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준을 낮게 잡으면 망한다(1) /고전11:1-/살전1:5-6/ 옥한흠 목사
2015-05-11 23:38:39
◑설교자와 인격
▲오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해서 저는 저 자신의 내면에 감추고 있는 영적인 고민,
그리고 한국 교회 사역자들을 내다보면서
또 신학대에서 훈련받고 있는 많은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저 나름대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하나의 불안,
이것을 일단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너무 거룩한 말씀을 날마다 가르쳐야 되고 전해야 되는
참 어떻게 보면 부담스런 위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그릇에 이 보배를 담았다고 했는데,
아니 좀 금 그릇에다가 담았으면, 이 금 그릇도 행복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질그릇에 이것을 담았으니, 질그릇은 참 너무 힘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참 기를 펴고 살 수 없는 처지에서
우리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만큼 거룩한 말씀을 가르치고
입에 담고 날마다 이야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우리를 그만큼 믿어주고 존중해주고, 또 모든 면에서 따라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많은 오늘 평신도의 마음속에 있는 설교자에 대한,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각인이 되어 있느냐,
열심히 가르치면서 자기는 잘 안 지키는 사람.
남은 거룩하게 훈계할 줄 알면서 자기는 잘 훈계는 못하는 사람.
자 이런 식으로 각인이 되니까, 이제는 막 기도 많이 한 목사다.
그것 가지고 그 인격이 신뢰를 못 받습니다.
늘 성경책 들고 다닌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설교 잘한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이제는 모두가 한 수 깎아 내려서 사역자들을 평가하고 봅니다.
여러분 이 말이 거짓말인지/참말인지, 여러분들에게 가까이 와서
‘존경합니다’ 말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세요.
그들의 내면에 진심이 있는가요?
교회 안에는 불행하게도 은혜 받은 아첨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첨하는 말에 너무 많이 흔들립니다.
그 아첨에 넘어가다 보니, 오늘 우리의 인격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우리 사역자에게 있어서 인격이 이만큼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능력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능력 있는 목회자, 능력 있는 설교자,
이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눈이 빛납니다.
그러나 인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별로 관심이 없어요.
교회 부흥에 대한 어떤 방법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모입니다.
그러나 인격에 대한 어떤 것을 강조하면, 다 눈을 감고 졸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큰 병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 합시다.
강단에 세워놓으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감동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울렸다, 웃겼다, 마음대로 하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이 부흥사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들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정말 가슴을 칠 일들이 한 두건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능력은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은혜를 끼치는지는 모르겠어요.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일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격이에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설교를 못해서가 아니에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그들의 인격 문제는, 바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의 인격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거울이에요.
이런 면에서 너무 너무 심각한데, 오늘 이 심각성을 우리가 오히려 느끼지 못하고
목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목회자>라는 이름의 미국 잡지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2천 명을 대상으로 ‘평신도들이 어떤 목회자를 원하는가?’ 라고 하는
설문조사를 제가 잠깐 보았습니다. 제일 앞에 나오는 세 가지가 이것입니다.
1) 첫째는 개인적인 야망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아니하는 헌신적인 봉사.
자기 목회를, 자기 어떤 개인적인 야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소지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도 없지 않아 있어요.
신자들은 정확하게 읽고 있는 거예요.
벌써 설교하는 말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키워드는 야망이구나/ 소명이구나’
다 알아요. 기가 막혀요.
눈치로 보는 데도, 아주 도사들이에요. 정확하게 알아요.
평신도가 원하는 목회자는, 인격적으로 자기 야망을 앞세우는 자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두 번째가 인격적인 신실성을 원했어요.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에요.
말은 굉장한데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3) 세 번째는, 모범적인 표준이 되어졌으면 좋겠다. 따르고 싶은 표준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 가지를 다 묶어놓고 보면, 한 마디로 인격이라는 말에 다 포함이 됩니다.
이것이 평신도가 원하는 지도자상이에요.
그런데 이 사실을 오늘날 우리가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뭐 지금은 자유주의 신학에 너무 많이 물들어서, 우리가 많이 주목을 하지 않습니다만,
예일대 신학교. 미국에서 신학으로 알아주는 유명한 신학교죠.
그 신학교는 지난 150년 전부터 매년마다 그 유명한 <설교학 특강>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150년 역사를 가진 설교학 특강 세미나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제가 몇 건을 읽어봤습니다. 뭐 그 깊이가 대단해요.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설교자로써 탁월한 분들만 초청해서
며칠씩 특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책으로 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일 대학교 설교학 특강 시리즈 자료 하면, 누구나 고전으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1876년, 지금으로부터 한 130년 전에,
우리가 잘 아는 필립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특강을 했습니다.
2년을 연속 특강을 했는데, 필립 브룩스는
지난 천 년 사이에 세계가 배출한 10명의 설교자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특강을 할 때, 이런 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사역을 위한 준비는 단순히 어떤 기술을 연마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더욱이 풍부한 지식만을 갖추는 것이어도 안 된다.
사역을 위한 준비는 유능한 말씀 증거자로서 역량과 자질을 갖출 때까지
인격을 연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일 대학교 설교학 특강 시리즈에 기본적인 주제는 “인격”이라고 합니다.
100년 동안 이어진 주제가 인격이에요.
그만큼 사역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격이라는 말입니다.
◑소명과 갈등
▲저는 목사로서 부름받은 것을 항상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저입니까.
저보다 더 훌륭한 평신도들 우리 교회 안에도 수 백, 수 천 명이 되는데.
왜 저를 불렀습니까.’ 라고 하는 부담과 동시에 감격이 있어요.
며칠 전에도 우리 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몇 분이 선교사로 떠납니다.
뭐 연세가 다 50대 중반이 넘었는데, 이제 남은 인생을 선교지에 가서 일하고 싶다.
그래서 지난 일 년 동안 선교 전문 기관에 가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분은 블라디보스톡 대학 한국어 교수로, 또 한 분은 정보통신 교수로,
또 한 분은 미국 풀러 신학교에 가서 3년 공부 하고 멕시코로 선교사로 떠나려고,
다 한국에서 일급 두뇌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이제 떠나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특별히 함께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제가 그들과 함께, 적어도 15년 이상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저 밑에서 제자훈련 받고, 사역 훈련 받고, 다 나중에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신 분들입니다.
학적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탁월한 분들입니다.
지금 직장에서 나와 은퇴한 돈으로만 해도, 평생 편안히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어려운 곳을 찾아갑니다.
학교에서 방 하나 주는데, 주방도 없는데, 옛날 소련에서 지은 것이니까요,
그냥 자고 일어나고 하는, 그런데 ‘목사님도 거기 가서 연단 좀 받으셔야지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 제가 한 가지 교회 사역을 하면서
왜 하나님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목사로 부르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당신들이야말로 인격적으로나 헌신 면에서, 목사 기 죽이기 좋은 사람들인데
왜 당신들을 부르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을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아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느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진실한 말이에요.
저보다 목사 되기에 훨씬 타당한, 훨씬 적합한 평신도들이 너무 많은데
하나님이 그들은 부르지 않고, 이 허물투성이인 나 같은 것을 불러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웠다는 점에 대해서, 항상 불가사의 수수께끼에요.
그래서 감사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불안하기도 하고, 기뻐하다가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이런 감정기복이 일어나는 것을 제가 자주 봅니다.
그런데 솔직한 심정으로, 저는 저 자신을 미워할 때가 더 많습니다.
더욱이 저는 제자훈련을 항상 해야 한다고 깃발 들고 외치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더 이런 감정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저 개인에 대한 혐오증이 자주 저를 괴롭게 만듭니다. 왜요?
예수의 제자 되자고 외치는 것만큼, 내가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제 양심에 항상 직면하거든요.
그리고 남을 가르치는 것만큼 나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무뎌져서.. 양심에 가책도 없는.. 그런 내 자신을 발견하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떨 때는 혐오감이 생겨요.
더욱이 여러분, 제자훈련이 무엇입니까. 작은 예수 되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온전한 자가 되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평신도를 온전한 데에 세우자. 예수 닮아가는 작은 예수를 만들자.
이런 포커스가 항상 제자훈련에서 강조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어느 정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았다..는 모습이 보여야지요.
내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인정하고, 가족이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인정할 수 있는 어느 수준을 가고 있으면서
이런 소리를 하면 좋겠는데
지금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도록, 저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만
여전히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저의 모습이
어떤 때에는 스스로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뭐 저의 솔직한 고백이에요.
◑제자훈련 사역자로서의 고민
▲제자훈련에 대해서, 처음에 제가 마음을 뜨겁게 가졌던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를 만들라고 했으니까, 그 명령에 복종해서 목회해야 한다!
그 소명감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평신도를 깨우면, 하나님의 교회가 놀라운 능력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이 일에 열을 올렸어요.
그런데 이런 제자훈련을 뭐 20년, 30년이 넘도록 하다보니까
이제는 점점 관심이 어디로 쏠리느냐 하면 저 자신에게 쏠리는 거예요.
도대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수준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그 인격을 너는 몇 퍼센트 정도나 너의 삶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느냐.
계속 저 자신에게로 이 포커스가 집중되는 것을 제가 지금 계속 느껴요.
그러니까 겁도 나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그래서
‘내가 어쩌다가 이 팔자가 되었나. (왜 이런 어려운 일에 뛰어들었나..)’ 하는 생각도 해요.
아예 할 수 있으면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에 은혜스러운 설교, 은혜스러운 교육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가장 힘든 주제를 가지고, 제가 설교 할 때가 많고 강의를 해야 될 때가 많다는
이 사실 때문에 저는 항상 부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이에요.
▲그러나 이런 고민이, 저는 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볼 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에요. 질그릇은 고민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민 없는 질그릇이라면, 질그릇이 아니에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인격 문제를 항상 신중하게 다루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했을까?’
바울이라고 뭐 완전했나요? 바울이라고 그 인격에 흠이 없었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서신서를 읽으면서, 바울에게서 조금씩 스며 나오고, 냄새가 풍기는 그의 약점들을
우리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인격을 놓고 어떻게 해결했을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영혼이 찌들어지지 아니하며
그 영성이 위축되지 아니하며, 그 마음에 기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긍지를 가지면서 평생을 살았을까,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저에게 관심사였어요.
◑사도바울에게서 해답을 발견하다
▲그런데 오늘 읽은 이 본문이 정말로 저에게 주는 굉장한 해답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설교의 주제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기 내면에 있는 인각적인 고민, 질그릇으로서의 약점,
인격적으로서의 불완전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자기 눈을 평생 고정시켜놓고
오직 그 분을 닮은데 정신을 집중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받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중은 절간에 앉아서 그 앞에 있는 큰 바위를 40년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바위만 응시하면서 살다보니, 나중에는 그 중의 얼굴이 바위처럼 변하더라..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닮는다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참으로 내가 예수님을 닮는다, 본받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시사철 24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영의 눈이 따로 있어서
마치 태양계 행성이 항상 태양을 바라보면서 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그(바울)의 마음의 내면에 눈이 있었어요.
그 분에 대해서 눈을 떼지 않아요. 항상 그분만을 바라보아요.
그리고 그 분을 닮으려고 전력투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바울이 이런 말까지 했잖아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내가 아니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상한 말을 할 정도로
그는 주님을 완전히 자기의 눈에 가득 차도록 놓고 한 평생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결이었어요. 자기의 인격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어요.
자기 내면에 들어오는 모든 모순과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었어요.
주님만을 바라보았어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이 없이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안 되기 때문에
그만큼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었다'고 소리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 부인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보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본받겠다고 하는
자기의 그 중심의 목표가 많이 달성이 된 것 같아요.
만족스러울 만큼 자기는 예수님을 받는 수준으로 나아간 것 같아요.
무엇을 보고 아느냐. 그 다음 말씀을 보고 알아요.
‘너희는 나를 본 받아라’ 고전11;1b
이 말씀을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닮아 가는데 있어서
자기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점점 닮아가는 자기를
성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샘플로 내어놓은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보아라. 나처럼 깊은 영안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지 못하는 약점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마.
너희는 나를 보아라. 나를 보고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라.’
그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어요.
▲그의 글들을 보면 고린도전서 4:16절에는 ‘너희는 나를 본 받는자 되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배경이 뭐냐 하면,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바울은 정말 낮은 자리까지 떨어지면서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한 생명을 구원하는데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 성도들에게 보여주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세상의 찌꺼기같은 자리와 같은 곳에 떨어지면서
수모와 수치를 감수하면서 한 영혼을 구원하려고 전력하는 그 모습,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날마다 응시하고, 날마다 바라보는 그분을 닮으려고 하다보니까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나를 본받아라.’ 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신 분!
얼마나 부러운 사람인지 모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1:1절의 배경이 뭡니까.
많은 사람이 유익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포기하는 자기의 인격, 자기의 모습을
교인들에게 내놓은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겠다.
이런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바울의 모습은, 그는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바로 자기가 날마다 본받기를 사모하고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예수님에게서 배운 거예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를 희생해서 썩는 밀알이 되는
주님의 그 삶과 인격을 통해, 자기가 그것을 전수한 거예요.
그리고 교인들을 보고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전1:6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 중에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살전1;5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인격을 가지고 너희를 대했는지, 너희가 잘 알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가 우리를 본받으라..
바울이 샘플로 내어놓은 자신의 그 인격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절을 보면, 거기서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그 배경은 무엇입니까?
온전히 이룬 것처럼, 자만하기 쉬운 자들을 경고하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어요.
‘온전히 이루었다는 소리 하지 말아라.
나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지금도 달려간다.
마지막 상을 얻기까지 아직도 얻지 못한 자처럼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향해서 달려간다. 그런 나를 보고, 너희는 본받으라.’ 이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완전한 자리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어떤 면에서는 극치에 이른 그런 위대한 지도자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고
아직도 노상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신임을, 그는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세계의 건강은, 앞에 있는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아직도 나는 부족하다는 심정을 가지고 달려가는데 있습니다.
완전하다고 스스로 자족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준에까지 그의 표준에까지 이르기 위해서
일생을 필사적으로 달려가는데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그랬어요. (계속)
데살로니가교회 /살전1:4-10/ 이동원목사
2014-12-01 19:38:02
다음 주일은 목장교회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교회 청장년 목장 1,500목장과 할 수 있으면 700여개에 달하는 교육 목장(어린이 청소년)까지도 함께 목장교회 주일에 동참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평상시 주간이나 주말 모임시간과 다르게 주일에 모이기 때문에 특별한 시간을 정하고 경우에 따라 연합으로 모이는 일도 있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목장 교회 종려주일에 평상시 주일에 모이는 교회당이 아닌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는 실험을 하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본질이 건물이 아니라는 성경적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교회의 본질이 교회당이라면 교회는 건물이 없어지는 날 함께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건물을 의존하지 않아도 존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처음 300년간 교회는 이 땅에서 그렇게 존재하여 왔습니다. 중국 문화혁명당시 교회당이 폐쇄되었지만 중국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들은 지하교회 혹은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하며 예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우리 교회 모든 평신도가 평신도 목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발견은 소위 만인 제사장 직이었습니다.
만인 제사장이란 소위 전문 적인 신학훈련을 받은 성직자들만이 예수님을 만난 모든 평신도들도 직접적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누구나 소명 받아 사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은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한국 교회는 특히 목회자 의존도가 높은 교회로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중국 교회가 목회자만을 의존하는 교회였다면 중국 교회는 문화혁명 당시 존재할 수 없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중국 정부는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모든 성직자들의 기능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지하로 들어가 작은 가정 교회로 존재하기 시작한 중국 교회들에서 모든 성숙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목사가 되어 예배를 인도하고 가르치고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중국교회의 더욱 폭발적인 성장을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교회 종려주일을 갖는 셋째 목적은 그동안 소그룹 공동체인 작은 교회 목장 교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분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목장교회를 선언하고 주일 예배이상으로 이 작은 공동체 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회로 전환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건강한 교회의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구경꾼이 다수로 이루어진 삶의 나눔이 없는 교회입니다. 잠실야구장을 가득 채운 구경꾼들은 흥행이 지속되는 몇 시간동안 흥분과 함성을 터트리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게임이 끝난 즉시 그들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흩어져 갑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2명 이내의 소그룹으로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하면 절대로 옆에 있는 이웃들에게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내 이웃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들의 신앙 성숙에 진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삶의 나눔으로 치유와 변화 그리고 성숙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지난 5년간 확인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지구촌 교회 성도라면 우리가 목장교회에 반드시 소속하여 삶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약 성경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건강한 교회-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교회는 바울 사도가 그의 제2차 전도여행중 유럽의 속한 마케도냐 빌립보에 와서 전도한후 그 다음 선교지로 찾아온 도시가 바로 데살로니가(지금도 그리스에 속한 대도시)였습니다.
(행전17장) 바울은 이 도시에 에베소나 고린도처럼 오래 머문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학자들은 짧게 잡으면 3주(아마도 회당에서 가르친 기간), 길게 잡아 7-8개월 이내를 머물렀지만 그러나 선교 효과는 대단했고 이 도시에 아주 건강하고도 영향력 있는 교회가 태어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바울의 전도에 저항했던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고린도로 떠난후 다시 얼마 전에 태어났던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성장해 가도록 주후 52년경 고린도에서 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서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배우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교회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분명한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되었고, 6절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인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이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다른 모든 세속적 공동체와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말씀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에 의해 영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말씀이 영적인 젖(우유)이고 단단한 고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것도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17:8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기도 중에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들의 이야기도 나누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선포되고 나누어 질 때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똑 같은 말씀을 받는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고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 일까요? 문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가지 마음 밭을 이야기하신 이유입니다. 씨는 같아요. 그런데 밭이 달라요. 길가도 있고, 돌짝밭도 있고, 가시밭도 있고 그리고 좋은 땅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의 마음 밭이 좋은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짧은 시일에 좋은 결실을 거두게 한 것입니다. 살전2:13을 보십시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무엇을 감사해 하고 있습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 하느니라”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와 우리들의 목장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역할 모범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받을 만한 지도자를 상실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유머가 유행할까요?
어떤 선생님이 학교에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정치가나 사업가중에서는 투명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고 하자 어떤 학생이 손을 들어 “선생님, 가장 투명한 사람들은 연예인들뿐 입니다.”하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하자,
“선생님, 연예인들은 잘 벗지 않습니까?”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행복은 그들이 본받을 대상이 있었고 그들을 잘 본받아 마침내 그들도 본 받을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 하반부와 7절을 보십시오.“--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 교회 내에서는 성숙한 성도들이 때로는 아버지처럼 훈계하고 때로는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때로는 형님 누님 언니 오빠처럼 서로를 세우고 서로에게 본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전2:7에서는“--유순한자가 되어 우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살전2:11에서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제가 가능했던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처음 데살로니가 교회에 도착하여 회당을 중심으로 한 3주간 전도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반발하자 행전 17:5-7에 보면 사도는 모임 장소를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행전17:7을 보십시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야손의 집에서 모여 서로를 사랑하고 권면한 모임 이것이 바로 데살로니가를 변화시킨 모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동일한 역사가 우리들의 목장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3.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배우는 또 하나의 모습은 이 교회가 주의 오심을 특별한 열정으로 기다리는 교회이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론적인 교회였습니다.
오늘 날 성도들은 종말론의 이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는, 여러해 전 2,000년에 진입하기 전 이 땅에 일부 종말론적 교회(다미 교회, 다베라 선교회등)가 보여준 행태처럼 현실을 도피하고 가정과 사회를 버리고
밤 12시에 모여 기도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이런 병리적 신앙에 놀라서 아예 예수님의 재림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내에도 그런 두 가지 경향의 성도들이 다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구실로 자기의 일상적인 일을 등한히 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살후3:10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규모없이 무질서하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니며 이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신앙고백인 것을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이미 본문 10절에서 데살로니가 인들이 받은 신앙의 중요한 고백의 일부가 재림신앙인 것을 확인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 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오늘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도 부끄럼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결론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살전5:23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언제라도 내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준비하고 사는 것-이것이 종말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것이 주께서 재림을 가르치시면서도 그 날을 비밀에 부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분이 오늘 오실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제가 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여류 문학가 권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건강이 안 좋게 느껴져 병원에 갔다가 암 진단을 받습니다. 처음엔 가족들이 알리지 않고 숨겼는데 우연히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암에 걸린 것을 아셨습니다.
이 분이 믿음이 좋은 분이셔서 그 날부터 죽음 준비를 하십니다.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용서할 사람 용서하고 용서 받을 분에게 용서 받고 편지 쓸 사람 편지를 하셨답니다. 갚을 돈이 없나 갚고, 지키지 못한 약속이 없나 살펴 다 정리합니다.
유산도 정리하고, 평소에 부담이 있었던 선교사님들에게 선교헌금도 보내고, 유언서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더 병세가 나빠지는 증상이 없어요. 누군가가 다른 병원도 가보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오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지난 후 저도 그 분을 뵈웠을 때 “권사님, 지금까지 인생 정리하시느라 돈도 많이 쓰시고 했는데 후회 안 되시나요?” 물었더니 대답이 뭔지 아세요? “아네요. 목사님, 제가 지난 몇 달처럼 인생을 진지하게 산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것이 바로 종말 신앙이요 재림 신앙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신앙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믿고 살며 전도하던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붙여준 별명을 아시나요? 행전17:6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도다” 그런데 이 대목을 영어 KJV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These that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일입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가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우리의 이웃들을 품고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우리들의 집, 혹 마을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이런 간증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선택받은 교회상 /살전1:2-7/ 곽선희 목사
2014-11-27 10:32:56
저는 몇 년 전에 뉴질랜드를 방문해서 세 교회에서 연이어 부흥회를 인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교회의 방문을 위해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그 지명을 보고 놀랐습니다. ‘Christ Church'. 이러한 지명의 도시가 이 지구상에 있습니다.
세상에 지명도 많습니다만 '그리스도 교회', 이것이 도시의 이름입니다. 35만 명이 사는 뉴질랜드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큰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이 곳은 스코틀랜드에서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이 모여서 자자손손 아주 조용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면서 신앙적으로 살아보자는 뜻에서 세운 도시라고 합니다. ’Christ Church'. 그런 도시입니다.
그곳에 가서 며칠 있는 동안 재미있게 보고 느낀 것이 무엇인가하면, 가보시면 알지만 그곳에 있는 집들이 크든지, 작든지 지붕이 전부 삼각형입니다. 아주 높게 삼각형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었느냐하면 이렇습니다.
그 지방에는 눈이 잘 안 오는데, 스코틀랜드에는 눈이 많이 오거든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는 지붕이 평평하면 안 되거든요. 눈이 흘러내리도록 삼각형으로 돼 있는데 고향생각이 있어서 눈도 안 오는 집에 전부 이렇게 삼각형으로 지붕을 올려 만든 것을 보고 그 분들의 그 고향 생각을 능히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 안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습니다. 아주 예술적으로 지은 그렇게 크지 아니한 성당이 있는데 일본의 어느 청년들이 어느 날 거길 지나 가다가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서 들어가서 신부님께 부탁을 하고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그 교회 측에서는 일본 사람이기도 하고 뭐 예수 믿는 것도 아니지만 선교적 차원에서 결혼식을 허락했습니다. 했더니 '여기서 결혼한 사람은 이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너도나도 일본에서 계속해서 젊은 사람들이 거기까지 결혼하러 간단 말입니다.
이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마침내 교회 옆에다가 호텔까지 지었어요. 그리고 전 지역에서 이걸 패키지로 여행 업계에 여행 상품으로 내놓아 성행을 하게 되는데 아주 큰 사업이 되었습니다. 일본 젊은이들이 거기 가서 결혼을 하고 또 신혼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거예요.
이 교회 측에서는 교회가 어쩌다가 이렇게 남의 장사에 말려들었으니 이건 안 되겠다 해서 교회법으로 결혼식 안 해주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일본 여행업계에 큰 손실이 왔습니다. 마침내 일본 사람다운 짓입니다.
그 옆에다가 가짜 성당을 하나 지었습니다. 예배당을 하나 잘 지어놓고 또 가짜 신부를 하나 세워가지고 계속 결혼 주례를 합니다. 이렇게 지금 까지 그런 상황입니다. 현재 그렇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게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교회가 교회지, 여행업자가 선택한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십니다. 인간은 그의 뜻을 조용히 따라갈 따름입니다.
여러분, 예수소망교회의 설립에 대해서 이제는 좀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바로 이 예배당이 서 있는 이 대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교회 오실 때마다 느끼지만 온 세계에 이렇게 좋은 명당자리에 세운 교회가 없어요.
이렇게 좋은 땅, 아니 우리 한국 어디에 이런 땅에 세워진 교회가 있습니까? 교회는 다 골목으로 들어가서 있지 이렇게 비싼 땅에 이렇게 좋은 예배당을 짓고, 뒤에 동산이 있고, 사통오달에. 도대체 이런 희한한 장소가 어떻게 교회의 설립 장소로 됐을까?
어쨌든 이 1,200평 대지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유래는 이렇습니다. 아, 이 근방에 있는 목사님들이 절 찾아와서 자기들이 그 땅을 보고 사려고 좌우간 10년 동안을 뺑뺑 돌면서 기도했대요. 저 땅 사게 해달라고. 그렇게 예배당을 지으려고 애를 썼는데 못 샀어요. 그런데 곽목사는 오자마자 샀어요. 그래 어떻게 샀을까? 그걸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아주 신중히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겸손해서 샀고 당신들은 교만해서 못 산거요." 그랬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지요? 이 대지가 원래 두 사람 것이었어요. 500평, 700평. 그런데 500평 사람이 팔겠다고 하면 700평 사람이 안 팔겠다고 그래요. 땅값을 올리려고. 700평 사람이 어떤 때에 팔겠다고 나서면 500평 사람이 안하겠대요.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이걸 다 사야 되겠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래 500평 가지고 안 된다는 생각에서 다 사려고 하다 보니까 못 산거죠. 그런데 저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500평 판다고 그래서 그저 샀습니다. 만족합니다. 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500명 들어가는 예배당, 딱 세우고 조용하게 그렇게 목회하려고 했습니다. 500명 들어가는 예배당 설계까지 다 하고 건축허가까지 나왔습니다. 이제 지으려고 하는데, 미안합니다만 고맙게도 동네 사람들이 데모를 했어요.
반대 데모를 한 거예요. 이거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 곽 목사님이 나와서 세운다는데 여기 교회가 커질 것이고, 이 동리가 시끄러워질 텐데, 500평 가지고는 안 된다. 좌우간 1년 동안을 건축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참 애타게 기다리다가 동네 사람들하고 한번 만나서 의논을 하였습니다. 했더니 차라리 크게 하려면 하라고, 작은 건 안 된다고. 그래서 나머지 700평을 사게 됩니다. 그 700평 가진 분도 그 700평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그래서 쉽게 팔아서 합쳐서 이 교회가 됩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누가 이러한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참 오묘하게 역사해서 여기에다 예수소망교회를 세우게 해 주신 거예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간단히 말합니다.
겸손해서 이 땅을 샀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이렇게 세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셔서 이 땅을 우리 예수소망교회에게 주셨고 오늘의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를 선택하심을 아노라." 사도 바울의 유명한 선언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선택하신 것을 아노라.'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세우는 건데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른 목적으로 다른 동기로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과연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거기서부터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확증을 해 줍니다.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복음이 말로만 아니고 능력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말로만 아니고 능력이다. 말로만 되는 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능력으로 나타나야 교회입니다.
참,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는 일 같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제가 소망교회를 처음 세웠을 때 11명이 가정에서 예배드리면서 시작했습니다마는 이제 상가를 하나 얻었습니다. 겨우 150정도가 교인이 될 때입니다.
전혀 생각지 않게 한 달 동안에 그 교인 가운데에 귀신 들린 사람이 세 사람이 있었어요. 이걸 어떡하겠어요? 제가 인천에서 14년 동안 목회하면서 많이 경험해 봤어요. 인천은 바닷가기 때문에 워낙 귀신이 많아요. 그 귀신들린 사람 내쫓는 거 내가 아주 능란하거든요. 신학대학에 가서 엑소시즘 강의도 내가 했습니다.
아 이렇게 했으니 그까짓 거 문제가 안 되죠. 그 귀신을 싹 내쫓아서 깨끗하게 만들었지요. 그랬더니 소문이 나는데 의외의 소문이 납니다. 우리 곽목사님은 박사요, 교수요, 목사요,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 ‘영권’이 있다고, 요샛말로 영발이 있다고 그러죠. 하하하. 영발이 있어야 되요.
여러분, 성경에도 보세요. 예수님이 만일에 귀신을 내쫓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이 그 많은 병자를 고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또 솔직히 말하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런 사건이 있음으로 예수가 예수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가 되는 거 아닙니까? 말로만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난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되니까 능력 있는 종으로 소문이 나더니, 죄송합니다.
1년 동안에 2,000명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소망교회가 된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능력, 복음의 능력화, 말씀이 말로만 아니라 이거예요. 이것이 능력으로 나타나야 돼요. 능력으로 나타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적인 교리, 인간화된 지식이 아니라, 도덕 강연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그 교회 안에서 나타날 때 비로소 교회가 교회되는 것입니다.
추상적,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영생하게 하는 능력,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는 순간 교회는 교회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그 확실한 증거의 개인적 검증 기준이 본문 말씀에 있습니다. 보세요. 이겁니다.
"믿음의 역사.(3)" 믿음은 가슴에 있는 겁니다만 역사란 말은 '에르곤'입니다. 에너지입니다. 힘으로 나타나야 되요. 믿음이 힘으로 자기 극복의 힘으로, 시험을 이기는 힘으로, 정욕을 이기는 힘으로 말입니다.
힘으로 나타나야,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 아니라 그 인격과 성품과 생명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할 때 그가 택함 받은 사람이에요.
또한 "사랑의 수고.(3)" 그렇죠? 사랑한다면 수고는 따라가는 거죠.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의 아주 논리가 있잖아요. 사랑은 수고다. 사랑은 희생이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그런데 그 수고와 희생은 기쁨이다. 여러분, 부엌에서 설거지 하십니까?
그 설거지 하면서 '어쩌다 내 팔자가 이렇게 됐나' 하면 사랑은 거짓말이에요. 사랑하면 설거지 하는 게 행복하고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영광이에요. 또 가족들을 위해서 새벽부터 나가서 돈 번다 하더라도 이것도 행복한 거예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수고가 얼마나 참 확실한 얘기입니까?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내가 몇 일전에 결혼 했는데 결혼하면 그저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결혼생활이 아주 피곤합니다. 너무 힘든데요. 그 가정생활이라는 게 노동입니까? 오락입니까?" 그랬어요.
그러니까 목사님 하는 말씀이 “그거, 중노동입니다” 그랬어요. 또 신부님을 찾아가서 물어 봤대요. "노동입니까? 오락입니까?" 이 신부님 대답이 걸작이에요. “십자가입니다” 그랬대요. 이제는 랍비를 찾아갔어요. 이스라엘 랍비를 찾아가서
"아니 이거 가정생활이 노동입니까? 오락입니까?" 그러니까 그 랍비가 껄걸 웃으면서 아주 명답을 했어요. "그건 틀림없이 오락입니다. 그게 만일에 노동이면 내 마누라가 식모한테 시키지 자기가 하겠습니까?"
못 알아들었죠?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게 만일 노동이라면 그걸 왜 자기가 하겠냐? 자기 가정부한테 시키지, 그런데 이건 자기가 하거든요? 여러분, 사랑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기쁨이에요. 기쁨이 돼야 거기에 바른 수고가 있고 희생이 있고 기쁨이 있고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또한 "소망의 인내(3)" 소망이 확실하면 인내는 쉬운 거예요. 소망 없는 인내는 지옥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소망이 확실하면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어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는 거예요. 왜요? 자기가 가야할 소망의 세계가 환하게 보이니까.
환란과 핍박,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교까지도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망이 확실하니까. 바로 이런 믿음을 가리켜서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택함 받은 자의 모습이라고, 택함 받은 자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토마스 에디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발명을 할 때에 우리가 가져야 될 자세가 무엇이겠습니까? 토마스 에디슨은 말합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세요. 인내로 승부가 납니다." 기다림이 지루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소망이 확실하면 기다린다는 거 지루하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제가 나이 드니까 이런 얘기도 합니다. 제가 제 아내를 집에다 두고 얘들 다 놔두고 혼자서 유학을 5년을 했거든요. 이 미국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아내를 아니 우린 일주일도 혼자는 안 되는데 거 5년 동안이나 이별해서 그럴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고, 앞으로 5년 후에 만날 걸, 이렇게 생각하면 곱빼기 기쁨이 있는 거 아니겠느냐? 무얼 그렇게 초조하냐? 그까짓 5년이 무슨 큰 문제냐? 안 그래요?
저는 뭐 5년 동안 집사람 두고 가서 공부할 때 한 번도 미안하다는 생각 안 했어요. 잠깐만 기다려라. 안 그렇습니까? 무얼 그렇게 조바심을 하고 난리를 칩니까. 소망. 소망. 멀리 바라보고 확실하면 오늘 인내는 문제가 안돼요.
이러할 때 우리는 택하심을 아노라. 그건 택함 받은 사람의 모습이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교회라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보면, 데살로니가 전서가 사도 바울의 모든 편지 중에 No. 1입니다. 첫 번째로 쓴 겁니다. 처음으로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의 교회는 선택받은 교회요. 처음부터 환란 가운데서 복음을 받았고, 도를 받고, 기쁨으로 받고, 행복한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니 선택받은 사람들이요.' 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믿는 자의 표본이 됐습니다. Idealist Model입니다. 이상적 모델이 됐어요. 교회란 뭐냐? 여러분, 오늘도 우리 교회의 이미지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교회, 저런 교회 뭐 참 교회가 뭔지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혼란해졌습니다.
여러분, 소망교회, 우리 예수소망교회는 교회 중에 교회 아주 이상적 모델로서의 교회, 표본적 교회. 꼭 필요합니다. 뭐 특별한 일은 안 해도 ‘이것이 교회다’ 할 수 있는 교회가 꼭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교회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부흥할 것입니다.
함께 교회된 모습을 바로 세워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고, 하나님의 복음적 능력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 그 교회에 그 능력을 매일 같이 체험하는 그런 살아있는 교인, 바로 그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특별한 행사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교회다. 예수소망교회는 이것이 교회라고
말해 주는 확실한 증거로서의 교회, 등대 같은 그런 교회로 다시 출발하고 부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 교회를 여기에 세워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이 지식으로가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며 생명력으로 나타나며 모든 사람이 중생하고 성화되고 변화되는 그런 교회, 살아 역사하는 교회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참 교회의 모습으로 본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하사 이 교회를 통해 많은 교회가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귀한 교회로 교회의 사명을 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떻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 수 있는가 /살전1:6-8
2009-07-08 12:17:28
본문 전 3:11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결혼식장으로 한번 가 봅시다. 친지들의 축하의 박수 속에 씩씩하게 입장하는 젊은 신랑이 흥분과 긴장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함박 벌어지는 웃음은 아름답습니다. 친구가 쳐주는 Wedding March에 발맞추어 눈부신 Wedding Dress에 꽃다발을 살며시 가슴에 안고 늘그막한 아버지의 자애스런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꿈에 취한 듯 걸어 들어오는 신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신랑신부는 이날로부터 때마다 철마다 그네들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이 주신 음식과 삶의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몇 년을 지내는 동안 어여쁜 아들 딸들을 갖게 됩니다. 직장에 시달린 몸과 자녀 기르기에 고달픈 마음은 귀엽고 앙증스런 자녀들의 재롱과 웃음에 그만 어디론가 살아져 버립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인생은 달고도 쓰며 행복하기도 하며 슬프기도 한 것입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대로 때와 목적이 이루기 전까지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계속하여 우리 생활에 나타납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과(롬 11:32)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엡 2:8). 우리가 깨끗하고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아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히 4:16).
오로지 믿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인생에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고 삽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재물과 부요를 누리며 자기의 분복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이 세상에서 가지는 이런 모든 소유와 기쁨과 아름다움은 자연법칙의 진행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하나씩 둘씩 시들고 사라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사 39:6).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아름답게 하신 모든 것은 여름의 신록이 지나면 앙상한 겨울이 오는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변해지고 추해지고 죽어갑니다. 짐승이 병들고 죽는 것처럼 사람도 결국 병들고 죽고 맙니다. 사람은 한없이 존귀한 것 같으면서도 짐승과 동일한 호흡으로 살다가 짐승보다 길게 또는 짧게 죽어가므로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한탄하며 독백합니다.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그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3, 8~11).
전 3:11 중반절을 보면 이 허무하고 맹랑한 현실세계 밖에 보다 깊고 그윽한 세계는 없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짐승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특유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영혼불멸의 증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불멸에 대한 다른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자기 모습을 사진 찍어서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하지만 그 자신이 죽은 다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도 무덤 저편의 사실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영혼불멸이란 단지 잃어버린 영원에 대한 종교적인 향수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종교의 씨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 의지하고 마음껏 하소연하며 울 수 있는 어떤 대상을 갖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는 종교성이란 깨어진 거울과 같은 인간의식 속에 제각기 자기의 하나님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가 한없이 많고 또 거짓됩니다. 마호멧의 하나님도 있고, 공자의 하나님도 있고, 애국가의 하나님도 있지만 또 이 하나님은 각각 다른 하나님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은 사람의 종교성에 비치는 허무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이 영원이란 막연한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요, 헬라말로 Pleroma 즉 하나님의 모든 충만, 성취하신 모든 일의 시종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려는 간절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영원을 구하며 종교를 구하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처음과 나중의 기한과 목적을 가진 종교를 구합니다. 본문 1절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를 때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구하되 추상적 환상적 하나님이 아니요 구체적으로 역사 위에서 일하신 증거를 가진 하나님을 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전 3:11 하반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설악산과 내장산의 단풍의 물결을 보고 감탄하면서 “이것은 신의 창작품이다”라고 아무리 놀라워해도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없습니다. 속리산의 문장대를 보고, 제주 사봉의 낙조를 보며, 8월 한가위 해운대의 달맞이를 보고 그 장엄한 장면에 넋을 읽고 “이거야말로 신의 조화”라고 찬탄할찌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볼 수 없습니다. 나라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리고,
학문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며,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을 알만하게는 하지만(롬 1:19~20) 그것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처음과 나중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두 눈을 부릅뜨고 삼라만상을 살펴도 거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영혼불멸과 종교성에 호소해도 거기에는 아무런 들리는 소리도 없고 한줄기 빛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와 계시에만 의존합니다. 일반은총과 자연계시의 영역은 침묵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새로운 하늘의 음성이 들려올 때만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하 5:7~10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 두었는데 그룹들의 채가 길어서 궤에서 나오므로 그 끝이 내전 앞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말씀 안에서만 세계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의 생애 가운데 몇 차례의 힘에 지나는 시련의 고빗길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는 다른 무엇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말씀의 밧줄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고후 1:8~9). 신자는 말씀의 밧줄에 온 몸을 맡기고 타잔처럼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믿습니다”라고 외치며 건너 뛰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 거의 십년마다 다가오는 위기의 날들에 그리고 천국 갈 때 우리는 말씀의 그네를 탑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건강한 자와 병자, 의인과 죄인, 산 자와 죽은 자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이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이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하시는 일을 어떻게 계시하십니까?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품 속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 계시하십니다(요 1:1).
히 1:1~2 에 “예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물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저 유명한 철학, Hella의 Stoa학파가 말하는 막연한 우주의 지배적 원리이거나 인격신 Logos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유일한 Logos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요 1:14)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 나사렛 예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시면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는 똑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씀을 들으라”는 하늘의 증거를 받으시면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을 것과 부활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마침내 역사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많은 증인 앞에서 자기를 증거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롬 4:25은 이 사실을 설명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 빌립에게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9~11).
예수께서는 선지자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기록하신 성경에서 그분의 가르치신 모든 일을 보고 그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신(고후 4:6)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일을 통하여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왕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두루 행하시며 행하신 착한 일을 통하여 그가 믿는 자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행하시는 일을 삼 년간 목격한 시몬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기독교를 비웃던 철학자요 유대교 신자인 바울이 부활하사 영광 중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행 17:3) 죽는 날까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 수는 있습니다. 롬 11:33에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씀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다 측량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요 사랑한다는 것은 안다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Pleroma,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창조의 근본이시오 목적이시며 구원의 근원이시오 완성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이 하나님의 Pleroma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Pleroma,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고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Pleroma를 우리가 믿음으로 소유할 때 우리는 영생을 소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을 때 그의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의 불안과 허무, 근심과 슬픔이 살아집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생명 없는 종교에 시달린 어둡고 지친 영혼이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기쁨으로 만족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곧 그분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처음과 나중을 알게 됩니다. 산 믿음과 산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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