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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계시록 설교 모음

요한계시록 22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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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가겠다 /계22:6-21/ 유기성목사

2018-06-27 01:30:46

 

계 22:6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참되다.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에게 곧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자기의 천사들을 보내셨다. 7 '보아라, 내가 곧 오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라."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8 이 모든 것을 듣고 본 사람은 나 요한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듣고 볼 때에, 이것들을 내게 보여 준 그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였더니, 9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아라. 나도, 너와 너의 동료 예언자들과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10 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이 책에 적힌 예언의 말씀을 봉인하지 말아라. 11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12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13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14 생명 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15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16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 17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시오!"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18 나는 이 책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책에 기록한 재앙들을 덧붙이실 것이요,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한 말씀에서 무엇을 없애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한 생명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서 그가 누릴 몫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20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20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이제 요한계시록 마지막 설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인 22장에서는 정말 놀랍고도 가슴 설레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신 다음 주님께서 “곧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7 내가 곧 오리라. :12 내가 곧 가겠다. :20 내가 곧 가겠다.

 

 

지난 금요일,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아직 북한 내부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증거가 없기에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도 있지만 남북 정상회담이 이렇게 진행된 것 자체가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의 재림은 남북정상회담과 비교할 수 없이 놀라운 일이고 너무나도 확실한 일입니다.

천사가 :6에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참되다” 하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에게 곧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자기의 천사들을 보내셨다”

주님의 재림을 믿게 되면 주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은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춤을 추며 즐거워할 일이 될 것입니다. :12에 보니 그 주님은 상을 주려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재림신앙의 핵심은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요한은 ‘보아라, 내가 곧 오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기뻐서 그 말을 전해준 천사에게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다가 천사의 제지를 당했을 정도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천국도 믿고 주님의 재림도 믿는다고 하면서 소망의 기쁨을 가지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어서 ‘천국가고 싶어요. 빨리 죽고 싶어요.’ 하는 것은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자살이 죄라고 믿기에 죽지 못하고 ‘죽여 달라’고 구하는 것은 소망의 교리를 믿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비밀을 봉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0 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이 책에 적힌 예언의 말씀을 봉인하지 말아라."

그래서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어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읽는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계시에서 어떤 부분은 빼거나 어떤 것은 더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귀의 무서운 미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둘로 갈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기에 더욱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과 주님이 오시든 말든 여전히 마음과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1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14에 보면 성도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보혈의 피를 통해 날마다 자기를 정결하게 하며 삽니다. 그러나 :15의 멸망할 자들은 개들처럼 살고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로 삽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갈망하며 살았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증언해주는 초대 교회의 문서가 있습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2세기에 살았던 귀족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진 편지로써 요한의 제자 폴리캅에 의해 쓰여졌다고 전해지는 편지입니다.

[디오그네투스께, 그리스도인은 나라나, 언어나, 의복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도시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나 다른 이방 도시들에 흩어져 살고, 그 도시의 관습에 따라 옷을 입고, 그 도시의 음식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조국에 살면서도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외국인과 같이 모든 권리를 누리지는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지만, 아이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식탁은 공유하지만, 아내를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육신을 입고 있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법에 순종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법을 초월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합니다. 그들은 능욕 받을 때 능욕하는 자를 축복하고, 멸시당할 때 멸시하는 자를 존중합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하는데도 죄인들처럼 벌을 받고, 벌을 받을 때는 생명을 얻는 것 같이 기뻐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공격하고, 헬라인들이 그들을 핍박하지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왜 그들을 미워하는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에 주님의 재림의 환상이 나오지만 언제 오신다는 구체적인 날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전천년설 후천년설과 같은 신학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오직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날짜를 알면 사람들이 마음대로 살다가 주님 오시기 전날 회개하려 할 것입니다.

 

요한은 :17에서 성령과 신부가 주님께 “오십시오” 외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도 함께 "오십시오!" 하고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과 신부의 부름에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20 ...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20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은 요한의 말에 진심으로 “주님 오십시오.”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형편이 너무나 힘들고 심한 박해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여러분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외치게 됩니까?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 임하신다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당황하거나 슬프거나 걱정되거나 두렵지 않겠습니까? 정말 기쁨입니까? 감사입니까?

 

‘주여, 오실 때 미리 알려나주세요.’ 하는 마음은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큰 박해도 죽음의 위협도 없고 그럭저럭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눅 17:26~30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현상에 대해 걱정하셨던 것은 성도가 마치 먹고 마시고, 학교에 가고, 일하고, 집 사고, 차를 사고, 시집 장가를 가려고 태어난 것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하여는 아무생각 없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00년 동안 “곧 가겠다” 고 말씀하시고는 오시지 않으셨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 다시 오겠다” 말씀만 하시고 안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요 14:18에서 보면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19에 그 때,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보지 못하겠고 오직 성도들만 주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분명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재림하실 것이지만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재림신앙은 하늘만 바라보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에 임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살면서 재림하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여기서 미리 맛보는 천상의 예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통하여 재림하실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재림신앙은 주님이 재림하실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외칠 수 있어야 진정한 재림신앙입니다.

그래서 매일 밤 10시에 매일합심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 오시옵소서.” 하고 외칠 믿음이 없다면 성령께 소망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구하기 바랍니다.

 

이번 제주도 세미나 중 봉사자로 온 한 자매가 자기에게 믿음이 없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느냐?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소망의 기쁨이 있느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날 저녁 기도회 때“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구나!”하는 마음에 펑펑 울었습니다. 그 때 김승회 목사님께서 그 자매의 사정을 듣고는 ‘애통함이 곧 성령의 역사’임을 깨우쳐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방에서 자매들이 함께 기도해 주었는데,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소망의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는 종말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십니다. 계시록의 시작도 주님이셨고 마지막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의 은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여러분, 누가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너를 사랑하는가 / 만프레트 지발트

너의 능력이 사라진 후에 누가 너를 사랑하는가? 네가 일할 힘이 없어졌을 때도 너를 사랑하는 이가 있는가? 네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어도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이가 있는가? 네가 가진 지식과 능력과 소유를 먼저 묻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누가 너를 사랑하는가?

네 예쁜 눈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깨끗한 피부를 사람들이 칭찬하고 멋진 외모에 시선이 쏠리지만 너를 진정 사랑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들이 너의 의견을 존중하고 네 주장을 인정하며 네 지식과 논리에 박수를 보내지만 누가 정말 너를 사랑하는가? 너의 멋진 모습 뒤에 감추인 면을 보면서도 그것까지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네게 있는가? 그렇다면 기뻐하게. 나도 함께 기뻐하겠네.

그리고 그 사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그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하나님은 네가 삶의 밑바닥에 있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해 주신다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너를 가슴에 품으셨네. 네가 그를 전혀 알지 못했던 그 때 그의 아들이 네 죄를 다 걸머지고 그 죄 때문에 죽지 않으셨던가? 그는 선물을 주시려고 가난한 아들을 초대하는 아버지가 아니셨던가?

그가 너를 사랑하네.

 

우리를 진정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알게 되면 “어서 오시옵소서.” 외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주님 다시 오실 때, 친밀한 주님으로 만나느냐, 낯선 주님으로 만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동행일기를 쓰게 하는 것입니다. 재림하실 주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것은 목사가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밥을 누가 대신 먹어줄 수 없고, 호흡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듯이, 재림하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만큼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의존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직접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지난 주간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고 있는 나라의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예수 동행일기 세미나를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정부가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게 하니 Walking Worshiper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공원이나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예배하자는 것입니다. 눈물겨운 고백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예수 동행일기에 너무나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Walking Worshiper로 살아갈 믿음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모이지 못해도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든지 모여서 예배할 자유가 있지만, 모여서 예배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걸어 다니면서 예배할 수 있어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성령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주님과 동행할 수도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외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갈망하는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새벽별이라 /계22:16/ 이동원 목사

2015-05-07 16:18:10

 

논 지 :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기까지 인도하시고 상급을 주신다.

 

설교요약

 

1,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을 비치시는 빛이시다.

 

2, 그리스도인들의 복은 성화이다.

 

3,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를 성찰해 나가야 한다.

 

4, 우리는 천국 통치에 동참하게 된다.

 

개역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나 예수는 교회들에 관한 이런 일을 너희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나의 천사를 보내었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또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시니라.(kkjv)

 

I Jesus have sent mine angel to testify unto you these things in the churches. I am the root and the offspring of David, [and] the bright and morning star.

 

예수님은 성경에서 여러번 자기를 계시(啓示)하셨습니다.본문은 예수께서 친히「나는~이다」(I Am)라고 밝히신 마지막 말씀입니다.요한계시록 2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하시더라”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 계시는“나는…광명한 새벽 별이라”

 

(I Am…the bright and morning star)는 선언입니다.“새벽 별”은 어둠을 추방하는 희망의 상징입니다.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둠은 두 가지 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박해와 고난의 어둠 : 주께서는 요한과 박해 받고 있는 초대 교회를 향해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이 말씀은 어둠 속에 있었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둘째/역사의 어둠 :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이 세상과 역사 속의 종말론적인 상황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점점 깊어가는 죄악의 밤! 그 역사 속의 죄악의 밤과 그 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크로즈업(close-up)되어, 한 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 요한계시록입니다.계시록은 역사의 어두운 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또 이 밤을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末世之末을 앞둔 이 마지막 고비를 외줄을 타듯 걸어가고 있습니다.오늘날 세계는 상당한 화해의 분위기에 젖어 있고, 역사에 서광이 비췰 듯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물론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역사는 낙관적인 상태로만 펼쳐지지는 않을 것입니다.평화와 화해에 대한 우리의 큰 기대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더욱 어두워질 것입니다.그러나 이 어두워져 가는 역사 속에서도 희망의 새벽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주께서는 성경 최후의 계시를 닫으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새벽 별>이라는 표현은 성경 계시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별로 낯설지 않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 2:28).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에서도 가장 죄악이 많았던 도시가 이두아디라라는 도시였습니다.

 

깊은 죄악에 빠진 어두운 도성 두아디라! 2장 24절을 보십시오.“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두아디라 도시는 사단의 깊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회의 어둠, 문화의 어둠, 역사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 세대의 어둠을 이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주께서 주셨던 약속 중의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그들에게 있어서 승리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그리스도가 승리의 원천이십니다.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주님 자신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이렇게 시작되었던 요한계시록의 계시는“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그 마지막 장(章)을 닫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새벽 별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먼저 나오는 것은 <다윗의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예언된 그대로 다윗의 뿌리로 오셨습니다.아마도 이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더욱 강조한 표현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로 오셔서 구세주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광명한 새벽 별이셨던 것입니다.그분은 역사 최후의 어두움과 그에 대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이제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질 희망의 새로운 날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첫번째 오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받는 놀라운 희망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 희망은 완성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녁 별이 하루의 끝이라면,새벽 별은 새 날의 시작일 것입니다.이 희망의 계시, 희망의 메시지로 계시록은 닫혀집니다.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역사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증언합니다.그러나 성경은 결코 절망의 책이 아닙니다.

 

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단순히 심판의 날만이 아닙니다.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소망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희망의 새 날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광명한 새벽 별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희망입니까? 이것은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우리의 구원이 완성됨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희망인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장8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그런데 22장 13절에 또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나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14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화(聖化)가 완성되는 날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열망이 있다면, 우리의 인격과 품성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그런데 언제 그렇게 완성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우리가 완전히 성화되는 날입니다.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닮을 수 있는 이 성화 완성의 사건은「영화」(榮化)라고도 합니다.주님을 닮아감으로써 거룩해지는 과정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14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마지막 복, 즉 주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의 거룩함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거룩한 자가 되어 생명나무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고, 그뿐 아니라 문들을 통해서 영원한 성(城)인 우리들의 본향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거룩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그러나 거룩하게 되어지는 성화(聖化)는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갖게 한다는 말씀입니다.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이 나옵니다.

 

첫번째 복은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두번째 복은 14장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自今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세 번째 복은 16장 15절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네번째 복은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다섯번째 복은 20장 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여섯번째 복은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일곱번째 복은 22장 14절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은 무서운 재앙의 메시지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이 담긴 책입니다.계시록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마지막도 복으로 마무리됩니다.그리고 마지막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요한계시록에 복이 전반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숫자는“일곱”입니다.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복을 상징합니다.22장 14절의 마지막 복은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 관한 상징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는 순간에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것이 성화의 시작입니다.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단순한 경건의 노력이나 도덕적인 결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최선의 노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우리의 어떤 도덕적인 결단도 우리를 구원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우리가 거듭날 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씻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구원의 사건은 우리에게 성화의 시작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 메시지 안에서는, 우리의 죄 사함의 사건과 그 이후에 거룩해져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장 5절을 보십시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이것이 구원의 경험이고 성화의 시작입니다.그 다음에 19장 8절을 보십시오.19장은 이제 심판의 날이 다 지나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는 온전히 새로운 옷을 입습니다.이 새로움의 시작은 구원받은 순간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해방된 삶을 시작했습니다.이렇게 우리가 해방된 삶을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주님의 의(義)가 온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그때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의 새로운 옷을 입게 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루마기 빠는 일을 계속해 해야 합니다.여기에서 “두루마기를 빤다”고 하는 것은 한 번만 빤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빠는 것을 의미합니다.“두루마기를(계속해서)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계 22:14).성경에 “너희가 옛 사람을 벗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이것도 계속해서 벗으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도 계속해서 입으라는 말입니다.성화의 과정은 단회적(單回的) 사건이 아닙니다.구원은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은,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말씀을 통해서 그분과 계속 교제할 때 가능합니다.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계속하여 빠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의 과정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됩니다 그때 우리는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얻습니다.그러면 이 성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 성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천성(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그러면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번제단을 거쳐서)로 말미암아 해결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은 후에는 계속적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거룩함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용납되지 아니하고 죄가 허용되지 아니하는 천성에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날에는 내가 온전히 변화되어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죄악과의 갈등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하고 완성된, 생명수로 씻기움을 받은 後에 세마포를 입고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그러기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그날이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2.우리가 상급을 받게 됨

 

주님의 재림은 역사의 심판과 최후의 전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그러나 그날이 우리의 희망인 것은 우리가 상급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간혹 상에 대해서 열정을 잃어버린 분들을 보게 되는데, 아마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또 자녀들을 보십시오.상 받았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빠, 아빠! 나 상 받았어요.미술 대회에서 <최고상>을 탔어요!” 하면서 자랑스런 마음으로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순수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상급을 약속하시며 우리의 거룩한 삶을 격려하십니다.요한계시록 22장 12절을 보십시오“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고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수고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내 수고를 알아 주지 않아서 슬피 우는 외로움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주께서는 다 갚아 주십니다.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수고의 땀을 흘린 사람들은 그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당신을 아십니다.당신의 수고를 기억하십니다.이름 모를 소자(小子)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잔의 친절을 베푼 것까지 잊지 않고 그 보상을 약속하신 주님! 재림의 그 날은 그리스도인이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체상이 아닙니다.개인 각자에게 주는 상입니다.당신의 행위대로 주실 것입니다.구원은 행위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오직 믿음으로만 받습니다.그러나 상급은 행위대로 받습니다.

 

그날에는 상급이 없어서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생각나십니까? 그날에 주님이 우리가 어떤 상급을 받을만한가를 시험해 볼 것이라는 고린도전서 3장 말씀 말입니다.

 

3장 10절을 보십시오.“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그리스도인의 삶은 집을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건축의 터는 예수님이십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12절).

 

예수님을 기초로,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다 구원을 받습니다.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같지 않습니다.구원을 받아 놓고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충성스럽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집짓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다 집을 짓습니다.어떤 사람은 금으로 은으로 보석으로 짓고,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습니다.

 

계속해서 13절 말씀을 보십시오.“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13절).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그 결과를 밝히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밝혀내십니까? 역시 13절입니다.“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功力)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우리 인생의 집에다 불을 질러 보십시오.어느 집이 제일 먼저 타겠습니까?

 

나무, 풀, 짚 등을 재료로 하여 지은 집은 얼마나 잘 타겠습니까? 그러나 금, 은, 보석으로 지어진 집들은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계속 14절 이하를 보십시오.“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14,15절).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 “해”(害)가 어떤 해인지는 정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하여간 해를 받는 것만은 분명합니다.성경이 거기까지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이것에 대해서 상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지나치게 끌고 나가면 카톨릭의 「연옥(煉獄)의 교리」까지 비약될 수도 있습니다.그것은 위험한 해석입니다.솔직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그 말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왜 그렇습니까?

 

지푸라기 같은 혹은 거지 같은 신앙 생활을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공력은 다 불에 타도 그 터만은 남습니다.그 터는 그리스도이십니다.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은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없으면 부끄러울 것입니다.해(害)가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 공력이 불에 타지 않고 드러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상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을 위해서 일했던 우리들에게 주의 상급이 주어지는 그 순간이 꼭 오고야 맙니다.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나를 위해서 했던 그 모든 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드린 그 모든 수고를 내가 안다!”이 상급을 받는 날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두려워진다면 그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받을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참으로 큰일입니다.주께서 상급을 주실 그날에 당신은 어떤 상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상급은 면류관입니다.

 

옛날 왕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최대 영광의 상징은 면류관이었습니다.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충성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면류관! 성경에는 다섯 가지의 면류관이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9장 25절 이하에 나오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과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 20절에 나오는“기쁨의 면류관”과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나오는“생명의 면류관”과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나오는“의의 면류관”,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 2절 이하에 나오는 “영광의 면류관”이 그것입니다.예전에는 부흥 목사님들이 설교하면서, 예수를 시원찮게 믿으면 나중에 “개털 모자”를 쓰게 될 것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만,

 

성경에 개털 모자는 없습니다.하여간 이 다섯 가지 면류관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각기 다른 수고에 대한 상급의 약속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썩지 아니할 면류관 : 절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주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잘 관리하며 철저히 절제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몫인 것입니다.

 

2)기쁨의 면류관 : 영혼을 구원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주님 앞에 서는 날, 너희가 전도했던 사람들이 너희에게 기쁨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전도한 사람들을 천국에서 다 만납니다.우리는 기쁨의 면류관이라는 것을 직접 머리에 쓰게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해도 좋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그날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이 제가 전도한 사람입니다”상상만 해도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그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어떤 영혼이 구원받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려니와, 그 영혼을 천국에서 만나는 기쁨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사실 지금은, 그 사람이 나에게 전도를 받아 구원 받았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사건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도착하는 그날엔 전도 받았던 그들이 “형제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영원토록 절을 할지도 모릅니다.이 기쁨의 면류관을 아십니까? 복음을 전하면 누구나 맛보게 됩니다.

 

3)생명의 면류관 :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박해를 받았으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여 승리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4)의의 면류관 :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8).우리는 믿음으로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그러나 의의 면류관은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을 위한 몫입니다.

 

5)영광의 면류관 :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 무리를 섬긴 사역자들에게 주어집니다.주님을 위해서 수고의 땀과 눈물을 흘리며 오늘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 마지막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왜 기다립니까? 상급의 날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날에 받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사람은 그날이 기다려지겠습니까?

 

부끄럽고 죄송하고 어쩔 줄 몰라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모습 그대로 이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그 상급의 날, 소망의 날을 위하여!

 

3.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저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주님의 공생애 첫번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주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왕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 왕의 통치 능력을 경험합니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왕국이 싸우고 있습니다.이 싸움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날에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그때 사단의 왕국은 완전히 깨지고 부숴지고 멸망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메시야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할 때 누구나 상투적으로 가장 많이 들먹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하나는“정의”입니다.“정의 사회 구현”등은 빠지지 않는 공약입니다.그리고 또 하나는“평화”입니다.

 

“평화를 위해 머슴이 되어 기여하겠다”는 것입니다.정의와 평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표현 중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두 단어는 무엇입니까? 역시 “정의와 평화”입니다.하나님 나라는 정의의 나라요, 평화의 나라입니다.

 

즉,“정의가 온전히 실현된 평화로운 나라”입니다.지금 왜 정치가들마다 정의와 평화를 그렇게 부르짖습니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끼요 문제입니다.“내가 정의 사회를 건설하겠소! 내가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겠소”하고 목청껏 외쳐대지만 공수표입니다.

 

왜냐하면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그러므로 누구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나라가 임하옵시며!

 

”이것은 아직 완전한 정의와 평화를 맛보지 못한 인류의 숙원이요, 몸부림입니다.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찬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요한계시록의 계시 절정에서 약속된 이 메시지를 보십시오.

 

11장 15절입니다.“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때 천사가 선언합니다.드디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온전히 지배하는 세상이 왔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에서는 천년 왕국이 이루어지는 모습들이 예언됩니다. 또 22장에서는 그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조명합니다.5절을 보십시오.“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곳, 우리도 왕 노릇 하며 맘껏 누리는 다시는 밤이 없는 그 나라! 이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보면, 정의와 평화라는 단어가 이 나라의 특성을 얼마나 잘 말해주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입니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평화의 왕자!>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입니다.

 

계속되는 7절을 보십시오.“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이 <평화의 임금> 이 <공평과 정의> 로 그 나라를 보존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평화와 정의, 이 두 가지는 그분과 그 나라의 특성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이사야서 11장 4절 이하를 보면, 이새라는 사람의 가계(家系)를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 땅에서 어떤 사역을 이룰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4,5절).공의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얼마나 잘 상징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계속되는 이사야서 11장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6절).

 

당신 집의 꼬마들이 사자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이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분의 통치를 상징하는 가장 주요한 두 단어는 바로 <공의(정의)와 평화> 입니다.

 

이사야서 65장 17절을 보십시오.“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17절).그분이 창조하실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19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19,20절).죽음이 없는 나라! 저주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사야서 65장 21절 이하를 보십시오.“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21,22절).정의의 나라입니다.

 

내가 땀흘려 수고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남이 가로채서 먹는다면 그곳은 불의와 불공평이 가득한 곳입니다.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불공평 때문일 것입니다.역사도 증명하듯이 사람들은 이 불의에 울면서 정의를 구합니다.

 

한 지도자가 일어나 정의를 부르짖을 때 우리는 그에게 희망을 겁니다.그가 평화를 약속할 때마다 우리는 이 평화의 꿈에 젖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평화와 정의의 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낙관하지는 마십시오.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 땅에 완전한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나라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난무하는 불의와 불공평을 바라보면서, 평화가 짓밟히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성경의 마지막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그날에야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에게 희망의 사건인 것입니다.

 

4.우리가 천국 통치에 동참케 됨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함께 다스리게 됩니다.우리가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국회의원이 되려고 지나치게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물론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인 정치 지도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제시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을 필요로 합니다.그러나 이 놀라운 사실에 주목하십시오.주께서 다시 오셔서 주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 때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그 나라를 함께 통치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5절을 보십시오.“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에서 “저희”는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속에 저와 당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9장 27,28절을 보십시오.27절은 28절의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이런 말입니다.

 

“선생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른 줄 아십니까? 주일에 낚시도 못하고, 저녁 예배까지 참석해야 하고, 전도하는 데 내 시간을 바치고, 봉사에 힘썼습니다”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절) 세상이 새롭게 되는 그 때가 옵니다.그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은 아주 흥미로운 장입니다.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고발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1절부터 보십시오.“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

 

성도들끼리 판단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되지, 그 문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서 서로 헐뜯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그러면서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

 

장차 우리 주님이 최후의 심판관으로 오셔서 역사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 주님을 수종들면서 우리도 함께 세상을 판단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와 이 세상과 온 인류를 심판할 자리에 당당히 앉을 사람들입니다.그런데 그리스도인끼리 사소한 문제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의 법정에 호소해서야 되겠느냐는 책망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주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왕 노릇 할 귀한 존재들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9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11절).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으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당장에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초림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지는 않으셨습니다.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지상을 통치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건설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가 므나의 비유입니다.누가복음 19장12절 이하를 보십시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12,13절).여기에서 <돌아온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나의 왕국을 이룰 때까지 너희는 내가 맡긴 것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라”므나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유사합니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왕이 돌아왔습니다.16,17절을 보겠습니다.“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이 상급이 재미있습니다.

 

한 도시의 시장이 아니라, 열 개 도시의 시장 노릇을 한다는 말입니다.계속되는 말씀입니다.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18-21절).우리가 이 비유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주시는 상급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냥 면류관만 씌워주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이 비유는 그 나라에 이루어질 놀라운 사실에 관한 예시적이며 암시적인 사건입니다.우리는 면류관을 받아 멋있게 쓰고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의 위치에 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천국에 가면 심심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금부터 걱정합니다.그러나 천국은 심심한 나라가 아닙니다.천국에도 정치가 있습니다.그러나 천국에는 세상에서와 같이 권모술수가 판치는 불의한 정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당신은 그 나라에서 참으로 멋진 정치가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통치하는 이 놀라운 꿈, 주님과 함께 시장도 하고 도지사도 하는 삶! 그렇다고 너무 세속적인 욕망으로 변질시키지는 마십시오.우리가 아직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천국은 거룩한 정치가 있는 나라임이 분명합니다.

 

공법(公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 위대한 나라! 불의가 전혀 없는 나라! 탐욕이 조금도 없는 나라! 뇌물이 조금도 없는 정의로운 샬롬의 나라! 이 천국의 비전에 눈을 뜬 사람마다 사도 요한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희망의 사건입니까?

 

첫째는,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상급을 받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징조가 보입니다.그분의 재림 징조는 새로운 세상, 즉 영원한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발걸음 소리입니다.새벽 별이신 주님이! (아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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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이 중요한 이유 /계22:12/ 옥한흠 목사

2015-05-11 22:22:34

 

◑1. 세상에 우리가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해서.. 천국을 사모해야 한다.

 

▲성도가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이 세상은 천국을 가리는 두꺼운 천막이 하늘을 광범위하게 둘러 처져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을 보지 못하고, 오직 세상만 바라보고 평안하게 여긴다.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너무 두렵게 생각한다.

 

이런 생각과 감정은 너무 완고해서, 부수기 어려운 요새와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이 주는 모든 즐거움과 행복을 다 누리기 전에는,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절대 빨리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예수 믿는 분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많다.

천국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면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에 푹 빠진 생각에 갇혀 산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스스로 망하는 길이다.

 

▲세상 부귀영화... 오래 가지 않는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안개와 같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지금 굉장한 것을 손에 쥐고, 만족하고, 좋아하고, 기뻐하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안개와 같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여러분, 10년 전만 생각해 보시라!

10년 전에 내가 성공해서 누리고, 즐기고, 자랑하고, 좋아하던 것들

1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시라,

내 손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뭣이 있는가?

 

10년 전에는 그렇게 좋아서 까무러칠 듯 했던 것,

지금 내 손에 뭣이 남아 있는가?

다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렸다.

 

▲천국을 사모함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혹자는,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을 ‘현실도피’적 신앙으로 오해한다.

염세주의적 삶이라고 여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여러분,

위엣 것, 더 완전한 것, 더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태도는

‘긍정, 전진’이지, ‘도피, 염세’가 아니다.

 

도리어, 악하고 일시적이고 허무한 세상에 집착하는 자들이

(영원 천국의) 도피주의자들이다.

일시적인 것들 뒤에 숨어서, 영원한 것을 고의적으로 보지 않으려하는 자가

도피주의자들 아닌가!

 

세상에 푹 빠져서 헛된 것들에 내 인생을 전부 쏟아붓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2.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천국을 사모해야 한다.

 

저주받은 세상은, 성도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苦海와 같은 곳이다.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들을

우리가 제대로 눈으로 보고 접하며 산다면

한 순간도 웃을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절망하지 않으려면.., 천국을 사모해야 한다.

 

천국을 보면...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

천국을 사모하면...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게 된다.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희망을 가지게 된다.

 

문제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슬프더라도... 심지어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죽음을 앞두고도 웃는 자유

 

어떤 목사님은 일주일에 몇 차례씩이나 투석을 하면서도 목회를 잘 하고 계신다.

여러분, 투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하시는가? 1번에 4시간 걸린다.

 

또 엄청나게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도, 내가 병원에 찾아가 보니,

그는 전혀 투석에, 수술에, 죽음에... 놀라울 정도로 두려움이 없었다.

 

얼굴이 환하고,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몸이 연약한 가운데서도 목회를 하는 행복에 대해, 그는 자세히 말했다.

그리고 자기 삶이 기쁘다고 했다.

 

그렇다. 그는 진정 <천국을 사모>하고 있으니까

고통의 공포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하고 있는 것이다.

 

생사를 가르는 수술을 앞두고도 그 불안에서도... 자유하고 있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3. 선한 일에 헌신하기 위해서... 천국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천국을 소망하고 사모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등진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라.

반대로 <선한 일에 더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모든 죄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답고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셨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믿음을 붙들어 주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이유는

→ 세상에서 살 때, 선한 일을 많이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엡2:1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그냥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서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선한 일들을 열심히 하라고... 구원하신 것이다.

 

▲‘선한 일’이란 무엇인가?

 

-먼저 이 세상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대항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이다.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돕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잘 살게 만들고, 후손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이 사회가 더 발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소명대로 충성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그런데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이런 선한 일을 하는데 더욱 열심을 내게 되어 있다.

주님이 상급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2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천국을 사모하며 선한 일에 자기 평생을 바친다.

 

▲C S 루이스의 말을 들으면 참 공감이 간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 천국을 가장 많이 생각했던 크리스천 들이었다!” ★★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폭정과 사치가 난무했던 로마 제국을 바꾸어 놓은 주역들이 누구인가?

천국을 사모하며 살던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었다.

 

숨이 막힐 듯 했던 중세사회를, 진리로 환하게 비추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삶과 신앙의 의미를 되찾게 해 주었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천국을 사모하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100~150년 전, 악습과 우상숭배의 흑암의 한국 땅에

거기서 고통 받던 백성들을 복음으로 구해내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날마다 “예수 천당!”을 외치며, 천국을 바라보던 믿음의 선배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누가 이 세상을 위해서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인가?

 

→ 평소에 천국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핵심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붙드는 일을 수행한다.)

 

▲C S 루이스는 계속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여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천국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다.

 

교회가 천국을 향하면, (크리스천들이 천국을 사모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으로 향하면,

천국도 잃게 되고, 세상도 잃게 될 것이다.”

 

교회가 배가 불러서, 천국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 <힘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을 잃어버리면, 교회가 타락했다는 증거요,

그 결과 세상도, 천국도 모두 잃게 되어버린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러나 깨어있는 신앙으로 <천국을 사모하면>,

그 결과 천국뿐만 아니라, 세상도 얻게(구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우리 각자 자신을 깊이 돌아보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란다.

 

◑4.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쉼을 얻게 되므로... 천국을 사모해야 한다.

 

군대생활을 하다가 집에 휴가 온 청년이, 자기 방 침대에 누워서 드는 생각,

‘참 우리 집이 정말 편하고 좋다!’ 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천국은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한 곳이다.

그래서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다.

 

♬이 곳과 저곳 멀잖다. 주 예수 건너 오셔서

내 손을 잡고 가는 것, 내 평생 소원 이로다♪. (찬228장 2절)

 

 

▲마치는 말 : 자다가 깰 때가 온다.

 

여러분, 연출가가 무대위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면, 연극은 끝나게 되어있다.

우리 주님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끝난다.

 

그 날이 되면, 세상에 살 동안 천국을 사모하면서

신앙생활 성실히 하던 크리스천인 우리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득 채우게 되기를 바란다.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랍고도 황홀한 그 재림의 때에

우리 모두는 그 흰옷 입은 무리 속에 포함되어

그들과 함께 찬양하는 자리에 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그것은 오늘 내가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에 달려 있다.

세상에 빠져 망하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계22:16-21/ 성경의 마지막 부름 / 한경직 목사

2014-08-26 10:31:18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17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마칩니다. 창세기는 만물의 시작을 말하여 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으로 시작하여 인간의 창조, 죄의 기원, 구원의 역사의 시작 등 온갖 처음 되는 일을 가르쳐 줍니다.

 

반면에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만물의 마지막을 가르쳐 줍니다. 마지막 환난, 마지막 전쟁, 최후의 심판, 현 우주 자체의 최후를 미리 가르쳐 줍니다. 물론 인류의 종말도 포함됩니다.

 

그러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있는 모든 책들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가? 한마디로 죄로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올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십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십니다.

 

온 성경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가득합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하신 열매를 먹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숨기는 인간 타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리지 아니합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아담을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또한 부르신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사람의 죄악이 온 세상에 관영하여 전인류가 홍수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는 비참한 기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7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을 불러내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죄인을 불러 구원하셨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렇게 죄인을 부르십니다.

 

또 이사야 55장에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식량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악인은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 하시리라”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또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는 다음과 같이도 부르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는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을 부르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노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마태복음 11장 28절을 기억하시는 이들이 많을 줄 생각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7장 37절에 있는 주님의 부름도 기억하실 이가 많을 줄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뿐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셔서 또한 죄인을 부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죄인을 부르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는 최후의 부름 곧 성경의 마지막 부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 한 절 가운데 ‘오라’ 하는 말이 세 번이나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여기에 간절한 하나님의 마지막 부름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라고 친히 부르십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 마음 속에 고요히, 그러나 분명히 부르십니다. 때로는 이성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때로는 양심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혹은 인간 생활의 쓰고 단 경험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통하여도 또한 고요히 부르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랑의 음성을 소멸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또 신부가 오라고 부르십니다. 신부는 물론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곳저곳에 높이 솟은 십자가가 죄인을 부릅니다.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종소리가 또한 죄인을 부릅니다. 일찍이 어떤 분이 백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에 본 교회에서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제게 말합디다. 성탄절에 크리스마스 노래를 듣고 회개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 소리, 경건히 드리는 기도의 소리, 또는 설교를 듣고 돌아오는 이들이 많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온 교회가 오라고 부릅니다.

 

또 듣는 자도 오라고 같이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에게 부탁하는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기쁜 부름의 소식을 널리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무릇 목마른 자는 다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원하는 자는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나 부르십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초청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원해야 그 부름을 듣고 원하고 와서 생명수를 마십니다.

 

성령께서도 억지로는 무슨 일을 못합니다. 소를 물가로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물을 마시게는 못합니다. 어린아기도 그렇습니다. 젖꼭지를 아기 입에까지 넣어 줄 수는 있으나 억지로 빨게는 못합니다. 내가 원해야 빱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인을 부르시어 생명수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억지로 마시게는 못합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여 스스로 내가 마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때때로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그 여는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열어야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여러분, 중심에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중심에 은혜를 받을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도 외면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이 마지막 부름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또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비행기로 여행을 하시는 이들은 누구나 당하는 경험입니다. 비행기가 떠날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게 되면 확성기를 통하여 지금 아무 데로 가는 아무 비행기를 탑승할 분은 아무 문으로 나가라고 크게 외칩니다. 이렇게 몇 번 외치다가 마지막 얼마 후에는 다시 그 비행기를 타실 분은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은, 이것은 마지막 부름입니다. This is last call. Last call. 마지막 부름입니다. 외칩니다.

 

이 마지막 부름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요? 이 마지막 부름에도 나가지 아니하면 문은 닫힙니다. 비행기를 놓칩니다. 타지 못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이 마지막 부름을 주의하여 들으셔야 합니다. 주님께 올 수 있는 기회도 그 한계가 있습니다. 오라고 부르실 때에 곧 오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최후에 쓴 편지 곧 디모데후서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 전에 오라”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때에 노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불원간 최후의 날이 자기에게 임할 것을 예감하면서 당시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오라고 재촉합니다. 겨울 전에 오라고 재촉합니다. 왜 겨울 전에 오라고 합니까? 그때에는 겨울에는 배가 다니지 못하던 때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오는 데도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의 이 마지막 부름을 우리는 꼭 들어야 합니다. 겨울 전에 와야 합니다.

 

미국에 이민가서 사는 한 교우가 얼마 전에 편지로 자기의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자기는 몇 해 전에 세례를 받기는 받았지만, 사실 그때에는 자기 죄를 온전히 회개하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감사해서 이 사실을 제게 고백하면서 알린다고 하였습디다. 세례는 물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회개가 없는 세례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오라는 말은 온전히 회개하면서 주를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1장을 읽어 보면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회개는 없이 성전 뜰만 밟는 이들을 책망한 말씀이올시다. 오늘 이러한 이들은 없습니까? 성전 뜰만 밟아서는 아니됩니다. 주님께 참으로 중심으로 오셔야 합니다.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찬송을 부른다고 다 주께 오는 것도 아닙니다. 중심으로 옛것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주님께 오셔야 합니다.

 

1979년도 거의 저물었습니다. 성경의 이 마지막 부름을 놓치지 마십시다. 겨울 전에 오십시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심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나의 영적 주소가 어디입니까? 스스로 살피십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간곡히 부르십니다.

 

슬픔과 고통의 짐을 진 사람은 없습니까? 근심과 염려의 짐을 진 이는 없습니까? 낙심과 절망의 짐을 진 이는 없습니까? 아니,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지금까지도 마음의 불안과 번민 속에서 허덕이는 이는 없습니까? “무릇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주님은 부르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심령이 기갈한 이들도 주께 나오셔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모두 주님께 나와서 새로운 사람이 될 때에 나라도 바로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경의 이 마지막 부름에 응하여 이 모든 무거운 짐은 벗어 버리고, 기쁨과 화평으로 충만하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의 사랑에 넘치는 부르는 음성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들었습니다. 이 성경의 마지막 부름을 경히 듣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하나하나가 이 부름을 듣고 겸손히 모든 것을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주님과 함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풍성한 생명을 우리 모두가 얻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강해(90) /계22:1-5

2011-01-07 15:31:09

 

천국 소망이 넘치는 삶

 

<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마지막 묘사 >

 

드디어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에 도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계속해서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마지막 묘사가 나옵니다. 어떤 묘사입니까?

 

1)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1절)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데 달마다 실과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었습니다(2절).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2) 천국에서는 다시는 저주가 없을 것입니다(3절). 저주가 무엇입니까? 죄로 인한 영혼의 어두운 그림자를 말합니다. 왜 저주가 없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고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살 것입니다(4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원히 속한 사랑 받는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4) 그리고 천국에는 다시는 밤이 없을 것입니다(5절). 21장 23-25절에 이어서 다시 한번 이 사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

 

천국에 관한 묘사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천국의 복된 삶을 생각하면 죽음조차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옛날에 인터넷에 이런 칼럼을 하나 띄웠습니다. 그 제목은 "죽을 각오로 살 각오를 하십시오"라는 칼럼입니다. 죽을 각오로 살 각오를 하면 무엇이 겁날 것이 있겠습니까?

 

살다 보면 어렵고 힘들고 상처 받는 일이 생기지만 그 어려움에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을 이겨내기만 하면 어려움을 당해 본 사람이 당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은혜와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어려운 일을 겁내지 않으면 바로 그때 능력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 죽음을 겁내지 않으면 그 능력은 배가됩니다.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상실이 아니라 소득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냥 천국에 가서 하나님이 주신 상급 받고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죽을 각오로 살 각오를 하고 살면 놀라운 삶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 천국 소망은 심령 부흥을 가져다줍니다 >

 

특히 내 영혼에 부흥의 역사가 있기를 원하면 먼저 천국 소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요즘은 교회들이 부흥회를 잘 안하는 편입니다. 분당에 교회가 참 많아도 부흥회 하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부흥회의 가장 핵심적인 설교 주제는 "예수 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얼굴마다 빛나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했었습니다. 핍박이 많아도 누구도 그것을 핍박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핍박이 있으면 오히려 더 목숨을 걸고 믿었습니다. 남편이 때리고 부모님이 욕을 해도 더 열심히 교회에 나왔습니다. 왜 그렇게 기쁘게 살았습니까? 바로 천국 소망이 넘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천국 소망에서 옵니다. 진짜 은혜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천국 소망에서 나옵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잘하면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목사님들의 설교에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면 그 설교가 은혜가 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고 살면 안됩니다. 보이는 것은 금방 사라지고, 금방 무너집니다. 20세기 최대의 토목공사인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한 동아 건설이 무너지는 것을 보십시오. IMF 전의 30대 그룹 중에 지금도 30대 그룹 안에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요새 LG 카드 흔들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처럼 땅에 있는 것은 다 무너집니다. 물질도, 권력도, 인기도 다 무너집니다. 그 사실을 알고 우리는 오직 천국 소망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없어도 늘 있는 자로 살 수 있고, 약해도 늘 강한 자로 살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의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지는 한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새 무슨 이민 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육과 정치에 염증이 나고 불안해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만 그곳은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외국 생활이 얼마나 외로운 생활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이민의 환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든지 희망을 가지고, 천국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데 가면 뭔가 대단할 것 같지만 특별한 나라, 특별한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 안에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천국 소망이 있으면 어디든지 천국이 됩니다. 그러면 가정도 천국이 되고, 교회도 천국이 되고, 직장도 천국이 될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만 특별한 줄 알고 주님만 붙들고 살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에도 낙원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헬라어로 '유'는 없다라는 뜻이고, '토피아'는 장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 땅에서 사회제도를 바꾸어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유토피아가 온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들이 이제는 다른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회를 유토피아로 만들려고 하면 그때부터 교회생활은 어려워집니다. 이 세상에는 유토피아 가정도 없고, 유토피아 교회도 없고, 유토피아 나라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이 유토피아가 됩니까?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꿈꾸지 말고 천국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섭섭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섭섭한 일을 잘 당할수록 그만큼 하늘의 위로가 크게 준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와 대우는 천국에서 받을 것으로 알고 그저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완전한 행복이 없습니다. 아직까지 진짜 좋은 것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영광은 앞으로 천국 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천국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강해(91) /계22:6-9

2011-01-07 15:30:03

 

말씀을 대하는 자세

 

이제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묘사가 끝나고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말씀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언급을 합니다. 어떤 언급입니까?

 

1) 요한계시록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6절). 2)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주신 것입니다(6절). 3)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7절). 이 본문을 보면서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참되고 신실하다고 하지만,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고 신실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하면서 몇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 확신으로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절대적 가치에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도 진리이고 저것도 진리이다"라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회색지대가 많고 회색인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목마르게 됩니다. 그처럼 절대적 가치에 회의를 느끼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절대적 가치를 더 원합니다.

 

이단이 성행하는 이유는 잘못된 것이지만 절대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당장에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은 느낌을 줍니다. 거짓된 확신이지만 절대적 목소리를 가지고 다가오기에 사람들이 이단에 빠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절대적 확신을 어디에서 얻게 됩니까? 성경 말씀과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 속에서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기준을 언제나 성경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성경이 맞다고 하면 맞는 줄 알고, 성경이 틀리다고 하면 틀린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말씀 중심적으로 살 때 성령의 역사가 가장 잘 나타납니다. 오늘날 말씀 중심적으로 하면 성령 중심적인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말씀과 성령은 절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강조하면 기도를 강조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를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중심적으로 살 때 성령님이 가장 기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대할 때 모든 말씀에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어렵게 들려지는 말씀에도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복음서나 창세기, 로마서 같은 말씀만 볼 것이 아니라 레위기, 욥기, 에스겔, 예레미야, 요한계시록 같은 말씀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힘들게 들려지는 말씀에도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말씀은 수술칼입니다. 때로는 말씀을 들으면서 내 성격이 드러나고, 내 자존심이 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3.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고 말씀이 성도들을 성숙하게 합니다.

 

요새 밥은 주지 않고 일만 시키는 목회자가 있다고 합니다. 전도, 찬양, 경배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다 열심히 하게 합니다. 그런데 밥은 안 줍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그것입니다. 수많은 프로그램이 다 있습니다. 무대는 많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밥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찬양 집회에 가면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20분만 하세요." 물론 그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시간 가까이 찬양과 경배를 하느라 지쳐서 정작 말씀을 먹어야 할 때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입신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행동이라고 해도 자기 행동만 하고 하나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태도가 있다면 문제가 심각할 것입니다. 자기만 말하고 남이 말할 때 딴짓을 하거나 졸면 누가 그를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니까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 나와 있는 천사의 말을 통해 유추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천사와 같이 고귀한 존재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십시오 >

 

이러한 모든 말씀과 환상을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요한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하니까 천사가 황급히 요한을 말리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유대교 전통사상에서 '천사숭배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것을 숭배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돈을 숭배해도 안되고, 외모를 숭배해도 안되고, 자녀를 숭배해도 안되고, 목회자를 숭배해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요새도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심심찮게 고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고사 때마다 돼지 머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고사지낼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돼지 머리의 표정을 웃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이 잘되고 사업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고사에 쓰이는 돼지 머리를 자세히 보면 다 웃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돼지 머리가 웃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언제는 자기를 무참히 죽이고는 다시 자기를 부활시켜 자기 앞에 비는 것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신기하다는 것을 좇아갑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예수 무당, 예수 점쟁이'한테 영혼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 화려한 것, 눈에 보이는 것 좇아 다니지 말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말도 있지만, 나 자신이 나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는 것도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사를 보십시오. 사단 루시퍼처럼 자기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말씀 중심적으로 살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강해(92) /계22:10-15

2011-01-07 15:28:24

 

천국에 들어가는 자

 

<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마십시오 >

 

오늘 본문은 천사의 말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신 결론적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말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인봉하지 말라'는 말은 '그대로 공개하라'는 말입니다. 즉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요한계시록을 많이 읽고 새겨듣고 재림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는 이 요한계시록을 거의 취급하지 않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재미도 없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이단들만 열심히 요한계시록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책을 몇 번 통독했는데 요한계시록만은 읽지 않고 쏙 빼놓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인봉한 책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 일한 대로 갚아주시는 주님 >

 

그리고 11절 말씀에서 "뷸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구절에서는 '그대로'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가 행한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12절에 나오는 주님 말씀도 같은 말씀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했습니까? 불의를 심판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주목적은 각 사람이 그의 일한 대로 상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주님의 기준은 우리의 기준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천국을 믿고, 내세를 믿고, 주님의 갚아주심을 믿고 있다면 겉멋만 추구하지 말고, 무대만 좋아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한 대로 정말 갚아주신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13절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 >

 

그리고 14-15절 말씀에서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와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오지 못합니까? 15절 말씀에 묘사된 자입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여기에 나오는 죄는 사람들이 짓는 죄 중의 대표적인 죄인데, 개들이란 말은 어떤 영어 성경에는 정말 '개들(dogs)'이라고 되어 있고 어떤 영어 성경에는 '무엇인가를 왜곡하고 비트는 사람(perverts)'로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답지 않은 비틀어진 사람' 혹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주인 말만 듣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단들을 말합니다.

 

이단들은 오직 교주 말만 듣습니다. 교주가 "물어!" 하면 뭅니다. 심지어는 "죽어!" 하면 죽습니다. 자기는 충성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충성한 것이 아니고 교주에게 충성한 것이고, 사람에게 충성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교주에게 충성한다고 집 뺏기고, 가정 뺏기고, 자기 삶까지 뺏기고, 나중에는 지옥에 가는 사람으로 제일 첫 번째 언급된 백성이니 이중 삼중으로 비참한 사람들이 됩니다.

 

충성도 잘해야 합니다. 개처럼 충성하면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단에 빠지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폭넓은 사고(perspective)'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남을 말도 듣고, 남의 목사님 말씀도 듣고, 다양한 책도 많이 읽고, 건전한 신학도 상당히 중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일수록 다른 책을 못 보게 하고, "성령! 계시!"라는 말을 잘하면서 신학은 우습게 압니다. 그것은 그들이 정말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들의 눈을 가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개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개들'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은 개들을 무당이나 점쟁이나 창녀나 살인자보다 더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술객들은 마술을 통해 사람을 미혹하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말하고, 행음자들은 창녀나 포르노업자나 제비족과 꽃뱀을 말합니다. 그리고 살인자와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라는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21장 8절에서도 새 예루살렘성을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자들을 말하면서 그냥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거짓말하는 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거짓말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적이고 상습적으로 거짓말하는 자'를 말합니다.

 

살다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짓말 비슷한 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목회자에게도 그런 경우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 속에서 심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도 누가 "괜찮습니까?"라고 물으면 "괜찮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믿음의 말은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갈등이 있는 경우 무슨 말을 못합니까? 그래서 아내가 찾아와서 마음에 한을 쏟아내며 한참 남편 흉을 봅니다. "결혼사기 당했고, 비인격자이고, 자기만 알고, 죽어버렸으면 좋겠고...." 그런데 남편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저보고 뭐라 말합니까?" "결혼사기 당했답니다. 비인격자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합니까? 최대한 지혜롭게 잘 얘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거짓말로 볼 수는 없습니다.

 

< 주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

 

그런데 실질적으로 15절의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나오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기에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자들을 말합니다.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죄가 가려지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감추어진 죄가 드러나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한 곳에서 어떤 분이 제가 쓴 글을 제목은 물론 내용까지 다 그대로 도용해서 올려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람에게 알려지면 얼마나 수치스런 일입니까? 미국에서는 그렇게 해서 회사에서 쫓겨나고 목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만 비난을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그런 수치스런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고, 영원하신 기억력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한 가지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한 수치감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죄를 씻어주시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과 우리의 회개 고백이 없었다면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는 지옥의 뜨거운 불보다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할 때 주님의 보혈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지 모릅니다. 저도 어제 이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주님의 보혈을 생각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보혈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다시는 그와 같은 상습적으로 짓는 범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한 주님의 보혈의 증거자가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천국 시민으로서 합당한 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강해(93) /계22:16-21

2011-01-07 15:26:11

 

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드디어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3가지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교회의 중요성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들을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고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고, 또한 "교회들을 위해서 내 사자들을 보냈다"는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 구절에서 '신부'는 누구를 말할까요? 역시 교회를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초점이 '교회에 다니는 성도의 구원과 위로와 소망'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영혼을 살리고,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제일 이유는 구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는 힘써 구제도 해야 하지만 교회는 본질적으로 구제 기관은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사귀는 친교기관도 아닙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친교기관으로 알고 자신을 알아달라는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남을 먼저 알아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교회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깨달았느냐, 무엇을 들었느냐?"보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중심적인 삶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입니다.

 

2. 말씀의 중요성

 

본문 18-19절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아주 강한 어조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요한계시록 말씀에서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누가 말씀을 더합니까? 이단들이 "계시받았다! 어떻다!"고 하면서 말씀을 더합니다. 누가 말씀을 뺍니까?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다 상징이다!"고 하면서 말씀을 뺍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얼마나 복된 자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직전에 꼭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듣는 귀'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듣는 귀'가 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듣는 귀'가 없으면 사람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말씀이 끊어지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받기를 원하시면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에는 반드시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질 때는 큰 축복이 이르기 직전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복된 삶을 원하면 우리의 중요한 기도제목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저의 마음이 열린 마음이 되게 하시고, 저의 귀가 듣는 귀가 되게 하소서!"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보이고, 설교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릴 때 신비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시작될 것입니다.

 

3. 믿음의 인내와 기다림의 중요성

 

본문 20절 말씀에서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도 요한이 화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여기에서 '속히'라는 말은 '곧(soon)'라는 말도 있지만 '진짜로(indeed)'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삶 중의 하나도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춘향전이 말하는 핵심 내용은 '기다림은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핵심 내용도 '기다림은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씀이 약 450번 예언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그리고 신구약에는 예수님의 재림예언이 초림예언보다 훨씬 많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도령도 약속을 지키고 왔는데 주님께서 오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다시 만나 큰 위로를 받을 날을 기다리며 사는 삶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결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나치 수용소에 있었던 유명한 빅터 프랭클은 말했습니다. "수용소에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절망하고 낙망하는 사람들은 빨리 죽었지만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기다리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있었기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삶에 참된 신앙의 맛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나실 때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아이를 품에 안고 감격하며서 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를 제게 보여주시는군요.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비전을 위해 살면서 최선을 다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는 지금 제 2의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넉넉해지고, 사랑과 용서가 생기고, 기도제목도 응답되고, 우리의 비전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조금 더 인내하며 기다리며 등과 기름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신부로서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켜 주님 만나 뵈올 때 기쁨으로 만나 뵈옵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admin

 

댁쟾쇰줈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계21:1-22:5 /계21:1-7/ 유기성목사

2018-06-27 01:11:02

 

 

이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계 22장도 너무나 귀한 은혜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절정은 계 21장입니다. 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30분 설교로 어떻게 천국의 은혜와 영광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엉뚱한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설교하지 않고 성령께서 1분만 우리 모두를 천국에 데려가 보여주시고 돌아오게 하시면 효과만점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임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모든 교인들이 집에 가려고 하지 않고, “주여, 조금 전에 본 천국으로 지금 당장 데려가 주세요.”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으로 천국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분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 하니, 천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었는데 한 마디로 황홀한 성이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18-21을 보면 온 성이 보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보석이라 해석도 하기 힘들어 “이 보석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했더니 “이 세상 어느 왕궁보다 아름답고 영광스럽다.”라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소 아시아의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실상이 무엇인지를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는 교회는 실망스럽고 타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 성의 진정한 영광은 무엇일까요? 보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3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요한이 보니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2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해나 달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눈물을 흘리는데, 누가 눈물을 닦아 주기에 눈을 들어보니 하나님이셨습니다. 천국은 이런 곳입니다.

그러니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있을 리가 없고,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가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만드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면 주 예수님이십니다.

:5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그 말씀을 여기서 다시 하십니다.

:6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여러분은 이런 천국이 있으며, 이 땅에 임할 것을 믿으십니까?

아마 대부분 믿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음을 믿으니 삶이 달라지셨습니까?”

이 질문에는 대답하기 힘든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천국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낙심합니까? 왜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합니까? 왜 그렇게 돈에, 이익에 집착합니까? 명예욕,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믿으면서도 고난도, 슬픔도, 억울함도, 미움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 평소에는 천국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이 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때, 잠깐 생각납니다. 천국에 가셨겠지 하며 조금 위로를 받습니다. 순간에 심각해집니다. ‘나는 정말 잘 살고 있는가?’ 그러다가 다시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서울 용미리와 벽제 납골당에 필기대가 있답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유족들의 애틋한 편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편지의 일부가 [눈물의 편지]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평소에 사랑하지 못했던 후회가 절절히 묻어 있습니다.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것을 부인하고 또 부인하면서 당신을 부르다가 어느새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정말 외롭고 힘들 때 당신이 남긴 목소리를 들으며 펑펑 울어보지만, 나 아직도 시원하게 울어보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목 놓고 울어보고 싶어요. 여보, 나 직장에 나가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잘 참아내고 있어요. 일하다가도 당신이 직장 다닐 때 힘든 것 왜 이해해주지 못했나, 천장을 쳐다보고 눈물을 참곤 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살 테니, 걱정마세요.”

 

“당신에 대한 미움 같은 것 이제는 다 없어졌어요. 당신 미워했던 것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에요.”

“당신이 떠나기 전 2개월, 내가 당신에게 했던 모진 말들 때문에 내 마음은 병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는 마음속 깊이 당신을 사랑했어요.”

천국에서 당신 볼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아이들만 다 결혼시키면 당신 곁으로 가고 싶네요.󰡓 (아내 윤춘미)

“여보, 요즘 들어 동우는 엄마를 더 찾는구료.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라서 그런가보오. 선미는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편인데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은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 같아. 여보, 당신의 존재의미가 이렇게 큰 줄은 미처 몰랐소.”

“여보, 나 죽으면 당신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 거야, 정말 미안해.”

 

“지훈아, 정말 미안하다. 너의 생전에 따뜻하게 못해준 것이 못내 가슴에 걸리는구나. 네가 한 말, 아버지처럼 안 살겠다던 너의 그 말, 영영 지워지지 않는구나.”

“아빠, 내가 정말로 아빠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뭔 줄 알아. 아빠를 정말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더 미안해요, 한 번도 이런 말 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내드려서 너무 미안해요. 아빠, 가끔 집에 와. 한번만 딱 아빠 품에 안겨보고 싶어.󰡓 (딸 이승미)

 

왜 죽을 때 가서야 이처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보이고, 중요한 일이 생각나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지금 죽음도 영생도 천국도 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시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믿는 성도의 세상사는 모습입니다.

어떤 시련이나 유혹, 핍박이 있어도 담대하고 기쁘게 천국을 향한 길로 나아갑니다.

현실이 힘들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때도 있지만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가서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 마음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새 삶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까?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새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정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까요? 정말 천국은 있을까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신의 영혼 안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저는 잘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간절할 뿐 늘 같은 죄,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서 회개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좌절했습니다. 저 자신이 미워지고 용서가 안 될 때도 많았습니다. 똑같은 일들이 어제도 오늘도 반복이 되어 제겐 변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자격이 없으면 강단에서 내려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몇 번이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 삶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알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죽으라.” 말씀하셨을 때,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다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저 자신에 대한 절망 때문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 복음으로 들려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 안에 새 생명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7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캐나다의 유명한 피플스 쳐치의 담임목사였던 O. J. 스미스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단히 두렵고도 엄숙한 5가지 사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마지막 심판 때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구원받으리라 여겨졌던 사람들 중에도 멸망당할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죽은 뒤에는 구원받을 기회가 다시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섯째, 지금이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에 새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까?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까?

마음이 메말라, 말도 행동도 굳어있지는 않습니까? 변화가 싫어지고 아무생각 없이 세상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 살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살면 큰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계 21장 새 하늘과 새 땅은 여러분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가서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안에서 매순간 새로워지고 다시 시작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것은 죄지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결함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10번 실패하면 주님은 11번 일으키시고, 100번 실패하면 주님은 101번 다시 시작하게 해주십니다.

 

전에는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한탄하였는데,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매일 매일이 기대가 됩니다.

 

지난 금요일 (4월 20일) 영성일기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 주님과 하루를 살 것을 생각하니 기쁘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기대가 됩니다.”

 

계 22장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중심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12종류의 과실나무가 있는 풍요로운 곳이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우리는 결코 세상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생명수의 강이 우리에게서 흘러나가 사람들과 교회들과 사회가 치유되고 열매 맺는 역사가 일어나야 천국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한 정보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부된 자임을 깨우쳐 주시고 신랑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는 성경입니다.

매주일 요한계시록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받은 은혜 역시 더욱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더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전히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막연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보았고 설교도 들었고 간증도 들었지만 믿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면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눈으로만 성경을 읽지 말고 제 영혼의 눈이 뜨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새로운 삶의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변화의 역사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찬양 주께 가오니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admin

 

댁쟾쇰줈

 

 

 

장례식 설교(6편)/ 새 하늘과 새 땅 /계21:1-7/

2016-05-16 11:29:10

 

사람은 누구나 헌 것보다는 새 것을 좋아합니다. 옷을 입어도 새 옷을 입고 싶어하고, 음식을 먹어도 새로 차린 음식을 먹고 싶어합니다. 또 가구나 집, 자동차도 중고품보다는 새 것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제 읽은 말씀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졋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즉 너무나 영광스럽고 거룩한 것으로 변화되었기에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바다가 다시 잇지 않다고 했을까요? 히브리 사람들은 바다라함은 건너갈 수 없는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는 나눔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바다는 파도가 흉융하게 치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슬픔의 상징이요 고통의 상징인 것입니다.

 

고인이 가신 천국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고통, 슬픔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눈물이, 즉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죽는 것이 없습니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아픈 것, 즉 질병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밤과 죄와 저주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불행은 바로 이 저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이불행의 근원이 제거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2.절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에는 누가 살까요? 그 곳은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 즉 우리 성도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성경은 ‘그 에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그곳의 아름다움을 표현햇습니다. 다시말하면 천국이 마치 신랑을 위해서 단장하고 예비한 신부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고,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 천국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3절. 하나님이 그 곳에서 우리와 함꼐 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악의 근원이 되는 사탄 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입니까?

 

이 말씀은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곳은 만물이 새롭게 변화되는 곳입니다. 새로워집니다. 그곳에는 갈증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목마를 때 생수를 마시면 시원해지듯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갈증들을 시원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사망이나 통곡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고인이 계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것만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잠시 잠깐이면 없어질 슬픔과 괴로움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위로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겨주시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우리를 단장시켜 주시고 주님을 바라보며 저와 여러분도 고인과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 승리자의 반열에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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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치 /히11:13-16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당할 때마다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인도의 어느 산간에서 수도하고 있는 성자에게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어린아이를 끌어 안고 이 성자에게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성자가 보니 이 어린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성자가 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으나, 그 대신 저 동네에 내려가서 겨자씨 하나를 구하여 오십시오. 그런데 그 겨자씨는 지금까지 죽음의 고통을 한번도 겪지 않은 집에서 구해 와야만 합니다.” 물론 그 부인은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자는 다시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죽음의 비애를 겪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고요히 맞이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아무리 길다 하여도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 조명하여 볼 때 안개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생이 영원히 지속될 것같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삶이 어느 날 반드시 중단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삶의 태도는 현저히 달라질 것입니다.

 

한 로마의 황제는 인생을 엄숙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그의 신하가 매일 아침 문안을 할 때마다 “폐하시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명하였답니다. 그는 이 신하의 인사를 통하여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삶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성도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며, 앞서간 성도들과 만나는 일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광의 교량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인생을 성찰할 때, 인간은 결국 나그네의 삶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본문은 “이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은 한번 결단한 믿음을 죽기까지 계속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죽기 이전까지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을 결산하는 가장 엄숙한 순간입니다. 믿음의 생활이 없이 믿음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열조들은 소망을 영원한 천국에 두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갔습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보고, 환영하며, 증거하엿음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의미있는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려면 이 세 가지 단어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볼 수 없는 천국을 믿음의 눈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들의 삶이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영하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메시지와 약속의 주님인 그리스도를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였습니다. 영원한 빛 아래서 발견한 놀라운 삶을 증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그네 생활은 어떻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멀리 볼 수 있는 커다란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보는데 따라서 그 삶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줄 알아야 우리가 산다. 미리미리 보아야 한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그리고 이 믿음을 소유하려면 멀리 있는 것을 붙잡아 들이는 커다란 팔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위해서는 멀리 있는 것을 소유한 감격을 증거하는 입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그네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까? 본향을 확인하며 삽니다.

 

아브라함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그의 고향에는 넓은 땅과 가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고생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본향이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딸인 김혜령 성도는 이 땅에서 길지 않은 생을 살았습니다.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남편의 지극한 간호도 외면했고, 부모님의 정성도 다 허사가 된 것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못다한 일들이 많고, 너무나 안타까운 젊은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계십니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읍시다. 그래서 본향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께서 강건하게 하시며, 위로하시며, 함께 하심의 은혜가 넘쳐 나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고 김혜령 성도를 떠나 보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유족들을 돌아보시사 하늘의 위로와 은혜를 덧입혀 주시옵소서. 특히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소망을 안겨 주신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우리가 고인을 다시 만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위로받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절망 중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신뢰의 마음을 주옵시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옵는 것은 육신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이들과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 위에 자비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로우신 뜻에 합당하게 하셔서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시어서 거룩한 주의 전에서 주님께 감사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힘과 생각을 북돋아 주셔서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복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자비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전케 하시는 주님!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하시며, 소망가운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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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의 길 /요14:1-6

 

 

우리 인생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 중에 가장 확실한 진리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불확실한 한 평생의 고독한 길을 죽음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길은 두 갈래의 길입니다. 한 사람은 죽음을 향하야, 한 사람은 생명을 향하여, 한 사람은 낮은 곳을 향하여, 한 사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바른 길과 굽은 길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굽은 길을 잘못 들어서서 한평생 헤매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이 길이다 하고 찾았는데 세월이 다 갔습니다. 이렇듯 유감스럽게 한평생을 끝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또 험한길, 평탄한 길이 있습니다.

 

똑같은 생을 사는 것 같으나 밝게, 평탄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하게, 험악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행이 없이 사는 사람이 있고, 동행이 있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늘 외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친구를 가지고, 모든 사람과 깊이 사귀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지막 목표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은 이것이다. 확실하게 마지막을 보장받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몇 시간 전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유훈과 같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길을 가십니다.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나 분명히 생명의 길입니다. 친히 말씀하시면서 친히 먼저 가시고 계십니다. 주께서 먼저 가셨기에 이 길은 열린 길입니다. 좁은 길이지만 막힌 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이지만 죽음의 길이 아닙니다. 먼저 가셨으니 열린 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인생은 셋으로 엄격히 구분이 됩니다. 하나는 생리학적 인생입니다. 육체는 분명히 흙입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흙에서 나서 영혼이 함께하는 동안 흙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살다가, 죽어 영이 떠나가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둘째는 철학적 생명입니다. 의식세계입니다.

 

역시 사람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만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영적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면 무섭고 모든 것이 저주요, 심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이 근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몸은 살았으나 영이 죽었을때에는 죽은 것이라고. 그러나 몸은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 죽어서 영이 살았을 때에 성경은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것입니다. 잠시 쉬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생명은 영적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살았을 때에 정신적 생명이 삽니다. 정신적 생명이 완전하게 살아나 있을 때에 사실은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대답하십니다. 나는 생명이다. 내가 생명의 본질이다 하십니다.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뿐만아니라 생명의 길을 가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밀알 한 알이 썩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면서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이 여기 잇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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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다는 말 (고후 4:16 ~ 고후 5:7)

 

우리 믿는 사람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의 속사람, 그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뭉입니다. 사도바울은 날로 후패해지는 육신 가운데서도 날로 새로워 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먼저 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생명을 연상케 합니다. 산 것은 언제나 새로워 집니다. 산 나무에 새잎이 돋아납니다. 산 풀에 새싹이 납니다. 산 꽃이 더 이름답습니다. 죽은 것이 새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려면 먼저 죄와 허물의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둘째로 새롭다는 말은 아침을 연상합니다. 아침에는 만물이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아침 햇빛이 비취는 까닭입니다. 주님이 빛이 우리에게 비췰 때 우리의 심령은 새로워집니다.

 

셋째로 이 새롭다는 말은 샘물을 연상케 합니다. 더운 여름 사막길을 걷던 나그네가 길가의 오아시스를 만나 그 맑은 샘물을 마시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원기를 회복합니다. 수사성 여인-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넷째로 새로워진다는 말은 안식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지칠 때 평안히 쉬어야 육체가 새롭습니다. 피곤한 몸이 하룻 저녁 푹 자면 그 이튿날 아침 새로운 건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스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개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다섯째로 믿음 있는 사람은 겉사람이 후패할수록 그 반비례로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연약해지면 인간의 모든 욕심이 사라지게 된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니 자연히 남을 용서하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하늘의 신령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겉사람은 육체가 아주 무너질 때면 새로워진 그 심령은 옛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같은 사람을 보면 그가 밧모섬에 유배가 되어 홀로 굴 속에 앉았을 때 그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어 후패하였지만 그의 속사람은 아주 새로워졌습니다. 그의 신령한 눈은 아주 밝아져서 영원한 장래를 미리 볼 수 있었고 지극히 높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령한 귀는 아주 밝아져서 천군 천사들의 노래와 구원받은 수없이 많은 성도들의 화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보는데 따라서 그 삶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줄 알아야 우리가 산다. 미리미리 보아야 한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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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 (히 11:13~16)

 

 

옛날 궁중에서 왕을 즐겁게 하고 때로 왕이 잘못했을 때 풍자적인 놀이로 왕의 잘못을 깨우치게 했던 직업 가운데 광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광대의 바보같은 익살을 보고 임금님께서 당신의 지팡이를 건네주며

 

“너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임금님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유언을 하며 “이제 나는 돌아노지 못할 길을 떠난다”고 말을 하자 광대가 앞으로 나서며, “폐하, 폐하께서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실 때 꼭 사신을 보내 준비토록 하셨는데 이번 여행도 충분히 준비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왕은 준비를 못했노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광대는 가장 바보같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던 그 지팡이를 임금님께 건네 주며 “폐하, 나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받으시지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구태여 성경이 아니더라도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고향이 있으니까 돌아갔겠지요. 때로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목적지가 잇으니까 떠난 것이요, 출발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본향을 알고 계십니까?

 

인간에겐 귀향 욕구, 즉 고향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란게 있습니다. 이민 간 사람들 중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이란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조상의 얼과 뼈가 묻혀있는 자기의 고향, 내 나라 내 조국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순전히 엉뚱한 고향을 찾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허무한 고향을 찾는 사림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향해 출발한 신령한 귀성객입니다. 즉 하늘 본향을 향해 가는 순레객들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신앙의 길은 피로 얼룩진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어느 가수는 노래하길 인생은 하숙생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 나그네의 길이 죽음과 멸망의 길이냐, 아니면 영생과 천국의 길이냐?가 다를 따름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왔습니까? 이 땅에 태어난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유프라데스 강 유역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잇었습니다. 하나님. 아브라함

 

순례의 길- 이 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믿음은 곧 천성을 향해 행진하는 것을 의미.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너무 큰 미련을 둔다면 그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다리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갈 따름이지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서 얻은 명성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예는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만이 나그네를 구원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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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 (왕하 2:1~3)

 

 

우리가 인생이란 말을 할 때 출생, 결혼,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말합니다. 출생이나 죽음 어느 하나도 인생에서 제외 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아도 어느 때는 희극을 보고, 어느 때는 비극을 봅니다. 실패한 인생과 성공한 인생을 봅니다. 그리고 비극은 비극대로 가치를 말하고, 희극은 희극대로 가치를 말합니다. 실패한 인생도 절대로 뜻없는 인생으로 매도할 수 없습니다. 실패한 비극 영화를 볼 때 더욱 큰 인생의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실패한 자만이 느끼고 깨닫는 인생의 순결과 가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어떻게 살았던지 그의 출생과 죽음을 인생이라는 축복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삶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축복의 사건입니다. 출생과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삶 그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죽음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세상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진시왕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려고 불로장생초를 구했지만 허사였습니다.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죽음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저주의 수단을 은총의 수단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을 보면 진실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원수를 오히려 용서하는 기도를 합니다.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또한 다윗은 아들에게 힘써 대장부기 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실한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명이 후손을 통하여 이루어지되 진실하게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생명의 연속선 상에서 메시야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인간편에서 볼 때 죽음은 모든 것을 무로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업적, 모든 부귀영화, 그 모든 것을 다 박탈합니다. 인생은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죽음을 무찌르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원한 무덤도 아니며, 인생의 종착역도 아닙니다. 영생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대장부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행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인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가족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이 귀한 신앙의 유업을 이어가며 주의 일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 우리도 종착역에 도착할 날이 옵니다. 그때에는 고인과 같이 빈 몸이 아니라 그 속에 성령의 기름을 가득 채워 세상의 빛으로 예수님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유족 여러분!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이 영생의 믿음으로 고인을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드립시다. 조객 여러분! 이 희망으로 유족을 위로하며, 고인을 하나님께 보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고인의 죽음은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사건 속에 합류되는 삶의 사건이라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고 000 은 이 땅에서의 세를 지내시다 주님을 만나 그의 영혼에는 천국의 기쁨이 넘쳤고,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은혜와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힘입어 잠자는 것같이 평안하게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우리도 이땅에 살면서 부활 신앙과 영생을 맛보며 살게 하시고, 저 천국을 향하여 힘있게 행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유족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믿음과 지혜를 주시며,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말한 힘써 대장부가 되고, 진실한 인간이 되며,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모든 삶이 형통하는 축복을 베풀어 주옵소서. 형제간에 우애가 있게 하시며, 홀로 남으신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아버지의 아름다운 그 신앙의 유업들이 이 자녀손들을 통하여 이어지게 하옵소서. 또한 사랑하는 이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하옵시며, 이 나라의 보배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땅 위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햇빛 밑에서 자라난 곡식을 먹는 동안에 하나님을 잘섬기는 자 되게 하시고, 선한 일에 땀을 흘리는 일꾼이 되게 은혜를 주옵소서. 오늘의 모든 장례 절차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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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마지막 날 부활에는(요11:24-27) 찬송:228, 545

 

1. 부활을 보여주신 예수님

 

오늘 화장예배 앞에 머리 숙인 우리는 다시 한 번 인생의 결과에 대해 예측해 보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한 가정의 슬픔과 영원한 세계를 향한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과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모 없이 3남매가 힘겹게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사로는 병이 들었습니다.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슬픔 가운데 두 자매가 생각해낸 것이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을 지체하셨고, 그동안 나사로는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가정과 동네 사람들은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늦은 시간에 마리아의 가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썩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얼마나 야속한 눈물입니까? 조금만 빨리 오셔도 충분히 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왜 이렇게도 짜증스러울까요?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썩어진 육신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놀랍게도 나사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미 죽은 시신입니다. 이미 부패된 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실체’를 확증시켜 주기를 원했고,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2.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는 상관없이 고인의 시신은 몇 줌의 잿더미로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소망 가운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의 죽음 몸을 다시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주님이 잿더미가 된 고인의 시신을 죽음의 늪에서 나오게 하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저항할 수 없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연합되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물론 불완전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현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주님에 대한 신앙은 저버린 채 마지막 날의 부활에만 국한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다시 한 번 마지막 날의 부활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고인을 부활체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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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관한 최후의 말씀 /계21:1-/ 유진 피터슨

2015-06-20 20:07:14

 

◑새하늘과 새땅 - 하늘과 땅의 통합

 

성경의 시작인 창1:1은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로 시작한다.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 21:1에는 새하늘과 새땅의 선포로 마친다.

 

‘하늘’은 - 초월적/영적/신비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땅’은 - 반대로 실제적/물질적/현실적 요소를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고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이미지를 구사하는 목적은

- 기독교 신앙이 ‘하늘’과 ‘땅’의 두 요소가 함께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 극단에 빠지지 말고, ‘하늘’과 ‘땅’이 둘 다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하늘’(내세주의, 탈세속주의)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신앙이 ‘땅’(현실주의, 실재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두 요소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하나님’이란 존재도, 하늘과 땅의 두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먼 곳 하늘에 계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땅에도 계신다.

신앙은 초월적/신비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실재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

 

사도 요한이 ‘새하늘과 새땅’이란 묵시적 표현을 도입한 이유가

그런 신앙의 양면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편집자의 이해에 따르면)

 

일례로, 우리의 부활도 ‘영적 부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육의 부활’도 함께 일어난다.

올바른 신앙은 영적/물질적 두 영역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주기도문도 이 두 요소를 동시에 포함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늘과 땅’ 다 포함

일용할 양식, 이웃의 죄를 용서,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하늘과 땅’ 둘 다 포함

 

참된 신앙은, 장차 우리가 죽어서 가는 <미래천국>적인 요소도 있지만,

이 땅에서, 우리 삶의 현실에서 이루어질 <현재천국>적 요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을 버리고 ‘영’만 쫓는 기독교 신앙도 잘못이며,

‘영적’인 것을 도외시한 채 ‘현실적/물질적’인 것만 몰두하는 신앙도 잘못이다.

(혹자는 둘 다 균형 있게 추구하되, 그 우선순위는 엄연히 ‘영적’인 것에 둔다.)

 

참된 신앙은, 현실도피도 아니다... ‘현실의 완성’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몽상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예루살렘 - 천국은 ‘전원’이 아니라 ‘도시’다.

 

여러분, 보통 종교나 소설에 그려지는 천국의 이미지는... 전원생활의 낙원 풍이다.

조용하고, 푸른 풀밭에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사람들은 그런 천국을 바란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천국의 중심인 ‘새예루살렘’을 ‘도시city’로 그리고 있다.

그것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루살렘 도시’말이다.

 

도시의 이미지가 무엇인가?

복잡한 시장, 사람들이 웅성거림, 온갖 계층이 활발하게 왕래하는 거리 등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 요한이 은유적(묵시문학적)으로 설명하는 천국의 이미지는

<미래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도시 생활에 맥이 빠지고 진절머리 낸다.

그런데 천국이 ‘도시’라니? 실망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새예루살렘 도시’이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겠다. 새new것이란 뜻이다.

 

<과거주의>적 관점의 해석에 의하면,

미래의 천국에 가기 전에,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들고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 땅위에 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전히 이 땅에 이뤄지게 한다는 뜻과 같다고 본다.

 

▲바벨론과 새예루살렘의 비교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다. 계18:2

사도요한은, 계시록의 후반부에서 ‘두 도시’를 설명하고 있는데,

도시 바벨론은 마땅히 무너져야 할 세속적 도시이며

도시 예루살렘은 새롭게 세워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파괴하고 새로 세워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성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도시 ‘예루살렘’의 이미지

혹자는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이미지이다.

유다왕국 말기에 온갖 우상숭배, 배신, 음행, 이방의 침공으로 망한 도시이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역사를 보더라도 ‘도시’의 이미지는 ‘죄악의 온상’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으며,

니느웨, 두로, 사마리아, 타락한 예루살렘 등

언제나 사람이 모여드는 곳은... 죄악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하게 되어있다.

 

사도요한은 그런 ‘부정적 이미지의 도시’를 들고 나온다.

그것을 ‘새 도시, 새예루살렘’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탕자를 내버리고 새 아들 낳아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탕자 같은 사람을 고쳐서 새 아들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런 뉘앙스는 ‘12문과 12기초석’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데...

 

 

◑새예루살렘의 12기초석과 12문

 

12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각기 새겨져 있고,

12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씌여져 있다.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12지파의 이름들이라 21:12

여러분, 12지파인 야곱의 12아들들은 얼마나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었는가?

특별히 그런 사람들을 이름을 <천국에 들어가는 입구>에 기록한 것은

회개한 자들은 새예루살렘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 성에 성곽은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12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21:14

12사도를 생각해 볼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경에 별로 기록이 안 나온다. 별로 많은 활약이 없었던 것을 보인다.

(나중에 다들 순교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 엄청난 성도들이 순교했다.)

 

그들이 새예루살렘에 중요한 기초석(주춧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현실이 아니고, 묵시적/은유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좀 지나치거나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사도요한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별 볼 일 없었던 9명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그것도 중요한 기초석(주춧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큰 희망을 준다.

 

죄악으로 점철된 예루살렘 도시도 새롭게 고쳐서 쓰시고,

허물투성이 야곱이 12아들들도 고쳐서 새롭게 만들어 쓰시고,

별 볼일 없는 12제자들도 고쳐서 새롭게 고쳐서 쓰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역사상 모든 것이 복구 가능>한 곳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 유진 피터슨 박사는 이렇게 요한의 묵시적 은유를 풀어내고 있다.

 

*새예루살렘의 헬라어 '새new'가 옛 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새예루살렘의 크기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1만2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144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21:16~17

 

해석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매우 크다>는 뜻에는 동일하다.

새예루살렘의 거룩성, 영광은,

그 주변의 신성모독적, 세속적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영화롭다는 뜻이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

성도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고 있는 중이다. 고후3:18

 

사도 요한은, 서두에 계2~3장에서 ‘땅’의 일곱 도시(교회)들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마지막에 계21~22장에서 ‘하늘’의 도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 ‘땅’에서는 말할 수 없이 곤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하늘’에서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유진 피터슨 박사는 철저히 과거주의/묵시문학적(상징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오던

‘미래 천국과 새하늘과 새땅’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해석상 논란이 예상된다.

물론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해서, 미래 천국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는 개인적으로 과거주의+미래주의, 상징적+문자적 해석을

둘 다 함께 수용한다.)

 

 

 

 

잃어버린 진리, 중생 /계21:3/ 폴 워셔

2015-06-18 20:12:54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창조사역인 “거듭남” 교리를

단 5분밖에 걸리지 않는 4영리식 영접기도와 바꿔버렸습니다.

 

요1:12절의 영접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나를 사형수로 여기고 죽음에 던지며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을 통치하시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중생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회심의 증거는 결신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부분에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교리에 대해 말씀 드리는 중입니다.

잠깐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전도를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의 교리(래디컬 컨버전)입니다.

 

중생은 단지 인간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단지 천국으로 들어가는 대열에 끼기 위해서

지옥으로 가는 대열에서 뛰쳐나오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할 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에 견줄 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에서 창조되었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도

부패한 쓰레기와 같은 사람을, 놀랍게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할 때,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을 때,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창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초자연적인, 즉 신비한 역사’

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통 뜨거운 눈물이 동반되지요. 뜨거운 회개도 동반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증거는 전도 집회에서 단 한번 결심을 했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단지 몇몇 사람만 변화시키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끊임없이 육적인 상태를 지속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가능하다는 교리는

완전한 비성경적입니다.

 

크리스천도 죄를 짓습니까? 네!

크리스천도 육적인 행위를 합니까? 네!

크리스천이 잠시 동안 미성숙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네!

 

그러나 크리스천이 “10년~20년 계속” 거룩하지 못한,

세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신비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크리스천이 되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은, 변화된 다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교회 밖에서처럼,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죄를 많이 보게 된다고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포르노, 거짓말, 증오 등이 교회 안이나 밖에서 동일하게 넘쳐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요즘 미국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름답습니다.

상한 심령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을 깨뜨리며 다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러나 매번 그런 일이 재차 반복되고, 또 계속 반복되고 있다면

문제는 그가 진정 중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중생한 신자라면,

성경에 나와 있는 “새 언약”은 실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시며,

새롭게 거듭난 본성을 가진 새 사람들을 만드실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21:3

 

그리고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에 새겨질 것이며,

그들은 그 법에 순종하며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회심의 증거는, 단지 결신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기독교 역사학자인 달라모어 박사님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는 많이 달랐을 텐데요.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들의 삶이 계속 변화되었고, 그들은 계속 교회에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자기 삶에도 전혀 변화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단지, 초청에 응하는 표시로, 자기 손을 들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까?

 

▶오늘 여기 나오신 분들은, 마음에 고민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손을 들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또 결신 카드를 작성하라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기 전인 6시까지

여기에 계속 남아서, 여러분과 상담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카드에 서명을 하게 한 다음

구원에 대해 5분 정도 설명해 주고,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제자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것은, 아예 새롭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중생도 불분명한 그들에게 전도할 것을 권유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전부 정답을, 지식적으로만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단주의’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하고, 그것(구원)에 대해서는 다시는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분이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건 초자연적/신비한 역사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각자가, 간절히 간구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을 했다면,

오늘밤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여기를 걸어 나간 뒤에, 자기 삶이 변화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여러분 안에 착하신 일을 시작하신 주님이, 그 일을 완성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밤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완전한 회심이 아닙니다.

왜냐면 진짜 회심의 증거는

하나님의 역사와 마음의 변화가.. 자기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설명 드리는 것은, 이것은 예전의 방식입니다.

18세기, 19세기의 역사에 나오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6살 때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천국을 가고 싶느냐고 묻는다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아이는 물론 손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14~15세가 되면

하나님의 것들을 증오하는 세상에 살기 시작하면서, 반기독교적으로 변합니다.

 

그때 아이한테 다가가 얘기를 한다고는 하지만,

어릴 때와 같은 식으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원해서 신앙을 고백하게 해야 하는데

이때 여러분이 삶의 모든 부분에서, 보여주는 증거가 중요합니다.

 

정말 부모가, 그리스도안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다면,

사춘기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면서,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인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한 것이, 그 진정성이 불분명하고

계속 죄 가운데 거하다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것을 이루십시오.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이루셔야 하는 부분이지만

여러분의 소원과, 믿음과, 진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은 요즘 기독교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변해가는지 아실 것입니다.

값싼 은혜, 결단주의, 지적 동의.. 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걸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변질되지 않은 진짜 복음에 깨어있으십시오.

 

그것은 은혜의 복음이고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끝까지 완성하시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구원 받은 증거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삶의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회심의 증거는 결신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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