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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계시록 설교 모음

요한계시록 17장 - 18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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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시대를 분별하여야 한다 /계17-18/ 유기성목사

2018-04-10 12:29:15

 

계 17-18장은 사탄의 왕국인 바벨론의 심판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는 계 16장에서 잠깐 언급하였는데, 계 17-18장에 걸쳐서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큰 바다 물 위에 앉은 한 창녀를 보여 주었는데,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 위에 앉아서 ‘세상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진 큰 도시’ 바벨론이었습니다.

 

이 바벨론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세상이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배후에 바벨론이라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분명한 실체이고 아주 강하게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 중에 그 눈이 뜨이기를 축복합니다.

 

바벨론은 영적 분별을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계 17:2-3을 보면 바벨론은 지금 세상 정권들의 보이지 않는 실세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권력과 황금만능주의, 음란과 사치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음행이라 하였는데, 지금 세상은 급격히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 등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론과 동성애 합법화 등 기독교 세계관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은 반드시 윤리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 탐욕과 음행을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란의 영이 온 세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음란물로 인하여 인간성이 파괴되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파괴되고 있음에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음란이 엄청나게 돈 버는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은근슬쩍 음란물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탄에게 힘을 더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바벨론의 특징은 교회와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6 그리고 나는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로 성도들을 죽었으면 그 피에 취하였겠습니까?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핍박받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바벨론이 성도들에게 행하는 무서운 악행을 보여주셨을 때, 요한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6 내가 그 여자를 보고 크게 놀라니,

요한이 너무 놀라니 천사가 “왜 놀라느냐?” 하면서 진정시켜야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것이지 영 안이 열리면 놀라고 두려워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매사에 “마귀, 마귀”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영적 실체가 있음을 알고 분별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바벨론은 마침내 멸망에 처해질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계 17:11 ...마침내 멸망하여 버릴 자다.

이 사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삶이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계 18장에서 드디어 바벨론의 멸망이 선언됩니다.

온 땅을 환하게 만드는 영광을 가진 한 천사가 힘차게 외칩니다.

계 18:2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천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이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계 18:8 ...그 도시에 재난 곧 죽음과 슬픔과 굶주림이 하루 사이에 닥칠 것이요, 그 도시는 불에 타 버릴 것이다. ... :10 ...화를 입었다. 화를 입었다. 큰 도시야! 이 강한 도시 바빌론아! 너에게 심판이 한 순간에 닥쳤구나 ...

 

여러분, 미국이나 중국이 무너졌다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실제로 거대한 제국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일이 역사상 여러 번 일어났었습니다. 로마가 그랬고 일본과 독일이 그랬고 소련이 그랬습니다. 이 모든 일은 바벨론이 무너질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바벨론이 하루 사이에 무너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두려운 것입니다. 위세가 하늘을 찌르도록 높아지던 순간에 갑자기 무너졌다는 것은 바벨론 세상 속에 살던 사람들은 ‘악’ 소리도 질러보지 못하고 함께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18:19부터 바벨론이 무너질 때, 놀라고 절망하고 슬피 탄식하는 이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인데, 권력자들과 부자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세상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엄청난 권력과 부를 얻고 사치하며 음란하게 살았습니다. 자신들이 사탄의 왕국에서 살고 있으며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종말을 맞이하니, 비명을 지르고 탄식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계 18:19 그리고 그들은 머리에 먼지를 뿌리고, 슬피 울면서, "화를 입었다. 화를 입었다. 큰 도시야! 바다에 배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 도시의 값진 상품으로 부자가 되었건만, 그것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구나!"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요한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시대를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에서 성도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계 18:4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이 경고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족을 끌어내려는 천사의 외침이 생각나게 합니다.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러나 롯의 아내와 사위는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소돔과 함께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소돔의 생활에 완전히 빠져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지금 우리와 우리 가족들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벨론 세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를 세상 임금이라 했습니다.

요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바벨론의 특징은 돈, 돈 하는 것입니다. 꼭 부자만 아니라 돈이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줄 아는 자는 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벌기 위해서 가정도 건강도 희생하고 신앙도 희생합니다. 안하던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불법을 저지르고, 바가지도 씌우고, 가짜 물건도 팔고, 부실 공사도 하고, 뇌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힘으로 남을 억압합니다.

 

금연 광고를 보았는데, 보기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담배는 독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라가 담배를 제조하여 팔고 있는 것입니까? 돈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끔찍한 총기 사고가 계속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그래도 총기 규제를 못합니다. 역시 총기협회의 이익 때문입니다.

 

인류는 아직 핵폐기물을 완벽하게 처리할 기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핵무기는 계속 만들고, 원자력발전도 건설합니다. 다 돈 때문입니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를 멸망시킬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바벨론에 의하여 지배받고 조종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벨론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산 속에 들어가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대도시화가 바벨론 세상의 특징이지만 산 속이나 광야가 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에 혼자 있어도 사탄이 시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직장도 다니고 사업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상과 성공주의와 물질주의, 음란과 탐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벨론이니 정신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 일기를 쓰면서 ‘유기성 목사가 지독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 17-18장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겪은 영적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바벨론의 실상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벨론의 실상을 다 보게 하셔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영적 실상이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자세는 비참할 정도로 나약하다는 것입니다.

 

강영안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더 무서운 적이다.” 바벨론 세상에서 이렇게 살면 큰일입니다.

 

세상이 바벨론이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나그네인 것입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큰일입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니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자는 것을 어찌 지독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눈이 뜨이기 전까지는 목사이면서도 제 삶의 목표는 공부 많이 하고 다른 목사보다 더 크게 교회를 성장시키고, 설교 잘한다는 말을 듣고, 가족 모두 건강하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에 대하여 설교만 하였지 실제는 이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뜨이고서 그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목사도 바벨론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바벨론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어떤 목사님은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배낭여행한다고 생각하고 매일 매일 예수님만 붙잡고 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이 시대의 영적 실상을 알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계 17:1 “이리로 오너라. 큰 바다 물 위에 앉은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중세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원을 떠나려는 친한 동료를 말리던 한 수련자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원장을 찾아가 항의했습니다. “왜 원장님은 수련자들이 떠나가는데 말리지 않으십니까?” 원장은 잠시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말했습니다.

 

“사냥꾼이 수많은 사냥개를 풀어 토끼를 잡으러 갔어요. 그 가운데서 맨 처음 토끼를 발견한 사냥개는 마구 짖어대며 그 토끼를 쫓아갑니다. 그러자 토끼를 보지 못한 다른 사냥개들도 짖어대며 그 사냥개를 따라갔어요. 그런데 따라가기만 했던 개들은 곧 힘이 들거나 장애물이 나타나면 포기하고 되돌아오게 되지요. 그러나 토끼를 직접 본 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표물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있어도 꿋꿋이 토끼만 보며 쫓아가 잡아오지요."

원장의 이야기를 들은 수련자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지금 전도 집회를 하는 심정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사람 모두 다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 앞에서 서게 될까요? 그것이 너무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요한계시록을 주셨을까요?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갈망하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 절벽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사람의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 안에 온갖 악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죄의 공격에 취약한 존재인지,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키려고 역사함을 생생히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붙잡게 됩니다.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저에게는 절박한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아직은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에게서 신학생들에게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세상을 살지만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며 영적으로 시대를 분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찬송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admin

 

댁쟾쇰줈

 

음녀 바벨론의 비밀 /계17:1-18

2018-10-24 05:28:05

 

세 번째 환상 꾸러미(17:1-20:8)의 내용은 언약 공동체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음녀 바벨론(17:1-19:10), 두 짐승(19:11-21), 용(20:1-10)의 멸망을 계시했지요. 17장 내용은 음녀 바벨론 환상과 그녀의 정체를 알려주는 천사의 해석입니다.

 

일곱 대접 맡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을 불러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입니다(1). 음녀는 결혼 언약을 배반한 여자를 뜻하는데, 구약에서부터 창기에 비유되었던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사 1:21). “음녀가 앉은”많은 물은 예루살렘 주변의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을 상징하지요(15; 렘 51:13).

 

원래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거룩한 처소였습니다(출 15:17). 그런데 거룩해야 할 신부는 음녀가 되었지요.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했습니다(2). 북이스라엘 왕들 모두가 금송아지를 숭배를 하게 했고, 남유다 왕들도 거의 혼합 종교에 빠지게 했습니다(렘 3:6; 겔 16:23-35; 호 5:3-4, 6:10).

 

엘리야 시대에는 칠천 명을 제외한 모든 백성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게 무릎 꿇게 했지요. 그 후에도 땅에 속한 왕과 백성 모두 혼합 종교를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요한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갔습니다(3a). 광야는 원래 언약 공동체를 상징했던 여인이 양육 받은 곳입니다(12:6). 그런데 이제 광야의 “여자”는 “붉은빛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 그 짐승은 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용이거나 사단의 권세를 대행했던 바다 짐승입니다(12:3, 13:1).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몸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했으니까요(3b). 여자의 외모는 “자주 빛과 붉은빛 옷”과 “금과 보석과 진주”로 황후처럼 화려한데, 내면은 “금잔”에 가득한 “가증한 것들”과 자기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합니다(4). 이마에 적힌 이름이 그녀의 정체를 알려줍니다.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5). 음녀는 큰 성 바벨론, 곧 만국의 성들과 구별되었던 예루살렘성을 뜻합니다(16:19).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행실을 낳은 큰 음녀는 언약 배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입니다.

 

요한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음녀를 보았습니다(6a).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전령을 돌로 치는 자라고 예수께서 의인화하셨던 예루살렘의 모습과 똑같지요(마 23:37). 요한이 여인의 변한 모습을 “크게 기이히”(6b) 여기자 천사가 반문합니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7a).

 

구약과 주님의 가르침을 상기하면 기이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신부가 음녀처럼 짐승과 야합하는 일은 성경에 공개된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속합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 된 성도를 음녀라 했는데, 구약 교회뿐 아니라 지금도 WCC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와 야합하는 일이 진행 중이지요(약 4:4).

 

7-15절은 천사가 “여자”와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직접 해석해준 내용입니다(7). 요한이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했습니다(8a). 예수님 오시기 전에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십자 때문에 치명상을 입고 무저갱에 결박당하고, 재림 직전에 잠깐 풀려나 활동한 후, 결국 멸망할 사단의 화신이 짐승입니다.

 

창세 때부터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이 짐승을 “기이히”여길 것입니다(8b). 짐승 머리 중 하나가 치명상을 입고도 회복하자 기이히 여겨 경배할 것이라는 내용과 병행하지요(13:3-4).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과 주님의 가르침에 무관심하므로 기적에 쉽게 속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기를 싫어하므로 계시록 스스로 해석해 둔 상징의 의미조차 모른 채 어이없이 미혹되고 맙니다.

 

짐승의 정체를 알고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 있는 뜻”이 필요합니다(9a).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탁월해도 인간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비밀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비밀을 하나씩 계시해 주셨지요. 그러니 자기 지혜를 다 내려놓고 천사의 해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천사의 해석에 따르면, “일곱 머리”상징은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자 “일곱 왕”을 뜻합니다(9b-10a).

 

13장에서 바다짐승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모방한 사단의 화신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출현한 짐승은 늘 지중해 주변에서 출현한 제국들을 상징했었지요. 그 제국 중에 일곱 산으로 표현될 수 있는 제국은 일곱 언덕 위에 세워진 로마 제국뿐입니다. 그러니 일곱 왕은 로마 제국의 일곱 황제를 뜻하겠지요.

 

계시록이 기록되던 무렵, 일곱 왕 중에 “다섯”이 망했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째 나타날 왕은 “잠간 동안”통치할 것입니다(10b).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면서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했지요(11a). 치명상을 입었다가 다시 살아난 머리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13:3).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한 만왕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를 모방했으나 본질상 “멸망”할 자이기도 합니다(11).

 

요한이 본 “열 뿔”은 머리로 상징된 로마 황제에게 속한 “열 왕”을 상징합니다. “아직 나라를 얻지”못한 속주의 총독들이지요. 그들은 짐승이 살아 있는 동안 왕권을 “일시 동안”만 누릴 것입니다(12). 그럴지라도 짐승이 주는 권력의 단맛에 푹 빠진 그들은 “한 뜻”으로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내놓을 것입니다(13).

 

로마 황제 제도는 율리우스 시저가 터전을 마련했는데, 첫 왕조는 옥타비아누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로 이어지다가 네로의 자살로 끝납니다(68년). 그래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장군들이 황제의 빈자리를 두고 싸웠는데, 세 명의 통치 기간을 다 합쳐도 겨우 1년 6개월입니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내란을 끝내고 두 번째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의 통치기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함락되었고(70년 4-8월), 최후 방어 진지였던 마사다 요새도 함락되었습니다(73년). 그의 첫째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장군이자 아버지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공한 황제입니다.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전통 신들을 되살리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황제입니다. 성도들을 콜로세움에 세워 맹수와 결투하게도 했지요. 베스파시아누스 왕조가 유대 민족에게는 사단의 화신 같았던 셈입니다.

 

천사의 해석을 로마 황제 연표와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요세푸스처럼 율리우스 시저를 초대 로마 황제로 간주하면, 다섯이 망한 뒤에 지금 있는 네로가 여섯 번째 황제에 해당합니다. 네 명의 장군이 황제 자리로 다투며 “잠간 동안”통치했던 시기를 일곱 번째 황제 통치기로 간주한다면,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그 일곱 중에 속한 자”인 동시에 “여덟째 왕”에 해당합니다(10-11).

 

평민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는 고위급 장군 자리까지 올랐으나 네로가 낭송하는 시를 듣다가 졸았다는 이유로 유배당했던 인물입니다. 한순간에 모든 권세를 잃었다가 유대 독립전쟁을 막을 적임자로 복귀했지요. 네로가 자살한 후에 발생한 장군들의 내란을 진압하고 황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기록하던 시점을 기준으로 삼으면,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짐승의 화신과 비슷합니다(11)

 

권력에 치명상을 입었다가 되살아나 경배받는 자리에 앉는 과정도 비슷하지요(13:3-4). 하지만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해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애굽,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헬라를 망한 다섯 머리로 해석해도 비슷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머리를 로마로, 장차 나올 머리를 재림 직전에 등장할 짐승 나라로 해석해도 비슷한 측면은 있습니다.

 

확실한 점은 머리로 상징된 황제들과 뿔로 상징된 속주의 총독들이 짐승과 일심동체가 되어 “어린 양”을 대적할 진영을 구성한다는 점입니다(14a).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호적 명령을 내려 잉태한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가게 했습니다(눅 2:1-5).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할 때,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눅 3:1).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내렸었지요(행 18:1-2).

 

클라우디우스의 양아들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이 로마시에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씌워 성도를 핍박했지요. 로마 황제들은 스스로 의식했든 아니든 언약 공동체의 대적자로서 사단의 화신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세속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세상의 권세나 사상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존재와 가르침을 대적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를 뺀 유토피아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통합하고 경배받을 최후의 적그리스도 역시 언약 공동체를 대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명심할 것은 “어린 양”이 승리자라는 점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아무리 강력하게 동맹을 맺어도 “만주의 주”“만왕의 왕”이신 어린 양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린 양의 승리는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도 공유합니다(14b). 언약에 신실한 이들이 고수한 복음은 모든 세속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교만함을 다 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고후 10:4-5).

 

언약을 배반한 음녀의 결말은 어떠할까요?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6). 이세벨 황후의 최후처럼 비참합니다(왕하 9:30-37). 짐승과 야합할 때는 핍박을 면하고 형통할 것 같았겠지요. 그러나 음녀는 철저히 이용만 당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이 음녀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자 마지막 심판의 표상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최종 성취하실 때까지, 열 뿔과 짐승에게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주십니다. “한 뜻”으로 뭉치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기꺼이 “짐승에게”주게 하십니다(17). 음녀도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으로 군림하게 하십니다(18). 주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활동할 멸망의 아들도 불법으로 형통할 것입니다(살후 2:3).

 

하지만 언약을 배반한 자와 언약 백성을 대적한 자들의 최후는 멸망입니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주변에 출현했던 모든 제국이 멸망했던 것처럼 그들은 절대로 최후 승자가 되지 못합니다. 음녀나 짐승 같은 자들이 시대마다 등장해서 교회를 없애려고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멸망한 것은 그들이었고 살아남은 것은 항상 교회였습니다. 재림 때도 멸망을 피하고 승리할 공동체는 언약에 신실한 교회입니다. 성도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공동체에 섞여 있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잠 24:1).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언약에 신실한 거룩한 신부로 살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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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계17:1-18:24/ 곽창대 목사

2020-05-27 04:27:01

 

오늘 우리가 살펴볼 17-18장의 요절은 18:4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여러분은 주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지금도 동일한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거기’는 바벨론입니다. “내 백성아. 베벨론에서 나오라!” 이 주님의 음성은 부드러운 음성이기보다는 절박한 외침입니다. 이유는 곧 바벨론이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8:2,무너졌도다x2. 강조. 예언적 과거).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도시 사람들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도시들을 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의 가족들을 구출하시교자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롯에게 보냈습니다. 천사들이 롯의 가족들에게 내일 아침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이 도시에 내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동이 텄는데도 롯은 자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롯을 깨우며 외쳤습니다. “일어나라!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럼에도 롯은 꾸물거렸습니다. 할 수 없이 천사들이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끌고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롯의 사위들은 천사들의 절박한 외침을 농담으로 여겨 소돔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더러운 곳에 앉아서 땅에 버려진 과자를 주워먹고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청소년들이 인터넷 방에 앉아 게임이나 도박에 빠져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청년들이 술집에 앉아서 불량배들과 노닐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장이 타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곧 멸망할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절박하게 외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의 절박한 외침을 우리가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긴다면 어쩌면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바벨론에서 나와야 하나요?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바벨론이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벨론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망할 수밖에 없는 바벨론의 정체를 밝혀줍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참혹한 멸망까지 제법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바벨론의 정체(실상)

 

17:1에 큰 음녀가 등장합니다. 큰 음녀란 음녀 중의 음녀라는 뜻입니다. 이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있다고 했는데 많은 물은 17:15에서 해석하는 대로 세계의 백성들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입니다. 음녀가 불신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이 음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17:4을 보세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온갖 좋은 것으로 치장했습니다. 손에는 금잔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을 보면 한 눈에 반할 정도로 매혹적입니다. 그래서 같이 지내고 싶어집니다. 그 품에 기대어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금잔 안에는 가증하고 더러운 것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7:5에서음녀의실상이폭로됩니다. 음녀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음녀의 실체입니다. 그 이름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l 비밀: 음녀는 마치 양파처럼 그 안에 악독과 거짓과 부패가 겹겹이 쌓여있다는 뜻입니다.

l 큰 바벨론: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는 뜻입니다(17:18).

l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모든 음란과 우상숭배와 사치와 거짓과 악을 생산하고 있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 음녀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17:2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왕들과 사람들이 음녀가 주는 포도주(술)에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 음녀가 세상을 주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8장에 보면 이 음녀의 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부류들을 열거합니다.

l 3절: 땅의 왕들(정치가들)과 땅의 상인들(경제인들)

 

l 17절: 모든 선장과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게 일하는 자들(무역업자들).

이들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자기의 배를 채우고 즐기고 사치스럽게 삽니다. 대신에 백성들을 부려먹고 온갖 죄악들을 자행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그렇게 하도록 유혹하고 부추기는 자가 바로 음녀 바벨론입니다.

 

그러므로 이 음녀 바벨론은 세상 나라들과 백성들을 부와 쾌락과 미신으로 미혹하여 죄의 늪에 깊이 빠지게 하는 세상의 지배 문화와 정신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 경제 예술 학문 등 사람이 생산하는 모든 일에 이 더러운 음녀가 깊숙이 개입하여 사람들의 타락을 부추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화려한데 실상은 더럽고 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실상을 모르고 음녀의 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7:3을 보면 이 음녀 바벨론을 강력하게 지원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붉은 빛 짐승’인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으로서 사탄의 직계 하수인인 적그리스도입니다(13:1-10).

 

적그리스도는 사탄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세상 나라를 지배하는 사악한 정치 지도자나 정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음녀 바벨론이 이 짐승을 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음녀가 짐승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음녀 바벨론이 광야에 있었다고 하는데 광야에서 하나님께 양육 받고 있는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서입니다(12:6참고). 17:6에서는 이 음녀 바벨론이 성도들과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고 합니다.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고 죽였다고 뜻입니다.

 

17:7에서 음녀 바벨론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란 사도 요한에게 천사가 그 음녀와 음녀가 탄 짐승의 비밀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면서 이하의 구절들에서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에 관해 말씀합니다.

 

17:8에서는 짐승(적그리스도)에 관해 말씀하는데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모방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입니다(1:4,8,4:8).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고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 짐승(적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결정타를 맞고 패했지만 종말의 마지막에 다시금 등장하여 잠깐 동안 이 세상을 유혹하고 압제할 것인데 불신자들이 다시 재기한 그 짐승을 보고 놀라며 따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짐승(적그리스도)은 결국 사탄과 함께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어서 천사가 일곱 머리와 열 뿔에 관해 설명합니다(17:9-13).일곱 머리는 음녀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일곱 산과 일곱 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우선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 시가 일곱 언덕 위에 건설된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왕은 역사에 이미 나타났거나 나타날 일곱 제국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17:10에서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으나 이르게 되면 잠시 동안 머물 것이라고 했는데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l 이미 망한 다섯 제국: 고대 바벨론. 앗수르. 신 바벨론. 메데-바사. 헬라-마게도냐 제국

l 사도 요한 당시의 제국: 로마 제국

l 앞으로 나타날 제국: 적그리스도의 나라

 

그러나 이상과 같이 구체적인 제국으로 해석하기 보기보다는 모두 상징적인 의미로 보자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일곱 왕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적인 황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l ‘다섯’: 적그리스도적인 황제들 가운데 대부분이 망했음을 뜻한다.

l 지금 있는 하나: 한 황제가 지금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l 마지막 일곱째 왕: 곧 지상에 등장하게 될 적그리스도적인 왕을 뜻한다.

 

어쨌든 현재 사도 요한의 시대에 열국을 다스리고 있는 적그리스도적인 왕은 로마 제국이나 로마 제국의 어느 한 왕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17:11에서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8절. 적그리스도)은 여덟째 왕인데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마지막에 적그리스도의 실체가 출현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적그리스도의 실체도 결국 멸망할 것입니다.

 

17:12-14에는 열 뿔에 대해 설명합니다. 열 뿔은 열 왕들입니다. 즉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하수인들로서 세상의 여러 나라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짐승(적그리스도)을 섬기는 대신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적그리스도에게 복속된 세계의 패권국가들과 황제들이 세계를 통치하기 위해 내세운 두 가지 정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 백성들의 타락을 부추기는 음녀 정책이며 다른 하나는 성도와 교회를 위협하는 정책입니다. 한 손에는 유혹의 포도주를 들고 다른 손에는 박해의 칼을 들고 사람들을 적그리스도와 사탄에게 굴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음녀 정책을 한 마디로 말하면 즐기자는 것입니다. ‘좀더 눈을 즐겁게 하자. 배 부르게 먹자. 육체의 쾌락에 빠지자. 그래야 재미있고 행복한 인생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저기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과 교회를 보라! 얼마나 약하고 어리석지 않은가? 너희들이 저들을 따르면 갖가지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힘들고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선택하라! 우리를 따르겠는가?

 

어린양 예수를 따르겠는가? 우리를 따르면 즐겁게 살 것이고 어린양 예수를 따르면 고난과 죽음뿐이다!” 이 같은 유혹과 위협 앞에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적그리스도와 음녀 바벨론을 따를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하지만 성도와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선 성경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 약속은 어린양 예수님을 따를 때 결국 승리한다는 약속입니다.

 

(계 17:14)『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그리고 종말의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 나라들이 음녀 바벨론에 항거할 때가 온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17:16입니다. 바벨론과 세상 열국과 적그리스도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17절에서는 자중지란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란 하나님께서 음녀 바벨론과 적그리스도가 파멸하실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승리의 약속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2. 바벨론 파멸의 이유와 모습

 

18장에서는 세상을 농락했던 음녀 바벨론이 왜 멸망하는지 그리고 그 멸망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묘사합니다. 먼저 바벨론이 멸망하는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l 종교적인 부패(2절): 귀신과 우상을 열렬히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했다.

 

l 정치적인 부패(3. 9-10절): 음녀 바벨론이 만국의 왕들을 농락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들을 하나님과 백성들을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고 부려 먹는데 사용했다.

l 경제적인 부패(3. 11-15. 17-19절): 땅의 상인들(경제인들)과 무역업자들이 치부했다. 부를 나누지 않았다.

 

l 음녀 바벨론의 교만(7절): 이 총체적인 부패 이면에 음녀 바벨론은 교만할 대로 교만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6:18,약 3:6,벧전 5:5).

 

그래서 하루 동안에 음녀 바벨론이 파멸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셨습니다(18:8).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으로 졸지에 파멸하는 바벨론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애곡합니다.

 

l 왕들(정치가들)의 애곡(9-10절)

l 상인들(경제인들)의 애곡(15-16절)

l 선장과 선원들과 선객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무역업자들)의 애곡(17-19절)

 

8:21에서는 큰 맷돌 같은 돌이 바다에 빠져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이 사치와 음란의 큰 성 바벨론도 완전히 파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반복합니다(21-23절).

 

l 바벨론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l 더 이상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l 더 이상 좋은 기술이나 공산품도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l 더 이상 음식을 만들거나 그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사라질 것입니다.

l 등불 빛도 사라질 것입니다.

l 결혼의 즐거움도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오직 두려움으로 가슴을 치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만 있을 것입니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18:10,16,19)”

 

음녀 바벨론이 이렇게 졸지에 망하는 근본 이유를 23-24절에서 다시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l 복술로 만국을 미혹했기 때문

l 성도와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3. 바벨론의 파멸에 대한 성도의 대응

 

음녀 바벨론이 파멸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성도와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두 가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첫째는 천사가 성도들에게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계 18:20)『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둘째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속히 나오라고 외치십니다.

(계 18:4,개정)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유는 바벨론이 곧 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그곳에서 지금 빨리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장소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이 세상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오라는 것은 영적인 탈출을 뜻합니다.

 

영적 탈출이란 큰 음녀 바벨론이 제공하는 술을 받아 마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음란과 탐욕과 우상숭배와 부정과 사치의 술을 마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18:4에서는 그 음녀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벧전 4:3,7)『[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요일 2:15-17)『[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눅 17:26-32)『[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멸망 당한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이 같은 생활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참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행복은 이기적인 행복입니다.

 

내가 배 부르고 내 가정이 행복하고 내 미래가 보장되어 있으면 다 된 것 아니냐는 이기적인 행복이 바로 가장 큰 죄악입니다. 최선을 대해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 목표가 오직 자기의 행복이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곧 사라질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참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며 살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것에 미련이 남아서 뒤를 돌아봄으로써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최고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추구하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이기적인 행복에만 매여 있습니까?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 소개된 예화입니다.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 황제 하나가 자기 제국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불어나니까 아주 화가 나서 지혜로운 신하 하나를 불러 명령했습니다. “여보게. 저렇게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로마의 법이 너무 허술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법을 고쳐서 예수 믿는 자들을 무조건 죽이도록 하라!”

 

그러자 신하는 대답합니다. “폐하. 그래서는 안됩니다. 저 크리스천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승 예수처럼 순교하기를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죽이면 기독교가 더욱 번창할 것입니다.”

 

왕이 다시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저들을 잔인하게 고문만 한다면 기독교의 세력이 위축되지 않겠나?” 신하가 답합니다. “폐하. 그것도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은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늘의 더 큰 상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예수의 흔적이라고 자랑합니다.”

 

왕이 신하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신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왕이시여. 한 가지 묘책이 있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쾌락과 사치에 물들면 서서히 무너질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와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과 미혹하는 세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적은 두 가지 세력 중에 후자 쪽이 우세합니다. 교회가 음녀 바벨론의 미혹에 타협하고 동화될 때 교회는 점점 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종말을 사는 성도와 교회를 향해 바벨론의 음녀 정책을 잘 분별하고 거기서 나오라고 주님께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어린양 예수님의 신부입니까? 성령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까? 그렇다면 그 신분에 걸맞게 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롬 12: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종말의 때에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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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요한계시록 강해-24/ 유혹과 그 결과에 대하여 /계17:1-18

2020-01-21 07:25:18

 

1. 인생 최고의 유혹은?

 

여러분의 삶에서 최고의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저의 인생 최고의 유혹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대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요. 저의 군 시절은 화려했습니다.

 

3년 중 두 번의 여름을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 밑 해안초소에 딸린 관측소에서 보냈는데요. 그곳은 제게 ‘여름별장’과 같았습니다. 군 헬기를 타고 동해안을 관측했고, 육해공 합동작전 실무자 교육 때문에 진해 교육사령부로 와서 교육도 받았습니다.

 

부대에 있을 때에는, 병과(兵科)가 정훈(政訓)이 아닌 포병(砲兵)인데도 정훈장교로 있으면서 부대 교회 주일 설교를 했고, 연대나 사단이나 군단 교회 군목이 자리를 비울 때면 거기로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또 군단 內 정훈장교들의 논문 경시 대회에 논문을 제출해서 군단장상을 받았고, 당시 서울 상암동에 있던 국군정신전력학교에 가서 전 군에서 차출된 장교들과 교육을 받았고, 무엇보다 한미연합훈련인 에 통역장교로 참가했습니다.

 

그러던 중 전역을 앞두고 있을 때, 저의 동서가 ‘전역하거든 목회하지 말고 내 사업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기업 간부 수준의 대우와 더불어 집과 차까지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3,4개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 그런 분과 함께 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군에서 어느 정도 제 능력을 檢證 받았기 때문에 자신감도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고민을 했습니다. 신학교를 마치고 군에 갔으니 목회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런 고민을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대를 동기들보다 3년 늦게 갔습니다. 신학대학원 3년을 마치고, 결혼까지 하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군에서 남들보다 늦게 출발한 것의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제가 소위 때 대위인 포대장(중대장)이 저보다 한 살이나 어렸습니다.

 

그렇다 보니 초급 장교들 사이에서 저는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전역하여 목회일선에 복귀하면 신학교 동기들은 이미 목사 안수를 받았고, 유학을 간 동기들은 학위를 받았는데, 저는 전역 후 3년의 강도사 기간을 또 보내어야 하기 때문에, 동기들에 비해서 5년에서 6년이 늦을 것입니다. 그러면 군에서 남들보다 늦어서 경험한 것들을 목회현장에서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동서의 부탁을 듣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전역하기 전 부대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개인 시간을 갖는데요. 1992년 12월 말일부로 전역하는데, 12월 첫주부터 사역을 하라고, 그것도 당시 신분으로서는 ‘전도사’에 불과한데, 수석부교역자로 와서 사역하라는 부산 북교회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고민을 아시고 전역도 하기 전에 사역의 현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고민이나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유혹은 제게 정말 강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도 나름의 유혹이 있었을 것이고, 또 현재 유혹을 당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유혹들은 어떤 것입니까? 한 신실한 성도가 자신이 포르노를 보는 것 때문에 너무너무 고민이 된다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유혹이라고 하는 것도 들었고, 어느 분은 한 가지 일을 오래 못하는데 심지어 사역도 2년을 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유혹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설교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이 유혹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유혹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유혹의 결과는 어떠할까요?

 

 

2. 유혹하는 자와 그 최후

 

1) 큰 음녀(1~6)

 

1절에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일곱 대접을 쏟아 심판을 경고한 일곱 천사 중 한 천사가 다시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음녀는 5절과 18절에 따르면 ‘바벨론’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음녀 바벨론은 누구, 혹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 음녀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

 

첫째로 음녀, 즉 바벨론은 武力으로 교회를 위협하고 박해하던 당시의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9,10)”고 합니다. 로마는 일곱 언덕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로마의 특징을 일곱 언덕과 일곱 고개로 설명하면 그 이상 잘 된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즉 일곱 산과 일곱 왕은 사탄의 하수인이 된 세상 권력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권력과 무력과 경제력 등으로 세상을 장악하고 그것으로 교회를 위협하던 로마 제국을 비롯한 세상의 권력이 유혹자인 음녀라는 것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강한 것들과 높은 것들, 그리고 가진 것들은 늘 유혹의 대상이 됩니다. 인류 역사는 한결같이 막강한 제국의 힘과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경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음녀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세상 권력 뒤에 숨은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3절에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다는 표현이나,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 적혀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3절에 나오는 붉은 빛 짐승은 13장에서 본 대로 바다에서 나온 짐승입니다(13:1). 이 짐승이 사단인 용과 같은 붉은 색깔을 하고 있다는 것은(12:3) 짐승이 사단의 권세를 위임받은 존재임을 뜻합니다.

 

또한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다는 사실도 음녀와 짐승 그리고 사단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로마 황제들이 자신들을 신격화 하여 사용한 칭호들과 관련된 표현이고, 全 時代에 걸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훼방하며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결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2)”고 합니다.

 

“땅의 임금들”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정치 논리, 견제와 균형의 논리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무너뜨리고, ‘다른 신 다른 종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느니, ‘인권’ 어쩌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결국 우상과 죄악을 방조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이 음녀와 야합하여 음행하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음녀에게 복종한 자들은 “땅에 사는 자들”로서 그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며, 음녀의 가르침에 속아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8).

 

 

둘째로 큰 음녀는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그 이유는 ‘음녀’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과 짝하여 사는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행위는 ‘음행’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사1:21,렘13:27,호2:5,3:16,17).

 

특히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을 음녀라고 부른 이유는 당시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성경과 특히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음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음녀’는 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자’와 상대되는 상징적인 용어로서, 12장의 ‘여자’가 ‘참 교회’를 상징한다면, 17장의 ‘음녀’는 ‘거짓 교회’를 상징한다는 주장입니다. 주님의 신부인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 됩니다.

 

그래서 ‘음녀’가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음녀’는 배교하고 타락한 교회를 상징한다는 말입니다. 즉 이단이나 사이비 사설에 사로잡혀 주님의 교회를 떠난 자들이 음행을 한 자들이요 음녀와 같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라는 표현은 음녀가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서 세상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거나 혹은 거대하고 치밀한 유혹을 세상 사람들에게 행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견해는 모두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상황이 벌어집니까?

2절,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음녀, 즉 바벨론이 지도자들과 권력과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이용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는 꾸며진 것이다’, ‘십자가 복음은 거짓말이다’라고 믿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음녀가 유혹하는 모습은 정말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ㅓ한 음녀의 모습과 유혹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2) 음녀가 유혹하는 모습

 

음녀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빛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3).

 

여인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가장 강력하고 신비하기까지 한 권세와 능력을 올라타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주 빛과 붉은 빛의 옷을 입었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고 하는데요. 그가 입은 자주 빛과 붉은 빛의 옷은 세상에서 가장 휘황찬란하고 영광스럽다는 뜻입니다. 즉 사치와 허영과 교만과 유혹의 극치라는 것이죠. 그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꽃보다 아름답고 별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비춰져 온 세상이 그에게 유혹을 당한 것입니다.

 

또 그 손에 금잔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볼 때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에는 부도덕하고 더러운 죄악으로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유혹을 당한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지요.

 

또 이 음녀의 이마에는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당시 로마의 창녀들이 자신들의 이름이 기록된 띠를 이마에 두른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자인 음녀 역시 이마에 자기 이름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거기다가 6절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피에 굶주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사34:5). 이것은 짐승을 숭배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극심한 박해를 뜻하는 것으로 음녀가 자신에게 유혹당하지 않는 자들을 죽이고 그 피에 취해서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피에 취한 음녀는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의 가장 큰 적이며,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러한 음녀는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사도 요한은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6)” 여겼습니다. 천사가 1절에서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리라고 한 것과는 달리 음녀가 화려하게 치장하고서,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고, 그 피에 취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음녀의 멸망을 기대했던 요한이 도리어 그 반대의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당황해 하고 놀라워하는 것이죠.

 

 

3) 음녀의 멸망

 

그때 천사가 요한에게 말합니다.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7).” 천사는 또 계속해서 말합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짐승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만, 다시 “무저갱” 곧 악이 가득 찬 곳에서 나와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즉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충성을 다하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과는 달리 짐승을 좇아 우상 숭배를 일삼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짐승에게 미혹되어서 짐승에게 충성을 다 한다는 말입니다.

 

또 10절의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는 말은 오고 오는 이 세상이 ‘반 하나님’, ‘적 그리스도’, ‘반 교회적인’ 세력으로서 세상을 미혹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바치며, 한마음으로 충성을 맹세하여 짐승과 더불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합니다. 이러한 유혹은 과거에도 있었고, 또 지금 있으며, 장차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간 덤비다 곧 멸망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를 반대하면서 유혹을 일삼는 자들은 모두 얼마 가지 못해서 무저갱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재미있는 결론이 하나 더 있습니다.

 

16절,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음녀가 자신이 타고 있던 붉은 짐승에게 벌거벗겨지고, 먹힘을 당하고, 불로 살라진다는 것입니다. ‘벌거벗게 하고’는 高價의 자주 색 붉은 빛의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한 음녀의 모습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4). 또한 ‘살을 먹고’는 맹수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무슨 말인가 하면, 세상과 교회의 유혹자인 음녀가 나중에 누구에게 망하고 파괴되는가 하면, 자기편인 짐승과 그 하수인들에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3. 성도를 유혹한 자는 반드시 …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과 교회를 유혹하는 음녀에 관한 것입니다. 음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유혹할 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음녀를 바벨론이라고 한 것은 세상을 유혹하고 성도들을 타락하게 하는 권능과 유혹의 힘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즐기는 것은 ‘괜찮다’고, ‘한번일 뿐’이라고 속삭이며, ‘다들 그렇게 한다’고 부추기는 세력들이 바로 음녀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과 돈과 수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음녀는 악을 생산하는 악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거짓되고 타락한 문화를 생산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미혹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음녀에게 충성하던 세상의 권세와 조직이 음녀를 버린 후 비참하게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 역시 장차 완전히 멸망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결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탄은 이 세상과 인간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세상 사람을 유혹하고, 성도들을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행자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영국의 한 해변을 찾았습니다. 그는 휴가철이 지난 후라 한적하고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 위에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여행자는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사람에게 그 원인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갈매기를 치우던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관광객들이 던져준 과자와 사탕들 때문이지요. 갈매기들은 그 달콤한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그만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잃어버렸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긴 후에도 그들이 주던 달콤한 먹이만 기다리다가 굶어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유혹은 우리의 영혼과 삶을 망가지게 만들 뿐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유혹은 항상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고, 예수님에게도 있었던 유혹이 여러분에게 없겠습니까? 요셉의 최고의 유혹은 ‘미시즈 보디발’이었을까요? 총리인 자기 앞에 무릎 꿇은 형들에게 ‘복수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이었을까요?

 

신약 요셉의 최고의 유혹은 마리아와의 파혼이었을까요? 자기 곁에 잠든 마리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을까요? 마가의 유혹은 바울을 떠나는 것이었을까요? 다시 돌이킬 때 바울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었을까요? 기억하십시오.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패배와 상실과 죽음의 길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성도를 유혹하는 유혹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지는 자만이 아니라 유혹하는 자 역시 망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유혹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그 유혹을 이겨내는 성도가 되십시오. 개인적인 유혹이든, 조직이나 이 사회가 주는 유혹이든, 삶의 유혹이든 영적인 유혹이든, 그 모든 유혹을 잘 이겨 날마다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혹에 넘어지면 모두가 망합니다. 그러나 유혹을 이기면 모두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이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복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admin

 

댁쟾쇰줈

 

 

 

70강 /다섯은 망하고 하나는 있고 /계17:6-13/ 김성수목사

2015-07-20 21:25:52

 

▶우리는 지금 음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의 화려한 옷을 입고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세상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게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 음녀가 들고 있는 금 잔 속에는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

즉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독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우리가 확인했지요.

 

하나님께서 17장과 18장에서 요한에게 바로 그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분명 그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내가 너에게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이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그 음녀가 심판을 받기는커녕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는 모습,

오히려 승리자의 모습으로 요한에게 보여 집니다.

 

▶(계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이렇게 요한에게 보여 진 음녀는, 마치 승리 주를 마시고 있는 성공적인 모습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모습을 크게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게 정말 음녀의 심판이 맞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고 있는 것 같고

세상 세력이 오히려 승리의 축배를 들며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음녀의 심판의 모습인가?’

 

요한은 ‘따우마 메가’ 크게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6절만 보더라도, 후천년설의 주장은 얼토당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은 점점 정화될 것이고, 나아질 것이고, 결국에는 지상 낙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곧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올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의 바람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이 땅은 오히려 점점 악인들이 크게 승리하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맞서게 되면 겉으로는 손해보고, 피 흘리고, 지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됩니다.

바로 그 것이 이 땅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그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에 성도들을 ‘예수의 증인’ 헬라어로 하면 ‘말튀론 예수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임을 당한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가 지난주에 확인한 것처럼

음녀와 그의 세력들이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서 거만하게 들고 있는 승리의 축배는

그 자체가 ‘가증하고 더러운 독이 들어있는 독배’이며

결국 그들은 그 금잔에 들어있는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에 취해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지 못했던 사도 요한은

‘따우마 메가’ 크게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 저들이 저렇게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그러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복 받은 분들이에요.

사도 요한도 몰랐던 그 성도의 신앙생활의 비밀을 이렇게 명확하게 보고 계시니

사도 요한이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천사가 음녀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있는 요한에게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그 비밀을 알려 주마’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계17: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그런데 그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의 묘사를 보면,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전에 한 번 다뤘었지요?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공부할 때

일곱 머리는 무엇이며, 열 뿔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었었습니다.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9절에 보시면, 그 일곱 머리가 일곱 산이라고 하고, 그 일곱 산은 일곱 왕이라고 합니다.

 

▶(계17:9-10)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길 혹자들이 이 ‘일곱 산’이라는 구절 때문에

일곱 머리를 로마라고 주장한다고 했지요?

로마가 원래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로마는 ‘칠산절’이라는 명절을 절기로 지키기도 했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 해석은 너무 협의 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그 일곱 머리를 로마로 해석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가시적으로 구체화된 사단의 대리자들은 역사를 통해 늘 있어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로마’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과거주의 해석자들의 주장처럼, 그 일곱 머리는 ‘역사적 로마’만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은

조금 가난한 해석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산’이라는 것은 항상 ‘세력, 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41:14-15)

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 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15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렘51: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슥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어 버리실 악의 세력을 가리켜 ‘산’이라고 부르시지요?

그래서 바벨론도 큰 산 바벨론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산이 일곱이라는 말입니다. 그 ‘산’이 일곱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7’은 완전수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일곱 산’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구체화되어 등장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시면 그 '일곱 산은 일곱 왕'이라고 합니다.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기를 ‘왕’은 ‘왕국’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 일곱 머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구체화되어 등장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정치적인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것’이 맞는 해석인 것입니다.

 

'열 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의 꿈속에 나타난 짐승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그 열 뿔이 무엇인지 공부했지요?

 

(단7:3,20,24)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20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라

 

24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열 뿔도 역시 열 왕, 왕국, 세력,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그게 10개라는 것은 엄청난 힘, 엄청난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단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받은 짐승의 세력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엄청난 세력으로 등장해서, 우리 성도들을 핍박하고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이라는 단어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시면 그 일곱 왕 중에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때문에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분들이 한 때 힘을 받았었지요.

그 분들이 주장하기를, 이 일곱 왕은 로마 황제 일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큘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까지가 다섯이고

여섯째가 베스파시안이고 일곱째가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킨 타이터스라고 해석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니다, 베스 파시안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적이 없으니까 빼야 한다.

대신에 네로의 환생이라 불릴만큼 지독하게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도미티안을 넣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주의 적 해석은 이렇게 일관성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역사가들이 공식 적인 로마의 첫 번째 황제로 인정하는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바로 전에

로마를 통일했던 줄리어스 시이저가 비록 BC44년에 부르터스에 의해 암살되기는 했지만

이미 황제의 칭호인 imperator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공식적인 황제는 줄리어스 시이저부터 계수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각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로가 죽은 후에 비록 잠깐이지만 ‘갈바, 오토, 피텔리우스’같은 사람들이

공식 적인 로마의 황제로 몇 개월씩을 다스렸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왜 빼나?’라고 했을 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은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들을 대입해서 풀게 되면

나중에는 억지와 추측과 짐작을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다섯은 망하였고'에서 다섯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다섯 왕국 애굽,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헬라를 지칭하는 것이고

'하나는 있고'의 하나는 로마이며(요한 계시록이 기록된 때가 로마시대이므로)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의 하나는, 로마 뒤에 올 성도들을 핍박하며 미혹할 또 다른 정치세력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강성해 보이지만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make sense 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로마도 없고, 이 요한 계시록이 기록 된지도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요?

 

거기에 대한 바른 답을 얻기 위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천사로부터 ‘요한이 기이히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무엇을 크게 기이히 여겼지요?

'왜 음녀가 오히려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에 대한 기이함이었습니다.

천사는 지금 거기에 대해 요한에게,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음녀는 무서운 짐승을 타고 그 짐승을 조종하고 있는데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는 사단의 대리자로,

사단으로부터 엄청난 힘을 받아 이 땅을 핍박하고 미혹하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 세력의 일곱 중에 다섯은 망했고, 하나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이고,

마지막에 최후의 발악을 하다가 결국에는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구절의 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세력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는 사자처럼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여기서 ‘마귀를 없이 하셨다’ ‘카탈게오’는 ‘완전히 쓸모없게 하다, 무장 해제 시키다’라는 뜻입니다.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마귀의 허리를 꺾어 버리신 것입니다.

 

마귀가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가 뭐지요? ‘사망’입니다.

죄인들을 사망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마귀의 가장 궁극적이며 커다란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은 ‘죄’아래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사망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혼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신 그 분이 그 품안에 동생들을 줄줄이 품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생들은 전부 사망을 이긴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망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들을 어쩌지 못 합니다.

 

(고전15:54-57)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렇게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이제 그 허리가 꺾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은 망하였고’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짓지 않나요?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그 악한 습관과 성품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단의 미혹에 빠져 허우적대고

심지어 구원의 확신까지도 흔들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는 있고’입니다.

 

왜 하나님은 여전히 그 사단의 세력에게 우리를 미혹하도록 놔두고 계실까요?

왜 하나를 남겨 두셨을까요?

 

▶(계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그 짐승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 권세는 누가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계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쉬운 성경)

하나님께서는 열 왕들이 짐승에게 권력을 넘겨주는데, 한마음이 되게 하여 그 분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이 통치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미 허리가 꺾인 마귀의 세력에게 잠시 동안 힘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뭐였지요?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은 성도들의 거룩을 위해, 성도들의 양육을 위해 사단의 세력이 성도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혹은 절대 ‘사망으로 우리를 끌고 갈 수 없는’ 미혹입니다.

 

그것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마귀의 세력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그들의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들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그 공격과 미혹은 우리의 양육에 필요한 미혹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혹은 우리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 미혹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인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짐승이 전에는 있었다가 이제는 없고,

다시 무저갱에서 올라 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보세요. 10절에서는 ‘하나는 있고’라고 하면서 8절에는 ‘시방 없으나’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고요.

어찌 보면 모순처럼 보이지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그 내용만 잘 숙지하고 계신다면, 그 해석에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신분과 운명을 뒤 집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는 시방 없는 것이고,

우리의 영적 성숙과 거룩으로의 경주를 위해, 우리를 미혹하고 핍박하는 것이 사단에게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는 있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혹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 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세력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과학, 문명, 사상, 철학, 자고 일어나면 변하지요? 놀랍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놀랍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의지하거나 소망을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과학과 문명과 철학과 사상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도 가지지요.

 

▶조금 더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7장에 가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 ‘하나’를 남겨 놓으셨는지

그 이유가 정확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롬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지금 사도 바울은 그 ‘죄’라는 것이 자기 안에 내장처럼 붙어 있는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에서 해결을 받습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데 이렇게 해결을 받고도 그의 삶이 변한 게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고 절망한 그 때와

‘그래서 거기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감사의 고백을 한 후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 다음을 보세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어떠세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요? ‘거기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래놓고

또 ‘여전히 나는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그 죄의 세력 앞에 노출이 됩니다.

노출이 될 뿐 아니라, 자칫 절망까지 느낄 정도로 그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며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신에 대해 절망하면서 어떤 결론으로 끌고 가는지 보세요.

 

(롬8:1-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죄를 떨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야 했구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죄 조차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을 비롯한 여러 분의 초대 교부들이 ‘오 거룩한 죄여’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이 정도는 소화하실 수 있는 실력이 되신다고 믿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된다.’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그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지고 양육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겠지요.

 

(롬6:1-2)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러한 고백과 함께 그 엄청난 선물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쳐가며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향해 정진하는 삶을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세력은 참 불쌍합니다. 지금 우리 때문에 하나님한테 열심히 사용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우주가 우리 성도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듯이, 마귀들도 성도들을 위해 잠시 권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면 좀 더 확실해 지실 거예요.

(계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이미 마귀는 십자가에서 disarmed되었는데, 하나님은 마귀가 교회를 시험하게 놔 두세요.

무엇 때문이라고요? 우리를 거룩한 자로 양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바로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마귀의 세력을 다섯은 망하게 하셨지만 ‘하나는 있게’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귀가 주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영생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평안 속에 거할 수 있는

용사들로 만드시기 위해 '마귀'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환난과 평안을 동시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중략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마귀의 핍박과 공격은 어떤 식으로든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 여사에 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여사의 다른 책에 보면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그 분은 폐결핵, 직장암, 관절염 등으로 평생을 누워 지내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병들지 않고 어찌 기도할 수 있으며 병들지 않고 어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병들지 않고 어찌 다른 이의 아픔을 알며 병들지 않고 어찌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오! 나는 병들지 않고는 인간일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 분은 자기에게 병이 없었다면

자기는 애시 당초 인간이 되기엔 틀린 그런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지긋 지긋한 병들을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이 많이 힘들어집니다. 사단이 미혹하지요, 하나님이 징계하시지요, 양수 겹장입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왜 그렇게 놔두신다고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만사형통과 일사천리, 소원성취만으로 우리의 거룩이 영글어 가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손이 마이더스의 손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뭐든지 만지면 금으로 변하는 마이더스의 손,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손을 마이너스의 손으로 만드실 때가 더 많습니다.

만지면 줄어들고 실패하는 그런 삶이 오히려 허락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망하고 실패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천국의 소망을 확고하게 새길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가로막고 있는 대적들이 너무 커 보여서 혹시 낙심하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육을 위해 남겨 놓으신

'겨우 하나 남은' 힘을 가지고 우리의 훈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고, 영원한 승리의 면류관은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놓지 마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

 

 

admin

 

댁쟾쇰줈

 

 

여자(바벨론)와 짐승의 비밀/계17:1-14

2004-02-20 12:17:28

 

 

확실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최후 승리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심판의 과정에는 일곱 인재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1환난이라 부릅니다(계6:). 또 일곱 나팔재앙이 있

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2환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재앙이 있습

니다. 곧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3환난이라 부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바벨론의 최후 심판을 봅니다. 17장

은 바벨론 최후의 내적인 면을 가리키고, 18장은 바벨론 최후의 외적인 면을 보

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바벨론은 세상의 악에 대한 총칭입니다.

 

Ⅰ. 요한에게 보여 준 여자(큰 음녀)를 봅니다(계 17:1-6).

 

1. 그 이름은 무엇인가?

큰 음녀라고 하였습니다(계 17:1, 17:15-16). 또한 여자라고도 하였습니다(계

17:3, 7, 9, 18). 혹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하였습니다(계

17:5).

 

2. 무엇을 의미함인가?

이것은 바벨론의 다른 이름입니다. 본문 17장 5절에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

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비밀'이란 불법의 비밀(살후 2:7)로 숨은 힘, 숨은 원리, 숨

은 뜻을 말합니다.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함으로써 그의 무신성, 반신성,

살신성, 배교성의 중심(center)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음녀는 사탄의 힘을 지

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3. 왜 그를 음녀라고 했는가?

이 말은 신부 새예루살렘(계 21:2)에 대조해서 쓰는 말입니다. 그를 '음녀'라

고 부르고 '음녀의 어미'라고 부른 것은 그의 영적, 도덕적 타락성을 의미합니

다. 큰 세상을 유혹하고 미혹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등지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4. 음녀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라고 하였습니다. 17장

15절에 보면 여기 '많은 물'은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

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물'은 '세계 열국'을 가리킵니다.

그가 물위에 앉았다 함은 그의 세계적인 지배력, 영향력을 과시하는 말입니

다.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류의 음녀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

교육 등 모든 부분에 걸쳐 세계를 흔들었습니다.

 

5. 음녀의 모양은 어떠했나?

① 붉은 빛 짐승을 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3절에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라고 하

였습니다. 여기 붉은 빛 짐승은 바로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계 12:3) 곧 무신

론 권력을 의미합니다. 그는 큰 붉은 용의 큰 아들 격이 됩니다(계 12:). 그녀

가 탄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17:3)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반신적이고 살신적인 정권의 성격과 그

가 지배하는 위성 국가들을 뜻합니다. 대단한 것은 음녀가 그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등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여자가 그 짐승을 탄 것이 아니고 짐승이 그 여자를 등에

업은 것입니다. 짐승은 바벨론 문화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줏빛과 붉은 빛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계 17:4).

이것은 그 음녀의 마력적인 유혹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고 했습니다(계 17:4).

이것도 그의 육체적 탐미주의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유혹의 방편들입니다.

가증한 것들로 가득한 금잔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계 17:4).

빛나는 금잔에 비하여 그 잔 속에 있는 것들은 가증한 것들이고, 음행의 더러

운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예외없이 배신과 불신과 불경건과 무신사상

과 유물사상과 우상숭배사상들을 가리킵니다.

 

6. 음녀의 활동은 무엇인가?

이 세상과 세상의 군주들을 취하게 하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2절에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음녀의 활

동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군주들을 취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녀는 이 세상과 세상의 군주들에게 음행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였습니다. 요한계

시록 14장 8절에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음행의 포도주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그 음행의 알코올은 과학만능, 철학, 쾌락, 문화 예술, 유물론 등의 알코올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지상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그 음행의 포도주는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우상숭배 사상이며, 또한

거짓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이단 사상일 수도 있습니다.

실로 가증한 음료들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마취제요, 사망수(死亡水)입니다.

성도와 예수 증인의 피에 취한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6절에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

들의 피에 취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녀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는 데 익숙하고, 그것을 취미처럼 즐기며 쾌감으로 여기고 있다

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8절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

이라」고 하므로 짐승의 활동 무대인 이 세상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Ⅱ. 요한에게 보여준 짐승(괴물)의 비밀을 봅니다(계 17: )

 

영감의 사람 사도 요한은 이 큰 음녀의 정체를 보았습니다. 곧 그의 이름과,

그 이름의 의미와, 그 음녀의 현주소와, 그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큰 붉은 짐승의 등에 앉아 음행의 포도주로 세상과 세상의 왕들을 취

하게 하고, 예수의 증인들과 성도들을 죽여 저들의 피에 취하는 쾌감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끔찍스러운 장면 앞에 기이히 여기고 또 크게 기이

히 여기고 있었습니다(계 17:6).

이때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다시 말하기를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였습니

다(계 17:7).

 

1. 일곱 머리(계 17:3, 7, 9)는 일곱 산(계 17:9)이요, 또 일곱 왕이라고(계

17:10) 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상에 나타난 세계적인 적기독 국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짐승으로 묘사했는데, 사도 요한 당시에는 이미 다섯 마리 짐승이 망하였다고

했습니다(계 17:10). 그는 여섯째 짐승의 통치하에 살고 있고, 그 다음에 일곱

째 짐승이 반드시 출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7:10).

우리는 이 일곱 머리, 일곱 산, 일곱 왕 곧 일곱 짐승을 애굽, 앗수르, 바벨

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그리고 나타날 마지막 하나의 세계 정부(?)로 보는

것입니다.

 

2. 열 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3절에 「일곱 머리와 열 뿔」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7절에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계시록 13장 1절에도 「열 뿔 가진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1) 열 뿔의 정체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17장 12절이 분명히 답하기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열 뿔이란 세계 패권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거기에

기생하고 공생하는 이른바 그의 위성 국가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패권 국가

의 맹주국들입니다. 이것은 기나긴 세계사의 웅변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의 짐승이 출현하는 날, 또 그 짐승의 권력 앞에 붙어

살아야 되는 열 뿔 시대가 온다고 한 것입니다.

 

(2) 열 뿔의 정황은 어떠한가?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일시 동안 권세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2절 중에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고 하

였습니다.

아직도 열 왕의 때는 이르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열 왕의 때는 마지막 세

계인 짐승의 정부가 들어설 때 이들의 정체도 분명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대한 것은 열 왕들은 짐승과 더불어 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짐승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 저들도 그 짐승(임금)에게

권세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

다.

열 뿔(열 왕)들은 모두 대동단결하여 자기의 통치권을 짐승(일곱째)에게

신탁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3절에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

에게 주더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세상의 군주들이 합심하고 합력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들의 통치권을 짐승에게 신탁하므로 공조 공생하는 기생

적 정치 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대주의적 정치 쇼를 하는 길

만이 살아 남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위성국이 되는 길만

이 나라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열 왕들은 일곱 번째 짐승의 통치 이념에 맹종하고 충성합니다. 저들

은 일곱 번째 짐승 시대의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문화, 사회, 풍습에 익숙해

져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첨단을 걷는 걸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

다. 저 고대 세계는 애굽으로 통했고, 헬라로 통했고, 로마로 통했듯이, 마지막

세계는 그 짐승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때 세계는 모두 다 그 짐승의 표를 생

존의 신분증으로 휴대하고 다니게 됩니다(계 13:16-17).

 

Ⅲ. 현대적 교훈

 

성령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여자(큰 음녀)와 짐승의 비밀 계시는 끝날을

살아가는 종말의 교회를 향한 생명의 등불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결과는 저들의 마음에 짐승 같은 사고와

판단과 행동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복제 시대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 괴물 인간(Beast Man) 시대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중대한 교훈은 바로 여기에 있습

니다. 다니엘이 말한 열 왕의 때 곧 열 뿔 시대가 확실히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단 2:44).

 

이 열 왕의 때는 일곱 번째 짐승(일곱 머리=일곱 산, 일곱 임금)의 출현과 함

께 그 절정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곱 번째 짐승의 중심 사상은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받은 것입니다.

이 영을 받은 짐승이 온 천하 임금들(열 왕들)을 자기 통치 아래로 소집하는

것입니다(계 16:13-14).

중대한 문제는 그때 열 왕들이 일심으로 그 짐승의 통치자 앞에 '더불어' 동

맹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세계가 쉽게 하나로 통일되는 힘은 저들이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

(큰 붉은 용+바다에게서 올라온 짐승+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받았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그의 등에 타고 있는 음녀의 술에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권세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겟돈이라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

게 됩니다(계 16:16). 그 큰 이유는 요한계시록 20장 9절이 답해 주고 있습니

다.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기(포위)」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자(음녀=바벨론)와 짐승(일곱 산, 일곱 머리, 일곱 왕)과 열 뿔(열 왕)은 이렇게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함은 결코 여자가 짐승을 주장함이 아니고, 짐승이 여자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짐승이 자기 등에 여자, 곧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을 엎고 다닙니다. 이 바벨론이란 말의 뜻은 '혼잡'입니다. 이 시대의 무신론적이요, 유물론적이요, 살신론적이요, 우상 숭배적인 인본주의 문화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짐승(Beast Man)은 이 세상 문화(바벨론 음녀)를 업고 다니며, 그녀의 술에 열국(열 뿔)을 취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짐승의 고등한 작전입니다. 짐승이 여자의 술잔을 받아 자기도 취하고 열국을 취하게 만듦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음녀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짐승에게 죽고 마는 것입니다(계 17:16-17).

그 마지막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의 진과 성(교회)을 포위하고 박멸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세계에 흩어져 있는 주님의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는 영영 멸망하고 말 것인가?

과연 사탄의 왕국이 실현될 것인가?

과연 짐승의 세계가 되고 말 것인가?

확실히 종말의 세계는 짐승(Beast Man)의 시대로 줄달음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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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74강 /무너져 버릴 사치의 세력 /계18:1-4/ 김성수목사

2015-07-20 21:17:25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우리는 계속해서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이 일 후에, 메타 타우타’라는 단어로 시작이 됩니다.

 

이 단어는 장면이 바뀔 때 쓰이는 단어라고 했지요?

17장에서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설명을 한 요한은 똑같은 내용을

이제 다른 환상으로 보고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디즈니랜드의 입체 영화관을 떠올리시라고 했지요?

 

요한 계시록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같은 내용을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때로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을 하고 있는 책입니다. 2절을 보시면 그게 더 확실해 집니다.

 

 

◑18:2절, 바벨론의 멸망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 말은 전에 어디서 보았던 구절입니다.

 

(계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계속 무너지지요? 한 번 무너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무너집니다.

계시록에는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반복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18장에는 그 바벨론의 멸망이 앞에서보다 좀 더 처참하고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여러 곳에 나타난,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구절들을 인용해서

그 마귀의 세력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파멸을 하게 될 것인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13:19-22)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20 그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곳에 그 양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21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 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

 

22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렘50:39-40) 그러므로 사막의 들짐승이 시랑과 함께 거기 거하겠고

타조도 그 중에 깃들일 것이요 영영히 거민이 없으며 대대에 거할 자가 없으리라

 

4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무너지게 한 것같이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게 하며 그 중에 우거하는 아무 인자가 없게 하리라

 

둘 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역시 이스라엘의 대적인 에돔의 멸망에 관한 예언도 오늘의 본문과 아주 흡사합니다.

 

(사34:8-15)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9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10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11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12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13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14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수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 거하여 쉬는 처소를 삼으며

 

15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그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

 

▶그리고 역시 이스라엘의 대적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도 이렇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습2:14-15) 구스 사람아 너희도 내 칼에 살륙을 당하리라

 

13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14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 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 리로다

 

보세요. 이 세상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밟고, 화려하고 당당하게

그들의 권세를 과시했던 대적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떻게 되었다고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

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천국의 대표적인 상징인 ‘생명’과 ‘활기’와 ‘기쁨’과 ‘빛’같은 것들과

정 반대되는 개념들로 동원이 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고 힘 있어 보이고 활기 차 보이는,

붉은 옷과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는 바벨론의 실체는

‘죽음’과 ‘무기력함’과 ‘어두움’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만이 그렇게 가시적인 현실 뒤에 감추어져 있는

바벨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에게 ‘내 백성들아 거기서 나와라’ 하고 강하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그 하나님의 애절한 권고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계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여러분이 조금 전에 읽으신 구약에 나타난 바벨론을 비롯한 하나님의 대적들의 멸망을 보시고

또 오늘 본문에서의 바벨론의 멸망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 나는 그러한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안도의 숨을 쉬고 계십니까?

 

‘혹시 나도 그렇게 귀신들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인, 그 어둡고 음습한 곳에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십니까?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한번 갔다가 아니면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지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사업은 한번 망하면 다시 재기를 할 수 있고

대학은 한 번 떨어지면 재수와 삼수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신앙생활은 한번 실패하면 그 길로 영원히 귀신들과 더러운 영들과 함께

이를 갈며 무한대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진지해 지십시오. 조금만 더 열심을 부리십시오.

 

제가 왜 굳이 구약의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멸망하는 장면을 여러 군데 찾아서 읽어드렸는지 아세요?

제발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다른 세상에 관심을 가지시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힘의 원리에 의해 남을 평가하고

이 세상의 힘으로 나를 치장하고 장식하고 자랑을 삼으려 한다면

여러분도 음녀 바벨론과 똑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하자는 것입니다.

그 음녀 바벨론의 미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세상 사람들은 전혀 거부감 없이 그 미혹에 끌려갑니다.

 

◑사치와 치부(致富)의 함정

 

▶(계18: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그 음녀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음녀가 주는 금잔에 취한 자들은

전부 그 음녀 바벨론과 함께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인데, 그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땅의 왕들이 그 음녀와 더불어 음행을 하고, 상인들도 그 음녀의 사치스런 미혹을 좇아

부를 추구하다가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로 다음 구절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하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이 강대상에서는 어떤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세상 속에서 나오십시오.” 그래야 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오늘 날 교회에는 ‘고지론’이 판을 치고

여전히 세상의 힘의 원리가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장로는 인격과 신앙보다는 돈이 많아야 하고 세상 적인 힘을 소유한 사람이

교회에서도 소위 쓸모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제 질문에 답을 해 보세요. 첫 번째 질문은 아주 쉬운 질문입니다.

돈이 많고 신앙이 없는 사람과, 돈이 없고 신앙이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더 교회에 득이 되는 사람입니까? 당연히 돈이 없어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지요.

 

그럼 두 번째 질문을 드리지요. 돈이 많고 높은 자리에 않은 신앙이 있는 사람과,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직업을 가진 신앙이 있는 사람과

누가 더 교회에 득이 되는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이왕이면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교회가 갑자기 활기가 있어집니다.

뭔가 그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유익을 볼 거라는 기대 때문이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실 때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더 선호하시나요?

 

▶(요6: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우리를 통하여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잘 믿게 되는 것,

그것이 완성이 되면,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면

이 우주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것처럼 완전히 멸망하고, 새로운 신천지가 도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 데에는

부자와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도 귀하게 쓰이겠지만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쓰여 집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앉은 사람들이

남들에게 행복하고 기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동원하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기쁘고 행복할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못 배우고 소외된 사람들이

전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조건이 없음에도 예수로 인해 만족해하고 즐거워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가

 

‘도대체 저들이 저런 상황 속에서도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그 비밀이 뭘까?

저들이 나와 다른 것은 저들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 하나 뿐인데

그럼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저러한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도 그 예수를 알고 싶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는 지금 그의 가난과 못 배운 것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못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을 하면서 ‘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들을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일부러 가난하게 살고 일부러 무식해지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만큼은, 그러한 세상 적인 힘의 논리로 사람과 사물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거기서 나오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음녀가 주는 세상 힘의 논리에 빠져서

하나님마저도 그 세상 힘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수단으로 동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을 동원해서, 이 땅에서 무언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서

쓸모 있는 일을 하라고 이 땅에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게 되는 데에 여러분의 가난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는 데에 여러분의 질병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는 데에 여러분의 사업의 실패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난해서 병이 걸려서 사업에 실패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의 예

 

▶혹 이런 질문이 드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가 보기에 엄청난 일을 하고 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럼 그러한 대표적인 사람 중에 다윗을 한번 볼까요?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어린 소년 시절에

물맷돌 다섯 개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질투해서 죽이려고 좇아다닐 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 해서 그의 옷자락만 조금 베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죽인 병사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그 사울의 가족들을 후대해 줍니다.

그리고 사무엘 하5장에서 비로소 왕이 되고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삼하7:5-13)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 더러 내 성전 지어달라고 했느냐?

내가 너희를 위해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이지, 너희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윗을 주권자로 삼고 다윗의 대적들을 물리쳐 주고 보호해 줄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를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진짜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성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성도들의 본분은 이 땅에서 우리의 힘과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끌려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고

그 은혜를 인식하게 되면 감사가 나오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증거가 바로 사무엘하 12장입니다.

다윗이 그 수많은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고 한 순간에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자기의 충실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가 임신을 하자

우리아를 궁지에 몰아서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게 죄인지도 모릅니다.

 

(삼하12:1-12)

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나머지 성구는 주1)

 

다윗은 나단이 그에게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단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그 놈은 죽여야 한다.’

 

나단이 ‘그게 바로 당신이요’ 하고 말해주자 그 때 다윗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자였구나, 그럼 지금까지 내 삶 속에 일어났던 그 수많은 신앙의 승리의 순간들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 속에 나왔던 수많은 신앙의 승리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끌어 주신 결과이지 자기 안에 있는 힘과 열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시51:1-17)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더러운 관을 통과해서 나오는 것들처럼 전부가 다 죄라는 것

 

4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죄라는 것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창조해 달라고 합니다. 나올게 없으니까요.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우리로부터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제사라는 것이 뭡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어떤 중재자, 구원자가 없으면

우리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제사인데

우리는 아차하면 우리의 정성과 진심이 우리의 구원에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공로주의입니다. 공로주의는 누가 더 낳은 열심을 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느냐의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문제입니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단 한 순간도 선하게 존재할 수 없는 죄 덩어리입니다' 라는 자각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걸 인식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걸 우리가 뭐라고 부릅니까?

그걸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를 자각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것입니다. 상한 심령!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입니다. 뭐 대단한 일 해내는 것 아닙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5장의 언어로 표현을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산상 수훈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하겠지만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복’의 조건이 아니라 ‘복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결과’요

‘증상’이요 ‘확인’ 인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복을 받은 자,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라는 자각을 하게 만드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죄에 대한 욕구나 마귀의 공격 같은 것들을

그냥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 속에 실패와 절망과 좌절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죄인들의 처참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울러 신앙의 진보도 함께 병행시켜 요구하십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 속에는 늘 갈등과 자신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구원자가 꼭 필요했었던 이유를 마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자’

 

그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거기에 돈이 필요합니까? 건강이 필요한가요? 명예가 필요합니까?

물론 그런 것이 사용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때로 가난도 질병도 눈물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음녀는 세상의 힘의 논리를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진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저리로 밀어놓고

자꾸 세상의 힘과 정성과 열심과 진심으로 ‘엉뚱한 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윗의 시편 51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이게 그 다음에 지은 시입니다.

 

▶(시40:1-7)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기도를 하고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다윗은 자기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기적이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은 도저히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자신에게 구원자가 필요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오실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지요?

어떻게 그걸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히10:1-7)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정확하게 시편40편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 10장 7절에서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는 말을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실패와 절망과 좌절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까?

내 속에서는 선한 것이 전혀 나올 수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나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기적 같은 간섭이 필요하며

바로 그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내용을 설명하는 모델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어떤 결론을 얻는지 보세요.

 

(시32: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모든 것은 은혜로구나,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기적을 일으켜 주시지 않고

구원자를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전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구나.’

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골리앗을 때려죽이게 만드셨고,

사울을 놓아주게도 만드셨고, 밧세바를 범할 때 그냥 놔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메시아의 필요를 알게 되고

그 메시아를 보내주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골리앗을 때려죽인 용감함의 표상으로,

사울 왕을 살려 준 자비의 표상으로, 사울의 가족들을 후대한 친절함의 표상으로,

성 공한 왕의 표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모든 선한 것들을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 아래에서만

누리고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불가능하고 더럽고 추한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독생자의 목숨을 끊어서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시며

 

결국 그 하나님 앞에 항복하며 감사의 찬송을 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 전체’의 삶의 표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 가면 다윗이 그 파란 만장한 삶을 살고 난 뒤 얻은 결론이 이렇게 등장합니다.

 

(롬4: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의 시편32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윗의 삶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골리앗을 때려 부수고 자비를 베풀고

성전을 짓는 일을 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나는 불가능한 존재이며

내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메시아가 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삶으로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많이 붙잡게 되고

은혜를 더 많이 사모하게 되는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죄를 많이 짓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러분 자신에 대한 실망을 그렇게 많이 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절망과 실망과 실패 속에서 점점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나에게 아들의 목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며

그 감사가 나의 삶을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조금 씩 조금씩 바꿔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거기에 돈이 필요한가요? 거기에 명예가 필요합니까? 거기에 수려한 외모가 필요한가요?

 

그런데 왜 예배당에 와서 전부 그걸 구하고 있냐는 말입니다.

그건 음녀 바벨론의 미혹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그리고 진짜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하라’

 

여러분 때때로 ‘예수를 믿는 자로서 이런 삶을 살아도 되나?’

라고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실 때가 있으시지요?

 

때때로 ‘내가 이런 죄를 짓고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맞나?’ 하실 정도로 실패하실 때가 있지요?

그 때 여러분은 절망의 나락 속을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안에 선한 것을 창조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절대 선한 것을 내 놓을 수 없는 자입니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이런 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구나. 너무나 감사하다’ 까지 가십시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가는 그 복된 경험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꾸 항복해 가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그 더럽고 추악한 죄도 여러분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며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

 

 

주1) 삼하12:1-12

 

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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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75강 /미아 헤메라(One Day) /계18:4-13/ 김성수목사

2015-07-20 21:16:00

 

◑나오라 / 떠나거라

 

▶(18:4)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나오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우리는 지금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17장에서 내내 음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대해 경고를 한 요한은 18장에서도

역시 그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17장과 18장은 똑같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17장은 정치적 종교적인 세력으로서의 바벨론의 멸망을,

18장은 경제적 세력으로서의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장에는 당시에 쓰이던 경제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에 따르면 그 힘과 권세와 재물로 대표되는

화려한 바벨론이 종국에는 귀신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새들이 모이는 곳으로 참혹하게 변해 버릴 것입니다.

거기서 '모이는 곳, 퓔라케'는 '감옥, 형무소'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결국 힘을 추구하는 이 세상 세력들은

더러운 영과 귀신이 모이는 감옥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바벨론은 겉으로는 화려한 붉은 옷과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을 하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지만,

그 이면은 그렇게 처참하고 황량한 사망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이라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세상의 달콤함에 푹 젖어서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미성숙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 백성들아, 거기서 나와라, 'come out of her my people'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게 4절이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라'는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헬라어의 부정과거 명령형은

단호하고 시급하게 순종해야 하는 명령을 하달할 때 쓰는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미적미적 미루거나

오래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듣는 즉시 나와야 하는 시급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구약과 신약 여러 곳에서

'나의 백성들아, 세상에서 나오라,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48:20)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선파하여 들리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믿음의 여정을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굳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했을까요?

 

4천년 전 이미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는

구원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대아가 다른 말로 '바벨론'이지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갈대아, 바벨론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의 삶을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일 강 유역의 삼각주 땅인 풍요의 땅 애굽에서 끌고 나와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그 힘과 쾌락의 도시 바벨론의 원리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7: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모든 민족을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 이외의

세상이 추구하는, 힘의 원리와 자기 배를 위한 우상숭배의 삶은,

'너희들의 삶 속에서 씨를 말려 버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2:6-9)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이방인들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버리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들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들의 세상정신과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막으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조심해야 할 이방 땅이 어떤 땅인지 보세요.

 

사2: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끝까지 이 세상의 삶의 원리를 고수하는 자들을 가리켜

'이방인들과 언약을 맺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으리라고 천명을 하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그 곳에 있는 모든 족속들을

어린아이도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의 삶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거기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양들이 오로지 자기 목자의 음성만을 알아듣고 그 음성만을 좇아가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거기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아 나오는 것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회개'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기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 나옵니다. 이런 것이지요.

 

(스9:5-6)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기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이렇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고 그 길에서 돌이켜 나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던 그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이웃과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이타적인 삶으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세상적으로 볼 때 엄청난 손해가 감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하는

의지와 선택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속에서 돌이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 이외의 모든 자들과

그들을 움켜쥐고 있는 마귀의 세력 전체가 바로 큰 성 바벨론인 것입니다.

왜 그 전체를 바벨론에 포함시키는지는 제가 전에 설명해 드렸지요?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 날에 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실 것입니다.

 

(렘51:7-9)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8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9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토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음에도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했으므로 이제 우리가 너희를 버리리라’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바로 이 구절이 오늘 본문 5절에 인용이 된 것입니다.

 

 

◑그 죄가 사무쳤으며, 쌓였으며

 

(계18: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여기서 '사무쳤으며'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동사 '콜라오'는 (piled up)'쌓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세상의 힘의 원리에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죄로 쌓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동일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여러분이 이 죄를 ‘쌓는다, 콜라오, pile up’이라는 말을 들으시면 무엇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나십니까?

구약의 어디에서 세상 사람들이 죄를 하늘까지 쌓아올린 사건이 있었지요? 바벨탑 사건입니다.

 

인간들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자’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벽돌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혼란의 탑 바벨론을 한 번에 다 무너뜨려 버리셨습니다.

 

그 바벨탑에서 바벨론이라는 단어가 기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섭지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벧후3:3-1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하나님의 백성들)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감출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긴 있는 거야?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악한 세상을 가만히 놔두는 거야?

그 하나님은 힘도 없고 무력한 하나님이거나,

아니면 전혀 우리 인간 세상에 관심이 없는 그런 무관심한 하나님일거야.

우리도 그 정도의 힘은 있잖아.

 

그러니까 오지도 않을 그런 무관심하고 무력한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우리의 힘을 축적하여 우리 스스로 행복과 쾌락을 만들어 즐기자’

라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멸망해 버릴 바벨론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힘이 없어 무력하게 지켜보고 계신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어 침묵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막 읽은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동안에

자행되는 세상의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억하고 계신다고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18: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하나님은 지금 무관심하게 다른 곳에 신경 쓰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세밀하게 간섭하시며 죄인들의 죄를 낱낱이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 온 자들의 죄는 그들이 얼마만큼의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모두 기억에서 지워버리시겠다고 반대의 약속도 하고 계십니다.

 

(히10:16-17)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렘31:33-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게 바로 우리 성도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실수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게 백일하에 다 밝혀진다면 전 정말 부끄러워서 천국에서도 얼굴 못 들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렇게 하나님은 ‘바벨론의 불의함을 모두 기억하시는 반면에’

회개하고 돌아 온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는 하나도 기억하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베드로 후서와 연결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 죄를 하나도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그 감격스러운 복음을 알아듣게 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어떻게 산다고요?

우리는 그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서기 위해,

열심히 피 흘리기까지 수고를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바벨론의 처벌

 

▶그러나 성경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분명하게 처벌할 것임을

6절에서 이렇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세요.

 

(계18: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갑절’이라고 번역이 된 ‘디플루스’라는 단어는 ‘두 배’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이 닮은 두 사람을 가리킬 때, 혹은 ‘완전하게’의 의미로 쓰던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in full’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갑절로 갚아 주리라’는 말은 ’정확하고 확실한 처벌을 하리라’는 강한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가 행한 그대로 갚으신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과를 배나 갚을 것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지요?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반드시 정확하게 처벌하실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한 보응의 논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마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렘50:29) 활 쏘는 자를 바벨론에 소집하라 무릇 활을 당기는 자여

그 사면으로 진을 치고 쳐서 피하는 자가 없게 하라

그 일한 대로 갚고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니라.

 

이렇게 큰 성 바벨론은, 그가 이 땅에서 그 사치의 세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며

조롱한 만큼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큰 성 바벨론이 저지르는 죄의 내용이 뭐 길래

하나님은 이토록 철저하게 그들의 멸망을 약속하고 계신 것일까?

본문 7절에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계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 첫 번째 죄목이 뭡니까? ‘자기를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뭡니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자기를 올려놓는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 1번 질문이 뭡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입니다.

답이 뭐였지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어떨 때 가장 영광스러워 하십니까?

자식이 남들 앞에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설 때, 우리 부모님들은 가장 영광스러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잘 자라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낼 때 가장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서

사랑과 온유와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절제를 뿜어내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저기 봐 내 자식 보여? 야, 저 녀석 이제 다 컸네.’ 이게 바로 아비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큰 성 바벨론의 미혹에 빠진 멸망할 자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영광, 자기의 자랑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 그들의 죄목은 ‘사치’입니다.

이 ‘사치’라는 단어 ‘스트레니아오’는 ‘쾌락을 즐기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본 ‘자신을 영화롭게 하다’라는 말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스트레니아오’인 것입니다. 본문 12절과 13절을 보시면

그들이 얼마나 사치를 부리며 살았는지 조목조목 그 내용이 나옵니다.

 

(계18:12-13)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의 세력들이 거래하던 물품의 목록입니다.

이 목록들은 크게 일곱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가 보석류입니다.

 

1) 금, 은(당시 로마는 고급 소파나 욕탕, 식기를 만들기 위해 스페인에서 수입 해다 썼다)

보석(금 은 이외의 벽옥, 황옥, 홍보석, 녹 보석 등 로마는 인도와 홍해 페르시아 만에서 보석을 수입 해다가 치장함),

진주(당시 고대시대에는 진주가 보석의 여왕.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으로 취급)

 

2) 두 번째가 세마포, 자주옷감, 비단, 붉은 옷감 같은 고급 옷감들입니다.

이런 옷감들은 왕족들과 귀족들이 그들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과 이집트, 스페인 등지에서 수입 해다가 썼습니다.

 

3) 세 번째가 고급 가구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향목이라는 것이 나오지요?

향목은 북 아프리카에서 나오는 시트러스 나무를 말합니다.

(당시 로마는 그 나무로 테이블을 만들었는데 당시 로마의 여자들이

진주를 그들의 부와 사치의 표징으로 사용했다면

남자들은 이 비싼 향목으로 테이블을 제작해서 집에 들여놓는 것으로

부와 사치의 표징으로 삼았음)

그리고 상아를 이용해서 그 테이블의 다리나 우상을 제작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당시에 로마에서 얼마나 그 상아를 많이 썼으면

아프리카의 코끼리의 상아가 모자라서 인도에서까지 수입 해다가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유’라는 것은 ‘구리’입니다.

당시에 구리는 값비싼 예술품이나 집의 장식품을 만들 때 쓰던 것입니다.

 

그리고 ‘옥석’은 대리석을 말합니다. 요즘도 대리석은 부와 사치의 상징이지요.

 

4) 네 번째가 고급 향료들입니다. 계피, 향료, 유향이 나오지요?

이것들은 몸에 뿌리는 향수들이기도 하지만

잔치 때 포도주에 섞어 마시는 향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5) 다섯 번째가 고급 음식들이지요. 포도주, 감람유, 고운 밀가루가 나옵니다.

고운 밀가루는 당시 로마의 부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입 해다가 먹은 음식입니다.

 

6) 여섯 번째가 가축과 농기구입니다. 소, 양, 말, 수레가 나옵니다.

수레는 부자들의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

 

7) 그리고 일곱 번째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입니다.

여기서 ‘종들’ ‘소마토이’는 원래 ‘몸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소마토이’ 바로 이어져 나오는 ‘사람의 영혼들’과 동격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번역을 해 보면 ‘몸들, 심지어 사람의 영혼들’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1만 명에 가까운 노예들이 항상 사고 팔리는 노예시장이 있었습니다.

왜 그 사치의 세력이 거래하는 물품의 맨 마지막에 ‘사람들’이 등장하는지 아십니까?

 

큰 성 바벨론이 사람들을 금과 보석과 진주와 붉은 옷을 가지고 사치로 미혹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목적은 결국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팔아서 사치를 조장하는

사악한 악의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누가, 어떤 나라가, 어떤 제도가 진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합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이웃과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을

사명으로 갖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누구인지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은 겉으로는 사람을 위하는 척,

사람들에게 참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줄 것처럼 속이지만

결국 그들에게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벨론이 거래하는 사치의 목록에 ‘사람의 영혼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만큼은, 나의 인생에 주어진 나의 가족과 믿음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단은 그러한 형제자매들조차도 나의 유익과 나의 배를 위해,

오늘 본문의 말씀 대로 하자면, 사치를 위해 미워하게 만들고 갈라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단의 계략에 절대 속지 마시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물질과 이익과 편리를 조금 손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얻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위해 나를 비우는 연습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절대 멸망해 버릴 사치의 세력에게 속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그리고 말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그 바벨론이 ‘나는 여황이요 과부가 아니라 나는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교만을 떱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벨론의 세력에게 애통과 슬픔으로 갚으시겠다고 천명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 힘을, 자기 주먹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교만’입니다. 그들은 ‘안상무신, 안하무인’입니다.

항상 ‘나’가 세상의 중심에 있지요.

 

그런데 8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루 동안에 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호탕하게 교만을 떨 때 하나님께서 돌연히, 갑작스럽게 그들을 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여기서 쓰인 ‘하루 동안’ ‘미아 헤메라’는 ‘하루 one day’라는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에 동일한 의미의 단어가 쓰였는데, 그 구절을 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계18:17) 그러한 부가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여기서 쓰인 ‘일 시간에’(one hour)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처럼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재앙으로 그들을 치신다고 하시나요? 사망과 애통과 흉년으로 치시겠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지금 그들은 풍요와 쾌락과 이기심으로 자신들을 즐겁게 하라고 부추기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흉년과 사망과 애통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고

거기에 넘어간 자들도 역시 그들과 함께 불살라지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동안, 미아 헤메라’ ‘일순간’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아까 베드로후서 3장에서 그 준비하는 삶이 무엇을 하는 삶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서기 위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의 삶 속에서 열매로 맺어 가는 삶’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영원할 것 같지만 ‘미아 헤메라’

우리가 전혀 기대치 않던 날에 일순간에 멸망해 버릴 것입니다.

지금 같아선 ‘난 영원히 가난할 것 같지요?

지금 같아선 난 영원히 못난이로 남을 것 같지요?

 

지금 같아선 난 영원히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 것 같지요?’

아니요. 그 날은, 바벨론의 멸망의 날은 ‘미아 헤메라’ 일순간에 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치의 세력에게 놀아나지 마시고 잘 참아내십시오. 잘 견디십시오.

여러분이 진짜 승리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살전5:1~8절까지를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살전5:1-8)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76강 /지나가는 자가 되시렵니까? /계18:9-24/ 김성수목사

2015-07-20 21:14:25

 

▶우리는 계속해서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음녀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확인한 것이 음녀 바벨론은 금과 진주와 보석과 붉은 옷으로

세상에게 힘과 쾌락과 행복을 약속하며 미혹하고 있지만

그 세력은 인간의 영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파괴할 목적을 갖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라는 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음녀 바벨론이 멸망하게 되자

그 음녀의 금잔에 취해 속았던 세상 사람들이 통곡을 합니다.

그 통곡하는 사람들을 성경이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는지 보세요.

 

▶(18:9) 그 도시와 더불어 음행을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세상의 왕들은,

그 도시를 태우는 불의 연기를 보고, 그 도시를 두고 울며, 가슴을 칠 것입니다.

 

먼저 9절을 보시면 ‘땅의 왕들’이 통곡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땅의 왕들이란 음녀 바벨론의 미혹에 넘어가서 ‘힘을 추구하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던 권세와 힘이 음녀 바벨론이 멸망하자

‘일 시간에, 미아 헤메라’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세상 권세와 힘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자

세상 왕들은 그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시면, 그들이 통곡을 하면서 두려워 떨고 있는 모습이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계18: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여기서 고난이라고 번역이 된 ‘바사니스모스’는 ‘torment, 고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여, 프호보스’는 ‘두려워 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희희낙락하며 권세를 누리던 땅의 왕들이

음녀가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떨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아니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막9:43-49) 주1)

 

자칭 고상한 기독교인들이

‘지옥이 있긴 어디 있어,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같이 무시무시한 곳을 만드셨을 것 같아?

그건 다 우리보고 착하게 살라고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아닙니다. 지옥은 분명 존재합니다. 지옥에서 활활 타는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불이요, 안식의 불이 되지만

죄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죄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죄와 공존하실 수 없으시고, 절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고 순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와 악은 하나님 앞에서 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힘과 권세를 누리던 세상 왕들이, 음녀 바벨론이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며

두렵고 떨고 있다는 것은, 그들도 똑같은 고문에 처해질 것임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그 세상 왕들이 추구하는 힘의 원리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이 만들어 낸 ‘시대정신’이라고 했잖아요.

 

기억나세요?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아주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세 가지 질문을 갖고 태어난다고 했지요.

그 첫째가 ‘what is man?’

두 번째가 ‘what is our problem?’

세 번째가 ‘what can we do about it?’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경험을 통해 무의식에 저장하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세계관이 된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세계관들이 어떤 공동체나 나라의 사회와 문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전 인류의 공통된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전 인류는 안타깝게도 ‘죄인’입니다.

그 ‘죄인’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힘을 쌓아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납니다.

 

그렇게 힘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모두 획일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

그러한 죄인들의 획일적인 세계관이 모여

그들의 사회와 문화에 지속적으로 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시대정신을 낳지요.

그게 뭡니까?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자연주의’고도 부릅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며 ‘만물의 근본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전부인 자연주의자들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와 힘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주의, 성공주의, 물질주의’라는 세상의 시대정신이 교회 안에도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커지고 사람이 늘어나고 많은 일을 해 내야

좋은 교회라 인정을 받습니다. 화려한 경력의 목사가 추앙을 받습니다.

그가 어떤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느냐’로 그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예배당 안에서 계속해서 그러한 바벨론의 힘의 원리를 추구한다면

여러분도 언젠가 그 바벨론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떨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왜요? 곧 자기도 그 고문에 던져지게 될 것이니까요.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여러분이 안전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버리십시오.

 

(벧전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심판은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통곡을 하는 사람들이 상인들입니다.

 

(계18:11,15)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땅의 상고들도 똑같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부’가 일 시간에 날아가 버림으로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음녀 바벨론이 당하는 고문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역시 그들도 그 고문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땅의 상고들이란, 단순히 장사하는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부’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 멸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통곡을 하는 자들이 배 부리는 자들입니다.

이 배를 부리는 자들은 바벨론 세력의 사치품을 실어 나르던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치의 세력인 바벨론에 빌붙어, 세상의 원리로 살던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계18:16-19)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에스겔서 27장에 가면 오늘 본문과 아주 흡사한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겔27:25-35) 다시스의 배는 떼를 지어 네 물화를 실었음이여

네가 바다 중심에서 풍부하여 영화가 극하였도다

 

26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물에 이름이여 동풍이 바다 중심에서 너를 파하도다

 

27 네 재물과 상품과 무역한 물건과 네 사공과 선장과 네 배의 틈을 막는 자와

네 장사와 네 가운데 있는 모든 용사와 네 가운데 있는,

모든 무리가 네 패망하는 날에 다 바다 중심에 빠질 것임이여

 

28 네 선장의 부르짖는 소리에 물결이 흔들리리로다

 

29 무릇 노를 잡은 자와 사공과 바다의 선장들이 다 배에 내려 언덕에 서서

 

30 너를 위하여 크게 소리질러 통곡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며 재 가운데 굶이여

 

31 그들이 다 너를 위하여 머리털을 밀고 굵은 베로 띠를 띠고 마음이 아프게 슬피 통곡하리로다

 

32 그들이 통곡할 때에 너를 위하여 애가를 불러 조상하는 말씀이여

두로 같이 바다 가운데서 적막한 자 누구인고

 

33 네 물품을 바다로 실어 낼 때에 네가 여러 백성을 풍족하게 하였음이여

네 재물과 무역품이 많으므로 세상 열왕을 풍부케 하였었도다

 

34 네가 바다 깊은데서 파선한 때에 네 무역품과 네 승객이 다 빠졌음이여

 

35 섬의 거민들이 너를 인하여 놀라고 열왕이 심히 두려워하여 얼굴에 근심이 나타나도다.

 

오늘 본문이 여기서 인용된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요?

바벨론의 미혹에 빠져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살던 자들은, 모두 이렇게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힘이라고 여겼던 권세와 부가 순식간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바벨론이 여러분에게 약속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마치 커다란 공갈 빵 같은 것이지요. 한순간에 ‘푹’ 하고 사라져 버리는 그런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바벨론의 세력과 정반대의 삶의 원리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밟힙니다. 당연하지요. 긁어모으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힘을 쌓고,

남을 죽여 나의 배를 불리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는 바벨론에 맞서

오히려 그들에게 퍼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고,

나를 비워 그들을 살리는 바보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땅에서 바벨론에게 죽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계11:2, 7-10)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보세요. 우리는 이렇게 이 땅에서 죽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반면에 세상 바벨론은 그들이 가진 힘을 자랑하면서

우리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며 서로 예물을 보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사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계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이 성이 어디입니까? 바벨론이지요.

우리는 바벨론이 권세를 잡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피 흘리며 죽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늘 기도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어떤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 하나님 나라가 빨리 완성되게 해 주세요’ 그 성도의 기도가 어디에 나왔었지요.

 

(계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하나님은 그 기도의 응답으로 그들을 죽인 그 큰 성 바벨론을 폭격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20절을 보세요.

 

(계18:20-21)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계시록 6장 10절에 대한 답이지요)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 당하는 것 같고 죽는 것 같지만

그들은 곧 통곡하게 될 것이고, 오직 우리만이 그 통곡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렘51:48-49)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자들이 북녘에서 밀려올 것이니,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의 파멸을 보며 기뻐서 노래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49 "세상 사람들이 바벨론 때문에 칼에 죽은 것과 같이,

이제는 바벨론이 이스라엘 사람을 칼로 죽인 죄로 쓰러져 죽을 차례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느라 잠깐 동안 죽음을 맛보게 되지만

바벨론의 세력은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죽음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계11:17-18)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보세요. 그 바벨론의 세력이 진화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이 땅은 점점 살기 좋아질 것이고

종국에는 질병도 없고 시간 여행도 할 수 있는 지상 낙원으로 변할 것이라는 허울 좋은

미혹을 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들을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그들은 이 땅을, 이 세상을 망하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거기서 나오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땅의 왕이 멸망하는 경험을 하게 해 주시고,

상고가 멸망하는 경험을 하게 해 주시고,

배 부리는 자가 멸망하는 경험을 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땅의 왕들의 통곡’은 미래형이고,

상도들의 통곡은 현재형이고 배 부리는 자들의 통곡은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그 통곡은 전 역사에 걸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러한 ‘힘과 부와 힘의 원리를 추구하는 자들의 멸망’을 경험하게 해 주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거기서 나오라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부터는 이 환상이 철저한 파괴의 장면으로 바뀝니다.

 

(계18:21-23)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바벨론이 바다에 빠져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이 구절도 역시 예레미야서에서 인용이 된 구절입니다.

 

(렘51:60-65)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임할 모든 재앙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이르되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 거하지 못하게 하고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63 너는 이 책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예레미야가 바벨론에게 임할 모든 재앙의 내용을 한 책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의 군대 장관 스라야에게 그 것을 줍니다.

그리고 유브라데 하수 속에 그 것을 던지며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패쇄 하리라.‘라고 말하게 시킵니다.

 

그 일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가시적으로도 ’미아 헤메라, 순식간에, 돌연히‘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그 때가 되면 인간들이 자신들만을 위로하려 만들어 놓은,

그리고 자신들의 야망의 실현으로 일구어 놓은

‘음악도, 산업도, 빛도, 사람도, 생명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모든 화려함이 다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 일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 그리스도인들만이

영원히 그 아름다운 땅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17절 말씀대로 그냥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지나다가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는 천국의 시민으로 사시겠습니까?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가셔야지요. 그러면 오늘을 준비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본문 14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계18: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 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

 

 

주1) 막9:43-49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강해-25/ 이 세상의 멸망, 그 이유 /계18:1-20

2020-01-21 07:27:37

 

1. 모든 것의 종말에 대하여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 그리고 四季節의 끝인 겨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푸르던 나뭇잎들도 어느새 다 떨어져 보이지 않습니다. 땀에 젖은 반소매가 보기 좋더니 이제는 살짝 드러난 맨살조차 측은해 보입니다. 왕성하던 젊음은 사라져버리고, 주름과 꺾어진 허리와 염색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머리카락이 세월의 길이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이면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實感하게 되지요.

 

성경은 ‘처음’과 ‘마지막’을 기록한 ‘유일한 책’, 아니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을 이루신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 와서 그 결말,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주와 지구와 인류 역사는 그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반드시 끝이 있다는 말이지요.

 

특히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8장은 이 세상의 최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종말, 세상의 마지막은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 그렇게 자연스레 오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인류와 역사와 세상의 종말은 도대체 왜 오는 것일까요?

 

 

2. 이 세상이라는 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8장은 17장에 이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장은 음녀와 같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요, 18장은 바벨론의 실제적인 陷落을 기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1절에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고 합니다. 이 “다른 천사”가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의 하나인지, 땅이 환하여지는 영광을 가진 유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 천사는 자신의 영광으로 온 땅을 환하게 하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무너졌도다”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멸망은 확실한 일이라는 것이죠. 이 세상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무너질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네 가지 형태입니다. 8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첫째 형태는 ‘사망’, 곧 죽음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죽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애통’입니다. 쾌락과 환락의 소리, 상인들이 사고팔고 거기서 흥청망청 하는 소리 등으로 요란하던 성읍이 슬픔의 도시로 변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흉년’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징계를 뜻합니다. 자랑하던 물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죠.

 

네 번째는 ‘불에 살라진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마지막 형태는 남아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태워져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하나님의 네 가지 재앙을 통해서 완전한 파멸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어떤 학자는 당시 세계적 대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당시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에 들어서 어떤 이들은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 미국의 ‘뉴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에 쓰여진 문자 그대로 ‘바벨론’으로서 장차 ‘바벨론이 재건될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을 반대하는 중심이 될 것이며, 결국에 가서는 다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이 모두를 포함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벨론은 기록 당시의 로마일 수 있고, 지난 세월 하나님을 대적하던 세력의 상징인 바벨론일 수 있고, 오늘도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와 백성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뜻하는 말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즉 바벨론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하나가 되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제국처럼 되어 버렸고,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력과 그 사람들을 뜻한다는 것이죠.

 

1) 멸망의 특징

 

그들이 받게 될 최후의 심판은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① 첫째는 길고 긴 세월을 거치면서 찬란한 성과를 이룬 역사와 문화와 경제가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8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10절,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7절,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그리고

19절,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여기서 한 시간이란 ‘가장 짧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인류의 찬란한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리 민족마다 나라마다 수백 년 수천 년 된 유적들을 유지 보존한다고 해도 그 날에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누구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전도서 1장 2절 말씀보다는 “화 있도다! 화 있도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전도서가 허무함을 노래한 것이면, 오늘 본문은 허무함과 슬픔과 충격과 당혹감 등을 모두 포한한 말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과 인류 역사는 마지막을 맞게 될 것입니다.

 

 

② 두 번째로 최후의 심판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철저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21절,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맷돌을 바다에 던지면 ‘가라앉을까 말까’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던져진 그대로 즉각 가라앉으며, 다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인류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와 경제와 업적들이 이렇게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파괴될 뿐 아니라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③ 세 번째로 최후의 심판은 이 세상과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22절 이하에 보면, 악기 연주하는 소리, 즉 음악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나 다른 그 무엇이든 그것을 장식하기 위한 보석을 세공하는 자가 사라질 것입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맷돌로 가루를 만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밤에 불을 밝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의 즐거운 웃음소리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은 모든 웃음기가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한숨과 신음과 애곡하는 소리만 있을 것입니다. 아니죠. 그 소리마저 사라져 버린 적막강산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으로 이 세상에 일어날 모습들입니다.

 

 

2) 멸망의 원인

 

그렇다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멸망하는 것일까요? 유구한 인류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 원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 혹은 ‘부패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세상을 심판하실 정도의 부패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① 첫째로 그 부패는 영적인 부패입니다. 2절을 보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모여서 썩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없애신다는 말입니다.

 

식전에 이런 사진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사진처럼, 오늘 본문은 마치 쓰레기 야적장처럼 더러워진 이 세상에 대한 생생한 고발입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그 주님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문화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들은 더러운 문화를 만들어 이 세상을 쓰레기 야적장처럼, 영적으로 보면 귀신의 처소처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음행, 즉 성령을 따르기보다 악한 영들을 추종함으로서 이 세상을 더럽혔다는 것이죠. 영적인 부패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도덕적인 부패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악한 영일뿐 아니라 더러운 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단의 지배 아래 들어간 문화는 더러운 문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꼬드김으로 타락한 세상은 그 사탄을 좇아 온갖 더러운 일을 행함으로서 이 세상을 더러운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바로 이 부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지구 종말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오늘 본문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② 두 번째로 그 부패는 정치적인 부패 때문입니다.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바벨론은 마치 힘 있는 형님이 아우들에게 술잔을 권하듯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할 것과 나름의 이유를 둘러대며 온갖 악을 행해도 된다고 부추겼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의 행위는 포도주를 권하여 그들로 취하게 만드는 행동과 같다는 말이죠. 바벨론은 땅의 지도자들을 꼬드겨서 이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한 곳,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곳으로 만들기보다는 귀신의 땅, 사단의 왕국으로 만들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정치가들을 하나님의 ‘사자(使者, minister)’라고 부릅니다. 즉 정치가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악을 벌하고, 정의를 세워,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대신에 도리어 마귀의 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악을 벌하기보다 오히려 善과 公義를 짓밟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지도자들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나님이 되고자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정치가들의 탐욕과 권력 남용 등은 뒤에서 조종하는 자인 사탄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세상은 더러워졌고, 그러한 현상은 종말을 향하여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 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라는 것이죠.

 

 

③ 이 세상이 멸망하는 세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부패 때문입니다. 3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그리고 11절 이하를 보면, 경제적인 부정 혹은 경제적인 腐敗가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열한 상품 목록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기 넷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요.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사치품들의 유물들로서, 지금 우리가 보아도 대단한 사치품들입니다.

 

먼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12)”에서 금과 은은 스페인에서, 보석의 대부분은 인도에서, 질이 낮은 진주는 홍해에서, 고급 진주는 페르시아 만과 인도에서 수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정상적인 수입 절차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제국의 힘으로 강탈하여 가져온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12)”

 

중에서 세마포는 이집트 스페인 소아시아에서, 자주 옷감은 황실전용으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것이며, 비단은 중국에서, 붉은 옷감은 소아시아에서 가져왔습니다.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12)”

 

중에서 각종 향목은 아프리카와 모로코에서, 각종 상아로 만든 그릇은 시리아, 아프리카, 인도에서, 값진 나무로 만든 그릇은 아프리카와 인도산 흑단목에서, 청동이나 무기 종류는 주로 스페인에서 가져왔습니다.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13)” 중에서 계피는 인도네시아와 중국에서, 향료와 향은 인도에서, 향유는 예멘과 소말리아에서 가져왔습니다.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13)” 중에서 포도주는 시실리와 스페인 소아시아에서, 올리브유는 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 당시 사치품으로 분류되던 곱게 빻은 밀가루는 아프리카 산이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들의 영혼들이라(13)”에서 가축들은 우유 고기 가죽을 위해서 뿐 아니라, 원형극장의 오락용으로 수입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종들과 사람의 영혼”이란 일을 시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원형극장에서 피터지게 싸우다 죽게 하는 용도로 주로 사로잡아 온 다른 나라 포로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플리니’라는 학자가 고대 로마 시대의 사치품 목록을 기록으로 남겼는데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품목과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대부분 약탈물이라는 점이고, 상인들이 이러한 사치품으로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점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본을 독점할수록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이는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고,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집니다. 즉 경제적인 불공평과 부패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가 종말을 향해 갈수록 신자의 사회 경제적인 책임은 더 중요해 집니다. 가진 자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는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께 빚을 진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 빚을 갚아야 하지요. 어떻게 그 빚을 갚아야 합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17,18절을 보면, 입으로만 ‘사랑을 받았느니’, ‘은혜를 입었느니’ 말하지 말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그것을 나타내라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물질을 나누며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향해서 가는 시대 속에서 여러분은 경제적인 실천, 즉 나눔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멸망에 대한 반응

 

오늘 본문은 인류 역사가 이렇게 멸망할 때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첫째 반응은 소위 ‘가진 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정치적인 혹은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그것을 누리던 사람들로서 본문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의 왕들(3)과 땅의 상인들(3)과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17)입니다.

 

첫 두 부류는 앞에서 보았고, 세 번째의 선객은 당시 지중해 문화권에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무역하는 큰 부자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로 치면 무역업자 혹은 유통업자들입니다. 당시 그들은 정치적인 힘과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멸망할 때 제일 안타까워할 사람들은 바로 무엇인가를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이 세상이 멸망할 때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떻습니까? 본문에는 두 가지 단어가 반복되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7).”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9).”

 

“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11).”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15).”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19).”

 

이 본문들에 나오는 첫째 단어인 ‘고통’은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에만 쓰여진 단어로서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고통으로서 허무함과 절망감을 함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애통’은 죽은 자와 사라진 것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찬란함을 갖춘 문화와 업적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차제가 고통이고 슬픔이라는 것이죠. 바벨론 때문에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은 바벨론의 멸망을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영화와 권세를 누리던 왕이 슬퍼하고, 또 장사로 돈을 벌던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십시오. 세상은 그들의 전부였고 그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니 고통하고 애통해할 수밖에 없지요.

 

 

② 두 번째는 인류 역사가 멸망할 때 그것을 지켜보던 성도들의 반응입니다. 20절,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통곡의 시간에 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까? 이것을 옛 성경은 “신원(伸寃)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들의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즐거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순간이기 때문이죠.

 

마지막 심판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순간이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대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때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즐거워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원한을 풀어주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지금은 웃지만 마지막에는 슬피 울며 애통할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고난 속에 있으면서 우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웃는 자들로 인하여 여러분은 괴로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차 그들은 울 것이지만 여러분은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멸망의 날을 바라보며 …

 

말씀을 맺겠습니다.

 

장차 이 세상나라는 완전히 멸망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왜 멸망합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역하고 음행과 사치를 쫓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이 더럽고 부패한 쓰레기 야적장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또한 불의한 일을 기억하십니다. 그대로 돌려주시고 갚으십니다. 그래서 멸망 되는 것이죠.

 

이것이 이 세상 최후의 모습이라면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4절은 18장 전체 메시지의 요약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나와라’, 즉 ‘구별되게 살아서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세상 그대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보십시오. 바닷물은 짜지만, 그 물을 먹고 사는 고기는 짜지 않습니다. 신자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신자가 다를 때 세상 사람들은 신자를 바라볼 것이고, 신자의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에 그대로 파묻혀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멸망하는 날 결코 그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이 들려주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여러분에게 이 음성이 들립니까? 장차 망할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이 있고 없고에 얽매이며,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면 그런 사람은 최후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오직 주님만, 오직 천국만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그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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