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경향성(Spiritual Tendency) /살전2:13-20/ 고재성 목사
2025-08-18 23:18:12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미국의 어떤 지방 호텔에 노부부가 들어와 “혹시 방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호텔 직원은 자기네 호텔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호텔에 전화에 연락을 해 보았습니다. 어느 호텔에도 방이 없었습니다. 그 직원은 “객실은 없습니다만, 비도 오고 새벽 1시니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면 어떻겠습니까?”라며 자신의 방을 내주었습니다. 다음 날 노신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의 사장이 되어야 할 분 같군요”
그 직원은 정중한 인상과 함께 그냥 웃었습니다. 2년 후, 그 신사는 그 호텔 직원에게 뉴욕행 비행기 표와 함께 자기를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가 뉴욕에 도착하자 그 신사는 뉴욕 중심가에 대리석으로 만든 궁전 같은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호텔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것입니다”
그 호텔이 바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입니다. 미국 대통령이나 한국 대통령이 뉴욕에 가면 묵는 바로 그 호텔입니다. 그리고 그 신사는 바로 호텔 주인 ‘윌리엄 월도프 아스토’였습니다. 종업원의 이름은 ‘조지 볼트’였습니다. 그는 이 호텔의 첫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태도가, 자세가, 우리의 경향성이 얼마나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지를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이, 우리의 자녀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태도를, 자세를, 경향성을 피드 백(feed back)해보십시오. 점검해 보십시오. 경향성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떤 태도를 가지고 그 방향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느냐, 즉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삶과 열매는 다르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태도, 어떤 방향,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Ⅰ. 영적 신비성을 놓치지 않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13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의 모습은 결코 화려하거나 근엄한 종교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0장 10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내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는데, 직접 대해 보면 볼품이 없고 말도 시원치 않다고 말합니다.”
(For his letters," they say, "are weighty and powerful, but his bodily presence is weak, and his speech contemptible. NKJV)”
외모도 볼품이 없고 말하는 것도 시원치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고대 작가는 바울을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작은 키에 머리는 벗겨졌고 다리는 휘어져 있었다. 눈썹은 진하게 드러났고 매부리코를 지니고 있었다”
바울의 겉모습에는 청중에게 매력을 줄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과 그가 전하는 말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13절의 공동번역은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which you heard from us, you welcomed it not as the word of men, but as it is in truth, the word of God, which also effectively works in you who believe.)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실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사람 자체에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를 통하여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외모가 수려하거나, 세상적으로 내세울만한 학력이 있다거나, 유명세가 있으면 듣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것은 육적인 태도요, 혼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진실을, 가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들이 집에 돌아 왔을 때 부인들은 아이들을 뒷바라지를 하며 아등바등 다투다가 집안생활에 허덕거리고 지쳐 있는 모습으로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몸빼, 아니면 다 낡아빠진 추리닝, 무릎이 튀어 나온 옷을 입고 있을 수 있습니다. 상의는 식용유가 이곳저곳에 묻혀 있습니다. 머리는 어수선합니다. 그러면 육적이고 혼적인 사람은 마음속으로 실망을 합니다.
자기 직장의 자매들은 세련된 옷에 단정한 머리에 기타 등등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은 뭔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신비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로 봅니다. 그 수고와 그 눈물과 그 피곤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여보! 당신 너무 수고가 많구려”하고 가슴 아파하며 안아 줄 것입니다. 아내 속의 희생적이고 거룩한 어머니성을 발견 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키우기 위해 모든 육체와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그 희생을 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상 속에 영적 신비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앙적인 영역에서의 영적 신비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찬송을 할 때도 그저 노래를 부르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높고 위해 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부른다면 정말 높고 위대하신 주님을 바라다보면서, 그분을 의식하면서 부르게 될 때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어둠이 떠나가고 내 영혼이 소생케 됩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여호사밧 왕이 모압 동맹군에 의해 포위를 당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과 금식하며 찬양대를 동원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성 밖으로 나와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다. 그 때 그들이 부른 찬양으로 그저 소리,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부른 것입니다. 영적 신비성을 가지고 부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적군들의 눈을 혼란케 하여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보스톤 지역에서 ‘A.J. 골든’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교회 목사 사무실에서 힘을 들여 설교를 준비하다가, 피곤하여 그만 의자에 앉은 채 책상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30세 정도의 낯선 사람에게 왠지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낯선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교인들이 목사와 인사를 나누고 다 교회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그 낯선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다. 골든 목사는 안내위원들에게 그 낯선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안내위원이 이렇게 답을 하는 것입니다.
“아, 그 사람이요. 알고 말구요 그 사람은 예수라고 하는 분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깨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 골든 목사님은 회중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앉아계신다고 믿고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도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것으로 알고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는 능력 있게 부흥했고 많은 선교 사업을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님에 제정하신 성찬식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영적 신비성을 믿고 참예하면 구원의 사랑이 회복됩니다. 마음과 육이 치유됩니다. 사명이 회복됩니다. 어둠의 영들이 떠나는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어떻게 합니까? 강보에 쌓인 어린 아기 속에 메시아를 보고 경배를 합니다. 왜요? 영적인 신비성의 태도로 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 시므온은 어린 아기 예수를 보고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1)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겉은 볼품이 없는 육신을 가지고 오셨지만, 그 성육신 하신 예수님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거기서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까?
영적 신비를 놓치지 않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 설교를 들을 때 때로는 사람의 말로, 인간적인 차원에서 듣게 되는 우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신비성의 태도를 가지고 들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지난 주에 오신 목사님은 발음이 조금은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들어보니 얼마나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크므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은 롯이 자기 딸들과 사위들에게 ‘하나님이 이곳을 멸할 것이기에 이곳을 떠라나’고 말하였습니다.(창19:14) 그러자 그 사위들이 장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thought he was joking)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다. 망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레갑 자손들에 대해 조금 길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레갑 자손에 대한 기록은 역대상 4장 12 절에는 ‘레가 사람’으로 나옵니다. 또 역대상2장 55절에는 레갑의 집 조상은 ‘겐 족속’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도 ‘겐 사람’(삿1:16)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막에 거주하던 유목민입니다.
‘예후’는 북이스라엘 9대왕 요람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왕하9:5)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북 이스라엘 7대왕 ‘아합’의 가문을 징벌을 합니다. 아합의 아들 70인과 그 가문에 속한 사람들과 친구들과 제사장들까지도 다 죽입니다.(왕하10:1-11 ) 당시에 남 유다의 6대왕 ‘아하시야’는 아합의 외손자였습니다. 예후는 ‘아하시야’와 그의 형제들 42인을 모두 죽입니다.( 왕하9:27,10:12-14) 이로써 북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남유다까지 우상숭배의 악한 영향을 끼쳤던 아합의 집의 남아있는 모든 자들을 다 죽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합니다.(왕상21:17-25,왕하10:17 )
바로 이때에 ‘레갑’ 자손의 선조인 여호나답(또는 요나답)이 나옵니다. 당시 바알을 음란하듯 섬기던 아합의 집을 징벌하는 예후의 편에 아무도 서지 않습니다.(왕하10:15) 그런데 신앙의 사람 요나답이 예후를 돕습니다. 함께 사마리아로 가서 거기 남아 있는 아합의 남은 자들과, 바알의 선지자와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을 합니다.(왕하10:18-28) 이렇게 해서 악한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로 인하여 야기되었던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종교적인 타락이 완전한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이때에 요나답은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비록 그는 일인자는 아니었으나, 2인자로서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충성스러운 팔로워(follower)를 통해서도 귀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레갑 자손들에 대한 것입니다.
예레미아 35장 1절에 보면,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여호야김은 유다 18대왕으로서 이때는 BC 600년 무렵으로서 유다가 멸망하기 약 15년 쯤 전입니다.
예레미야가 레갑 온 족속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포도주로 대접을 하며 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선조 요나답(혹 여호나답)이 금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나답은 그의 후손들에게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고, 평생 장막에 거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 후손들에게 잘살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라고 하는 조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이런 명령을 하였을까요?
당시에 이스라엘은 바알 종교가 넘쳐났습니다. 당시 농업과 풍요의 신이었던 바알은 이스라엘에게 너무나 유혹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집을 짓고 파종을 하며, 살게 되면 바알 우상에게 빠지기가 너무 쉬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넉넉해지니까 우상으로, 죄로 빠지는 것을 목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결심을 하고 유목생활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명령을 한 것입니다. 요나답은, 그 후손이 풍요와 쾌락을 쫓아가는 한, 바알 숭배를 피할 길이 없다면, 차라리 풍요와 쾌락을 버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것을 명한 것입니다.
유다 6대 왕 ‘아하시야’ 때에 내린 요나답의 명령은 18대 왕 ‘여호야김’ 때에 와서도 그대로 준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렘35:8-10) 이때는 약 240여년이 지난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택하신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준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말씀하시고 명하셔도 하나님의 명령은 내 팽개쳐 졌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고 주님의 종들을 보내서 아무리 명하셔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여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멸망이 이제 눈앞에 다가 온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답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 선조가 명한 명령을 준행하나 유다 백성은 듣지 않는다. 이제 내가 유다에게 선포한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나와의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이다."(렘35:16-17) 그리고 약 16년 후 BC 587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유다 20대왕 시드기야는 비참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레갑의 자손을 축복하십니다. 35장 18절로 19절에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 모든 훈계를 지키며, 명한 것을 행하였으니,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레갑 자손은 BC 721년의 북 이스라엘 멸망 때도, BC 587년의 남 유다의 멸망 때도 살아남습니다. 그들은 집이 없었고, 장막을 짓고 유목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이동이 쉬웠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택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어준 것입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점령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여리고 지역에 가면 이 레갑의 자손들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며,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를 않았습니다.(렘35:12) 반면 이 레갑 자손들은 그의 조상들을 통하여 전해준 신앙적인 말씀을 귀한 말씀으로 받고 240년간을 지켰습니다.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이러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인간적인 눈으로 계속 바라보시고, 인간적인 말로 들으면 그곳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로 말씀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의 놀라운 역사를 많이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Ⅱ. 난관을 뚫고 십자가의 길로 가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으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핍박을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killed) 사도들을 쫓아내었습니다.(drove out)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displease)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hostile)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들을 방해를(keep us from speaking)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들은 죄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길은 이러한 고난이 있습니다. 몇 중 의 방해물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미 바울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고난을 길을 걸어가는 것들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동일한 길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받기를 원했습니다.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환경과 역경을 뚫고 좁은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정도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들을 본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태도요, 경향성이요, 방향성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들이 모두 육신적인 삶의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 8절 이하에 이런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넓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좁은 길을 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의의 길을 갔습니다. 모두 다 세상 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시대의 방향을 역류를 하였습니다. 방주를 지을 때 얼마나 조롱을 받았을까요? “그러나” 노아는 사명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생은 역전이 되었습니다. 존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우상 앞에 드려진 음식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 앞에 풀무불이 있다할지라도 금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십자가가의 길, 좁은 길, 정도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이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높여 주셨습니다. 왕조가 바뀌었지만 한번만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평생 쓰임받게 해 주셨습니다. 형통한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단6:28)
우리가 평양에 가면 꼭 한번 들려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백선행(1848~1933)기념관입니다. 이 분은 한국 여성 최초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르신 분입니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이 그냥 '평양 백과부'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물질로 선행을 많이 했기에 사람들이 <선행>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어려서 안씨 가문에 출가한 백씨는 결혼 1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시집가 자식도 없이 16살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것입니다. 백씨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지극히 가난한 시부모를 바라보면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며 모시고 살았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근검절약을 하였습니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며 사는 것'을 생활 신조로 삼고 억척스럽게 살았습니다. 삯바느질과 길쌈은 물론이고 20리나 떨어진 시장에 가서, 버리는 음식찌꺼기 주워 다가 돼지를 길렀습니다. 콩나물 장사도 했습니다. 이렇게 돈을 모아 베개 속이나 방바닥을 뚫고 그 속에 숨겨두었습니다. 이런 백씨를 보고 사람들은 '구두쇠 백과부', '악바리 백과부'라 불렀습니다.
어느 날 평양 시내에 '백과부가 망했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토지 중개업자 소개로 시어른들과 남편의 무덤을 위해 입을 것 입지 못하고 먹을 것 먹지 못하고 모은 돈 200냥으로 대동강 일대 ‘만달산’을 샀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웃끼리 믿고 살았기에 현장답사도 하지 않고 산 것입니다. 그 땅을 찾아가 본 백씨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산은 풀 한포기 없는 돌산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백씨는 절망감을 뒤로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믿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이 땅을 샀더라면 그가 망했을 텐데, 자신이 그 아픔과 손실을 대신한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자신이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그 돌산은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산임을 알려지게 됩니다. 백씨는 2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일본인 시멘트업자에게 팔게 됩니다.
이번에 친척을 통해 진남포의 수 만마지기 되는 논을 오천 냥을 주고 삽니다. 또 속은 것입니다. 가보니 논이 아니라 쓸모 업는 갯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배심감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으나, “내가 재물이 많으면 게을러질까봐 하나님이 경고하시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그 손해를 내가 지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광물질을 조사하다가 진남포 앞바다에 순도 90%되는 질 좋은 철광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이 백선행 여사의 소유였습니다. 결국 수천 만냥에 팔게 됩니다.
백선행 여사는 이 물질을 들을 가지고 우선 먼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민족교육에 뒷받침하고자 광성소학교에 3백50석지기, 창덕소학교에 3백석지기, 승현여학교에 2만6천평의 토지를 기부합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평양신학대학교도 바로 백선행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백선행의 아름다운 일들이 퍼지면서 1925년 총독부에서는 백씨에게 표창장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백선행은 과감히 거절했습니다. 민족지도자 조만식과 뜻을 같이하여 산정현 교회와 유명한 오산 중고등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의 일과 선행을 많이하게 됩니다. 그녀가 죽을 때 그는 지금 돈으로 350억의 돈을 하나 남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사회를 위해 기부를 하고 헌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자식도 가족도 없는 백씨였지만 그의 영결식에는 학생들은 물론 조만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와 사회 단체요인 등 1만여 명이 그의 뒤를 따랐고, 백선행의 업적을 새긴 기념비가 여러 학교에 세워졌습니다. 그를 어머니라 부르는 청년이 수천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분의 삶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하면 십자가의 삶을 재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관을 뚫고 믿음의 길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오히려 하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존귀한 이름이 되도록 격려하여 주신 것입니다. 늘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게 된 것입니다.
경남 거창에 가면 거창고등학교가 직업선택의 십계이 강당에 붙여 있습니다.
“1.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얼마나 도전이 됩니까? 그런데 저는 오늘 다른 한 가지를 더 전하려 합니다. 시대의 풍조를 역류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과 혈기와 죄된 기질들과 반대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좁은 길로 가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 성질대로 믿습니다. 영은 거듭났지만, 마음과 성격과 언어는 아직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치열한 영적인 전투의 영역은 우리의 성품과 기질에 있습니다. 옛 성질들과 언어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핍박보다 더 큰 문제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 간 것입니다. 성품의 영역에서도 좁은 길, 그리스도의 길,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6절 하반부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 정도를 걸어가고, 시대와 반대정신으로 살고, 우리 죄된 성품에 반대의 길로 가게 될 때 거기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Ⅲ. 목자의 태도, 경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17-20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잠시 떠났습니다. 여기서 ‘떠났다(ajporfanivzw)’는 말은 헬라어에서 ‘너희로부터 고아가 되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채이다’(kidnapped, being taken)로 바꿀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두고 떠날 때 그들로부터 채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의 핍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그 지역을 떠나 베뢰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떠나면 된 것 아닙니까? 이 지역까지 따라와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군대가 힘든 사람은 지역을 보고 소변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한다고 다 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편지를 썼다는 자체가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약함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건설적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오히려 더 사모하는,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 그들의 얼굴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사람에게 섭섭하기보다 뒤에 있는 영적인 세력을 분별하였습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방해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는 이렇게 권면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면서 바울은 성도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았습니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동기에서든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차이는 것과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그 사람 뒤의 세력을 분별해야지 사람과 싸워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아직 부족한 모습들이 있을 지라도 이들이 우리의 소망과 기쁨과 면류관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김요석 목사님의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이란 책에 보면 ‘돌아온 아버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정씨라는 아버지는 8명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며 키워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 그 기쁨을 깨지고 말았습니다. ‘근선’이라는 넷째 아들이 한센병(문둥병)이 걸린 것입니다. 우리 식구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믿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근선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절벽이 나오면 밀어버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떨어져 버리려 합니다. 그런데 이 근선이란 아들이 불안한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 엄마하고 형들하고 동생들을 생각해보세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분이에요. 저 때문에 식구들을 내팽개치시면 안돼요”
이 문둥병에 걸린 아들이 식구 모두의 사랑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근선이는 소록도록 가게 됩니다.
집에 돌아가서 식구들에게 근선이는 죽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사망신고까지 했습니다. 이 아들은 영원히 자신들 앞에서 사라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화살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들들은 모두 결혼해서 대부분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본인과 처는 그때까지 건강했기 때문에 어느 아들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던 집에서 그냥 살았습니다. 그런데 처가 죽고 나자 의지할 데가 없어진 것입니다. 몇 년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럴 힘조차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큰 아들네로 갔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라는 걸 단박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우네 집으로 가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네로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들놈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아들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늙은 아버지는 기꺼이 맞아들여서 편안히 죽게 해주는 자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과 처는 오직 자식들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하지만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처량한 마음으로 소록도에 보낸 아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40년 만에 소록도에 가서 근선이 아들 소식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아들이 소록도를 떠나 영호 마을에서 결혼한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를 끌어안고 우는 것입니다.
“애비는 사십 년 동안 네 소식 한번 알아보지 않았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으냐?”
“처음 소록도에 갔을 때는 너무 외로웠지요. 밤마다 집 꿈을 꾸었어요. 식구들을 미워하면서 내 운명을 원망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되고 난 다음부터는 식구들에 대한 미움을 잊게 되었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도 생기구요, 전에는 그냥 죽고만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해야 할 이유가 생겼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서 나를 떼어놓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한센병자라고 버린 자식만이 아버지를 진정을 받아들여 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문제거리라고 생각하는 가까운 사람들, 자녀, 주일학교 학생이 여러분의 기쁨이요, 자랑거리요, 면류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불편한 사람, 문제거리의 사람을 목자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생한 만큼 큰 보람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마가는 바울의 선교에서 애물단지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때문에 크게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이 마가가 베드로의 수제자가 되고, 마가복음을 기록하고, 바울을 위로자가 되고 거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믿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이 정말로 좋으십니까? 천국백성이 된 것이 좋으십니까? 그렇다면 복음을 증거하시고 영적인 자녀들을 생산하시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처럼 12명의 제자들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이들이 주님 강림하실 때 우리의 면류관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면류관을 쓰고 주님 앞에 섰는데, 개털모자 쓰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가는 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경향성, 어떤 방향성을 가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이 됩니다. 영적 신비성을 놓치지 않는 태도, 경향성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태도를 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난관을 뚫고 믿음의 길, 거룩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시대와 반대정신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어떤 관계에 섭섭해 하지 말고 우리의 면류관이 될 것이며, 기쁨이요 자랑거릴 가 될 것이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의 놀라운 축복을, 십자가 뒤의 영광의 축복을, 영적 면류관을 쓰는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순간순간마다 믿음의 태도를 취하길 원합니다. 영적인 신비성을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환경을 뚫고 믿음의 길을, 정도의 길을 걸어가길 소원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가길 소원합니다. 오늘의 문제와 문제가 되는 관계들이 결국 면류관과 기쁨과 소망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고난 그리고 기쁨 /살전2:13-20/ 이상웅 목사
2023-11-23 01:20:43
지금까지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서 본 사실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기간에도 참 많은 변화를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길어야 6개월 정도 사역하고 떠났음에도 주변 믿는 자들의 본이 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고민은 무엇입니까? 신앙 생활한 연수는 꽤 긴데 좀처럼 변화하지 않고, 변하더라도 너무 더디다는 것 아닙니까?
히브리서 5:12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우리가 이런 처지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을 가진 시간을 생각하면 마땅히 선생이 되어 가르쳐야 하는데, 여전히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취미생활이나 운동을 5년, 10년 했다면 다른 사람을 지도할 만큼의 실력이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지난주에 본을 받고, 본이 되는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따를만한 좋은 본이 있어야 하고, 본이 되고자 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따를만한 좋은 본이 된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의 영광을 구하거나 잘못된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며 사역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본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좋은 본이 있다고 무조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본을 따르는 사람들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어떤 모습이 짧은 시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이 왜 성장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인을 성장케 하는 첫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람에게 들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본받을 만하고 존경스런 신앙인들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어떤 태도로 듣습니까?
이 목사가 이 본문을 어떻게 푸나 감상하십니까?
‘재미가 없다, 예화를 덧붙이면 좋겠다’ 판단하십니까?
예, 설교자는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겠지만,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들은 사람을 통해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설교자의 입을 통해 각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사도행전 10:33입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말씀은 백부장 고넬료가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데려와 그의 말을 들을 때 한 말입니다.
고넬료는 비록 베드로 앞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명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 말씀을 전하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만, 그 시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지만,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자 특권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듣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이 말씀이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합니다.
‘역사한다’는 말은 성경적 표현입니다. 영어로는 work, 일한다, 운동한다, 활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헬라어 직설법 현재형으로 쓰였는데, 이는 계속되는 지속적인 현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활동하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죄가 익숙합니다.
세상적 사고에 익숙하고, 세속적 가치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무리 좋아도 죄에 물든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결단은 실패하고 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죄를 이길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에 의해 쓰였고, 사람에 의해 듣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역사합니다.
어디서 역사합니까? 상황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게 됩니다.
예리한 칼처럼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죄의 습성들을 도려냅니다.
습관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게 행동하도록 일하십니다.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2. 고난 받음
그리스도인을 성장케 하는 두 번째 요소는 고난에 대한 태도입니다. 1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14절이 “왜냐하면”이란 말로 시작됩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은 것처럼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울에게 들은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표시가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표시입니까?
그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전에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가치를 따르게 되면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며 살려면 고난과 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물리적인 고난만이 고난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말씀의 뜻을 따르려니 참고 견디어야 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족들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역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님이 슬퍼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고 3년이 지나도록 신문에 나온 대기업 신입사원 모집 광고를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힘들게 자녀를 양육한 어머니의 원함을 외면해야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외면하거나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 고난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고난은 성도의 정상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7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이면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어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4:22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 말씀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나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지금 겪은 일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박해가 뒤따릅니다. 빌립보서 1:29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입니다.
그러니 고난을 피하려 하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한 지 오래되었으나 변화가 없거나 더딘 이유는 고난을 두려워 피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15-16절입니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한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수없이 경험한 이들입니다.
그랬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주 예수와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번 침례교 총회에서 한 결의문이 채택되었습니다.
최근 대전에서 일어난 교회간의 분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크지 않은 교회지만 50년된 한 침례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바로 옆에는 다른 교단의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가 다른 곳에 예배당을 짓고 이전했습니다.
빈 건물을 100억을 주고 침례교단의 큰 교회가 들어왔습니다.
원래 같은 교단의 교회가 가까이 있으면 안된다는 거리제한 규정도 무시하고 들어와서 모양새가 좋지 않았는지 기존에 잘 있었던 교회를 팔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소문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없이 지내던 교회가 옆에 교회가 이사오고 고통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적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거듭나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순종하지 않으면 교회를 핍박했던 유대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할 때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고난과 섬김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도리어 교회를 핍박하고 방해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란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을 때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로 인한 고난도 피하지 않음으로 성장하는 성도 되시길 축복합니다.
3. 영광과 기쁨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런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바울은 어떻게 여겼습니까?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런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17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잠시 너희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내가 너희를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고, 다시 너희를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사탄의 방해로 무산되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성도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19-20절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의 소망이며,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있는 너희’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계십니까?
무엇을 기쁨으로 여기고, 무엇을 자랑으로 여기며 사십니까?
세상의 영광은 꽃과 같이 시듭니다. 권력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식은 네이버에 이어 이제 AI에게 완전 밀렸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서게 될 사람만이 영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만이 영원합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부흥사 목사님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개털 면류관 쓰고 다니겠냐고 헌신하고 봉사해서 금 면류관을 쓰라고 했습니다.
많은 분이 ‘아멘!’했지만 약간 삐딱했던 저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급이 있냐?, 개털 면류관 쓰고 열등감 느끼는 곳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냐?’ 이런 의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그 의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영광이고, 기쁨이고,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상급입니다.
마땅한 권리를 내려놓고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돌보고, 아버지처럼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던 형제자매들을 주님의 나라에서 만나게 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내가 헛되게 살지 않았구나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내가 기꺼이 인내하며 기도하며 고난받은 것이 참 잘한 일이었구나 감사할 것입니다.
사람이 소망이고, 사람이 기쁨이고, 사람이 면류관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만나게 될 가족들, 지체들, 이웃들을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그 소망을 따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나는 고난에 어떤 태도로 대응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소망과 기쁨과 영광으로 여기는가?’ 점검하고 대답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살전2:13-20/ 문기태 목사
2023-05-04 10:27:20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사람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에게서 똑같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유대 사람은 주 예수와 예언자를 죽이고, 우리를 내쫓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웁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잠시 여러분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고자 하였고, 특히 나 바울은 한두 번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장 13-20절)
여러분의 기쁨과 자랑은 무엇입니까? 또 여러분은 기쁨과 자랑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사람 앞에서뿐 아니라 주님 앞에서 여러분이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되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해 보았습니까? 사람으로 인한 감사가 다른 어떤 것으로 인한 감사보다 더 가치 있는 감사가 아닐까요?
가족들, 직장 동료들, 함께 신앙 생활하는 목장 식구들과 교인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여러분이 자주 만나고 부딪히며 살기에 갈등도 많고 상처도 많이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마운 것이 훨씬 많습니다. 혹은 그 중에 누가 없으면 더 좋을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나 알게 모르게 도움 받은 것도 많고 그가 있으므로 내가 더 사랑하고 섬기며 살 기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께 칭찬 듣고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귀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 13절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감사하였으면 끊임없이 감사하였을까요?
바울의 감사의 제목은 다름이 아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에 바울의 마음에는 끊임없는 감사가 솟아났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얼마나 감격하고 뿌듯하고 행복했을까요?
저도 여러분을 생각할 때 감사한 마음이 솟아납니다. 여러분들이 제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하는 주인공들입니다. 제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의 얼굴이 떠오르며 감사의 제목이 더욱 끊임없이 솟아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 앞에서 바울의 기쁨이며 자랑거리가 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어떤 점을 보고 끊임없이 기뻐하며 감사를 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을까요?
1.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13)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들을 사용하셔서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의 말로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며 설교를 듣기 때문에 설교를 판단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당히 듣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진단하고 내게 최선의 처방책으로 말씀을 주신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수없이 말씀을 듣지만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바울과 바울이 보내는 교역자들을 통해 들은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3절에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설교를 듣다 보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고 여기지 않고 목사가 어떤 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보고 몹시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교인들이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면 말씀을 아주 귀하게 여깁니다. 말씀을 들을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다른 어떤 것과도 그 기회를 바꾸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면 그 말씀을 흘려 듣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반복하여 묵상하며 되새김질 합니다. 입맛에 따라 말씀을 가려 듣지 않고 모든 말씀을 달게 받아 들입니다.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3절 하'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자 그 말씀이 믿는 자들 가운데서 살아 움직였습니다. 큰 능력이 말씀을 듣는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말씀을 들으며 큰 믿음이 그들 안에서 솟아났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어떤 시험도 잘 감당하고 시련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새 힘이 말씀을 통하여 솟아났습니다. 크고 중요한 사명을 잘 감당할 지혜도, 용기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 공급 받았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바랍니다. 사단의 부추기더라도 속지 말고 하나님이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겸손히 그리고 달게 받아 들이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믿음으로 책망 앞에 겸손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믿음으로 감동 앞에 즉각 결단하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믿음으로 도전 앞에 즉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기쁨을 주는 자랑스러운 교인이 되기 바랍니다.
2. 믿음을 본 받아 고난을 견뎌냈습니다.(14)
목회를 하면서 자주 발견하는 일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큰 고난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의심하고 흔들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큰 고난을 만나고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나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고난에 무너지고 주저 앉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서거나 주저 앉으면 믿음이 자라지 못할 뿐 아니라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좋은 상을 받지 못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늘 복을 다 잃어버립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데살로니가에 들러 유대인의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여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불량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큰 소동을 벌이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여 부득이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불과 몇 개월 밖에 사역을 하지 못하고 떠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큰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큰 박해를 받으며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나 묵묵히 고난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는 모습을 눈 여겨 보고 그들도 동족에게 고난을 받았지만 고난을 견디고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고난에 굴복하지도 않았고 고난을 핑계로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으며 고난 가운데 간절히 기도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더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박해의 배후에 사단의 강력한 공격이 주원인임을 깨닫고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영적 싸움을 싸워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바울의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요?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그리스도인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모든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시험과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난 자신 없어!' 하고 뒷걸음질 치면 패배자가 됩니다. 시험과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말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견뎌내고 영적 성숙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시험과 고난을 만나면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큰 고난을 당할 때는 아름다운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고 용기를 내어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난을 잘 견뎌내고 승리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이 와도 물러서지 않고 인내하며 견디면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우리들이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됩니다.
여러분 시험이 올 때, 고난이 덤벼들 때 믿음의 선배들을 본 받아 잘 승리하고 주님 앞에 영광이 되고 큰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소망이며 기쁨이요 자랑스러운 면류관으로 보았습니다.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믿음이 잘 자라고 있으며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들이 몹시 자랑스러웠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그들과 함께 천국에서 받을 영광을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여러분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전도한 사람, 여러분이 양육한 사람, 여러분이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하늘 영광이 임합니다. 하늘에서 칭찬과 상이 임합니다. 당장은 힘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지칠 수 있습니다. 내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고, 희생해도 알아주지 않고, 사랑과 섬김이 헛수고처럼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그들이 있어서 예수님께 칭찬 들을 수 있고 하늘의 면류관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사람들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로 인해 상 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전도한 사람, 나를 양육한 사람, 그분들이 상 받게 하기 위해 내가 예수 잘 믿고 예수를 많이 닮아 갈 때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나로 인해 상 받게 됩니다.
여러분, 헛된 것들을 기쁨과 자랑으로 삼지 말고 교회와 사람으로 자랑을 삼기 바랍니다. 사람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가족을 섬기고, 목장 식구들을 섬기며 VIP들을 섬기는 것으로 인해서도 좋은 상을 받습니다. 불평하지 말고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어려움을 만날 때 잘 견디며 성숙의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그 앞에 설 수 있도록 요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랑의 면류관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전2:13-20/ 남수연목사
2023-04-30 08:47:03
지난 튀르키예 지진으로 시리아와의 접경지역인 안타키아라는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안타키아는 신약성경의 지명으로 안디옥입니다.
이 안타키아에 광림교회가 세운 안디옥교회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번 지진으로 무너졌습니다.
교회가 다시 잘 복구되길 소망합니다.
2천년 전 이 안타키아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디옥교회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순교하고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박해로 도망친 초대교회 성도들이 북쪽 안디옥까지 올라가서 교회를 세웠던 것이죠.
안디옥교회가 얼마나 예수님을 온전히 따랐는지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처음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붙은 별명입니다.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가 바로 이 안디옥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최초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죠.
이렇게 해서 바울의 전도여행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지는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 지방이었습니다.
첫 성 빌립보에서 매맞고 감옥에 갇히는 능욕을 당하고 이후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되죠.
그 결과로 생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지난 주에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복음을 믿고 가정교회가 세워졌지만 유대인들의 행패로 인해 바울은 밤에 몰래 성을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가지 못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이런 사정들을 알아야 바울사도가 왜 이런저런 말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바울의 큰 기쁨이었고 많은 칭찬을 받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의 믿음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복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1절부터 12절까지는 바울사도가 자신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을 해명합니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겠죠.
데살로니가 교회는 특별한 지도자 없이 평신도들끼리 자력으로 커가던 교회였습니다.
그런 데살로니가교회의 약점을 공략하는 유대인 방해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했던 바울사도를 모함했습니다.
위험이 닥치자 교인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교인들을 모아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사기꾼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모함들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모함을 당할 때 적극적으로 나를 변론하고 시비를 가려야 할 때가 있고 참고 덮어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명예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실성과 교회의 미래에 미칠 영향 때문에 적극적인 해명을 하는 것이죠.
나 개인의 억울함이라면 맞서지 않아도 하나님이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13절부터 다시 데살로니가성도들의 신앙의 문제로 관심을 돌립니다.
그런 시험에 넘어지지 않을 만큼 성도들이 바로 서게 된 것은 데살로니가교회가 가진 두 가지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바울사도가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13절,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이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먼저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데는 자기가 전해 준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의 문제점은 과연 설교자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는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말씀을 잘 해석해서 성도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가 다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의 함정은 신자들의 요구를 따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강해는 너무 딱딱하다, 영적인 내용들은 너무 어렵다, 죄와 회개에 대한 설교에 지쳤다, 사는 것도 힘든 데 신앙생활에까지 너무 부담을 주지 마라.
그래서 점점 설교에서 순수한 하나님 말씀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듭니다.
간혹 유명 목사의 설교임에도 듣다 한숨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성경 한 절을 본문으로 읽고 세상이야기, 새로운 정보, 세속 학문, 간증, 그런 것들로 설교 시간을 보냅니다.
신자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놓아야 하는 고육지책이겠죠.
바울사도가 편지로 보낸 설교 한 편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복음과 신앙을 위한 간곡한 권면 이외에 다른 뭐가 씌어 있습니까?
믿음을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바울사도은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쳤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선물처럼 어느 순간 우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황폐한 마음의 불모지에 툭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왜 인간이 죄인인지,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지, 이런 성경의 내용들이 머리 속에 차근차근 쌓여야 합니다.
말씀을 받지 못하고 분위기나 감정에 의존한 신앙생활은 위태롭습니다.
제 정신이 들면 ‘이게 과연 진짜야?’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점점 더 정신 차리면 어느날 교회를 떠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면요, 정신 차릴수록 더 믿어집니다.
구원을 얻을 믿음의 씨앗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좋은 마음 밭에 떨어져야 믿음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 얼마나 잘 설명해 주셨습니까?
올바른 신앙생활로 잘 기경 된 좋은 마음 밭에 말씀이 뿌려질 때 믿음이라는 선물의 싹이 나서 결실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것은 좋은 밭이 되지 않으면 새가 뿌린 씨앗을 낼름 집어 먹듯이,마귀가 와서 구원얻지 못하도록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성경을 잘 배우고, 설교를 들을 때 좋은 땅이 씨앗을 품듯이 받아들이면 반드시 믿음의 싹이 나오고 아름답게 결실하리라 믿습니다.
2.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원을 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고난도 함께 받았습니다.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고난을 위로하기 보다는 바울사도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안심하는 것 같죠?
고난을 이기기까지 했으면 됐다는 것입니다.
한 성도님이 교회에 나오니 더 고난이 많아지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맞는 말입니다.
이전엔 세상 방식으로만 살면 됐지만 신앙이라는 기준이 들어오면 둘 사이에서 당연히 번민이 생기는 것이죠.
그런 갈등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지난 한 주도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과 내 본능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면 내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사회생활에서도 신앙의 기준으로 살아가면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첨예한 갈등을 일으킨 것도 주님의 의로우심이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를 원만하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 세상 방식에 맞춰서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해받지 않는 방법으로 사는 것이죠.
본문 당시 유대 본토의 교회들이 왜 같은 민족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재산을 뺏기고 고향에서 쫒겨났습니까?
예수님만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고, 그렇게 말하고, 그것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똑같이 자기 민족들에게 박해를 당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3장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당하는 이런 고난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시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믿음의 분량만큼, 받은 은혜만큼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적게 주시고 많은 짐을 지우시겠습니까?
또 주님을 위해 스스로 짊어진 고난은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매질을 당하고 발이 착고에 채워 감옥에 갇히는 능욕을 다했죠.
매맞고 손발이 묶인다는 게 얼마나 치욕입니까?
하나님이 왜 복음 전파의 십자가를 진 사도들을 이런 능욕으로부터 구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울사도의 주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마음이 그 정도를 스스로 감당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잡히기 전에 도망갔겠죠.
아예 전도여행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진심으로 바치고자 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으시고 다 받으십니다.
굳이 피할 길을 주지 않으시는 것은 성도의 마음에 있는 헌신을 그렇게 다 드러내시고 주님께서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도 담대함이 생기고 점점 더 확신을 갖고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원하는 고난을 고역으로 생각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수고가 수고로 느껴진다면 거기엔 사랑도 없고 감사도 없는 것이죠.
사랑하면 더 희생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성도들을 보며 ‘저렇게까지 헌신할 필요가 있냐’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고난은 괴로움보다 더 막대한 유익이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기쁘게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이것도 주고 싶고 저것도 주고 싶은 게 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인 것이죠.
저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때로 하나님께서 자꾸 ‘뭐가 필요하니? 뭐가 더 필요하니?’ 물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현재의 보상과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우리는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받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봉사를, 내가 이런 희생을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었다니 너무 잘했구나, 그 기쁨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안일하게 살며 잠깐 이생을 즐기다 가는 것과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인생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고난을 팔자려니 생각하고 괴롭게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한 작은 고난이라도 만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도망칩니다.
사는 것도 고난인데 신앙의 고난까지 질 수는 없다는 것이죠.
기도의 짐, 전도의 짐, 봉사의 짐, 이런 짐까지 지면 인생의 짐보따리가 더 무거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과 고난을 자원하며 살아간다면 그 덕에 오히려 인생의 역경들을 더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짐을 지고 열심히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 내 삶의 그 무거운 짐보따리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더군요.
믿음이 있다면 힘들 때일수록 주님을 위한 짐을 자원해서 지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이런 십자가적인 고난과는 다르지만 우리는 인생의 고난을 겪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있고 큰 병에 걸려서 하나님 앞에 나오셨다면 잘하신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중에서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이 겪는 고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고난은 아닙니다.
이런 삶의 고난에 대해서는 먼저, 이것은 주님을 위해 내 스스로 당하고 있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예수님을 믿고 자녀가 되었기에 이런 문제들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서 잘 풀어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하나님이 내게 고난을 주시냐는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돌아서게 되는 것이죠.
다만 그런 고난도 우리에게 축복인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찾다 진짜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던 문제들도 어느덧 먹구름이 걷히듯 물러간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은 계속 우리와 함께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다 이겨 낼 것입니다.
다만 고난이 올 때 너무 성급하게 결말에 도달하려고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결말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잖아요?
짧은 결말만이 아니라 오히려 긴 과정들이 만들어가는 게 인생입니다.
결말에만 집착하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삶의 과정들을 놓치게 됩니다.
하루하루 그 걸어가는 과정들을 올바르게, 선하게, 감사하게 살면서 인격과 신앙을 잘 세워가는 것이 성도들의 복된 삶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말고 데살로니가 성도들 같은 굳건한 믿음을 지켜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러나 이 외국인 성도들의 의문은 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박해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성도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15절부터는 그런 의구심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울사도는 그토록 사랑했던 자기 민족이었지만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을 가차 없이 단죄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게 된 것은 구속사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안 믿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동반자로 선택 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함께 하시며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구원과 심판에 대한 모든 진리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구약성경이 없으면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으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살아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진정성있게 경외한 적이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의 그 많은 기록들이 이스라엘의 반역하는 행위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 아버지를 알았더라면 나를 알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실은 하나님아버지를 알지도 못했고 경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심판주로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고 대경실색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혼절할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닐테니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종교의 틀에 가두고 자기들이 만든 종교를 신봉한 것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던 게 아닙니다.
그 결과가 15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쫒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런데 18절을 보면 그들의 배후에는 사탄이라는 인격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바울사도가 야반도주로 이별했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다시 가서 만나려고 왜 노력을 안 했겠습니까?
그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당연히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사탄이 막았다고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전파를 강력하게 저지하는 원수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하나님나라와 성도들을 공격하고 도발하겠습니까?
사람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릴 시험들도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일을 힘들게 만들고, 세상으로 끌고 가고.
사람을 통해서 믿음을 약탈하려는 마귀의 작전은 다채롭습니다.
바울사도의 경우는 유대인들의 시기심과 분노를 조장해서 데살로니가로 오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죠.
바울이 꼼짝 못하고 고린도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이런 마귀의 계략에 사실 우리는 꼼짝 없이 당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의 세계에 대해서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대처하면 우리의 승률은 점점 더 높아질 것입니다.
내 감정을 휘젓고 낙담시키고 불안하게 하며 믿음을 약화시키는 상황이나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잖아요?
내 본성이 거기에 말려들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간수하고 말씀대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죠.
두려워하지 말든지, 용서하든지, 근심하지 말든지, 감사하든지, 기도하든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대응할 무기가 다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것을 알았기에 편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날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 편지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으니 마귀가 참패한 것이죠.
우리가 이런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원하는 일이 이뤄지지 않고 원하는 기도응답을 받지 못해도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다른 결과에도 반드시 좋은 점이 있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옳으심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영이 얼마나 원대하시면서도 세밀하신지를 알면 마귀를 대적하되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난번 어느 기사를 보니까 동물 실험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더군요.
동물들은 잠귀가 밝잖아요?
이전의 연구들은 동물들이 자기 보호를 위해서 자다 깨다를 자주 반복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었습니다.
동물들이 계속 얕은 잠을 잔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푹 자는 동안에도 깨어있는 신경이 있다는 걸 이번에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신경이 위험한 소리를 감지해서 얼른 깨운다는 것이죠.
동물들이 푹 자도록 불침번 신경을 따로 만드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잘 우리를 알아서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마귀가 덫을 놓고 시련을 불러온다 해도 다 하나님의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이고 우리의 연단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길 것을 믿고 나 자신도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악의 영들을 대적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그들로 인해 감사하는지가 절절히 편지에 나타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바울사도는 한편 복음으로 인해 자신처럼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애잔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맞게 될 결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확신하기에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있는 보배로운 복음을 기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 길을 함께 가자고 남을 권할 수가 있는 것이잖아요?
바울사도의 결론은 예수님이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것이기에 지금 우리가 잘 살아도, 좀 가난해도,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지 못할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잘 살아도, 또는 가난한 것도 다 무의미한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의 영광이요 기쁨이고 주님 강림하실 때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갔을 때 자랑의 면류관이 될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습니까?
그 아름답고 찬란한 천국에서 내 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라면, 아무도 그곳에 데려가지 못했다면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함께,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예수님을 잘 믿고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의 영광과 기쁨 /살전2:17-20/ 조학환목사
2023-01-02 16:11:20
보통 인간에게는 다섯가지 욕구가 있다고 한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의 욕구, 3단계는 애정과 소속의 욕구, 4단계는 자기 존중의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①생리적 욕구는 말그대로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가장 기본적 욕구로 이것은 기본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②안전의 욕구는 생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욕구이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된다. ③애정과 소속의 욕구는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함께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이다.
④자기 존중의 욕구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귀히 여김받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그래서 남이 나를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⑤자기 실현의 욕구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고 그래서 성취감을 느끼며 보람을 찾고 나아가 남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욕구이다.
낮예배시에도 비슷한 말씀을 드렸지만 이런 욕구들은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발전시키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는 명백한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게 뭐냐? 물론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성을 무시한 철저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본 욕구인 것이다.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거기에 걸맞는 고차원적인 욕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영적인 욕구이다. 영적인 욕구란 물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자하는 욕구이다. 우리 영혼이 구원받고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 우리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욕구,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욕구야말로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이며 세상의 인본주의적 욕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고지선의 욕구이며 최상의 생명의 가치와 기쁨과 평안과 귀함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욕구인 것이다.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 우선은 나 자신이 진정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며, 나아가 이 땅에 죄와 무지가운데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게 되며, 동시에 그런 올바른 영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에 앞서 말한 인본주의적 관점에서의 모든 욕구들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올바른 생명의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 가운데 살다가 마침내 영원한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그저 육신과 물질과 정신적인 영역만을 추구하고 그런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이고 2차원적인 삶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과 물질을 통합하는 통전적인 인격체를 이루어 이 모든 분야의 욕구를 바르게 가지고 바르게 추구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 전인격이 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이런 영적인 욕구가 충만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물론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이런 아름다운 욕구로 충만하여 그로 인하여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데살로니가교인들을 보고 싶은 열망(17,18절)
먼저 오늘 17절을 보자.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내가 어쩔 수 없이 너희를 떠났지만 그러나 결코 너희를 떠난 것이 아니다. 마음은 늘 너희와 함께 있었다. 너희를 위해 정말로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 즉 그는 언제나 성도와 교회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영적인 욕구인 것이다.
이 말씀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에 데살로니가에 전도하다 불과 3주만에 그곳을 빠져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관련이 깊다. 이 때의 상황은 행 17장에 잘 나타나 있다.
행17:1,2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여기서 성경을 강론한 내용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다.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했다. 그러자 많은 헬라의 경건한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믿게 되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더욱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였다.
행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그러나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고 야손만 잡혔다가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베뢰아로 피신시킨다.
행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3주만에 데살로니가를 떠나 온 후에 바울은 늘 데살로니가교회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몸은 떠나 있으나 마음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함께 하였고, 그래서 그곳을 다시 찾으려고 했으나 사정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디모데를 보내어 디모데가 보내온 소식에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운데 든든히 서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바울은 너무 기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몸으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떠나 있었으나 실제로는 떠난 것이 아니었다. 자나 깨나 그들 생각이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오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할 뿐 아니라 그들을 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힘썼다. 그들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믿음이 자라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거기도 환난과 핍박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잘 견뎌내고 있을까? 서로 사랑하며 지내고 있을까? 궁핍과 육신의 질고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교회와 성도에 대한 관심이 곧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고 예수님께 대한 관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소자 중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인 다른 성도들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간의 이런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녀이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자매이다.
그러므로 정말 서로 사랑하고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고 함께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자. 서로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축복하고 위로하고 기도해주며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되어 협력하여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서로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 돌아보고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필요를 채워주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고 힘을 주고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더욱 힘있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자.
2.사단의 방해 공작이 있었음(18절)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기도하며 그들을 보기를 원했지만 사단이 집요하게 바울을 방해하고 있었다. 18절을 보자.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여기서 사탄이란 주로 유대인들은 끈질기게 바울을 따라다니며 복음을 방해하고 괴롭힌 것을 말한다. 심지어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밖에 갖다 버리기도 하였다.(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물론 직접적으로는 유대인들이 한 일이지만 결국 그것은 사단이 유대인을 통하여 하는 일이기에 결국 사단의 역사인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만 사도바울을 방해하고 핍박한 것은 아니다. 1차 전도여행시 구브로에서는 박수 엘루마가 방해하였다.(행13: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2차 전도여행시는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이 핍박하기도 하였다.(행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그밖에 수없는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있었다. 고후11:24-27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래서 때로는 전도의 문이 막힌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사도 바울도 낙심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는 일어났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아름답게 세워져 갔다. 즉 환경적 상황적 육체적 인간적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사탄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사도바울을 넘어트리려고 하였지만 그는 결코 거기에 굴하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동일하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인간적 상황적 많은 장애물도 있다. 사탄이 그런 것들을 교묘히 이용하여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한다. 오늘 교회도 이런 여러 가지로 사단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역사는 분명히 일어난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도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오늘 서구기독교가 위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 그곳에서 하시든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하시든 하나님은 하신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서 사단이 어떻게 교묘하게 역사하더라고 이를 잘 분별하고, 어떻게 위협해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주님은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3.바울의 소망, 기쁨, 자랑, 면류관, 영광(19,20절)
그래서 바울은 그런 숱한 환난과 핍박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힘들때도 많았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감사하고 기쁜 일이 있었다. 바로 복음의 열매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가는 일이었다. 교회와 성도와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하고 아름답고 복되고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었다.
오늘 19,20절을 보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성도들이 바울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스러운 면류관이라고 하였다. 너희가 내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하였다. 사실 안 그런가?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나?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있나? 이보다 큰 면류관이 어디 있겠나?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나?
돈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권세나 그 무엇인 진정한 자랑이요 영광이요 기쁨이요 소망이 되겠나? 그런 것들 잔뜩 쌓아 놓는다고 그게 하나님 앞에서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나?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때 그 얼마나 큰 기쁨이겠나?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면류관을 받겠나?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한 것인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들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게 되는 그런 것들 볼때의 그 기쁨과 보람과 의미가 얼마나 크겠나?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어떤 것들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이 기쁨이었으면 자랑거리였으며 면류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영적인 욕구를 가지자. 정말로 아름답고 복되고 가치있고 의미있고 기쁘고 소망이 되고 영광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써 올바른 영적인 욕구를 가지고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살아가자.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인지,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세상의 다른 것을 추구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가자.
그래서 정말 교회와 성도를 생각하고, 교회와 성도를 서로 귀히 여기고 정말 기도하며 축복하며 위로하며 권면하며 돌보고 섬기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자.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기쁨이 되자. 비록 사단의 방해 공작이 있을지라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지 말고 결국 주님이 승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자. 세상의 무슨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부귀영화나 기타 다른 어떤 것도 자랑거리로 삼지말고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위한 수고를 자랑거리로 삼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주의 역사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소망이 되는 교인 /살전2:19
2019-01-22 12:39:54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거센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노인은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내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딸은 몇 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작은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딸을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풍랑이 높이 이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믿음은 소망입니다.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때 소망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뱅크-풍랑을 이기는 소망)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들러 복음을 전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행 17:5). 그러자 유대인들은 소요를 일으켰고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를 거쳐 아덴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디모데만을 데살로니가에 보내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위로하게 했습니다(살전 3:2).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바울의 마음은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 데살로니가에 있었고 그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힘썼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기를 한 번 두 번 가고자 했다고 했습니다(18절). 사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제 막 눈을 떠서 겨우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보는 그리스도 안의 영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7절) 영아와 같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돌볼 수 있기를 진실로 원했으며, 비록 데살로니가에서 개인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노력에도 결국 데살로니가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계획을 몇 번 세웠으나 그때마다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하여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이는 우리들은 현재의 괴로움을 잘 참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소망뿐만 아니라 기쁨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망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경주자가 상금을 바라보고 달리듯이 이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신앙의 경주를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에게는 그들이 전도하여 개종하거나 새로이 입교한 교인들이 곧 그들의 면류관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자신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것은 다름 아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싶어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기쁨의 근거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성숙하여 또 자녀를 낳고 잘 사는 것을 보기 위하여 수고하듯이 바울은 그들의 발전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과거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현격히 변화된 현재와 영광된 미래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기쁨의 광채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수고로 얻어진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바울의 삶과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복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의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자녀를 생산한 모든 전도자들이 누릴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힘써 이 사역에 수고해야겠습니다.
소망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신앙이 성숙하게 자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온 것이며, 기쁨이라 함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에서 나온 것이고, 자랑이라 함은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바울의 전도사역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 것입니다.
'자랑의 면류관'이란 말 속에는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가 받았던 월계관의 뜻이 있습니다(Bruce).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운동 경기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습니다(고전 9:25;갈 2:2).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날' 대신에 '그리스도의 강림'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강림'(파루시아)은 고위 관리가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 사용되었는데 특히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황제와 같은 지배자가 방문할 때 쓰여졌습니다. 바울은 '파루시아'를 쓸 때에 이와 같이 황제의 방문을 연상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더 크고 화려한 영광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소망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소망으로 인내하는 교회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교회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교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교인 소망을 움직이지 않는 교인 소망을 가지는 교인 소망이 되는 교인이 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세계 야구 시합을 보면서 야구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하면서 야구가 민족의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모두에게 소망이 되는 교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부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고대 문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자기의 옆구리에서 없어진 갈빗대를 찾기 전까지는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여자 또한 남자의 품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몸부림을 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아내를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나의 갈빗대, 키티.”
부부가 서로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서로 아끼며 상대방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 그들은 타인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타인과 하나님의 복을 받는 부부가 될 것입니다.
결혼한 이상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인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서로 상의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는 지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것입니다. 실패할 때나 행운을 차지했을 때나 배필과 그것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부부가 평소에 대화나 의사소통을 한다면 어떤 문제도 무난히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과 몸을 배필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의 것입니다.
비밀과 위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배필을 포옹하면서 이렇게 말해도 수치가 아닌 것입니다. “당신은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다가 황당한 경우를 몇 번씩 당했답니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사모님이 깨우면서 막 바가지를 긁는 것입니다. 잠결에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해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꿈에 목사님 막 멀리 도망가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깨워서는 그럴 수가 있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합니다.
그러니 뭘 잘못했다고 얘기해야 될것인가? “당신 꿈에 나타나서 내가 도망가서 진짜 잘못했소.” 그렇게 해야 될것인가? 어이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가끔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게 참 약이 되었다 합니다. “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구나.” 하고 생각해서 더 잘 할 것 아니겠는가 생각되더랍니다.
서로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갈등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안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저 사람이 없다면….” 하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바가지를 긁어도 내 앞에 있어야지 없다면 그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언제나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하는 일이 영 못 미덥고 시원찮아도 “그래도 저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 아내가 하는 일이 못 마땅해도 “저 사람이 없으면 내가 안 된다” 실제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없다면 상당히 곤란할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분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이 그러더랍니다. “참 우리 남편, 일생 제 속을 썩였습니다. 여자가 몇 명인지 모르고, 집 안에서 같이 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컷 돌아다니다가 늙고 병드니까 집에 돌아온 거에요. 병들어서 안방에 누워있는데 제가 참 구박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죽고 나서 보니까 그저 거적데기 덮어서 윗목에 누워있어도 살아 있는 게 나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속 썩이는 사람이래도 있는 게 낫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부부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부부가 서로 소망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 어떤 신문기자가 그의 부인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원리를 알겠습니까?
부인의 대답에 기자는 그러면 아인슈타인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가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과 그의 진실한 인품을 압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성원리는 모르지만 남편 아인슈타인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믿고 의지하고 소망이 되는 부부가 됩시다.
부모와 자식 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1989년의 일이었다. 중공의 외교부장 화국봉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화국봉 일행의 얼굴이 미국 텔레비젼 화면에 잠깐 비쳐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로스앤젤레스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던 70세의 한국 노인 한 분이 벌떡 일어나면서 저 사람 내 자식이다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집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께서 70세가 넘으셔서 혹시 노망이 드신 게 아닐까 하고 염려를 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텔레비젼 화면에 나타났던 사람은 중공정부의 고위 관리인 중국 사람들이요, 70이 넘은 노파는 한국 사람인데 어떻게 중국 관리가 한국 사람의 자식이 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텔레비젼에 비친 사람 하나가 네 형이 틀림없으니 어서 속히 형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성화에 견딜 수 없어 그 아들은 형의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정의 내력인즉 그들이 중국에 살고 있었던 1945년에 해방을 맞았고, 큰아들은 대학 졸업반에 있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기로 하고 가족들만 먼저 서울로 왔으며, 중국은 모택동 세상이 되어 그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중국을 벗어날 수 없어 서로 이산가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중국에 남아 있던 아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국에 동화되었고 중공 외교부의 고위직에 올라 화국봉을 수행하고 일본을 공식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며, 서울로 온 가족은 둘째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헤어진지 3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70고령의 어머니는 어떻게 텔레비젼에 비쳐진 순간의 모습을 보고서 자기 자식인 줄을 알았을까요? 어머니는 내 자식을 아는 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자신의 자녀들을 아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보모가 육신의 자식을 알아보듯이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십니다. 영육 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2)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 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간에 서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구역에서 속회에서 기관 모임에서 에서 서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어렵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을 때가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때마다 언제나 상기해야 될 것은 우리는 서로 소망이 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서로 사랑하고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 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 16:3)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장막제조를 업으로 하는 부부였는데, 실로 이상적인 크리스찬 부부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성경에 정통했습니다. 행18:26에 보면 "그가(아볼로)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씌여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성경에 정통하여, 전도자 아볼로를 집에 청해 보다 깊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들 부부는 집 교회 창설자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 (고전16:19)라고 합니다. 현대의 가정 집회와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부근의 사람들이라든가 신자들을 청하여 집회를 열어, 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집의 교회"를 이 부부는 가는 곳 어디에서나 만들고 복음 선교를 위해 힘썼습니다.
부부가 한가지로, 자기들의 생명까지 내어 놓고 남을 위해,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종을 위해 진력했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롬16:4)라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 (요15:13)을 땅에서 행한 사랑의 부부였습니다.
이외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롬 16:9)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21)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몬 1:1)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 1:24) 한 모두가 바울 사도의 소망이 된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서로 도와 줄 때입니다. 진정한 자랑,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부부의 심정 부모 자식의 심정 목자의 심정으로 서로를 대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누리는 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쁨입니다. 부부간에 부자간에 목자와 성도 간에 성도 서로 간에 누리는 기쁨, 곧 다른 사람을 돌볼 때 누리는 기쁨은 오직 예수님 믿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의 기쁨입니다.
부부간에 서로의 소망이 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망이 되고 성도 간에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소망이 됩시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박)-3 /살전2:13-20
2011-01-12 16:15:28
전도자의 영광과 기쁨
저는 바울을 생각할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바울의 모습에 비추어 저를 바라볼 때에 너무도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과 저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무모한 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모습을 흠모합니다. 바울과 같은 종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는 바로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입에 발린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진실로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기쁨 속에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적인 명예나 부귀 영화가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요즘은 교회 목사라고 하면, 그렇게 무시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 시대만 하더라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그것은 부끄러울 정도로 무시당하는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갖은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성령의 위로가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복음을 전함으로 예수를 믿고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져 가는 성도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살전3:7에도 보면, 바울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그들이 주 안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제는 살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서 유명한 목사가 되는 것입니까? 예배당 하나 번듯하게 짓는 것입니까? 넉넉한 사례비를 받아서 풍족하게 사는 것입니까? 성도들이 대접을 잘 해주는 것이겠습니까? 무엇이 목회자의 가장 큰 기쁨이겠습니까?
목회자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워지고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 안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바로 자신이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해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 믿음 안에서 온전히 자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습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이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저에게 그런 존재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장차 제가 하나님 앞에 가서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저를 말씀의 종으로 세우시고 강단에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가르치는 자로 세우셨는데, 여러분들이 그 말씀 위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가지 못했다면, 저는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의 성공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믿음 위에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제자들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저를 성공한 목회자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있어서도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이를 위해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어떻게 해서 바울에게 그러한 귀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13절로 가보면, 바울이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드리는 감사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십니까? 저의 입술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계십니까? 아니면 경험도 없고 인생의 연륜도 부족한 한 젊은 목사의 말로 듣습니까? 여러분 솔직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오십니까? 잘 모르시겠다면,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에 그 말씀이 내 생각과 삶을 바꾸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만약에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생각과 고집들이 꺽어지고, 버려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말씀들로 인해서 지금까지 바꾸지 못한 내 말이나 행동이 바꾸어진다면, 그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강사나 연설가가 아닙니다. 강사나 연설자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듣는 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강사나 연설자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 여러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거의 빠짐없이 청와대 대변인이 나와서 하는 말들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들은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그의 말은 청화대의 입장이며, 대통령의 말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들은 오르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의견이 개입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자가 목사인 것입니다. 그냥 말씀만 읽어서 선포하지 않고 설교를 하는 것은 개인의 의견을 덧붙이기 위함이 아니고,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설교 시간에 감동을 받을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마음속에는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의 대변자가 아닌, 강사로 생각하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만을 정확하게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말씀을 한 인간 설교자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감동이 되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감동이 안되면 거절해도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에 들든지 아니 들든지, 우리는 그 말씀을 엎드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이 가끔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서는 한 집에 들어가 소리칩니다. ‘어명이요!’ 그러면, 그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엎드려서 그 어명을 받습니다. 혹 그 어명이 사약을 내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왕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고 그 사약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왕의 말을 받는 태도입니다. 거기에 어떤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왕의 명령이기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납득이 가지 않아도 거기에 불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앞에 서 있는 목사의 말을 그렇게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압니다. 그것은 목사마다 같은 말씀을 가지고도 설명하는 것이 다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말이 맞는 말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말씀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저 목사의 말이 맞는 것 같으면 받아들이고 (아멘하고) 내 생각에 저 목사의 말이 맞지 않으면, 노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슬픔입니다.
도대체 누가 참 하나님의 종인가? 도대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가? 우리가 그것을 판단하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바울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거짓 교사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도리어 바울이 거짓 사도라고 매도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복음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백성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참 복음이 승리함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순간에는 분간하기가 좀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설교자가 누구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있느냐를 보면 됩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 교사인 것입니다. 살전2:4-5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은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썼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말들, 우리의 마음에 쏙 들게 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앞에 서 있는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저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제가 바로 말씀을 증거해야 여러분도 바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눈이 활짝 열려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알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말씀을 가감하지 않니하며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하지 아니하며,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결과는 바로 말씀의 역사였습니다. 13절 하반절에 보면,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말씀’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에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 말씀을 받을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히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의 역사가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본 받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의 교회로부터 어떤 본을 받았습니까?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너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그들이 본받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고난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았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따라 저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자기 나라 사람들부터의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에의 순종을 세상적인 축복으로 연관을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말씀에의 순종 = 축복’ 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대로 사는데도 축복을 받지 못하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이 과연 순종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까? 그 다음에도 베드로가 순종해서 과연 그렇게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셨고,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그 많은 물고기들은 세상적인 축복이 아니고, 그를 통해서 주님이 부르실 그 영혼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면 수천명씩 주님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고 나서부터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자신과 함께 고난을 받자고 말하는 것입니다.(딤후1:8&2:3)
그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있어서의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었습니다. 19-20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어서 성도들이 바로 영광이요, 기쁨이요, 면류관이기 때문에 그들이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역시 자신들에게 그 생명을 전해준 전도자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고 빼어줄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계가 그렇게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위로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이요, 저의 상급입니다. 오직 여러분들에게 참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저의 모든 힘을 다 하겠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생각과 삶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이 깨어지고 그 말씀 앞에서 여러분 자신이 부인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에 우리의 삶에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찾아왔던 그 고난이 , 또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찾아왔던 그 고난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중에도 서로가 피차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그러한 교회 공동체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스스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친구입니까, 원수입니까?/살전2:17-20,3:13
2001-12-04 17:48:42
저는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가족이 그리워지고, 교인들이 보고싶어집니다. 세미나에 참석을 하면, 주최측에서 좋은 식사를 제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음식을 대하게 되면, 나만 그런 음식을 먹는 것 같아, 참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언젠가 달라스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해서, 제 앞에 앉으신 어떤 목사님에게 저의 이런 느낌을 말씀드렸더니, "목사님은 참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군요! 목사님 교인들은 참 복받은 교인들입니다!" 하시더군요. 제가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좋은 음식이 생기면, 그걸 먹지 않고, 온 식구가 다 올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70년대의 저항시인인 김지하라는 분은, 교회를 "밥상공동체"라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17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잠시 여러분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18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고, 특히 나 바울은 한 두 번 가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습니다. 19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살전 2:17-20).
바울이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그토록 그리워했을까요? 오랜 정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것을 받은 것도 아닐 텐데...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싶어하고, 그들을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게 만들었을까요? 그건 바로 영의 양식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본문 1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영광, 목회자의 가장 큰 기쁨은, 목회자가 전하는 말씀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순종하여, 복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영의 양식을 함께 나누는 일이요, 교인들이 그 양식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나고 성숙된 삶을 사는 것을 볼 때, 목사는 영광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접대하는 일에 분주해 말씀 듣는 일에 소홀한 마르다보다, 그런 일 잘 못해도 말씀 듣는 일에 열중했던 마리아를 더 칭찬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에 깊게 깔려 있는 하나의 특징은 임박한 종말론입니다. 2:19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또 3:13에서는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산 사람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품었으니, 배우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임박한 종말의 사상은 예수님에게로 소급이 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누이인 마르다가, 늦게 도착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이렇게 원망합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 11:25-26). 예수님도 종말이 곧 오리라 믿으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0예수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사람 둘이 그들 곁에 서서 11'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행 1:10-11). 예수님이 분명히,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셨고, 또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들도 "예수님이 우리 시대에 오실 것"이라고 가르쳤고,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리라 한 예수님이 오시질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착각하신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잘못 들었나?"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는데, 사도들이 하나 둘씩 순교들 당하고, 신자들이 적지 않게 처형을 당하고, 나이든 신자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데도, 오리라 한 예수님은 오시질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언제 다시 오실까?" 이 문제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내린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금까지 내려온 결론은, "아마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때일 것이다 (마 24:14). 그러나 종말은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 (마 24:43-44).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36...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42그러므로 깨어 있어라'"입니다 (마 24:36, 42). 이 임박한 종말의 문제는 지금도 해결하기 어려운 신학적 난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초대교회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 위기가, 교회를, 박해 속에서도 성장하게 하고,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되게 한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할 순 없었지만, 임박한 종말을 거짓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임박한 종말의 사상은 크리스천의 삶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첫째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싸우지 말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슈가 발생했을 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우리의 영생에 관련된 문제냐?"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생을 가로막는 일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판단은 주께 맡기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의무에 깊이 관심하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건 종교 영역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입니다.
TV의 Talk Show를 가만히 보면, 자기 일이 아닌데도, 거품을 물고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쇼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황당무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남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종교에 관한 한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 3:9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사실 이건 바울의 창작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서에 쓰여져 있는 말입니다. 그는 단지 시편 14편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만큼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남을 판단하지 말고, 네 잘못이나 깨닫고 고쳐라"하고 말씀하셨고,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하는 군중을 향해,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책임 있게 살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돈, 돈!"하며 살아갑니까? 아무리 좋았던 관계도 돈 때문에 틀어지고, 돈 때문에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도 살해하고, 돈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이혼하고, 용돈 적게 준다고 자녀가 가출하고...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좋아야 할 관계들이 깨집니까? 그런데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했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함께 나누어 가졌습니다 (행 2:44-45).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곧 오실지도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종말이 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거 다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크리스천은 돈 있다고, 사치를 부려서는 안됩니다. 재산을 어느 자식에게 얼만큼 물려주어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청교도 정신이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donation 문화가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밝게 하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래도 이 세상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곳이라는 점을 일깨워주어 온 것입니다.
사실 책임 있게 산다는 것은 돈에만 국한 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 활동에 다 해당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 에너지, 재능, 지혜...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왜 내 인생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하느냐? 그건 종말이 언제든지 올 수 있고, 그때에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계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 즉,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싸우지 말자", "판단은 주께 맡기자", "책임 있게 살자"는 생각이 그리스도인의 lifestyle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칼로 위협하던 로마제국이 도리어 그들의 삶에 감동을 받아 백기를 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많아지는데, 사회는 왜 이 모양이냐?"하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건 크리스천은 많은데 Christian life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고, 구원해 주셨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살전 2:12). 에베소서 2장에서 그는 또 이렇게 증거합니다. "8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0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2:8-10).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리스천다운 삶을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3주 동안 짧은 인연을 맺었지만, 그들을 몹시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그들을 그토록 그리워한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 말씀이 그들의 삶을 바꾸어놓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리켜서, "여러분이 나의 영광이요 자랑입니다"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도적 같이 임할 그날을 생각하며, 죽고 살 문제가 아니면 싸우지 않고, 판단은 주께 맡기며, 책임 있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항복할 때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그분께 항복한 사람은, 마지막 날 친구로 드러날 것이고,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자기 주장을 고집한 사람은, 마지막 날 원수로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친구입니까, 아니면 그분의 원수입니까?
한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되면/살전2:17-20 2001-11-06 09:34:11 제가 95년도에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도시에서 저는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살피며 사도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2000년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도시에 들어갑니다. 생전 처음 가보는 곳입니다. 아마 속으로는 걱정을 하면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곳에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곳을 가든지 먼저 유대인을 상대로 전도를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반응이 매우 좋아 3주 동안 날마다 가르치며 전도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도 들어와서 들었고 유대인과 가까운 이방 사람들도 들어와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헬라 사람들도 예수 믿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귀족이나 상류층에 속하는 귀부인들 다수가 예수 믿고 바울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이 질투를 해서 드디어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굉장히 위험에 처했습니다. 결국 예수를 처음 믿은 사도 바울의 제자들이 사도 바울을 권면해서 밤중에 그 도시에서 빼돌려 다른 도시로 보냈습니다. 그 후로는 바울이 다시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새로 탄생한 개척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좀더 격려하고 위로하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편지를 쓴 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그후 바울이 들은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이 빠져 나온 후로도 핍박을 받으면서 예수를 잘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남편에게 박대를 당합니다.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또 예수 믿은 몇몇 사람들은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합니다. 이렇게 몹시 어려운 상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3주 동안 복음을 듣고 갖게 된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핍박을 받았지만 기뻐하면서 신앙생활을 했고, 게다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이 너무 흥분하고 감격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9절, 20절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 누구냐? 우리의 기쁨이나 우리의 면류관이 누구냐? 그의 강림하실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데살로니가 교인 너희가 아니냐? 너희야말로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너희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이 말씀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감격해 있었을까? 얼마나 흥분되었을까요?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습니까? 3주밖에 안 된 짧은 기간에 태어난 새로운 영적 생명인 그들이 지금 핍박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겠습니까? 이때 바울이 같고 있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19절 20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1. 분명한 재림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세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은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모시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구름 사이로 멀리 멀리 하나님 나라를 향해 승천하시는 주님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그 때 천사가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본 이 예수님이 나중에 이 모습 그대로 다시 세상에 오신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내가 속히 오리라." 주님이 꼭 이 세상에 재림하셔서 이 악하고 더러운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우주에 건설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바울은 그 재림을 너무도 분명하게 믿었습니다. 그 날이 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뜻을 다 펴보지 못하고 꺾이는 슬픔을 당해도 절대로 기가 죽지 아니하며, 절망하지 아니하며, 자살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그 날이 되면 나의 슬픔, 나의 고통을 주님이 다 위로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도 바울은 그 날을 마음에 그려볼 때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짧은 한 평생을 살면서 그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을 위하여 다른 형제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물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의 젊음을 온통 바쳐 순교하면 주님오시는 그날 그 영광이 너무나 황홀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숱한 매를 맞아가며 수없이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어떤 축복과 상급과 칭찬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바울이 압니다. 그 중에 특별히 데살로니가 교인 때문에 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을 칭찬, 상급을 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너희가 바로 나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너희가 나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뛰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국가적으로 경사인지 모릅니다. 서로의 정치적인 견해를 뛰어 넘어 야당이니 여당이니를 따지지 말고, 한국인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온 국민이 경축할 일이요,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노벨 평화상과는 비교가 안 되는 상을 탈 사람들이 우리 중에도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주실 그 칭찬과 상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영원 영원토록 광채가 나는 상이요, 영원히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일이요, 영원히 자랑이 될 만한 축복입니다. 주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주께 맡기고 살기 좋은 환경을 버리고 해외 그야말로 비참하고 어렵고 힘든 땅에 가는 것입니다. 미국이라고 하는 그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젊은이가 그 나라를 등지고 못살고 헐벗고 미개한 한반도로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또 미개한 아프리카로, 동남아시아에서 땀을 흘리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주님이 주실 칭찬과 상 하나로 모든 고통과 서러움과 아픔은 깨끗이 물러가고 영원토록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감격의 밑바닥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2. 한 영혼이 구원되는 것을 하나님이 너무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도해서 예수 믿은 그 사람, 하나님은 그 한사람을 너무 기뻐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문 밖에 나와서 기다리십니다. 누가 돌아오는가?, 누가 회개하고 예수 믿는가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울이 전도해서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감격하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오죽하면 천국에서 천사들과 많은 구원받은 성도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겠다고 하셨겠습니까? 돌아온 영혼, 구원 얻은 영혼!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반드시 칭찬하실 것을 바울이 압니다. 상을 주실 것을 압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하나님은 전도 된 한 심령을 향해 너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가장 약한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전도 하셨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여러분을 전도한 사람은 여러분 때문에 엄청난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누구를 전도하였습니까?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길은 전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로 하여금 한사람이 주님께로 돌아 왔다면 그것은 노벨 평화상 받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한영혼 때문에 주님이 반드시 나에게 상을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집니다. 전도 된 그 사람은 그만큼 소중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흥분! 그 속에는 3. 내가 전도한 그 한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열심히 전도했다고 하지만 몇 십 명인지 몇 백 명인지 확실히 모릅니다.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적은 수의 사람,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을 놓고 왜 바울이 그처럼 흥분합니까?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질 놀라운 사건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에 보면 바울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 마게도니아 전지역을,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리스' 전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 때문에 그리스 반도가 들썩들썩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만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전도했습니까? 애나 키우는 초라한 아주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겉보기에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구원받은 것 하나 만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주머니 때문에 자녀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고, 그리고 이 아주머니를 통해서 앞으로 2, 30년 동안 예수 믿고 돌아오게 될 사람이 얼마나 많을 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의 자녀들이 예수 믿고 나서 자란 후에 어떤 인물이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자녀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 자녀의 자녀를 다 계산하면 100년 동안 도대체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지 계산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하신 것 아십니까?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전도한 한 사람이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이며 어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아무도 상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다볼 때 그 한 사람이 엄청난 존재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전도자를 꼽으라면 자타가 다 빌리 그래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도했을까를 물어 보면 억 단위를 이야기합니다.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이런 마이크 시스템, 비행기, 자동차 등 모든 현대 문명의 이기를 다 동원해서 전도를 4, 50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을 억 단위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예수 믿은 사람이 적어도 몇 백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 목사를 예수 믿고 전도자로 만든 무명의 전도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 책을 보니 "모다카이 햄"이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빌리 그래함이 19살 때 그가 살던 조그마한 마을에 그 전도자가 와서 천막을 치고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가자 빌리 그래함도 함께 가 보자고 해서 왔습니다. 그날 "모다카이 햄"이라는 전도자가 빌리 그래함 목사를 주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예수 믿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더니 빌리 그래함과 친구 몇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안수기도 해 주면서 축복했습니다. 집에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전도자가 됐는데 모다카이 햄 목사님은 빌리 그래함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이 모다카이 목사를 보시고 무엇이라고 그러실 것 같습니까? "이리로 좀 와 봐라. 너는 이 앞에 종려나무를 들고 흰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저 큰 무리가 보이니? 저 사람들이 다 네가 전도한 사람이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그렇게 많이 전도를 못했어요." "네가 빌리 그래함을 전도하지 않았니? 네가 전도한 빌리 그래함, 너는 한 사람을 전도했지만 그 한 사람 때문에 지금 수백만 명이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왔잖아. 한번 봐라. 얼마나 대단하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이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니라." 금 면류관을 그에게 씌워 주면서 주님이 칭찬하시게 될 그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모다카이 햄 목사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정신을 잃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도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우리가 다 모릅니다. 한국 이야기를 한 번 합시다.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라고 하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섬에서 그런대로 지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괜찮게 사는 집안에 딸이 하나 태어났어요. 문씨 집안입니다. 그래서 딸 이름을 "중경"이라고 지었어요. 문 중경. 그 딸이 그 섬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있는 중도라고 하는 섬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정씨 집안에 시집을 간 그녀는 참 행복하게 살 줄을 알았는데 그만 애가 안 생기는 것입니다. 5년이 지나도 7년이 지나도 애가 생기지 않자 드디어 자식을 기다리는 시부모로부터 엄청난 구박을 받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되는 모진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너무 구박을 받자 결국 견디다 못해서 가출을 해 버렸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섬에서 죽을 게 아니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에나 가서 죽을 생각을 하고는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용산역에 내렸습니다. 갈 데가 없지 않습니까? 이제 죽으러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리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여기고는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에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범 목사님이 인도하는 전도집회였습니다. 무엇이 좋아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손뼉을 치고 춤을 추는지 참 희한한 광경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뒷자리에 엉거주춤 앉았습니다. 그러다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복음을 그 시간에 이 자매가 들은 것입니다. 듣는 순간 성령이 그 마음을 활짝 열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도록 만들었습니다. 눈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니 정말일까? 정말 나 같은 것도 사랑 하실까? 애도 못 나서 구박받은 나 같은 것도 사랑하실까?' 하는 질문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하는데 사실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문중경이라는 자매의 마음이 완전히 새 마음으로 거듭났습니다. 자살하겠다는 생각은 싹 날라가 버리고 내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소중하다면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성범 목사님이 목회하고 계시는 목포의 교회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한참 전도를 하다가 생각해보니 자기를 구박하던 시댁이 살고 있는 중도로 돌아가서 그들을 전도하자는 생각이 들어 배를 타고 중도 섬에 왔습니다. 사람들이 환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굉장히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동네 어귀에 조그마한 마당에 서서 찬송과 성경을 손에 들고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폼을 잡고 서면 전도인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을 끌어 모아야 전도를 할 것 아닙니까? 그 당시에 제일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던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이 찬송을 부르자 별 구경 거리가 없던 섬이라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들었겠습니까? 몇 십 가구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모였습니다. 애 못 낳는다고 구박받던 여자가 갑자기 변신을 해 가지고 와서 미친 사람처럼 찬송을 불러제끼니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이 여자가 복음 전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거기서 재미를 보자 그 다음에는 지도로, 그 다음에는 암태도로, 배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공산당이 그 섬에까지 들어와 예수를 믿는 다고 해서 이 문중경씨 잡아다가 총살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에 올려진 순교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대로 가버렸습니다. 그 사람 이름은 역사책에 없습니다. 교회사 책에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사역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문서가 없습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섬 섬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부인을 통해 예수 믿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목사가 된 사람이 68명입니다. 상상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목사 중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 부흥을 주도하고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거목들이 몇 사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결교의 유명한 부흥사였고 얼마 전 총회장을 하고 한기총의 지금 책임을 맡고 있는 이만신 목사님도 그 부인에게 전도받은 섬내기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 3, 40년 동안 한국의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붙인 위대한 전도자가 있습니다. 그 분을 통해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한국 교회의 중요한 자리에서 리더쉽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캠퍼스가 달라졌습니다. 바로 C.C.C 김준곤 박사입니다. 그 사람이 그 섬의 출신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문 중경이라고 하는 자매는 김준곤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타날 줄 몰랐습니다. 그저 젊은이들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복음을 들은 김준곤 목사님 때문에 수십 만 명 아마 수백 만 명이 복음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서 은혜 받고 삶이 달라진 한국교회의 기둥들이 여럿 있습니다. 홍정길 목사, 옥한흠 목사 이동원 목사, 하용조 목사님도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목사님들을 통해서 한국 교회가 얼마나 지금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문중경 자매를 부를 것입니다. "너 이리 좀 와서 보아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 전부 서 있는데 다 네가 전도했구나. 사랑하는 딸아, 네가 전도했구나. 정말 귀하다." "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안 했습니다." "아니야, 너를 통해서 예수 믿게 된 누구누구 때문에 저렇게 많은 열매가 천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랑하는 딸아, 정말 수고했다." 주님이 그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그 머리에 면류관 씌워주시는 그 날이 오면 이 여자가 정신을 잃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지금 자기가 전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놀라운 이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몇사람을 전도했습니까? 한사람밖에 없습니까? 그러나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모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자랑이 되는 일이면 가장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우리의 기쁨이 되는 일이면 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쁨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아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짧은 한평생 쌓아놓은 재산에 속지 마십시오. 재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집니다. 내가 세상에서 명예롭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권력이나 명예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내 명예가 사용이 됐다면 그 때야 그 명예가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 재물이 쓰임 받았다면 내가 쌓아놓은 재물이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우려는 해외 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분이 어려운 중에도 동참하셨는데 그 일에 동참하신 분들은 일평생 그 기쁨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자랑이 될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보시고 칭찬하시면서 면류관을 씌워줄 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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