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이 필요해 /살전3:1-8/ 배영진 목사
2023-05-06 02:20:35
오늘은 목양이 필요해 이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은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는 일과 매우 유사합니다. 예수를 믿은 초신자가 그 믿음이 혼자 크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 자기 혼자 크는 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동물들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는데 가끔 소나 말이 새끼낳는 것을 봅니다. 네 발 짐승, 소나 말이나, 태어나면 5분 안에 걸어다녀요. 암소가 송아지 낳는 장면을 보면 사람이 애기낳을 때같이 크게 울지 않습니다.
그냥 눈만 껌벅껌벅하면서 고통을 참아요. 엄마 암소에게서 송아지가 태어날 때 두사람이 잡아당기더라구요. 삐쩍 마른 송아지 쭉 잡아당기면 툭 땅에 떨어져요. 그런데 갓 태어난 송아지가 한참 누워있다가 발을 흔들다 비틀거리며 일어나요. 곧바로 네 발로 일어나 걸어다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사람이 태어나서 5분 만에 딱 일어나면 어떨까요? 징그러울 것 같아요. 사람은 절대 그렇게 못일어납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야만 사람이 됩니다. 열심히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기저귀 수천번 갈아주고 키워야 자랍니다.
한 사람이 예수믿고 거듭나 태어나는 일도 매우 유사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걸 거듭난다고 합니다. 영혼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그 새로 태어난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는 목양이 필요합니다. 목양이 없으면 예수믿는데 믿음이 자라지 않아요. 시험이 들고 넘어져버립니다. 오늘 데살로니가교회는 갓 태어난 초신자들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성도들에게 왜 너희에게 목양이 필요한가를 설명합니다. 태어나 3주된 어린 교회, 어린 성도들이죠. 사도행전 17장 바울사도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회당에서 복음전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대부분 유대인들은 복음을 반대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헬라사람 몇 명 그리고 몇몇 귀부인들이 예수님 믿어 교회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3주만에 극심한 핍박이 일어나 바울과 그 일행이 떠납니다. 사도바울은 마치 아기 떼어놓은 엄마처럼, 데살로니가를 떠난 이후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저 초신자들 믿음이 어떻게 될까, 믿음의 뿌리가 못내려 넘어져버릴까 걱정해요. 그래서 바울이 급기야 디모데를 보냅니다. 지금 데살로니가에 목양이 필요해요. 1절에 보면, 우리가 참다못하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사도가 마음을 졸여요. 그래서 디모데를 보낸 겁니다. 본문에, 여러분을 굳게 한다, 굳게 선다, 마음을 굳게 한다! 계속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 믿음이 굳게 서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목양이 필요해! 이것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첫째, 목양을 통하여 믿음이 세워진다.
다같이 2절을 읽어봅니다. 누구를 보내요?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사실 바울사도는 몇 번이나 데살로니가에 가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1장 18절 사탄이 길을 막아서 못갔다고 나옵니다. 어떻게 사탄이 길을 막았는지 알 수 없어요. 하여간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너무 걱정이 됐습니다. 그 초신자들 계속해 목양을 해야하는데 바울이 갈 수 있는 상황이 안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아테네에 남았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냅니다. 디모데는 누군가? 2절에 우리의 형제요,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엄청 믿어요. 오늘 디모데를 보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 해야 할 일이 뭔가? 목양입니다.
2절과 5절을 보면 나옵니다. 2-3절 보면, 목양이 왜 필요한가 이유가 나옵니다. 디모데가 가서 할 일이 뭔가? 그것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무엇을 굳건하게 할까요?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아무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5절을 읽어볼까요? 내가 참다 못하여, 또 참다못하여 라는 말을 한번 더 합니다. 참다못하여 디모데를 보냈다 그래요. 5절에 그것은, 왜 디모데를 보내야 했는가?
유혹하는 자가 여러분을 유혹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자 2절과 5절을 연결시켜보면, 바울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초신자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보내자, 그래서 믿음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 안그러면 누가 온다구요? 유혹하는 자가 그 성도들에게 온다, 만약에 디모데를 안보내고 유혹하는 자가 오면 성도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염려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애써 믿었던 그 믿음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바울은 이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헛되이 돌아가면 안된다!
이 영적으로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을 데살로니가 초신자 성도들이 다 알까요? 성도들은 이제 갓믿은 이들이어서 잘 모릅니다. 아직 믿음이 굳건하지 않아요. 디모데가 안가면 유혹하는 자가 옵니다. 유혹하는 자는 영어로 tempter입니다. 시험하는 자 사탄마귀를 말합니다. 마귀가 찾아온다, 이것을 바울이 잘 알아요. 지금 우리 아기가 아픈 것 같은데, 아기가 나 병원가야 돼! 알까요? 모릅니다. 병원 안가면 큰일나는 건 부모만이 알아요. 아기에게 부모양육이 필수적입니다. 성도에게 목양이 필수적입니다. 자 다시 2절 3절로 가봅니다. 그러면 목양이란 무엇일까요? 성도들이 믿음으로 자라려면, 누군가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디모데가 가서 할 일은 한가지예요. 말씀을 떠먹여주는 일입니다.
왜 먹여줘야 할까요? 믿음이 있지만 뿌리가 약해요. 믿음이 굳게 서도록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믿음도 그렇고, 삶의 변화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성도도 믿음이 직선으로만 쭉 올라가는 법이 없습니다. 처음에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가다, 왠일인지 내려가요. 그리고 다시 반전의 계기를 잡았을 때 내려갔던 그래프가 다시 치고 올라갑니다. 이 포물선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삶의 변화는 나선형으로 올라갑니다. 처음 예수믿을 때는 순수한 어린 아이같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혼이 기뻐요. 변화되고 싶고 변화된 삶의 간증도 잘합니다. 나는 이제는 주님밖에 없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아기는 아프면서 큽니다. 잘 놀다가 아이는 어때요? 아파요? 안아프고 자라나요? 아이는 아픕니다. 갑자기 열이 나고 울고 보채고 난리납니다. 첫 아기 키울 때는 정신이 없어요. 아프다는 건 병균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꼭 내 아기가 죽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때 보살펴주고 병원가서 약먹이고 주사 맞으면 아기는 금방 나아요. 아프고 나서 아이가 큽니다. 이렇게 나선형으로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런데 목양이 없으면, 이 목양을 안받으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누가 찾아 온다구요?
5절 시험하는 자가 옵니다. 만약 그들에게 목양하는 디모데는 안오고, 시험하는 자가 오면, 어때요? 성도가 천지분간을 못합니다. 시험하는 자는 뭘 하는가? 이간질이 전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성도가 멀어지게 만들어요. 마귀는 여러가지 무기를 맘대로 써요. 목자와 멀어지게 하거나, 목사와 멀어지게 하거나, 마귀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그 믿음을 흔들어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오면, 성도의 믿음이 다시 내려가요. 믿음이 좀 굳건해진 것이 다시 얕아지게 합니다. 그 성도의 믿음이 침체되게 합니다. 그래서 환난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흔들리고 요동칩니다.
저는 목양을 지난 30년간 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과정을 실제 다 경험했습니다. 진정한 목자는 부모처럼 아기를 키웁니다. 목양은 개인적 터치입니다.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맞춤형으로 키워내는 목양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상담과 목양을 병행합니다. 한 사람이 회복될 때 내면에 심리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에게 오랫동안 자기 속에 담겨진 내면의 부정적 감정 대응에 관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다운되지? 왜 이리 두려울까? 왜 이 지점에서 참을 수 없지? 왜 이때 화가 날까? 왜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나? 왜 이렇게 서럽지? 이거예요. 이게 혼자 해결이 안됩니다. 누가 도와줘야 해요. 이것을 해야 합니다. 심리적 변화가 있고나서, 영적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곧 목장생활과 교회생활입니다.
둘째, 목양에는 기쁨이 있다.
6절입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갔다 돌아와 목양의 결과를 말합니다. 바울사도가 믿음의 기쁜 소식, 사랑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기뻐합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목양을 하고 돌아와 보고한 아주 기쁜 소식이 뭐였는가? 성도들이 믿음이 굳건히 섰다는 것입니다. 7절에 바울사도는 너무나 기뻐합니다. 이런 말을 해요. 나에게 있는 어떤 궁핍과 환난이 와도 그게 다 사라진 것 같다, 8절에, 이제는 우리가 살아났다! 이제는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 자식 철드는 기쁨입니다. 목양과 똑같습니다. 진정을 다해서 목양하고 돌보고 보살피고 말씀을 먹였는데, 그 성도가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그 부부가 회복됩니다. 그 예배가 달라집니다.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옛날에 부모님들이, 너희 쑥쑥 크는 걸 보니 나는 밥 안먹어도 배부르다 그러셨어요. 자식들이 자라서 철들면 부모가 행복합니다. 모든 시름이 없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쓴 거예요.
8절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이제 우리가 살아있는 셈입니다! 그래요. 이 말은 뭐예요? 사도바울이 그만큼 노심초사했다는 뜻입니다. 아 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아직 연약한 상태인데, 디모데가 가서 목양을 해서 저들을 굳건히 세워야 하는데 혹시 디모데보다 시험하는 자가 먼저 가면, 성도들이 시험을 당하여 그 믿음이 뿌리째 흔들려 쓰러지고 말 것인데, 그러면 그 성도들이 그동안 가졌던 믿음이 사라지고 그러면 복음사역이 헛되게 된다! 이 염려가 사도바울을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몰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목양을 하고 돌아와 보고한 것이, 성도들 믿음이 굳건히 섰다고 하니까 9절 바울이 너무나 기뻐합니다. 모든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은 목양하면서 저에게 큰 기쁨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설 때입니다. 정말 기쁘거든요. 제가 상담할 때 최소한 두시간씩 소요됩니다. 그의 내면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의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핍니다. 그리고 상담과 예배와 삶공부와 기도, 어떤 경우 북쉐어링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 그의 마음이 강인해지고 그의 믿음이 굳건하게 서는 것을 봅니다. 정말 기쁘거든요. 여러분의 목자와 목녀도 같은 심정으로 여러분을 목양합니다. 아무도 혼자 크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보살핌과 돌봄을 받으며 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사람은 정서적 케어가 필요합니다. 기분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심리적 케어, 내면을 들여다보는 상담이 이루어져야, 마음밭을 갈고닦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사회적 케어, 함께 힘을 내서 뭔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케어, 말씀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내 영혼을 키워갑니다. 이렇게 성도의 변화는 총체적으로, 종합적으로 시도해야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서 여러분이 목양을 집중적으로 3개월을 받으면 변화의 조짐이 점점 나타나고, 1년에서 2년 정도 네가지 케어를 받으면 현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하셨어요. 이렇게 성도는 목양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까지 왔다면, 누군가로부터 많은 목양이 나에게 있었습니다. 혼자 크는 사람이 없어요. 누군가의 기도가 있었고, 누군가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물질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그걸 여러분이 받아먹고 이만큼 큰 거예요. 그래서 이 시간 여기까지 자랐습니다. 이제 내가 오늘까지 믿음으로 커오는 동안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일직선으로 믿음이 쭉 올라가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나선형입니다.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이 믿음의 포물선 나선형 그래프로 가는 것입니다. 내 믿음과 변화의 포물선의 그래프를 지금 그려보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나 나를 목양해준 디모데가 있어요. 그리고 누구나에게 시험하는 자도 불쑥 불쑥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때 또 다시 디모데가 찾아와 다시 목양을 받았고 일어섰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래프가 나선형으로 올라갑니다. 어떤 경우 디모데와는 이상하게 멀어졌을 때 시험하는 자가 옵니다. 그때 여러분의 믿음의 그래프가 내려갔을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올라갔을 때 나를 양육해준 그분이 있었구나! 누가 내 믿음을 굳건하게 해줬는지 알아야 합니다. 누가 내 믿음을 격려해줬는지 알아야 합니다. 누가 내 믿음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줬는지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도 누군가 목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래프에 내 믿음이 내려가고 하나님이 멀어지고 침체되었을 때가 있어요. 그때 나를 목양하는 디모데, 왠일인지 그는 안보이고 그때 나를 시험하는 자가 찾아옵니다. 시험하는 자를 붙들면 믿음이 내려갑니다.
오늘 예배에 나와 하나님말씀을 듣는 시간이면 지금 목양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올라가고 있는 그래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곳에서 목양을 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반드시 여러분 믿음이 굳건히 일어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목양을 꼳 풍성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진정으로 목양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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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주는 사람/살전3:1-10
2003-03-31 22:29:35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옷을 주지 아니하시고 벌거벗고 살게 한 이유가 있답니다. 옷을 주면 틀림없이 주머니를 달아달라 할 것이고 또 주머니를 만들어 주면 거기에다가 돈을 채워달라고 할 것이기에 옷을 안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어쩔 수 없이 환경에 끌려 산다고는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본능과 많은 욕심에 이끌려 갈 때가 많습니다만 그래도 나의 나된 정체를 절대로 잃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사회가 소위 <돈>이라고 하는 화폐를 축으로 하여 회전하고 있듯이, 오늘날 학교는 점수를 축으로 하여 회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약 60번의 시험을 치러야 하고, 그 시험에서 단 한 점이라도 많은 점수를 따기 위해 아이도 부모도 선생도 혈안이 되어야합니다. 그리하여 이 점수는 학교를 졸업한 후의 인생에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영향을 끼치게끔 구조적으로 숙명에 끼여듭니다. 점수를 많이 딴 우등생에게는 장미 빛의 미래가, 점수를 따지 못한 열등생에게는 회색 빛의 인생이 막연히 나마 약속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데이트 상대를 고를 때 대입 수능고사의 점수를 알아보고 또 부모들도 며느리나 사윗감을 선택할 때 그 점수로써 인물 평가를 하기도 한다는데, 마치 점수가 옛날 양반, 상놈의 신분이나 전과자의 낙인처럼 따라다니기까지 한다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언제부터인가 한국에 있어 시험 점수는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까지 돼 있는 것입니다. 곧 <점수 = 인간 가치>의 등식 위에 학교 교육이 돌아가고 있고, 교사나 학부모나 아이를 볼 때 점수 안경을 통해 70점 아이니 80점 학생이니 하는 고정 관념을 형성시켜버립니다. 돈 많은 사람이 <돈 부자>로 우러름 받아 그의 윤리도 도덕도 묻혀 가듯이 점수가 많은 사람은 <점수부자(點數富者)>로 그의 인간성이 어떻다는 것과는 별도로 무턱대고 우러름 받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또 한번 우리를 욕망주의의 매력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점수 지상주의 사회의 빅 이벤트인 대입 수능고사 시험 점수가 발표되고 이제 그 점수를 손에 들고 본격적인 가치인정 받기 시합인 <원서접수>에 들어갔습니다. 당사자와 부모, 가족, 교사까지 합치면 우리 인구의 약 5분의 1을 희비와 흥분과 실망의 도가니 속에 휘몰아 넣는 <점수 마(點數 魔)>가 판치는 날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제일 불쌍한 아이들이 원서 들고 다니는 아이들 아닙니까?
사실 이 아픈 현실을 안고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점수>란 교육 평가의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점수>가 교육 전체를 잡아먹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알기 위하여 먼저 체온이나 혈압을 재어보고 다음 단계의 진료를 하고 또 다시 중간중간 진료를 하기 위해서 체온이나 혈압을 체크하듯이 점수는 교사가 가르친 것을 학생이 어떻게 얼마나 이해했는가를 알아보고 그에 따라 다음 수업의 진행에 참고하기 위한 자료에 불과할 뿐이지 그 점수가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평생 따라 다니면서 인생의 가치를 품평하는 낙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이 이렇게 까지 된 것에 가슴아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이 충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의 충족은 곧 <쾌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욕구의 충족이 곧 경사입니다. 행복으로 알았습니다. 요즘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제목처럼<가문의 영광>이 어디에서 옵니까? 결국은 욕심의 충족에서 오는 만족 아니겠습니까? 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사실 <욕심>이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나친 자기사랑입니다. 여기에 매이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마땅히 그리해야죠.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화(禍)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나만을 위한 생각과 자신만을 위한 계획과 자기만을 위한 행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욕심>이란 것이 자리를 잡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욕심 다음의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참으로 비참해 지고 맙니다.
[쾌감원칙(快感原則 pleasure principl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 (Freud, Sigmund)]에 의하여 가정된 정신과정(精神過程)의 기본원리입니다. 이 말은 원래 성적 본능에서 시작되는 말인데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구하려는 경향이 있다하여 [쾌·불쾌 원칙]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 욕망이 해소되었을 때를 <쾌>라고 하고 해소되지 못한 상태를 <불쾌>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얻어지는 쾌감이란 지극히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역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쾌락을 위해 사십니까? 그렇다면 원시적 본능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행복을 위해 사십니까? 그러나 이것 또한 기독교적 삶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가장 기독교적 삶이란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행복>과 <기쁨>의 차이입니다. 행복이 곧 기쁨이요, 기쁨이 곧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데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행복>과 <기쁨>은 다릅니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삶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누리고 있는 보편적인<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행복해합니다. 주어진 결과에 대한 만족으로 찾아오는 감정의 고조, 그것이 행복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가져서 행복하고, 얻어서 행복하고, 이겨서 행복하고, 성공해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이란 이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외부적인 조건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에 그 원천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슨 일이 일어나서 기쁘고, 일어나지 않아서 기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마르지 않는 샘물의 원천이 내면에 흐르는 것이 기독교적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라서 기쁘고 가난한 자여서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에게도 기쁨은 하나의 권리입니다.
그래서 늘 기쁨의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항상 기뻐하라"(빌4:4)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위험성은 언제나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적인 기쁨의 삶을 포기하고 세상 적인 행복만을 바라보고, 육신 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의 자세로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이리저리 밀리는 파도처럼 그렇게 세상에 몸을 묻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원초적 기쁨의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쾌락 보다 훨씬 더 내면적이고, 조건적인 행복보다 한층 더 깊이 있는 기쁨을 속으로부터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기뻐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로 인하여 남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소극적인 기쁨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기쁨의 법칙을 아십니까? 내가 기뻐하는 것보다 나로 인하여 남이 기뻐 할 때는 그 기쁨이 배가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기쁨의 법칙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 지으신 것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누구하나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고,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하지 않습니까?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 사랑해요 축복해요 /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그렇습니다. 나의 생각을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게 해야합니다. 나의 행함이 하나님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기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기뻐하게 했는지 아십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잠시동안 목회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바울은 그 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바울은 두고 온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걱정됩니다.
특히 초신자들의 신앙이 흔들려 믿음에서 떨어 질까봐 노심초사하며 데살로니가로 다시 가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디모데]를 보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디모데를 통하여 신앙을 돌보고 고난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돌아 온 디모데를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실한 신앙생활에 대한 보고를 받게 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신앙생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을 들고 감격에 겨워 오늘 편지를 합니다.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여러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하여 기뻐했듯이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나로 인하여 남이 기뻐하도록 <기쁨을 주는 자>의 마땅한 삶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지를 기억해야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광고의 역할은 무척 중요합니다. 광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제품의 판매가 좌우되고 더 나아가서는 회사의 존폐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 모델을 뽑을 때도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광고모델은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광고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든지 아니면 광고하려는 상품과 관련된 분야에서 권위자이든지 그것도 아니면 대중의 시선은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참신함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광고의 모델이 되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모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메이저리그 야구선수인 박찬호 선수의 광고료가 100억을 넘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광고를 하는 것일까요? 그 만큼 모델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요, 그 만큼 기업 이미지 홍보효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족속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광고 모델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벧전2:9에"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전파되어야합니다. 나를 통하여 예수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실천으로 하나님 나라의 광고모델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날 세상은 문자로 된 성경책을 통하여 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보여주는 <살아 움직이는 성경책>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정말 기쁨을 주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광고 모델로 사는 사람입니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고 남이 기뻐 할 수 있는 사람이 가치가 있고 귀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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