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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데살로니가서 설교 모음

데살로니가전서 4:1 - 12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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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생활 /살전4:1-8/ 조학환목사

2022-12-31 11:44:49

 

3장까지는 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환난 중에도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가보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디모데를 보내게 되었는데 디모데가 나중에 와서 전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 있다는 너무나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4,5장에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그들에게도 결점이 있었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롤 통해서 나타난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점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당시 그 지역에 만연되어 있던 성적 문란한 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재림이 없다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재림을 믿는다는 이유로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며 우리는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앞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서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감사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삶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서 좀더 기도해야 되겠다. 물론 그것이 온전치 못한 지상교회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당연시 여겨서는 안된다. 어쩔 수 없이 부족하긴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거룩하고 온전한 모습을 갖기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4장 이후부터 바로 그런 말씀을 주고 계시다.

 

1.더욱 많이 힘쓰라.(1)

 

살전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앞서 칭찬하고 감사했지만 이제 너희에게 권면 할 것이 있다. 너희에게 바란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가 더욱 힘써야 할 것이 있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말한다. 이미 너희가 다는 아니지만 하고 있는 일들이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운데 든든히 서는 일이다. 믿음을 따라 움직이고 사랑으로 수고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생각하라.

 

더욱 많이 힘쓰라.’ 지금까지 많이 힘썼지만 더욱 힘써라. 과연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지 생각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더욱 힘쓰라.

 

하나님의 일은 졸업이 없다. 이만하면 되었다가 없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위해 힘써야 한다. 어떤 이는 나도 옛날에 많이 했다면 그만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주님 앞에 설때까지 해야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며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며 은혜가운데 거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많이 수고했지만 앞으로도 더욱 힘쓰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자.

 

2.거룩한 생활을 하라.(2-5)

 

한 사회나 개인이 올바른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 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부부생활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성결함을 지키며 살아가는 개인이나 사회는 올바른 가치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개한 사회일수록 성적 올바른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그렇다. 올바른 문명사회는 성적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나라와 부족들이 성적인 올바른 관념이 없다. 그래서 성적 문란한 행위를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을 그걸 그 지방의 문화라고 여기려고 한다. 문화는 문화다. 그러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문화다. 고쳐야 한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포기하는 행위다. 그건 꼭 동물과 같은 사고방식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영역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만약 이걸 모르고 제멋대로 한다면 결국 동물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므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사회 자체가 그랬다. 그 당시 헬라 문화권 사람들은 성적인 성결의식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망대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렇다보니 그런 동물적 삶을 살면서도 죄의식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악습에 젖어 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서는 그런 악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불결한 삶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3-5절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더욱 힘써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 특히 강조할 것은 성적 깨끗함이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를 취하라.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

 

여기서 기억할 것. 하나님의 뜻은 뭐냐? 거룩함이다. 육적, 물질적, 정신적, 영적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분리된 것이다. 세상과 다른 것이다. 육을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용하는 것,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 영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따르는 것, 이런 것이 거룩함이다.

 

우리는 혹시 구습을 좇아 살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육적, 물적, 정신적, 영적으로 세상에 살면서 굳어진 대로, 세상 사람들의 습관대로 살아가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자.

 

3.경건치 못한 삶의 결과(6-8)

 

경건한 삶은 단순히 경건한 삶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경건한 삶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과 사람 간에도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살전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성적 불경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배우자이다. 배우자를 죽이는 행위와 같다. 하나님이 이를 신원하여 주신다고 하였다. 즉 원수를 갚아 준다는 말이다. 꼭 세상에서 원수를 갚아 주지 않는다해도 결국 하나님 나라에 설때에 받을 수 밖에 없다. 기억하라. 성적 추악한 행위는 많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라는 사실을....

 

성적 불경건의 또다른 치명적 결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8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두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자를 죽이는 행위와 같은 것이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0:12-14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 살인하지 말지니라 / 간음하지 말지니라. 즉 인간에 관한 계명 중 세 번째 계명이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살인을 하면 엄청난 죄인줄 알면서 간음한 것은 그다지 큰 죄로 여기지 않으니...... 이 사회 풍조가 썩어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살인죄와 간음죄는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요, 자신을 더럽히고 배우자를 죽이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정말 이 사회의 이 잘못된 풍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교회가 먼저 거룩성을 회복해야 한다. 육적, 물적, 정신적, 윤리적, 영적으로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더욱 많이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진정 사랑과 은혜과 기쁨과 존중이 있는 복된 삶을 영위해보자.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8

2001-09-24 08:52:17

 

몇 해 전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급하게 피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정의 일곱 살 난 아들이 피하지를 못하고 불 속에 갇혔습니다.

자기의 가족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 줄 알았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아파트의 창문으로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창문 아래로 달려가서 팔을 벌리고 아버지가 아래서 받을 테니 눈을 감고 뛰어내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창문 아래에 그물 망을 준비해 놓았고 아이는 연기로 인해서 자기의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불길이 점점 더 거세어 지고 아이는 눈을 꼭 감고 아래에있는 아버지에게로 뛰어 내렸습니다.

연기로 인해서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의 소리만을 믿고 아래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힘센 팔로 그 아들을 안았습니다. 살려냈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탄의 불구덩이 속에서, 나의 자존심과 교만과 형식적인 종교 생활, 전통적인 것의 불구덩이 속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뛰어내리는 것, 그리고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세상의 불구덩이속에서 세상의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뛰어 내리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롯의처를 생각해야 할까요?

[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17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17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17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17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어떤 이는 믿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신을 전체적으로 위임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1)에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로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살전 1:3)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라고 사도 바울은 칭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아름다운 교회를 향하여 사도바울은 다시 권면하기를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욱 많이 힘써야 할 것인가요?

 

 

 

첫째로,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더욱 많이 힘쓰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라는 말은 성도로서의 마땅한 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마땅히 는 (살전 212)절에서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살전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이 성경은 (41)절의 합당하게 와 연결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마땅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41)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이니 한 말씀 속에 우리의 존재가치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나는 하나님의 특별히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이곳까지 불러 주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성도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느니라 (1516)

어머니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셨다 (11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정 하시고 (14) 라고 하시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전이요, 하나님의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사시었으니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요 하나님 것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전619-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까지 나 같은 것 위해 주셨으니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의 존재를 그만큼 크게 보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요 유업을 이을 자답게 귀한 존재로서의 자신 있는 삶이 있어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본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이라고 했다.

이는 성도의 의무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은 (51013)까지에 보면 주께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 할 만큼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또 오매불망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벼슬도 하고 돈도 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제일 주의로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만 바로 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기쁘게 해 줄 수 있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대통령 마음에 들어도 빛을 보는데 만왕의 왕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왜 하나님이 못 본체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독자 이삭을 번제단에 드렸지만 도리어 그 아들이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삭이 두고두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510)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22절에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물론 할 수 있는 한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기쁘게 해줘야 하겠지만 그러나 제일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눈치를 잘 살 피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514)에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 그 때에는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0) 말씀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의로움><진실함>에 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의 에베소 교인들이 빛을 잃어 버렸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에베소 시는 이교 문화권에 속해 있었는데 온갖 도덕적 타락과 부정적인 영향력이 만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여신 다이아마(아데미)를 숭배하며, 예배의식으로 매춘을 하였는데 이것이 에베소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에베소는 살인자들, 도적들, 강도들이 자유롭게 살수있는 피난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착함보다는 악함이, 의로움보다는 부패함이, 진실함보다는 거짓과 속임수와 가증스런 탐욕이 더욱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빛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1) 착함의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착함이란 헬라어로 '아가토수네'라는 말로서 단순한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대한 정신을 말합니다.

넓은 아량과 폭넓은 이해심, 모든 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포용력과 아낌없이 주는 사랑, 이러한 착함을 의미합니다.

빛이 된 성도는 부드러움과 온유함으로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를 주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의로움의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헬라인들은 의로움이라고 번역된 '디카이오수네'라는 단어를 '인류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의로움이란? 자신이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한 온전한 수행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빛된 성도들은 율법에 순종하고 말씀의 요구에 온전히 응하는 행위로 어긋남이 없는 의로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3) 진실함의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진실함이란? 헬라어로 '알레데이아'로서 실제로 행하는 도덕적인 진실을 뜻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목숨을 버리심으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진실성을 증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처럼 행위로 증명되는 사랑, 공의, 자비, 긍휼에 있어서 거짓 없는 참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열매를 빛 된 성도는 하나님께 맺어 드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더욱 힘써야 할 것은 우리의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바울이 권면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오래 전에 바울에게서 받은 것들이므로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라고 말하면서 (본문3)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라고 하였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한 생활이다.

(본문)에 너희의 거룩함이라는 것이다.

이는 (1145)에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는 말씀을 볼 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거룩이란 말은 구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무엇에 대하여 거룩을 말하는가?

분수에 합당한 생활이다. 본문6절에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리 성도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못할 때 형제인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분수를 넘어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페르바이네인이라고 하는데 경계선을 넘다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결혼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서 성적인 범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말은 도덕적인 규례를 넘어서는 성생활로 인하여 형제인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고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여러분! 여러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거룩, 즉 하나님을 닮아 가는데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거룩이란 구분하다. 성결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세상사람들과 구분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과 구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민족만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啓示로서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그의 뜻을 나타내신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가장 귀중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의 의미는 해석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만은 구속사건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해서 이집트와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생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에 되어 거룩하게 살 땅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너희는 거룩하게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나안에 이미 사는 거민들을 모두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진멸하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찌 이방인도 사람인데 파리 목숨처럼 끊으라고 하셨는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거민들은 하나님이 없는 백성들이요 아세라와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육신은 살아있으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므로 이미 영은 죽은 자와 같고 시체와 같았습니다.

그런고로 출애굽사건은 하나님이 인류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사건인 것입니다.

이 출애굽사건은 그림자요 이 출애굽의 사건의 성취는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사망과 멸망에서 구원하셔서, 즉 구별하여서 보혜사 성령의 역사 안에서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뜻은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해서 큰 부자가 되는데 목표를 둡니다.

결국 목표는 부자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결국 세속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삼습니다.

결국 예수를 우상화해버리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하면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표는 오직 거룩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벧전 215)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거룩해 지는 방법은 (벧전 222)에 너희가 진리로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분은 영을 봅니까?

영을 볼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행위는 봅니다.

그것은 즉, 그 사람의 생활 입니다.

그 사람의 생활이 그의 영의 속성이 되는 것입니다.

(17)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기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고 했습니다.

각 사람의 행위가 그의 영성입니다. 그의 삶이 그의 영성입니다.

그의 말이, 그의 행위가 모두 영성인 것입니다.

저는 영성훈련을 한 다고 하면서 깊은 산에 올라가 명상을 하게 하는 영성 훈련은 생활과 동떨어진 영성훈련은 비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영성훈련은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영성훈련인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 이것이 영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맑아지시기를 원하십니까?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거룩해 지고 싶습니까?

하얀 옷을 입고 하얀 신발을 신고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쓴다고 해서 영혼이 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에 있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대로 순종하며 사는 삶, 이것이 우리의 거룩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 많이 힘 써야 할 것,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우리의 순종으로 우리가 거룩해 지는 모습을 가지도록 더욱 많이 힘써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 이 시기에 우리의 신앙을 훈련하는 시기에 우리가 더욱 힘씁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되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통하여, 삶의 순종을 통하여 더욱 힘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품격 /살전4:7-12/ 김기석목사

2020-03-10 12:04:32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빠져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외로운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내일이 대한大寒이니까 24절기의 마지막 절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때의 정경을 설중雪中의 봉만峯巒들은 해 저문 빛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흰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가 저녁 해를 받아 빛나는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인데, 올해는 눈이 거의 안 와서 이런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는 노래조차 달라져야 하는 모양입니다.

 

세상이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이 우리가 느끼는 근원적 외로움을 해소해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계와 대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친밀한 소통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만남을 통해 자기를 형성하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만난다는 것은 서로 마주서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동의하고 손을 잡고 하나가 되는 것”(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 p.35)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친밀한 만남이 지속될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나다운 삶을 기획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어떤 형태로든 인사를 건네오고 거기에 반갑게 응답하면서 우리는 외로움을 견딜 힘을 얻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슬픔은 다들 마음이 한껏 달아오른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뜨거워지는 것은 지구만이 아닙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마음의 여백이 줄어들고 사소한 차이조차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편을 가르고,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고, 입장이 다르면 부르대며 적대감을 보입니다. 느긋한 평화를 누리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가야 할 기독교인들조차 평화롭지 못합니다.

눈빛 맑고, 마음이 따뜻하고, 말에 품위가 있고, 여백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이 시대의 우리의 소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약 성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울 사도의 서신은 대개 각 지역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송된 회람편지였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지만 교회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인간적인 허물과 약점 그리고 각자의 욕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 다 녹아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갈등이 많습니다. 생각하는 바와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바라본다면 다행이지만 사람들은 눈 앞에 있는 대상들을 바라보며 호불호를 표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16:24) 하신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자기 부인否認이 따름의 전제 조건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내려놓거나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근본이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누구인지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오늘은 바울 사도를 우리 길잡이로 삼으려 합니다.

 

부르신 까닭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의 결실입니다.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회당에 들어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17:3).

 

유대인 가운데 몇 사람, 경건한 그리스 사람, 그리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의 말에 깊은 공감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시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키고, 바울 일행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신도들은 밤을 틈 타 그들을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자마자 그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던 바울은 마치 갓난아이를 두고 먼 길을 떠나온 엄마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그곳으로 보내 교인들의 형편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디모데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곤경과 환난 속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로소 그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이런 표현을 했겠습니까? 바울은 큰 애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 그들에게 신앙의 근본을 다시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함 받은 이들은 더러움에서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러움(akatharsia)은 욕심에 사로잡힌 상태, 사치의 노예가 된 상태, 불순한 동기를 품은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택함 받은 사람은 그러니까 욕심을 자꾸 덜어내는 연습과 단순하게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덜 먹고, 덜 갖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소유를 통해 행복을 사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조화롭고 평온한 상태에서 주어진 것을 한껏 누리는 소박한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소박素朴한 삶은 꾸밈이 없는 삶입니다. 꾸밈이 없기에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거나 이용할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때 비로소 우리는 거룩함의 입구에 당도합니다. 삶이 단순해야 삶의 순도가 높아집니다.

 

거룩함(hagiasmos)이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상 속에서 구현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성화된 삶입니다. 성화된 삶은 일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12:1)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밥을 먹든, 길을 가든, 사람을 만나든, 일을 하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만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더러움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거룩함은 낯선 가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거룩한 삶의 특징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대합니다. 바울은 이런 말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1:3).

 

믿음이 행위와 결합되고, 사랑은 수고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망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특히 우리 마음을 붙잡는 것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입니다. 수고(kopas)의 문자적 의미는 슬픔으로 가슴을 두드리다라는 뜻이지만,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다’, ‘고통을 받아들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런 사랑의 수고에 모범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조용하게 살기를 힘씁니다. 조용하게 산다는 말은 여기저기 겅중거리며 뛰어다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적인 고요와 침묵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중뿔나게 자기를 드러내거나 돋보이게 하려고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동방 교회 전통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명상하며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을 일러 헤시카즘(hesychasm)이라 하는 데, 그 말은 조용하게 산다는 뜻의 헤시카조hesychazo에서 온 말입니다. 조용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사랑의 수고가 필요할 때는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때도 고요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떠벌이거나 광고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뜨이기 위해 하는 일을 하나님은 신통찮게 여기십니다.

 

셋째,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사실 이 권고는 초대교회가 처한 상황에 꼭 필요한 권고였습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던 초대 교회는 아주 강력한 영적 일치를 맛보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던 모든 담들이 무너졌고, 유무상통하는 인류 초유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감격이 지난 후에 남는 것은 지루한 일상입니다. 그런 지루함 속에서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주님의 재림 약속이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주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결한 신부로 자기를 바치기 위해 하던 일을 작파作破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그런 이들까지 품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재림이 지연되면서 그들의 존재는 교회의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일 당장 주님이 재림하신다 해도 오늘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전념하라는 말은 세상일에 오불관언의 태도를 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담이 되지 않도록 애쓰라는 말입니다.

 

품위 있는 삶

그렇게 사는 것이 바깥 사람들 보기에도 품위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왜 하필이면 품위’(euschemonos)라는 단어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사전은 품위를 사회생활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념으로서, 사회 성원들이 각각의 지위나 위치에 따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품성과 교양의 정도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 단어는 몇 차례 더 나오는데, 번역자들은 이것을 단정하게‘(13:13), ‘적절하게’(고전14:40)로 번역했습니다. 품격이란 말도 떠오릅니다. 물건을 뜻하는 품자는 입 자 세 개가 위아래로 겹쳐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우리가 한 말이 쌓이고 쌓여 품성을 이룬다는 뜻으로 새기면 어떨까요? ‘품격할 때 격바로잡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말이나 행동을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자꾸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품격이 생깁니다.

 

품격이 있는 사람은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을 교정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에 한참 못 미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이 얼마나 매력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2:47). 매력은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선교란 매력의 감염입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은 질그릇 같은 몸에 보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보화를 간직한 이들의 삶은 당당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이것이 믿는 이들의 품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보며 볼썽 사납다고 말합니다. 품위가 없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마음씀이나 지향이 똑같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미워합니다.

 

기본적 교양이나 상식 그리고 예의조차 없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문제로 여기고, 자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비판적인 사람은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습니다. 믿는다 하는 이들 가운데 자기만족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볼썽 사나워집니다. 최소한 볼썽 사나운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2:10a). 하나님은 지금도 시간 속에서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겸허하게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하나님의 뜻/살전4:1-12

2008-05-27 17:02:20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알 수가 있겠습니까? 흔히 당신 마음 나도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내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는 아무리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상대방과 같은 입장이 되었다고 해서 또한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고 할 수만도 없는 것이 그러한 입장이 되기까지의 환경이 또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결국은 내 입장에서의 이해일 뿐 온전히 상대방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알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한 평생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과연 나는 내 아내 내 남편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마음이 들 적은 없었던가요?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무엇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토록 외로움이 몸부림치게 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 보려고 했던가?

 

그저 내 방식대로만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고 내 방식대로만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대는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내가 보고 있는 그대일 뿐이지 그 사람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 주셨던 그 사랑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왜 내가 이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십니까?” 하고 따지고 들 때도 있지를 않았던가요?

 

래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아하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아 감사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군요.” 하고 깨달아 감사하게 될 때의 그 기쁨을 여러분도 아시지를 않습니까? 오늘은 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이란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이 숨 쉬고 똑같이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받는 사랑입니다. 내가 받은 만큼 주는 사랑입니다. 먼저 받아야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희생이라고 하지만 어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과연 희생을 말하고 있던가요? 결국은 희생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 가운데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벌기는 백정처럼 벌고 쓰기는 장승처럼 쓰라는 말도 합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 아니던가요? 소위 말하는 투기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여기 집을 사고 땅을 사면 값이 많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돈만 있다면 나부터라도 그 땅을 그 집을 살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실상 오늘날까지 돈을 번 사람들치고 그렇게 땅 투기 부동산 투기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돈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다 도둑놈이라는 말들을 하지 않던가요? 내가 여건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여건만 된다면 자녀들 공부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 이사하고픈 마음들 역시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 병신이라는 말들도 하지를 않습니까? 오죽하면 내가 하면 정당한 것이고 남이 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는 말까지 생겨났겠습니까? 그런 이중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진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내가 희생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잘 될 수 있다면 그걸 진정으로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내 일처럼 그렇게 기쁘던가요?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아파하는 것 이상으로 함께 아파해줄 수 있고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내 일처럼 기뻐해 줄 수 있는 것,

 

오히려 기회가 주어져도 상대방을 위해서 양보하고 상대방이 잘 되도록 밀어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그러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서 헤매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상대방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아내에게 조차도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지를 않습니까? 나는 자존심도 없는 사람인줄 아느냐고 그렇게 소리를 버럭 지른 적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최대한 자존심 다 버리고 산다고 했지만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그러한 나 자신을 힘들어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지만 이번 딸을 출가시키면서 보니까 결코 아니더란 말입니다.

 

딸의 행복을 위해서는 놓아주어야 하는데 막상 놓아주려고 하니 그게 그렇게도 힘이 듭디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며칠을 몸살을 앓았겠습니까? 진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인데 내 행복부터 생각하고 있는 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 내 안에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 마음이 힘들다고 해서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상대방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성질을 다 부려대는 일도 얼마든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 내 욕심이 아닙니까? 내 마음이 불편하니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상대방을 힘들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이기적인 욕망이 내 안에 가득한 것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기가 왜 그리 어렵던 지요? 뻔히 상대방이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 주장을 굽히지 않는 그런 어리석음이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나도 좀 살고 보자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욕정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나 힘든 것만 생각했지 상대방이 힘들 것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내 안에도 가득합니다. 아니 어떤 때는 반대로 상대방을 위해서 따사로운 손길을 내밀어도 귀찮다고 매몰차게 손사래 치는 것을 볼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그런 손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또 원망하곤 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합니다. 그런 어느 세상 사람들 중의 하나와 같은 모습으로 더 이상 남아 있지 말아야 합니다.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해야 되고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음식을 권합니다. “몸에 좋단다. 먹어봐.” 그러면 아니 싫다는데 왜 자꾸 그러냐고 합니다.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먹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먹기 싫어도 주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 모두에 다 서툽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다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없을 텐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말을 하고 너무도 쉽게 행동을 합니다. 때로는 참아줄 수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기다려줄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너무 성급할 때도 많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기다리고만 있다가 또 삐끗할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때를 맞추어야 할지 정말로 힘이 듭니다.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하느냐?”고 하지만 그제야 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기 까지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본다면 이제라도 말해 주어서 고마워요.”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다리셨습니다. 동구 밖까지 나와서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아버지가 자식을 찾아 나설 수는 없었던가요? 아니죠? 찾아 나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어쩌면 그 자식은 아버지를 피해서 영영 멀리 떠나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아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동구 밖에 나가서 매일 기다리고 있는 그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니죠.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가슴 아파하며 기다리는 사랑,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해 마지막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던 사랑이 왜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죄에서 건져 구원할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랑이 어디 있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한없이 욕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사랑 이윽고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 이 사랑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쫓아가서 다리 몸뚱이라도 분질러서 끌고 와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기다리는 그 마음에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부모 된 마음은 다 압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난하긴 쉽습니다. 욕하긴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마음이 오히려 눈물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진짜 사랑입니다. 탈선해서 이단에 빠져 헤매는 아들을 위해 1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하던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나카 그 어머니는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통곡을 하며 울부짖는 아들 왜 어머니는 나를 더 기다려주지 못하셨냐고 몸부림을 치지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를 그리며 아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가 초대 교회사에 귀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성자 어거스틴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가 눈물로 기록한 참회록을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런 위대한 한 인물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오늘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평안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노래 가운데 그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그래요 짜증을 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쉽게 짜증을 냅니다. 그러고는 혼자서 씩씩거립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더 큰 상처만 남깁니다. 차라리 그럴 줄 알았으면 짜증이나 내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차라리 기분 좋게 하면 될 것을 짜증부터 내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면서 할 때도 있습니다. 참 인생이 어리석은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 짧은 세상에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쉽게 화도 내고 그토록 씩씩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이미 우리가 서로를 사랑으로 잘 감싸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방법에 있어서 서로 서툴 따름입니다. 한데 그 사랑이 쉽지 않은 것이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랑으로 잘 감싸준다고 하는 것이 내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닌 주는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도 받는 사람이 흡족하도록 그리고 결코 상처가 되지 않도록 주어야 하기에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조건을 붙입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 너도 그에 상당하게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듣기를 원합니다. 한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다고 서운해 합니다. 자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끊임없이 주지만 자식은 때로는 그런 사랑조차도 힘들다고 합니다. 오히려 조금만 서운한 것이 있으면 엄마가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따지고 대듭니다. 그럴 때 부모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집니다. 한데 그런다고 해서 내가 다시 너를 사랑하면 내가 개다 그러고 맙니까?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베풀지를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진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통곡을 하면서도 여전히 손을 내밀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생각해보면 사랑만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속이 다 썩어나가면서까지 소갈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식들을 돌보는 그 부모의 사랑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겠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겠죠. 그러면서도 속은 다 썩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매를 든다고 해결이 됩디까? 화를 낸다고 해결이 됩디까? 오히려 더 힘들어만 지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이제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 참 평안을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속상한대로 다 해 본들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잠시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방 후회하게 되고 맙니다. 조금만 더 참을 것을 하는 마음으로 아파하던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지금 평안한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자식에게 부모로서의 할 일을 다 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참 평안입니까? 마땅히 해야 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직장인은 또한 직장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도리는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기도하라고 했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염려하고 근심하고 속을 끓이고만 있었지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마음을 쏟아 기도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은혜와 복만 바라고 있었지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도리를 다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땅히 구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못하고 마땅히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로 서야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에만 바빴습니다. 그러면서도 탄식만 하고 원망만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주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구하지도 않고 그저 염려만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주는 자기 되어라 그리하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안겨주시리라고 했는데도 주는 자가 되기보다는 무언가 주려고 해도 내게 무엇이 있어야 줄 것이 아니냐고 대들지를 않았습니까?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일을 돌아보고 자신의 일에도 정성을 다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존경하게 되고, 여러분 자신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는 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무어 자신의 일이냐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주는 자가 될 때 그것을 통해 내가 축복의 통로로서 우뚝 서게 됨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주는 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구를 돕는다고 할 때 결국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것은 또한 내 몸이 그만큼 건강하게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그것이 내가 잘 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도 되는 이것이야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시일반이라고 비록 나는 한 숟갈을 떠 주지만 그래서 그만큼 주리는 것 같아도 그로 인해 한 사람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나도 그만큼 더 기뻐지고 더 건강해지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일이 결국은 내 행복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평안한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평안한 삶은 나 혼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상대방으로 평안하게 할 수 있을까를 그러므로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내게는 있으나 상대방에게 없는 것을 내가 채워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평안이 내게로 뻥튀기가 돼서 돌아옵니다. 내게 필요한 것으로 내게 채워지게 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기를 힘쓰심으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채워가시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 한 가족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평안한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베푸는 사랑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도록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도 베풀어 주셨고 사랑도 주셨고 상대방과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하지 말고 그 말은 무언가 빈자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빈자리를 내가 먼저 채워나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다보면 자연히 관심이 가게 마련입니다.

 

빈자리는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빈자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빈자리를 채워나가는 내가 될 때 자연히 내 빈자리도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빈자리를 넘치는 사랑과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이 채워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이 내게 넘치게 되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사람 은혜의 사람 평안의 사람으로 우리 모두가 살아가며 먼저 주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은 명령이다/살전4:1-8

2008-01-26 12:25:41

 

 

질문 하나 드리지요. 나사로는 무덤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걸어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여럿 있습니다.

 

엘리야 때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그랬고,

엘리사 때 수넴 여인의 아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 때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그랬습니다.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는, 에스겔 37장의 환상중에 나타난 부활입니다. 골짜기에 가득 쌓인 마른 뼈들이 군대로 일어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The hand of the LORD was upon me, and he brought me out by the Spirit of the LORD and set me in the middle of a valley; it was full of bones.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He led me back and forth among them, and I saw a great many bones on the floor of the valley, bones that were very dry.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He asked me,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I said, "O Sovereign LORD, you alone know."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se bones and say to them, 'Dry bones, hear the word of the LORD!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se bones: I will make breath enter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하라.”

I will attach tendons to you and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So I prophesied as I was commanded. And as I was prophesying, there was a noise, a rattling sound, and the bones came together, bone to bone.

37:1-7

 

과부의 죽은 아들들, 마른 뼈들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생명은 외부에서 난 것입니다. 안에서 자생(自生)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화론의 입장의 반대 편에 선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생명은 안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납니다.

 

모든 부활명령입니다. 따라합시다.

 

무덤에 계시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This man was handed over to you by God's set purpose and foreknowledge; and you, with the help of wicked men, put him to death by nailing him to the cross.

Bu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freeing him from the agony of death, because it was impossible for death to keep its hold on him.

2:23-24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선언합니다. 생명의 본질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생명은 밖의 자극에 대하여 안의 반응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기독교입니다. “가장 잘이라고 비교형태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만이 생명의 신비를 바르게 드러냅니다.

 

칸트(Immanuel Kant)는 시계보다 정확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산책 나가는 길에 동네 사람들은 시계를 맞추었다지요, 아마?

 

칸트의 물자체(Ding as sich) 개념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물자체는 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객관적 실재입니다. 물자체가 우리 인식’(감관과 오성, 경험과 사유)을 거쳐 현상으로만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자체를 깨달을 수 없고, 그저 현상만 파악합니다. 본체는 모르고 그림자만 이해하는 인간의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칸트를 활용해서 오늘 메시지를 풀자면, 물자체와 인간의 의식 중에 물자체에 주도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조건에 대한 반응이 인간의 깨달음입니다. 그것이 생명이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칸트를 조건-반응의 대립구도로만 이해한 한계를 지적합니다. 변증법적 내지 사물과 내가 하나되는 어우러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생명의 신비는 어우러짐이 아니라 대립의 긴장에 있습니다. 깊이 묵상하셔야 할 대목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우리의 역사행위를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고 했습니다.

 

칸트의 물자체, 토인비의 도전 자체, 그것은 말씀이며 명령입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우리는 순종으로써 존재합니다. 어렵습니까?

 

지난 45, 한국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40대 후반의 중국인 부부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6개월 동안 뇌사 상태에 빠졌던 48세의 중국인 남자가 기적적으로 회생했습니다. 이 기사는 음악을 듣고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한국일보 김성우 기자는 식물인간 된 40, 평소 애창곡 틀어주자 소생이라고 타이틀을 올렸습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난 95년 작고한 대만 가수 덩리쥔의 노래가 식물인간을 소생시키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면 음악을 칸트의 물자체라고 할 수 있고, 토인비의 도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그 음악을 찾아 나서겠지요.

 

기사를 가만 읽어보니, 그의 아내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남편의 곁에서 말을 걸면서 자문자답을 했습니다. 또 남편이 덩리쥔의 열렬한 팬인 점을 감안, 혹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매일 아침, , 저녁에 최소한 한 시간씩 거르지 않고 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병원의 주치의는 덩리쥔의 음악이 환자의 뇌세포 신경에 자극을 주어 그가 깨어나고 빨리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기자도 의사도 바른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 “물자체혹은 외부의 도전이 그를 깨어나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판단 하나는 옳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진정한 물자체며 도전은 그의 아내입니다. 아내의 정성과 사랑입니다. 남편이 뇌사 판정을 받았어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소망을 품고 간호한 정성과 사랑입니다. 세상에 뇌사에서 소생한 사람들 이야기는 많지만, 단 한 경우도, 아무도 돌보지 않는데 스스로일어난 경우는 한 건도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덩리쥔이 누구야? 그 음악, 어디가면 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없겠지요?

 

남자들이 과로하는 세상입니다. 4050, 위험합니다.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곁에 있는 아내에게 살짝 물어보십시오.: “믿어도 돼?”

 

그러나 그 아내를 움직인 동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그런 착한 마음씨를 주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생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옳습니다.

 

뇌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오늘 영적인 부활과 패턴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정성과 사랑으로 뇌사를 극복할 수는 있지만, 그걸 가지고 죽음에서 부활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일깨움입니다. 김춘수의 은 유명합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 불러주기가 없었다면, 내게로 올 리도 없고, 와서 꽃이 될 리도 없겠습니다.

 

<부활은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을 내리셨을 때, 나사로가 순종했습니다.

부활의 명령은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날마다 부활의 명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부활은 선택사항(option)이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부활이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나중에, 죽음 이후에야 관계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의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에 참여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Then those also who have fallen asleep in Christ are lost.

If only for this life we have hope in Christ, we are to be pitied more than all men.

고전 15:18-19

 

행복한 성도는 1. 하나님의 부활 명령을 듣고 (부활=생명임을 깨닫고), 2.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말씀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말씀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사로야, 나오고 싶니?

나사로야, 나올 생각이 있으면 나오려므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렇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이었습니다. 죽은 자에게 부활은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선택사항으로 압니다.

그러나 부활은 명령입니다.

복종해야 합니다.

 

거역하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해야 합니다. “재림 때 부활을 위해서는 오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은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변화. 그것은 중심이동”(中心移動)입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그 중심이동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부활이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루살이일 뿐입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죽음을 놓고 두 가지로 사람을 가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 사람과, 죽으면 영생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죽음으로 끝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의 세계로 도망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버리자!”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음의 세계는 쓰레기장이 아닙니다. 파묻어 버리면 그만인 세계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소망이 없다면 무서운 일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다면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바로 오늘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그 날에 이뤄집니다.

오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부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5장에서 났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1. 부활과 2.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재림 때 부활 명령이 떨어집니다.

성도의 생활은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언제 부활의 명령이 떨어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재림 때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재림 때의 부활이 낯설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재림 때 부활을 맛보려면 지금부터 날마다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날마다 부활명령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에 머물지 않음입니다. 생명으로 일어섬입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부활입니다.

2. 부활의 때는 주님의 강림하실 때입니다. “나팔소리가 울릴 때, 우리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3.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것입니다.

4.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르실 때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자!”입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1. 이 천한 세상에 오셔서, 2. 모진 고난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3. 부활하셨을까요?

 

이것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없이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잠들지 않고주님을 따라서 영의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에 있습니다.

 

그 부활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기다리는 바로 그 부활의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그 주제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聖徒)란 무엇입니까? “거룩한 무리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무리입니다.

거룩()은 무엇입니까? “분리입니다. 그냥 따로 떼어놓는 모든 분리를 거룩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분리된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편에 분리되었다 함은 무슨 말입니까?

세상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영이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신령진정으로야 가능합니다.

신령은 곳 성령이요, 진정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중요한 일이 다 그렇듯이, 마땅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성령과 말씀으로써 거룩함에 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기억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부활로써 거룩하게 된다 함은, “나 중심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을 경험한다고 할 때, “하나님 중심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감정, 여건, 환경에 따라 움직이던 삶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시골 사립문은 돌쩌귀가 있습니다. 문은 돌쩌귀를 따라 돌아갑니다.

나를 중심으로 돌던 문이면, 하나님 중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래야 합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그래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1. 기뻐함, 2. 기도함, 3. 감사함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성도의 마땅한 삶의 태도입니다.

 

나는 한결같은사람을 좋아합니다.

나는 언제나 한결같은부모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언제나 한결같은사람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언제나 한결같은아들을 낳았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제 어미처럼 언제나 한결같은여자를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웃자고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한결같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이 밤에 뚫고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를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대비하는 가장 좋은 전략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군대 생활할 때 경계근무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결코 용서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항상성을 잃어버린 군인은 용서할 수 없는 군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부활주일 아침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거룩함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과 말씀입니다.

방언입니다.

언어생활을 바꾸는 것입니다.

남이 듣든지 안 듣든지, 항상 똑같이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1. 항상 기뻐함

2. 쉬지 말고 기도함

3. 모든 일에 감사함

 

1. 항상 기뻐하십니까?

사람이 어떻게 항상기뻐하고만 살 수 있습니까?

슬픈 세상입니다. 매운 음식이 매력이 있듯, 우는 노래가 유행합니다. 그런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항상기뻐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가능합니다.

죄의 짐을 지지 않으면 항상 웃을 일 뿐입니다.

실천해 보십시오.

주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그러면 웃을 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이제부터 웃을 일밖에 안 남았다!

 

믿어지십니까? 아니라구요? 믿으셔야 합니다!

 

2.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까?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응답 없는 대화는 한 두 번입니다. 계속하다가는 미칩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씀읽기입니다.

 

교회는 말씀읽기를 대단히 크게 강조합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오후 1-2시 성경공부가 열립니다.

교회 성경공부의 교재는 성경 자체입니다.

성경을 읽자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시간에 한 장을 읽어도, 읽고 묵상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해도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기도를 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기도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 제일 행복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기도하러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3. 모든 일에 감사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문제가 닥쳐왔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실패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

 

 

<대화 1>

마르다 : 예수님.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 : 누가 그 죽은 시체 걱정 하라더냐?

시체가 그냥 일어나지 않을 것은 나도 안다.

이제 네가 믿어야 할 것은 내 능력이다. 내가 하는 것을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대화 2>

어떤 사람 예수님. 저 사람은 안 됩니다. 돈도 없고, 건강도 안 따라줍니다.

성질도 고약합니다.

예수님 누가 저 사람 걱정하라고 했느냐?

나도 그 사람 안 되는 것 잘 안다.

너는 내 능력, 내 사랑, 내 관심, 내 기도를 믿어라.

 

<대화 3>

당신 예수님. 저 안 돼요. 저 겉보기와는 달리 문제가 많아요.

예수님 누가 네 걱정 하라더냐?

내가 네 겉모습에 속고 있는 줄로 아느냐?

속아서 여태 네 곁에 있는 줄로 아는구나?

, 아직 죄 짐을 들고 있구나?

그거 나한테 맡기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널 사랑한다. 내 사랑을 믿어라.

 

결론

 

예수님은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우리 마음 문 바깥에 서 계십니다.

주님의 명령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명령에 순종해서,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날은 언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을 안다는 사람은 거짓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알려주시지 않으실까요?

항상성을 갖게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항상 똑같이 일정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소개할 때 늘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속고 있는 것입니까?

 

좋은 사람은 기분파(氣分派)가 아닙니다.

기분파를 만나 교제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우리 중에 기분파가 있다면, 빨리 성질을 고쳐야 합니다.

곁엣 사람을 다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늘 일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렇게 일정한 여러분이 정말 좋습니다.

 

주님 안에서 이렇게 귀한 만남을 허락하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기도 Prayer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 저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정한 마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게 하옵소서.

말과 행실이 다르지 않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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