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⑭ 환난보다 더 큰 복 /계7:1-17
2019-05-18 00:56:52
1. 인생은 환난(患難)이다
프랑스 문학가인 로망 롤랭(Romain Rolland, 1866~1944)은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 인생은 밤낮없이 이어지는 비참한 전쟁이다. 빛도 없고 행복도 없이 고독과 고요 속에서 벌이는 사투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인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도 “인생은 재미있는 쇼나 잔치가 아니다. 오히려 역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말처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고, 그리고 그 고난 혹은 재난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찾아옵니다. 또 굳이 고난이나 시련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어떤 일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쁘게 다가오는가 하면,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고 나쁜 일은 길기만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 신자라고 해서 인생의 고난 환난에서 예외가 아니며, 도리어 신자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이 더 있습니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는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인 말이었습니다.
예수만 믿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살만한 세상인데,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잡혀가거나 또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2. 신자에게도 환난이 있다
1) 인침을 받은 자들
요한계시록은 환난의 책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당시 성도들이 너무나 혹독한 환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주님으로부터 이 계시를 받아 기록한 사도 요한이 환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의 요한과 교회들에게 주님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재앙들은 교회와 성도들이 당할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는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했습니다. 그 일차적인 대상은 로마 정부와 황제, 그 다음은 유대주의자들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린양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은 후, 그 봉인을 하나하나 떼시고, 그때마다 일어나는 재앙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여섯째 인을 뗀 후 일어나는 재앙, 즉 6장 12절부터 14절에 기록된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재앙은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는” 재앙입니다. 이것은 전 우주적인 재앙이면서 지구가 파괴되는 것처럼 보이는 재앙입니다.
이것을 환상 가운데 본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6:17)”에 도대체 “누가 능히 서리요(6:17)”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상황 이후, 즉 “이 일 후에(1)” 그가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 그 막간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전 우주적인 재난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
이것은 여섯째 인과 그로 말미암은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2절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 즉 언제라도 그들이 붙잡고 있던 바람을 놓아버리면 그 바람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권세를 받은 천사들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바람은 지역의 특성상 ‘사막의 열풍’인데요.
이 열풍은 한번 불었다 하면 바다에는 폭풍이 일어나고, 땅의 모든 식물은 바짝 말려버립니다. 그야말로 재앙이요 심판의 바람이지요. 그와 같은 심판의 바람을 불게 할 권세를 부여받은 네 천사가 바람을 붙잡음으로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고요가 온 세상을 덮고 있을 때,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2)”로 외쳤습니다.
그 외침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3)”였습니다. 마치 형을 집행하는 집행관들에게 갑자기 왕의 사신들이 달려와서 ‘형 집행을 멈추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인이란 인을 치는 도구와 거기에 새겨진 활자나 문양, 그리고 그로 인한 날인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은 아주 전부터 널리 사용되었는데요. 주전 3천 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자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인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 인을 받게 될 ‘하나님의 종들은 누구일까?’ 둘째, ‘인을 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셋째, ‘인침을 받은 십사만사천은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① 첫째로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누구일까요? 요한은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5)”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각 지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 맞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 명씩 해서 십사만사천명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많은 학자들은 인침을 받은, 혹은 받게 될 사람들은 혈통적인 이스라엘 즉 유태인들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유태인들의 대대적인 복음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 전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우선 본문에 언급된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열두 지파의 이름이나 그 순서가 아닙니다.
5절부터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 등 열두 지파이나, 여기에는 통상적인 열 두 지파의 이름에서 빠지는 레위 지파가 들어가 있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합쳐 요셉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 단 지파가 빠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② 두 번째로 인을 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 혹은 어떤 모양의 인을 어떤 방식으로 친다는 뜻일까요?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을 친다는 것 자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의 표시입니다. 소나 말 같은 가축을 기르는 주인들은 자기 가축의 엉덩이 등에 특정한 무늬의 화인을 찍어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침을 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은 소유권에 대한 명확한 定義 때문입니다.
즉 굳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친다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쳐지는 인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을 집행하는 대행자들이나 원수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인은 품질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마치 가 그 제품의 품질을 보증하듯 인을 친다는 것은 그가 참 신자임을 보증하신다는 징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백성임을 나타내심으로서 인이 찍혀진 당사자나 원수들이 다 알 수 있게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진짜이기 때문에 건드리거나 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③ 세 번째로 인침을 받은 십사만사천은 누구이며 또 어떤 의미일까요? 4절,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서 가장 우선적인 질문은 십사만사천이란 숫자를 ‘수학적인 실수’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묵시적인 수’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교계 안에서 뿐 아니라 이단들까지 서로 다른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십사만사천이 ‘수학적인 실수’라고 믿는 사람들 중에는 6장 11절의 말씀대로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심판의 날이 온다는 말씀을 근거로 내세웁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만, 여기에 나오는 십사만사천은 수학적인 숫자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수’라는 것을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증명해 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9~10)”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도 요한 역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는 또 무슨 의미일까?’하고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침을 받은 자 “십사만사천”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요한이 인 맞은 자의 수를 “십사만사천”이라고 한 것은 그가 들은 것(4)’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본 수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수였습니다. 요한이 들은 수와 직접 본 수가 다르다는 말이죠.
따라서 이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3은 ‘하늘의 수’요, 4는 ‘땅의 수’로서 3과 4가 곱해진 12를 ‘완전수’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파도 열둘이고, 예수님의 제자도 열둘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10을 ‘꽉 찬 수’라고 믿었고, 10을 세 번 곱한 1000을 ‘더 찰 수 없는 완전수’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십사만사천은 12 X 12 X 1000을 계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수행하신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말해 줍니다. 즉 인 맞은 무리는 신구약 전체의 모든 신자,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한다는 말이죠.
두 번째로 인침을 받은 자 “십사만사천”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왔습니다(9).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무리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만을 의미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사람들은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되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다르기 때문에 유태인들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십사만사천은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한 개인이 온전케 되었다는 의미이고, 그들의 수가 하나님의 계획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의미로서 십사만사천이라는 것이죠.
2)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 십사만사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9,10)” 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흰 옷을 입고서 보좌와 거기 앉으신 어린양 앞에 섰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종려 가지를 들고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승리는 남을 거꾸러뜨리고 이기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과의 투쟁에서 이기는 것이며, 공중권세 잡은 자의 계교와 불신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11)” 하면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2)” 이라면서 성도들의 찬송에 화답했습니다.
그때, 이것을 보고 있던 요한에게 장로 중 하나가 “이 흰 옷을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13)”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알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가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3~14)”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 무리들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엄청나고 지독한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한 자들이었던 것이죠.
바로 여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인침을 받은 자들인데도 그들이 큰 환난을 통과했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을 받은 것이 고통이나 환난 풍파의 ‘면제부’가 아니었다는 말이죠.
도리어 “큰 한난”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인 받기 전보다 더 큰 환난’이라는 의미이고, 또 ‘인을 받았기 때문에 더 크게 당한 것’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종이라고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큰 환난을 당하고, 또 같은 사람인데도 인침을 받는 그 순간 더 큰 환난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죠.
이 말은 당시 성도들에게는 아무 문제없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너무나 큰 환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죠. 분명히 주님을 믿는데도, 아니 그 누구보다도 더 잘 믿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역사상 가장 혹독하고 잔인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환난은 교회와 성도에 대한 직접적인 환난이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핍박한 자들에게 임하는 환난입니다. 그럴지라도 오늘 본문은 원수들을 환난으로 심판하시기 전에 성도들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환난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처럼 성도인 여러분의 삶에도 환난이 있었고, 지금 환난 가운데 있는 이들도 있으며, 또 앞으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서두에 드린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인생이기 때문에 환난이 끊이지를 않을 뿐 아니라, 신자이기 때문에 남다른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님과 복음 때문에 환난을 각오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이죠.
3) 인침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복
그러나 환난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침을 받고 큰 환난을 거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고(15)”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와 복음 때문에 환난을 당했으나 믿음으로 이겨낸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간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숨어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구약 시대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 이상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경계를 넘는 것은 죽을죄였고 또 그 경계선에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남자들 역시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을 지나 이스라엘의 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너머는 제사장의 뜰이어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하늘의 성전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환난을 이긴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15절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고 합니다(15). 출애굽기 24장 16절, 17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출애굽기 40장 34절부터 36절의 성막의 경우에도 구름이 성막을 덮어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했습니다. 역대하 7장 1절부터 3절,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에도 여호와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어서 제사장들이 그리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한 곳에는 어느 누구라도 ‘접근금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환난을 이긴 자들이 여호와의 보좌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쳐 주신다고 말합니다. 장막은 집입니다. 이 말은 신자가 장차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동고동락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16)”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때와 관련된 이사야의 예언(사49:10)을 반영한 것으로 구속 받은 자들이 누릴 영원한 복을 의미합니다.
‘주림과 목마름’은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갈급함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구속 받은 자들은 어떤 종류의 주림과 목마름도 없는 완전히 충족된 상태를 누리게 된다는 말이죠. 또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그 어떤 것에도 해를 입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 때는 조금 뜨거운 햇빛도, 조금 심한 바람에도 상하기 쉽지만, 장차 주님 앞에서는 그 어떤 해도 입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성도들은 모든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인침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네 번째 복은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17)”입니다.
즉 장차 주님 앞에 가면 ‘왜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고 우리가 그의 양인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에서 목자 되신 주님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생명수는 일차적으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갈급함을 解渴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영적인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도 주님의 말씀입니다. 장차 그 주님의 말씀이 가장 가까이에서 들리는 자리에 우리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님은 신자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의 한숨도, 아픔도, 고통도, 이별도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별이여 안녕, 슬픔이여 안녕, 고통이여 안녕, 죽음이여 안녕!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주실 주님의 복이고 그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3. 환난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로키 산맥 해발 3천m 높이에 수목 한계선(樹木限界線, timberline)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다고 합니다.
나무들이 이러한 모습을 갖게 된 이유는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나무들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죠. 이것은 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인생은 환난의 연속입니다. 또 오늘 본문은 우리가 신자이기 때문에 더 큰 환난을 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굳이 더 큰 환난은 아니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아무리 기도해도 여전히 그대로인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달라지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병이 고쳐지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재정적 어려움이 계속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보다 멀리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 멀리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땅의 환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면 장차 원수들이 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누릴 그 놀라운 영광의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의 환난을 잘 이겨내면, 장차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눈에 있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넘치도록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오늘 본문은 인생의 환난풍파를 잘 이겨내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지금이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신자는 환난을 이기는 자이고, 주님은 여러분이 당한 환난을 이기도록 적극적으로 도우실 것이며, 나아가 환난을 이긴 자에게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환난, 믿음의 시련을 잘 이겨서 장차 주님의 보좌 앞에서 누릴 그 놀라운 복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admin
성도가 누릴 영광을 바라보라 /계7:1-17/ 유기성목사
2018-04-10 10:24:10
계 7:1 그 뒤에 나는, 천사 넷이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서, 땅이나 바다나 모든 나무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 그리고 나는, 다른 천사 하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땅과 바다를 해하는 권세를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아라."
4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이 찍힌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마에 도장을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5 도장이 찍힌 사람은, 유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르우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갓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6 아셀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납달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므낫세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7 시므온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레위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잇사갈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8 스불론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요셉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베냐민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었습니다.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13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계 7장은 계시록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 명이란 수 때문입니다. 신천지 등 신흥종교 교주들이 가장 많이 오용하는 말씀인데 이들은 십사만 사천 이란 수가 구원받을 사람의 실제 수라고 주장하면서 “14만4천 명 구원받는다고 요한계시록에 말했지 않느냐? 남은 자리가 얼마 안 남았어. 그러니 빨리 들어와라.” 그렇게 사람들을 미혹해 왔습니다.
이런 말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심판의 날 구원받을 사람이 정말 누구이며 또 얼마나 될지를 성경적으로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계 7장에서 144,000명이란 수가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마지막 일곱째 인이 떼어져 무서운 심판의 바람을 풀어놓으려고 네 천사가 동서남북 네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 뜨는 데로부터 하나님의 도장을 가진 한 천사가 나타나 ‘잠깐 멈추라’고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아라."
여기에 나오는 ‘이마에 도장이 찍힌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날 구원받을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4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이 찍힌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144,000명이란 수는 상징적인 수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와 예수님의 12 제자를 곱한 144에 유대 문화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를 의미하는 1,000을 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44,000명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의미입니다. ‘천군만마’라는 표현과 비슷한 것입니다.
계 7:9에 가면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
144,000명과 이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역사상 온 세계에 흩어져 존재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기도 했습니다.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니라”
이것은 히브리서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주님께서 계 7장에서 요한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은 “성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보좌 앞”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고난 받을지라도 성도가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라 물러서지 말라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구원받을 무리에 속해 있을까?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마를 들여다보지 말고 마음에 성령이 임하셨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이 인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마에 인쳤다는 것 역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임하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보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러분은 마음에 성령이 임하셨음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144,000명에 속한 자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좋아만 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을 모시고 산다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항상 성령을 의식하며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성령의 근심거리가 되어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1부 예배 후 연세 드신 여 성도, 조용히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마음에 용서하라는 사람이 있는데,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하고 싶지만 안 됩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주님께서 용서할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이것이 성령의 근심입니다.
성령의 근심을 작게 여기거나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히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9에 보면 하늘의 성도는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교회 모습이 이 땅의 교회에도 그대로 드러나야 진짜입니다. 그래서 서구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 중의 하나가 인종차별을 용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돼 저 사람은 이래서 안 돼 하면 안 됩니다. 그런 편협한 생각은 성령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인지 아닌지의 조건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요한은 하늘의 성도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9 ... 흰 두루마기를 입고
흰 옷을 입었다는 말은 어린 양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천국에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입니다.
요한은 하늘의 성도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왜 이들은 이렇게 소리 높여 찬양할까요?
천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천국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눈으로 뵈면 어떻게 할까요? “안녕하세요.” 할까요? 다 엎드릴 것입니다. 하늘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찬양하는 것은 여기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성도들의 찬송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천사들도 따라서 화답하였겠습니까?
:11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너무나 황홀하였습니다.
요즘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는 판타지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기에 부목사들과 함께 가서 보았는데, 너무나 유치하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계시록에 나오는 하늘의 성도들이 누리는 그 영광스런 광경은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 장면을 묘사해 줄 작가나 영화제작자가 없을까, 기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별로 복 받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도가 받을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받을 영광은 지금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해 주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리하십니다.
조건은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안 믿고에 상관없이 하늘에 영생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준다고 존재하고 안 믿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성경 말씀을 정말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계시록 말씀들은 하나의 판타지 소설일 뿐입니다.
제가 처음 죽음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였던 때가 초등학교 시절, 고아원 친구가 죽었을 때였습니다, 장례식에 갔더니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다고 땅에 묻을 수 있나? 죽어도 집에 데려가야지, 밤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여러분은 답을 얻었습니까? 성경을 읽고서 비로소 답을 얻었습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종이 가까웠을 때까지 천국에 갈 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빌리그레함 목사님을 청하여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는데,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미국 대통령이라고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엡 2:8을 읽어주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날 그 성경구절을 붙잡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는“고맙네, 이제 나는 준비되었다네.” 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계시한 말씀을 믿을 때, 비로소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실재가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죄 많고 악하다 할지라도 히 12:1 말씀처럼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바라보게 되면 모든 무거운 것이 다 벗겨집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도 벗어 버리게 됩니다. 인내로써 눈앞의 경주를 하게 됩니다.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흰 두루마기를 입은 큰 무리들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이 아는지 떠본 것 같습니다.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14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도는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라 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편하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편하게 산 것 같아도 그가 성도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15-17에 하늘에서 성도가 누리는 영광이 어떤 것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보상과 위로를 받을까요?
편안하게만 살았던 사람이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도로 살려다가 주리고 목마르고 뜨거운 태양빛 아래 고통을 당하고 눈물을 쏟았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한동안 “주님과 동행하려면 고난의 길을 가야한다, 고 하면 누가 그 길을 가려 할까?” 하는 생각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바라보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너무나 기쁜 길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주여, 주님 앞에 설 자격을 갖추게 하시는군요.”,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허락하시는군요.”
성도의 영광을 보는 자에게는 가야 할 길이 환히 보입니다.
시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D.L. 무디(Moody)가 쓴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분위기가 대단히 우울하였습니다. 모두들 낙심하여 무엇인가를 해 볼 의욕을 잃고 있었는데 그때 한 노인이 자신이 산행을 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노인이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미처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안내원에게 “그만 포기합시다. 다시 산 아래로 데려다 주세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안내원은 웃으며 “우리는 곧 폭풍 위로 올라갈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걸어갔더니 정말 여름 저녁과도 같이 고요한 장소에 도달하였습니다.
골짜기 아래에는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치고 천둥이 치며 번개가 번쩍거렸지만, 산꼭대기에서는 안내원의 말처럼 모든 것이 고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방이 캄캄하다고 할지라도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 어두움은 사라질 것입니다.”그래서 다들 새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2017년 한 해 잘 살아 오셨습니까?
먹고 살려다보니 혹시 길을 잃고 방황하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가야할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성도가 받을 영광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 하늘의 영광을 보라 담대하라 찬양하라 감사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마에 인침 받은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 살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모두 함께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7장으로 돌아와서 본문에서 주시는 막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견상으로 세상의 죄와 악인들에 대하여 정확한 공의의 잣대로 심판하시고 재앙을 쏟아 부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표면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심은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참된 평안과 구원을 얻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마음으로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두려운 책이 아니라 은혜가 넘치는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배려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내용을 본문의 7장을 비롯한 막간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6장에서 인의 재앙을 통해 무서운 진노와 재앙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에 6장에 소개된 재앙들이 우리들의 현실에 그대로 펼쳐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성이 심각하게 파괴되어져 갑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들이 갈라질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는 우주의 대 격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재앙의 현상들은 세상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도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재앙과 징벌의 직접적인 대상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두려움이 엄습해 올 것은 분명합니다. 6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바라보는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다시 한 번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장을 쓰도록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박해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당하게 될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아시고 그들을 배려하시는 모습을 4장과 5장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밧모섬에 유배되어져 있는 요한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심으로써 요한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하늘 보좌에서의 광경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늘 보좌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아라. 절대로 세상의 눈높이에서 세상에서 당하는 문제들을 바라보지 말아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믿음의 백성들에게 간곡히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하늘 보좌를 보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영원한 천국의 하늘 보좌를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섬세하신 배려는 6장에 기록된 일곱 인의 재앙이 세상에 전개되는 장면에서도 계속됩니다. 6장에 보면,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에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두렵고 무서운 진노가 일어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8장으로 넘어가면 또 다시 무시무시한 재앙에 대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곱 인에 대한 재앙이 세상에 전개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바로 7장이 주는 의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거칠고 공의로운 재앙의 장면 속에서도 온화하고 부드럽게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인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다. 내가 너희들의 이마에 인을 쳐 놓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벽하게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믿어라!”
이 말씀을 주시고자 7장의 막간을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질병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건강하던 믿음의 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는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고 항변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곧바로 주님이 예비하신 그곳으로 데려가십니다. 육신은 이 땅에서 썩어지고 없어지겠지만 거룩하게 변화된 우리의 몸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안타깝고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는 순간 눈물이 없고 한숨도 없는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위로를 받으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도 그곳에 빨리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하신 그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충성된 일꾼으로 설 수 있기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듯이 6장 12절부터 여섯째 인을 떼는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절인 17절에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무시무시한 진노의 장면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간담도 서늘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도 이런 두려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토록 맹렬하고 두려운 것이라면 그 진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7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본문 7장을 읽게 되면, 믿음의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로와 희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을 떼는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의 문제를 제거해 주고 싶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7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고 나서 우주의 흔들림과 악한 자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이 있은 후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보았던 장면이 무엇입니까?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여기에서 ‘땅의 네 모퉁이’는 동서남북으로 분류되는 땅의 사방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으로써 땅의 전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네 천사가 나오고, 네 모퉁이가 나오고, 네 바람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디든지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네 바람도 사방 전체에서 부는 바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의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것은 온 땅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니까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특징은 네 천사가 나타나서 네 모퉁이 전체에 부는 바람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붙잡다’는 단어는 바람들이 불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으로 하여금 땅 바다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한 것은 마치 폭풍 전의 고요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바람이 파괴를 상징하고 있는데, 예레미야 49장 36절부터 38절까지를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오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 엘람에서 쫓겨난 자가 가지 않는 나라가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엘람으로 그의 원수의 앞,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앞에서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재앙 곧 나의 진노를 그들 위에 내릴 것이며 내가 또 그 뒤로 칼을 보내어 그들을 멸망시키리라. 내가 나의 보좌를 엘람에 주고 왕과 고관들을 그 곳에서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 36절에 보면,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이 엘람에 오게 하는데, 그 바람이 오면서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립니다. 이것은 파괴입니다. 흩어버리는데 그 다음에 37절에 보면 ‘재앙’이 나오고, ‘진노’가 나옵니다. 그리고 ‘멸망’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멸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바람은 지금 파괴 활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파괴 활동을 하는 바람을 네 천사가 딱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바람이 불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잠시 멈추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잠시 유보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천사로 하여금 바람을 붙잡아서 파괴 활동을 못하게 하십니까?
이어지는 본문의 2절과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네 천사로 하여금 바람을 붙잡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딱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리 인을 쳐서 구별하여 보호하기 위해서 잠시 바람을 붙잡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 땅을 심판하시기 전에 당신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이 불신자들과 함께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사전 조치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장자를 치시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문설주의 피를 볼 때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드디어 장자의 재앙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도 애굽의 장자들이 죽어나갑니다. 전 도시가 곡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심정으로 서 있었을까요? 어쩌면 이 재앙이 자신들에게도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문설주에 뿌렸던 어린양의 피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안도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가장 귀하게 보시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영웅호걸도 아니고 백만장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름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를 내리든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큼은 우리 성도들을 가장 존귀한 자로 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비록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할지라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부지런히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왔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이단의 가르침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해 돋는 데’라는 것은 물론 동쪽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동쪽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출애굽기 27장에는 성막의 문이 동쪽에 있고, 에스겔 43장에는 하나님의 영광도 동쪽으로부터 성전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메시아는 동방의 나라인 한국에서 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단들의 소리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있습니다. 밧모섬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있는 섬입니다. 그 밧모섬에 있는 요한의 입장에서 볼 때 동쪽이라고 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둥급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이라는 것은 지구상의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동해 바다라고 하지만, 일본인들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는 서해 바다입니다. 따라서 ‘해 돋는 데’가 동쪽이고, 그 동쪽이 한국이기 때문에 장차 메시아가 한국에서 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넘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구원과 보호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보호를 위한 모든 은혜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은 인간 스스로 맞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천사가 자기 마음대로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태초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생명책에 따라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여기저기에서 어려움이 닥치고 구원에 대한 어지러운 이야기와 풍설들이 바람처럼 밀려올 때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3절에 보면,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인’이라는 것은 고대의 군주가 자신의 공식 문서나 재산에 찍는 것이기도 하고, 가축의 소유주가 자신의 가축임을 표시할 때 찍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은 노예나 군인들, 혹은 종교나 길드와 같이 어떤 단체의 회원임을 확실히 하기 위한 신분 표시의 일종으로 찍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이러한 인을 치신다는 것은 택하신 자를 자신의 양으로 확실히 해서 지키고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끝까지 살펴보면 이처럼 찍힌 하나님의 인은 마지막 끝 날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천국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하셔서 찍은 인은 상황이 변하거나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랑과 보호도 영원합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들이 성도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보았을 때 성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종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인도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인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성도들과 사탄의 인을 맞은 자들 사이에는 역사의 마지막까지 영적 전쟁이 있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종들이지만, 동시에 사탄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군사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신실한 종으로써 영적 전쟁에서도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기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치는 일이 너무나도 시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쓰나미의 재앙 몰려오기 직전에 그 재앙으로부터 보호하고 구원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표시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천둥과 같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땅을 해하지 마라! 바다를 해하지 마라! 내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다 찍기 전까지는 나무 하나도 해하지 마라!”
그리고 4절에 보면,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수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에 보면,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이 숫자를 가지고도 장난을 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는 십사만 사천명이라면서 문자적으로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명에 들어가기 위해서 직장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저렇게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지금 신천지는 자신들의 신자들이 십사만 사천명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주장을 바꾸어서 십사만 사천명은 순교자들의 영혼과 합일이 되는 왕 같은 제사장의 구원을 얻게 되고, 자신들의 집단에 참석한 나머지의 사람들은 ‘흰무리’의 구원이라고 해서 일반 백성으로서의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신천지의 사람들이 저렇게 열심을 내는 이유는 바로 백성으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십사만 사천명에 들어가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신도 가정도 다 끝장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도 나오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7장 4절에서는 분명히 이마에 인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14장 1절에서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면 7장에는 인만 찍고, 14장 1절에서는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이냐?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할 때 7장에서는 인을 찍은 것으로 묘사를 하고, 14장 1절에서는 이름을 쓴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인을 찍었다고 할 수도 있고, 이름을 기록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이 실제로 찍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 이마를 보십시오. 제 이마에 성부와 성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눈으로 보이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성부와 성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상징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성부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냐? 여기 하나님의 인을 찍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찍혀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성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도장을 ‘콱’ 찍으신 것입니다. 이 도장은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감도장입니다. 하나님이 인감도장을 찍으시면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소유물에 누가 손을 댈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적그리스도가 창궐하고, 거짓 선지자가 넘쳐 나서 저들이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로 해치지 못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로 확인하시고, 확실하게 보호하십니다. 이것을 보여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오늘의 본문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호라고 생각을 한다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업에서 실패한 성도들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방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타나는 현상들만을 보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궁극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기가 어렵습니다. 죽는 그 순간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통과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도장을 찍으시고 이름을 적어주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어떤 환난이나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위협하면서 날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그 백성과 영원무궁토록 복된 삶을 살도록 보장하십니다. 그것이 7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보실 때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시려고 7장을 기록하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의 수 /계7:4-8/ 오주철목사
2018-06-28 00:58:22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자애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듯이 ‘막간’이라는 장면입니다. ‘막간’이라고 하는 것은 연극에서 하나의 막이 끝나고 그 다음 막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쉬는 시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중요한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막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에서 여섯째 인이 끝나고 일곱째 인으로 넘어가기 전에 본문의 7장에서 막간이 나옵니다. 그리고 8장에서 일곱째 인과 함께 첫째 나팔에 관한 재앙이 나옵니다. 9장에 가면 여섯째 나팔이 나오고 10장과 11장까지 막간이 펼쳐진 후에 11장 뒷부분에서 일곱째 나팔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일곱째 인이 나오면서 동시에 나팔에 관한 재앙이 나오고, 일곱째 나팔이 나오면서 동시에 대접에 관한 재앙이 나오는데, 그 사이에 막간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처럼 막간이 들어가 있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서운 진노와 재앙을 바라보면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이 막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조그만 사건에도 얼마나 쉽게 낙담하고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안달하며 휘청거리는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7장과 같은 막간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늘 눈앞에 펼쳐지는 환경과 세상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리와 현실적인 역경 앞에서 쉽게 좌절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심정으로 오늘의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6장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자 무시무시한 우주의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이 엄청난 재앙 앞에서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서 두려워하며 고통스럽게 절규합니다.
“산아, 우리 위에 떨어져라! 바위야, 우리 위에 떨어져라! 그리하여 저 어린양의 진노의 낯으로부터 우리를 숨겨다오!”
이 무시무시한 진노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들어가면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저렇게 맹렬한 것이라면 그 진노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이러한 물음 앞에 하나님께서는 십사만 사천명의 무리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내 백성은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 내 백성의 운명은 내가 보호하고 지킨다. 내 백성은 반드시 승리한다.”
이것이 7장의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내용을 잠시 정리를 합니다. 요한이 보니까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땅의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것은 온 땅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네 천사가 이 바람을 딱 붙잡고 있으면서 파괴활동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네 천사로 하여금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은 장차 이 땅에 무서운 재앙의 심판을 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백성들을 구별하셔서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다 찍기 전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 하나도 해하지 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은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듯이 묵시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인이 찍혀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도장을 ‘콱’ 찍으셨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상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침을 받을 때까지 재앙이 연기 되는 것은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과 사탄에 의해서 시련을 겪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인침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는가?
본문을 보면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올라와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찍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인을 칠 때의 과정이라든가, 인을 맞은 자들의 반응이나 전후 모습의 변화 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을 맞을 대상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성경이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칠 때의 감정이라든가, 현상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를 두고 이단들이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침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는가?”라는 물음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뜨겁게 열심히 할 때는 구원의 확신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내가 생각해도 신앙생활이 전혀 아니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맞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인을 맞은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 것인가?”
이런 의심과 염려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이단들이 찾아옵니다. 그 대표적인 이단이 박옥수와 이요한의 구원파입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붙잡고 집요하게 구원의 확신에 대해 질문하면서 자신이 구원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없다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기성교회들이 모두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 믿음의 근본을 흔들어 놓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과 같은 표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을 치실 때의 과정이나 느낌에 대해 성경이 왜 침묵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을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인을 치는 것이 성령의 인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바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수많은 주장들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던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얼마나 혼돈 속에 빠져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불필요한 억측이나 독단을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신비한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알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표지에 대해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해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아바, 아빠’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런가 하면,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곧 성령을 받은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와 표지를 통해 누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경험한 성령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일정한 틀이나 공식으로 고정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보십시오. 같은 성령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이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불같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과 같이 분명한 표징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말씀의 은사처럼 보이지 않는 지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경이 말씀하시는 곳까지만 가고, 성경이 서는 곳에 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분명한 진리에 대해서는 더할 수 없이 확고한 자세로 붙잡아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이나 성령의 내면적인 사역과 같이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이단에 빠질 위험이 많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선택된 백성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길은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들 편에서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왕으로 고백하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십사만 사천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을 해석하는데 문자적인 해석과 상징적인 해석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과 많은 이단들이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십사만 사천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나온 유대인들만을 가리키는 실질적인 숫자라고 주장을 합니다. 실제로 얼른 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 맞은 자들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팔레스타인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400만명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유대인들은 1,500백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전 세계적으로 많이 흩어져 있는데, 유대인들도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 가장 많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입니다.
대략 5,000만에서 7,500백만명 정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고 합니다. 세계 웬만한 도시에 가면 중국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00만명이 본토에 있고, 그 다음에 약 1,100만명 정도가 해외에 흩어져 있어서 1,500백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 중에 구원받아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을 맞은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5절부터 8절까지는 유대인 열두 지파에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이다는 뜻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세대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유대인들은 십사만 사천명이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얼마나 구원을 받느냐고 했을 때 본문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이들은 유대인들 중에는 십사만 사천명이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 중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십사만 사천명은 민족적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유대인처럼 묘사를 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냐?”
본문 5절부터 8절까지 기록되고 있는 지파들의 목록을 보면 구약성경에 열여덟 번 나옵니다. 그때마다 특색이 있는 지파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의 지파 목록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상한 것은 단 지파가 없습니다.
단 지파가 없다는 것을 가지고 과거에 우리나라 이단들이 많이 이용해 먹었습니다. 저들은 주장하기를 이스라엘의 단 지파가 북쪽으로 가서 사라졌는데, 그들이 한반도로 건너와서 단군이 나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단 지파에서 단군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단 지파의 후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단군은 신화입니다. 신화는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이라는 단어가 똑같으니까 단 지파가 단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 지파라고 할 때 그 ‘단’은 히브리어의 ‘단’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에서 ‘단’하고, 한국말의 ‘단’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사이비 이단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을 다 바치고, 가정이 다 파괴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 절대로 가정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가정생활을 합니다. 직장생활을 잘 합니다. 신앙과 생활을 이원론적으로 가르치면 안 됩니다. 신앙이 생활이고, 생활이 신앙입니다.
다음으로, 요셉 지파를 보십시오.
본문 6절에 보면 요셉의 두 아들 가운데 므낫세가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8절에 보면 요셉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나열하면서 아들 지파인 므낫세가 나오고, 아버지 지파인 요셉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도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므낫세만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상적인 지파 배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의 지파 목록이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시기는 A.D. 95년입니다.
95년 당시에는 벌써 이스라엘에서 열두 지파라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부다 썩여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게 되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 앗수르가 식민지 동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방 땅으로 분산시킵니다.
때문에 지파 개념이 모호하게 되어졌고, 나머지 남유다의 두 지파도 A.D. 70년에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그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에 가서 어디는 무슨 지파, 어디는 무슨 지파라고 따져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인 95년에는 지파들이 이미 다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파의 경계선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지파들의 이름들은 실제로 유다 지파 중에서 1만 2천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지파들이 다 썩여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지파 자체가 이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십사만 사천은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받은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누구냐?
본문 3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라고 해서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도장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종들이 누구냐?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계시록 자체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유대인들만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목사만을 생각하지만, 여기 1장 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은 목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여러분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종들에게”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7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3절에서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유대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장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은 유대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4장 1절을 보면 시온산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십사만 사천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14장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여기에 보면,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합니다.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건져냄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7장에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 십사만 사천명은 유대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경을 보게 되면 열두 지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여기에 보면, 마지막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예루살렘 성으로 묘사를 하면서 이 예루살렘 성에 열두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예루살렘 성으로 묘사를 한다면 그 예루살렘 성에 여러분들이 들어가서 살 것 같습니까, 살지 않을 것 같습니까? 삽니다. 반드시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열두 지파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저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열두 지파라는 것은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묘사할 때 요한계시록에서 열두 지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장에서 천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십사만 사천명이라고 표현을 했을까요?
이 시간 여러분이 머리로 한 번 암산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올 사람들까지 전부 다 합쳤을 때 도대체 몇 명이 될 것 같습니까? 십사만 사천명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해도 6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 통합측만 해도 270만명이 넘습니다. 십사만 사천명이라고 한다면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십사만 사천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멸망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신천지를 비롯하여 이단들에서는 십사만 사천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신천지에서는 9절에서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흰 무리’라고 하면서 4절에서의 십사만 사천명을 구별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즉, 십사만 사천명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선지자들의 영과 합일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흰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명과 흰 무리를 구분하는 것은 이만희가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십사만 사천명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직장도 내팽개치고 그렇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기 십사만 사천명은 실질적인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사만 사천명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하는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을 문맥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런 엉뚱한 주장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주장에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다 보면 숫자들을 통한 상징들이 많이 나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도 상징입니다. 열둘이라는 상징의 숫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신약의 열두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 수가 열둘입니다.
구약에 열둘, 신약의 열둘이라고 하면 벌써 144입니다. 거기에다가 구약과 신약을 다 포괄했으니까 144가 되는 것이고, 1,000이라는 숫자는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은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 침을 받은 한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십사억이 될는지, 백사십억이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으시는 것에서 한 명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십사만 사천 명 속에 들어갔는지 들어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들 십사만 사천 명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언양영신교회 성도들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다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혹여 자신은 신앙적인 체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십사만 사천 속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믿느냐, 못 믿느냐? 그것은 여기 십사만 사천 명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장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확실하게 믿습니다. 믿으면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단들이 와서 이상한 것으로 장난을 칠 때 제발 거기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 그래서 신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 곱하기 천. 이것은 많은 수인데 정해진 수가 바로 십사만 사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수가 얼마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을 맞은 정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찍은 사람들 속에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14장에 나오는 시온산에 서서 새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십사만 사천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십사만 사천 속에 속하고, 어떤 사람은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너무 너무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 구원하시면 영원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늘 감사하시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때로 나 홀로 외딴 섬에 남겨진 것과 같은 심정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처럼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하나님! 저 혼자 이 고독한 신앙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시대에 7,000명을 남겨두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십사만 사천명의 무리들과 허다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혼자서 외로운 영적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믿음의 성도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인을 찍는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있건, 어떠한 위기를 만나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계7:9-17/ 오주철목사
2018-06-28 01:02:23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계시록 7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7장은 말씀을 드렸지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재앙들이 떨어질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막간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있는 막간의 장면들을 보면서 알 수가 있듯이 교회와 성도는 재앙 시리즈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괴로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가 재앙으로 인한 고난 때문에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싸우고, 그 고난으로 인하여 더 빨리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궁극적으로 우리들을 사탄과 악의 공격에서 지켜주시고,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 확고한 약속을 보여주시는 것이 7장이라고 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요한계시록을 강해한다고 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일곱 인을 떼는 재앙이 임하고, 일곱 나팔을 부는 재앙이 임하고, 일곱 대접을 쏟는 재앙이 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궁극적으로 보호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보시면 어두운 심판의 면을 보여주시다가 동시에 밝은 면을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심판의 면을 보이시는 것은 불신자들을 경고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밝은 면을 보여주시는 것은 성도들을 격려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7장의 말씀은 성도들을 격려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재앙과 고난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감사하며 찬양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7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와 9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십사만 사천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9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은 능히 셀 수 없이 큰, 승리한 무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두 무리는 사실상 같은 그룹이지만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신약 백성이 갖는 이스라엘의 유산이라는 맥락에서 이스라엘과 신약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결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뒷부분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고 해서 범세계적인 온 인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부분은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뒷부분은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로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십사만 사천명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명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제곱한 수 ‘144’에 완전성과 무한성을 상징하는 1,000이라는 수를 곱하여 얻은 수가 십사만 사천입니다.
따라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 숫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로 작정되어 하나님의 인을 맞은 그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인을 맞은 십사만 사천명의 장면을 본 후에 또 다른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여기에 보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여러 민족의, 여러 언어의 많은 사람들, 누구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장차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지만 여기에 보면,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해서 상당히 많은 숫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십사만 사천명이라는 표현과 9절에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표현은 결국 같은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왜 9절에 와서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을 했고,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4절부터 8절까지에서는 십사만 사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똑같은 사람들을 묘사하는데 이렇게 다르게 묘사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6장 17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어린 양이 여섯째 인을 떼었을 때 온 우주의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는 어린 양의 진노의 큰 날에 왕과 통치자들을 비롯하여 노예든 자유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숨을 곳을 찾으면서 산과 바위를 향해 절규합니다.
"바위야, 산아! 우리 위에 떨어져라! 그리하여 저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숨겨 다오!”
무시무시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하게 될 때에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 저 어린 양의 무서운 진노로부터 누가 버틸 수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불신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서운 진노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불신자들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그때가 옵니다. 그때가 오면 불신자들이 감당을 못합니다. 그때가 되면 천년을 하루와 같이 참으셨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진노를 한꺼번에 다 쏟아 부으십니다. 지옥에 보내는 순간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어린 양의 무서운 진노 앞에 서게 됩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 누가 그 진노의 날에 설 수가 있겠는가?”
무시무시한 질문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두 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의 답변은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을 맞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무서운 진노가 임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은 6장 17절에서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대해서 “설 자들은 이런 자들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앞에서 걱정하지 않고 설 수 있다는 답변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할 때 ‘누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 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설 수가 있느냐? 그것은 1절부터 8절까지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가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 곱하기 많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1,000이라고 해서 십사만 사천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답변이 1절부터 8절까지의 답변입니다.
그 다음에 9절부터 17절까지의 답변은 똑같은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린 양의 진노를 당하지 않는 이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왜 그들이 설 수 있느냐? 왜 어린양의 무시무시한 진노가 임하는데 그들은 전혀 겁을 내지 않고 당당하게 설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이 오늘의 본문인 9절부터 17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변의 핵심이 본문 14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 그 앞에 설 수가 있느냐?”라고 했을 때, 그 이유는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서 희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계시록적인 표현인데,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옷을 희게 씻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피를 묻혔는데 어떻게 흴 수가 있습니까? 피를 묻혔다면 벌겋게 되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옷을 씻으면 흰옷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린 양의 피를 통해서 죄를 다 씻고 나면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옷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염려 없이 누가 능히 설 수 있느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가 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부터 17절까지는 그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선다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도를 달리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도장을 맞은 사람들이 선다는 것이고, 9절부터 17절까지는 보좌 앞에 있는 어린 양을 믿는 사람들이 선다는 표현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구약식으로 표현을 한 것이고, 9절부터 17절까지는 신약식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그룹을 두고 한 쪽에는 구약의 방식을 통해서 표현을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신약의 방식으로 표현을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9절에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결국 십사만 사천 명과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8절까지의 말씀과 그 다음에 나오는 9절 이하의 말씀을 연결시켜주는 말씀이 10절입니다.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앞에 있는 어린 양에게 구원하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이 사실은 어느 한두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망라한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에는 소위 종교다원주의자들을 통해서 구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있다고 합니다.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이요, 사기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앞에 있는 어린 양이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두렵고 무서운 진노의 날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오늘의 성경본문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9절을 다시 한 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흰옷이라는 것은 깨끗하고, 순수함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의 보혈로 죄를 다 씻어서 깨끗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려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더러운 오염으로부터 보호함을 받아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보면, 사도 요한은 이러한 모습을 한 그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는 어쩌면 7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 마디 속에 6장 마지막에서 제시된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장 마지막 절에 보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높고 낮음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대재앙의 날에 산과 바위틈에 숨어서 “누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낮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능히 서리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바로 이것에 대한 대답을 본 절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구원받은 백성들만이 이처럼 당당하게 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절망과 탄식이 아니라 천지가 울릴 만큼 큰 소리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6장 마지막에서 언급되었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은 세상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마지막 날에 굴과 바위틈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다 포기하고 고난과 핍박을 받았던 성도들은 이처럼 당당하게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서 온 세상천지가 울릴 정도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자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생명의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이었고, 후자의 사람들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들었을 때 기쁨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한 순간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본문을 통해서 보듯이 멀지 않은 때에 그 한 순간의 차이가 이처럼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분명하게 외칠 수가 있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그리스도와 복음이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은 그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날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고마운 전도를 통해 이처럼 귀한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그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이처럼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 지구촌에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 종족이 1만 종족이 있다고 합니다. 울산의 110만 시민들 가운데 100만명이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들이 어린 양의 피를 듣고 믿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씻어주시고 깨끗한 흰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이 사역이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양하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에 보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양하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이 땅에서 그냥 가만히 놀다가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거나 관망했던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두 가지의 대가를 지불하고 승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큰 환난을 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데 순교적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로,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옷을 희게 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힘으로 산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붙잡고 살면서 승리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도 요한이 바라보았던 그 영광된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하나님 앞에 충성된 자의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말고 부지런히 열심을 내는 신실한 제자의 삶을 사십시오. 우리 주님의 생애가 땀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삶이었듯이, 여기 하나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들도 동일하게 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앉아 있지만 우리들 가운데 누가 먼저 주님 앞에 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잠깐 왔다가 가는데 하나님께서 2018년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 전하겠습니까? 전하지 않는데 누가 듣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나에게 건강이 주어졌을 때 복음을 전하십시오. 나에게 물질이 있을 때 그것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다 없어지고, 다 잃어버리고 난 후에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물질을 주셨을 때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희게 할 수 있는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전혀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다는 부끄러운 성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14절에서 ‘큰 환난’의 때를 놓고 여러 주장들이 있습니다. 먼저, 세대주의자들은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7년 대환난이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3년반과 후3년반으로 구분하면서 전3년반은 유대인들과 적그리스도가 비교적 평화롭게 살겠지만 후3년반이 되면 서로 싸우기 때문에 대환난이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큰 환난’은 후3년반의 대환난의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통신학에서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큰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전무후무한 큰 환난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기간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간을 직설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어느 기간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굉장히 큰 환난의 기간이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초림하셔서 재림하실 때까지가 환난의 기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시대에서 고난을 통과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바로 앞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하는 인침을 받아서 안전하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다시 이러한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의 보호와 안전이란,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보호와 안전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실제적인 고난에서 제외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더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환난을 당합니다. 심지어 믿음으로 인해 생명을 잃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가면 환난이 엄청 많아지게 됩니다. 적그리스도가 횡행하고 세상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생활을 하기에 굉장히 힘든 때가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환난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양하는 그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신분을 이야기 할 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더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더 안전한 사람들은 아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받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더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러한 고난으로 인해 더 큰 축복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며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제 본문 15절부터 17절까지는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부터 17절까지를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환난과 구원과 최고의 복, 이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이 이상의 복이 없습니다. 천국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가 누리게 될 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그때만을 생각하면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늙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대와 50대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영광의 그날이 올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쳐주십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지 아니하고, 보좌 가운데에 앉으신 어린 양이 우리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면서 저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기록되고 있는 완성된 구원의 상태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완성된 천국에서의 삶을 고대하며 많은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고단하고 힘들 때마다 저들은 천국을 향한 노래를 부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찬양 가운데 제가 좋아하는 ‘천당가’가 있습니다. 다같이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화려하고 무궁한곳 저 좋은 천당
천하사람 다 못 가도 우리는 가서
우리주님 천만 성도 같이 앉아서
이 세상에 지나온 일 이야기할 적에
2. 우리주님 우리들의 등을 만지며
애고 내 아들 내 딸들아 고생도 했지
생명강수 흐르는 물에 목욕시키고
생명과일 좋은 열매 따다 줄 적에
3. 우리들은 그 열매를 받아먹으며
세상생각 다 잊고서 기쁨이 충만
거문고와 비파를 홀로 칠 때에
딩동댕동 그 소리가 듣기 좋겠네
4. 여기 앉은 부모형제 낙심 마세요
예수만 믿고 보면 천국은 내 천국
그의 귀한 아들딸이 되고만 보면
반짝 반짝 금면류관 내 것이로다.”
너무 좋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완성된 구원으로 인하여 감격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너무 좋아서 오늘의 고난이 고난으로 보이지 않아야 됩니다. 잠깐 지나갑니다. 아무리 고생해도 잠깐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잠깐의 고난은 영원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사랑하는 여러분,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광은 어린양의 보혈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가슴에서 찬양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인생의 고통 앞에서 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노래를 지어주는 책입니다. 비록 환경으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지만 주님의 구원하심으로 인하여 부를 수밖에 없는 새 노래를 우리로 하여금 부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환난을 통과한 후 흰옷을 입고 지복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는 4장의 말씀입니다. ‘어린양’은 5장의 말씀입니다. 4장과 5장이 합쳐진 말씀이 10절에서 12절입니다. 이 찬송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천사와 장로들이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면서 화답을 합니다. “아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하니까 저들이 “아멘!”하면서 화답하는 것입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으로 시작을 해서 ‘아멘’으로 화답을 합니다. 얼마나 감격하면 이렇게 되겠습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사만 사천입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구원에 감격해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게 됩니다. 7장의 내용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성될 구원을 누리게 될 상태를 미리 보여주는 비전입니다. 미리 보여주시면서 오늘의 고난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린 양의 피로 흰옷을 입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이런 저런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지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고, 항상 찬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이 복된 소식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하며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주 앞에 섰을 때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사만사천에 들어있습니까? /계7:4, 계14:1-/ 박봉수 목사
2020-06-15 10:06:52
이번 코로나19사태로 뜻밖에 주목을 받은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신천지’입니다. 이 신천지는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시작된 발단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대구지역을 코로나사태의 최고 피해지역이 되게 한 장본인입니다. 이 때문에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으면서 그 전모가 드러났고,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천지 관련뉴스를 보면서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됐을 것입니다.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모두들 조심하고 있을 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예배를 드렸을까? 그리고 어떻게 대구집회소 한 곳에서 전국 여러 곳으로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었을까?
알고 보니 저들의 ‘십사만사천교리’ 때문입니다. 이 교리의 핵심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신천지가 도래할 때 주님 곁에 왕권을 가진 자 즉 왕 같은 제사장이 십사만사천명이 있고, 그 아래에 나머지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천지신도들은 이 십사만사천명 안에 들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천지는 이 안에 들라며 신도들 사이에 경쟁을 붙입니다.
신천지는 십사만사천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출석입니다. 수요일과 주일에는 반드시 집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만일 출장이나 여행 중일 경우 근처의 다른 지파의 집회소라도 참석해야 합니다.
신천지는 신자들의 출석체크를 위해서 전산처리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지문을 등록하게 하고, 주민등록번호처럼 신자등록번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집회 출석시 지문으로 출석체크를 하고, 본부에서는 전산으로 출석여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천지 대구집회소에는 코로나19사태 속에서도 신도들이 출석체크를 위해 모였고, 대구지역신도는 물론이고, 이 지역을 다니러온 타지역의 신도들, 그리고 특히 이만희교주 생가를 참배하러 온 타지역 신도들이 함께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천지는 신도들에게 십사만사천 안에 들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갖게 만들고, 이것을 이용해서 신도들을 통제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십사만사천 교리는 신천지가 원조가 아닙니다. 이미 교주 이만희가 영향을 받았던 이단들이 같은 수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직접 영향을 받았던 유재열의 장막성전, 그리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박태선의 천부교와 문선명의 통일교 같은 이단들이 이 십사만사천 교리로 신도들을 통제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만희와 무관한 이단들에도 이 십사만사천 교리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건너온 이단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그리고 몰몬교도 다 이 십사만사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이단들은 “당신은 십사만사천에 들어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기존교회에 다녀서는 절대 이 안에 들 수 없고 오직 자기들 집단에 가입해야만 들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그러면서 이 십사만사천에 들려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결국 이런 이단들은 이 교리를 이용해서 어리숙한 신도들을 속이고, 종교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는 무엇이기에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일까요? 우선 이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숫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단들이 저마다 이 말씀을 아전인수식으로 잘못해석해서 이런 문제들이 생긴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인침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사천이니” 한 마디로 말하면 구원 받은 사람의 수가 십사만사천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십사만사천을 ‘실제의 수’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 수를 ‘상징의 수’로 해석해야 하는지의 문제 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의 그리스도인들만 10억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성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 그리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수를 따지면 그야말로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입니다. 만일 숫자 그대로 십사만사천만 구원을 받는다면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역사학자 데이빗 바렛트(David Barrett)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순교자의 수는 약 7천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십사만사천명뿐이라면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대부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사만사천은 분명히 실제의 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그 자체로 상징의 책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숫자, 색깔, 동물, 물건들이 다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십사만사천은 상징의 수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십사만사천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까지 정통기독교는 이 상징을 이렇게 해석해 왔습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 곱하기 신약의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12, 곱하기 완전수 10의 세제곱을 뜻하는 1000, 그래서 그 합이 십사만사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두 포함하고, 그리고 신약시대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가득 찬 ‘만수’(滿數)를 뜻하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한 모두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이 없는 수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면 십사만사천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인침 받은 사람
십사만사천의 우선적인 특징은 인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 을 보면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저들 모두가 인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인침 받은 내용을 보면 3절 을 보면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이마에 인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1 을 보면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그러니까 이 십사만사천명의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다시 말해 예수와 여호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계 7:2 을 보면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마에 인을 친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인입니다.
종합해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저 천상의 영적인 인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이마에 새겨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이 인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저 천상의 영적인 존재들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구원 받은 사람들 그들의 이마에 영적인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눈에, 그리고 저 천상의 영적 존재들 눈에는 구별되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들의 이마에 영적인 도장을 찍으신 것일까요?
겔 9:4-6 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듣고 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심판할 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안에 우상숭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있는데 우선 그들을 찾아서 그 이마에 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안의 사람들을 심판하여 치되 이마에 표를 한 사람들은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마에 인을 치게 해서 주님의 이름을 새겨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을 쳐놓은 그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가도록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환난 풍파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 코로나사태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실 줄 믿습니다.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
계 14장을 보면 이 십사만사천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남다른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14:4-5 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에 네 가지 삶의 특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순결입니다 . 음란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지켜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둘째는 순종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여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셋째는 헌신입니다.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넷째는 정직입니다. 입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며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네 가지 삶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구별된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기러기]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기러기 한 떼가 어느 마을 위를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마리가 거위들이 모여서 평화롭게 모이를 먹는 모습이 보았습니다. 마침 한 쪽 날개가 아파왔습니다. 잠시 쉬어 가려는 생각으로 홀로 거위들이 있는 집 뜰에 내려앉았습니다.
이 기러기는 거위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신나게 놀며 지냈습니다. 문득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날아오르려고 날개를 퍼덕거렸지만, 그동안 살이 쪄서 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뒤 어느 날 하늘에 기러기 떼들이 아름다운 수를 놓으며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 기러기는 다시 한 번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끝내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우화 끝에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교훈을 남겼습니다. "거위는 절대 기러기가 될 수 없으나 기러기는 곧잘 거위가 돼 버린다. 경계하라!"
골 3:1-2 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십사만사천에 든 사람들은 기러기처럼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 거위처럼 땅의 것을 찾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러기 같은 사람들이 곧잘 거위가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정보화시대입니다. 눈을 뜨면 스마트폰으로 그리고 아이패드나 컴퓨터로 땅의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듭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정보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하늘을 쳐다봐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철저하게 지켜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하는 사람
계 14:3 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사도요한이 본 저 천상의 모습입니다. 핵심은 주님의 보좌 앞에 십사만사천명의 거대한 합창단이 노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노랫소리가 거대한 물소리와 우렛소리와 같이 웅장하고 우렁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거문고소리처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십사만사천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배워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다른 그 누구도 배울 수 없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사들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없고, 십사만사천에 들지 못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도 배울 수 없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한 종편방송에서 ‘미스터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이 국민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도 인기가 있다고 해서 유튜브를 통해서 최종결선 장면을 보았습니다.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14살짜리 소년이 최종결선에서 5위로 톱 7에 든 것입니다. 무슨 노래를 부르나 봤더니 전설적인 가수 배호의 ‘누가 울어’라는 노래입니다.
저는 처음에 잘 이해가 안 됐습니다. 트롯은 흘러간 노래라 해서 장년이나 노년들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대중가요 장르입니다.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잘 부르지 않고 특히 그 음악의 정서와 맞지 않아서 외면해온 장르입니다. 그런데 14살짜리가 트롯을 부르는데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정동원군은 부모가 이혼을 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하동에서 살아왔습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트롯을 좋아했고 늘 듣거나 불렀을 것입니다. 당연히 따라 부르며 자랐을 것이고, 노래를 잘 부르니까 할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잘한다며 자꾸 불러보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 받으려고 열심히 연습하고 또 부르다가 이렇게 된 것일 것입니다.
십사만사천의 구원받은 백성들은 저 천성에서 새노래 합창단을 이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새노래를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부르지 않는 노래, 그들이 모르는 노래, 새노래 찬양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부르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노래가 좋아져야 합니다. 그 노래를 부르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 노래를 부르다 눈물도 흘리고, 그 노래를 부르다 새 힘을 얻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래 실력도 점점 더 늘어야 합니다. 음악적으로도 나아져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영적으로 깊어져서 그 노래가 신령한 노래가 되어져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단들이 십사만사천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당신은 십사만사천에 들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십사만사천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그 질문을 생각하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사만사천에 들었습니까?” 이 질문은 다른 말로 말하면, “영적인 인침을 받았습니까?”,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찬양을 부르며 살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모두 십사만사천에 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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