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데살로니가서 설교 모음

데살로니가전서 2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8. 11.
728x90
반응형

 

 

지치지 않는 수고 /2:1-7, 살전2:1-3/ 김형익 목사

2021-05-19 03:31:00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세 차례에 걸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진리를 붙잡음으로써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여 드러냈고, 니골라 당의 가르침과 행위를 용납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신 일,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심한 책망을 받은 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살펴볼텐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 수고, 인내에 관한 주님의 언급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르는 상급에 관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상고한 바 있으므로, 주님의 책망 부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1. 주님이 아신다(2-3)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에 대한 이 묘사는 1장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주님에 대한 묘사,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1:13a,16a)라는 묘사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묘사는 주님께서 일곱 교회, 즉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 사역자들을 붙잡고 계시며, 주님의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기에, 교회의 모든 일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는 내가 안다라는 언급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2절에서 내가..알고라고 하고, 3절에서 아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에게도,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2:9)라고 말씀하시지요.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로 이어지는 모든 교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는 내가 안다는 표현이 모두 사용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주님은 그들의 수고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잘못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신다는 이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위로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을 넘어 두려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2. 행위와 수고와 인내(2-3,6)

 

주님은 먼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본문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라고 한 부분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세 명사의 나열은 관용적 서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령 데살로니가전서 1:3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 사도가 ‘(믿음의) 역사(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고 쓴 것과 유사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2절의 세 명사는 3절의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씀에서 세 단어와 연결이 되는 듯 합니다. ‘수고게으르지 아니한 것에 걸립니다. 우리 말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헬라어로 이 두 단어는 같은 어근의 단어입니다.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은 열심히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피곤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역개정역에서 게으르지 않다로 번역한 것은, 과중한 수고를 하다가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일 것입니다. 소위 탈진하여 아 내가 다시는 이렇게 수고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기 사용된 수고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한 수고를 넘어, ‘지치고 피곤하도록 애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를 헬라어로 코피아오(κοπιάω)’라고 읽는데,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배울 때, 코피나도록 수고하고 일한다는 것을 연상하면서 이 단어를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그렇게 열심히 지칠만큼 수고한 것에 대하여 주님이 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번째로, 2절에 인내라는 단어는 3절에 참고라는 단어에 연결됩니다.

 

이 두 단어 역시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뜻 그대로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오래 참는 인내로써 안팎의 어려움들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세번째로는 행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3절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라고 할 때, ‘견디고에 연결되는 듯 합니다.

 

사실, 이 두 단어들은 앞의 두 단어의 쌍들처럼 같은 단어이거나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들은 아닙니다. ‘견디고라는 동사는 ‘(어떤 짐을) 들다, 짊어지다, 옮기다, 메다와 같은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을 내려놓을 생각하지 않고 신실하게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네 행위다라고 할 때, 사도 요한이 의미하는 모든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들(복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2절에서 요한 사도가 세 단어를 나열하지만, 처음의 행위를 뒤의 두 단어, 수고와 인내가 부연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짊어지고 가는 짐은, 지치고 피곤할 만큼 수고스러운 일이고 또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는 에게해에 인접한 큰 항구도시였고, 당시 로마제국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대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신 아르테미스(아데미, 라틴어로는 다이아나) 신전이 유명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큰 소동이 일어났었지요. 그 소동이 일어난 원인은 은으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큰 돈을 벌고 있던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많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자, 자기 사업에 손해가 있을 것을 보고 일으킨 소동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이렇게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들은 아르테미스를 위한 신전을 건축했는데, 파괴와 화재로 두 차례 신전이 무너지고 주전 323년에 세번째로 재건된 신전은 고대세계 7대불가사의에 속한 건축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목록을 작성한 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이 건축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전차(戰車)를 위한 길이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게다가 1세기 말 이 거대한 신전에는 2000명 이상의 여사제들이 있었고 이들은 성전 창기들이었으니 아르테미스 숭배는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압력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의 외적 압력은 이것 뿐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는 황제 숭배에서도 자부심을 가질만한 도시였기에, 에베소에서 장사를 하고 살아가려면, 아르테미스 숭배와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는 일이 요구되었습니다.

 

여기서 6절에 언급되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도 등장합니다. 2:14-15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니골라 당의 가르침은 적당히 타협하여 아르테미스 숭배와 황제 숭배를 허용하는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훈이 발람의 교훈과 연결지어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알 숭배를 하게 했고 제사의식으로서의 음행을 하게 하였으며 그 제물을 먹게 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과 행위를 예리하게 분별하고 판단하여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모든 내적, 외적 압력들 속에서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뎠으며, 게을러지지도, 피곤하여 약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본문에서의 강조는, 그들의 행위, 수고, 인내가 아니라, 주님이 그것들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은 교회의 모든 것,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우리 벧샬롬교회에도 동일합니다.

 

3. 지치지 않는 수고

 

주님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그 의미가 드러나도록 풀어서 말하면, ‘너희가 믿음의 삶을 사느라 감당해야 하는 짐을 내려놓지 않은 모든 일, 너희가 지치고 피곤하도록 애쓰고 수고하는 것, 그리고 지치고 낙심해서 내려놓고 포기하여 게을러질 수도 있으련만 지금까지 인내로써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내가 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우리 자신의 지난 삶에 비추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과연 그만한 수고를 한 적이 있는지요? 탈진할 만큼 주님을 섬겨본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대다수는 직장에서, 일터에서 우리의 일을 감당하느라 지쳐도, 몸이 아파도, 그만 두고 싶어도 여전히 그 일을 감당하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렇게 하셨을 것이고,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직장이나 일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거나 주님 앞에서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삶에서도 돈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주님은 인정해 주십니다. 지금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그것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상, 그것을 너머 주님을 섬긴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여러분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고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그 길을 고수한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예배와 주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되, 피곤하고 지치기까지 감당하면서도 게을러지지 아니하고 약하여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을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단순히 여러분 중 어떤 분들 안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이 아니라, 주님을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불일 듯 일어나게 하도록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목적은 단지 죄책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제 말에 동의하실지도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의 교회 생활을 관찰해보면,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거나 혹은 번영 신학 아래 있을 때, 더욱 탁월한 열심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참된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아래 있을 때,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할 때는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복음 아래 있으면서 율법 하에서 요구되는 것보다 못한 사랑을 주님께 드려서는 안됩니다여러분은 남는 힘 가운데 조금을 예수님께 드리고서 충분히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주님께 찌꺼기와 치즈 부스러기, 감자 껍질이나 안겨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받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동기가 될 때, 사람들은 더 많은 헌금을 드립니다. 또 율법 아래서 벌을 받는다고 하면 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합니다. 그런 상황 아래서는 지치도록 피곤하도록 교회를 섬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아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그것만 못한 경향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러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목숨이라도 드릴 수 있어야 하건만, 일반적으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그만큼 덜 사랑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적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열심히 더 탁월한 봉사와 헌신을 드리자는 것이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자신이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비천한 인간으로 오셔서 목숨을 버리신 사랑인데, 그 무한한 사랑을 받은 저는 여전히 둔감하고 배은망덕하여 마땅히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지 못하였나이다.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를 감당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주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이런 수고와 인내를 드러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한 책망을 듣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그런 수고와 인내 조차 주 앞에 드린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물론이고, 그 행위, 그 수고, 그 인내도 버린 것이 아닙니까? , 정말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얼마나 더욱 회개함으로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4. 경고 그리고 상급 약속(5,7)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에서처럼, 경고와 상급에 대한 약속으로 마칩니다. 먼저 경고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은 먼저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생각하라. 회개하라. 그리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생각하라는 것은 기억하라, 되새기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내 신앙에, 주님께 대한 내 사랑에 문제가 생겼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기도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는 뉘우치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오해하여 듣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지금 잘못 듣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경고는 사실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1)라고 한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이런 유사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기 보다, 언제라도 주님은 성령 안에서 교회에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셔서 교회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신다면, 교회는 그전에도 그러했겠지만 더 이상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여기 주님이 말씀하신 에베소 교회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졌고,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목회를 했던 이 교회는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결국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셨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말입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에는 경고 외에도, 상급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주님께서도 종종 말씀하신 것처럼, 본문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기에, 주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광이고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할 아무 이유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는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님의 말씀은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회에게, 신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상급에 대한 약속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모든 압력과 유혹에 맞서 믿음으로 살고 섬기며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자리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임재를 함께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종말론적 약속입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도록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이기는 자에게는 그 임재의 회복이 약속됩니다. 이 약속은 실제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한다는 의미보다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체험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Beale). 그렇다면, 솔직하게 자문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상급에 대한 주님의 이 종말론적 약속은 과연 의미가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는 참고 견디고 지치지 않는 수고를 한 것에 대한 상급이 고작 그것입니까?”라고 묻고 싶은 분은 안 계십니까? “별로 그 상급은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진 않으십니까?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누릴 것이라는 주님의 이 약속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약속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하여 부부를 이루고 가정을 세워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당연 하듯이,

 

사랑하는 주님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충분히 그 연합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며 살았는데, 이제 약속하신대로 이기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나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그리고 가슴 설레는 축복입니까?

 

에베소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식어버린 가슴으로 주님을 대하면서, 그 가슴이 다시 한 번 주님을 향한 사람으로 불타오르기를 바라는 성도들에게 이 약속은 얼마나 가슴 뛰는 약속이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정직하게 이 약속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5.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우리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주님은 칭찬도 하셨지만, 무서운 책망과 경고도 상급에 대한 약속과 함께 주셨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들 처럼 칭찬만 들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 말씀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두려움과 겸비함이어야 마땅합니다.

 

설령,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라 할지라도 그러합니다. 종종 저는 교회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는 공동체입니다.” 혹은 우리 교회의 예배는 놀랍습니다.” 이렇게 교회들은 세상적 방식으로 과대 광고와 자랑을 하곤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이런 자부심들은 주님의 말씀 앞에서, 특별히 주님의 책망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교회와 성도는 주님의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가지고 주의 말씀대로 주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오직 주를 위하여 지치고 피곤하도록 수고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게으르지 않고 인내함으로 그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처음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여러분의 수고와 인내의 동기가 되게 하십시오. 그렇게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시는 거룩한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한 지치지 않는 수고로써 말입니다.

 

 

 

말씀 위에 선 신앙 (16) - 설교듣기(8) /살전2:13, 17:11/ 김형익 목사

2021-05-16 07:22:15

 

[설교듣기]라는 주제로 전하는 여덟번째 말씀이자 마지막 말씀입니다. 의외로 성경은 설교(하나님의 말씀)를 듣는 것에 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좀 더 다룰 수 있겠지만, 이후에도 별도로 언급할 기회가 많을 것으로 보고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

우리가 오늘 아침에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두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설교를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까요?”

 

데살로니가 케이스(살전 2:13; 1:6~7;2:19~20)

오늘 본문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도의 말, 즉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사도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그 말씀을 사람의 말로 해석하고 걸러서 듣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은혜를 받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사도의 기쁨과 감사가 그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으로 볼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는 내용은 데살로니가전서 1:6~7에서 조금 더 엿볼 수 있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말씀을 듣자 그들의 마음은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환난을 능가하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결과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사도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공히 인정할만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그들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삶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자 곧 바울 사도와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됨으로써 주변의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는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쯤 되니, 사도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향해서 찬사를 쏟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이것은 단지 사도 자신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태도에 우쭐해서 자기를 인정하는 자들을 향한 사랑 고백으로 쓴 말이 아닙니다. 사도 자신은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할 생각이 없었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살전 2:4~5).

 

그는 아첨하지 않았고(살전 2:5)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살전 2:6). 이런 것은 사도가 말씀을 전할 때 가진 일관된 태도였습니다. 거짓 사도나 거짓 교사들이 하던 말이 아첨의 말이었고, 그들이 가진 태도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사도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을 사도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케이스(4:14~18)

우리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케이스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4~18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분명히 사도 자신에게는 사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시험할 만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사도의 이 약점을 인하여 사도를 업신여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도를 천사나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태도로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지녔던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언급했던 육체에 가시와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사도가 지난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 구절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는 것입니다(4:15)

 

. 하지만 이 약점이 간질(뇌전증)이었다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더 심각한 약점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 약점은 사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를 업신여기고 거부하게 만들만한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를 천사나 주님을 영접하듯 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에서처럼, 여기서도 사도는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고백합니다(1:10). 사도는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태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른 태도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 케이스(10:24~26)

한 경우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입니다. 고넬료는 자기에게 보여진 환상을 따라 욥바에 머물고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하인들을 보내, 오셔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환상을 통해서 깨달은 뒤, 이방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러 오게 됩니다. 사도행전 10:24~26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때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다 불러모아 말씀을 듣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베드로가 들어오자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그에게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을 해야 했습니다.

 

고넬료는 사도를 자신과 동일한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대한 것처럼, 천사나 주 예수님처럼 대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왜 일개 갈릴리 어부 출신의 노인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까? 고넬료는 이제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데살로니가 사람들, 갈라디아 사람들의 예와 함께, 고넬료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으며 그 결과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향해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이상하거나 낯선 느낌 혹은 불편한 느낌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태도를 칭송하는 말들을 들어보기는 했는데 주로 전문 부흥사이 한 말이 아닙니까? 소위, “목사에게 잘 해라, 그러면 복받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이 세 경우가 우리를 인도하는 결론이 그저 목사에게 잘 해라입니까? 여기서 이 세 경우와는 좀 다르다고 느껴지는 경우를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간절함과 분별함으로 듣기: 베뢰아 케이스(17:11)

앞의 경우들이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살펴볼 경우는 말씀을 간절함으로 듣되, 분별하면서 듣는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17:11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의 케이스입니다. 지금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을 받는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를 통하여 말씀을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간절함에 분별하는 태도가 더해졌습니다.

 

지금 누가는 간절함과 분별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함과 동시에 비판 정신으로 말씀을 들었다는게 아닙니다. 여기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한 것은, 사도의 말씀을 간절히 듣는 태도의 한 특징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태도로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를 통해서 말씀을 들은 즉시 성경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도의 말에 흠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서 성경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태도는 사도가 말하면 무엇이든지 무조건 다 아멘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 태도는 목사가 하는 말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게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사도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확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수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는 칭송할 만한 고상한 태도였습니다.

 

설교자의 자리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의 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갈라디아 사람들 그리고 고넬료의 경우 뿐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의 경우는 설교자와 설교를 어떻게 동일시하고 구별했습니까? 또 설교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가치가 인정된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그 가치가 인정됩니다. 사도들은 항상 거짓 사도와 거짓 교사들의 활동을 경계하게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분별이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에서 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분별은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그는 그리스도 자신을 전하고 높이는가, 아니면 자신을 전하고 높이는가?” 회중이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이런 분별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6).” 이 말은 무조건 목사에게 잘하라는 식의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전한다는 전제에서 주는 권면입니다. 이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 전할 수 없을 만큼 오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설교자 자신의 관점과 회중의 관점

설교자에 대한 관점은 설교자 자신이 스스로를 보는 관점과 회중이 설교자를 보고 대하는 관점으로 구분하여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자 자신을 보는 관점은, 언제나 고넬료에게 했던 사도 베드로의 태도와 같을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나 주님에게 하듯 그 앞에 절하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을 천사나 주님처럼 영접했다고 해서, 자신이 천사나 주님이 된 듯이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들의 태도를 칭송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자신에게 잘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당한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같은 문맥에서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라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7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회중이 설교자를 보는 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회중은 사도이기 때문에 따르라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8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나 혹은 천사가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결코 그들을 용납 조차 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무조건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무지를 칭송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목사를 통해서 전해지는 설교를 비판적인 태도로 듣는 것 또한 긍정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양 극단의 태도가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한 것을 저는 우려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참된 은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회중의 확증이 요구되는 직분

설교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말씀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교회에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4:11). 목사와 교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주께서 친히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묵상하고 깨달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신학 강의와도 다릅니다. 설교는 단순한 성경 공부와도 구별됩니다. 설교는 그리스도 한 분께 초점을 맞춥니다. 설교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중의 귀와 마음과 영혼과 양심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회중을 통한 검증과 확증도 받아야 합니다. 회중은 설교자가 이 일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준비를 충분히 갖추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평이하게,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잘 전하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설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것이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그 자리에 무자격한 수많은 설교자들이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일반적 원리와 실천적 지침들

이제 [설교듣기]라는 주제를 마치면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일반적 원리와 실천적 지침을 말하겠습니다.

균형: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말라.

먼저 균형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나친 것은 부자연스럽고 어색할 뿐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은 지나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일입니다. 이것이 지나친 태도가 아니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함도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분별하라(7:1, 15~16, 20)

두번째는 분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또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조종당하는 고린도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19~20).”

 

주님께서도 친히 거짓 지도자들을 분별할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런데 좀 더 나가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15~16,20).” 비판이 아니라 분별을 명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분별하는 일은 모든 지도자들을 향해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바, 마태복음 7:21~23은 사실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은 모두 교회의 선지자와 은사와 권능을 행하던 사람들입니다.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설교자와 설교를 구분하되 분리시키지 말라.

세번째 원리는 설교와 설교자를 구분하되 분리시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 무지하다면, 결코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잣대가 되어야 설교와 설교자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그 기준인 성경을 상식이 대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보낸 선지자들을 많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지자의 말과 하나님의 음성을 분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듣기 싫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이라고 여겼기에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이름으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처형했습니다. 마음을 찌른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라.

마지막으로 설교듣기와 관련하여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갈라디아 사람들의 아름다운 본을 여러분의 삶의 모범으로 삼으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사람의 말로 들립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이성과 상식의 귀로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대로(4:2) 믿음으로 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갑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 사역의 비밀과 신비가 존재합니다.

 

주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누누이 말씀하신대로, 영의 귀로 들으십시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리고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비밀 /17:1-3,살전2:8/ 이동원 목사

2014-11-28 11:19:17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 가장 큰 전도의 열매가 있었던 곳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당시 인구 약20만이상)였습니다. 오늘 날 도 이 도시는 데살로니키(Thessaloniki)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지금도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 가는 제2의 도시입니다.

 

바울 사도 일행(바울,실라,디모데,누가등)은 빌립보를 떠나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로마의 유명한 군사도로)를 걸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살로니카 만(Gulf of Salonica)에 위치한 항구 도시 데살로니가(빌립보에서 약160km)에 도착한 것입니다.(지도 참조)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이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약 6개월 미만 체류하며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약 한 달간의 집중적인 사역을 하고 그 후에는 야손(5-6)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일종의 셀 모임으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의 결과는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살전1:9에 의하면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살전1:7에 의하면 그들의 믿음은 마게도냐 인근 지역 교회의 보본이 되었습니다. 살전 1:8에 의하면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도대체 바울 사도 일행이 어떻게 전도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때 바울 전도 팀의 역동적 영향을 암시하는 말씀을 우리는 행17:6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던 그리스도인 일행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주의해 보십시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물론 이 표현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KJV은 이 대목을 아주 흥미롭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These that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전도했기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를 만든 두 가지 비밀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복음적 "강해설교 사역"입니다.

 

본문2-3절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하는 즉시 유대인 회당(바울은 랍비였기 때문에 회당 설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찾아 허락을 받고 3주간에 걸친 말씀 강론 사역을 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런데 이런 바울의 설교 스타일을 가르쳐 오늘날은 강해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읽어 놓고 그 다음 자기 하고 싶은 소리를 하는 설교(제목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읽은 본문을 성실하게 해석하여 그 뜻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 뜻을 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성경 해석이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인가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의 강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그것이 바로 인류의 죄 문제와 구원 문제의 해답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설교를 <복음적 강해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에 근거한 복음의 메시지를 상실하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지요. 흔히 한 교회의 신학적 성향을 두고 대화하며 우리는 그 교회가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보수적이 되는 것도 진보적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적 교회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난 15년 동안 복음적 강해 설교 사역에 성실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신 중요한 이유였다고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사역의 큰 열매가 바로 이런 복음적 강해 설교의 결과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교회의 사역 스타일이나 예배 스타일등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가도 우리 교회에 한 가지 변함이 없기를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성실한 말씀 강론 사역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교회 비전 연구팀에서 승계 리더십의 자격 중에 첫째로 명시한 것이 바로 이 복음적인 강해 설교 사역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지구촌 강단에서는 변함없는 복음의 메시지, 성경적 강해 설교의 생수가 넘쳐흐르기를 기도하십시다.

 

그것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유일한 세상의 소망이십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이 복음의 메시지를 붙들고 선포하는 공동체로 나아 갈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 사랑의 실천 사역입니다.

 

바울 팀의 전도 사역이 위대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탄생시키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시 자기 도시와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밀을 우리는 살전2:8에서 발견합니다.

 

우리가 이 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 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됨이라그렇습니다. 그 비밀은 복음과 함께(복음 뿐 아니라)목숨까지도 내어 주고자 하는 사랑, 이런 이웃 사랑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위대한 메시지이지만 사랑으로 증거 되지 않으면 우리의 이웃들은 복음의 진정성을 믿지 못합니다. 사랑이 복음을 증명하고 복음을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면서도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한 원인이 바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 교회 비전 연구팀이 새로운 비전을 만들면서 고심하며 목회자와 평신도의 동역으로 만들어 갈 우리 교회 미래 사역의 역점 사역으로 명기한 부분이 사회복지 사역의 확대였습니다. 이번에 15주년 기념 마당을 준비하면서도 이것이 또한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15주년 기념 축제의 두개의 초점을 우리는 <선교와 이웃사랑>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파송 선교사님들을 초청하여 미숀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선교지 우물 봉헌식을 하고 단기 선교 파송식을 진행한 것은 변함없는 우리 교회의 선교헌신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 사랑의 소명과 실천 프로젝트로 우리는 15주년을 기념하는 15집의 가난한 가정을 선택하여 집수리하는 웰빙 프로젝트, 15명의 장애 이웃들을 선정하여 취업훈련에서 취업까지 돕는 사역, 또한 15분의 긴급한 의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선정하여 지원하는 사역을 담당했고,

 

지난 토요일에는 장애인과 비 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한 마음 마라톤 대회(4,000명이 참여, 700명의 장애인이 참여함)를 개최하고 그리고 지난 주일의 헌혈 행사에 이어 오늘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목숨을 내어 놓는 주일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숨을 다 살고 그 목숨을 사용하는 기능적 도구였던 신체의 일부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나누기 위한 장기 기증 행사를 갖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1998524일 주일(11년전) 한국 교회내 장기 기증 캠페인에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마련하는 모범을 보인바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한 기관으로 최대 인원인 1,200명 이상이 장기 기증에 동참함으로 KBS 저녁 9시 뉴스에 소개되어 한국 교회, 한국 사회에 장기 기증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복음으로만 아니라 목숨이라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후일 우리의 비전처럼 진실로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실로 한 알의 밀로 기억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장기 기증 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오신 사랑의 장기 기증 운동 본부장이신 박진탁 목사님의 장기 기증의 취지를 설명하는 말씀을 잘 들으시고 많은 성도들이 이 이웃 사랑 사역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사도의 감사 /살전2:13-16/ 곽선희 목사

2014-11-27 22:56:28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라고 하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 중에 세인트 조안이라고 하는 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그런 희곡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성녀 잔다르크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입니다.

 

그 속에 이러한 대사가 나옵니다. 한번쯤 깊이 생각해야 될 그런 대사입니다. 찰스 왕이 조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소리, 소리. 어찌해서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고. 임금은 나야. 네가 아니야.

 

왕인 나에게 하늘의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왜 너 같은 천한 사람에게만 들리느냐? 왜 내게는 들리지 않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 때에 그 잔다르크가 말합니다.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듣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듣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듣지 아니해서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듣지 아니함으로 듣지 못하게 돼 버렸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굴까? 저는 생각합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의 소리, 이성의 소리, 친구의 충고,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이보다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고집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오래 참으심이 있습니다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거역하면 어느 순간에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이것을 성경은 '듣지 못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들을까 하노라.”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강퍅하게 됨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심판받은 사람입니다. 심판받은 사람. 저는 가끔 많은 사람들과 지내면서 보면 '도대체 이런 사람이 있을까?'

 

제가 하도 이 말을 많이 썼더니 제 전용용어라고 소문이 났어요. 구제불능. 구제불능이 아니라 구원불능. 확실히 구원불능한 사람이 있어요.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아이구, 저 분을 좀 만나주시지요. 만나서 한번 충고해 주시지요." 저는 안합니다.

 

젊었을 땐 뭣도 모르고 했습니다. 제가 만나보니까 점점 더 완악해지고, 기고만장해집니다. 그래서 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충고하지 않는다. 듣기 싫어하거든 말하지 않는다. 또 대답하기 싫어하거든 묻지 않는다.'그게 제 생활철학입니다.

 

어느 한계를 딱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구제불능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벌써 꽂혔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안 듣습니다. 들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교인, 서기관, 제사장 등의 종교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예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 얼마나 많이 물어 봅니까?

 

얼마나 탐색전을 합니까? 그 많은 이적을 보면서도, 그 많은 기사를 보면서도 가서 또 물어보고, 또 물어봅니다만 결국은 회개하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저주를 받을 것이다" '아나데마 에스토' 영어로 하면 Goddamn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심판해 버렸소.' 라는 말입니다.

 

, 이제 보세요. 구약에서 보면 바로왕 같은 사람, 얼마나 기회가 많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열 번입니다. 열 번이나 이적을 보이며 말씀을 전하고 기회를 주었는데 끝내 회개하지 않고 강퍅해져서 그만 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홍해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왜 이러해야 했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강퍅케 하시니라.” 이건 심판이에요. 이미 심판을 받았어요. 현재적 심판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못 듣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문제는 마음의 자세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 안다'하면 다시는 들리는 것이 없어요. 교만한 자에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정욕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 다른 말씀이 들어갈 길이 없어요.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 말씀을 들을 수가 없어요. 어두운 미래에 대한 불확실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사람, 그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어요. 이미 절망해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들리지 않습니다.

 

요새 와서 자살이 많습니다. 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자살하는 사람 구원 받을까요 못 받을까요? , 교회 다녔다는데 어떻게……, 글쎄 구원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그건 하늘나라 가봐야 알고, 그건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고,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자살자는 자살하기 전에 우울증 환자입니다. 몸만 아프다고 병자가 아니라, 정신병도 병입니다. 가장 무서운 병중의 하나가 우울증인데, 병에 들면, 그 다음에는 자기에게 자유가 없습니다. 생각의 자유가 없는 겁니다. 자꾸만 외골수로 몰려 들어가면서 절망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물만 보면 빠지고 싶고, 불만 보면 뛰어 들어가고 싶고, 당장 죽든지, 죽이든지, 이런 사람이 돼 버려요. 그건 정상이 아니에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벌써 생각과 의식의 자유가 없어요. 병자예요. 하나의 병적 상태일 뿐이에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울증이 그렇습니다. , 이제 무슨 말이 들려오겠습니까? 그는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주 특별한 감사가 있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감사주일 설교를 50년 동안 해 왔습니다. 절기 설교란 원래 좀 힘듭니다. 그래서 3년에 한번씩 반복해 가면서 설교를 해 왔습니다만 오늘은 특별합니다.

 

내 일생 처음으로 감사절에 이런 설교를 합니다. 요샛말로 수준 높은 설교입니다. 높은 수준의 신앙체험을 가진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도의 감사’,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감사를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마음속에 그 위대한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만의 감사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 선교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감사는 무엇일까? 옥문이 열리는 것, 감옥에서 나가는 것,

 

만사형통하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것, 이런 외형적이고 피상적인 얘기가 아니었어요. 데살로니가전서 15절에 한 번 더 그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지식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걸 볼 때 그걸 감사했어요. 이게 설교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감사입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설교합니다. 루스드라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앞에 앉은 사람 하나가 말씀을 들어요. 잘 듣고 있습니다. 뭐 옛날에 통역이 시원한 것도 아니었고, 언어의 장벽도 있는데, 뭐 그렇게 시원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문화적 상황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어쨌든 사도 바울의 설교를, 낯선 손님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간절히 듣습니다. 집중하며 듣습니다. 그 듣는 모습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보다가 저 마음속에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봤다고 했는데 저도 한 50년 목회하다 보니까 이제 조금 봐요. 저도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걸 보고 일어나라!” 하니 벌떡 일어났어요.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요, 걸어본 적이 없어요. 얼마나 놀랐던지 좌우간 온 동리가 이거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다고 해서 사도 바울에게 제사 드리겠다고 제물 가지고 왔잖아요.

 

얼마나 굉장한 사건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말씀을 듣고 있어요. 그 듣는 자세를 보니까 저에게는 이게 설교가 아니에요, 도덕 강연이 아니에요, 그에게는 생명이에요.

 

한 말씀, 한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 걸 알고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알고 일어나라!” 했습니다. 벌떡 일어나요. 바울은 바로 이것을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전하는 말이 능력으로, 성령으로 역사하였다. 그래서 감사하는 거예요.

 

또 오늘 본문 2장에 와서 또다시 말합니다. “내가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했습니다. 13절에 보니까 쉬지 않고 감사함은계속적으로, 상황과 관계없이 항상 쉬지 않고 감사하는 것.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감사예요. 여러분, 왜 그러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라고 애쓰고 있지만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으면 이건 사람의 얘기예요. 사람의 충고에 불과해요. 도덕 강연에 불과해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래서 감사하고 있어요.

 

제가 몇 년 동안을 항상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시무할 때에 어느 날 외국인 몇 사람이 와서 저기 앉아 예배드리는 걸 봤어요. 동시통역을 했지만, 그 통역은 뭐 역시 한 절반밖에는 통역이 안 됩니다.

 

어쨌든 통역을 했고, 그 사람들은 이어폰을 사용해서 듣습니다. 예배 마치고 나갈 때 카드에 편지 한 장을 써서 제게 주고 갔습니다. 영어로 자세하게 또박또박 써서 제게 주었습니다. 그 긴 얘기를 다 못합니다만 마지막 얘기는 이겁니다.

 

내가 20년 동안 가진 소원이 있었고,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20년 동안 고민하고,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 왔는데 오늘 여기 와서 목사님 설교를 통해서 응답을 받았고 해답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편지는 제가 오래오래 간직했습니다. 너무너무 행복해요. 왜입니까?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거든요. 나를 통해 기도가 응답됐거든요. 말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졌단 말입니다.

 

여기서 목사는 행복하답니다. 목사의 최고의 행복은 이겁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베드로가 한마디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습니다.” 아마 그 거지가 실망했겠지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난 그때마다 생각해요. 베드로가 놀랐을까? 앉은뱅이가 놀랐을까? 나는 베드로가 더 놀랐을 것 같아요. 왜요? 나도 그럴 거 같으니까. 그때 베드로의 생각이 뭡니까? 바로 몇 일전에 예수를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도망갔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베드로는 생각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나는 주님께 고용되어 있다.’ 어두운 과거, 그 많은 실수, 아무 상관없어요. ‘오늘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나는 주의 능력의 역사에 고용되고 있다.’ 그것으로 행복한 거예요. 얼마나 행복할까요? 간단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가졌을 거예요.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이 그겁니다. 인간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 쉬지 않고 감사한다. 동시에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그 사람이 바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는 14절에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선택함을 아노라.” ?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걸 보니까.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가끔 곤욕을 치를 때가 있습니다. 예배 마치고 내려갔을 때, 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요. 그 열어보면 첫 마디부터 저한테 욕을 합니다. 누가 고자질을 해서 자기 허물을 알려서 목사가 오늘 자기 허물을 지적하고 공격을 했다는 겁니다.

 

, 그렇게 대듭니다. 내가 알게 뭡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누군지 알거 뭐요?” 그러면 자기 양심이 좀 찔렸던가 봐요. , 찔렸으면 회개하면 되는데 이 사람은 생각은 누가 고자질을 했나?’ 그렇게 돌아갑니다. 이건 아니에요.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은 무슨 말씀이 들려오던지 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그래서 감사하고 또 인간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언어로 바뀌고 있어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Incarnation입니다. 말씀이 성육신되는 시간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요. 이러한 관계가 신학적 용어로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해요.

 

여러분, 교역자와 여러분이 여기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설교 중에 만나고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관계에 카리스마적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종 어려움도 있었어요. 그의 감사를 또 들어볼까요? 갈라디아서 4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할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한 그리스도같이 영접했느니라.”

 

정말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감사가 짐작이 갑니다. 모름지기 추측입니다. 어디까지나 추리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설교하다가 간질병이 발동하면서 쓰러졌던 것 같아요. 거품을 물고 쓰러졌어요.

 

, 이러고 다시 그 다음 주일날 설교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 믿음을 시험할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나를 업수이 여기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했느니라.”

 

, 참으로 감사하다. 이거 아셔야 돼요. 그 모든 허물을 다 덮어주고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하나님이 보낸 종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저를 통해 들었다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감사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한 6개월 한 분이 계세요. 정치적인 그런 일에 휘말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갔어요. 제가 미국에서 그 분을 만났어요. 사실 억울한 사람이에요. 나도 그걸 알아요. 6개월 동안 감옥에 있다가 거기 가서 지내니 얼마나 괴롭겠어요?

 

미시간대학에 가서 만났는데 펑펑 울어요. 너무 답답하고 속상해서. 그러나 마지막에 눈물을 닦고 말합니다. “내가 감옥에 간 거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원망도 많이 했고, 불평도 많이 했습니다만 내 일생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가 교회 집사지만 성경 한번을 다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 성경 읽었고. 식사 때만 기도했지 제대로 기도해본 일이 없습니다. 내가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 너무 감사합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6개월 억울하게 감옥생활 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저는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여러분, 감사 중에 감사가 뭡니까? 깊은 감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겁니다. 손해는 봤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병들었지만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너무나 소중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모든 문제가 해결이 돼요. 모든 어두움을 뚫고 밝은 빛을 볼 수가 있어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는 주님의 음성이 가까이 들려옵니다. 그런고로 감사 중에 감사는, 말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 안에 감사하고 감사하는 중에 가장 귀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늘 감사합니다만 그저 물질적이고 또 세상적이고 또 환경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가장 기쁘고 가장 중요한 것, 그 감사를 잊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주여 말씀을 주시고 말씀으로 들려주시고 말씀 안에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 크신 말씀이 오늘 내게 능력으로 나타나서 오늘 내가 있음을 감사하고 그리고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수도 있는 소망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 것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감사로 일관된 주의 영광을 찬양하는 간증이 있는 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당신은 우리의 영광 /살전2:17-20/ 옥한흠목사

2014-11-09 18:09:14

 

지난 한 주간 우리는 굉장히 흥분된 나날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대각성전도집회 새생명축제 2000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엄청난 은혜를 주셨습니다.

 

15000명 이상 되는 성도들이 한 생명이라도 구원해 보려고 밤낮없이 눈물로 기도하고, 시간을 내어서 찾아가고, 정문에서 기다리거나 직접 가서 손을 잡고 집회로 인도하고, 집회 시간 내내 함께 앉아서 말씀을 듣는 등의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한 주간 동안 4319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태신자들이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제가 들어오면서 보았는데 의자마다 꽃바구니를 앞에 놓고 앉아 계시는 태신자들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요. 얼마나 감개무량한지요. 처음 오시는 분들이 받아 가지고 들어오신 꽃바구니가 어떤 자리는 열 개가 넘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꽃바구니를 놓고 앉아서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세상에 이렇게 신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믿고 돌아오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와서 말씀을 들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 예수 믿은 형제 자매가 2627명입니다. 100명의 교인으로 이루어진 교회로 셈하면 26개의 교회가 새로 탄생한 것입니다. 10명 중에 6명이 예수를 믿겠다고 카드를 내고 일어서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한 영혼을 구원해도 천사들과 잔치를 하신다고 했는데 오늘 그렇게 많은 심령들이 예수님 품에 안겼으니 우리가 얼마나 기뻐해야 합니까?

 

만약에 이런 생명의 축제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슴에 이런 놀라운 기쁨과 새로운 각성을 주신 것을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이 집회를 지켜보면서 성령께서 제 마음에 주시는 메시지가 분명히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제 마음에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국민일보 기자에게도 이 메시지는 꼭 써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받은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부흥이 안 된다는 소리를 하지 마라. 전도가 안 된다는 말도 하지 마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 전하기만 하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해져도 예수를 거부할 만큼 아직은 악해지지 않았다. 지금 전도가 안 되고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 사람 때문이 아니고 우리 자신 때문이다. 교회가 병들어 있고 교회가 체질이 잘못되어 우리 스스로 좋지 못한 이미지를 남기고 냄새를 피우기 때문에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지, 우리가 제대로만 하면 지금도 얼마든지 예수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 성령께서 이 메시지를 제 마음에 계속 주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내면에 똑 같은 음성을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기 체질을 바꾸고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복음을 더 힘있게 전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627명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카드 내고 일어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정도의 의미로 끝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구원 받은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의미는 그 이상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도시에 선교를 하기 위해서 들어갑니다. 생전 가보지 아니한 곳에 첫발을 들여 놓는 것입니다. 아마 속으로는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갔을 것입니다. 원래 그가 하는 방식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매일 들어가서 구약 성경으로 유대인을 상대로 전도를 했습니다.

 

유대인은 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사야가 말한 고난의 종이요, 예수님이야말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전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3주 동안 날마다 가르치며 전도했습니다.

 

유대인도 들어와서 들었고 유대인과 가까운 이방 사람들도 들어와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경건한 헬라 사람들이 많이 예수 믿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헬라 사람이면 그리스 사람입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경건하다는 말을 붙입니까?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서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개종해서 회당에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귀족이나 상류층에 속하는 귀부인들 다수가 예수 믿고 바울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번 대각성 전도집회를 6개월간 준비하면서 태신자 하나를 만들고 교회로 인도해서 예수 믿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많이 느끼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도 실패했습니다. 목사 말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3주 동안 전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몇 십 명인지 몇 백 명인지는 모르지만 예수 믿고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이 질투를 해서 드디어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굉장히 위험에 처했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은 사도 바울의 제자들이 사도 바울을 권면해서 밤중에 그 도시에서 빼돌려 다른 도시로 보냈습니다.

 

그 후로는 바울이 다시 그 도시에 들어가서 이제 새로 탄생한 개척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좀더 격려하고 위로하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편지를 쓴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이 들은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이 빠져 나온 후로도 핍박을 받으면서 예수를 잘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남편에게 박대를 당합니다.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또 예수 믿은 몇몇 사람들은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합니다.

 

이렇게 몹시 어려운 상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3주 동안 복음을 듣고 갖게 된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핍박을 받았지만 기뻐하면서 신앙생활을 했고, 게다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이 너무 흥분하고 감격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9, 20절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 바울이 '우리'라고 한 것은 바울과 함께 동역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모데와 실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합해서 '우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누구냐?

 

우리의 기쁨이나 우리의 면류관이 누구냐? 그의 강림하실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데살로니가 교인 너희가 아니냐? 너희야말로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너희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이 말씀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이 흥분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습니까? 3주 밖에 안 된 짧은 기간에 태어난 새로운 영적 생명인 그들이 지금 핍박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19, 20절을 놓고 우리가 다시 한번 몇 가지를 꼭 배우고 마음에 담아야 되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재림하십니다.

 

오늘 처음 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간에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믿겠습니다." 하고 결단하셨습니다. 한가지 더 들어 두십시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시간표에 따라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이것을 재림하신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은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모시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구름 사이로 멀리 멀리 하나님 나라를 향해 승천하시는 주님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그 때 천사가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본 이 예수님이 나중에 이 모습 그대로 다시 세상에 오신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내가 속히 오리라." 주님이 꼭 이 세상에 재림하셔서 이 악하고 더러운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우주에 건설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 날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살아도 이 세상에 정을 주지 않고 그 날을 바라보는 거룩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 날이 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뜻을 다 펴보지 못하고 꺾이는 슬픔을 당해도 절대로 기가 죽지 아니하며, 절망하지 아니하며, 자살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그 날이 되면 나의 슬픔, 나의 고통을 주님이 다 위로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되면 내가 악한 일과 악한 사람들로 인해서 당한 손해와 억울하게 입은 상처들이 많이 있지만 주님이 다 싸매 주시고, 내가 입은 손해 보다도 몇 갑절 더 풍성한 축복으로 위로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남을 향해 이를 갈지 않습니다.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 날이 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너무나 포악한 악을 보고도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거짓과 음란과 온갖 더러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가 그래도 이 세상을 놓고 소망을 갖는 이유는 그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도 그 날이 있기 때문에 잘 사는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못 살아도 그 날이 있기에 못 사는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날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도 바울은 그 날을 마음에 그려볼 때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짧은 한 평생을 살면서 그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을 위하여 다른 형제에게 전도하고,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물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더 나아가서 자기의 젊음을 온통 바친, 순교의 재물이 될 때까지 주님의 나라와 그 일을 위해서 희생한 거룩한 성도들이 그 날이 되면 누리게 될 그 영광이 너무나 황홀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숱한 매를 맞아가며 수없이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어떤 축복과 상급과 칭찬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바울이 압니다.

 

그 중에 특별히 데살로니가 교인 때문에 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을 칭찬, 상급을 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너희가 바로 나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너희가 나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뛰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국가적으로 경사인지 모릅니다. 서로의 정치적인 견해를 뛰어 넘어 야당이니 여당이니를 따지지 말고, 한국인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온 국민이 경축할 일이요,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개인에게도 영광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영광입니다.

 

아셈 회의에 참석한 20여명의 정상들이 연설을 할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의 수상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서 축하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벨 평화상은 이름 그대로 평화상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얼마만큼 희생하고 값을 치루었느냐에 따라서 그 평화상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잘 알다시피 다섯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대통령이요, 6년 동안 감옥에 갇혀서 고독하게 씨름을 해야 하던 생을 보낸 사람이요, 10년 동안 망명이 아니면 자택 연금을 당하면서 너무나 힘든 나날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아니하고 민주주의, 인권, 통일을 위해서 지금까지 생명을 걸고 싸워 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최근에는 남북 화해의 물고를 터 준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