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받아먹어라 /계10:1-11/ 유기성목사
2018-04-10 12:12:42
계 10:1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2 그는 손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 서서, 3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으니,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리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4 그 일곱 천둥이 말을 다 하였을 때에, 나는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인봉하여라. 그것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5 그리고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6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7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8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10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11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길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큰 재앙이 임하기 전에, 꼭 요한에게 감당할 은혜를 먼저 주셨습니다.
일곱 번째 인의 재앙이 임하기 직전, 계 7장에서 주님은 하늘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일곱번째 나팔 재앙이 임하기 직전에도 계 10장에서 주님은 요한에게 감당할 은혜를 먼저 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실을 이길 힘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선 한 힘센 천사를 보게 하셨는데, 그에게는 작은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완전한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때 천사가 큰 소리로 말하는데, 일곱 천둥소리 같았습니다. 그 때 요한이 그 소리를 기록하려 한 것을 보면 그 두루마리의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록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과정은 이미 확고히 정해져 있지만 우리가 지금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마지막 때의 계시를 받고도 기록하지 못하게 하셨고, 사도 바울도 삼층천에 올라가 마지막 때의 모든 비밀을 듣고 보았으나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미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며 말했습니다.
:6 ...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7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예언해주신 말씀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만 분명히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주신 성경책의 예언으로도 충분합니다.
만약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단이며 속이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셔서 요한이 그 천사에게 나아갔더니 천사가 요한에게 "이것을 받아먹어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등학교 때, 사전을 씹어 먹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전을 다 외우겠다는 것이지요.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것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렘 15:16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라고 하였고 겔 3:3에서도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고 하였고 고전 3:2을 보면 말씀을 젖과 밤에 비유하였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를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지식의 근거만으로 아니라, 먹어야 사는 양식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경 말씀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으라, 곧 그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리빙스턴, 16년간 아프리카 정글에서 선교, 잠시 영국으로 귀국하여 글라스고 대학에서 연설, 한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고독한 환경에서 16년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주님의 두 마디 약속 때문입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말씀을 먹은 사람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병이 고침받기를 세 번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는 그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질병을 오히려 기뻐하였고, 자랑하였습니다.
고후 12:9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이것이 말씀을 먹은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였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아멘. 나는 이제 예수님과 연합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 정말 믿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는 하나이며 주님은 나를 결코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신다!’ 이것이 진리를 결론 삼는 믿음입니다. 그 때, 의심과 실패의 순간이 올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결국 말씀이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은 이 놀라운 말씀을 알면서도 “나는 안 죽었나봐.” 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씀은 알지만 먹지를 않았기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글 하나가 있습니다.
제목은 [그러자 예수께서 우셨다]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곁에 둘러 앉히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통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의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이 말씀을 글로 적어 놓고 싶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말했다. "이 말씀을 외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야고보가 말했다. "그걸 갖고 우리끼리 시험 쳐 보겠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가 말했다. "이 말씀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참고 서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바돌로메가 말했다. "이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할까요?"
그러자 요한이 말했다. "다른 제자들한테는 이런 걸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자 마태오가 말했다. "이제 하실 말씀이 다 끝나셨나요?"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 말씀이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는 예수에게 앞으로 하실 수업 계획서를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가르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셨다.”
성경 말씀을 그저 아는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애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라도 말씀을 먹지 않으면 실족하고 맙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순회선교단 김용의 선교사님의 막내아들 김선교 선교사가 극심한 신앙의 방황 끝에 믿음의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그 과정을 [믿음은 분투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김선교라 지어준 아버지는 대단한 믿음이었겠지만, 본인은 그 이름대로 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17살에 선교사가 되었지만 처절한 믿음의 방황이 있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왜 내 믿음은 이것밖에 안 될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된다고 하셨는데 왜 나는 그 삶을 살아낼 수 없을까?’ 질문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같이 믿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방황을 겪는 모든 과정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영성일기를 쓴 것입니다. 10년 정도 기록한 묵상 노트와 궁금하면 적어놓았던 노트들을 꺼내들고 읽어가는 중에, 자신이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주님은 항상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묵상 노트와 일기 속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셨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자신의 "믿음의 방황”을 지켜본 주위 사람들이 명확한 복음, 올바른 진리를 말해주길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과 믿음의 선배들이 만약 "그래, 인간은 어쩔 수 없어." "그만하면 됐어." "힘들면 그만해도 돼." 하였다면 그는 방황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야, 복음은 분명해." "주님이 하실 것이다." "끝까지 가자."... 하면서 방황하고 갈등하고 반항하는 자신을 묵묵히 참아가며 견뎌주었기에 그가 방황을 이기고 확신에 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것이 진리다.’ ‘이게 맞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먹은 사람은 반드시 말씀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천사의 말처럼 입에는 꿀 같은데 배에는 썼다고 했습니다.
:10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이 말은, 말씀을 듣는 것은 너무나 달콤하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힘들다는 말입니다.
요한이 하늘의 영광을 보고 심판과 구원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달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에게 많은 백성과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말씀은 너무나 좋지만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핍박과 멸시를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따금 ‘나는 정말 잘 가고 있나?’ 하는 질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24 시간 주님과 동행하자고 하지만 안 되는 것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내가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명확한 기준으로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라!' 는 것입니다.
제가 가는 길이 옳은지 여부는 느낌이나 사람들의 반응이나, 환경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곳까지 가야하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으면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저는 제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제 비전을 이루자고 노력하지도 않고, 오직 ‘성경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는 것을 믿을 뿐이고 어떻게 성경이 약속한대로 살아갈 것인지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아미시 공동체에서는 “우리가 용서하여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 는 성경 말씀 하나 붙잡고 500년 공동체를 이루고 삽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논쟁하려 하면 간단히 대답합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설교 준비를 마무리하면서 “주여, 말씀을 먹게 해 주소서.” 기도했을 때, 주님은 의외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경 읽기부터 하라.”
갑작스런 반전이었지만 그것이 옳았습니다. 말씀을 먹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읽지도 않은 말씀을 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인터넷 뉴스는 항상 새로운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검색을 합니다. 반면 성경책은 늘 그 소리 같고, 너무나 뻔한 말씀 같아 읽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고 먹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전하는 일이 쓴 맛일 때가 있지만 주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의 쓴 맛을 능히 감당할 은혜의 단 맛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배불리 먹고 그 말씀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하신 후에 사명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 휴대폰 등 옛날에는 상상도 못할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을 위한 음식의 재료는 곡물과 채소와 고기, 그대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정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뉴스가 아니라 생명의 양식인 성경입니다. 뉴스나 보고 드라마나 보니 영이 메마르는 것입니다. 짜증이 나고 조급해지고 우울해지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해 보세요. 삶의 기쁨과 감사, 회개, 힘이 생깁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들은 사람은 마지막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읽어 보지도 들어온 적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때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순간 성경 말씀이 펼쳐져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항상 성경을 들고 다니며 읽어야하고, 성경을 먹는다는 마음으로 읽기로 결단하여야 합니다.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admin
요한계시록 강해-17/ 말씀의 삶을 살라! /계10:1-11
2020-01-21 07:15:40
1.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시대
여러분도 느끼고 계시겠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다소 혼란스럽고, 또 전에 없던 죄와 악이 난무해도 지금처럼 살기 편하고 좋은 시대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죠.
저만 해도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작은 지게를 지고 아버지나 형님을 따라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고, 그렇게 산에 가서는 소나무 껍데기를 벗겨 그 안에 있는 속껍질을 먹으면서 자랐습니다. 또 버스를 타려면 20리 길을 걸어야 했고, 하루 두 세 차례 밖에 없는 버스마저 놓치면 수십 리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정말 먹고 싶었던 자장면과 생일 케이크는 집에서나 다른 데서는 먹을 수 없었고 교회 중등부에 올라가서 한 달에 한 번 생일자 축하 때 처음으로 잘라보았고 또 먹어보았습니다. 아무튼 지금 우리는 너무 너무 좋아진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어떨까요? 신앙생활도 똑 같이 좋아졌을까요? 정말 好時節을 살고 있지만, 신앙의 열정과 삶의 열심은 옛날 어려웠을 때보다 더 못합니다. 그때만큼 충성하지 않고, 그때만큼 기도하지 않고, 그때만큼 전도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먹지 못해도 교회 가고, 아파도 교회 가고, 죽어도 교회 가서 죽자고 했는데, 지금은 먹으러 간다고 교회 안 오고, 아프다고 교회 안 오고, 죽을까봐 교회 오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즉 시절은 좋아졌으나 신앙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는 말이죠.
그 중에서도 가장 못해진 것은 성경에 대한 태도일 것입니다. 저희들 어릴 때는 전 교인이 일 년에 성경 一讀하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말이면 반드시 일 년 단위로 된 <성경읽기표>를 전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연말에 이것을 거두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루 세 장, 주일 다섯 장’ 해서 성경을 一讀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경 일 년 일독’이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립니까?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계시록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던 성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오늘 본문은 그렇게 어려운 교인들에게 짐을 덜어주기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사도 요한과 당시 성도들에게 주시는 어렵고 힘든 부탁은 무엇입니까?
2. 말씀을 먹으라 하신 주님
1) 불신자들에 대한 재앙들 사이에 신자들에게
우선 오늘 본문은 설명이 조금 필요한 부분입니다. 굳이 기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한 번 들어는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을 1,2부로 나누어서 읽으면 그 뜻이 더욱 명확해진다고 말합니다. 1부는 1장부터 11장까지인데요. 계시록은 1부의 끝인 11장 19절로 끝을 맺어도 그 뜻과 전개에는 별 문제가 없도록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2부는 12장부터 22장까지인데 1부와 대조를 이루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록 방법을 <교차대구법(交次對句法, chiasmus)>이라고 합니다.
교차대구법이란 어떤 내용을 설명할 때 첫째 문장은 끝 문장과, 둘째 문장은 끝에서 둘째 문장과, 그리고 셋째 문장은 끝에서 셋째 문장과 서로 대조되도록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문학적인 기교인데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용을 보다 깊고 다양하게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심판”이라는 큰 주제를 교차대구법 형식으로 네 차례에 걸쳐서 반복하는 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구성 가운데 오늘 본문은 11장과 함께 1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1부의 마지막 부분은 지금까지 계속 되던 재앙에 관한 기록이 아닙니다. 이것을 ‘삽화’라고 하는데요. 어떤 내용을 진행 하다가 잠시 쉬어가는 내용을 말합니다. 이러한 삽화는 앞에도 있었습니다. 어린 양이 여섯째 인을 떼신 후 곧바로 일곱째 인을 떼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고, 그 사이에 삽화가 하나 있었지요. 그 삽화가 무엇이었습니까?
7장에 기록된 것으로, 바로 인 치심을 받은 “십사만 사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 “흰옷 입은 무리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삽화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들, 즉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재앙이 진행되는 중에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保護와 사랑과 報償의 대상인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삽화는 왜 기록되었을까요? 너무나 무시무시한 우주적이고 끔찍한 재앙에 관한 계시의 말씀들이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더 기죽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그것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하여 이런 삽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즉 삽화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말이죠.
이런 첫 번째 삽화처럼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도 삽화가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과 11장입니다. 그 삽화는 “작은 두루마리(10장)와 두 증인(11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작은 두루마리”에 관한 것입니다.
2) “두루마리를 먹어버리라”
1, 2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지금까지 보았던 나팔을 든 일곱 천사가 아닌 다른 한 천사, 즉 힘센 천사와 그 손에 들려진 “작은 두루마리”를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힘센 다른 천사”는 누구일까요? 이 천사에 대한 설명이 예수님에 대한 설명과 비슷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묘사되었을 뿐 천사라고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천사를 예수처럼 묘사한 것은 그가 어린양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의 막중함 때문입니다.
이 천사는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1)”옵니다. 하늘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요. 시편 기자는 하늘의 흰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고(시104:2,3), 에스겔은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겔1:28). 또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된 가운데 나타난 곳에 구름이 등장합니다(마17:5, 행1:9).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은 만왕의 왕, 영광의 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9장 11절부터 16절에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이고, 에스겔 1장 28절에 따르면 무지개는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입니다. “그 얼굴은 해 같고.” 해는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줍니다.
따라서 이 천사는 심판이나 재앙이 아닌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발은 행동을 상징하고, 불은 힘의 원천이며, 튼튼한 다리는 활동의 기본이 되는 것처럼 천사는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강력하고 확실하게 사역할 것입니다. 또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2)”라고 했습니다. 오른발로 바다를 밟고 왼발로 땅을 밟고 서 있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천사의 손에 들려있는 펼쳐진 작은 두루마리입니다.
천사의 손에 작은 책이 펴진 채로 놓였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를 다 했다는 뜻입니다.
그 모습으로 천사는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3)” 외쳤습니다. 성경에서 사자의 울부짖음은 주로 하나님의 음성에 사용되었습니다만(호11:10;암3:8), 본문에서 천사의 소리가 사자와 같다는 것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여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외침은 일곱 우레가 반응할 만큼 크고 우렁찼습니다.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3).” 여기의 일곱 우레는 ‘일곱’ 인의 재앙, ‘일곱’ 나팔의 재앙, 그리고 ‘일곱’ 대접의 재앙처럼 요한계시록에 반복된 확실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행하심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일곱 우레의 반응은 천사의 말에 대한 동의, 그러니까 “아멘”과 같다는 말입니다.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고 일곱 우레가 그에 반응하자 사도 요한은 그것을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4)”고 했습니다. 요한에게 기록을 금한 이유는 아직은 그 내용을 공개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원수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과 성도의 최종적인 승리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안건이 결정된 것을 회의록에 기록할 때, 그 과정을 일일이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누가 안건을 내고, 누가 재청을 하여 동의를 표했는지, 그리고 몇 표에 의해서 결정되었는지를 기록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어떤 안건을 결정하다’라고만 기록하면 됩니다. 그처럼 원수에 대한 심판과 교회와 성도의 승리의 과정을 일일이 적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
이어지는 5절부터 7절은 “힘 센 다른 천사”의 음성입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비밀은 예언된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11장 15절부터 18절에 다시 반복됩니다.
이상의 설명들이 여러분들에게 다소 복잡하게 들리실 것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6)”이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마지막 심판을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6).
7절 말씀처럼 마침내 일곱째 나팔이 불려질 것이고, 그때 세상의 끝이 올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립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신불신 간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체하시고 연기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즉 여섯째 나팔까지의 재앙만 보아도, 심판이 지체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기록된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진행되던 환상 중에 하늘에서 들려오던 음성, 아마도 우리 주님의 음성으로 여겨지는데요. 그 음성이 사도 요한에게 천사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두루마리 책을 가지라고 말합니다(8). 그래서 그 책을 받아 가졌더니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이번에는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말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9).” 천사가 자신의 손에 펼쳐진 채로 있던 그 책을 요한에게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책을 먹는다? 그것도 옛날 책인 두루마리를 먹는다? 여러분은 이것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옛날 사람들은 글공부를 하면서 그 글을 잘 깨닫기 위해 그 글이 기록된 종이를 태운 후 그 재를 술이나 물에 타먹으면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저희들 어릴 때도 영어사전을 한 장씩 외우고는 그것을 씹어 먹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천사가 “먹어버리라(9)”했고 요한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것을 먹었습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10)” 물론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행위가 가진 의미는 분명합니다. 성경은 가지고 다니는 책이나, 읽고 듣는 것으로 그만인 책이 아니라는 것이죠. 마치 음식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입으로 소리 내어 읽고, 되새김질 하듯 계속 읊조리고, 그리하여 그 뜻을 분명하게 안 후,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오늘 본문은 ‘먹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두루마리 책을 먹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그 배에서는 쓰디 쓸 것이라고 합니다.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9).” 이것은 구약 시대에 비슷한 경우를 당했던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도 겪었던 상황인데요(렘15:16,19; 겔3:3). 여기서 ‘입에 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일 자체는 한없이 기쁜 일임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입에 달다’는 표현이 성경에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시편119:103, 예레미야15:16). 그 다음으로 ‘배에 쓰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인데요. 그 뜻은 먹은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느끼게 되는 고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쓴 이유는 현재 핍박 가운데 있는 교회와 성도들 때문입니다. 지금도 힘들지만, 앞으로 더 큰 환난 가운데 더욱 더 힘들어질 것이고, 또 거대한 적그리스도와 그 세력의 출현 및 그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닥칠 것을 계시한 말씀의 책은 알면 알수록 쓸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당시 성도들과 사도 요한은 너무나 힘든 상황에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주신 말씀을 이해하여 그대로 살아내는 것은 더더욱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신자임을 감추고 살아도 될까 말까한 시대에 신자라는 표시를 내는 것은 ‘나를 죽이시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책, 주님의 말씀은 쓰디 쓴 독초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11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많은 백성, 나라, 방언과 임금들에게 ‘예언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죠. 사실 주님은 계시록 1장에서부터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이 부탁을 하셨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1:11).” 즉 계시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성도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지금이 힘들고, 또 그 말씀이 어렵고,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더 어려울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은 자의 피할 수 없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789년 영국 군함 바운티(Bounty) 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자들 중 일부는 사회 정치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피트게언’이라는 섬에 상륙하여 원주민들과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뒤 그곳에는 살인, 폭력, 성(性) 문란, 알콜 중독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러한 결과에 회의를 품은 지도자 ‘플래처’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남은 사람들은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떠나기 전 ‘존 아담스’라는 사람이 창고에서 우연히 성경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그는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지 않고 성경과 함께 그 섬에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피트게언 섬이 천국처럼 변했습니다. 한 권의 성경으로 인하여 그 섬과 섬사람들이 변화된 것이죠.
결국 말씀의 삶의 최종적인 모습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그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전도를 어려워할 뿐 아니라 꺼립니다. 그러는 이유는 ‘별 효과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전도하는 시대는 지났다’, ‘전해도 듣지 않더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주님 오실 날이 다가올수록 더 전하라’고 합니다. 광고, 즉 PR의 원리 가운데는 ‘사람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계속 반복하여 들려주면 그러는 중에 이해되고, 상품의 이름과 내용이 그 속에 침투되어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외침으로서 그들로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의 마지막 사명은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꺼져가는 전도의 마지막 불씨를 다시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전도로 인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며, 교회가 살아나고, 이 시대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말씀을 살아내고 전하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어느 곳에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가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이나 그 가정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가까이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한 이웃이 그의 부인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그녀에게 성경을 한 권 주었습니다. 성경을 받은 그의 아내는 ‘혹시나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성경을 보물처럼 여겼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남편은 아내와 그가 갖기 시작한 신앙을 비웃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만취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까 부인이 성경을 읽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전에는 술에 취한 자신을 보면 싸움닭처럼 달려들던 여인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고는 계속 성경을 읽자, 화가 난 그 남자는 “불에 태우면 없어질 이 따위 성경책을 왜 읽어?”라고 고함을 치면서 부인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벽난로 속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남편이 벽난로의 남은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종이에 마태복음 24장 35절 말씀이 있었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구절을 읽는 순간 그는 마치 몽둥이로 한 방 맞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에 태우면 없어질 이 따위 성경책을 왜 읽어?”라고 했는데, 주님의 말씀은 불에 태워도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죄책감을 강하게 느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보십시오! 성경은 단순한 책이 결코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복음을 방해하며,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의 재앙을 말씀하시는 그 중간에 삽입된 것으로, 전적으로 성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두루마리 책을 먹으라’, 즉 말씀을 먹고,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며, 또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두루마리가 배에 쓴 것처럼, 말씀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계속 하는 것이 신자가 살 길입니다. 그렇게 살 때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이 땅에 희망의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현실이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괴롭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괴로울수록 더 적극적으로 말씀의 삶을 살아낼 때, 그것이 여러분과 주변을 더 복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의 삶을 살고, 그리하여 말씀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댁쟾쇰줈
전도자에 관한 최후의 말씀 /계10:1-/ 유진 피터슨
2015-07-16 13:07:57
계시록 10, 11장은 <증인>, 즉 전도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피터슨 박사는 이 부분을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한 ‘전도자'에 관한 설교로 해석하는데요...
그는 계시록을, 먼 미래의 종말, 재림 직전의 사건에 대한 해석보다는, (소위 미래주의 해석)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기 위한 설교로 해석합니다. (소위 과거주의 해석)
진리를 올바로 선포하면, 베드로처럼 하루에 수 천 명을 회개케 하지만,
반대로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선지자와 사도는 진리를 겁 없이 말하는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이다.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요한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음녀’를 거론한다. 계17:6
증인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면... 반드시 피를 흘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증인’(마르투스)란 말에서, 오늘날 ‘순교자’(마터)란 말이 생겼다.
1세기 말엽에는 대부분 성도의 가정에는, 순교당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증인(전도자)의 활동 시점이 6째~7째 나팔의 중간 시점
성도들의 기도에 의해 천사들의 7나팔이 울려 퍼진다.
그 중에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6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까,
유브라데 강에서 말탄 기병대가 놓임을 받는다.
이것은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당시 무서웠던 ‘파르티아’ 군대의 침입을 뜻한다.
그들은 특히 말을 뒤로 앉아 타고 가면서 활을 쏘는 무서운 군대였다. 9:19
초대교회를 핍박하는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다는 예언이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9:20~21
바로 이때 하나님은 <증인>을 부르시고, 그런 회개치 않는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그것이 이어지는 계시록 10~11장에 전개된다.
◑천사와 작은 두루마리 계10장
▲일곱 천둥이 말하는 것을 기록하지 마라. 그것을 비밀로 하여라! 10:4
저자는, 다른 해석자들과 달리, 이 구절에 큰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왜냐면 예수님께서도, 병자를 고치신 후에 비밀로 해라고 말씀했던 적이 있었고,
변화산에서도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17:9
그러나 결국에는 그 비밀들이 성경에 기록되면서 다 알려졌다.
그러니까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는” 법이다. 전3:7
7천둥이 말하는 것 - 지금이 말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지,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증인이 겪는 단맛과 쓴맛
천둥은 일시적 비공개였지만, 공개해야 할 것이 있다. <두루마리>이다. 10:8
앞서 봉인된 두루마리가 나와서 요한이 울었던 적이 있다. 5:1~2
여기에 두번째로 두루마리, 즉 성경이 등장한다. 증인이 증거해야할 내용이다.
그래서 요한이 천사에게서 그 두루마리(성경)를 받아먹자,
<입에는 꿀처럼 달지만, 배에는 쓰라리고 아팠다>
에스겔 선지자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다. 겔2:8~3:3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처음에는 송이꿀처럼 달다.
그러나 말씀을 가감 없이 증거 하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렘20:8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배에는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이 말씀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이다.
모든 ‘증인’은 단맛과 쓴맛을 둘 다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을 때는 달콤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때는 쓴맛이다.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증거하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단맛과 쓴맛의 양면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성경은 ‘성공’만 보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대표적이시다. ‘배척’도 동시에 당하셨다.
(오늘날 말씀 때문에 배척을 받지 않는다면... 깊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증인의 삶 - 안식과 전투의 양면성
너는 많은 민족과 나라와 언어와 왕들에 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10:11
‘증인’에게는 예외가 없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명령’이다.
이 말씀은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던 예레미야를 연상케 한다. 렘1:5~10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면, ‘안식’만 있는 게 아니다. ‘전투’도 있다.
순종하면 평탄한 삶만 살게 되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부분적인 가르침이다.
많은 민족과 나라에 증인으로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전투이다.
물론 전투 중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이 있지만 말이다. 둘 다 봐야 한다.
◈두 증인 계11장
◑절별 해석
▶ 성전측량(1~2절)
"지팡이 같은 갈대"는 당시에 쓰이던 갈대로 만든 자. measuring rod(NIV)
"지팡이"란 말은 "자"ruler란 말과 당시에 혼용되었다.
측량의 의미는 다음 두 가지다.
i)소유를 의미한다.
ii)보호를 의미한다.
에스겔이 환상중에 바라본 천국 성전도 상세하게 측량되었고(겔 40장)
스가랴도 예루살렘이 척량되는 것을 보았다(슥 2:1~5).
새 예루살렘도 측량된다(계 21:15~17).
▶ 두 증인(3~14절)
① 두 증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은 4절에 나온다.
"이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v.4)
*두 감람나무 -감람나무는 기름을 의미하며, 기름부음 받은 두 사람을 뜻함.
스가랴서와 관련지어 보면, 기름부음 받은 두 사람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이다(슥 4:14).
스가랴 때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도와 성전 건축을 완성하셨듯이,
말세(=교회시대)에 두 증인을 도와 성전을 완공하시겠다는 뜻이다.
*두 촛대 - 교회를 의미한다. 두 감람나무와 동일한 뜻이 반복 상징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항상 '두 감람나무=두 촛대=두 증인'을 세우신다. 하나가 혹시 실족하면
다른 하나가 붙잡아 주듯이, 투 톱 시스템(축구 용어)은 주님의 전략이다.
계시록 2~3장에도 7교회를 ‘촛대’에 비유하셨다.
*사도 요한은 '나라와 제사장'을 계시록에서 두 차례 언급하고 있다(1:6, 5:10)
혹시 이 두 증인을 '나라와 제사장'에 연계시키고 있는 가능성도 높다.
스룹바벨은 '나라'(=왕)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이었다.
②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러 보내실 때 둘씩 짝 지워 보내셨다(눅 10:1).
고로 두 증인은 '복음을 전하는 성도(교회)를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도 옳다.
두 촛대=두 증인(계 11:3)=두 증인(눅 10:1)으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7대접 재앙 중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긍정적 역사이다.
이렇게 계시록에는 항상 '긍정적 승리' 와 '부정적 심판'이 교차적으로 계시된다.
'계시록의 양극 구조' 참조 요. http://blog.daum.net/rfcdrfcd/12973445 (맨 아래에 있음)
③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한다"(v.3)
그래서 3년반(1,260일)을 교회시대(승천~재림)로 본다.
그 때 당시에는 달력의 1년을 360일로 계산했을 것임.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이다.
④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v.5)
→ 두 증인은 교회시대에 복음 전파의 권세를 가졌다. 교회시대는 교회가 승리한다.
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달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엘리야),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모세)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v.6)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권세를 가졌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곧 교회의 대표들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변화되어 나타났던 인물들이다.
그것은 재림 때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준 목적도 된다.
*엘리야는 주의 날이 오기 전에 나타날 선지자였다(말 4:5).
초림 때 세례 요한으로서 이미 나타났지만, 재림 때 다시 나타날 것이다.
두 증인으로서, 모세와 엘리야로서, 두 감람나무로서, 두 촛대로서 나타날 것이다.
⑥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v.5)
두 증인의 권세는 "말"(증거하는 복음)에 있다. 12:11참조.
⑦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v.7)
교회 시대가 끝날 즈음에 큰 핍박(대환난)을 당한다.
앞서 두 증인이 원수를 소멸했지만(v.5), 그 때는 짐승이 두 중인을 죽인다(v.7).
그 때는 '사단이 놓이는' 때이다.
그러나 두 증인(또는 사명자)은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결코 미리 죽지 않는다.★
교회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 마치기 전에는 결코 망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⑧ 예루살렘에서 특히 핍박이 많이 일어난다(v.8).
이 예루살렘은 문자적/상징적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11:8에 "영적으로 하면..." 설명이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선 문자적으로 봄도 옳다.
구약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혹은 이스라엘을 ‘소돔’에 비유했다(사1:9-10, 렘23:14).
앞서 소아시아에 보낸 7교회에서도 유대인 회당은 성도들을 핍박했다(계 2:9, 3:9).
상징적으로는 예루살렘을 당시 성도들을 가장 거세게 핍박했던 '로마'로 생각한다.
⑨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v.8)
시체가 길에 버려져 있음은 큰 모욕이다. 이는 교회가 큰 수치 당할 것을 암시한다.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v.9)
죽인 후에 장사도 못하게 하는 것은 당시에도 최대의 가혹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⑩ "저희가 땅에 거한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v.10)
아합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고 불렀다(왕상 18:17).
실제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는 아합 자신이었지만, 그는 거꾸로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말세 때에도 불신자들은 '두 증인'이 자기들을 괴롭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예물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⑪ 두 증인은 사흘반 후에 부활하고 승천(휴거)한다. 십자가 후에 최후승리 얻는다.
이 시점은 바로 세상 끝이다(v.11~13).
이 때, 큰 지진이 나서 '성' 1/10이 무너지고 거기서 죽은 사람이 7천명이라 했다.
이것은 '성'이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임을 나타낸다.
만약 로마였다면, 적어도 10만 명 정도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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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반, 1260일, 42달, 세때반, 3일반의 해석상 이견
① 교회시대=종말시대(승천~재림)를 가리킨다는 주장.
문제점 - 말세에 특별한 '대환난' 또는 '사단의 놓임'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 승천 이후 재림까지 말세는 지금처럼 계속 진행 될 것으로 본다.
② 말세에 특별한 전무후무한 '대환난' 기간이 있다는 주장.
사단의 놓임으로 시작되는 3일반 or 세때반 or 삼년반 대환난이 있을 것으로 본다.
③ 위의 두 주장을 모두 포용해서 보는 주장.
교회시대가 계속 말세와 환난이지만, 그 중에 3일반 or 세때반 or 삼년반 등의
특별한 대환난이 있을 것으로 예측한다. (편집자는 이렇게 이중으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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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 현재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서 종교 전쟁은 불가피.
현재 유대 극우파들은 성전 바깥에서 레위기 형식을 갖춰 제사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옛날 솔로몬 성전에 나오는 성전 기명들을 모두 준비해 놓고, 성전이 재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작년 9월, 옛 솔로몬 성전터(현 회교사원)
에서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석 하나를 착공하고 기념식을 감행했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사실 '성전 터 빼앗기 싸움'으로 압축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을 기꺼이 인정해 줄 것이다. 단, '옛 솔로몬
성전터 자리'만 내주고 예루살렘을 벗어나 인근지역에서 국가를 창립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죽어도 '알 아크사'를 빼앗길 수 없다 하며, 도리어 이스라엘
이 하루속히 예루살렘을 떠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없다.
팔레스타인은 죽어도 동예루살렘(옛 솔로몬 성전터)을 독립국가의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후 7세기에,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지은 성지 '알 아크사'를 빼앗
길 수 없다는 각오다. 결국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솔로몬 성전을 회복하려면 무력 이외엔 별 다른 '협상, 타협'은 가능성이 0%이다.
성경 어디에도 '예루살렘 성전이 말세에 재건되어 질 것'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있
진 <않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마 24:15, 계 11:1 에서 유추해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는 것을 -유추적으로- 알 수 있다.
성전 재건이 선행되어야, 거기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지는 수순이 이루어진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진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질지는 '미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미처 상상이 되지 않지만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도 많다. 비행기 컴퓨터 등)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될 것은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
◐ [묵상] 두 증인
주님은 즐겨 '두 증인' 방식을 사용해서 일하신다. 모세와 엘리야는 본질이
판이하게 다른(율법과 선지자) 두 실체가 연합된 것을 뜻한다.
①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
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10)
마리아가 잉태하고 불안해 할 때,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서로 위로를 받았다.
다윗이 황무지에서 사울을 피해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요나단을 통해 위로하셨다.
모세에게는 아론을, 엘리야에겐 사람이 없는 광야 상황에서 까마귀라도 붙여주셨다.
내가 그 길을 옳게 걸어가고 있다면, 고난이 있지만, 주님은 동행자를 붙여주신다.
반대로, 오늘 내게 동행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내가 그 길을 옳게 걸어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도 된다.
② 모세와 엘리야 두 증인이 똑같이 필요하다.
모세만 주장하면 안 되고, 엘리야만 주장하면 안 된다. 한 쪽만으론 불충분하다.
모세 같은 종도 필요하고, 엘리야 같은 종도 필요하다.
나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라는 생각이 들땐→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pattern
을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이런 독단주의에 쉽게 빠지는지....!
우리교회/교단/나라/피부색의 우월성을 느낄땐→유대주의 선민사상으로 퇴행한것임.
하나님이 일하시는 스타일은 대개 "투톱two top"(축구용어) 인 점을 잊지 맙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활약할 때, 베드로도 있었다.
다니엘도 활약했지만 세 친구도 한 몫 톡톡히 했다.
요셉은 총리로 뛰었지만, 유다는 영적 장자권을 승계했다.
그 외 에스라와 느헤미야, 여호수아와 갈렙,
신약시대에는 사도와 선지자(엡 2:20) 등이 있다.
내가 원 톱이라면, 또 다른 원 톱은 누구일까? 그러나 전통적 한국인 사고방식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원 톱'을 좋아했는데, 앞으로 시대는 점점 더 변하리라 본다.
◑'예루살렘 성전'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상징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1. 문자적 해석
①'예루살렘 성전'을 실제적인 팔레스틴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고 본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7년 환난 중 전3년반에 성전을 소유하게 되고,
거기서 레위기에 나오는 번제를 회복해서 드릴 것이다.
그러나 후3년반에 이 제사가 폐하여지고,
거기엔 적그리스도의 우상이 대체되어 세워질 것이다(마24:25). 註1)
② 사도바울도 이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불법의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살후 2:4)
③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말라 이방인에게 주었다. 42달 동안 짖밟힌다."
"성전 밖 마당"="거룩한 성"(계 11:2)인데,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이것을 이방인들이 42달(교회시대 또는 후3년반)동안 짓밟는 것으로 본다.
④ 문자적 해석의 약점 → 아래 상징적 해석을 보시오!
▶2. 상징적 해석
① 히브리서에 보면, 구약의 성전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표한 그림자였다(히10:1).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속적인 제물로 자신을 드리셨다(히 10:10).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이후(A.D.95)인 계시록에서 다시 성전 제사 제도를 언급하실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언급된 것은 '상징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
②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고(요 2:19~22),
바울은 성도들이 '성전'이라고 지칭했다(고전 3:16, 6:19).
성도는 산 제물로 영적 예배를 드린다(롬 12:1).
그러므로 신약시대, 교회시대에 와서 구약적 의미의 성전을 주장하면 안 된다.
③ 계시록 자체가 성도들은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고 증거 한다.(1:5-6, 5:9-10).
그러므로 유대 민족, 예루살렘 성전 등의 구약적 의미는→교회 시대에는 사라졌다.
④ 고로 11:1의 "성전"은 온 세상 교회(성도)로, "측량"은 '성도들을 보호하심'으로,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는 것은 '성도의 영혼을 보호하심'으로 본다.
그러나 "성전 밖 마당"="거룩한 성"은 '성도의 육체'로 보고,
그것은 마지막 때 환난 당하도록 내버려두신다고 본다.
(또는 불신자를 가리킬 수도 있겠다.)
▶3. 그러나 상징적 해석에도 약점이 있다;
① 11:8에 큰 성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 또는 애굽이라 했다.
"영적으로=상징적" 의미는 성경 본문에 이미 풀어주셨다. '영적으로 하면...'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문자적" 뿐이다.
고로 계 11장의 '예루살렘'은 문자적이다.★
② 상징적 해석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성도들의 영혼'으로 본다. (위④번)
왜냐하면 육체는 대환난 당할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 3:16, 6:19에 말하는 '성전'은 엄밀히 성도의 '육체'를 포함한다.
③ 상징적 해석은 맞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문자적 해석을 포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4. 포괄적 해석
둘 다 해석 가능하다면 둘 다 취하면 될 것이고, 어느 부분에 있어서 한 쪽만 해석
가능하다면, 한쪽만 취하면 될 것이다.
admin
댁쟾쇰줈
요한계시록의 9가지 핵심 문제 - 9 /계10:8
2011-02-15 17:03:35
(9) 성경에 나타난 종말의 역사적 진행
1. 인류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
지금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종말을 고비로 숨가쁘게 달리고 있다. 인류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서는 종말론이 성립될 수 없으며 물론 성경의 모든 증거도 정당성을 잃게 된다. 그러면 그 종말이 언제 오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 종말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성경에서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분명한 진리로 계시해 주고 있으므로 그 모든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2. 복음의 증거와 이스라엘의 회복
①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종말에 있을 여러 가지 재앙에 관한 예언을 하시면서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복음으로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전 세계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기를 말하면서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고 했다(롬11:25). 이 천국 복음은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언제 이방인의 충만한 수효가 차서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는 역사적 시점이 언제 오느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수효이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② 예루살렘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는 기간이 지나야 한다.
예수님은 장차 이스라엘이 당할 황폐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 값으로 황폐하여 버린바 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주의 재림 시기까지 메시야를 만나지 못할 것임을 예언하셨다(마23:37-39)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이 주후 70년대의 로마의 디도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성취된 사건임을 누가복음에는 실감 있게 예언되어 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다(눅19:41-44). 이 같은 이스라엘의 재앙이 메시야를 죽인 피 값임을 성경은 증거해 준다(마27:25).
③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주후 70년대의 이스라엘의 재난은 이스라엘을 뿌리 채 뽑아 버렸다.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어 구원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러나 아직 이스라엘의 구원의 시기가 아니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어 뿌리째 말랐지만 사실인즉 그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막11:11-14).
이스라엘이 2천여 년의 민족적인 흩어짐에서 다시 회복하는 일이 인류의 역사의 종말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성경 여러 곳에서 예언해 주고 있다.
사11:11-12 ' ...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렘31:7-10 ' ....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겔38:8-9 ' ....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들어 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
암9: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 원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 '
슥14:4-5 ' .... 너희가 그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 '
롬11:25-27 ' ....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 '
④ 이스라엘의 역사적 회복 과정
(1) A.D.70년 로마의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 점령당함. 유대인들의 흩어짐.
로마 → 아랍 → 십자군의 정복기 → 터키의 지배 → 688년 오마르 사원 건립
(2)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토만 터키 말엽 시대에 일어난 시온주의 운동에 의하여 자리가 잡혔다.
(3) 1917년 11월 영국 외상 발포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조국 건설을 승인함으로 영국의 위임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발포어 선언'임.
(4) 1947년 11월에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과 이스라엘 양 국가로 분리할 것을 가결하였다.
(5) 1948년 3월 국민 의회 설립
1948년 5월 15일 유엔 승인으로 영국 위임 통치 끝남.
(6) 1948년 5월 16일 1차 중동 전쟁
1956년 10월 29일 2차 중동 전쟁
1967년 6월 5일 3차 중동 전쟁 (이때 예루살렘 회복)
1973년 10월 6일 4차 중동 전쟁
3. 열 뿔과 짐승의 등장
(1) 인류의 종말에 이르려면 열 뿔의 등장이 있어야 한다.
단7:24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 '
이들은 적 그리스도 국가를 이룰 나라들로 이스라엘의 종말에 등장하여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유대인들을 핍박하며 때와 법을 변경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계17:12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계17:12절의 열 뿔은 단7:24절의 열 뿔을 말한다. 그리고 단7:8절의 작은 뿔은 열 뿔의 왕으로 등장하고 있는 짐승(적 그리스도)과 동일 인물이다.
(2) 단2장에서 계시해 주시는 열왕(列王)의 시대가 와야 한다.
첫째 왕, 정금으로 된 머리 → 바벨론 왕 (B.C.606-538)
둘째 왕, 은으로 된 가슴과 팔 → 메데바사 (B.C.538-330)
셋째 왕,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 헬라 (B.C.330-146)
넷째 왕, 철로 된 종아리 → 로마 (B.C.146-A.D.
동로마 476
서로마 1453
다섯째 왕은 철과 진흙으로 된 발인데 이 나라가 한 나라를 의미하지 않고 '열 왕의 때'라고 했다(단2:44). 열왕(列王)이란 열 뿔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넷째 왕부터 다섯째 왕까지에는 '장차의 기간'이 개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장차 멸망 받고 곧이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때문에(단2:44) 로마에 예속된 나라도 아니며 로마의 열 명의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도 아니다. 단2장의 발로 등장하는 이 나라는 열 뿔과 한 맥으로 이어지며 작은 뿔인 짐승과도 연결된다. 이 나라에 대하여 단9:26절과 27절에서 '장차 나타날 한 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왕이야말로 열 뿔을 업고 종말에 등장하는 적 그리스도이다.
(3) 짐승이 등장해야 한다.
종말에 이른 명백한 성경적 증거로써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의 등장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살후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란 말씀이다. 이 짐승은 7년 환난 중에 일어나 전 세계를 후 3년 반기간인 마흔 두 달간을 지배한다(계13:5). 그리고 이 자는 후3년 반기간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예루살렘을 짓밟고 유대인을 핍박하며 자신을 경배케 한다(단7:24-27. 살후2:4).
멸망의 아들이란 말은 적 그리스도를 표현한 말로 그가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을 당하기 때문이다(계19:19-20).
이 멸망의 아들은 열 뿔 가운데서 나온다(단7:7-8).
이 멸망의 아들은 열 뿔을 지배하는 작은 뿔로 나온다(단7:8,24. 계17:12). 이 멸망의 아들은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그 모습을 들어낸다(계13:4).
(4) 유대인의 구약적 제사 제도가 다시 등장해야 한다.
단9:27절에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했다.
살후2:4절에서 이 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는다고 했다.
마24:15절에서 예수님은 이 자가 거룩한 곳에 선다고 하셨다.
그러면 이처럼 구약적 제사 제도가 시행되려면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전이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 지려면 다음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 → 1948년 5월 15일에 독립되다.
예루살렘이 회복되어야 한다 → 1967년 6월 6일 2차 중동 전쟁 때 회복되다.
다음에 성전의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 → 지금의 오마르 사원 장소에 세운다면 또 다른 변란이 일어나야 한다. 만약 다른 장소를 택한다면(통곡의 벽이 유력) 성전을 건축하는 일로 성사된다. 혹 이 유대인이 하나님을 경배할 이 성전은 적 그리스도의 선의의 배려에 의해 7년 환난 중, 전3년 반기간에 전격적으로 세워질는지 모른다.
(5) 한 이레의 언약 기간에 들어가야 한다.
단9:27절에 나오는 한 이레의 언약 기간은 상징적 기간도 아니며 교회 기간은 더군다나 아니다. 다니엘서 곳곳에 나오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한 이레의 언약에 절반 기간임이 분명하며 이 기간 후에 짐승이 심판 받고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한다는 예언으로 미루어 이 기간은 종말에 있을 7년 환난 기간을 의미한다. 이 언약은 짐승에 의하여 체결될 평화 협정이 될 것이다(계7:1). 이 협정이 한 이레의 절반 기간에 가서 파기됨으로 유브라데 전쟁이 일어난다(계9:14).
(6)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이 있어야 한다.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은 7년 환난에 들어간 시대적 징조로 나타난다. 이들은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회개의 사역을 하게 되며 이 사역의 결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나타나게 된다(계7:9-14. 계11:1-6). 이들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하나님이 대 환난 날을 위해 예배해 두신 예비처로 인도를 받게 된다(계12:6,13-14).
두 증인은 순교자의 사명을 받기 위해 기도한다(계10:8-11).
두 증인은 진실한 종들로 하나님이 예비하신다(계14:4. 계17:14)
두 증인은 한 이레의 언약 직전에 하나님이 인 쳐주신다(계7:1-8).
두 증인은 예언의 사명자로 1260일간 예언한다(계11:1-4).
두 증인은 '밤중에 소리'로 주의 재림을 외칠 것이다(마25:6).
이들은 두 명의 한정된 증인이 아니며 종말의 사명자로서의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로 전 세계적으로 등장하는 이들의 출현은 한 이레의 언약과 함께 하나님이 성경적으로 보여 주시는 종말적 징조가 된다.
결론 : 우리는 인류의 종말의 도래를 이스라엘의 영토가 회복된 일로 중요한 고비에 이르고 있다고 믿고 있다. 1948년 5월 15일의 이스라엘의 독립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는 하나의 역사적인 큰 획(劃)을 이루고 있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 얼마 후에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드리기 위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다는 놀라운 뉴스를 접하게 될 것이다. 1967년 6월 7일에 있었던 예루살렘 회복은 이 사실의 가능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열 뿔의 등장은 종말에 있어야 할 필수적인 일이다. 열 뿔로 상징된 10여 개 국가들이 하나의 통일된 연맹체를 형성한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7년 로마조약에 의하여 등장한 E.U.(유럽공동체)는 그런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E.U가 앞으로 등장할 열 뿔의 모체가 될는지 혹 모를 일이다.
언제인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작은 뿔의 존재가 혜성처럼 나타나 흐트러진 E.U를 강력한 군사적, 경제적 연맹 체로 규합하여 열 뿔을 형성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종말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 보여 주는 '유브라데 전쟁'은 중동에서 발발하는 세계대전이다. 이 전쟁은 핵전쟁으로 이 전쟁의 결과 세계 인구의 ⅓이 죽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밝혀 준다. 이 같은 전쟁의 기운이 벌써 오래 전부터 중동 지역에서 계속되어 오고 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종말적인 전쟁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열 뿔이 등장하고 그 열 뿔의 지배자로 작은 뿔인 '짐승'이 등장하여 세계 열강간의 합의로 한 이레의 언약이 성사되는 날이면 모든 종말적 징조가 결정적으로 성취되는 시점에 이르는 것이다.
그때 전 세계적으로 구름 떼처럼 일어나 열려진 작은 책의 계시를 다시 예언하는 두 증인의 역사도 물론 함께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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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강해 /요한계시록-16 /계10:1-11
2011-07-05 14:59:32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 10:1-11)
오늘 본문을 보면 요한은 전도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가 본 환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 또한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깨달아 알게 된 미래의 일을 우리는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로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전해야 할 것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11절)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에게 미래가 보여진 것은 그 미래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9절) 요한이 먹은 말씀은 입에는 다나 배에는 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전해야 하는 말씀의 미래를 잘 드러내주는 말씀입니다. 곧 그 말씀이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우리 자신이 들을 때는 매우 달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 길은 쓰디쓴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아나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들이 원하는 미래가 아니라 사실로서의 미래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이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힘이 듭니다. 그것이 바로 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바로 그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며 쓴 것을 느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이 쓰디쓴 것을 맛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자기 입에서 끝냅니다. 자기 좋은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항상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은 그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하물며 복음과 미래라는 것을 가지고 혼자만 알고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예언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우리의 이웃의 미래가 바뀔 때 바로 우리가 예언자로서 산 것입니다. 그것이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나를 통해 우리 이웃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합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이 쓰디쓴 경험일 수 있지만 그 쓰디쓴 경험이 바로 우리의 복이 될 것입니다.
요한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4절)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은 일곱 우뢰가 울리며 말한 것을 기록하려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미래는 알면 알수록 더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잘못된 전제를 깨트려줍니다. 요한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록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곧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더 유익할 수도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놓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닫아 놓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힘써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열심히 모르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곱 우뢰가 요한에게는 들려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요한에게는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요한이 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곱 우뢰는 요한 개인을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도 개인적으로 하늘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요한 사이에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과 요한을 더욱더 친밀하게 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개인적인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비밀이 있어야 전할 것도 있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이 친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늘 우리 이웃을 향한 예언자(선지자, 전도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복음을 주시기도 하였지만 바로 그들을 위해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 일이 힘든 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복된 길이기에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전도자로서 우리 안에 뜨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비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언을 알고 비밀을 가지고 있어 이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예언자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요한계시록 강해(47) /계10:1-7
2011-01-07 17:00:13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힘센 다른 천사의 실체 >
오늘 본문은 여섯 번째 나팔재앙이 지난 후 일곱 번째 나팔 재앙이 있기 전에 보여진 장면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이 힘센 다른 천사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이 힘센 다른 천사는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을 일으키는 풀려나는 네 천사와 대비됩니다. 그렇다면 이 힘센 다른 천사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개 두 가지의 의견으로 나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하고, 한 부류의 사람들은 천사장 미가엘과 같은 강력한 천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누구인지 보다 정확히 파악해 보기 위해서 계속되는 묘사를 보십시오. 1절 하반부에서 3절 말씀까지 보십시오.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강력한 천사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까? 언뜻 보면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다고 하는데, 4장 3절에서 무지개가 보좌에 둘려 있다는 묘사를 볼 때 이 묘사는 피조물인 천사에 관한 묘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다는 표현도 요한계시록 1장 15-16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있었다는 표현도 5장 7절에 나오는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셨다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힘센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천사로 묘사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이 전능하신 예수님을 '힘센 천사'로 묘사하는 것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힘센 천사는 예수님이 아닌 미가엘과 같은 어떤 천사를 의미하는데, 그 천사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은 천사'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 힘센 천사가 사자처럼 큰 소리로 부르짖으니까 일곱 우뢰 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때 요한이 그 소리를 기록하려고 하니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일곱 우뢰 소리를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소리가 어떤 소리였는지 알았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계속해서 사도 요한이 보니까 그 힘센 천사가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5절)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며 이런 말씀을 합니다. 6절 하반부 말씀과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오늘 본문의 장면을 보면 전체적으로 장엄한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힘센 천사'가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은 천사라면 그리스도의 권세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이 모습은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3절 말씀도 그리스도의 권세를 잘 보여줍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이 얼마나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은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니까 일곱 우뢰가 발해집니다. 그 우뢰소리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소리였는지 잘 모른다고 여기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만 한가지 이 장면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세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말씀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비밀로 감춰둔 것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고, 아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범위 내에서 하나님 말씀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12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범위 내에서만 순종하고 살아도 이 땅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아는 만큼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모습을 보면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니까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사도 요한이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다가 하늘에서 그 말씀만은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알고 있는 내용을 다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의 '기록하려고 하다가'라는 말씀이 사도 요한이 그 일곱 우뢰의 비밀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 말씀에는 정말 더욱 구체적인 비밀이 있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말씀만은 인봉하고 후세에게 기록으로 남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그 말씀대로 순종했을 것이고, 우리는 그래서 어떤 소리를 요한이 들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더욱 귀한 자세를 교훈 받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까지만 알려고 해야 하고, 성경이 가라고 하는 부분까지만 가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면 우리도 침묵하려고 하는 자세가 바람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몰라야 될 부분까지 알겠다고 성경을 쪼개고 파헤치면서 결국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알아야 될 부분은 알아야 하지만 몰라야 될 부분은 몰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철저히 말씀을 앞세우고 순종하는 자세가 승리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일곱 우뢰의 비밀을 우리는 천국에 갈 때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 부분을 사도 요한은 전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쏙 빼긴 했지만 결론으로 하나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주님을 말씀만을 사도 요한이 전하고 있습니다. 6절 하반부의 말씀과 7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중요한 내용을 빠져 있지만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결국 믿는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의 재앙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겠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기쁨이 넘치는 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주제이고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입니다.
말씀이 반드시 성취되듯이 믿는 자들은 결론적으로 반드시 승리로 귀결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고 더욱 전진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강해(48) /계10:8-11
2011-01-07 16:58:42
말씀을 잘 소화시키십시오
< 작은 책과 관련된 환상 >
어제에 이어서 여섯 번째 나팔 재앙과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사이에 보여진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어제의 내용을 간단하게 다시 살펴 보면 인류의 삼분의 일을 죽이는 네 천사 외에 하나의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이 힘센 다른 천사는 나타난 묘사를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 권세를 받은 강력한 천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힘센 다른 천사가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2절), 사자처럼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소리가 났습니다(3절)
바로 그때 요한이 그 소리를 기록하려고 하니까 하늘에서 일곱 우뢰 소리를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4절).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소리가 어떤 소리였는지 알았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알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았으면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범위 내에서만 순종하고 살아도 이 땅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 자꾸 말씀을 쪼개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세기 70-80년대에 "말씀을 잘 쪼갠다"는 신기한 해석을 한다는 분들로 인해서 성경 말씀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겨졌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아는 만큼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도 요한이 보니까 그 힘센 천사가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5절)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며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6-7절).
그리고 나서 일곱 우뢰소리의 비밀을 적지 못하게 했던 그 음성이 사도 요한에게 또 들려왔습니다. 8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그래서 사도 요한이 힘센 천사에게 나가 작은 책을 달라고 하니까 그 천사가 말했습니다. 9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그 말씀대로 사도 요한이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으니 정말로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었습니다(10절). 그리고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어제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해 본 부분은 '다른 힘센 천사'였는데,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작은 책'입니다. 이 작은 책은 무엇을 말할까요? 1) 5장에서 하나님의 보좌에서 어린양이 취한 바로 그 책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2) 요한계시록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3)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어떤 신비한 책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작은 책이 어떤 책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사실상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책을 둘러싸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보십시오.
하늘에서 사도 요한에게 음성이 들려 힘센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힘센 천사에게 나가 작은 책을 달라고 하니까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그 작은 책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달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9절). 그래서 그대로 실천했는데 정말 입에는 달고 배에는 썼습니다(10절). 그리고 난 다음에 예언의 메시지를 만방에 전하는 음성을 듣습니다(11절).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은 양식이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작은 책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먹어 버리라고 힘센 천사는 말합니다. 그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양식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매일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누군가의 신앙이 기복주의적 신앙이나 허황된 신앙이 아니고 진실한 신앙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 성경 읽기'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 읽기가 그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오랫동안 먹지 않으면 영혼이 영양실조에 걸려 굶어죽습니다. 그처럼 먹지 않다가 한꺼번에 먹어도 몸에 무리가 생기고, 때로는 영적인 암에 걸립니다.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하나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 말씀대로 작은 책이 항상 펴 놓이게 해야 합니다.
2. 하나님 말씀은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정말 좋습니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소화시키는 것은 진통이 뒤따릅니다. 듣는 것까지는 좋지만 말씀대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살다 보면 말씀을 시험하는 환경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열매맺게 하실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또 한가지를 도전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단 말씀만 들으려 하지 말고, 쓴 말씀도 들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식품과 약은 대개 맛도 없고 씁니다. 오직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일 때만 달게 만들어서 먹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자라면 쓴 말씀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쓴 말씀을 먹을 때 우리의 영혼이 더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단 말씀만 좋아하지 말고, 쓴 말씀도 잘 소화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쓴 말씀에 금방 시험이 듭니다. 말씀에 시험에 잘 드는 단계를 뛰어 넘을 수 있어야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비판의 말을 들을 때도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으면 오히려 회개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할 때 그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화가 나지만 가만히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살펴보면 그 말이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지 않더라도 맞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내 삶에 도움이 되고, 은혜가 있습니다.
비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힘들고 아픈 일이지만 그 비판을 맞다고 여기고, 무엇인가 행동 변화를 이루려고 할 때 내가 복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더욱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비판을 잘 하는 분은 복이 없지만 비판을 잘 받아들이는 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씀도, 어떤 비판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바다 철학'을 가진 바다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비판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비판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후 가장 바른 길은 선택하면 됩니다.
3. 말씀을 먹고 나서는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1절 말씀이 바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예언의 말씀이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었으면 그 복음을 만방에 전파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이나 임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소화했다는 가장 큰 증거 중의 하나가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하는 삶이 쉽지 않은 삶이기에 듣는 것은 달지만, 소화하는 것은 쓰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복음 전파는 '힘든 것'이지만 반드시 '힘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고, 소화시키고, 전파함으로 마지막 때의 삶을 승리로 엮어 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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