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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계시록 설교 모음

요한계시록 21:1 - 27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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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21:1-8/ 조정의목사

2023-12-10 08:39:21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할 것이 있으랴”(1:9-10). 매우 공감되는 말이다. 새 것은 금세 헌 것이 되고, 삶은 이미 있던 것의 재탕, 이미 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5).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약속하셨다(벧전 1:4).

 

미국 CCM 밴드 머시미의 리더 바트 밀라드는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이란 잘 알려진 노래로 하나님과 함께할 천국을 단지 상상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세상을 단지 상상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천국의 윤곽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사모하는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하셨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천국을 더욱 사모하도록, 그래서 세상에 미련을 두게 만드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1.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1-4)

 

먼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천국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 도성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이 직접 본 장면, 직접 들은 음성에 따른 것이다(“또 내가보니”, “또 내가 보매”, “내가 들으니”, 1, 2, 3). 세상엔 천국을 보고 들었다는 수많은 거짓 증언이 존재하고 인기를 끌지만, 정작 진실로 천국을 보고 들은 사도의 유일한 증언에 주목하는 자는 드물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고 바랄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이 여기 있다.

 

천국의 구체적인 특징은 9절부터 다음 장 5절까지 묘사된다. 이를 요약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천국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새롭다는 것이다. 하늘, , 예루살렘 등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새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완전히 창조한다: 창조를 정화로 보는 사람이 있다. 타락한 피조세계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고치시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새 창조이다. 옛 세계를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new)”의 의미는 가치나 매력에서 우월하다’, ‘옛것보다 낫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상태,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 바다와 해와 달이 없는 것을 볼때(23),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 기존과 유사성을 갖지만, 완전히 다른 질서와 체계를 가진다.

 

완전히 아름답다: 천국의 거룩한 성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지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바벨론, 로마에게 차례로 함락당하고, 천년 왕국 때 이 땅에 재건되었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영원히 세워진다. 요한은 그 모습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말했다. 크고 웅장하고 견고하고 아름답고 정결한 성으로 영원히 있을 것이다(21:9-22:5).

 

완전히 선하다: 바다는 하나님 백성을 실족시키는 악의 무리가 출몰하는 곳으로 생각되었던 장소다(13:1, 짐승).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모두 불못에 영원히 가두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출몰지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악이 발현할 수도 없고, 악을 발견할 수도 없는 선한 세상을 창조하신다. 선한 세상은 죄도 없고 죄의 결과도 찾아볼 수 없다. 처음 하늘과 땅은 죄로 인해 저주받아 고통과 슬픔과 질병과 사망을 낳았다. 하지만, 새롭게 창조하실 세상엔 다시는 사망,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4).

 

완전히 친밀하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새로움은 선하고 아름다운 만물의 새로움이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장 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새로움은 하나님과 우리의 완전히 친밀한 관계에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운 광경에 사로잡힌 요한에게 또렷이 들린 하나님의 말씀, 보좌에서 난 큰 음성이 이를 말해줬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3).

 

천국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곳이다. 과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광야 장막에서 함께 거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자기 백성 교회와 성령으로 함께 거하신다. 그러나 천국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친밀함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사실 하나님 없이는 천국도 없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5: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시고 하늘에서 내려보내 주신다(2: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영원히 심판하시고 그동안 선을 위해 수고하며 흘렸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4). 천국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현현으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 백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시는 친밀함을 영원히 공유하시는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면서 아쉬운 것이 있을 때만 천국을 생각한다. 집이 없을 때, 아름다운 처소를 바라고, 아프고 슬플 때, 고통과 슬픔이 없는 천국을 생각한다. 괴로울 때 위로와 안식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죄로 넘어질 때, 악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 신자들도 바라는 것들이 아닌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11:1). 당신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무언가인가? 아니면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그분 자체인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싶어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윗처럼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만 바랄 것을 요구하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62:5).

 

2. 새 하늘과 새 땅의 임금(5-6)

 

영원한 세상에서 무엇이 새롭게 되는지 살펴봤다면 이제 누가 새롭게 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앞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시고 때가 됐을 때 내려주신다고 했다.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임금으로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먼저, 그분은 보좌에 앉으셨다(보좌에 앉으신 이, 5). 보좌는 다스리고 통치하고 심판하는 모든 권세가 있는 왕의 자리다. 그분은 이미 모든 악을 심판하셨고, 이제는 자기 백성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체시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선포하셨다. 거기에다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확증하셨다. 반드시 계획하신 그대로 이루신다는 분명한 열심과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기록하라고 명령하심으로 변하지 않는 그분의 계획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증하셨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처음 드러난 것이 아니다. 본문이 기록되기 8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언하셨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65:17-18). 그러면서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뜻을 이루리라하였노라라고 하셨다(46:10).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신다는 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주관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본문에서는 이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라고 표현했다(6). 역사의 시작과 끝,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1:11).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이루었도다라고 선언하셨다(직설법 완료).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오랜 계획과 많은 노력과 막강한 자원으로 시작해도 쉽게 변경되고 지체되고 폐기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겠다고 선포하신 계획은 이미 완료된 것처럼 정하신 때와 정하신 방식대로 한 치의 오류 없이 성취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면서도 종말을 불신하는 사람이 있다. 베드로는 말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조롱하며 정욕대로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벧후 3). 그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천지가 창조되었음을 믿고(1), 말씀대로 홍수가 나서 땅이 심판받았음을 믿고(6),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이 말씀으로 붙들려 있다는 것을 믿었지만(1:3), 그 말씀대로 처음 만물이 불태워지고 새로운 만물이 창조될 것을 믿지는 않았다.

 

당신은 믿는가? 하늘과 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진실로 믿는 자는 곧 불타버릴 곳에 삶을 투자하지 않는다. 새롭고 영원한 곳에 삶을 투자한다. 썩고 더럽혀지고 쇠하게 될 유업을 바라지 않는다.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유업을 바란다. 당신도 그러한가?

 

3.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7-8)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받게 될 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계시록은 하나님 반대편에 선 자들, 마귀를 따르는 자들,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심판받을 것이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의 최종 운명이 둘째 사망이라고 가르쳤다.

 

본문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점술가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라 했다(8).

 

두려워하는 자들은 환난과 핍박 등 믿음을 시험하는 일을 만나면 두려워 자기 안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를 가리킨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어떤 사실을 불신하는 자가 아니라 신실하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 여러 가지 유혹에 빠져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깨는 자다. “흉악한 자들가증한 자들을 말하며 뒤에 나오는 우상 숭배자들과 같이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경배하는 자들인데, 특별히 여기와 로마서에서만 사용되는 동사가 사용되어 황제 숭배를 허용한 자들과 관련이 있다. “점술가들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미신적인 뜻을 좇는다는 면에서 일종의 우상숭배자와 같다. “살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이고(특별히 대환난 기간에), “음행하는 자들거짓말하는자들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사람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믿는 일에 불충한 자들,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따르지 않는 이들이다.

 

반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는 백성은 이기는 자(7). 그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바라고, 믿는 일에 반하는 모든 것과 치열하게 싸워 이기는 자다. 그들은 땅의 지체를 죽이고(3:5), 마귀를 대적하고(4:7),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요일 2:15). 육신의 정욕에 질 때도 있지만,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 위해 싸운다. 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열렬히 사랑하여 목마른 자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6).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성도에게 편지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소망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기 원한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본 자들이 그곳에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기 원했던 것처럼, 그분의 영광스러운 참모습을 보면 우리는 영원히 매료되어 기쁨과 만족을 얻고 친밀한 사랑을 나눌 것이다.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 당신의 삶을 지금 깨끗하게 하는가? 당신은 누구를 사모하고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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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21:922:5/ 조정의목사

2023-12-10 08:42:06

 

앞으로 살게 될 새집을 보는 것은 참 흥분되는 일이다. 낡고 허름한 집에서 깨끗하고 새로운 집으로, 좁고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 넓고 빛나는 거처로 이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하는 신랑과 함께 살게 될 신부라면, 단지 새로운 장소에 살게 된다는 기대를 넘어 남편과 함께 친밀한 사랑을 그곳에서 평생 나누게 될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쁨으로 여기저기 집을 둘러볼 것이다.

 

성령님은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신 신혼집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를 통해 당신이 천국을 더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 그곳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친밀한 사랑, 영원한 사귐을 더욱 갈망하게 한다. 확실히 보장된 천국의 기쁨으로 이 땅에서 겪는 시험과 유혹을 이기게 하신다.

 

1. 천국의 조감(219-11)

 

조감은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10절에 보면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였다. 높은 곳에서 천국의 도성, 새 예루살렘을 내려다본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안내자가 나오는데, 바로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다(9). 이 천사는 전에 큰 음녀와 그녀가 받게 될 심판을 요한에게 보여줬다(17:1).

 

이번엔 정반대의 대상을 보여 준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9). 당신은 장차 심판의 집 혹은 신부의 집, 둘 중 하나의 집으로 인도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신부가 살 집이 아닌 신부를 보이겠다고 했을까? 교회가 건물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결국 교회를 특징짓는 것은 교회를 이루는 사람인 것처럼, 성경은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그 특징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전체적인 모습은 한 마디로 광채.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의 향현이다. 요한은 환상 속에서 본 천국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11). 새 예루살렘엔 하나님 영광의 빛이 가득하다. 그 빛은 진귀한 보석같이 아름답다. 투명한 벽옥(다이아몬드), 수정이 빛을 굴절시키듯 맑고 찬란한 하나님 영광의 빛이 온 성에서 뿜어져 나온다. 숨 막히게 경이로운 광경이다!

 

2. 천국의 측량(2112-21)

 

, 이제 가까이 가서 새 예루살렘을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천국 도성의 크기도 측량하고, 건축자재도 꼼꼼히 볼 생각이다.

 

첫째, 구조: 크고 높은 성곽, 열두 문, 열두 기초석으로 구성된다(고대 건축물의 가장 기초가 되는 구조). 동쪽, 북쪽, 남쪽, 서쪽에 각각 세 문이 있어 사방에서 출입이 자유롭다(13). 열두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써 있다(12).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맺으신 하나님 언약의 은혜를 힘입어 사람들이 사방에서 이 성으로 들어온다. 또한 열두 기초석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다(14).

 

열두 사도가 목격하고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가 맺으신 새 언약의 은혜를 힘 업어 각처에서 사람들이 이 성으로 들어온다. 위협이 전혀 없는 새 예루살렘에 크고 높은 성벽이 왜 필요할까? 열두 문을 왜 천사가 지킬까? 아마도 거대한 성벽은 천국 백성의 영원한 안전을 드러내고, 천사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있을 것이다.

 

둘째, 크기: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사용했다(15). 먼저, 성은 네모반듯하다. 길이, 너비, 높이가 같다(16). 정육면체 혹은 피라미드형일 것이다. 만 이천 스다디온은 약 2,200km, 면적으로 비교하면 한반도의 22, 미국의 절반 크기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성곽은 백사십사 규빗, 60m인데, 아마도 두께를 가리키는 것으로 만리장성보다 두껍다. 압도적인 크기와 견고한 두께는 천국의 웅장한 위엄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되는 크기라고 단정하며 측량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만(상징), 요한은 이것이 단순히 사람의 측량이 아니라 곧 천사의 측량이기도 하다고 분명히 못 박는다(17).

 

셋째, 자재: 먼저 성곽은 벽옥이고, 성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다(18). 맑고 투명하며 고귀한 재료다. 특히 빛을 찬란하고 아름답게 투과하는 재질이다. 성곽의 열두 기초석은 각각 벽옥, 남보석(청금석, 사파이어), 옥수(녹색 규산염), 녹보석(에메랄드), 홍마노(적색과 흰색 층으로 구성된 돌), 홍보석(진홍색 홍옥수), 황옥(금색 벽옥, 감람석), 녹옥(녹주석), 담황옥(토파즈), 비취옥(녹옥수), 청옥(붉은 오렌지 색깔 보석), 자수정(자주색 석영)이다(19-20).

 

어떤 사람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상징하는 열두 가지 보석과 유사하다는 이유로(28, 39),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든 민족이 나아갈 수 있는 천국의 기쁨과 연관 짓지만, 핵심은 각색 보석에 있다(19). 새 예루살렘을 가득 채운 하나님 영광의 빛은 맑고 투병한 성곽을 통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고, 성곽 기초석의 각색 보석을 통해 여러 가지 색깔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열두 문은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21). 광물이나 쇠붙이를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이 오랜 세월 소량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진주는 진귀하다(13:46). 문 하나가 하나의 진주로 되어있다면 얼마나 값진 것인가? 또한 새 예루살렘의 길은 맑고 투명한 정금,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영광을 담아내기 위한 재료다.

 

건물의 크기와 넓이, 외벽의 두께를 측량하는 것, 어떤 건축 자재가 사용되었는지 조사하는 것 자체가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아니라 그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누구신지 주목해야 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성곽이 견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이 거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고 영화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영광을 맑고 투명하게,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비추는 진귀한 보석이 사용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천국 도성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바라는 이유는 그 천국 도성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바라기 때문이다. 그분의 참모습을 보고, 그 영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3. 천국의 예배(2122-27)

 

많은 사람이 천국에서 영원히 무얼 하며 지낼지 궁금해하고 심지어 걱정한다. 천국은 영원한 예배의 처소다.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성경에 나오는 정육면체 건물은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대제사장에게만,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허락된 예배의 장소다.

 

22절을 보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한다.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방 도시국가에도 가장 높고 중요한 자리에 신전이 있는데 말이다. 천국 도성에 성전이 없는 이유는 그 자체가 성전, 거룩한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으로 영원히 임재하신다(22).

 

성전 예배는 밖에 해나 달이 비칠 때, 안에 등불을 켜둘 때 가능하다. 밤에는 성전에 예배드리러 갈 수 없기 때문에 문을 닫아둔다. 하지만 천국의 예배는 다르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에(23) 예배를 멈출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밤이 없기 때문에(25), 항상 낮에처럼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않는다(“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새번역). 천국에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임재 가운데서 영원토록 예배드리게 될 것이다.

 

본문은 천국의 예배를 이렇게 표현한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24).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고 들어가겠고(26). “땅의 왕들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행하고, 각각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그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릴 것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천국엔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자만 들어갈 수 있다. 영원히 하나님만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죄로 더럽혀진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 입술의 신앙 고백과 거리가 먼 삶으로 거짓말하는 자처럼 살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27).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거룩한 예배자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7). 어떤 사람은 한 번 깨달음으로 생명책에 기록되면 어떻게 살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죽은 자라고 평가하신 거짓말하는 사데 교회에게 회개하고 깨어서 그 옷을 더럽히지 말라고 요구하셨다. 그런 이기는 자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않겠다고 하셨다(3:5). 행위로 생명책에 이름을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반드시 흰 옷을 입고 거룩한 예배자의 삶을 산다는 말이다. 그런 자만 들어간다.

 

4. 천국의 생명(221-5)

 

마지막으로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 장면은 생명의 근원을 말하는 첫 창조의 더 나은 회복, 새 창조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들과 동산에서 영광 가운데 친밀한 사귐을 누리셨다. 하지만 죄가 모든 걸 망쳤다. 죄 때문에 만물이 저주를 받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생명의 주를 떠났고,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게 됐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게 됐고, 생명나무 그리고 동산 자체가 금지됐다.

 

하지만 회복된 에덴, 천국의 동산을 보라.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1; 2:9-14).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 강물은 영원한 삶에 필요한 모든 필요를 흡족하게 채운다. 생명수의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는 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2).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는데,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다(2). 여기서 치료는 아픈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건강한 생명력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에덴, 천국엔 다시 저주가 없다(3). 모든 죄와 그 결과물이 사라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좌정하신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3).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3).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이마엔 하나님 이름이 있다. 영원히 그분의 소유다.

 

여기 우리가 감격하며 부르는 찬송 가사의 출처가 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다시 한번 제약이 없고 멈추지 않는 기쁨의 예배, 하나님의 영광, 그 임재 가운데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창세기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생육하여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첫 사명은 회복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의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세세토록 예배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순종하는 일에 충성하면, 천국에선 그 보상으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단지 안식하며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제약 없이, 죄악 없이, 온전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예배하고 순종하며 살게 될 것이다. 영원히! 천국을 갈망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천국을 진정으로 갈망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만 예배한다. 하나님께 충성하며,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한다. 그리고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

 

눈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 단지 볼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볼 것을 기대한다. 손이 없는 신자는 천국에서 단지 손을 사용할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손으로 주를 만지고 주를 위해 일할 것을 갈망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이것으로 요약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천국이 보배로운 것은 보배로운 분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얻기 위해 살고, 온전히 누리게 될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라.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사람들 /21:5-8, 6:18-19, 8:17/ 김형익 목사

2021-08-17 10:04:35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심으로써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그 성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아름다움 자체였습니다.

 

오래도록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은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은 사망과 애통함과 곡함과 아픔이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인 5-8절은 이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자들이 누구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1.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 (5-6a)

 

A. 말씀하시는 하나님 (5; 20:11; 1:8)

 

5절을 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우리는 20:11에서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지만, ‘보좌에 앉으신 이라는 표현이 요한계시록에서 거의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상고하는 중에 종종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난다는 표현들을 보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우이거나(16:1,17), 혹은 천사들의 음성일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10:4; 14:13; 18:4). 하지만 본문 5절에서처럼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 것은 1:8 이후 처음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8).”

 

B.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5a)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요한이 다시 보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제까지 요한이 본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환상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비준해주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1-4절의 말씀을 요약하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쓰인 새롭게라는 단어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용한 단어,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καινός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만물로부터 죄의 모든 흔적과 영향을 깨끗하게 지우시고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C.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5b; 65:16-17; 6:18-19; 살전 5:24; 10:32-39)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것은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말도 단순히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말씀만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비준하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라는 말씀은 이사야 65:16-17로부터의 인유입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617).”

 

선지자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거듭 선포합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여기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감흥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이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감동을 주었을까요?

 

황제 숭배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고난과 재산을 빼앗김과 심지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더 나은 결정인가를 물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닻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소망과 확신을 주었겠느냐는 말입니다. 만일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거짓 확신이나 오해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 죽음은 얼마나 어리석고 무가치한 죽음이겠습니까? 무슬림들이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살 테러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은 죽음입니까?

 

어쩌면 내일이라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할지도 모르는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의 진리성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박해로 인한 배교가 심각하게 일어나던 교회를 향해 쓰여진 히브리서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브리서 6:1819).”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그가 하시는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다는 사실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니다.

 

바울 사도도 큰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4).”고 권면한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서, 히브리서 10:32-39을 들어봅시다. 히브리서를 쓴 사도의 메신저로 히브리서 사본을 들고 온 사람이 이제 그 공동체에서 히브리서를 읽어준다고 상상하면서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3239).”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포함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참됨을 믿고 소망을 가지게 하시려는 은혜로운 배려입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어려움 속에서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약속(기록된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증언하는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15항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증언에 감동되고 설득되어 성경을 고상하고 존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용의 천상적인 성격, 그 교리의 효능, 문체의 위엄, 모든 부분들의 일치, 전체의 의도(이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한 충분한 발견, 다른 많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들 그리고 그것의 전체적인 완전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풍성하게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인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가슴 안에서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말미암는다.

 

D.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6a; 16:17; 19:30; 44:6; 48:12)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6절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이루었도다라는 말씀을 봅니다. 일곱째 대적 심판에서 성전의 보좌에서 나는 음성이 되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16:17). 현세의 악한 질서를 종결 짓는 사건들이 끝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 역사의 모든 사건세상 멸망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을 포함하여이 끝났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성취와 완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고 소리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19:30).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고, 이후의 모든 역사 성취는 바로 주님의 구속적 죽음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앞에서 보았듯이(1:8, 17; 2:8),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멧의 첫 자음과 마지막 자음입니다.

 

이 두 자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의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사이에 어이지는 모든 시간과 사건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우연히 일어나고 흘러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입니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에서 그리고 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처음과 마지막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시간의 주인이시고 시간을 통제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시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늘 시간에 쫓겨서 초조함과 염려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여러분이 염려한다고 시간을 늘리거나 앞당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을 쥐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모든 시간 속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요한이 갑자기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이사야 44:6; 48:12).”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성경은 과거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성경의 예언들은 미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예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현재와 같은 환난의 시기에도 여전히 역사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1세기 말의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위로는 동일한 효력을 지닙니다.

 

2. 이기는 자 (6b-7)

 

A. 이기는 자가 받는 상속 (7; 12:11; 2:13; 8:17; 17:7; 삼하 7:14)

 

, 이제 우리는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민이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만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민이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주님의 메시지(2-3)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들을 보았습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약속들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민이 되는 것이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단장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도 혹은 믿는 자라고 하면 되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주로 이기는 자라고 표현했는데, 왜 이렇게 신자 혹은 성도의 특징을 묘사한 것일까요? 결국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사탄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를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이며, 우리를 미혹하고 압박하는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이라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됩니까? 12:11에서 사도 요한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이기는 방식은, 짐승이 우리의 생명을 취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이깁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버가모에서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2:13).

 

7절에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받으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신실하고 참된 말씀입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리스도께서 상속받으시는 모든 것을 함께 상속받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이 상속의 영광을 언급하면서 로마의 성도들을 독려했던 말씀을 요한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7).”

 

여기서 다시 한 번 언약의 문장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3절은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했는데, 중요한 차이는 백성이 아들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는 자가 받아 누리는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복의 요약적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17:7)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것(삼하 7:14)을 종합적으로 성취하는 말씀입니다.

 

B.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약속 (6b; 55:11; 6:37)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좀 더 자비롭고 은혜롭고 편안하기 짝이 없는 말씀을 듣습니다. 6절에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목마른 자입니다. 이기는 자라고 해서 우리가 이르지 못할 엄청난 위인들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들은 위인 중의 위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음을 인하여 그들이 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서 설명될 수 있는 위인이 있다면 그는 이기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생명 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는 말씀은 이기는 자의 본질을 설명해줍니다. 이 말씀도, 이사야 선지자의 무한히 은혜로운 말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복음의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복음의 약속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하거나, 많이 배워야 하거나, 도덕적이어야 하거나, 교양이 넘쳐야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리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 아닙니까?

 

굳이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목마름입니다. 복음은 단단한 식물이 아닙니다. 이가 튼튼하고 입안이 건강해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물에 비유하시지 않습니까? 물은 이가 없어도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입안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흘려 넘길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마시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목이 마르다면 말입니다.

 

목이 마르다면 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고 약속하십니다. 이 샘에 와서 누구든지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 자비롭고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도 주저하는 영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자기가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가 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별을 보고 싶어한 사람이, 망원경을 발견하고 나서는 망원경을 통해서 보지 않고 망원경 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러분이 기꺼이 은혜를 받으려고만 한다면 됩니다. 믿음의 입으로 은혜를 마시려고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한 영광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3. 두려워하는 자 (8; 13:21; 딤후 4:10a; 8:26; 4:40; 14:5; 1:16)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부정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안 돼!”라고 첨언을 합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요한계시록 21:8).”

 

한 마디로 이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는 연결되는 표현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포기한 배교자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레고리 비일의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약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더 이끌리고 박해에 직면했을 때 타협한 자들을 가리킨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가시적인 신앙 공동체 안에 있지만 세상과의 거룩한 싸움에서 후퇴하고 용기 있게 짐승과 맞서지 못하는 충성되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분명히 어느 지역교회에 속한 교인이지만(여러분이 벧샬롬교회의 교인인 것처럼) 인내하지 못하고 세상의 압력에 굴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결국 믿음을 떠나는 교인들입니다.

 

로버트 마운스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 보다는 개인적인 안정감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는 씨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태복음 13:21).”들입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이런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 충분히 많이 말씀합니다(6:4-6; 10:26-31; 5:19-20; 벧후 2:20-21; 요일 2:19; 5:16). 데마는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디모데후서 4:10a).”

 

두려워하는 자들뒤에 이어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주님께서 바다에 일어난 큰 풍랑을 보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고(8:26),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40)”고 책망하셨을 때, 믿음과 두려움을 함께 언급하신 것과 유사합니다. 두려워하는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릴 수 없는 자들의 목록에 맨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이라고 썼을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목록은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 불신자들의 특징이겠지만, 물론 가시적인 언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중에도 일부 있었을 것입니다. 흉악하다는 것은 가증스럽고 혐오스럽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불린 큰 음녀에게 속한 특징이었습니다(17:4-5).

 

살인자라는 말은, 성도들을 죽인, 땅에 거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6:9; 9:21; 13:7,10,15; 17:6; 20:4). 음행은 니골라 당의 죄악이었고(2:14,20),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많은 신전에서 종교적으로 행해진 신전 매춘과 깊이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또 마술이 1세기 로마 세계의 삶에 필수적인 한 영역이었다는 점에서(8:9-24; 13:8-11; 19:17-20; 9:21; 18:23; 22:15), 신자들도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영역이기도 했습니다. 우상숭배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경계한 죄요, 십계명이 명백하게 금하는 죄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만국의 죄의 심장부에 있는 것이 우상숭배였고(9:20; 22:15), 짐승이 세운 거짓 종교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13:4, 8, 12, 14-15; 19:20). 그리고 황제 숭배라는 일상의 맥락에서 범해질 수 있는 죄였습니다. 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고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받을 자들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6:18).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의 특징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14:5)”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디도서 1:16).”들입니다. 이들은 거짓말로써 자신들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해 있음을 입증하는 자들입니다(8:44). 이런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참된 말씀입니다.

 

4. 교훈과 적용 (4:14; 107:4-5, 10, 23-25, 30; 55:22)

 

말씀을 맺기 전에, 여러분에게 드릴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기는 자입니까, 두려워하는 자입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목마름이 있습니까? 목마름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이 물을 마셔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지 마십시오. 이 샘에 나아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시는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4: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여 헤매며 주리고 목이 말라 영혼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107:4-5).

 

또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일 때도 있습니다(107:10). 아니면 바다 같은 인생에서 큰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107:23-25). 이 모든 상황에서 여러분을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영혼의 닻 같은 소망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6:19). 그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107:30).”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보았던 모든 환상을 통하여 그것을 우리에게 확증해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십니다(55:22). 그러니 모든 영광을 삼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1).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십시오./21:1-22:5/ 김형익 목사

2021-05-08 09:26:06

 

우리는 오늘 두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첫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까지 다윗의 생애에 대한 설교를 20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God’s Will 교회에서 김영채 목사님께서 마태복음을 강해하다가 떠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김목사님이 돌아오시면 계속 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나중에 다윗 시리즈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저는 이때 하나님께서 God’s Will 교회와 죠이선교교회가 합하여 하나가 된 새 죠이선교교회에 주시고자 하는 특별한 말씀이 무엇일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정한 것이 <사랑하는 교회에게>라는 시리즈의 제목이고,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직접 교회에게 주신 편지를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그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신 주님의 편지입니다. 오늘은 그 일곱 교회를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교회가 얻게 될 장래의 영광에 대한 본문을 함께 상고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1~22:5을 함께 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비전을 보여주시는 이유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교회는 개독교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부끄러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은 물론이고, 여자 문제, 돈 문제로 넘어지는 목사님들의 모습들 그리고 교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부도덕성들입니다. 더러는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죄악의 문제는 그렇다치고 인간적으로 보면 교회는 참 뭔가 되기 힘든 집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뭔가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사회적 요인이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구성원 간에 동질성이 이렇게 없는 조직도 없습니다. 세상의 조직과 기업의 규모나 특성들이 교회를 기죽게 하는 것 같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는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교회의 미래 영광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소위 비전입니다. 왜 이 환상을 요한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고 지난 2000년의 교회가 이 말씀을 읽게 하셨을까요? 당시의 고난받는 교회, 로마제국이라는 반기독교적인 거대 정권아래서 신음하고 낙담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에게 영광의 비전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에스겔을 보십시오.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예언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모든 유다 백성들은 망한 현실의 패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언을 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미래 성전의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환상은 에스겔의 영혼을 낙심에서 가슴벅찬 감격과 영광으로 가득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비전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전 영광의 환상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개독교 소리를 듣는 교회,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라기 보다는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때에 이 비전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전이 없으면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비전이 없으면 저는 목회할 힘을 잃습니다. 이 환상을 보는 성도들은 어떠한 조롱도, 비난도, 고난도, 죽음도 이기고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비전, 이 환상을 보고 붙잡아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그림이 내 가슴 속에 생생하면, 그런 자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2. 천상의 교회/승리한 교회 vs. 지상의 교회/전투하는 교회

본문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설명을 드립니다.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인데, 천상의 교회가 있는가 하면, 지상의 교회가 있고, 천상의 교회는 승리한 교회라고 일컬으며,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라 불립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천상의 교회, 승리한 교회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각각 볼텐데 그 교회들은 다 지상의 교회이고 전투하는 교회들입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는 문제도 많고 늘 전쟁터 속에서 고통하고 피흘리는 교회지만, 언젠가 주님 오시는 날에는 그 교회가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말입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본문처럼 교회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3. 영광스러운 교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말씀이 시작되는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사실상 창세기 1~2장의 이야기와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본문입니다. 이 마지막 두 장의 주제는 회복과 영광입니다. 마치 성경 전체를 한 사람의 저자가 쓴 것처럼 본문은 첫 두 장과 놀라울 정도로 대조를 보여주는 결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오늘 설교에서 다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2절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사도 요한은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거대한 성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거기에 크다는 표현대신, 거룩한 성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성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이고, 그 교회가 누릴 미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결혼식을 위하여 단장한 어린양의 신부(21:2,9~10)

첫째로 교회는 사람이란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장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교회입니다. 여기서도 그 성의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21:2).

 

이 성을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 결혼식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신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1:9~10절도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성령께서 요한은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즉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인 것입니다. 바로 장소가 아닌 성도들 자신인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마치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시고 아담을 위해서 최고의 선물인 하와를 손수 지으신 후, 아담에게로 인도해주시는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친히 단장하셔서 어린양이시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신부를 인도해가시는 모습 말입니다. 또한 이 신부는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친히 피흘리시고 자신을 주심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하신 바로 그 신부인 교회라는 것을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압니다(5:26~27).

 

그 신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새 예루살렘에 대한 단 하나의 묘사는 그 성이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신부로서 순결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신부에게 어디 있습니까? 이 신부인 교회, 즉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보았던 점도 없습니다. 흠도 없습니다. 주름 잡힌 티도 하나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름답고 순결하고 거룩한 신부입니다. 완전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것이 교회 즉 성도들의 장래 영광에 대한 성경의 묘사입니다.

 

B. 성도들의 궁극적인 처소(21:3~4; 14:2~3)

그런데 여기 새 예루살렘이란 은유로 표현된 교회는 또한 성도들이 궁극적을 거하게 될 장소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처소는 모든 성도가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입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은유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인 성도들 자신일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거하게 될 처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완성된 교회의 그림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게 될 세상인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 처소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무엇보다 이 처소는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가 성취되는 곳입니다. 21:3은 보좌에서 나오는 큰 음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합니다.

 

에덴동산부터 시작해서, 성막과 성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누린 모든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하게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부분적이거나 희미한 하나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때의 하나님의 임재는 완전하고도 충만한 임재가 될 것이며, 성도들은 그 감격과 그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방해거리들의 제거) 또한 성도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더욱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모든 방해거리들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1:4에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세상을 살면서 모든 사망, 애통함과 곡함 그리고 아픈 것들로 인한 눈물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주님께서 씻어주신다고 하신 것은 우리로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모든 슬픔과 고통의 문제들을 제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점점 더 놀라운 장면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그 성을 요한이 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표현하자면 그 빛이 지극히 빛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은 것이었습니다(21:11).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핍박 가운데 있는 연약한 교회 속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완성된 교회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을 요한은 보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성에 해나 달이 없다는 것입니다(21:23).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기 때문이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이 없어서 깜깜한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22:5).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왜 하나님이 빛이신지를 경험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빛을 드러내시고 영광을 우리에게 비추실 것입니다.

 

(성곽) 본문은 새 예루살렘의 성곽에 대해서 약간 구체적인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옛날 성들이 성곽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들이 다 멸해진 후에, 왜 성곽이 필요할까요?

 

이것은 적들의 존재를 상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성이 얼마나 안전한 성인지를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성곽의 두께가 144규빗인데, 이것은 65m입니다. 이 정도 두께의 성벽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성의 안전함을 이런 수치로 표현한 것인데, 단순히 65 m가 아니라, 완전수인 12x12=144 규빗이라는 것, 완전에 완전을 곱한 완전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또 성곽 자체가 그냥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벽옥으로 되었으며, 여기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3개씩 문이 있는데 그 문이 거대한 진주 하나로 만들어진 문들입니다.

 

각 진주 문에는 각기 구약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곽에는 각종 보석들로 만들어진 빛나는 12 기초석이 놓여져 있는데 이 기초석에는 각기 12 사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12지파의 이름과 12사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것은 이것이 완전한 교회라는 것,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가 모두 연합된 완전한 교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본문은 성곽에 대한 묘사와 함께 성 자체에 대한 묘사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만들어진 성이며 그 길도 정금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정금이 얼마나 맑으면 유리 같은 정금일 수 있을까 상상만 할 뿐입니다. 그 정금은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반사하니 더욱 빛나는 형상이었을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그 성은 정육면체로 된 성입니다.

 

정육면체는 구약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가 언제나 정육면체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처소가 곧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거룩한 예루살렘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즉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새 예루살렘은 바로 지성소의 확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은 길이, 넓이, 높이가 각각 12,000 스다디온, 환산하면 1400마일이나 되는 성이었습니다. 이것도 1400마일이나 되니 얼마나 큰 성입니까? 미국 동서 길이의 절반이나 되는 길이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이 12,000 스다디온이란 단위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전수 121000이라는 무한이 곱해지는 거대하고도 무한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성의 정중앙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좌에서부터 큰 길 한 가운데로 유유히 흘러나오는 강물이 보입니다. 그것은 생명수 강입니다. 그 수질은 수정같이 맑습니다.

 

이 생명수는 영광스러운 교회와 성도들을 영원히 만족하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성령의 무한히 흐르는 은혜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초막절 끝날에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로 선포하셨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7~38).”

 

이 생명수강가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12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케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죄지은 자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막으셨던 그 생명나무가 이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징으로서 존재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징으로 성도들에게 나타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어린양 보좌가 성 중앙에 있듯이, 이제는 성도들이 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22:4). , 이런 영광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죄인들에게는 그렇게도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산이나 바위라도 자기들을 덮쳐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해야했던 바로 그 얼굴을(6:16) 성도들은 기쁨과 감격과 영광으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 예루살렘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기 때문입니다(22:3).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으니 이제 성도들을 향한 저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3:1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두려운 명령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시는 영광의 성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바로 성이고,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이자, 성도들 자신이며 교회의 완성된 모습인 것입니다.

 

4. 영광에 이르는 자와 이르지 못하는 자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성,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에 이르게 될 자가 있는가 하면,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게 될 자가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있었듯이, 여기에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가 있고, 지옥의 영벌로 들어갈 자가 있습니다. 세상 사는 동안 교회에 속했다는 것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에 들어가는 자들은 이기는 자들뿐입니다(21:7). 이기는 자가 유업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은 두려워 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불과 유황못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21:8). 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성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그 성을 유업으로 얻지 못할 자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주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라고 말합니다(21:27). 이들을 성경은 세상이라고 말하고, 큰 음녀(17:1) 또는 큰 성 바벨론(18:2)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거듭난 자들이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이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자신인 것입니다. 그들은 싸움을 싸워 이긴 자들입니다. 천상의 교회는 싸움이 끝나고 승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 오늘 우리가 속해있는 죠이선교교회는 여전히 전쟁터에서 싸움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 영광의 교회를 유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왜 이 말을 썼을까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는 없습니다. 싸우지 않고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는 싸우는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틴 루터는 그의 전생애를 영적 전쟁터에서 교회, 거룩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우리 믿음의 선배입니다. 우리 시대는 조금도 그와 다르지 않은 싸움을 싸우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싸움터의 한복판에서 이런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그는 싸움터 한 복판에서 영광스러운 교회의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영광스러운 교회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애를 드려서 이 싸움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도들이 알았고, 아타나시우스가 알았고 어거스틴이 알았던 그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길은 진리로 싸워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통합된 죠이선교교회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겠습니다. 왜 이 땅에 죠이선교교회가 존재해야 합니까? 교인수를 좀 불리고 큰 교회 소리를 듣고 성장한 교회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인교회가 많은 지역에 왜 또 하나의 교회가 필요합니까? 한국음식점과 가게에 가면 그렇게 많은 설교 CD들이 놓여져 있는데 왜 우리는 거기에 피곤함을 더해야 합니까?

 

주님의 교회는 오직 진리의 싸움을 싸웠던 교회들이었고, 그 복음의 진리가 선명하고 분명한 소리로 선포되지 않는다면 영혼들은 평생을 교회에서 보냈다고 할지라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으며, 진리가 없는 교회, 진리를 타협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싸우고, 이기는 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일이 더 힘있게 일어나도록 주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뜻 가운데 두 교회를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5.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육체 속에 가리워졌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고, 그저 한 사람의 목수나 랍비 정도로 알았고, 심지어는 그분을 때렸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분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별로 주목할만한 어떤 매력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고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은 제자들 조차 알아보지 못할만한 분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완전히 하늘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사도 요한이 보았을 때 사도는 죽은 자와 같이 땅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1:17). 저는 교회도 감히 주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변화를 경험할 것을 압니다.

 

이 땅에서 교회의 영광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승리한 교회는 영광을 입게 될 것이고, 그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될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원을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에 드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싸움을 싸우면서 받은 모든 상처는 영광의 상처가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싸움의 한복판에서 흘린 눈물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싸움을 싸우면서 지칠 때, 낙심하게 될 때, 소망이 흔들릴 때 주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셨던 그 영광스러운 교회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끝까지 붙들고 이기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외없이 저와 여러분이 함께 그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기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 영광스러운 교회 /21:1-22:5/ 김형익 목사

2021-05-12 08:46:14

 

벧샬롬교회에 목사로 부임하여 2016년 새해를 맞으면서 여러분과 어떤 주제 혹은 어떤 성경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던 중, 지난 12월 요한계시록을 새벽마다 나누면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교회의 환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합당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편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성경 본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부터 차례로 일곱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설교 시리즈를 여는 말씀으로 성경 전체의 마지막이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승리한 천상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목사가 바라는 교회나 교우 여러분이 바라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고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고 섬기게 되는 복된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요한계시록 21:1~22:5을 함께 읽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교회는 개독교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부끄러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은 물론, 여자 문제, 돈 문제로 넘어지는 목사들의 모습들 그리고 교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부도덕성들입니다. 더러는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죄악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인간적으로 봐도 교회는 참 힘든 집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사회적 요인이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구성원 간에 동질성이 이렇게 없는 조직도 없습니다. 세상의 조직이나 기업이 가진 규모나 특성들과 비교하면 교회는 보잘 것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교회의 미래 영광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요한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로 하여금 이 말씀을 읽게 하셨을까요?

 

당시의 고난 받는 교회, 로마제국이라는 반기독교적인 거대 정권아래서 신음하고 낙담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에게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에스겔을 보십시오.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예언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모든 유다 백성들은 망한 현실의 패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언을 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미래 성전의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환상은 에스겔의 영혼을 낙심에서 가슴 벅찬 감격과 영광으로 가득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환상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전 영광의 환상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개독교 소리를 듣는 교회,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교회가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때에 이 환상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이 환상이 없으면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만일 이 환상이 없으면 저는 목회할 힘을 잃을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보는 성도들은 어떠한 조롱이나 비난, 고난이나 죽음도 이기고 설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환상을 보고 또 붙잡아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그림이 우리 가슴 속에 생생하면, 그런 자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2. 천상의(하늘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 그리고 승리한 교회와 전투하는 교회

본문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설명을 드립니다.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인데, 천상의 교회가 있는가 하면 지상의 교회가 있고, 천상의 교회는 승리한 교회라 부르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천상의 교회, 승리한 교회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각각 볼텐데 그 교회들은 다 지상의 교회이고 전투하는 교회들입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는 문제도 많고 늘 전쟁터 속에서 고통하고 피 흘리는 교회지만, 언젠가 주님 오시는 날에는 그 교회가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말입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본문처럼 교회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3. 영광스러운 교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종말의 영광을 다루는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사실상 창세기 1~2장의 이야기와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본문입니다. 이 마지막 두 장의 주제는 회복과 영광입니다. 마치 성경 전체를 한 사람의 저자가 쓴 것처럼 본문은 성경의 첫 두 장과 놀라울 정도로 대조를 보여줍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오늘 설교에서 다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2절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한 아름다운 성이 내려오는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그런데 이 성에 대해서 바벨론에 대한 묘사와는 달리, ‘큰 성이라고 하지 않고 거룩한 성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성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이고, 교회가 누릴 미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결혼식을 위하여 단장한 어린양의 신부(21:2,9~10)

첫째로 교회는 사람이란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벧샬롬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 장소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21:2은 그 성의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거룩한 성을 신랑을 위해 단장하고 결혼식에 입장하는 아름다운 신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1:9~10절도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보여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인 것이지요. 성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장소가 아닌 성도들 자신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마치 아담을 창조하신 후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시고 아담을 위해서 최고의 선물인 하와를 손수 지으신 후, 아담에게로 인도해주시는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단장하셔서, 어린양이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신부를 인도해가시는 모습입니다. 또한 이 신부는 에베소서에서 말씀한 바,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친히 피 흘리시고 자신을 주심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하신 바로 신부인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5:26~27). 그 신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새 예루살렘에 대한 단 하나의 묘사, 그것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결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신부에게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즉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보았던 점이나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거룩한 신부입니다. 완전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것이 교회 즉 성도들의 장래 영광에 대한 성경의 묘사입니다.

 

B. 성도들의 궁극적인 처소(21:3~4; 14:2~3)

그런데 여기 새 예루살렘이란 은유로 표현된 교회는 또한 성도들이 궁극적을 거하게 될 장소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14:1~3).

 

그 처소는 모든 성도가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입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은유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인 성도들 자신일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거하게 될 처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완성된 교회의 그림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게 될 세상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 처소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무엇보다 이 처소는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가 성취되는 곳입니다. 21:3은 보좌에서 나오는 큰 음성을 기록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성막과 성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누린 모든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하게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이거나 희미한 하나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함께 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때의 하나님의 임재는 완전하고도 충만한 임재이고, 성도들은 그 감격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방해거리들의 제거) 또한 성도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더욱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모든 방해거리들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1:4에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세상을 살면서 모든 사망, 애통함과 곡함 그리고 아픈 것들로 인한 눈물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주님께서 씻어주신다고 하신 것은 우리로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모든 슬픔과 고통의 문제들을 제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점점 더 놀라운 장면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요한이 본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빛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은 것이었습니다(21:11).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핍박 가운데 있는 연약한 교회 속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완성된 교회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을 요한은 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성에 해나 달이 없다는 것입니다(21:23).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기 때문이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이 없어서 깜깜한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22:5). 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왜 하나님이 빛이신지를 경험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빛을 드러내시고 영광을 우리에게 비추실 것입니다.

 

(성곽) 본문은 새 예루살렘의 성곽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옛날 성들이 성곽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들이 다 멸해진 후에, 성곽이 왜 필요할까요? 이것은 적들의 존재를 상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성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성곽의 두께가 144규빗인데 이것은 65m입니다.

 

지상 최대의 성벽이라 할 만리장성의 두께가 4~8m라고 할 때, 이 정도 두께의 성벽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성의 안전함을 이런 수치로 표현한 것인데, 단순히 65m가 아니라, 완전수인 12x12=144 규빗이라는 것, 완전에 완전을 곱한 완전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또 성곽 자체가 그냥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벽옥으로 되었으며, 여기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3개씩 문이 있는데 그 문이 거대한 진주 하나로 만들어진 문들입니다.

 

그러니 이 진주의 크기는 얼마나 거대하겠습니까? 진주 문에는 각기 구약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곽에는 각종 보석들로 만들어진 빛나는 12기초석이 놓여져 있는데 이 기초석에는 각기 12사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12지파의 이름과 12사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것은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연합된 완전한 교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본문은 성곽에 대한 묘사와 함께 성 자체에 대한 묘사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만들어진 성이며 그 길도 정금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정금이 얼마나 맑으면 유리 같은 정금일 수 있을까 상상만 할 뿐입니다. 그 정금은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반사하니 더욱 빛나는 형상이었을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그 성은 정육면체로 된 성입니다.

 

정육면체는 구약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가 정육면체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처소가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성, 거룩한 예루살렘이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즉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새 예루살렘은 바로 지성소의 확장입니다. 이 성은 완전한 성입니다. 이 성은 길이, 넓이, 높이가 각각 12,000스다디온, 환산하면 2,221킬로미터입니다.

 

정육면체로 된 성의 한 쪽의 길이가 2,221킬로미터가 되니 얼마나 큰 성입니까? 미국 대륙의 동서 길이의 절반이나 되는 길이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이 12,000 스다디온이란 단위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전수 121000이라는 무한이 곱해지는 거대하고도 무한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성의 정중앙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좌에서부터 큰 길 한 가운데로 유유히 흘러나오는 강물이 보입니다.

 

그것은 생명수 강입니다. 그 수질은 수정같이 맑습니다. 이 생명수는 영광스러운 교회와 성도들을 영원히 만족하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무한히 흐르는 성령님의 은혜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초막절 끝날에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로 선포하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7~38).”

 

이 생명수강가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12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케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죄지은 먹고 영생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막으셨던 그 생명나무가 이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징으로서 존재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징으로 성도들에게 나타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어린양 보좌가 성 중앙에 있듯이, 이제는 성도들이 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22:4). , 이런 영광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죄인들에게는 그렇게도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산이나 바위라도 자기들을 덮쳐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려달라고 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얼굴을(6:16) 성도들은 기쁨과 감격과 영광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기 때문입니다(22:3).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으니 이제 성도들을 향한 저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3:1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두려운 명령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시는 영광의 성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바로 성이고,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이자, 성도들 자신이며 교회의 완성된 모습인 것입니다.

 

4. 영광에 이르는 자와 이르지 못하는 자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성,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는 동안 교회에 속했다는 것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는 자가 유업을 얻을 것입니다(21:7).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못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21:8).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듭난 자들이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이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자신입니다.

 

천상의 교회는 싸움이 끝나고 승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 오늘 우리가 속해있는 벧샬롬교회는 여전히 전쟁터에서 싸움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는 싸우는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틴 루터는 자기 전 생애를 걸고 거룩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우리 믿음의 선배입니다. 우리 시대는 조금도 그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루터는 전투의 한복판에서 이런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그는 싸움의 한복판에서 영광스러운 교회의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그에게도 보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영광스러운 교회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려서 이 싸움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진리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도들이 알았고, 아타나시우스가 알았고 어거스틴이 알았던 그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싸움이며, 우리가 이기는 길은 진리로 싸워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벧샬롬교회의 부르심입니다. 왜 이 땅에 벧샬롬교회가 존재해야 합니까? 교인수를 좀 불리고 큰 교회 소리를 듣고 성공한 교회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그저 우리들끼리 인생살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입니까? 주님의 교회는 오직 진리의 싸움을 싸웠던 교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선명하고 분명하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평생 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교회, 진리를 적당히 타협한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싸우고 이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5.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육체 속에 가리워졌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고, 그저 한 사람의 목수나 랍비 정도로 알았고, 심지어는 그분을 때렸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분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별로 주목할만한 어떤 매력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고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은 제자들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요한이 다시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보았을 때 사도는 죽은 자와 같이 땅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1:17). 저는 교회도 감히 주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변화를 경험할 것을 압니다. 이 땅에서 교회의 영광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승리한 교회는 영광을 입게 될 것이고, 그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될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원을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에 드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전쟁터에서 싸움을 싸우면서 받은 모든 상처는 영광의 상처가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싸움의 한복판에서 흘린 눈물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이 싸움을 싸우면서 지칠 때, 낙심하게 될 때, 소망이 흔들릴 때 주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셨던 그 영광스러운 교회를 바라봅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이고 장래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벧샬롬 공동체의 교우 여러분, 예외 없이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 영광의 자리에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21:1-22:5 /21:1-7/ 유기성목사

2018-06-27 01:11:02

 

21:1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5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6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7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8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9 일곱 천사가 마지막 때에 일곱 재난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리로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10 나를 성령으로 휩싸서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고, 거기에는 열두 대문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열두 대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고,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13 그 대문은 동쪽에 셋, 북쪽에 셋, 남쪽에 셋, 서쪽에 셋이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주춧돌이 열두 개가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15 나에게 말하던 그 천사는, 그 도성과 그 문들과 성벽을 측량하려고, 금으로 된 자막대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6 그 도성은 네 모가 반듯하여, 가로와 세로가 같았습니다. 그가 자막대기로 그 도성을 재어 보니,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서로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2,200킬로미터) 17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니, 사람의 치수로 백사십사 규빗 (65미터)이었는데, 그것은 천사의 치수이기도 합니다. 18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9 그 성벽의 주춧돌들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주춧돌은 벽옥이요, 둘째는 사파이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비취옥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21 또 열두 대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데, 그 대문들이 각각 진주 한 개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시의 넓은 거리는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이었습니다.

 

22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에는, 해나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 24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25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사람들은 민족들의 영광과 명예를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27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22:1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3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성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성 안에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예배하며, 4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고,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22장도 너무나 귀한 은혜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절정은 계 21장입니다. 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30분 설교로 어떻게 천국의 은혜와 영광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엉뚱한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설교하지 않고 성령께서 1분만 우리 모두를 천국에 데려가 보여주시고 돌아오게 하시면 효과만점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임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모든 교인들이 집에 가려고 하지 않고, “주여, 조금 전에 본 천국으로 지금 당장 데려가 주세요.”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으로 천국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분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 하니, 천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었는데 한 마디로 황홀한 성이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18-21을 보면 온 성이 보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보석이라 해석도 하기 힘들어 이 보석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했더니 이 세상 어느 왕궁보다 아름답고 영광스럽다.”라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소 아시아의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실상이 무엇인지를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는 교회는 실망스럽고 타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 성의 진정한 영광은 무엇일까요? 보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3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요한이 보니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2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해나 달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눈물을 흘리는데, 누가 눈물을 닦아 주기에 눈을 들어보니 하나님이셨습니다. 천국은 이런 곳입니다.

그러니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있을 리가 없고,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가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만드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면 주 예수님이십니다.

:5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그 말씀을 여기서 다시 하십니다.

:6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여러분은 이런 천국이 있으며, 이 땅에 임할 것을 믿으십니까?

아마 대부분 믿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음을 믿으니 삶이 달라지셨습니까?”

이 질문에는 대답하기 힘든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천국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낙심합니까? 왜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합니까? 왜 그렇게 돈에, 이익에 집착합니까? 명예욕,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믿으면서도 고난도, 슬픔도, 억울함도, 미움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 평소에는 천국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이 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때, 잠깐 생각납니다. 천국에 가셨겠지 하며 조금 위로를 받습니다. 순간에 심각해집니다. ‘나는 정말 잘 살고 있는가?’ 그러다가 다시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서울 용미리와 벽제 납골당에 필기대가 있답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유족들의 애틋한 편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편지의 일부가 [눈물의 편지]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평소에 사랑하지 못했던 후회가 절절히 묻어 있습니다.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것을 부인하고 또 부인하면서 당신을 부르다가 어느새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정말 외롭고 힘들 때 당신이 남긴 목소리를 들으며 펑펑 울어보지만, 나 아직도 시원하게 울어보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목 놓고 울어보고 싶어요. 여보, 나 직장에 나가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잘 참아내고 있어요. 일하다가도 당신이 직장 다닐 때 힘든 것 왜 이해해주지 못했나, 천장을 쳐다보고 눈물을 참곤 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살 테니, 걱정마세요.”

 

당신에 대한 미움 같은 것 이제는 다 없어졌어요. 당신 미워했던 것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에요.”

당신이 떠나기 전 2개월, 내가 당신에게 했던 모진 말들 때문에 내 마음은 병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는 마음속 깊이 당신을 사랑했어요.”

천국에서 당신 볼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아이들만 다 결혼시키면 당신 곁으로 가고 싶네요.󰡓 (아내 윤춘미)

여보, 요즘 들어 동우는 엄마를 더 찾는구료.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라서 그런가보오. 선미는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편인데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은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 같아. 여보, 당신의 존재의미가 이렇게 큰 줄은 미처 몰랐소.”

여보, 나 죽으면 당신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 거야, 정말 미안해.”

 

지훈아, 정말 미안하다. 너의 생전에 따뜻하게 못해준 것이 못내 가슴에 걸리는구나. 네가 한 말, 아버지처럼 안 살겠다던 너의 그 말, 영영 지워지지 않는구나.”

아빠, 내가 정말로 아빠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뭔 줄 알아. 아빠를 정말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더 미안해요, 한 번도 이런 말 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내드려서 너무 미안해요. 아빠, 가끔 집에 와. 한번만 딱 아빠 품에 안겨보고 싶어.󰡓 (딸 이승미)

 

왜 죽을 때 가서야 이처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보이고, 중요한 일이 생각나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지금 죽음도 영생도 천국도 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믿는 성도의 세상사는 모습입니다.

어떤 시련이나 유혹, 핍박이 있어도 담대하고 기쁘게 천국을 향한 길로 나아갑니다.

현실이 힘들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때도 있지만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가서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 마음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새 삶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까?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새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정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까요? 정말 천국은 있을까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신의 영혼 안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저는 잘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간절할 뿐 늘 같은 죄,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서 회개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좌절했습니다. 저 자신이 미워지고 용서가 안 될 때도 많았습니다. 똑같은 일들이 어제도 오늘도 반복이 되어 제겐 변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자격이 없으면 강단에서 내려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몇 번이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 삶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알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죽으라.” 말씀하셨을 때,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다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저 자신에 대한 절망 때문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 복음으로 들려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 안에 새 생명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7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캐나다의 유명한 피플스 쳐치의 담임목사였던 O. J. 스미스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단히 두렵고도 엄숙한 5가지 사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마지막 심판 때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구원받으리라 여겨졌던 사람들 중에도 멸망당할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죽은 뒤에는 구원받을 기회가 다시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섯째, 지금이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에 새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까?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까?

마음이 메말라, 말도 행동도 굳어있지는 않습니까? 변화가 싫어지고 아무생각 없이 세상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 살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살면 큰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21장 새 하늘과 새 땅은 여러분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가서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안에서 매순간 새로워지고 다시 시작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것은 죄지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결함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10번 실패하면 주님은 11번 일으키시고, 100번 실패하면 주님은 101번 다시 시작하게 해주십니다.

 

전에는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한탄하였는데,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매일 매일이 기대가 됩니다.

 

지난 금요일 (420) 영성일기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 주님과 하루를 살 것을 생각하니 기쁘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기대가 됩니다.”

 

22장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중심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12종류의 과실나무가 있는 풍요로운 곳이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우리는 결코 세상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생명수의 강이 우리에게서 흘러나가 사람들과 교회들과 사회가 치유되고 열매 맺는 역사가 일어나야 천국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한 정보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부된 자임을 깨우쳐 주시고 신랑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는 성경입니다.

매주일 요한계시록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받은 은혜 역시 더욱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더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전히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막연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보았고 설교도 들었고 간증도 들었지만 믿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면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눈으로만 성경을 읽지 말고 제 영혼의 눈이 뜨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새로운 삶의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변화의 역사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찬양 주께 가오니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하늘에 관한 최후의 말씀 /21:1-/ 유진 피터슨

2015-06-20 20:07:14

 

새하늘과 새땅 - 하늘과 땅의 통합

 

성경의 시작인 창1:1은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로 시작한다.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 21:1에는 새하늘과 새땅의 선포로 마친다.

 

하늘- 초월적/영적/신비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 반대로 실제적/물질적/현실적 요소를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고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이미지를 구사하는 목적은

- 기독교 신앙이 하늘의 두 요소가 함께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 극단에 빠지지 말고, ‘하늘이 둘 다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하늘’(내세주의, 탈세속주의)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신앙이 ’(현실주의, 실재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두 요소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하나님이란 존재도, 하늘과 땅의 두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먼 곳 하늘에 계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땅에도 계신다.

신앙은 초월적/신비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실재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

 

사도 요한이 새하늘과 새땅이란 묵시적 표현을 도입한 이유가

그런 신앙의 양면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편집자의 이해에 따르면)

 

일례로, 우리의 부활도 영적 부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육의 부활도 함께 일어난다.

올바른 신앙은 영적/물질적 두 영역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주기도문도 이 두 요소를 동시에 포함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늘과 땅다 포함

일용할 양식, 이웃의 죄를 용서,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하늘과 땅둘 다 포함

 

참된 신앙은, 장차 우리가 죽어서 가는 <미래천국>적인 요소도 있지만,

이 땅에서, 우리 삶의 현실에서 이루어질 <현재천국>적 요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을 버리고 만 쫓는 기독교 신앙도 잘못이며,

영적인 것을 도외시한 채 현실적/물질적인 것만 몰두하는 신앙도 잘못이다.

(혹자는 둘 다 균형 있게 추구하되, 그 우선순위는 엄연히 영적인 것에 둔다.)

 

참된 신앙은, 현실도피도 아니다... ‘현실의 완성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현실적이어야 한다. 몽상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예루살렘 - 천국은 전원이 아니라 도시.

 

여러분, 보통 종교나 소설에 그려지는 천국의 이미지는... 전원생활의 낙원 풍이다.

조용하고, 푸른 풀밭에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사람들은 그런 천국을 바란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천국의 중심인 새예루살렘도시city’로 그리고 있다.

그것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루살렘 도시말이다.

 

도시의 이미지가 무엇인가?

복잡한 시장, 사람들이 웅성거림, 온갖 계층이 활발하게 왕래하는 거리 등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 요한이 은유적(묵시문학적)으로 설명하는 천국의 이미지는

<미래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도시 생활에 맥이 빠지고 진절머리 낸다.

그런데 천국이 도시라니? 실망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새예루살렘 도시이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겠다. new것이란 뜻이다.

 

<과거주의>적 관점의 해석에 의하면,

미래의 천국에 가기 전에,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들고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 땅위에 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전히 이 땅에 이뤄지게 한다는 뜻과 같다고 본다.

 

바벨론과 새예루살렘의 비교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다. 18:2

사도요한은, 계시록의 후반부에서 두 도시를 설명하고 있는데,

도시 바벨론은 마땅히 무너져야 할 세속적 도시이며

도시 예루살렘은 새롭게 세워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파괴하고 새로 세워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성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도시 예루살렘의 이미지

혹자는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이미지이다.

유다왕국 말기에 온갖 우상숭배, 배신, 음행, 이방의 침공으로 망한 도시이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역사를 보더라도 도시의 이미지는 죄악의 온상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으며,

니느웨, 두로, 사마리아, 타락한 예루살렘 등

언제나 사람이 모여드는 곳은... 죄악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하게 되어있다.

 

사도요한은 그런 부정적 이미지의 도시를 들고 나온다.

그것을 새 도시, 새예루살렘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탕자를 내버리고 새 아들 낳아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탕자 같은 사람을 고쳐서 새 아들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런 뉘앙스는 ‘12문과 12기초석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데...

 

 

새예루살렘의 12기초석과 12

 

12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각기 새겨져 있고,

12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씌여져 있다.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12지파의 이름들이라 21:12

여러분, 12지파인 야곱의 12아들들은 얼마나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었는가?

특별히 그런 사람들을 이름을 <천국에 들어가는 입구>에 기록한 것은

회개한 자들은 새예루살렘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 성에 성곽은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12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21:14

12사도를 생각해 볼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경에 별로 기록이 안 나온다. 별로 많은 활약이 없었던 것을 보인다.

(나중에 다들 순교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 엄청난 성도들이 순교했다.)

 

그들이 새예루살렘에 중요한 기초석(주춧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현실이 아니고, 묵시적/은유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좀 지나치거나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사도요한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별 볼 일 없었던 9명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그것도 중요한 기초석(주춧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큰 희망을 준다.

 

죄악으로 점철된 예루살렘 도시도 새롭게 고쳐서 쓰시고,

허물투성이 야곱이 12아들들도 고쳐서 새롭게 만들어 쓰시고,

별 볼일 없는 12제자들도 고쳐서 새롭게 고쳐서 쓰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역사상 모든 것이 복구 가능>한 곳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 유진 피터슨 박사는 이렇게 요한의 묵시적 은유를 풀어내고 있다.

 

*새예루살렘의 헬라어 'new'가 옛 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새예루살렘의 크기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12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144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21:16~17

 

해석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매우 크다>는 뜻에는 동일하다.

새예루살렘의 거룩성, 영광은,

그 주변의 신성모독적, 세속적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영화롭다는 뜻이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성도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고 있는 중이다. 고후3:18

 

사도 요한은, 서두에 계2~3장에서 의 일곱 도시(교회)들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마지막에 계21~22장에서 하늘의 도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 에서는 말할 수 없이 곤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하늘에서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유진 피터슨 박사는 철저히 과거주의/묵시문학적(상징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오던

미래 천국과 새하늘과 새땅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해석상 논란이 예상된다.

물론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해서, 미래 천국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는 개인적으로 과거주의+미래주의, 상징적+문자적 해석을

둘 다 함께 수용한다.)

 

 

 

 

잃어버린 진리, 중생 /21:3/ 폴 워셔

2015-06-18 20:12:54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창조사역인 거듭남교리를

5분밖에 걸리지 않는 4영리식 영접기도와 바꿔버렸습니다.

 

1:12절의 영접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나를 사형수로 여기고 죽음에 던지며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을 통치하시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중생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회심의 증거는 결신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부분에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교리에 대해 말씀 드리는 중입니다.

잠깐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전도를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의 교리(래디컬 컨버전)입니다.

 

중생은 단지 인간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단지 천국으로 들어가는 대열에 끼기 위해서

지옥으로 가는 대열에서 뛰쳐나오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할 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에 견줄 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에서 창조되었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도

부패한 쓰레기와 같은 사람을, 놀랍게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할 때,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을 때,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창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초자연적인, 즉 신비한 역사

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통 뜨거운 눈물이 동반되지요. 뜨거운 회개도 동반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증거는 전도 집회에서 단 한번 결심을 했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단지 몇몇 사람만 변화시키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끊임없이 육적인 상태를 지속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가능하다는 교리는

완전한 비성경적입니다.

 

크리스천도 죄를 짓습니까? !

크리스천도 육적인 행위를 합니까? !

크리스천이 잠시 동안 미성숙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

 

그러나 크리스천이 “10~20년 계속거룩하지 못한,

세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신비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크리스천이 되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은, 변화된 다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교회 밖에서처럼,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죄를 많이 보게 된다고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포르노, 거짓말, 증오 등이 교회 안이나 밖에서 동일하게 넘쳐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요즘 미국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름답습니다.

상한 심령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을 깨뜨리며 다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러나 매번 그런 일이 재차 반복되고, 또 계속 반복되고 있다면

문제는 그가 진정 중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중생한 신자라면,

성경에 나와 있는 새 언약은 실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시며,

새롭게 거듭난 본성을 가진 새 사람들을 만드실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3

 

그리고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에 새겨질 것이며,

그들은 그 법에 순종하며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회심의 증거는, 단지 결신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기독교 역사학자인 달라모어 박사님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는 많이 달랐을 텐데요.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들의 삶이 계속 변화되었고, 그들은 계속 교회에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자기 삶에도 전혀 변화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단지, 초청에 응하는 표시로, 자기 손을 들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까?

 

오늘 여기 나오신 분들은, 마음에 고민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손을 들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또 결신 카드를 작성하라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기 전인 6시까지

여기에 계속 남아서, 여러분과 상담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카드에 서명을 하게 한 다음

구원에 대해 5분 정도 설명해 주고,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제자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것은, 아예 새롭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중생도 불분명한 그들에게 전도할 것을 권유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전부 정답을, 지식적으로만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단주의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하고, 그것(구원)에 대해서는 다시는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분이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건 초자연적/신비한 역사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각자가, 간절히 간구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을 했다면,

오늘밤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여기를 걸어 나간 뒤에, 자기 삶이 변화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여러분 안에 착하신 일을 시작하신 주님이, 그 일을 완성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밤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완전한 회심이 아닙니다.

왜냐면 진짜 회심의 증거는

하나님의 역사와 마음의 변화가.. 자기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설명 드리는 것은, 이것은 예전의 방식입니다.

18세기, 19세기의 역사에 나오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6살 때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천국을 가고 싶느냐고 묻는다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아이는 물론 손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14~15세가 되면

하나님의 것들을 증오하는 세상에 살기 시작하면서, 반기독교적으로 변합니다.

 

그때 아이한테 다가가 얘기를 한다고는 하지만,

어릴 때와 같은 식으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원해서 신앙을 고백하게 해야 하는데

이때 여러분이 삶의 모든 부분에서, 보여주는 증거가 중요합니다.

 

정말 부모가, 그리스도안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다면,

사춘기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면서,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인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한 것이, 그 진정성이 불분명하고

계속 죄 가운데 거하다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것을 이루십시오.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이루셔야 하는 부분이지만

여러분의 소원과, 믿음과, 진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은 요즘 기독교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변해가는지 아실 것입니다.

값싼 은혜, 결단주의, 지적 동의.. 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걸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변질되지 않은 진짜 복음에 깨어있으십시오.

 

그것은 은혜의 복음이고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끝까지 완성하시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구원 받은 증거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삶의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회심의 증거는 결신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에 있는 것입니다!

 

 

 

 

21:1-7 /옥한흠 목사 천국환송예배-

2011-11-06 07:49:22

 

설교 : 홍정길 목사

 

저는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와 40년 이상 동역했습니다. 제가 옥 목사 처음 본 것은 1968년으로 당시 옥 목사님은 총신대(합동)에 갓 입학한 상태였습니다. 옥 목사님은 나보다 연상으로 당시 나는 67년에 총신대에 입학한 뒤 신학교의 여러 모습을 보고 몹시 실망할 때였습니다.

 

옥 목사님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과업을 신실하게 마치는 훌륭한 학생이었습니다. 내가 3학년 되고 옥 목사가 2학년이 됐을 때 옥 목사가 1학년 학생 중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모아 그룹을 만들어 열심히 교제하고 가르치는 모습 보았습니다.

 

옥 목사가 목회하던 시절은 한국교회 융성기였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한 동지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바른 교회만 하면 한국교회는 모두 올바로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개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기로 독려하고 격려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종교개혁시대를 통해 이미 평신도 손에 들려진 성경이 한국에서는 일제와 민족상잔 비극 통해 왜곡돼 가부장적인 형태로 변질됐습니다. 이런 가부장적이고 성경해석은 목사만 할 수 있다는 시기에 옥 목사는 성경 말씀을 평신도 손에 다시 돌려줬습니다. 그는 모든 하나님 자녀들은 하나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 평신도 중심의 목회를 하는 교회들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지키려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이 명령하고 말하는 것을 모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의 사역 배후에는 선교가 있고, 빈민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있으며 이 땅의 소외된 장애인과 외국인을 향한 따듯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옌볜과기대도 옥 목사님의 뒷받침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 교회가 단독으로 했다면 그 교회만의 특징이 될만한 모든 분야에서 옥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묵묵히, 성실히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한국교회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100만명 일때는 별 문제 없었습니다. 숫자가 적었던 만큼 영향력도 적고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기독인이 1000만명 가까이 되면서 교회의 재정은 50배로 커졌고 사회악은 100배로 성장됐습니다. 교회가 한국교회의 근심의 근원이요, 한국교회는 비리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옥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언제나 한국교회가 이래도 되는가. 그것도 다른 교단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잘 순종한다는 내가 섬기는 교단이 한국교회의 비리 한 복판에 위치하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옆에서 말렸습니다. 교권과 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렸습니다. “역사상 이방인들이 순교를 많이 시켜서 성자를 많이 만들어 냈지만 또한 교권이 만들어낸 순교자도 얼마나 많은데 당신이 혼자 그 어려운 것 감당하겠는가라고 말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교회갱신협의회를 만들어 교회 갱신운동을 했습니다. 교갱협을 하면서 어떻게든 자기가 속한 교단을 바로 잡아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비리로 얼룩진 교회 후계자 문제를 바로 세우기로 마음으로 작정했습니다.

 

처음 오정현 목사를 후임으로 정했다고 해서 내가 반대했습니다. “당신과 오 목사는 너무나 달라 가치관 혼란을 겪고 방법론 차이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옥 목사는 내 시대는 내식대로 목회해야 하지만 다음시대에는 오 목사가 정답일거야라면서 홍 목사님, 오 목사 뒷받침 잘 해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내가 두 사람을 워낙 너무 잘 알기에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돌아 보면 리더십이 바뀌면서 동력을 잃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의교회가 리더십 이양 이후 이렇게 더 큰 걸음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옥 목사님의 예쁜 마음의 배려와 멀리보는 눈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옥 목사님이 개탄했던 한국교회의 비리는 아직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교단 연합운동도 요지부동입니다. 옥 목사님은 교회가 가진 암처럼 악한 질병을 자기 몸으로 앓다가 92일 주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옥 목사를 72년 동안 담아뒀던 육체의 그릇을 관속에 내려놓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내가 너무 마음이 슬퍼서 조용히 묵상할 때 주께서 홍 목사, 너 정말 부활믿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조현삼 목사(광염교회)가 이렇게 이야기 해줬습니다. “우리 딸이 슬퍼하는 내게 전화하며 아빠 옥 목사님 소천이 나쁜 일만은 아니예요. 우리는 슬프지만 천국에서는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다 돌아오신 옥 목사님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말대로 천국에서는 얼마나 큰 잔치가 벌어졌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이 땅에서 옥 목사님의 영혼을 담은 그릇을 이 앞에 놓아두고 우리 눈을 우러러 하늘 아버지 영광 보좌를 바라 보아야겠습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

 

지금 이후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응답하십니다. 천국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의 개선식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옥 목사님을 천국의 그 장소에서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 장소는 어떤 장소입니까. 주께서 영접하신 그 집을 요한계시록 21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주께서 정금같은 길을 우리 앞에 펼쳐놓으셨다고 말하셨습니다.

 

황금은 땅의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보배입니다. 모두가 황금앞에 머리 숙입니다. 빌 게이츠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 분의 인격이 아니라 돈때문입니다. 이건희 회장도 존경받는 것은 돈 때문이지 인격 때문이 아닙니다. 황금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황금은 너희 아스팔트다라고 말합니다. “너희를 구속할 것은 은이나 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너희 구원에 비하면 황금 같은 것은 발로 깔아뭉갤 아스팔트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황금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진주 문을 지나갈 것입니다. 진주는 고통의산물입니다. 진주의 의미는 눈물입니다.

 

주께서 한 대문 지나갈 때마다 옥 목사, 네가 이 땅에서 흘렸던 눈물을 다 안다12번이나 위로 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은 이별의 땅입니다. 우리가 오래 살았다는 것은 이별의 이력서에 불과합니다. 우리 모두 한번은 홀아비나 과부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이별 합니다. 천국에는 곡하는 것도, 눈물도, 아픈 것도 없습니다.

 

, 이제 우리 옥형 아픔은 없겠구나...(눈물)

 

늘 몸이 약해서 같이 일하다 찡그리는 모습을 볼때마다 안타까웠는데 이제 아픈 것이 다시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먼저 천국 보내신 아버님도 만나시고 은사이신 박윤선 목사도 만나고, 그처럼 존경하던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과 어거스틴과 프랜시스를 만나서 교제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교회 성도님들에게 천국은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제 사랑하는 옥 목사님이 계시는 장소입니다. 우리 모두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축복도 아름답지만 천국이 가장 귀한 것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옥 목사님이 천국에 도착하는 날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흘린 옥 목사님의 눈물을 그 가슴으로 닦아 주실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그 면류관을 씌워줄 것입니다. 이땅에서 한일을 낱낱이 기억하셔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게 기독교가 내세의 이야기를 하니 현실 감각이 없다고 합니다. 그 말은 사기입니다. 이 순간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람과 어떻게 같겠습니까?

 

오늘 한국교회가 이모양 이모습인 것은 내세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기에 이 땅의 치욕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 시간이 그 영광의 개선식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일제때 신사참배 반대로 두 사람이 재판 받았습니다. 주범은 6, 종범 3년의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때 종범인 젊은 전도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6년형 받은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면서 형님. 부럽시다. 천국서 큰 상 받을 것 생각하니 부럽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천국을 바라는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이 시에 한국교회는 천국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승부가 끝날 것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영광의 개선식을 하는 날입니다. 우리 주 예수 앞에서, 원수의 목전서 상을 베푸신 그 분에게 상을 받는 옥 목사님이 받는 그 상을 믿음으로 바라봅시다.

 

우리 시야에 그 광경이 온전히 들어오면 한국교회는 개선되며 영광스럽게 될 거입니다. 우리 삶은 더 복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가슴속에 품고 살 때 우리 통해 이 땅에 천국이 보여지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왕 되신 그 분을 모실 때 한국교회에 새로운 주의 거룩한 나라가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은 영광의 개선식 날입니다. 그 영광을 봅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영광을 가슴속에 품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복합니다. (홍정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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