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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계시록 설교 모음

요한계시록 20장 11절 이하 최후의 심판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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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A /20:1-3, 3:27, 2:14/ 김형익 목사

2021-05-21 03:41:09

 

1.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 (17:11)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5세기의 신학자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기독교회 안에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근거하여 신앙의 내용을 가지게 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입장 차이에 따라 교리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장로교회가 유아세례를 믿고 시행하는가 하면,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당사자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주는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회중교회와 장로교회, 감독교회가 나뉩니다.

 

이런 차이들이 비본질적이라고 할 때, 이 주제들이 중요하지 않고 사소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중요하지만, 불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주 안의 형제로 용납한다는 점에서 비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요한계시록 20장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는 몇 가지 해석 그룹이 존재해왔습니다. 소위 천년왕국이라는 주제 아래 크게 세 가지(혹은 네 가지) 해석 그룹으로 나뉩니다.

 

먼저,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라고 불리는 그룹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라는 황금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역사적 전천년주의와 세대주의 전천년주의, 둘로 다시 나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천년왕국이라는 황금시대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 특정한 의미에서의 천년왕국이라는 황금 시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가 바로 천년왕국이라고 보는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입니다. 이것은 천년이 없다는 의미로 오해를 받기도 하기에, 시작된 천년주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벌써 어지러운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뜨거운 논란이 있는 이 본문에서 천년왕국이라는 주제를 얼마나 깊이 다루어야 하는가 많이 고민했습니다. 일단, 각각의 입장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제를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싶은 분들을 위해, 서종범 목사님이 강의한 30분이 채 안되는 두 개의 영상을 오늘 오후,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올릴 것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잘 비교하여 설명한 동영상입니다. 여러분은 그 동영상을 통해 유익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런 불일치를 경험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공교회가 교의(Dogma)로 받아들인 핵심 진리본질에 대한 불일치는 이단으로 정죄 받겠지만, 천년왕국과 같은 비본질적인 교리(doctrine)에서의 불일치는 주 안에서의 형제애를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한때 제가 부교역자로 섬겼던 교회가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전천년주의를 믿는다고 쓴 것을 보고 이건 수정해야 한다고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여러분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설교를 들으시고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17:11).

 

저는 벧샬롬의 모든 교우가 천년왕국에 있어 정확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천년왕국에 대한 문제는 장로교회로서 우리가 유아세례를 믿고 시행하며, 장로교의 정치체제를 가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유아세례를 시행하고 장로교 체제를 가진 것은 장로교회의 정체성 문제이지만, 천년왕국은 장로교회 안에서도 용인되는 해석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종말론 부분은 이러합니다.

 

[재림, 몸의 부활, 최후 심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이며 가시적으로 지상에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몸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의인의 영원한 행복과 악인의 영벌을 믿는다(16:27; 14:62; 14:3; 1:11; 3:20; 살전 4:15; 딤후 4:1; 2:13; 고전 4:5; 고전 15; 살후 1:7-10; 20:46,11-15).

 

심플하지요? 이 고백은 종말론 신앙에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최저선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인격적, 가시적 지상 재림, 그리고 몸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통해 만인이 영생과 영벌에 처해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여기에서 불일치한다면 주안에서의 교제에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에서는 관용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주의하여, 자칫 지나치게 협소하여 마땅히 사랑하고 용납해야 할 형제들을 문밖에 세워두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년왕국을 바르게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첫째,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먼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시대를 어떻게 읽고 사회와 문화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대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 요한계시록 20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계시록 20장은 교회사에서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 1-6절에 천 년이라는 말이 6번 나오는데, 이 본문 외에 소위 천년왕국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본문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을 이해하는 일차적 방법은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인데, 해석하되 요한계시록 안의 다른 본문들 그리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에서 그 논쟁을 일일이 소개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무천년주의의 입장에서 본문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중심으로 주님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그 어느 설명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천년주의가 가장 이 본문을 잘 이해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 20장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봅시다. 1-3절은 마귀가 천 년 동안 결박 당하여 무저갱에 던져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4-6절은 그 천 년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왕 노릇 한다는 내용입니다.

 

7-10절은 천 년의 기간이 마치고 마귀가 잠깐 풀려나서 만국을 미혹하고 그리스도와 그 백성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려다가 멸망을 당한다는 또 하나의(?)’ 최후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11-15절은 그 전쟁과 함께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온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최후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3. 19장과 20장의 시간 순서

 

제일 먼저 살필 문제는 19장과 20장의 환상이 보여주는 사건들의 시간 순서입니다. 1절은 또 내가 보매라고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이 표현은 요한이 보는 환상의 순서일 뿐, 그 환상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간적 순서는 아닙니다.

 

물론 시간적 순서로 연결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리고 라는 표현이 반드시 문법적으로 사건의 시간 순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20:1-6의 환상에서 보는 사건은 19장의 환상이 묘사하는 최후 심판과 마지막 전쟁보다 앞선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천사가 마귀를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은 천 년의 기간이 어느 시기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를 남깁니다.

 

여기서도 천 년을 상징으로 볼 것인가, 문자적으로 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이나 666 같은 숫자들은 상징적인 수라는 것을 우리는 봐왔습니다. 여기서도 천 년은 문자적 천 년이라기 보다 완전수인 10의 삼배수로서 사탄이 결박 당하여 무저갱에 갇혀있는 긴 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 년이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면, 그 천 년의 시기는 언제를 가리킬까요? 이것은 사탄의 결박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결정하면 쉽게 나올 수 있는 답입니다.

 

4. 사탄의 결박 시점과 결박 정도 (9:1)

 

사탄의 결박이 언제 일어났고 그 결박이 완전한 무능의 상태를 의미하는지, 사탄이 하는 주요한 일을 제한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논점입니다. 본문을 살펴봅시다. 요한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는데, 그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손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9:1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고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별은 1:17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사자, 천사를 가리킵니다. 아마 20:1의 천사가 9:1의 천사와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이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저갱은 악령들이 최후의 운명을 맞을 날을 기다리는 거대한 지하 동굴 같은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적 영역입니다. 이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열쇠가 네 번 나오는데, 먼저 주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1:18), ‘다윗의 열쇠(3:7) 가지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다윗의 열쇠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로서 현세에서 사탄의 모든 간계로부터 당신의 충성된 교회를 보호하는데 사용하시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9:1에 무저갱의 열쇠를 가진 천사가 오늘 본문과 함께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를 제외하면, 모두 같은 의미의 열쇠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나 무저갱의 열쇠는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권적 통제권을 갖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는 짐승이나, 종교적 세력인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들을 통해 만국을 미혹하는 사탄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의 천사는 큰 쇠사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열쇠에 더하여 사탄의 손을 벽에 묶어놓는 역할을 암시하지만, 역시 상징입니다. 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A. 결박의 시점 (3:27; 10:18-19; 12:31-32; 2:14; 2:15; 12:7-12)

 

천사는 용을 체포하는데, 그 용은 12:9에서 표현한 대로,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정체를 밝힙니다. 천사는 사탄을 천 년 동안 결박합니다. , 이제 이 결박이 언제 일어났는지 살펴봅시다. 전천년주의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사를 결박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천년주의는 천사가 사탄을 결박한 시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본문 안에서는 명확히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뒷받침해줄 성경의 설명들은 적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가복음 3:27).”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사탄의 힘을 빌려 그렇게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대답입니다. 주님은 사탄을 결박했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결박은 계시록의 본문과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또 주님은 전도를 위해 파송되었던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와 귀신들이 항복하더라며 기뻐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1819).” 이 말씀들은 사탄의 결박이 주님의 초림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132).” ‘이 세상 임금은 물론 사탄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탄의 쫓겨남과 주님의 십자가 지심(들림), 모든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심은 함께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쫓겨난다(ἐκβάλλω)는 헬라어 단어는 결박한다(βάλλω)는 헬라어 단어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오셔서 마귀의 세력을 멸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브리서 2:14).” 바울 사도도 골로새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이는 모두 주님의 초림에서 사탄의 결박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안에서도 그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12:7-12에서 용은 하늘 전쟁에서 미가엘에게 패하여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뱀의 머리를 밟으셨을 때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달리 묘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탄이 결박 당한 것은 12:7-12에서 일어난 그 일과 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결박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일어난 사건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초림은 성육신,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의 모든 사건을 포함합니다.

 

B. 결박의 정도 (고후 4:4; 벧전 5:8; 2:2; 6:12; 12:31; 28:18)

 

그렇다면, 사탄을 결박하여 천 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 가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탄이 천 년 동안 옴짝달싹 못하는 완전 무능의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의 역사를 현저하게 제한한다는 의미입니까? 첫번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우리는 3절에서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라는 문구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주요 활동의 특징인데, 그를 결박함으로써 이 주요 활동을 막고 제한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까?

 

전천년주의는 사탄의 결박은 완전 결박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사탄을 결박하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주님의 초림에서 사탄이 이미 결박 당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여전히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고후 4:4),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벧전 5:8),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고(2:2),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서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고 있는 것을(6:12)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비록 그럴지라도 사탄은 자신의 주요한 일, 만국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고 택한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서는 무력하게 쫓겨난 존재일 뿐입니다(12:31).

 

사탄이 결박 당했다는 것의 핵심은 그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초림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대위임령을 주실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18).

 

이것이 제자들이 모든 민족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사탄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할 수 없도록 결박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여전히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고 하더라도(고후 4:4), 모든 민족 가운데 있는 택한 백성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서는 어떤 결정적인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사가 사탄을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을 하였다는 말도 사탄의 완전한 무력화를 의미하지만은 않습니다. 인봉이라는 말은 인침과 같은 말인데, 그레고리 비일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봉은 절대적 감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인침은(7:3; 9:4) 그들을 모든 면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므로 물리적 박해는 겪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사탄을 인봉하는 것(인침)은 사탄의 악한 활동의 절대적 중단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영적인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택한 백성, 인침 받은 성도들을 미혹하는 능력의 박탈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결박되어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갇힌 사탄은 두 가지 점에서 능력이 제한됩니다. 첫째로 교회 시대 동안 사탄은 택함 받은 자를 미혹하여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그리고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없도록 방해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사탄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될 때까지 교회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 만국을 미혹할 수 없습니다.

 

이 두번째 경우가 3절 하반절에 그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는 말에 잠깐 나오고, 7-10절에서 마지막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사탄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잠깐 무저갱의 결박에서 풀려날 것이고, 주님과 주님의 군대를 대적하는 전세계적인 전쟁을 벌이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아마겟돈 전쟁, 최후의 전쟁이 반복하여 묘사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14:16; 12:1-3; 1:8; 24:14)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탄의 결박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일어났고,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 감금당하는 천 년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는 교회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때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만국을 미혹하던 그 권세를 더 이상 부릴 수 없게 됨으로써,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사도행전 14:16).”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12:1-3),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를 현저하게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을 무력화하시고(2:15) 멸하시고(2:14) 결박하셨습니다(3:27).

 

드디어 복음이 만국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셨고, 그 일이 교회 역사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져왔습니다. 주님은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대위임령을 주셨고(28:18-20)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1:8). 물론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복음의 증인들이 그 증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고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탄이 그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복음전도자들을 괴롭히고 죽인다고 할지라도, 사탄은 만국 백성을 미혹함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반응하게 되고 믿어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결박 당하여 이 일에서 철저하게 무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

 

그 끝은 언제입니까?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교회 역사 내내, 사탄은 결박 되었기에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 되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모으시는 일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비록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잠깐 놓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탄과 그 세력을 심판하여 완전히 멸하시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 넣으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이 될 뿐입니다.

 

6. 교훈과 적용

 

본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 가정, 자녀들의 삶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고 심지어 영적 세력인 사탄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시는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에게 불신 배우자나 부모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다면, 우리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불신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날마다 순간마다 주권자이시며 무한히 자비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둘째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도록 섭리하신 은혜의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당하여 있다고 할지라도, 복음전도자를 고난과 순교의 자리로 데려갈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에사탄은 크게 분내어(12:12) 우리가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본 것처럼 갖은 방법으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복음의 증인들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죽음 조차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을 두렵게 할 존재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시대에 주님이 교회에 주신 최고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시다. 개인으로서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공동체로서 벧샬롬교회가 복음의 증인으로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일에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드리십시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일을 무서워하지 맙시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와 교회가 그 영광스러운 소망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천년왕국B /20:4-6, 11:25-26, 1:21-23/ 김형익 목사

2021-08-17 09:45:31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어 천년왕국이라는 주제를 한 번 더 상고하려고 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셨고 쫓아내 멸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사탄을 잡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둔다는 의미입니다.

 

그 목적은 사탄이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기간은 천 년입니다. 천 년은 문자적 천 년이 아니라 긴 기간을 상징하고, 복음이 온 세상과 모든 열방에게 전파되는 시기, 즉 교회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에 사탄은 만국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미혹할 수 없으므로,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 때 사탄은 잠시 풀려나는데, 그것은 사탄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탄이 결박 당하여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있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복음 전파는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지만, 그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인 큰 성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 또한 많은 대가와 희생을 요구하는 삶인 것은 자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을 지키다가 박해를 당하거나 믿음 때문에 순교를 해야하는 시대의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사탄이 결박 당하여 무저갱에 갇혀있는 그 천 년 기간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 주요 질문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요한이 본 보좌들은 하늘에 있는 것인가, 지상에 세워질 것인가? 둘째, 이 보좌에 앉아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셋째, 첫째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육체 부활인가, 영적 부활인가?

 

1. 보좌가 있는 곳 (4)

 

4절은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몇 개의 보좌인지 모르지만, 요한은 보좌(왕좌)들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좌라는 단어가 47번 나오는데, 거의 전부 하늘에 있는 보좌를 가리킵니다.

 

사탄이나 짐승의 보좌를 가리키는 예외적 경우에만 지상에 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2:13 사탄의 권좌버가모교회; 13:2 용이 짐승에게 주는 보좌; 16:10 짐승의 왕좌). , 그럼 지금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보는 보좌는 사탄이나 짐승의 보좌가 아니기에, 요한은 지금 하늘의 광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장소는 요한이 처음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았던 바로 그 자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4).

 

그러나 천년왕국이 주님의 재림 후에 있을 것이라고 보는 많은 전천년설 주장자들은 이 보좌가 지상에 세워질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이론을 천년왕국을 언급하는 유일한 본문인 요한계시록 20장만 위에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 하늘에서 요한이 본 보좌들에는 앉은 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이 보좌에 앉은 그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2. 보좌에 앉은 이들 (6:9-10; 3:21; 10:34-37)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보좌에 앉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4절을 주의하여 읽어봅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요한계시록 20:4).”

 

요한이 본 사람들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보좌에 앉은 이들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첫번째 사람들이 순교자를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순교자의 영혼들입니다. ‘영혼(ψυχή)’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사람의 전인(全人)을 의미하지만, 이 경우에는 죽어서 몸과 분리된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6:9-10에서 하늘의 제단 아래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기도하는 영혼들입니다. 그들은 주님 재림의 날에 일어나게 될 심판과 그때에 그들이 육체 부활을 통해 몸과 영혼이 결합되어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될 날을 기다립니다. 본문에서 목 베임은 문자 그대로 목 베임으로 죽은 순교자들만을 가리키는 말이라기 보다, 순교를 의미하는 약식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순교자들은 신앙의 타협을 거부하고 믿음으로 인내한 교회의 대표자들이기도 합니다.

 

또 본문 4절은 두번째 그룹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순교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박해 속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신실한 성도들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자연사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환상에서 본 바, 보좌에 앉은 이들은 순교한 성도의 영혼들이고 또한 모든 박해 속에서도 인내하다가 믿음으로 죽은 성도의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 비일은 이들을 두 그룹의 신자들로 보기 보다, 순교자들을 대표로 하는 하나의 승리한 교회(천상의 교회)로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순교자들만이 아니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앞에서 비난과 따돌림, 투옥과 재산을 빼앗김, 그외 모든 부당하고 불편한 일을 겪고 감내한 성도들이 함께 공유됩니다. 순교를 했는가가 아니라, 믿음을 지키고 인내했는가가 핵심입니다. 이들이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요한계시록 3:21).”

 

보좌에 앉은 이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은 성도의 영혼들이 심판을 행할 권세와 통치권을 모두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으로부터 억울하고 부당한 판단을 받아서 죽임과 손해를 입었던 성도들이 이제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의 권세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억울한 죽음을 죽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성도들을 옳다고 인정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4절 말씀이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실제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주의 말씀 때문에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얼마나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이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 신앙 때문에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에는 문자 그대로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했고, 사도들 중 첫번째 순교자 야고보도 참수를 당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도 네로 황제 치하에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사도들 중 요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외에도 1세기 말의 성도들 중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2:13).

 

요한 자신과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순교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잠시 고난을 당할지라도 너희가 누릴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여라!” 하는 메시지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레온 모리스는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왕의 통치권과 승리를 얻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브리서 10:3437).”

 

보좌에 앉은 이들이 순교한 영혼들과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죽은 신실한 성도의 영혼들이라는 해석은, 4절 하반절에 살아서라는 말과 5절과 6절에서 첫째 부활이 의미하는 바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첫째 부활 (11:25-26; 6:4; 3:1-3; 2:4-6; 1:21-23; 고후 5:8; 23:43)

 

4절 하반절에 살아서라는 말과 5-6절의 첫째 부활,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무천년설의 해석을 따른다면 죽은 성도들의 영적 부활을 의미합니다. ‘살아서라는 말의 용례를 보면(11:25; 13:14), 이것이 반드시 육체 부활만을 의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용어도 대부분 육체 부활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첫째 부활이 주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육체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고 육체로 부활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한 뒤에, 둘째 부활, 즉 불신-악인들의 육체 부활이 일어나고 이어 백보좌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육체 부활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한 악인들의 육체 부활 사이에는 천 년의 기간이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전천년설은 두 번의 부활을 말합니다. 본문에 대한 이 해석은 성경의 어떤 본문에서도 지지를 받기 어렵습니다. 이 본문만이 그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의 고전적 논거로 헨리 알포드의 말이 인용되곤 합니다.

 

두 부활이 언급된 한 본문에서, 만일 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둘째 부활은 무덤에서 나오는 문자적인 부활을 의미한다면, 언어의 모든 의미는 사라지며 성경은 어떤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알포드가 말한 해석의 일반적 원리는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주님은 믿음으로 당신과 연합하는 것은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부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자들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6:4).”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골로새서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로새서 3:13).”

 

신자들은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산 자들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표현이 에베소서에 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46).”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사도 요한은 살아서라는 표현과 둘째 부활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 말을 쓰는 것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 육체적으로(육체와 영혼의 분리) 죽은 성도들의 복됨(14:13)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공유하는 것이 모든 신자에게 속한 공통된 유익이라고 할지라도, 본문에 있는 요한의 환상에서 이 유익은 죽어서 하늘의 영광 가운데로 들어간 성도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신학적으로 성도의 중간상태라고 부릅니다. 성도가 죽고 나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도는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명료하고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답을 얻을만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기는 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립보서 1:2123).”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성도의 죽음이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뿐이 아닙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의 고백과 다르지 않은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옆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언젠가 육체 부활을 하게 될 때 나와 함께 낙원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확언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살아서라고 말하고 첫째 부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말합니다. “첫째 부활은 완전하지 않지만 영원한 영적 부활을 시작하고, 이것은 나중에 영원히 더 큰 영적 형태로, 하지만 충분히 육적인 형태로 완성될 것이다.” 또 윌리엄 헨드릭슨의 말입니다. “여기서는 영혼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천 년 동안 다스린다. 그후에 영혼은 더 이상 다스리지 않는다. 몸과 영혼이 다시 합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 성도들이 다스리게 되는데 시간의 제한이 없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22:5).”

 

그렇다면, 5절에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전천년설에 따르면, 첫째 부활은 성도들의 육체 부활이고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불신자들이고 그들은 천 년 후에 육체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부활입니다.

 

그러나 첫째 부활이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영적 부활을 의미한다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죽은 불신자들의 영혼들입니다. 이들 불신자의 영혼들은 죽음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부활 생명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고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천 년이 차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죽은 성도들과 함께 육체로 부활할 것입니다.

 

6절에서 우리는 그 부연설명을 만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 둘째 사망은 14절 설명대로, 육체로 부활한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 곧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게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기에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된 것은 이것만은 아닙니다.

 

4.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왕 노릇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까지 하늘에 베푸신 보좌에 앉아서 무엇을 합니까? 그들의 영혼은 부활의 생명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천년왕국입니다. 정리하면, 천년왕국은 순교자들과 주안에서 죽은 신실한 성도들의 영혼 즉 천상의 승리한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의 생명을 누리면서 교회의 시대, 복음의 시기인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육체 부활, 그리고 악인들을 향한 최후의 심판과 성도들의 영원한 영광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이 왕 노릇은 무엇보다 영적 통치입니다. 죽은 성도들이 아직 몸으로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승리한 교회 성도들은 영광 중에 보좌에 앉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참여할 것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흠 없는 제사장으로 섬길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에 놀랍게 참여합니다. 이 다스림은 죽은 성도들이 언젠가 미래에 가질 영광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누리는 실재입니다. 이 메시지가 왜 중요합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적 교훈입니다.

 

5. 교훈과 적용 (2:10,13; 고후 4:17-18; 8:18)

 

요한계시록의 첫 독자들을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얼마 전 순교한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가 있었습니다(2:13). 그는 주님의 충성된 증인으로서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성도들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그 영광의 승리를 누리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안디바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박해가 끊이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최근에 죽은 성도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말씀하시면서 십 일 동안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10). 그러나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은 성도는 죽어서 천 년 동안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718).” 또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는 눈 앞의 영광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과 함께 그 순간 살아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알고 원합니다. 성도는 죽어도 영광이고 망해도 영광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확증해줍니다. 죽은 성도들은 천 년의 기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광을 누리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들은 육체로 부활하여 영화로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이것을 믿으십니까?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루비 켄드릭(Ruby Rachael Kendrick, 1883-1908) 선교사의 무덤을 불 수 있습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인상적인 묘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녀가 임종하기 한 달 전 자신을 파송한 미국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편지의 한 글귀입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한국을 위해 모두 바칠 것입니다(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그녀는 190724세 처녀로 한국(대한제국)에 와서 9개월 만에 맹장염으로 25세의 짧은 삶을마치고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기 일주일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돌아올 집이 있고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떠난다면 십자가는 없는 것이겠지요.”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온 루비는 개성에서 언어를 공부하는 중 폐렴에 걸린 아주 어린 한국 고아 소녀를 맡아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소녀는 위기를 넘겼지만 혼신을 다했던 그녀는 급속도로 쇠약해지면서 맹장염에 걸렸고 세브란스에서 수술을 하였지만 회복을 하지 못하고 결국 190861925세의 짧은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녀가 임종하기 한 달 전쯤, 자신을 파송한 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편지의 일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선교사의 삶을 누리는 기쁨이 이렇게 큰데 그것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있으라고 한 곳에 있는 것과 비교할 만한 더 기쁜 삶은 없을 거예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지요. “치러야 할 희생은요?” 맞아요. 저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겪는 희생은 너무 많고 크지요. 하지만 지금 그것은 어디에 있나요?

 

주님이 주시는 보상에 비하면 그것들은 너무나 작고 사소하답니다. 제가 잠시라도 머뭇거린 것이 얼마나 창피한지요. 선교회 여러분, 만약 주님께서 당신을 추수의 현장으로 부르신다면,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빨리, 기쁘게 그리고 온 마음으로 응답하세요. 여러분이 열 명씩, 스무 명씩 이곳으로 와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한국을 위해 모두 바칠 것입니다.” (1908511일 송도에서)

 

여러분은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인생이 어리석은 인생 처럼 보이십니까? 오늘 주의 말씀이 진리라면, 저는 그녀처럼 지혜로운 사람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혜롭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 /20:7-10, 38-39, 살후2:1-12/ 김형익 목사

2021-08-17 09:49:37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 천년왕국이라는 주제를 상고했고, 오늘은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는 주제를 살피려고 합니다. 본문은 천 년 동안 결박 당하여 무저갱에 갇혀 있던 사탄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잠깐 놓여서, 다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일 것을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탄의 시도는 결국 자신의 패망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전쟁이라는 주제로 19:17-21을 상고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또 하나의 전쟁, 곡과 마곡의 전쟁을 말씀합니다. 이 전쟁은 19장이 묘사한 전쟁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을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중에 널리 퍼져 있는 그릇된 종말론이 말하는 곡과 마곡에 대해서 많이 듣습니다.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곡과 마곡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이단들이 잘못된 종말론을 중심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은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결코 사소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주제는 중요합니다.

 

1. 에스겔과 요한계시록 (38-39; 36:26; 38:2)

 

먼저 곡과 마곡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에스겔 38-39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의 2차 침략이 있던 주전 597(예루살렘 멸망 10년 전), 여호야긴 왕과 귀족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그 이방 땅에서 5년이 되었을 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1-33장에서 악한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나서, 34-37장에서는 복음을 전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새언약의 내용으로 전해집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에스겔 36:26).”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약속은 37장에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으로 확증됩니다. 그리고 38-39장에서 에스겔은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원수로부터 세계적 규모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원수는 곡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고, 그가 다스리는 곳이 마곡입니다.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에스겔 38:2).” 오늘 본문 8절에서 곡과 마곡이라는 말은 에스겔의 이 본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전쟁이 마치면,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환상 속의 성전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에스겔의 메시지는 마치게 됩니다(40-48). 에스겔의 환상 속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주어질 영원한 영광을 보여줍니다.

 

가만히 보면, 요한계시록 20-21장은 특별히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지와 비슷한 흐름 속에 있다는 알 수 있습니다. 천년왕국의 기간에 온 세상에 전파되는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면(20:4-6), 사탄은 잠시 풀려나서 다시 만국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향해 최후의 공격을 시도할 것입니다(20:7-10). 그리고 이 싸움이 마치면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을 21장이 보여줍니다.

 

2. 곡과 마곡의 정체 (38:2; 39:2; 10:2)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향한 원수의 공격을 주도하는 세력은, 배후의 사탄을 제외하면 곡과 마곡입니다. 우리는 곡과 마곡의 정체를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과 마곡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존재하던 어떤 정치적 세력으로 해석하려는 유혹을 받아왔습니다.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위협과 공격 앞에서 쇠퇴해가던 4세기 말, 밀라노의 주교였던 교부 암브로스는 을 로마제국의 영토를 압박하던 고트 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세기 유럽에서는 성지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무슬림의 세력이 곡과 마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해석은 12-13세기(1095-1291)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의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13세기의 유럽은 몽골의 징기스칸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었고 자연히 이들은 징기스칸이 곡과 마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유럽의 기독교 사회는 자신들을 위협하거나 대적하는 정치적 세력을 곡과 마곡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시대를 지나면서는, 교황이나 터키를 곡과 마곡으로 여기기도 했고, 현대로 오면서 러시아나 중국을 그 세력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러시아를 마곡이라고 여기는 해석은 19세기 크림 전쟁(1853-1856)이 한창일 때, 영국인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발전되었는데, 이 해석은 현대 스터디 바이블의 원조이고, 세대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했던 스코필드 스터디바이블(1911)에 의해 널리 보급되면서 100년 이상 건재하는 해석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랜트 제프리(Grant R. Jeffrey, 1948-2012)러시아가 성경이 예언하는 곡과 마곡이다라고 그의 책에서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아랍 국가들과 연대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할 것이라고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 이런 모든 해석들에서 우리는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는데, 그들은 곡과 마곡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하나의 물리적 전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지나치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8-39장에서 곡과 마곡은 이렇게 소개됩니다.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에스겔 38:2).” 곡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 지역에 세워진 마곡 왕국의 통치자입니다. 세대주의자들 중에는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로스는 러시아, 메섹은 모스크바, 두발은 토볼스크(Tobolsk러시아의 한 도시)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신빙성이 없는 해석입니다.

 

아마도 마곡이라는 지명은 노아의 손자이고 야벳의 아들인 마곡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10:2). 그리고 이 지명들은 에스겔 39:2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북방에 위치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북쪽 끝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에스겔 39:2).” 사실, 에스겔서의 요점은 매우 먼 곳에서 용사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8-39장은 유대인들의 종말 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SF소설들이 화성인이나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소재로 삼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는 곡과 마곡의 침공이 그런 종말적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곡의 왕 곡은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주도적 세력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에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곡과 마곡을 구분하지 않고(왕과 나라/지역 이름) 사용할 뿐 아니라, ‘땅의 사방 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곡과 마곡은 더 이상 하나의 지명이나 인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즉 마지막 때에 마지막 전쟁을 위하여 모인,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계 만국의 세력을 총칭하는 상징적 이름이 된 것입니다. 벤 위더링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곡과 마곡은 지구 모든 곳에 있는 나라들에 있는 악의 세력의 상징이다. 이 악은 모든 방향에서 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최소한 곡과 마곡을 러시아(혹은 구쏘련) 혹은 중국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의도를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3. 이 전쟁은 물리적 전쟁이 아니다. (16:12-16; 19:17-21; 38:16,22; 39:6; 12:11)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다룰 주제는 최후의 전쟁의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곡과 마곡의 공격과 교회가 그들과 싸우는 이 최후의 전쟁을 물리적 전쟁으로 이해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사실, 물리적 전쟁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참 성도인 교회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세력과의 싸움인데, 만일 이 전쟁이 핵과 미사일을 동반하는 물리적 전쟁이라면, 이 세상에서 그런 물리적 방식으로 신자와 불신자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근거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곡과 마곡이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이 전쟁은 물리적 전쟁이 아닌, 영적 성격을 가지는 전쟁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징들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C.S.루이스가 쓴 나니아 연대기J.R.R.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같은 환타지 소설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이 전쟁의 성격을 짚어봅시다.

 

7절은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천 년의 기간이 찼고,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3절에서 그 후에는 반드시 놓이리라고 말씀한 대로, 사탄이 옥에서 풀려납니다. 그런데 7절은 무저갱 대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만국을 미혹하는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감금되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옥에서 놓이지만, 3절의 말씀대로, 잠깐 놓임을 받습니다.

 

사탄이 옥에서 나와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다시 만국을 미혹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요한계시록 20:8).”

 

사탄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여 모으는데 그들이 곡과 마곡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말씀하듯이,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곧 교회를 포위하고 전쟁을 벌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16:12-16에서는 아마겟돈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물론 아마겟돈도 상징적 지명입니다.

 

이 최후의 전쟁은 적어도 요한계시록에서 세 차례 각각 다른 관점에서 반복되어 묘사되었습니다. 전천년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16:14-16은 일곱째 대접이 부어지기 전에 벌어지는 아마겟돈 전쟁을, 19:17-21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벌어지는 큰 전쟁을, 끝으로 20:7-10은 천년왕국 후에 벌어지는 진짜 최후의 전쟁을 말함으로써, 요한계시록이 종말에 연속적으로 일어날 세 번의 전쟁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16장에서는 범죄한 인류의 심판과 파멸이라는 관점에서(16:12-16), 19장에서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이라는 관점에서(19:17-21),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의 수괴인 사탄의 패망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최후의 전쟁을 세 관점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들 각각에서 전쟁을 말할 때, 단어 앞에 정관사를 붙여 그 전쟁이라고 썼습니다(16:14; 19:19; 20:8).

 

윌리엄 헨드릭슨의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동일한 전쟁을 본다그것은 교회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최후의 공격이다.” 또 리처드 필립스의 말입니다. “역사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상의 큰 전쟁으로 끝난다. 복음이 온 열방에게 전파된 후에, 회개의 시기가 지나가고 끝이 올 것이다.” 물리적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땅의 사방 백성은 러시아나 중국일 수 없습니다.

 

본문은 사탄의 미혹을 받아 모인 땅의 사방 백성의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8). 이것은 그들의 세력이 거대하고 수가 많아서 일견 그들이 성도들을 이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에스겔 38:16에서는 곡의 세력을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릅니다(9a).’ 그들은 거의 교회를 삼켜버릴 기세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게됩니다(9b). 19:19-20에서 보았듯이,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전쟁을 벌이려 하지만, 허무하게도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라고 한대로, 전쟁은 벌어지기도 전에 끝이 나고 맙니다. 20장도 동일한 것을 보여줍니다. 전쟁이 아예 벌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림으로써 전쟁은 터지기 전에 끝이 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내가 또 전염병과 피로 그를 심판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무리와 그와 함께 있는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에스겔 38:22).” “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에스겔 39:6).”

 

10절은 천 년 후에 잠깐 풀려난 사탄이 일으키려고 한 전쟁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요한계시록 20:10).” 사탄 곧 마귀가 이제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 불과 유황 못은 이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던져진 바로 그 곳(19:20), 영원한 고통을 밤낮 없이 당하게 될 지옥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악의 거짓 삼위일체인 사탄과 두 짐승이 다 불못에 던져집니다.

 

정작 사탄이 일으킨 곡과 마곡이 하나님의 교회를 포위하여 싸우려고 하지만, 교회 자신은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이 전쟁을 싸우는 방식은 요한계시록 12:11에서 말씀한 대로,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이 증거에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요한계시록 12:11).”

 

이렇게 17장에서 시작된 마지막 심판이라는 주제는 사탄이 불못에 던져지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17-18장은 음녀 바벨론의 심판을, 19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심판을, 그리고 20장은 사탄 자신의 심판을 보여준 것입니다.

 

4. 신약 다른 본문들의 증거 (24:24; 살후 2:3,6-8)

 

주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마지막 날들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태복음 24:24).”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는 것은, 사탄이 천 년이 지난 후에 잠시 나와서 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마귀가 옥에서 나오게 되면 이런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교훈하였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데살로니가후서 2:3).”

 

이 말씀도 사탄이 풀려날 때의 일들을 말씀합니다. 6-7절도 봅시다.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데살로니가후서 2:67).” 사탄이 옥에서 풀려나는 때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바, ‘막는 것막는 자가 옮겨질 때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최후의 공격이 시도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씁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데살로니가후서 2:8).” 마지막 전쟁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의 본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을 동일하게 증거합니다.

 

5. 교훈과 적용 (살후 2:9-12; 24:24; 벧전 2:11; 살후 2:2)

 

오늘 본문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시고 말씀하십니까? 첫째로, 사탄이 옥에서 잠깐 놓임을 받아 다시 만국을 미혹하여 교회를 대적한다는 것은 우리를 경성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복음이 땅끝까지 거의 이른 시대입니다. 이 복음의 시대, 천 년이 마치면, 사탄이 잠깐 놓임을 받아 만국을 미혹하고 교회를 대적할 것입니다. 사탄의 주요 무기는 강력한 박해 뿐 아니라 미혹함으로써 불신을 조장하는 속임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더욱 진리로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세의 때를 이렇게 살라고 경고했습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데살로니가후서 2:912).”

 

사람이 망하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2:10).

 

주님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히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24:24). 마귀의 주요 무기가 미혹하는 것이라면, 교회가 주로 해야할 일은 진리로 무장하고 복음의 진리를 땅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말입니다. 저는 30여년 전 이슬람권에서 사역을 할 때, 무슬림들이 코란을 공부하는 것을 성전(지하드)으로 여기는 것을 봤습니다.

 

전투하듯이 코란을 낭송하고 배우고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진리로 무장하기 위해서 충분히 수고하고 있습니까? 이 마지막 때에는 돈이나 학위, 여러분이 세상에서 이룬 성취가 여러분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진리로 무장하고, 복음의 진리를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일에 우리의 수고를 다하라고 성령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둘째로, 본문 10절은 교회를 성도들의 진, 사랑하시는 성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라는 말은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던 방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진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약속의 땅을 향하여 순례하는 백성임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베드로전서 2:11).”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수많은 대적을 만났음에도 파괴되거나 멸망 당하지 않았듯이, 교회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잠시 놓여 무슨 짓을 하든 두려워 마십시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데살로니가후서 2:2).”

 

그러나 또한 교회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입니다. 우리는 곧 21장에서 그 사랑하시는 성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사랑하여 당신의 피로 사신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붙잡을 때,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패배주의나 값싼 승리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영구히 지속되는 성을 세우거나 가지지 않습니다.

 

그 성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이고, 주님이 단장해 주시는 성입니다. 우리는 지나가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날에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그 영광을 생각하며, 오늘 여러분의 옆에 있는 성도들을 대하고 바라보십시오. 그레고리 비일의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막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고 장래에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날은 온다 /20:11-15, 25:31-32, 고후5:10/ 김형익 목사

2021-08-17 09:55:10

 

오늘 본문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기독교 신자는 사도신경을 통해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고백함으로써, 재림하시는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는 최후 심판은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331항에서 최후의 심판을 탁월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세상을 심판할 한 날을 정해 놓으셨다.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 그날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심판 받을 뿐 아니라, 또한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자신들의 생각, 말 그리고 행위를 직고하고, 그들이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1. 크고 흰 보좌 (11; 25:31-32; 51:6; 벧후 3:7,10)

 

마지막 심판의 예언은 요한이 환상 중에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최후 심판을 백보좌 심판이라고도 부릅니다. ‘크고 흰 보좌라고 보좌 앞에 형용사가 사용된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유일한 경우입니다. 아마 이것은 20:4에서 보았던 보좌들죽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다스리는 보좌과 구별하려는 의도이거나, 심판의 권세와 위엄을 드러내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흰 색은 주로 순결함과 거룩함을 상징했듯이, 여기서도 그 의미를 포함할 것입니다.

 

요한은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이제 심판을 행하시는 분인데, 성부 하나님인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심판을 하시는 분이 성부 하나님이라는 말씀들이 있지만(6:4; 18:35; 14:10),

 

성자 예수님께서 심판하신다고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7:22-23; 고후 5:10). 주님은 친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마태복음 25:3132).”라고 말씀하셨고, 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도 하셨습니다(5:22). 그래서 조엘 비키는 보좌에 앉으신 이는 그리스도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사도신경도 심판하러 오시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하여 정리하면, 성부의 위임을 받아 성자 하나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아 심판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고 하신 말씀도 생각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역할 구분에 대한 지나친 논쟁은 유익하지도 않고 불필요할 것입니다.

 

요한이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을 보았을 때,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말합니다. 새 시대가 시작되기 위하여 현 시대는 끝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으로 표현된 피조 세계인 우주가 심판하시는 이의 권세 앞에서 도망한다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임박한 도래를 준비하는 우주의 해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21:1). 하지만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이사야 51:6).” 사도 베드로도 이것을 말씀했습니다(벧후 3:7,10).

 

2. 죽은 자의 부활 (12-13)

 

11절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의로우신 재판장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대상, 피고인석에 설 자들은 누구입니까? 12절은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들이 심판을 받을 피고들입니다. 13절을 보지요.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13).”

 

13절은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부활을 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바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준다고 합니다. 바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는 일차적으로 죽은 자들의 영역을 의미하고, 죽음을 통해 지배하는 악의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특히 바다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바다에서 실종하여 그 몸이 땅에 묻히지 못한 사람들도 부활과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과거에 화장을 반대하는 분들이 화장하면 부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부활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몇 년 전에는 존 파이퍼 목사님이 화장은 성경적으로 죄에 대한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피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취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 의미를 염두에 둘 수 있습니다마는, 성경이 화장을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지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에서 죽은 이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점점 커지는 현상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화장이든 수목장이든 수장이든, 죽은 자들은 예외 없이 부활하여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재림하셔서 크고 흰 보좌에 앉아 심판을 행하실 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피고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입니다. 더글라스 켈리는 이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인간의 모임이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 중 한 사람도 빠지지 않은 모임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참고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인 것은 2013210일 힌두교 축제인 쿰브 멜라(Kumbh Mela), 인도 알라하바드에 12천만 명이 모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과는 비교 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12절은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라고 표현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물론 주님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그대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자들도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신자들도 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결산하지 않을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3. 행위 심판과 두 종류의 책 (12-13; 16:27; 고후 5:10; 4:13; 21:27; 3:10,23; 8:1; 38:17)

 

우리는 심판하시는 분과 심판 받을 대상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심판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십니까? 그 기준은 12절과 13절 하반절에 각각 기록되어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12b),” 그리고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13b)”라고 했습니다. 기준은 그들이 살아 생전에 행한 행위입니다. 여러분은 신자들도 행위로 심판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으십니까?

 

답은 그렇다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태복음 16:27).”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0).” 신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12절에서 두 종류의 책을 만납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2).” 책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고 완전히 공정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책들에 대한 말씀은 다니엘서의 인유인데(7:10; 12:1-2), 요한은 두 종류의 책을 봅니다. 먼저 보좌 앞에 펴져 있는 책들인데(복수) 이것은 각 사람의 행위들이 기록된 책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이(단수) 펴져 있는 것을 보지요. 그것은 생명책입니다. 먼저 행위를 기록한 책들을 생각해봅시다. 만일, 아담 이래 지구 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 각 사람의 행위들이 기록되어 있으려면 그 분량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이 책들은 일종의 기소장인데, 하나님의 기소장이기에 판결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책들에는 저와 여러분의 평생의 행적도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 동기와 의도까지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일들도 그날에는 다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3).” 잘못이 없을지라도 세상의 재판정에 피고로 선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모든 생각, 의도, 동기 그리고 행위를 기록한 책을 가지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두려워함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여기 책들은 문자적 의미라기 보다, 결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자신의 기억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이 책들은 신적 기억을 상징한다. 이 기억의 책은 모든 행위, , 생각 그리고 동기들을 오류 없이 기록하는 책이다. 무한하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세부 사항을 완전하고 오류 없는 관찰로 지켜보셨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말 신자들도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라면, 신자들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책, 생명책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명책은 고대 세계의 도시나 국가의 시민 명부와 같은 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들은 천국 시민이고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27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들이라고 해도, 또 신자들이 얻은 구원의 믿음이 그들 안에 선한 행위들을 만들어낸다고 해도(2:10),

 

어찌 그들이 범한 부끄러운 죄악들이 없겠습니까? 행위를 기록한 책들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면할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3:10,23). 그래서 심판대 앞에 선 신자들도 먼저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악들을 직면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유죄 판결과 지옥 형벌로 이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판결을 받기 직전, 잠시 천사장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자, 그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그리스도에게 부어졌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라는 선언과 함께(8:1) 모든 죄의 용서와 무죄가 선고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의 등 뒤로 던져버리실 것입니다(38:17). 그리고 심지어 믿음이 신자 안에서 만들어낸 선한 행위들에 대한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생명책은 신자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유죄 선고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성입니다.

 

4. 둘째 사망 (14-15; 고전 15:26)

 

하지만 생명책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유죄 선고가 내려질 것입니다. 그 형벌은 둘째 사망입니다. 14-15절을 보지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4-15).”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두 번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죽음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으로,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15절 말씀대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불못은 육체적인 고통을 포함하지만 본질상 영적 고통을 영원히 겪는 지옥을 상징합니다. 육체를 지니지 않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영적 고통만을 겪겠지만, 부활하여 육체를 다시 얻은 사람들은 영적 고통에 더하여 육체의 고통까지 영원토록 겪을 것입니다.

 

끝으로 사탄의 지배력을 상징하던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은 마치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린도전서 15:26).”라고 한대로 입니다. 사망 곧 죽음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세계에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저주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영광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시기 위하여(21:1) 죽음의 저주를 음부와 함께 정죄의 자리에 던져 버리시는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13:8; 24:43-44; 살전 5:2; 6:37,44)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크고 흰 보좌에 앉아 인류 역사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도 피하여 간 데가 없다고 할만큼 두려운 심판의 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숨겨질 수 있는 존재나 개인, 숨겨질 수 있는 행위나 동기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 , 생각 그리고 동기를 오류 없이 기록한 책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만물이 그분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고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4:13).

 

세상 역사에서 구부러지고 뒤틀려진 정의가 완전히 바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의 심판에서 유죄를 면할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인이 살 길은 오직 하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이름을 주님은 생명책에 기록하십니다. 생명책의 원 이름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13:8; 21:27).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의식인 세례를 생각해보십시오. 세례는 참된 신앙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의 모든 죄는 다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모든 형벌과 저주가 주님에게 다 남김 없이 부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의 날에 신자들도 소환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참 구주시라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그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정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를 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주님을 믿는 사람, 그 믿음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음으로 참된 믿음을 입증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자들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날을 맞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성경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것이라고 거듭 말씀합니다(24:43-44; 12:39-40; 살전 5:2,4; 벧후 3:10; 3:3; 16:15). 주님의 재림과 심판의 날은 생각지 않은 날 불현듯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편안하게 앉아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심판의 날이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이 참되지 않음을 말할 뿐입니다. 참 신자는 그날을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막연한 무서움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가져오는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또한 그날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난 나의 큰 죄악들이 용서받을 때,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날을 맞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날은 죽음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날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지금 당장 주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1:15). 여러분은 그 심판의 날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여러분의 그 죄악들이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흘리신 피로만 덮여질 수 있고 사해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자비로운 약속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44).”

 

이제 구주를 믿는 자들을 위해 주님이 차려주신 식탁으로 나아갑시다.

 

 

백보좌 심판과 영원한 불못 형벌 /20:11-15/ 오주철목사

2019-05-23 01:37:52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사탄은 지금 천사에 의해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짐을 당한 후 천 년 동안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천 년이 다 찼을 때 잠깐 놓임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탄이 사용할 수 있는 잠시의 시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제한된 그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과 마귀가 아무리 발악을 하면서 우는 사자처럼 교회와 성도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잠시 잠깐 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도 잠시 잠깐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기쁨과 찬양과 감사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세세토록 영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잠시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 사탄은 결박되어서 무저갱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결박되었다고 해서 전혀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묵시문헌은 많은 상징들을 사용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랬을 때 여기에 나오는 무저갱이나 용이 모두가 영적 실체에 대한 상징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천 년 동안 결박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시기에 믿음의 성도들을 결정적으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을 누가 감히 들먹이면서 하나님께 시비를 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여전히 남는 문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보았을 때 사탄이 완전히 망했다고 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사탄은 수많은 성도들의 생명을 빼앗아감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에서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교의 현장에서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탄은 분명히 현존하고 있고, 성경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요한계시록 12장과 20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탄의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지상으로 쫓겨난 사탄이 예수님을 삼키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이제는 이 땅에 남아 있는 교회를 없애려고 우는 사자처럼 맹렬하게 공격합니다. 그런데 20장에 오면 그 사탄이 결박된 채 천 년이 찰 때까지 무저갱에 감금되어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12장에서는 맹렬하게 공격을 한다고 했는데, 20장에서는 아무런 미혹도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12장과 20장에서 강조되는 사탄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사탄은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머리를 상하게 되었습니다. 치명적인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 쓰러질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은 출혈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칼을 휘두르며 성도들을 위협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2장은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끝까지 인내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충성하도록 전투를 독려하는 장입니다. 거기에서 사탄은 이미 패한 모습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삼킬 자를 찾는 모습을 통하여 사탄을 결코 만만한 존재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는 가운데 굳건한 믿음으로 악한 마귀를 대적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반면에 20장에서는 성도들을 그와 같은 전투의 길로 독려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지금 맹렬한 기세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악한 사탄의 세력들이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장면입니다.

 

, 사탄의 세력이 마지막에 직면하게 될 궁극적인 패망을 미리 보여주면서 성도들에게 악이 현재도 멸망한 상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악이 이기고 나중에야 악이 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본다면 기독교는 도피주의적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과 그의 세력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멸망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이미 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탄이 어떠한 공격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성도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탄은 아마겟돈 전쟁, 곧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완전하게 멸망합니다. 반면에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지막 날에 기쁨이 넘치는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계시록 20장에서 확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비록 사탄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천 년이 다 찼을 때 사탄이 무저갱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나와서 만국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시험을 지나오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사탄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한 영혼이라도 파멸시켜서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령 충만함 가운데 항상 깨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영적 전쟁을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우리가 안일하게 생각하면서 방심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따라서 끝까지 인내하는 가운데 믿음을 굳게 붙잡고 주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우리는 사탄 마귀의 어떠한 공격에도 넘어지지 않고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탄을 따르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음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완전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를 정리하면, 사도 요한은 사탄이 천 년 동안 결박을 당할 것과 첫째 부활에 참여한 교회가 사탄이 무저갱에 감금된 천 년 동안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탄이 잠시 놓임을 받아 그에 의해 미혹된 땅의 사방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여 종말론적 대 전쟁인 곡과 마곡의 전쟁, 즉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대 전쟁을 일으켰던 마귀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검과 하늘의 불로 말미암아 태워지고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모든 죄악과 질고의 원천이었던 사탄이 영원한 형벌에 내던져짐으로써 현재의 부패하고 타락한 우주 전체가 붕괴되면서 일단은 정리가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인 신천신지가 새롭게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오고 오는 역사에서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백보좌 심판입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사도 요한은 지금까지 보았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환상인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희다는 것은 깨끗하다’, ‘순결하다’, ‘거룩하다’, ‘전혀 흠이 없다’, ‘전혀 불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좌는 하늘 보좌인데, ‘왕적 위엄왕적 통치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좌가 크고 희다는 것은 심판의 강한 두 성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그 보좌가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피조물들인 온 우주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가 희다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신 분으로써 부정한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심판을 가리켜서 소위 백보좌 심판이라고 합니다. ‘백보좌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심판이 모든 자들에게 편견과 사사로움이 없이 절대적 공의로 행해질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온 우주의 최후 심판과 관련해서 그 보좌에 앉으신 심판자가 누구이신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환상 중에 보았던 최후 심판자를 가리켜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

 

흔히 마지막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하신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요한복음 5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510절에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최후의 심판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하신다고 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본문에서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는 누구이십니까? 이 분은 온 우주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앞선 4장과 5장에서 언급되었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성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본질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 대한 심판을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시는 재판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에 보면, “내가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악에 물든 우주 만물이 더 이상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완전히 소멸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주 만물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지금까지 탄식하며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만물이 소망하는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차 우주 만물이 새롭게 되기 위하여 타락하고 부패한 옛 질서가 물러가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은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세상이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될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서 유념해서 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종말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세상의 마지막 종말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소위 삼대 칠중 재앙으로 불리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이라고 하는 연속되는 재앙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재앙들의 기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고, 또 소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앙 이후에는 큰 음녀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현재 세속 문명이 멸망하는 일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 및 그로 인한 사탄 세력의 멸망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비로소 타락하고 부패한 현 세상이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마침내 세상에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말 그 자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한 순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종말이 오기까지는 오랜 세월과 단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천 년을 하루와 같이 참으시고 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가운데서조차도 세상의 종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종말을 예고하신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종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의 예언들을 의심합니다. 심지어는 아예 세상의 종말은 없다고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종말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단계에 따라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세상의 종말에 어느 정도 다가왔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들을 보았을 때 그날에 상당히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현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세상의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세상의 종말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세상의 종말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면 세상의 종말이 우리의 생애 중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신뢰하고 지금의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믿고 그 징조들을 통하여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막연히 종말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당당하게 맞을 수 있도록 늘 깨어서 준비하며 경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종말을 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날은 기쁨이 가득한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방종하며 산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저주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은 누구입니까?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여기에 보면, 바다에서 죽었던 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사망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음부는 사람이 죽고 나서 일시적으로 가 있는 중간 상태를 말합니다. 흔히 성경에서는 무덤과 비슷한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음부에서도 나오고 바다에서도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살다가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무덤이든, 화장이든, 아니면 상어의 밥이 되었든, 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든, 본문에서는 죽은 자를 내주고라고 해서 어디서든지 간에 죽었던 사람들을 다 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그 날, 태초 이래로 죽어서 티끌이 된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을 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성도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12절에 보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보좌 심판대 앞에는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다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도 92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여기에는 결코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자와 불신자가 받게 될 심판의 기준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 사실을 본문 12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에 보면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펼쳐져 있는데 곧 생명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는데, 13절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백보좌 앞에 펼쳐진 두 종류의 책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행위들을 기록해 놓은 책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기록해 놓은 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단순한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와 마음속의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무익한 말까지 전부 다 기록되어 있는 책들입니다.

 

그리고 그 책들에 기록된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대상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부활은 세세토록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 무서운 심판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백보좌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책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책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달아보신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백보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어린양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패하고 타락인 인간은 스스로는 거룩함이 없고, 깨끗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의롭다고 확정하시고 판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순간부터 사탄의 나라에서 천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지옥에 가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심판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은 완벽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부족하다고 해서 여러분의 구원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판결을 내리셨다가 그 다음에 다시 그것을 취소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번 판결하시면 다시 취소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서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불안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라도 자신이 지옥에 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절대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지옥 가는 심판은 여러분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심판을 받느냐? 상급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똑 같이 판결을 하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불공평함이 되는 것입니다. 차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들을 놓고 상급의 심판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의 뜻에 따라 행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상급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통해서 보상을 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보상은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잘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고생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영원히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보상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넘어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도 말씀을 듣는 자세 하나 하나가 전부 평가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도 전부 생명책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은밀한 중에 우리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계십니다.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보시고 갚으신다는 이 신앙을 놓고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살도록 겸손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살 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차등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주신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더 충성해야 합니다. 중직을 맡고 나면 충성이 끝나버리는 그런 신앙인이 되면 안 됩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반드시 많이 요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어떻게 되느냐?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이 말씀은 이 땅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비참한 결말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엄청난 부와 권세를 지녔고, 많이 배웠고, 아무리 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피할 수 없이 맞아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결정짓는 유일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실 때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불못으로 던져지는 모습을 환상 가운데 미리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다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우리의 이름이 다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절대로 불못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나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것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짐을 당합니다. 영원한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지옥 교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지옥을 설교하는 사람도 드물고, 지옥을 설교하면 교인들이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양심에 따라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목사이고 참된 성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듣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가장 은혜를 받는지 아십니까?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를 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듣기 싫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들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지옥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가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면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1절에 보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영원히 의식적인 고통을 밤낮 쉬지 못하고 세세토록 당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사도 요한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 행위의 기록에 따라서 심판을 받아서 불못에 던져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사람들이 아무리 부인을 해도 이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사실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옥은 있습니다. 가 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곳에 가 볼 필요는 없습니다.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태초 이래로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영생에, 불신자는 영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지금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가족들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우리와 함께 영생에 이르도록,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남지 않은 세월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인내하는 가운데 믿음을 붙잡고 자신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생명책에 당신의 이름은 기록되었는가? /20:1-15/ 유기성목사

2018-06-27 01:07:11

 

20:1 나는 또 한 천사가 아비소스 (무저갱)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2 그는 그 용, 곧 악마요 사탄인 그 옛 뱀을 붙잡아 결박하여, 3 아비소스에 던지고 닫은 다음에,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 동안 가두어 두고, 천 년이 끝날 때까지는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4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5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7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서, 8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그들을 모을 것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9 그들은 지면으로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10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11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2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14 그리고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15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자리에 전도 받아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이 계실 텐데, 진심으로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새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할 성경 본문 계 20장은 전도대상자들에게 너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준비하신 성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20장에는 마지막 때 있을 천년 왕국과 이어지는 마지막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하던 바벨론이 멸망한 다음 마귀도 무저갱이라고 하는 아비소스에 천년 동안 갇히게 됩니다. 사탄이 역사하지 못하는 놀라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마귀에게 절하지 않고 순교했던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여기 언급된 천년 왕국이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있느냐,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기에 성경대로만 믿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아마 알려주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에게 붉은 색깔을 설명하여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논란 없이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주님의 교훈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반드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마지막 심판에 이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천년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사탄이 풀려나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터인데, 그것은 사탄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주님을 대적하는 군대를 삼켜 버리고 미혹하던 악마와 함께 영원히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버리게 됩니다.

 

그 후, 크고 흰 보좌 위에 주 예수님께서 앉으셔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게 됩니다.

그 때, 그동안 있었던 땅과 하늘이 사라져 버리고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부활인데, 빌라도도 가룟 유다도 히틀러도 스탈린도 김일성도 그 자리에 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뉩니다. 순교자들이 먼저 부활하여 주님과 다스리고, 그 후 부활한 이들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2011년 미국의 롭 벨 목사는 자신의 책 [사랑이 이긴다]에서 지옥은 없으며 인간은 죽어서 모두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책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2위에 오르는 등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옥이 정말 있을까요? 아마 큰 논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렇습니다.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셨는데,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다 대고 있어보라. 잠시 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온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 보라라고 했습니다.

 

지옥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독약 병에 독약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해골 표시를 하지 말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친절이고 사랑입니까? 그것은 지옥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일 뿐이며, ‘지옥은 없으니 죄지어도 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 네 마음대로 살아라는 마귀의 유혹인 것입니다.

 

무디(D.L. Moody)만일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고 성경은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 기존 예배당도 오락 장소로 바꾸어 써야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펼쳐진 책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행위를 기록한 책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그 책에 사람들이 일생 했던 생각, , 모든 행동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여러분의 책이 있습니다. 한 평생 마음속에 생각한 것, 누구를 미워한 것, 은밀한 가운데 행한 모든 더러운 행동,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일, 남편이나 아내도 모르고 부모도 자녀도 모르는 일이 다 기록되어 있고 그것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일생동안 행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대조해서 선행이 악행보다 많으면 구원받고 악행이 선행을 능가하면 멸망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느냐 만 문제입니다.

얼마 전 전직 대통령이 재판을 받아 엄청난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잘한 일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은 죄가 있으면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는 또 하나의 책이 있습니다.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지막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누가 그런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아주 쉽습니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입니다. 얼마나 쉽고 간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알고 나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 보다 더 큰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복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전도 받아 오신 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교회 나오라 예수 믿으라 극성스럽게 전도하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생명책에 기록되어야겠다는 뜨거운 소원 때문에 그렇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교회 현관 게시판에 이름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보셨을 텐데 하나님의 보좌 앞의 생명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이름들은 이번 전도집회 전도대상자들입니다. 모두 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세상 사람들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도 천국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간혹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많이 지어도 천국가고 세상 사람은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지옥 간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말인데 엄밀히 말하면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인데, 그 생명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래서 생명책에 자신이 이름이 기록되었는지는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하셨음을 아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결코 세상 사람보다 죄 많이 짓고 살 수 없습니다.

7:21에 보면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기만 했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들에게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7:33)고 하실 것이고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42, 50) 하셨습니다.

 

자신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예수님과 동행하면 의롭게 살게 마련입니다.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5장에 보면 구원받은 자와 멸망당할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주린 사람을 보았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고 벗은 자에게 옷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갔었느냐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였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25:40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셨으니 지극히 작은 자를 보아도 주 예수님을 함께 보는 사람이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의롭고 거룩하고 사랑이 많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시 여전히 죄성을 가진 사람이고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도 혈기나 정욕이나 음란이나 거짓의 충동과 유혹이 있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값없이 주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그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였기에 사탄의 고소 앞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정결케 되고 의롭게 되었다고 변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그렇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행위로 심판받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넘기면 큰일입니다.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기 전, 여러 번 경고 전단을 투하해서 피난가라고 했습니다. “히로시마 시민 여러분, 194586일 이전까지 50Km 밖으로 피난가십시오. 그날 원자탄이 투하될 터인데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코웃음 쳤습니다. “전쟁에 패하게 됐으니까 공갈친다.”, “30만 명이나 죽이는 폭탄이 어디 있어?”, “피난 갈까?” 망설이던 사람도 두고 보지 뭐.” 하고 주저앉았습니다.

결국 극소수의 사람만 피난 가서 살았고 거의 다 타죽었습니다.

 

마지막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이 오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매일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주님께서 눅 10장에서 칠십 인을 전도자로 파송하였는데, 그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하였을 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하셨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에게는 이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기 위하여 의롭고 거룩하고 사랑을 베풀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증거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기쁨 때문에, 의롭고 거룩하고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기쁨 때문에 어떤 시험도 고난도 이기는 것입니다.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꼭 목 베임을 당해야 순교가 아닙니다. 그럴 기회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유혹이나 핍박 앞에서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순교신앙입니다.

 

이처럼 주님과 늘 함께 동행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지만 먼저 보낼 수는 있습니다.

이민 갈 때, 이삿짐은 배로 먼저 부칩니다. 그리고 몸만 입국을 하여 부친 이삿짐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했던 일, 성도를 사랑했던 일,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던 일,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했던 일, 용서하고 사랑했던 일 때문에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기쁠 것입니다.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이것이 새 생명의 삶을 사는 사람의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여러분, 아직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확신이 없다면 지금 이 시간, 생명이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찬송 180장 하나님의 나팔 소리

 

admin

 

 

 

백보좌 심판과 그 전후 사건 1 /20:11-15/ 폴 워셔 Paul Washer

2015-06-18 20:09:00

 

당신을 태우러 기차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1절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잠시 멈춰 서서, 당신이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님은 진실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자주, 내 육신을 기쁘게 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죽음의 기차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 기차는, 비록 아주 천천히 오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확실히 내 앞에 도착합니다.

그 기차를 타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듯이 서게 되는 날이 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긍심self-esteem을 잃어버릴까봐,

또는 은행잔고가 없을까봐 걱정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 최후의 심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야 합니다.

 

지금 무수한 사람들이 지옥의 멸망 판결을 받고 있는데..

당신은,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주무실 수 있겠습니까?

 

이 성경의 말씀, 심판에 관한 말씀은.. 현실입니다.

그건 30, 50년 후, 먼 미래의 일이다!’ 라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50세만 지나서 되돌아보면, 과거의 1020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30, 50년 후의 현실도.. 금방 내 코 앞에 닥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자신의 최후 심판을 생각하며,

또한 세상 사람들의 백보좌 심판을 염려하며..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5감각으로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보다

훨씬 더 실재reality입니다.

이것은 다만 시간의 문제이지, ‘가능성의 문제는 아닙니다.

 

백보좌 심판 직전에, 사탄의 심판이 있습니다.

 

백보좌 심판을 나타내는 본문 계2011절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한글성경엔 또 내가 보니..” 라고 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은, 11절에서 백보좌 심판의 환상을 보기 전에,

앞서 10절에서,

사탄이 불못에 던져지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0.

최후에, 흔히 Satanic trinity (삼마일체)라고 부르는

사탄, 짐승, 거짓선지자가.. 불 못에 던져져서,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구절이 계201~10절입니다.

 

그리고이어지는 11절에서,

백보좌의 심판,

즉 불순종과 불신의 인간에 대한 심판이,

사탄의 삼마일체에 대한 심판과 연이어서 나옵니다.

 

10절과 11절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먼저 마귀의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연이어 불순종과 불신앙의 사람들을 심판하시는데..

 

물론 이 백보좌의 심판때는 신자들도 함께 심판을 받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사탄의 세력을 먼저 심판하시고,

이어서 사탄을 추종했던 사람들도, 반드시 사탄과 함께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고를 줍니다.

불신자들과 불신앙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최후에 받는 심판은,

사탄의 심판에 연이어서, 사람도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판결도 똑같습니다.

사탄의 세력도 '불못'이고,

불신자들도 그 심판의 결과는 '불못'입니다. 20:15

 

 

새 하늘과 새 땅 전에, 백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20장부터 대지를 크게 나누면

201~10절까지는.. <사탄의 심판>

2011~끝절 15절까지는.. <백보좌 심판>

그리고 계21장과 22장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여러분, 이 순서를 눈 여겨 보십시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는 <삼마일체,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이어서 <백보좌 심판>을 통해, <불신자>들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깨끗이 정화하시고, 청소하신 후에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전에,

하나님은, 사탄의 모든 역사를, 지난 수 천 년간 내려왔던 사탄과 그 훼방을

먼저 심판하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천국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탄이 계속 역사하고, 훼방하면.. 그게 어디 천국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 오실 때,

그 원수인 사탄이 <먼저, 앞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쓰러뜨린 후, 또 다른 원수를 심판하실 것인데,

그 원수는 바로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탄을 따라갔고, 사탄의 종이 되어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탄>을 심판하시면서, 연속해서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피조세상이 새롭게, 온전케, 의롭게 되려면.. 심판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백보좌 심판에서, 많은 인간들은 지옥(불못)으로 갈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는

자신의 몸을 이탈하는 경험을 합니다.

 

천사는 스크루지를 데리고 이집저집 돌아다니고,

스크루지는, 천사를 따라서, 우연히 방문한 집에서, 그 집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 아주 지독한 말들을 해서

스크루지조차, 그 저주의 대상에 대해 동정심을 느낄 지경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집 사람들이 스크루지라는, 자기 이름을 부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저주의 대상이, 사실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만, 이 이야기를 고쳐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 하늘에서 천상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파리가 되어서, 그 회의장에 잠입해서, 벽에 붙어서,

그 천상의 회의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전에,

세상을 죄로 오염시킨, 사악하고 비참한 존재들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신은, 당신의 이름 석자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악한 존재 중에는.. 바로 당신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건설하시기 전에,

이 피조세계를 죄로 오염시킨 모든 것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제거 대상, 심판의 대상 중에는

내 이름도, 거기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2011~15절의 백보좌 심판에 관한 말씀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번 들어보실까요?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나라 사역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마지막 심판 때, 그 생명책에 당신의 이름도 들어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지만,

당신은 전에, 이 진리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이런 설교를 들으셔야 합니다.

그 심판은 너무 엄중하기 때문이고,

'기차'는 나를 태우러, 지금도 계속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보좌 심판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20:11

오늘날 신자들, 즉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보좌를 보는 것입니다.

보좌를 보는 사람은.. 다 그의 인생과 신앙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에서 주의 옷자락이 가득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에스겔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도 하늘 보좌를 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보좌를 봐야 합니다.

위 구절을 암송하면서, 묵상하면서, 그 보좌를 보실 수도 있습니다.

꼭 봐야 합니다.

 

당신을 구속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주인이시며

거대한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 보좌는 너무나 높고 거대해서, 그것에 비교하면

모든 피조세계는 안개같이 사라져 버릴 지경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주의 일을 하다가, 세상이 모두 당신을 대적할 때도

당신은 보좌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회복되고, 다시 힘을 얻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도

하늘의 보좌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셔야 합니다.

 

꼭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본문 말씀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축복하시고 지지해 주셔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언젠가 그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언젠가 그 보좌 앞에서, 완벽한 정의 가운데 심판 받을 것입니다.

 

보좌의 권세

보좌는, 그분의 능력과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도 보여주지만,

하나님이 앉으신 그 보좌가, 심판의 보좌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셔야 합니다.

 

로마서 14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라고 합니다.

고후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 심판대(베마) 앞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리스도의 심판대(베마)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날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재판장과 피고가 뒤바뀐 그 날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찮게 여겼고, 헤롯과 협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무것도 아닌, 물건처럼 취급했는데,

이제 빌라도가 그리스도 앞에 설 것입니다.

 

빌라도가 참 비참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이 비참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빌라도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빌라도처럼,

복음을 계속해서 듣고서도, 그 분에 대해 고려해 본 후, 그분을 거절했습니다.

아니면 그리스도를 시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저 종교적이 될 만큼만 그리스도를 대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섬기는 그 정도만큼

당신은 사실 그리스도를 심판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불순종만 죄가 아니라,

당신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식이나, 그분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그분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크고흰 보좌

희랍어로 메가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외관의 크기, 치수, 무게, 탁월함, 권세, 능력이

모두 총체적으로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서게 될 심판의 보좌가 그렇게 위대합니다.

 

보좌의 위대함은, 그 발등상에서도 나타납니다.

보좌의 발등상은 이 지구 자체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이고, 땅은 나의 발등상이다

모든 대륙을 소유하고 유지한 왕은 없었습니다.

 

우리와 세상이 떨 수밖에 없는 위대한 왕도,

지구의 일부분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앞에 서게 될 이 왕은, 너무나 위대해서

그 보좌의 발등상이, 이 지구 전체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능력과 권위는

얼마나 위대하겠습니까?

 

나는 크고 흰 보좌를 보았다

사실, 그 보좌 앞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이 서 있습니다.

 

인간이 바다를 이루고 있지만, 요한은 그들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그렇게 위대하시기 때문에

요한은 오직, 그 분만 눈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보좌 앞에서,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많은 가치를 두고 있으며

우리는 서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실 때는

우리 인간은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교만의 문제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보좌를 봐야 합니다.

그때 모든 교만은, 즉시로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보좌가 위대한 이유는, 그 위에 앉으신 분 때문입니다.

그 분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알파와 오메가이고,

고대부터 계신 분, 보이지 않는 신, 송축 받으실 분,

권능자, 거룩한 분, 의의 하나님, 신 중에 신이며, 왕 중의 왕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고, 율법을 주시는 분이시고,

모든 자를 심판하실 분으로

이 분은, 우리가 두려워할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 분이 우리가 두려워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4:34~35,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그의 총명이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오직 이 땅만을 보며

그런 사람들의 모든 판단의 근거도.. ‘땅의 것입니다.

 

그런 당신이,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총명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보시고, 실재 Reality가 무엇인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제가 시poet를 위해서, 제 인생을 걸 것 같습니까?

이것은 시가 아니라, 실재입니다.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 만이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믿는 우리의 마음은 새로워졌고,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그렇다고 해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진정한 복음을 갖고 있다고 종일 자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매혹당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반짝거리는 것들,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에 의해

매혹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늘과 보좌를 우러러 볼 때,

진리에 대한 총명이, 신앙심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흰색'의 의미.

보좌는 흰색이라고 합니다. 백보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무너집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의를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했다고 해도, 소통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언어는 미약합니다.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의 이글거리는 백색의 찬란함!

천사조차 자신을 가리지 않고, 그 앞에 설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스랍들은, 히브리어로 불타는이라는 뜻이 있는데

그들 자체가 불타는 것이 아니라,

이 위대하고 두렵고 무시무시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를 반영합니다.

 

당신이 심판받을 보좌는, 점도 흠도 없는 백색으로,

어떤 협상도 허락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인 완벽한 백색의 의에 의해 심판 받을 것입니다.

 

.............

 

20장의 보좌와 계4장의 보좌를 비교해 보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보좌 심판과 그 전후 사건 2 /20:11-12/ 폴 워셔

2015-06-19 14:06:30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위 성경은 주의 임재 앞에서, 땅과 하늘이 피하여 도망간다고 말씀합니다.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했는데,

하늘과 땅이, 자기 있는 힘을 다해서,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도망치듯, 뒤로 물러난다는 것입니다.

 

루터교 신학자 싸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보세요, 이 말은 고전적 표현입니다.

 

그 보좌 위에는 끔찍하게 두려운 분이 앉아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교회에서 언제, 하나님이 끔찍이 두려운 분이다.. 라는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러나 과거에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끔찍이 두려운 분 awful God 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보좌 위에는, 이름도 형상도 모습도 없이

오직 신비하고 끔찍하고 awful, 무게 있는 존재가 앉아 계시는데,

그 분은 오직 이름 지을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곳에는 전능자의 벌거벗은 (가려지지 않은) 끔찍하게 두려운 임재가 있어서,

하늘과 땅이 그 앞에서 도망을 갑니다.

 

752.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975.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왁스) 같이 녹았도다

 

위 구절들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그 거민이 다 소멸되고, 온 땅이 다 녹는다고 합니다.

너무 두려운 말씀이 아닙니까?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그 가운데는 교만한 사람도 있고, 위대한 인물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용광로로 들어간 조그만 밀랍 인형처럼.. 다 녹아버릴 것입니다.”

 

저는 어제, 우연히 TV에서, <집을 새롭게 단장해 주는 어떤 방송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 선택되어, 자기 집을 무상으로 단장 받게 되었는데,

카메라가 비추는 그 집 안에서,

붉은 벨벳 예수라는 인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벼룩시장에서 그 예수 형상을 샀다고 했는데,

그 인형은, 50센티 정도 높이의 예수 조각상이었습니다.

 

인형 (예수님) 옷은 붉은 자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그런데 신성모독적인 것은, 그 위에 작은 동전 삽입구가 있는,

말하자면 예수님 저금통이었습니다.

 

아마 신상을 만들기 좋아하는 남미에서 만든 것으로 보여지는데,

돼지 저금통을 만들듯이, ‘예수님 저금통을 만들어 놓았고,

 

그 가정은, 그것을 구입해서, 자기 집 한 복판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돼지가 복을 불러오듯이,

예수님이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가정은, 그 예수 상, 사실은 저금통을,

자기 집 아파트 거실 한 가운데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스스로, 그 조각상, 즉 가정 제단 근처를 성전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TV 방송을 보면서,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히 그들이 사는 삶의 모습을, TV를 방영하는 중에, 카메라로 잡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누가 더 비참한 존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 형상으로 된 저금통을 만들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TV 방송을 보면서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군!’하며 혀를 차는 사람들인지..

여러분, 둘 중에, 누가 더 비참한 존재입니까?

 

TV를 보면서, ‘저 우상숭배, 저 무지함을 비난하는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도,

사실은, 자기 집에 예수 형상 저금통만 갖다 놓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과 똑같이, 자기 집 가장 중앙에, ‘물질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지 않나요?

 

우리도, 어리석은 그 가정과 똑같은 짓을 .. 종종 하고 있지 않나요?

예수님을, 복을 불러오는 돼지 저금통과 동일시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그리스도가 진정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돈만 많이 벌어다 주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 예수 저금통을 섬기는 우매한 우상숭배자들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이 딱지치기나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그것에 자기 목숨을 걸고, 따려고 열심히 애쓰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을 가지고, 똑같이 그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밴스 헤브너 목사는, 신자들이 다이아몬드 공기놀이를 하면서

애를 쓰며 살고 있다고 풍자했습니다.

 

공기놀이를 하는 돌이, 다이아몬드로 바뀌었을 뿐이지,

그 탐욕과 재미란 본질은, 아이 때나 어른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엄위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

그 앞에서 하늘과 땅이 녹아지고, 모든 인간들이 녹아질, 그 두려우신 하나님을 모르고,

 

그저 다이아몬드 공기놀이를 하면서,

하나님 도움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부자되고, 성공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부모라면,

손님이 여러분의 집에 와서, 집을 어질러 놓거나, 여러분의 옷에 때를 묻히면

그건 화가 나지만, 참을 수 있는 화입니다.

 

그런데, 어떤 낯선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여러분의 자녀를 때리거나 조롱하면.. 부모는 불같이 화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돼지 저금통취급해서, ‘예수 저금통을 만들어 놓고,

 

예수 저금통을 자기 집에 들여놓지 않아도,

똑같은 심정으로,

예수가 오직 자기 집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 형상 앞에서 빌고 섬긴다면..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불같이 진노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들 예수를,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돼지 저금통따위로 취급한 사람들을,

마지막 심판 날, 밀랍인형처럼 다 녹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외아드님을,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 분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격렬하게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누군가 당신을, 만왕의 왕 앞으로, 그 심판대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 힘은 너무나 강해서, 당신은 절대로 뿌리치고 도망갈 수 없습니다.

 

보니까, 하늘과 땅은

당신과 반대 반향으로 뒤로 물러갑니다. 피하여 없어집니다.

 

그때 하늘과 땅과 만물은, 피하여 도망가면서, 외칠 것입니다.

도망가라. 도망가라. 왕의 진노로부터 도망가라!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의 진노 앞에서, 누가 견딜 것인가?’

 

강은 그 앞에서 마르고, 산은 밀랍(왁스)처럼 녹아내립니다.

 

개미 같은 존재인 당신은,

왕의 심판대 앞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이 두려워서 그 앞에서 도망친,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하며,

지금 가슴을 펴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귀담아 들으십시오.

 

당신의 업적과, 지위와, 성과와, 자랑,

또한 모은 재산을 뽐내며,

그 위대한 왕의 심판대 앞으로, 당신은 걸어 들어가면서,

 

이 세상에 속한 것 중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

당신을 지나서, 파멸의 길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동자가 주행할 때 보면,

반대편 차선으로는, 다른 차들이 역주행해서 달려갑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으로 행진해 나아가고,

이 세상과, 또한 자기가 가진 모든 세상 것들은, 역방향으로 피해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장면을 정확히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불 속에서 겨우 건져진, 구원받은 자가 될 것입니다. 고전3:15.

 

여러분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모든 것을 다 잃고, 여러분의 몸만 겨우 서게 된다면.. ‘불 가운데 겨우 구원 받은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평소에 주님을 잘 섬긴 열매와 공적을 갖고서, 그것과 함께 서게 된다면,

, 그 영생의 열매들이, 심판주 앞에서, 피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날,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12:17절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세상이 지나간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떠밀려 사라진다입니다. pushed out 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토록 갖고자 애쓰는 것들,

영원치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심판 가운데 밀어내고, push out 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사도요한은 말씀합니다.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20:12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 '죽은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은, 끔찍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

육신이 죽은 자로도 볼 수 있지만,

그런 뜻과 아울러, 영혼이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숫자는.. 큰 자나 작은 자나.. 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입니다.

 

싸이스 라이트

큰 자나 작은 자나

큰 죄인이나, 작은 죄인이나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을 유의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큰 죄인뿐만 아니라,

작은 죄인들.. 즉 평민, 무식한 자, 가난한 자들도.. 죄인들은 다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황제나 거지나.. 심판 때는 똑같습니다.

 

그곳에는 흰옷 입은 자들도 없고,

'점도 흠도 없는 자'들도 없고, 종려나무도 없고,

벌거벗은 죄인들과

벌거벗은 전능자가 보좌에 앉아서,

영원한 저주를 선포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싸이스 박사는, 자기 책에서, ‘벌거벗은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벌거벗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벌거벗음입니다.

이 표현은, 최후 심판에 관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1. 여러분, 제가 이런 묘사를 한다고 해서, 낄낄대며 웃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갑자기 이 순간에, 이 교회 안에서

당신만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끔찍하겠지요?

 

여기서 벌거벗는다는 뜻은, 비유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런데 하나님도 벌거벗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벌거벗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그 엄위하심과 두려움을 감춰줄 만한, 어떤 안전장치, 보호장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극치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장면을 보았을 때, 너무도 두려워했습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서, 그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그 둘로는 날며 찬송하며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고 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흘깃하나님의 보좌를 보고도, 이렇게 두려워했습니다.

(벌거벗은.. 이 아니라) 옷으로 가려진 하나님의 신성을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사야는,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장차 우리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뵙게 될 그 하나님은

(이사야가 보았듯이) 옷자락으로 가려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벌거벗은 신성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싸이스 박사가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것도 이사야처럼 흘깃보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는 시간 내내, 그 두려운 존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사야보다, 얼마나 더 끔찍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감싸주지 않는 사람은) 정말 기절할 듯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당신하나님의 신성의 충만사이에

가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둘 다 벌거벗고, 서로 마주 서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벌거벗는다는 뜻은, 당신이 행한 모든

더럽고 추한 행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불 앞에 낱낱이 다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벌거벗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그 엄위하심과 두려움을 감춰줄 만한, 어떤 안전장치, 보호장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20:12.

 

요한은 나는 죽은 자를 보았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영혼이 죽은 자로 서 있는 것.. 말입니다.

 

만약 구원받지 못한 자가, 성경에 나온다면,

바로 이 구절에, 죽은 자의 그룹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당신이, 성경에 언급된 구절이 있다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오늘날 당신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죽은 자.. 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당신의 얼굴을, 거기서 보았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 벌거벗고 서 있는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당신뿐만 아닙니다.

인류의 수많은 무리들이, ‘죽은 자에 속하며,

당신도 그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 계시록은, 당신의 미래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회개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장차 그렇게 됩니다.)

 

당신이 스크루지 영감이고,

당신이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대 앞에, 벌거벗고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큰 자나 작은 자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 자.. 세상에서 크게 출세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보면,

큰 자, 수증기나 연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629절에,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이사야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이게 과장법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코에서 숨이 한 번 푹 꺼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는 다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의 코의 호흡이 멈추면, 그것으로 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세상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또는 물질을 어마어마하게 모았다 할지라도,

그 심판대 앞에 가면, 자신의 본질을 비로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다 연기요, 증발하는 수증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세상에서 좀 출세하고 성공했다고,

우리가 교만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는 증기에 불과하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날에, 안전합니다.

 

요한은 또한 작은 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작은 자도 큰 자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작은 자,

자기 자신을, 히틀러, 스탈린과 비교해서, 그들같이 큰 죄인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큰 자나 작은 자, 그 본성은..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 날에, 당신은

역사상 가장 악한 자와 비교해서 상대평가로 심판 받지 않고,

 

만약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의로운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혹자는,

천칭 저울의 한 쪽에 율법이 있고, 다른 쪽에 인간이 놓여져서

인간이 율법과 비교해서.. 부족하다는 판결을 받는다.. 고 말합니다.

 

어쨌거나, 어떤 기준으로 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받을 판결은,

너무나 두렵고, 어떤 사람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두려움의 극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성경에서 이런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대할 때,

자세를 똑바로 앉아서, 등을 세우고, 귀담아 듣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축 쳐져있거나, 나와 상관없다는 태도로, 뒤로 느슨히 앉아서 듣는다면,

그 자세가 벌써 최후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의 미래와 영생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을.. 자기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구부정하게, 또는 느슨하게 무신경한 태도로,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지옥은 존재하는가? /살후1:7-9/20:15/ 옥한흠 목사

2015-05-11 18:20:51

 

불안한 죽음

 

호스피스 일을 보시는 최 교수님의 책을 보면,

돈 많은 어느 사장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어느 날 몹시 떨며

두 무릎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서워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최 교수는 왜 그렇게 무서워 떨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옥 갈까봐 그래요...”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그 최 교수는 지옥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했더니

눈을 번쩍 뜨면서 , 가르쳐 주세요하더란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값없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고 일러주었더니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평안한 얼굴이 되고, 며칠 후에 돌아가시는데

 

부인한테 간곡히 부탁하기를 여보, 최 교수님한테 지옥 가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해주세요라고 하고

평안한 마음과 천사같이 빛나는 얼굴로 천국 가더란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영원한 고통의 장소,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1. 과연 지옥이 존재하는가?

 

추수는 반드시 있다

 

농사를 지으면 마지막에 추수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때가 있듯이

세상 끝 날에 심판이 있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사람들은,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지옥 같은 것은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서운 마귀의 미혹이다.

 

하나님은 밤낮 웃고만 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도 되시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다.

 

지옥의 원래 존재 목적

 

어떤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사람을 집어넣어 고통을 받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만든 곳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히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라고 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더니 한 교양 있는 여자는

목사님, 20세기에 무슨 지옥설교를 합니까? 그런 설교는 집어치우세요!”

라고 하더란다. 그때 목사님은 웃으면서

 

자매님,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사형당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나라의 질서와 공의를 위해서 반드시 형무소도 있고

사형집행도 필요한 것입니다.

 

정부가 국민을 괴롭히기 위해서 형무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고 심판의 하나님도 되신다.

 

1.무신론자들의 증언

 

영국에 무신론자 New Port는 죽어가면서 말하기를

내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필요 없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의 진노 앞에 서 있다. 나에게 지옥이 없다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의 영혼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여, 나에게 소망이 있다는 부질없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이다라고 말했다.

 

유명한 불란서의 계몽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기독교가 건설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자신)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해버리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하면서

무신론 책자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한껏 대적했다.

 

그는 또 “100년 안에 성경책은 다 없어진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면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여,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시오.

그러면 나의 값진 보물의 절반을 주겠소.”라고 말했을 때 의사는

“6주간도 못 삽니다했더니 의사를 못 살게 괴롭히면서

그러면 나는 지옥으로 가는데 당신도 같이 갑시다!”라고 하더란다.

 

그가 죽은 후 스위스 제네바의 성서공회가 그의 집을 사서

성서공회 창고로 삼았는데, 없어진다던 성경책이 그 집의 천장까지 꽉꽉 차고

넘치고 지금까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무신론자 Thomas Scott 경은, 자신의 임종 때

, 나는 이 때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들이 다 있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전능자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멸망으로 들어간다.”

라고 탄식하며 운명했다.

 

M. F. Rich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붙는 난로 위에

1백만 년 동안 누워 있는 편이 차라리 더 낫겠다.”라고 했다.

그 외에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이 수없이 많다.

 

2.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증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번만 기록되었어도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사야 7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한 번 기록되었는데

7백년 후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임마누엘로 탄생하셨다.

 

예수님은 지옥이 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8

(지옥에 왜 구더기가 있을까? 이것은 시체 썩는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사람의 썩는 살을 파먹기 위해 거기에 구더기가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차례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

만약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지옥이 있다고 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7~9

 

수제자 베드로도 지옥을 말씀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 2:4

 

사도 요한도 지옥을 말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0:15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3. 사람들의 증언

 

영국의 주요 일간지인 “The Times”(98. 7. 22.)에 가톨릭 대주교인

Dr. George Carey 가 은퇴하면서

성직자들은 교인들에게 지옥을 가르치라고 했다.

 

Carey tells clergy to give congregation Hell.

목사들은 반드시 세상의 종말과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전파해야 한다!”

 

preachers must proclaim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reality of

Heaven and Hell)라고 했다.

 

D. L. Moody 선생은 만일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 성경은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

기존 예배당도 오락 장소로 개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옥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란 죄 값으로 심판받고

지옥 갈 인간이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것이다.

 

2.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이 존재한다면 지옥은 어떤 곳인가? 흔히 지옥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 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지옥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다.

 

실제로 고통을 느끼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장소다.

강도는 그가 죽인 사람을 바라보며 양심의 고통을 느끼며,

투전꾼은 투전하며 속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끼는 곳이며,

음란방탕하며 살던 사람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며 후회하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교만하여 고집부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때 믿어둘 껄하며 영원히 후회하게 된다.

 

1.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이다

 

영원히 꺼지지도 않으며 벌레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9:48, 5:22, 20:10, 10:14-15, 21:8

 

지금도 땅속 깊은 곳에는 유황불이 끓고 있다.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에 가면

화산이 폭발했던 곳에 팥죽같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며

누런 유황이 쌓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분 집에 있는 가스불보다 더 뜨거운 불이 꺼지지 않고 붙는 곳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많이 했는데 설교하다가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 대고 있어보라. 잠시 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소통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온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16장에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나이다부르짖으며

손가락으로 물 한 방울만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애원했으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랬더니 나는 어차피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우리 집에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

 

고 했을 때 세상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 지옥이 있다고 해도 안 믿은 사람은 안 믿는다

라고 했다.

 

계시록 1411절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했다.

 

2. 피할 수 없는 곳이다

 

어느 빌딩이나 집에나 다 출구가 있고 비상구가 있는 법이지만

출구도 없고 영원히 피해나갈 소망이 없는 곳이다.

 

3. 끝이 없는 곳이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퇴원할 날이 있고

감옥에 간 사람도 출옥할 날을 기다리지만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영원히 끝없이 고통을 계속 받는 곳이다.

 

어떤 분은 천국이나 지옥을 실재하는 곳도 아니고,

시간 개념도 없는 곳이라고 설명하지만

지옥은 무시간 상태(Timelessness)가 아니라

끝없는 시간(Endless Time)이 계속 되는 곳이다.

 

참새 한 마리가 태평양 바닷물을 한 모금 물어서

깡충깡충 뛰어서 대서양에 뱉어놓으면서

그 태평양 바닷물이 다 마를 때까지 계속 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몇 억 만 년이 걸린다고 해도 영원에 비하면 시작밖에 아니다.

그렇다면 지옥에서 영원은 얼마나 긴 시간인가?

 

4. 모든 종류의 사람이 섞여 지내는 곳이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거지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다 지옥에 들어가 뒤섞여 지내는 곳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3. 지옥을 피하는 길

 

누구든지 어떤 죄인에게라도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길이 열려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어떤 죄인도 지옥 가지 않는다.

 

요한복음 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아무 종교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는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2. 부자와 나사로 눅16:19-31 01.03.25.옥한흠 목사님 설교

 

주일날 설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본문이다.

본문 자체의 해석상의 어려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자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부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16:19)

그러나 성경에 나온 부자에게 뚜렷한 도덕적 유죄성을 발견할 수 없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말, 부패 등 어느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재산이 부정 축재한 것이라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그럼 부자 되는 것도 죄인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어떻게 보면 조그만 자비심과 기본 양심은 있었다.

거지를 내 쫓지 않고, 자기 상 근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게 허용했다.

 

이렇게 너그럽고 아량 있는 부자를

우리가 나쁜 사람 취급하는 이유는 - 결과적으로 지옥에 갔기 때문이다.

 

나사로

 

거지 나사로가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무데도 없다.

단지 그가 천국에 간 것을 보고 결과론적으로 그가 의롭다고 판단할 뿐이다.

 

거지는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만약 그가 방탕하고 게을러서 거지가 되었다면, 그래도 천국에 가는가?

성경을 잘못 읽으면, 유전유죄/무전무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부자와 나사로성경본문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

 

1.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꼭 잘 믿은 결과가 아니며,

세상에서 실패한 것이 꼭 못 믿은 결과가 아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교인이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교인도 얼마든지 지옥에 갈 수 있으며,

세상적으로 실패한 교인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

 

뒤에 천국과 지옥 이야기가 만약 삭제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교인 부자를 매우 높이 평가했을 것이고

세상적으로 실패한 교인 나사로를 형편없이 낮게 평가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지지리 못 살고 늘 쪼들리는 가난한 교인

-조상의 저주가 아닐 수 있다.

 

세상에서 하루도 건강치 못하고 병들다 죽는 사람

-누구 죄 때문이 아닐 수 있다.

노숙자들 중에도 천국 갈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인과응보적 판단을 잘 내린다.

믿음=성공=부자=건강 일 수 있지만

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 판단을 유보하자.

 

2. 땅에서 보상이 없어도 천국에서 보상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16:25)

나사로가 땅에서 무슨 보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헌데, 굶주림, 걸식...

그러나 천국에서 그는 보상을 받았다.

 

손양원 목사님도 땅에서 무슨 보상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적으론 지지리 고생만 하시다가 결국 순교하셨다.

 

나환자 봉사 신사참배 반대 옥고 해방 후 다시 나환자 봉사

두 아들 순교 당신 자신의 순교

 

예수 잘 믿으면 당연히 복 받아야 되지 않는가?

동인, 동신 손목사님 두 아들이 세상에서 머리되고 부자 되어야 했는데...

 

우리 생각은 오직 땅에 굳어져 있다. 땅에서의 보상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땅에서 못 받아도 천국에서 위로를 받을 터이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16:25)

이 말씀에 위로를 받자!

 

3. 세상에서 유족하게 살고, 덕망 있게 살아도

그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예수님은 부자의 비도덕성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지옥에 갔다.

 

부자에겐, 보통, 유족함에서 오는 인격과 덕성과 여유가 있다.

부자가 양반이다는 시쳇말도 일리가 있다.

돈이 있어야 덕망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도 부자로서 양복도 사주고, 기부금도 적당히 내면서

인격과 덕망을 유지하는 교인들이 꽤 있다.

그들에게 뚜렷한 인격적 흠집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지옥갈 수 있다.

 

4. 믿음은 오직 은혜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서 자기 5형제가 여기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을 믿지 않으면, 나사로가 살아나가는 기적을 보더라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나사로처럼 기적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사람의 증언을

듣고 보고서도 안 믿는다는데, 16:31

그럼 나는 어떻게 안 보고도 믿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은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믿게 되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6)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일반인의 시각

 

영면 - 무덤에서 영원히 잠잔다는 생각.

영면 하소서!’라는 말을 시중에서 자주 듣는데,

그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자기 머리에 비판 없이 입력시킨 결과.

 

바울도, 주님의 재림 때 무덤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일어나리라고 말했는데,

그 구절만 읽으면, 성도가 죽으면 영면한다고 오해할 소지가 많음.

 

환생/윤회

 

장례식에서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면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꽤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 어머님 돌아가셨는데,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셨다

- 하관식 때 마침 옆에서 새가 날았음. 새는 산소주변에 어디든지 있다.

 

인도의 수 억 힌두교인들, 불교도들도 윤회설을 믿는다.

불교 문화권인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생과 윤회를 믿는다는 사람이 꽤 있음.

 

영혼이 떠돌아다님

 

죽은 이후 영혼이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무속 신앙의 계승.

굿을 통해 무당이 죽은 아버지의 혼을 불러내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굳게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즉시 천국과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 (네가 오늘 나와함께 낙원에...)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유물론적 사고방식이다. 극소수 철학자들만 이런 철학을 고수한다.

 

 

성경적 내세관

 

우리 육신이 죽으면,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대 앞에 선다.

허공을 떠돌지 않고, 무덤에서 자지 않고, 즉시 간다.

 

천국에 간 영혼은 보좌 앞에서 때가 차기까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쉰다(영혼부활)

 

주님의 재림 때, 천국 보좌 앞에서 쉬던 영혼들이

주님과 함께 공중으로 재림한다.

 

그 때 무덤에서 잠자던 육체가 일어나 공중에서 영혼과 만나

(영혼부활 +육체부활)을 이룬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영혼+육체적 부활체로 살아간다.

*그럼, 영혼부활(죽음)과 육체부활(재림) 사이의 기간은 몇 년일까?

- 그것은 죽을 때 3차원의 시간에서 4차원의 시간으로 넘어감으로

그런 계산이 무의미하다고 본다.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다.

 

*죽어서 영혼이 부활해서 가게 되는 천국과

나중에 재림 때 가게 될 새하늘과 새땅은 어떻게 다른가?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다. 넓은 의미로 다 같은 천국으로 본다.

차이는, ‘마귀가 살아있을 동안마귀가 불못에 심판받은 후의 차이다.

 

 

 

 

20:4-14/최후의 심판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25:55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二十十二)

 

오늘 아침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히브리서 二十七절에 이와 같이 기록되었습니다.사람이 한 번 죽고 그 후에 심판 받는 것은 정하신 것이니라인간의 생활이란 확실성 있는 것이 많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와 같이 이 자리에 모여 앉았지만 내일 무슨 일을 당할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명년에 될 일을 우리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이란 불확실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 두 가지는 있습니다. 첫째는 죽는다는 사실, 둘째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조만간 차이는 있지만 다 죽을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확실치 않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죽은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 확실합니다. 거기에 불분명한 점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 최후 심판에 대해서는 온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여러 가지 교훈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 사도들이 분명한 글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낼 때가 있겠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면양과 산양을 갈라 세울 때가 있겠다고 분명하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十七三十一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할 날짜를 정하여 두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절에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선악간에 그 행한 대로 갚음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서 十六절을 보면 우리의 은밀한 죄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날이 있겠다고 가르쳐 줍니다. 내 양심이 이후에 반드시 내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선악간에 보응(報應)을 받으리라 하는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지적해 줍니다.

 

그런 까닭에 사후의 심판은 단순히 기독교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계시 종교가 아닌 이른바 자연 종교, 세계의 다른 종교에서도 이것을 흔히 가르칩니다.

 

사후 심판에 대한 사상은 옛날 유대 사람에게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애굽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우리 한국 사람에게도,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마는, 그 심판에 대한 사상이 다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훨씬 전에 살던 헬라의 철학가 플라톤이 기록한오라터글드라는 책 가운데, 헬라에 어떤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중상을 당하여 다 죽은 줄 알고 그 시체를 불사르기 위하여 나무를 모아놓고 그 시체를 그 위에 놓고 막 불사르려고 할 때 죽은 줄 알았던 그 군인이 다시 소생하여 깨어났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이가 깨어나서 자기가 죽은 줄 알았던 그 때의 모든 경험을 말한 것이 거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이가 죽어서 어떤 곳에 가니까 두 길이 갈라지더랍니다.

 

그 길 가운데는 심판하는 이가 있어 일생에 모든 행한 일을 따라서 심판을 해서 옳은 생활을 한 사람은 오른편 길인 하늘 나라로 가는 길로 보내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왼편 길로 보내게 되었는데 왼편으로 가를 사람마다 높이 플래카드에다가 그가 지은 죄를 크게 쓴 것을 들어서 다른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했답니다.

 

나는 이런 죄를 지어서 지옥으로 갑니다 하는 이런 것을 들고서 가는 그 모양을 보았노라 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후에 대한 심판 사상은 동서를 물론하고, 어떤 민족을 물론하고 그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양심이 그것을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는 까닭입니다.

 

또한 사후의 심판은 인간의 이성이 지적하여 줍니다. 이치로 생각해 보아도 꼭 그래야 될 것입니다. 그 까닭은 우주는 도덕적 우주인데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 생활에 있어서, 현세에 있어서만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일상 생활에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현세에도 있을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그 죄 때문에 육신의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재난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양심의 고통을 심히 받아서 말하자면 지옥의 형별을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아네 죄 지은 사람이 받는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죄 지은 사람의 자손을 삼사 대까지 형벌 하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의 자손은 수천 대까지 복을 빌어 주시겠다는 그런 말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따라서 어떤 민족을 벌하고 아무리 강한 국가일지라도 도덕이 부패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떠날 때에 큰 심판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현세에서는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 까닭은 어떤 사람을 완전히 심판하려고 하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의 전 기간이 끝나야 그 사람의 생활을 온전히 심판할 수 있는데,

 

단순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사람의 전 기간을 심판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람이란 것은 단순히 육신만이 사람이 아니고 그 영혼이 사람인데 육신은 죽고 그 영혼이 살아 있으니까 육신 생활만 가지고는 완전히 그 사람의 생활을 심판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리리만큼 자주 심판하시고, 또 최후의 심판이 있을 터이니까 이 현세에서는 사사건건 다 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생이 깨달을 수 있으리만큼 만 이 세상에서는 심판하십니다.

 

그런 까닭으로 죽은 후에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 이성으로써 생각하여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는 우리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 인간의 국가에서도 법정에서 죄인을 공의로 공판하려는 것이 국가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법률로는 벌하지 못할 죄를 사람이 많이 짓고 있습니다. 모든 영적 죄는 인간의 법률로는 벌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죄, 시기한 죄, 이것이 온전히 행동으로만 나타날 때에만 어느 정도 제재할 수 있지만, 인간 법률로서는 이런 죄들을 공판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죄가 있는 것도 사람은 분명히 알 수가 없으므로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을 벌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마땅히 잡아서 사형할 사람인데 그 사형 죄수를 붙잡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또 오히려 그 반대로 사람을 잘 못 잡아서 형벌 안 할 사람을 형벌 하는 경우도 이 세상 법정에는 종종 있습니다. 또 죄 지은 사람을 형벌 할 때에도 열 가지 죄를 지었으면 열만큼 하고 다섯 가지 죄를 지었으면 다섯만큼 꼭 적당하게 우리 인간의 재판장들은 죄를 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서양에 재판소 꼭 대기에는 혹 어떤 동상을 만들어 놓는데 어떤 상을 만들어 놓느냐 하면 재판장을 만들어 놓고 그 재판장은 저울대를 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재판장의 눈을 보면 눈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의 재판장이라 아무리 저울대를 잡고 꼭 공평하게 다른 사람을 재판하려 하지마는 눈이 가리워 졌습니다. 세상 사람은 모든 것을 자세히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공평이란 아무래도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하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공의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후에 온전히 공의가 이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후에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이 최후의 심판을 하실 분은 누구이신가 함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삼위일체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인간의 죄악을 재판할 재판장으로 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으로 임하시는 것은 가장 적당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같이 모든 시험을 다 당하여 보셨지마는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그는 재판장의 눈에 수건을 가리운 것처럼 사람을 알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속 가운데 있는 것을 꿰뚫어 보시고 과거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이 재판장은 조급한 판단을 내릴 분이 아닙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생의 모든 슬픔과 모든 고통을 당하셨으므로 얼마든지 동정할 줄 아는, 동정할 수 있는 재판장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이와 같은 재판장을 모시게 될 것을 생각할 때 저윽이 우리 마음 가운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 최후 심판에 대하여 성경에 보면, 인간들을 심판할 때에 어떻게 어떤 표준을 가지고 심판을 하겠느냐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二十十二절을 여러분께서 들으셨습니다. 책들이 펴 놓였다는 것을 보니까 책이 여러 권입니다.

 

아마 제 짐작에는 사람 하나마다 책 한 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일생의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을 하나도 빠짐 없이 변함없이 꼭 사실대로 기록한 책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에 책을 쓰는 사람은 공부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설 쓰는 사람들은 특별히 재주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분명히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책을 출판했든지 못했든지 책 한 권을 씁니다.

 

아세요?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생활이 그 한 책이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써서 자서전을 냅니다. 모든 자서전은 한 소설입니다.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내면 생활을 꼭 그대로 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다음 하는 나라에 갔을 때 책 한 권을 보실 텐데 그 책은 여러분이 쓰신 책입니다. 그 책에는 여러분이 일생토록 마음속에 생각한 것, 누구를 미워한 것, 누구를 싫어한 것, 혼자서 무슨 일 한 것, 비밀히 무슨 일 한 것, 하나도 빠짐 없는 여러분 자신의 전기를 여러분이 직면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책 쓰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제 토요일 무슨 책 한 페이지를 썼습니까? 나타나는 생동만이 아닙니다. 은밀한 것까지 다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숨긴 것까지 다 기록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책을 펴놓는다는 것은 공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 개인의 모든 사람의 비밀 된 생각, 더러운 모든 행동,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 내 아내도 모르는 것, 내 부모도 모르는 것을 그 때에는 다 공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책을 쓰는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정죄(定罪)하는 사람 특별히 없겠습니다. 우리가 그 책을 대면하면 그 책 자체가 나를 더욱 정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책을 다 공개해서 펴놓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솔직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책만 있다고 하면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책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무슨 책이냐 하면 생명 책이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 책은 한 권입니다. 여러 권 아닙니다. 다른 책 즉 생명 책 한권이 그 앞에 또한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여간한 좋은 일을 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아닙니다.

 

세사 사람이 보기에 선하다고 하는 사람, 세상 사람이 보기에 도덕적 인물이라고 하는 사람, 세상 사람이 보기에 군자라고 하는 사람도 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 더러운 인간뿐입니다. 그 사람의 책에도 더러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온전한 공의 아래에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죄 짐을 지게 해서 대신 형벌을 받게 했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지만 그를 믿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용서해 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모든 더러운 죄를 지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 책에 기록한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이 다음에 하늘 나라에 가서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얻을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네가 이 길을 걸었느냐, 안 걸었느냐? 이것으로써 생명 책에 우리의 이름이 업느냐 잇느냐 하는 것이 작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행한 대로 심판 받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 뜻도 또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지마는, 하늘 나라에 가서 상을 더 받고 덜 받는 것은 우리가 믿은 후에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더 부지런히 하고, 얼마나 더 충성하고, 얼마나 더 장성했는지, 그 행위를 따라서 우리가 상을 더 받기도 하고 덜 받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은 누구나 다 멸망을 받는데 지옥에 가서 형벌을 받는 데도 등급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더 많이 한 사람은 더 큰 형벌을 받고 적게 한 사람은 적게 받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어거스틴 수도원에 있을 때 한 번은 꿈을 꾸니까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서 루터에게 책을 펴 보입니다. 그 책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전부자기의 지은 죄 즉 아이 적부터 젊었을 때까지 지은 죄가 전부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책을 가진 사단이 루터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사실이냐 물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네가 이런 더러운 죄는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기가 막히고 낙심되었습니다.

 

그 때에 위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었느니라

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단에게 하는 말이 그 죄를 지우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기록하라고 말할 때에 사단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한 번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인데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二十 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웹스터 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이가 조금 있다 얼굴을 들고 대답하는 말이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 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 내가 말하는 말, 내가 행하는 행동,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선생이면 선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장관이면 장관으로서 행한 모든 것,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으로서 행한 모든 것, 대통령이면 대통령으로서 행한 모든 것, 목사면 목사로서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심판을 받을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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