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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계시록 설교 모음

요한계시록 6장 설교문 모음

by Jessi J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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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관한 최후의 말씀 /6:1-7/ 유진 피터슨

2015-06-20 19:52:51

 

당면한 현실적 질문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 당해 있을 당시

많은 성도들은, (로마 제국 핍박)이 득세하는 현실을 보고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다시 살아나셨건만,

세상은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어째서 세상에 로마 군인들이 이처럼 활개치는 것일까?

복음은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했는데,

네로 황제 등 로마 정권은 성도를 감옥에 가두고 십자가에 매달았다...

 

 

사도 요한의 답변

 

7개의 인 (촛물로 봉인할 때의 '')

사도요한은 계4~5장에서 <7개의 인>을 통해

세상에 만연된 악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인을 뗄 때-흰말(문맥상 안 좋은 것임, 해석상 이견 있음)

둘째 인-붉은 말(전쟁)

셋째 인-검은말(기근)

넷째 인-청황색말(질병) 등등이다.

다섯째인-종교적 핍박 계6:9~11

여섯째인-자연 재난 계6:12~17

 

은 역사의 일부 구성요소이지, 전체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치통이 오면, 온 몸이 다 아픈 것처럼 낙심하고 고통 받는다.

몸의 다른 부위들이 다 건강하다는 것을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사도 요한은 충동적으로 악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는 먼저 계1장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여주고, (긍정)

4~5장에서 승리에 찬 예배의 환상을 보여주고, (긍정)

비로소 6장에서 세상의 악의 문제를 거론한다. (부정)

7장에는 다시 주님이 다스리시는 세계를 보여준다. (긍정)

 

우리는 계시록 전체를 고난/멸망/종말적 파괴당하는 세상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초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 생애 > 죽음 > 부활 > 복음전파 > 재림이다.

아무리 세상에 악이 만연하고 횡횡해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전혀 건드리지 못한다.

 

물론 악의 역사役事, 역사의 한 모자이크(일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관 안에 있으며,

때로는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셔서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기도 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을 사용하신 것처럼 말이다.

 

유진 피터슨 박사는, 이 책에서 <2, 3장의 7교회>를 설명할 때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7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주목해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7교회(정확하게 5교회)의 부정적인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저자는, 7교회의 전체 그림은,

그런 부정적 요소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7교회를 칭찬하시는 부분들을 그는 더 부각시키면서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교회(하나님 나라)’를 강조한다.

 

저자는, 전체 그림을 보라는 것이다. 계시록 전체 그림은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맞다. 예수님이 승리하셨다. 예수님이 지금도 승리하시고 계시고, 최후도 승리하실 것이다.

계시록 마지막(모든 책의 주제 부분)도 승리로 끝맺고 있다.

 

그래서 계시록, 현실의 역사, 미래의 역사까지도,

우리는 전체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입장이다.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 때를 기다리라!

성도들은 핍박과 악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호소한다.

6:10, 다섯째 인

 

그렇게 성도들은 핍박받지만, 동시에 그들은 주님의 눈동자 같은 보호아래 있다.

18:10~14참조

그래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대답해 주신다. 6:11

 

그 하나님의 때가 계6장 마지막 절에 나온다. 6:16~17

그 구절은 “(그 마지막 심판 때)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수사적 기법을 썼다. 6:17

절대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6~7장의 주제는 <악에 관하여>인데,

사도 요한은 누가 능히 서리요(견디리요)?” 말한다.

현실은 악이 득세하는 것 같지만,

심판의 때가 차면, 아무도 그것을 결코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여전히 든든한 하나님의 나라

6장은 악의 현실로 고통 받는 성도/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7장은 그것에 대한 해답이다.

 

6장에서 일곱 인을 통해, 악이 횡횡한 세상,

성도가 핍박 받고, 순교 당하는 세상을 설명하지만,

 

*이어지는 계7장에서 즉시로 <네 천사가 든든히 서 있는 모습>을 설명한다.

그들은 세상에 악이 제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이마에 도장(보호, 고후1:21~22)을 다 찍기 까지는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라고하셨다. 7:1~3

 

*<모든 천사, 장로, 하나님이 든든히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그리고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서 있다. 7:9

이렇게 7장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장과 절의 구분은, 나중에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고,

사도 요한은 장과 절의 구분 없이 기록했다. 원래는 6장과 7장의 엄격한 구분이 없었다)

 

사도요한은, 비참하고, 부정적인 현실인 6장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은 엄연한 현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든든히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바알과 아세라에 무릎 꿇지 아니한 7천명이 생각난다. 왕상19:18

'나만 남았나이다'며 비관적인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아니다, 7천명이 남아있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

사람들은, 현실을 살기 때문에, 항상 현실 세계만 보는 눈을 가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 세계이므로, 육신의 눈으로 잘 안 보인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의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7:1, 9, 11절 외에도,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이 든든히 다스리시는 세상이다.

그리고 최후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계시록의 후반을 보시라!

세상 역사의 전체 그림을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인을 떼시는 이는 어린양

여러분, 세상에 재앙을 가져오는 일곱 인,

그 인을 떼시는 이는 마귀, 사탄이 아니라, 어린양 예수님이다.

, 세상은 악이 횡횡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인을 떼신다!”

악과 재난까지라도, 그 허용과 허락까지 주님이 다스리시고 섭리하신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의 죄악에 대한 책임도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상징적인 네 마리의 말을 불러내는 이도 '천사'이다.

천사가 "오라!"고 명령하니까, 재앙을 가져오는 말들이 각기 달려 나왔다.

재앙을 의미하는 ''들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서 활동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악의 존재는 기정사실

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은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악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듯이하나의 현실로, 기정사실로 본다.

그런 원천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셨는가? )

 

대신에 사도 요한은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4:4 면서,

악을 이기고 나갈 것을 주문하신다.

 

적용 :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면 신경쇠약 걸린다.

 

(유진 피터슨 박사)가 성경 위 부분을 토대로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였다.

그 때 참석했던 한 분이, 몇 해 전에 자기가 신경쇠약에 걸린 적이 있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 삶을 살펴보니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악과 죄책감과 불행에 완전히 압도되어 살았다.

 

(자기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 것이다. 세상적 눈으로 자기 현실을 본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다스리고 계심을 보지 못했다.)

 

그는 상담가를 통해,

자기 인생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한 가지씩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다.

마음을 흐뭇하게 했던 인간관계, 감동적이었던 음악, 심장을 멈추게 했던 경치

또한 자기 몸이 여전히 쌩쌩하고 건강하다는 사실도 있었다.

 

그는, 자기가 오직 자기 인생의 어두운 부분만 부각해서 묵상하고 있다가

신경쇠약에 걸렸던 것이고,

자기 인생의 밝은 부분을 하나씩 인식하고 발견해 가면서, 거기서 놓임을 받았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 7~8장을 통해 가르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은 악의 세력(로마 제국)이 횡횡하고 득세하는 것 같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고, 주눅 들지 말고, 신경쇠약 걸리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그리스도가 중보하시며, 천사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며,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성도들의 큰 무리가 있으며, 하나님 나라는 승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도 완성을 향하여 순항중이다.

 

 /6:9-11/ 김성수목사

 

본문 설명/ 지상에서 순교적 삶을 살게 되어있는 성도들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4인에서 전쟁, 기근, 전염병 등 재앙이 계속 등장하다가

5번째 인에 있어서 뜬금없이 순교자에 대해 나온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다.)

 

순교자 하면.. ‘예수 믿다가 살해당해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렇다면 천국의 제단 앞에는, 순교한 사람들만 갈 수 있다는 얘기일까? 물론 아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순교/살해당한 사람들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성도의 총체를 뜻한다.

 

24:9 그때(말세)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설명하시면서

그 때는 사람들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고 하셨다.

‘12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그들은 전체 교회를 상징한다.

 

,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그들을 다 순교자다.. 이런 뜻이다.

 

모든 교회/성도는 반드시 이 땅에서 환란, 궁핍, 핍박을 통과한다’..는 의미다.

그게 본문이 말하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증인의 삶이다.

 

지상에서 성도의 신앙생활은.. 마치 죽임을 당한 것처럼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재단 앞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는데...

 

6:10,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기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기도는, 단순히 자기 억울함을 보복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랬는데,

그런데 하늘에 올라가면, 마음이 바뀌어서 빨리 복수해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교회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능력과 위엄과 권세를 가지신 대 주재이시며, 죄를 증오하시고, 처벌하신다는 면에서 <거룩하시고>

자신의 말씀에 진실하다, 신실하다는 의미로 <참되신> 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성도들의 기도는, 그 거룩하시고 참되신 성부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세상의 구원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기도이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니까...

 

6:11,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참 잔인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죽어서 올라올 때 까지, 먼저 온 너희는 조금 쉬고 있어라.’

이런 식으로 들린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죽어야할 자들이 자 순교해서

그 숫자가 다 차면 완성될 거야, 그때까지 잠시 쉬면서 기다려라.. 가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죽임을 당할 자로 표현하신다.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교회를 뜻한다.)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지 보자. (죽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교회는 이렇게 이 땅에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6:9절의 죽임을 당한 영혼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 땅에서 환란과 궁핍과 핍박속에 던져져서

마치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고통을 당하게 되는가?

 

교회/성도가 마치 순교자처럼,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 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도의 성화를 위하여

우리는 새 생명,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옛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 안다.

 

그 옛 사람을 부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환란'이요, ‘순교자적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환란과 고통을 통해서.. 이 땅에서 '죽는다'.

첫 창조의 부산물들을 하나 하나 죽여간다. 그러면서 거룩을 이루어 간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나?

우리의 죄악된 옛 육체가 되셔서 대표로 죽으셨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저주 받은 가 되셔서, 거기서 대신 죽으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새생명이 주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옛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예수가 죽으신 그 죽음을, 우리는 똑같이 고난에 동참하여 죽게 된다.

그래서 우리 삶속에는 당연히 어떤 모양으로든 환란, 궁핍, 고난이 있다.

 

'4가지 인'의 재앙이 우리 삶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도 그 4가지 인의 재앙에 그대로 노출된다. 하나님은 거기서 데리고 올라가시지 않고,

그냥 그 속에 놓아두신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벌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성도를 훈육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된다. (이 부분은 지난 '33, 4마리 말'에서 나누었다.)

 

그래서 이 1~4인의 재앙과, 5째 인의 재앙이 붙어 있다.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1~4인의 재앙이 우리 삶속에 그대로 있으면서, 우리는 죽는다.

그래서 5째 인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보면, 세상에서 죽임 당하는 환란이 뒤따르는 것이다.

 

고난이 올 때마다 마귀는 우리를 속일 것이다.

그건 너희에게 고통일 뿐이다.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

너희도 그냥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아라. 욥에게 그랬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가짜 성도들은 거기에 다 넘어간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얻어낼 어떤 부산물(축복)들을

목적으로 삼고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환란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그래서 길가, 가시밭, 돌짝밭이 나오는 것이다.

다 옥토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 지상에서 성도의 삶의 본질을 잊지 마시라. 그것은 환란이지, 축복이 아니다.

 

옛사람을 죽여가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모든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든 고난에 던져지게 되어 있다.

 

그 옛사람을 죽이는데,

만사형통/행복/형통.. 이런 것들만 오면.. 자기 옛사람이 죽겠는가?

만약에 만사형통/행복/형통.. 이런 것들만 오면.. 그 사람은 천국 가기 힘들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인 것이다.

 

세상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내 살(육신)을 잘라내어야 하는 그 아픔이 있기 때문에 힘들다.

거기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마22:15절 이하에 나오는 세금 논쟁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중략된 부분, 여기 클릭 해서 보세요 -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인생과 신앙생활을 허락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가이사의 것을 실컫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반대로, ‘가이사 나라의 것들을 하나 하나씩 포기하며 가는 것이다.

가이사 나라가 주는 편안함, 달콤함은 다 헛된 것이구나..

절대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구나..

그 허무함을 것을 배우고 살라고, 이 땅에 살려두신 것이다.

 

그래서 진정 우리는 성도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참 기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구나,

가이사의 나라에 있지 않구나!

나는 오직 하나님 나라만 소망하며, 그 은혜와 사랑만 구해야 되겠구나

 

그 헛됨과 그 참됨을 동시에 깨달으라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최근 교민신문에 달마사 광고가 났는데

와서 복 받으십시오!’ 라는 글자가 크게 씌어 있었다.

어째서 거기서 하는 얘기가, 교회당에서 하는 얘기와 똑같은지 모르겠다...

어떻게 무당들이 하는 얘기와, 과거의 부흥사들의 얘기가 똑같은지 모르겠다...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서,

죽을 때까지 고생하면서 신앙생활 했는데,

엉뚱하게 믿다가, 결국 나중에 천국에도 못 가면.. 안 된다.

자기 욕심이 있으니까, ‘복 받아라는 소리에 혹해서, 자꾸 따라가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을 광야길이라 표현한다.

 

광야 길이란.. 물도 없고, 메마르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아주 척박한 곳이다.

그럼 그 광야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허락하셨다면,

우리는 거기서 뭐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광야길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아담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그 훈련을 시키시려고.. 광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위에서 '성화'라는 말로 설명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가이사의 것들로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여호와가 나의 삶의 목적이며,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인간은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신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이나..

 

재앙, 환란, 궁핍이 가득한 광야로.. 우리를 내 모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세상에 진저리를 내면서 관심을 끊고,

,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평안, 보호, 사랑이 진짜구나!’ - 그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잠시 설교의 맥을 정리하면,

지금 우리는 ‘5번째 인 - 순교자적인 성도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그것을 각도를 약간 바꾸어 설명하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삶이며,

광야의 삶과 같은 것이다... 라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

 

보시라.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신다.

우리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축복받았다고 행복해지고, 천국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 경고의 말씀처럼,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되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 종종 본다.

어렵고 힘들 때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사업 잘 되고, 부자 되면.. 신앙생활이 나태해지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광야 훈련이, 또 반복해서 계속 주어지는 것이다.)

 

여러분,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 복을 오복으로 이해하시면 곤란하다.

참된 하나님과 영생의 즐거움을 아는 복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인용한 신8:3~15절을 요약하면,

광야에서 쌩고생 시키신 것은.. 마침내 영생의 복을 주기 위함이라.. 이다.

 

성도의 지상의 삶의 본질은.. '광야'인데,

그 쌩고생을 통해서, 성화되고..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열망하는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끊임없이 가짜 복으로 우리를 시험한다.

너 하나님 믿는다면서, 복 받았어? 부자 되었어? 성공 했어?

그렇다면 그걸 한 번 꺼내서 보여줘 봐!’

 

그러니까 신자들이 오기가 나서, 이를 꽉 깨물고 결심한다.

그래,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보란 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리라!’

 

그래서 교회적으로도,

일단 사람 많이 모여야 되고, 헌금 많이 모여야 되고..

그래서 그 /능력/권세를 보여주면서

, 하나님 믿으니까 이렇게 강해 졌잖아?’ 한다.

 

개인적으로는

부모, 형제, 친척 돈 다 끌어서라도 사업을 거창하게 운영해야 한다. (이래서 신자가 피해를 준다.)

그 축복에 대한 열망, 성공에 대한 자기 신앙이 확고하니까, (잘못된 신앙인데.. 자기 야망인데..)

그의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뜻(자기 성공)'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되어도 마땅한 것이다.

 

보니까, 기독교의 오리엔테이션이 완전히 잘못 되어 버렸다.

자기가 죽고, 십자가 지는 것이 기독교 방식의 승리인데,

 

교회/성도가 세상 방식과 똑같은 승리를 추구 하면서, 그런 와중에

본래 추구해야할 십자가 방식의 승리를 완전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경쟁도 불사하고.. 모든 수단을 다 써서라도..

일단 많이 모이고, 세를 과시 해야 되다 보니까..

(마귀가 뒤돌아서서 키득키득 웃고 있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름만 하나님으로 부르고, 섬기지..

실제로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우상)를 섬기는 것이다.

 

 

 

정리하면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여기서 죽임을 당한 영혼

순교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다가 핍박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지상의 모든 성도를 지칭한다고 설명 드렸다.

 

그래서 4복음서에도, 예수님이 가장 빈번하게 말씀하신 것이

복 받아 부자되고, 성공하고, 네 힘을 과시하며 살아라.. 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이었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본질이, ‘순교자적 삶에 있다는 것이다.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기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기도는 보복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가 속히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의 기도 내용은,

축복해 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완성, 복음 전파의 완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실의 기독교는

그 오리엔테이션(기본 방향 설정)이 잘못 되었을 수 있으므로,

우리가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거기에 열심까지 보태지면.. 대재앙이 일어난다.

 

*신앙의 오리엔테이션에 관한 관련글 아르고스의 배와 십자가

 

6:11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기다리라) 하시더라.

 

지상에서 성도의 신앙생활의 본질은,

죽임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 환란과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 것/'가이사의 것'들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배우고,

하나님과 그 나라,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며 사는 것이..

(6:11절의 표현에 의하면) 기다리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네 힘을 보여줘!’ 라고 유혹하는 마귀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그 힘을 보여주는 순간.. 기독교는 그 정체성(십자가)를 잃게 된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이다. 덩치는 클지 모르나..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삶에 닥치는 환란, 궁핍, 핍박, 고난은.. (이상한 게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이다.

광야생활을 40년 동안이나 허락하시는 것은.. 마침내 참 복을 얻게 하심 때문이다. 8:16

 

예수 믿으면, 그 오복을 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남편/물질/명예를 다 빼앗아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것 손에서 놓고, 참 복을 잡으라고!

 

물론, 그런 과정을 다 통과하고, 욥처럼, 다시 갑절로 받는다.

그러나 언제나 초점은 오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다.

그 복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누리게 된다면.. 그 오복들도 주실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그래서 4복음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광야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이 결핍된 광야에서

마귀가 인간의 대표이신 예수님을 시험하셨는데,

예수님은 인간의 대표로서 보기 좋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 분만 섬겨라!’ 하시면서

 

네 현실적/물질적/힘을 보여줘! .. 하는 마귀의 유혹을 다 이기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보여주는 대신에,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고 말았지만,

예수님은 그 광야 시험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이다.

보란 듯이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는/십자가를 지는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간 사람은.. 십자가 죽음 후에 평안, 생명, 부요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어서, (십자가에서 죽지는 않고)

부자 되고/성공하고/힘을 과시하는 길로 가다가는..

미끄러질 것이다. 그것 자체가 아예 예수 믿는 길이 아니니까!

 

60만 명이 출애굽 했는데, 2사람만 빼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죽는 일이 생길 때.. 너무 낙심 마시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시라.

 

/설교자는 목사가 되어서도,

어쩌면 인간()은 이렇게 안 바뀌냐?’

정말 신앙생활의 길이 더욱 더 어려워짐을 느낄 때가 많다.

(그건 수도원에서 50년 산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괴롬 속에서도, 좁을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이,

세상에서 힘을 보여줘 봐!’ 하는데도,

계속 묵묵히 힘이 없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순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인 것이다.

 

 

아프리카의 자이레(콩고)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한

영국 여의사 헬렌 로즈비어의 간증이다.

 

자이레에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군은 헬렌 선교사를 잡아서 폭행했다.

50만 명 거주 지역에 의사는 자기 혼자뿐이었는데,

그를 잡아다가 고문하는데..

헬렌 선교사는 하나님은 저를 버리셨군요라고까지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분명한 깨달음이 왔는데

헬렌, 너는 분명 21년 전 나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니?

바로 이게 그 특권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고난은 네 고난이 아니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야

예수님은 잠시 네 목숨을 빌리시는 것뿐이야,

네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야,

너는 그 죽음에 동참하는 영광스런 특권을 얻는 거야!’

 

헬렌 선교사는, 그 고통 속에서 이 깨달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의 일기에 쓰기를

예수님은 그 고통을 멈추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잔인함, 악함을 조금도 만류해 주지 않으셨다.

나는 여전히 아팠고, 두려웠고, 여전히 고통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오고 나서부터 나는 달라졌다.

이제 이 고통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통이었다.

 

나는 그 영광스런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 십자가의 삶, 순교자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방법으로 쓰여진다는 감격에.. 나는 잘 참아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헬렌 선교사가 고통에서 피하도록 안 말려 주셨다.

(물론 말려주시는 경우도 있고, 안 말려 주시는 경우도 있다.)

 

이 헬렌 선교사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17살 난 한 아이가 구원을 받는다.

나중에 그 아이가 자이레의 유명한 복음전도자가 되어서, 그를 통해.. 자이레의 복음전도가 시작된다...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6:1-17/ 유기성목사

 

6:1 나는 그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우레 같은 소리로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 그리고 내가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그는 이기면서 나아가고, 이기려고 나아갔습니다. 3 그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4 그 때에 불빛과 같은 다른 말 한 마리가 뛰어나오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권세를 받아서 가졌습니다. 또 큰 칼을 받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5 그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6 그리고 네 생물 가운데서 나오는 듯한 음성이 들려 왔는데 "밀 한 되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석 되도 하루 품삯이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말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7 그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이 넷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8 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9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지배자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지배자님께서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어 우리가 흘린 피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11 그리고 그들은 흰 두루마기를 한 벌씩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동료 종들과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2 그 어린 양이 여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와 같이 되고, 13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떨어졌습니다.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지고, 모든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15 그러자 땅의 왕들과 고관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과 노예들과 자유인들이 동굴과 산의 바위들 틈에 숨어서, 16 산과 바위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숨겨다오. 17 그들이 진노를 받을 큰 날이 이르렀다. 누가 이것을 버티어 낼 수 있겠느냐?"

 

주님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고난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제 하늘꿈학교 감사의 밤이 있었습니다. 탈북 청소년들이 찬양하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쉽지 않은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한 것 같아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교사 간증 시간에 간증하신 목사님께서 하늘꿈학교 교사로 일하였던 지난 7년 동안 탈북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며 겪었던 어려움과 좌절과 낙망의 일들을 나눌 때, 너무나 미안하였습니다.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그렇게 힘들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 줌으로 지금의 학생들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컸지만 열매가 너무나 귀하였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잘 아십니다.

그러나 고난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이기게 해 주십니다.

고난당한 자의 결과와 하늘의 더 큰 소망을 보여 주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요한에게 하늘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계 6장부터 18장까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세 가지 환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시는 것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6장은 예수님께서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하나하나 떼실 때, 일어나는 일들의 기록인데, :1에서 :8까지 네 봉인이 떼어지면서 말 탄 사람이 하나씩 등장합니다.

 

첫 번째 흰 말 탄 사람은 정복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 불빛과 같은 말 탄 사람은 민족들 사이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상징입니다. 세 번째 검은 말 탄 사람은 세상에 기근이 들도록 역사하는 자입니다. 네 번째 청황색 말을 탄 사람은 칼과 기근과 유행병과 들짐승으로서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의 사분의 일을 죽이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심판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가 아닙니다. 그 심판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심판들이 두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 아래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심판이 주님이 인을 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재앙의 내용도 정도도 다 주님이 지시한대로 됩니다. 심판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다섯 번째 봉인이 떼어질 때, 순교자들이 큰 소리로 탄원하는 기도가 들렸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언제 우리가 흘린 피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그 울부짖음에 대한 답변도 들렸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 (:11) 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순교자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성도들의 억울함과 답답함이 다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성도의 고난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더 크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무자비한 박해를 받았지만 200여년 후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려면 고난을 견디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욕먹고 핍박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례 받을 때 이 각오를 하고 받았습니다.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힘들어 고난은 피하고 평안만 찾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2에서 여섯 번째 봉인이 떼어지는 순간 이 땅에는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납니다.

:12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와 같이 되고, 13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떨어졌습니다.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지고, 모든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이 장면은 막 13:24-26까지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다른 부분은 환상으로 묘사하였지만 이 부분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 고관, 장군, 부자는 사람들이 다 꿈꾸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권력도, 돈도, 높은 지위도, 명예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도 못합니다. 죽으려해도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뵙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동굴과 산의 바위들 틈에 숨어서, 산과 바위를 향하여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숨겨다오“ (:16)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정말 두려워해야 할 말이 이제는 편하게 살고 싶다' 는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유혹입니다. 인생에 편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한복판에서 어떻게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하셨겠습니까?

편안하고 재미있고 넉넉하고 대접받는 길, 누구나 다 가고 싶어 하는 그 넓은 길의 끝이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는 가지 말라고 해도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존파이퍼 목사는 오래전 청년집회에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추구하는 풍요한 삶을 동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비극적인 삶을 쫓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가족, 좋은 직장, 즐거운 은퇴, 조개껍질 모으기가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 앞에 서기 전의 당신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창조주 앞에서 이것을 보십시오. 제 집을 보십시오. 제 차를 보십시오. 제 몸을 보십시오. 제가 모은 이 조개껍질들을 보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여러분, 삶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은 편안한 것과 대접받고 높아지는 것을 추구할 때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고난의 길을 각오하고 살아야할 때입니다.

 

:9에 보니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이들이라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죽음을 피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이들이 있습니다.

 

계시록이 쓰여지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자 밥이 되고 톱으로 켬을 당하고 또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는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북한이 그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국내 성지순례를 가보면 우리나라도 많은 순교자를 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요? 하늘을 보는 눈이 열리고 고난당하는 자의 마지막 결과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고 돌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유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순교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신앙과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순교자가 정말 복되다고 여겨지십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머리로는 그렇습니다. 그것도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편안한 것이 좋고 대접받는 것이 좋고 조금만 힘들어도 싫은 마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뭐야? 그러고도 설교할 수 있어?” 하는 생각에 며칠을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주실 더 큰 은혜가 남아있구나!”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더 열리고 요한처럼 하늘을 보는 눈이 뜨여서 순교도 복이라 여겨질 정도로 놀라운 은혜가 예비 되어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기도의 목표, 신앙의 목표가 뚜렷해졌습니다.

 

여러분도 순교하라면 어떻게 하나?” 겁내지 말기 바랍니다.

순교가 복이라 여겨질 정도의 더 큰 은혜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변해오지 않았습니까? 10년 전과 지금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제 더 놀라운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최근 연회 감독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응급으로 심장 수술을 받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만나 뵈었더니 이전과 달라지셨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몸은 약해지신 것 같은데 감사와 기쁨이 넘치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갔다 오니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단히 우리 생각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갔다가 오게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꼭 죽음의 문턱에 갔다 와야만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 한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에서 상식 밖의 거짓과 모함과 음모, 위협을 겪으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이 교회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잘못 알아들은 것인가요?”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깨우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선명하였기에 오히려 엄청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고난 - 죽음 - 부활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이 걸으신 길입니다.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도 걷는 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목사님께 고난이 닥친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목사님을 다듬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불시험을 즐거워하라 하셨던 것입니다.

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도 현재 고난은 장차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8:18)고 했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받으면 즐거워하라(5:11-12)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목사님이 더 이상 고난 때문에 힘들다 울지 않게 되었답니다. 앞으로 될 일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사님이 온전히 죽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를 주님 마음대로 다루어주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때, 지금까지 당해 온 고난과는 족히 비교도 되지 않을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여러분, 싫지만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영적인 눈이 뜨였느냐, 하늘을 보고 주님을 보고 고난당한 성도들의 마지막이 어떤지 보는 눈이 열렸느냐 이지 고난이냐 편안함이냐 가 아닙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목회하시는 쓰레기 마을에 사는 61세 된 엘리자베스라는 여 성도는 가난하고 여러 손자를 부양하는 고단한 노인인데, 주일예배 때, 간증하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더랍니다.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가 아닙니다. 내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을 알게 된 순간 저는 더 이상 쓰레기 마을에 사는 가난한 노인도, 손자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고달픈 노인도 아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다 각각 있겠지만 여러분의 이름도 다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그저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11:26에 보면, 시리아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는데 그 이름은 당시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비웃고 멸시하였던 표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아예 예수에게 미쳤구나.’ 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이처럼 믿기에 생긴 호칭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의 길이고 어떤 고난도 이기는 살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적당하게 붙잡고 있으니 어려운 것입니다.

 

삼손이 언제 회복되었습니까? 잘되게 해달라, 잘 살게 해달라고 했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장 비참했던 시절, 일제시대, 6.25 전쟁 때, 도저히 살 수 없으리라 여겨지던 그 때,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죽어라 주님만 붙잡고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고난을 외면하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붙잡고 주님만 바라보며 살면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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