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 /살전5:12-15/ 이상웅목사
2024-12-26 07:13:37
(갈렙추대-은퇴예식)
I. 아름답기만 하여라
♪가는 세월 그 누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서유석 집사님의 노래이죠.
시간과 세월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가면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병 드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이별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에 순복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임직예식이 있었습니다. 이젠 내 삶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3부예배 시간에는 은퇴예식이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런데 무슨 은퇴냐? 임직에는
은퇴가 있지만 사명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죽어야 끝이 난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대로 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산국화이어도 좋고 나리꽃이어도 좋은 것이다.
아니 달맞이꽃이면 또 어떤가.
(도종환 시인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는 산문집에 나오는 글)
장미만 꽃이 아니라, 채송화, 들풀 한 송이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강병화 교수의 「잡초는 없다」는 책도 있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참 아름답습니다.
중천에 떠서 작렬하는 태양도 아름답기만 합니다.
진도에 친구들과 함께 가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저곳 구경을 했는데 아직도 눈에 아르는
거리는 것은 저녁에 지는 노을, 석양의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봄에 파릇파릇 피어나는 녹색 나뭇잎, 여름의 울창한 숲, 가을에 맺혀지는 열매에 떨어지는
낙엽, 앙상한 가지 위에 하얀 눈이 쌓여있는 겨울 아름답기만 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자녀들이 자라는 것 얼마나 아름답고 예쁩니까?
청년들이 씩씩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 희망이 보입니다.
그리고 무르익은 장년들 노련한 노년들 어느 세대고 아름답지 않은 세대는 없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봤던 인생 여정을 뒤돌아 보면 어느 순간이 가장 아름다웠습니까?
언제가 가장 절정이었다고 느껴지십니까?
100세가 다 되어가는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해보면 항상 그분은 “지금”이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100세를 살고 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 교수님에게 누가 물었더니
솔직하게 얘기하면 내 생애에서 가장 활기차고 왕성하던 때는 77세쯤 되었다.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오늘 은퇴하는 분들 아직도 인생의 절정이 되려면 수년이나 남아 있습니다.
시편 102편 24절에 “나의 중년의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그런 시가 있습니다.
중년 사망률 1위 대한민국에서 잘 살아서 은퇴를 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나이가 들면 은퇴하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살아 보니 그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누군가 제게, 목사님의 생애 가운데 절정이 언제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순간순간 언제나 저는 클라이막스였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오늘
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후회함이 없도록 항상 죽음을 끝자락을 준비하고 살아왔던게
제 인생입니다.
II. 종려같이 백향목같이
정현종 시인의 낡은 용달차 하나도 꽃을 싣고 가면 꽃밭이 될 수 있다는 시가 있습니다.
쓰레기를 싣고 가면은 쓰레기가 되는 것이고 꽃을 싣고 가면 꽃밭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입니
다.
「작은 국화분 하나」라는 시입니다.
용달차가 작은 국화분 하나를 싣고 간다.(동그마니)
아니다 모시고 간다.
용달차가 작은 국화분 하나를 모시고 간다.
용달차가 이쁘다.
용달차가 저렇게 이쁠 수도 있다.
기사도 이쁘다.
여러분, 시간이 가면 늙어가는 겁니다. 주름진 얼굴, 그리고 지붕은 기왓장이 날아가고 뒤에
서까래가 떨어져 나갑니다. 창문은 침침해집니다. TV 볼륨이 조금씩 조금씩 커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집이 기울어집니다. 기둥이 무너진 데서 가끔은 넘어집니다.
이게 인생살이이지요.
짧고도 재미있는 시를 쓰는 이환천 시인의 「거울 앞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대로 읽어야 되나 조심스럽게 읽어야 되나 망설여집니다만
아이 씨 땡! 깜짝이야! 매일 보는 난데 볼 때마다 놀라네.
내가 나를 보고 놀란다는 겁니다.
여러분 웃으시지만 금방 그런 세월이 오게 되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제가 주변에 보면 나이가 들수록 부패하는 사람이 있고 발효하는 사람이 있어요.
똑같은 냄새인데 악취가 있고 향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느냐. 내 인생에 무엇을 싣고 달리느냐.
여하에 따라서 꽃밭이 되기도 하고 쓰레기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마흔이 되면 그 얼굴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뜻을 돌보며 나이 들어간 한 신앙인 의인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63빌딩을 짓고 신동아 건설을 세웠던 최순영 회장이 말년에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많은 집을 지었는데 엄청난 빌딩을 지었는데 다 놓고 가네. 잃어버리고 가네.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은 교회 두 개 할렐루야교회와 온누리교회만 남더라.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편92:12~15)
종려나무 장수하는 나무입니다. 건강한 나무입니다.
한 나무에서 수십kg 큰 나무는 수백kg의 열매를 수확합니다.
종려나무의 부채 모양의 나뭇잎은 승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백향목은 사철나무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솔로몬 성전을 지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그 향이 진동하니 감히 벌레가 끼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살다 보면 감히 사탄이 끼지 못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그의 사역, 그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아름다운 인격의 열매, 언어의 열매, 사역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여호와의 집에 심겨진 나무들이 있는 겁니다.
III. 부흥의 세대여, 다시!
오늘 은퇴하시는 분들, 이분들이 어느 시간에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아 어떤 자리에 와
있는지 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 걸음을 함께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어느
세대가 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민족사 속에서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가장 화려한
인생을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이분들이 태어날 때는 6.25 전쟁이 계속되거나 6.25전쟁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우리 윗 학년은 두 반, 세 반 그래요. 52년생과 53년생은 모두 다 한
반이 채 되지 않습니다. 52년생이 되려고 하면 전쟁 중에 잉태되어 전쟁 중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게 쉽겠습니까? 은혜 아니면 못 태어나는 겁니다. 53년생들 전쟁 중에 잉태되어
서 전쟁이 끝나기 전에 태어나거나 늦둥이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태어나야 되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세대가 태어나던 날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가장 불쌍한
나라, 황폐화되져 폐허 위에 살아왔던 세대가 바로 이 세대입니다.
70년 여정을 달려오면서 제1차, 2차, 3차, 4차 산업혁명 문명사적 전환기를 다 거친 세대가
이 세대입니다. 서구에서는 4차 혁명시대까지 경험하는데 200년이 더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짤막한 시간 내에 집약적인 경험을 하며 달려왔습니다.
이들이 태어날 때 국민 소득은 50불, 100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3만불, 4만불 세계
에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분들 어린 시절에 만들어졌던 단어들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죽겠네 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단어 뒤에 죽겠네가 붙습니다. 기뻐죽겠네. 슬퍼죽겠네. 배고파 죽겠네. 배불러 죽겠네. 바빠
죽겠네. 심심해 죽겠네.
그뿐이 아닙니다. 모든 입에 먹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굿모닝(good morning) 아침 잡수셨습니까? 굿애프터눈(good afternoon) 점심 잡수셨습
니까? 굿이브닝(good evening) 저녁 잡수셨습니까?
인사하면서 우리 밥 한번 먹자. 여러분 뭐든지 먹는 겁니다.
뇌물도 먹고 감동도 먹고 엄마나 챔피언 먹었어? 먹는 게 남는 겁니다. 식은 죽 먹기입니다.
까 먹고 등쳐 먹고... 뭐든지 먹는 겁니다. 왜요? 먹을 게 없었다. 그 얘기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분들이 이 땅에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대한민국 크리스천의 인구는 40만
내지 50만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섬기는 사이에 천만 성도 정확한 통계를 말하면
은 900만 정점을 찍고 지금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부흥을 일으킨 세대입니
다. 한국교회 경제부흥을 일으킨 세대입니다. 민주화를 일으킨 세대입니다. 산업선진화를
일으킨 세대입니다. 소위 팽창 시대를 일으킨 세대가 바로 이 세대들입니다.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회 경제는 어떻습니까? 참 신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뭘
가졌습니까? 지하 자본이 있습니까? 석유 한 방울이 나옵니까? 인구가 많습니까? 땅 덩어리
가 넓습니까? 그런데 이런 기적을 이루며 살아봤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역사적인 신비입
니다.
잘한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잘 믿었습니다. 교회 열심히 섬겼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
지 기도했습니다. 잃어버렸다고 하면 이걸 잃어버린 것이고 되찾아야 한다고 하면 이걸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회를 다시 일으키는 본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걸
되찾으면 우린 다시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부흥의 세대 다시 한국교회를 일으켜야 될 세대이며 이들이 했던 기도로 다시 이 민족을
일으켜 세워야 할 세대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대가 되면 모든 걸 좀 접고 모든 것을 이제는 다 마무리하고 내려앉고
쉬어야 될 나이인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조용히 집에 쉬거
라 그랬습니까? 꿈을 꾸리라. 여러분 꿈을 꾸는 것은 어린아이가 할 일입니다. 꿈꾸는 일은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 노인들을 향하여 마지막 날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사명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는 청년들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며 꾸어야 될 그 꿈을 꾸리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끝내자고 조용히 쉴 나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널부러져서
아무거나 먹고, 아무 데나 가고, 아무 때나 자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더 해야 될 일이 있는 겁니다. 이 노인들이 꿈을 꾸리라!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퇴. 영어로 Retire 자동차 바퀴를 바꿔 끼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인생 삼모작 사모작을 시작할 나이가 바로 이 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세미나에서 “당신이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될 이유가 뭡니까?”라는 제목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싱거운 제목 다 있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써 내려가다가 살아왔던
지난 날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누구와 어떻게 더 건강하게 살 것인가를 써 내려가는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내 곁에 맡겨진 사람들을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지, 우리 손주가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도
보면서 증조 할아버지라는 이름도 들어보고 싶고, 교회를 섬겼던 여러분들과 함께 여름날
되면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불러서 냉면도 먹고 싶고 그리고 심학산에 저녁에 같이 손잡고
올라가서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당겨주고 저녁노을도 구경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이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열매,
더 많은 열매, 더 소중한 열매, 입술의 열매, 사역의 열매, 사람들을 섬겼던 섬김의 열매...
더 맺어야 하겠기에 좀 더 건강하게 잘 살아야지.
그래서 다시 한번 내려놓았던 아령을 손에 잡게 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IV. 종말의 승리자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의인은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리로다. 사실
은 지금부터 맺는 열매가 솔직히 영적인 열매입니다. 이 세상의 열매, 땅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야 될 열매를 맺어야 될 시대가 바로 이 세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시니어들에게 7up 인생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1) Clean up
나이가 들수록 몸을 깨끗하게 목욕 자주하고 다니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상처가 어떻고
걱정 근심이 어떻고... 이제는 마음을 좀 더 깨끗하게 하고 살라는 겁니다.
2) Dress up
집에 있는 옷 가운데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 오세요. 항상 낡은 옷을 입으면 평생
낡은 옷을 입다가 깨끗한 옷 남겨놓고 이제 여러분 돌아가시면 그만입니다. 깨끗한 옷을
입으라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언제 불러도 당당히 서야 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해야 될 나이가 되었으니 의의 옷을 입고 살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입고 다닐 깨끗한 구원의 옷을 입고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3) Cheer up
얼굴을 밝게 항상 웃으면서 사세요. 마음을 긍정적으로 내 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
버리고 이제는 근심 걱정 내려놓고 살라는 겁니다.
4) Shut up
내 주장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다고 해서 말하지 말고 이제는 귀를 열고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야 될 나이고 격려해야 될 나이지 내 옛날 얘기하면서 살 나이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5) Show up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될 곳,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섬기는 자리가 있을 때는 찾아서
다녀야 될 나이가 됐다는 것입니다.
6) Pay up
돈을 어디에 쌓아 놓아야 될 것인지, 늘그막하게 아무데나 투자하고 살지 말라는 겁니다.
조심스럽게 돈을 관리해서 김 집사님이 국밥 사면 다음에 내가 냉면 사고... 그러면서 살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7) Give up
내려놓고 포기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우자에게도 하고 싶다고 말을 다하면, 친구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내 곁에서 사람이 멀어져 가는 겁니다. 접으세요. 한 번 접고 두 번 접다 보면 품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이도 한 번 접고 두 번 접고 세 번 접어야 하늘을 나르는 종이 비행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 접고 또 접어야 물 위에 띄울 수 있는 종이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
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하고 사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접으세요. 하늘을 날던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7up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사실 날이 적은 세월이 남아있다면 이제는 인생 후반전에 접어든 게 사실입니
다. 웰빙하면서 사셨다면 웰 다잉을 준비하는 사는 겁니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느냐 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종말의 승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
다. 이 세상에 어떤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준비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무개 장로님 별세하셨대요.
기억하세요.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별세,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아무개 목사님 세상 떠나셨대요. 우리가 살아오는 목표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떠나고 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개 권사님 돌아가셨네요. 온 곳이 있는 겁니다. 그곳으
로 우리 모두가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그대가 이 땅에 태어날 때에 사람들은 웃었고 그대는 울었다.
그대가 이 세상 떠나갈 때는 그대는 허허하고 웃게 될 것이고
세상은 그대를 아쉬워하며 울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느니라.
대구에 대봉교회가 있습니다.
큰 감홍시 교회가 아니고 대봉동 대봉교회. 우리교회에 자주 와서 설교를 하던 박희종 목사
님이 시무하시다가 은퇴를 한 교회입니다. 전임자 가운데 박맹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본 교단 74회 총회장을 지내신 어르신입니다. 그 당시는 NCCK 진보적인 교회연합체만
있을 때에 복음주의 교단들이 하나가 되어서 한국사회를 섬겨야 된다 그래서 한기총이라는
연합기관을 만들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서 만들었지만 목사님은 명예회장을
하셨고 제1대 대표회장을 지내신 분이 대구에 계신 박맹술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어디에 가든지 간에 평생 함께 살아봤던 친구이기도 하고 목사님을 지켜주는 보호자
이기도 하고 목사님의 중보기도자이기도 하고 목사님을 늘 돕고 섬기던 장로님 한 분을
간증합니다.
이분의 별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입니다. 그 당시에는 주보에 누가 어디 병원에 입원했다, 누가 아프다, 누가 유학에
갔다는 소식이 주보에 나오니까 그걸 빼곡히 노트에 적어서 가지고 다니면 중보기도를 합니
다. 잠이 깨고 기도 생각이 나면 새벽도 없고 한밤중도 없고 교회로 갑니다. 그러면 송판때기
두 개 가지고 딱딱딱 부르던 순행꾼들이 거 누구요? 부릅니다. 장로님이 나 하나님의 아들!
그러면 순행꾼이 장로님을 교회까지 모셔다 드리는 겁니다.
요즘은 주일예배, 수요예배 모든 예배에 기도 순서자들을 미리 공고하지요. 그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다가 눈에 띄는 사람, 아무개 권사님 기도하세요.
아무개 집사님 기도하세요. 수요일 저녁 예배입니다. 그때는 삼일예배라고 불렀습니다. 장로
님 이름을 부르면 아무개 장로님 기도하세요. 장로님이 기도하면 짤막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기도하시는 분이신데 그날따라 기도가 길어집니다. 3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갑니다. 그러면
서 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합니다. 7분이 되었는데 말소리를 못 알아 들을만큼 중엉중얼
기도합니다.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교인들을 축복하며 기도하고, 병원에 입원한 성도
님, 병든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산업전선 외국에 나가 있는 교인들, 군복무 중에
있는 젊은이들 유학생들까지 이름을 다 불러가며 기도하더니 점점점점 말꼬리가 흐려지는데
쿵 하는 소리가 나며 옆으로 쓰러집니다.
교회 젊은 집사님이 장로님을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걸음 뛰지 않았
는데 장로님이 등 뒤에서 숨을 거듭니다. 그리고 3일 동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그 폭우 속에 모든 교인들이 장로님을 아쉬워하며 교회를 왔다갔다 다녀갑니다. 오히려
축제요 잔치였습니다. 그리고 상여가 나가야 되는데 비가 계속 쏟아집니다. 그래도 가야지
어떡합니까? 출발하려고 하는데 소낙비가 쏟아지다가 하늘에서 무엇이 막아서는 것처럼
비가 뚝 그치고 해가 번쩍 떠오르더니 상여 가는 앞길에 구름이 선명하게,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그런 구름이 떠오릅니다. 비가 올 때 왔고 그칠 때 그쳤고 무지개가 뜰 때 떴겠지!
그러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여 뒤를 모든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다 나온 것처럼 줄이 끊어지지 않고 따라
가면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네. 찬송이 그 마을을 떠나갈 듯이 부르며 상여가 나갑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이게 바로 마지막까지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그 길이며 오늘 사역을 마무리하는 귀한 분들이 오늘 그 길 걸어봤음을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격려받는 귀한 이 날,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은혜가 넘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생활, 이렇게 합시다 /살전5:12-14/ 권오선 목사
2024-07-28 11:13:20
유럽지역에서 제일먼저 세워진 교회는 빌립보교회이고,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중심적인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바울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개종자들을 무시하는 텃새도 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신다는 잘못된 종말관으로 일을 하지 않음으로서 교회가 크게 혼란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비판했습니다. 참 어려움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고린도교회가 참 혼란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는 공통적으로 시련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린도교회는 그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함으로서 지금도 분열과 혼란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려운 문제들을 성도들의 신앙적인 지혜로 잘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리도 교회를 본받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본 받으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초대 모든 교회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내용은 다르지만 문제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은혜롭게 성장하는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과 지혜로 극복해 냈기 때문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교회는 극복하지 못하니까 고린도 교회처럼 됩니다. 참 불행합니다.
어떻게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는 길을 본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시한 방법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은혜롭고 모범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예안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고 성장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수고하는 자들을 알아주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12,13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교회의 봉사자들을 알아주고 가장 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런 교회가 은혜롭게 성장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은혜롭게 성장하는 교회는 봉사하고 수고하는 교인들을 칭찬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비록 나는 봉사할 환경이 잘 안되어서 못하지만,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안교회에도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회사나 개인적인 일이 바빠서 수고하는 현장에 동참은 못하지만, 대신 저녁에 와서 봉사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홈페이지에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글을 올리기도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희망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교회는 자기도 하지 않으면서 봉사자들의 수고를 깎아 내리고 비판하기 바쁩니다. 봉사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낙심시키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자기는 수고도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면서 봉사자들을 뒤에서 욕합니다. 이런 교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마귀의 장난에 놀아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끼리 파벌이 나누어져서 예수파에서 봉사하면 바울파에서 비난하고, 게바파에서 봉사하면 아볼로 파에서 비난합니다. 이런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가 아니라 사탄이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하는 모든 분들을 알아주고 귀하게 여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깨끗한 환경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토요일마다 교회를 청소하는 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갑 지나신 분들이 청소하십니다. 매주일 우리가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른 아침부터 주방에서 수고하시는 봉사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이 신앙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은 교사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일 은혜로운 찬양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주일 오후 6시까지 연습하는 찬양대의 수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관리가 되는 것은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면서도 교회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 말씀을 드릴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수고하시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보배 같은 귀한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귀하게 여기는 교회가 아름답고 은혜로운 교회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번동제일교회 백낙기 목사님의 말씀에 크게 감동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 노회 목사님 가운데, 노회로부터 징계를 받아야 할 분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목사님을 치리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백목사님께서 전권위원들에게 “그 한 사람 목사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도했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나? 신중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을 교인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봉사까지 하는 성도를 만든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수고가 있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교회의 보배로 생각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이 귀하고, 봉사자 한 명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알아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봉사하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알아주고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우리 예안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다 보배 같은 교인들과 봉사자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알아주고 격려하고 귀하게 여길 때, 교회가 은혜롭게 성장하고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 교인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귀하게 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성도 간에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본문 13절 마지막에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위기의 상황에서 화목함으로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고 정결하게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지만,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죄를 용서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피조물이었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린도후서 5장 18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고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고, 성도 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화목하지 못하고 싸우고 시기하고 분란이 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화목이라”고 하셨습니다. 화목한 가정은 보기만 해도 은혜가 있습니다. 화목한 교회도 보기만 해도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예안교회를 화목한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 간에 화목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화목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노력하고 인내하고 수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하고, 내 마음대로 다하면 화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이 있어도 참고, 분노한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고 웃을 수 있을 때 화목이라는 축복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가운데 화목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성도 간에 화목이 있을 때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교회 교인들과 어울리면 우리 교회의 무엇을 제일 먼저 자랑하십니까? 대부분 교인이 많다는 것과 교회 건물과 시설이 좋다는 것, 교회 재정이 많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목사들이 모이면 제일 먼저 무엇을 자랑하는지 아십니까? 교인이 많은 것도, 건물이 아름답다는 것도, 예산이 많다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큰 자랑은 자기 교회가 화목하고 평화롭다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 예안교회가 화목하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은 세계에서 가장 고가의 가구와 전자제품을 갖추었다 해도 지옥과 같습니다. 그러나 화목하면 집안에 낡은 가구와 낡은 전자제품이 있어도 천국과 같습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성도 간에 화목이 있는 교회가 아름답고 은혜가 있는 교회입니다. 화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교제할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고 성도 간에 화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게으르고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붙들어 주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은 육신적으로도 약하지만, 영적으로도 약합니다.
교인들 중에는 야생화 같은 교인이 있고, 온실화 같은 교인들도 있습니다. 야생화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야나 산악지대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엄동설한을 견딥니다. 누구도 야생화를 보호해주지 않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생화 같은 성도들은 교회에서 무슨 험악한 말을 들어도 낙심하거나 예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온실화 같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누가 옆에서 한마디만 해도 쉽게 상처를 받고, 넘어집니다. 이런 온실화 같은 교인들은 약하니까 붙들어 주라고 합니다.
“그렇게 약해 빠져서 어디에 쓸거냐”라고 나무라는 것은 더 큰 상처를 줍니다. 이런 말에 약한 성도들은 상처를 받고 넘어집니다.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 유교의 특징을 비유로 잘 설명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홍수에 떠내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칩니다. 누가 건져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면서 웁니다. “아이고, 불쌍해라. 저러면 죽는데. 어떻게 하다가 빠졌나. 참 불쌍하다”고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행동은 안합니다.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건지기는커녕 호통을 칩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살다가 빠졌나? 빨리 헤엄쳐서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그가 너무 불쌍해서 그대로 물속에 뛰어 들어 그 사람을 건지고 자기는 죽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어떤 종교를 가르킵니까? 눈물만 뚝뚝 흘렸던 사람은 불교의 석가이고, 정신 차리라고 야단친 사람은 유교의 공자입니다. 자신은 죽으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종교입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약한 교인들을 붙들어서 생명을 얻게 하는 종교입니다.
게으르고, 마음이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이 넘어지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쉽게 상처를 받고 쉽게 믿음을 포기합니다. 이런 분들을 붙들어서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처럼 혼자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수양하고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함께 은혜를 나누고 함께 생명의 길을 가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약한 자들이 설 때가지 오래 참으라고 합니다. 농부들이 양식이 없다고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벼나 보리의 이삭을 손으로 뽑아 올리면 농사 망칩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내 아이들의 신앙이 빨리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내 남편, 내 아내의 신앙이 빨리 자라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고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면 탈이 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장시켜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합니다.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조급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내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영적으로 약한 분들이 있습니까? 지금 쓰러지고 넘어지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기도로 붙드시고 사랑으로 붙드시고 격려함으로 붙드시고 오래 참음으로 붙드십시오. 그럴 때 우리 예안교회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회생활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분들을 알아주고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성도 간에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함으로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약한 자들을 붙들어서 넘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미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복을 받고, 이런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교회생활 하십시다. 그래서 여러분이 복을 받고, 우리 예안교회가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함에 대하여 /살전5:12-15
2017-10-19 17:24:47
오늘 날 사회적인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데이트폭력입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무슨 말인가 할 텐데 요즘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하다가 어느 한 쪽에서 헤어지자고 이별을 통보하면 특히, 여자 쪽에서 이별을 통보하면 순순히 헤어질 수 없다는 감정을 폭력으로 나타내서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는 지경까지 가게 되는 것이 데이트폭력이라고 하는 근래에 생긴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도록 때린다는 것은 사실은 생각도 하지 말아야할 행위입니다. 순간적인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분노라는 감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늘 경계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세상에 모든 것은 조건적이고 타산적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분노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화가 나고, 욕도 나오고 그렇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조절의 능력도 중요합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본능적 분노를 제어하는 이성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정 표출에 있어서 여자가 민감할까요? 남자가 민감할까요? 남자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여자들이 더 민감한 듯하지만 연구 자료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남자는 일주일에 여섯 번 화를 내고 여자는 세 번 화를 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로 화를 내느냐를 보니까 여자는 보통 사람 때문에 화를 내고 남자는 주로 사물 때문에 화를 낸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주로 마음에 안 드는 남편이나 혹은 말썽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화를 내는 반면 남자들은 펑크난타이어, 잘 안 드는 면도기 등에 화를 내기 때문에 여자들이 더 민감한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합니다.
[존 헨더슨] 이라는 사람이 “식사시간 30분전의 감정을 가장 조심해야한다.” 고 했습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고 혈당이 낮아지면 신경조직이 가장 예민해지기 때문에 화를 더 잘 내기 쉬운 결정적인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감정이 고조되어 밥 먹다가 싸우는 겁니다.
남편이 반찬투정해도 입 꾹 다물고 밥만 먹고, 찌개가 식었어도 맛있다고 후루룩거리며 먹는 집에는 싸움이 없습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는 관용구를 잘 압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여하간 식사할 때마저도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화를 내고 분을 내어서 저질러지는 일들이 결코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이루는 지혜로운 삶을 배워야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속에는 악을 이루는 것보다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은 생각도, 철학도, 신념도 악보다는 선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더 많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발견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형벌의식에 눌려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애초부터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억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간혹 “죽지 못해 산다.” 는 사람도 있고, “팔자려니 하고 산다.” 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머릿속에는 그 의식이 꽉 차있기 때문에 그 아까운 시간과 그 많은 시간들을 스스로 노예적으로 삽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드라마나 소설을 보게 되면 간혹 부부가 싸울 때 이렇게 싸우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부인이 “이 집에 시집와서 아이 낳아주고 밥해주고 빨래하고 온전히 당신 하나만을 위해서 사는 내가 완전히 이 집의 노예요, 돈 받지 못하는 식모지 뭐냐!” 고 그러면서 대듭니다.
그러면 남편은 “마누라하고 자식새끼들 벌여 먹이느라고 밖에 나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수고하는 나는 이 집에 머슴이라.” 고 그러면서 싸웁니다. 가만히 보면 그 집에는 머슴과 식모만삽니다. 만약에 정말 그런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자기 의지가 아니라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생을 사는데 억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부부가 되었으니 억지로 살아가고, 부자(父子)가 되고, 모녀가 되었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억지로, 부득이해서, 할 수 없이 산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그나마 이렇게라도 살지 않으면 벌받을까봐 무서워서 매맞을까봐 무섭고, 저주받을까봐 무서워서 산다.’ 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매사에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투자의식(投資意識)을 가지고 상 받을 마음으로, 보상받을 기대를 가지고 삽니다. 그랬다가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원망 불평입니다. 그래서 허영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위선적인 사람이 되기도 됩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오는 것이 있어야 된다.” 는 이 보상의식이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보상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신앙의 보상이란 이미 주어졌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천국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없는 것이 없고, 부족함도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땅에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살면서 늘 무언가를 더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고로 세 번째의 삶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존경과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인 일을 하는 자세입니다. 일이 주어졌다는 것이 감사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더군다나 나 같은 미천한 자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일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언제나 선한 일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5:41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처음 오 리까지 가는 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초행길에 길 안내를 부탁하니까 거절하기가 안돼서 가주었습니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억지로 피동적이고 수동적이고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오 리를 가서 보니까 만만치 않습니다. 혼자 보내자니 또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내가 더 가주겠습니다.” 하고 십 리까지 동행하는 마음입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내가 선택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일의 발단은 억지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기쁨으로 더 해줍니다.
오늘 성경은 선(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선이란 화목에서 오는 것이요, 오래 참는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마음의 태도에서 비롯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곧 그가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15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성경에 나오는 비유를 잘 압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이 외딴 곳에 이대로 두면 죽습니다. 이 상황에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을 해친 강도가 이 근처에 있을 것이고 내가 이 사람을 돕는다고 어름어름 하다간 나도 죽을 수 있다.’ 어차피 죽을 사람 돕다가 나 죽을 거 없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한 레위인도, 제사장도 도망가 버립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생각은 ‘내가 이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중요한 생각을 합니다. 생각의 중심이 나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겁니다. 여기에 사마리아 사람의 선함이 있는 것입니다.
[리차드 니버] 라는 신학자는 이 비유 속에 나오는 세 종류의 인간상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강도>와 같이 목적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레위사람>과 <제사장>처럼 자기 공동체에 충실하게 살겠다는 사람이 있으며, 그 다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은 책임적인 인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선함이란 이런 책임적인 인간상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 가 어느 날 시골에 갔다가 기차가 막 떠날 때에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간신히 올라타면서 신발 하나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간디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남은 신발을 벗어서 열차 밖으로 던지더랍니다. “왜 던지느냐?” 물었더니 “누군가가 주워서 신을 때 하나 가지고는 안 되잖아?” 하더랍니다.
자기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간디라고 하는 사람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게 합니다. ‘나에게 어떤 손해가 되느냐!’를 생각하기 보다는 ‘저 사람이 어떻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데서 선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선함에 대하여 생각할 때 역시 우리는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함의 본은 자기희생과 버림입니다. 목숨까지도 버렸다는 사실보다 더 큰 희생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보다 큰 선함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것이 우리를 향한 선함의 극치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다고 확신한다면 선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나 자신을 먼저 보고 남을 보려고 하는 세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 그 마음까지도 먼저 볼 수 있는 선함에 대한 신앙적 시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오늘 말씀처럼 악이 다가 올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선함에 대하여는 우선적으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항상 행할 수 있는 삶을 사십시다.
크리스천 코드 /살전5:12-18/ 하용조 목사
2015-05-26 11:39:47
성경을 보면 곳곳에서 독특한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코드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타를 배울 때 먼저 코드부터 배웁니다. G, C, A 코드…. 코드를 익히고 난 후 줄을 잡으면 소리가 화음이 되어 나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코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코드 창조, 말씀, 약속, 구원
하나님의 첫째 코드가 창조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생긴 것도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지와 그 사이 만물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사고 방식은 하나님의 코드는 창조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창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기독교의 특징 하나는 말씀이라는 코드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어라’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경이고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중심으로 모든 것의 기준을 삼고 마지막 권위로 삼습니다. 우리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방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최고 권위를 가지고 때문에 혼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록된 말씀을 믿고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성육신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독특한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또 하나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특징은 ‘약속과 구원의 코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빠져 죽게 된 모든 인간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코드 가운데 독특한 것은 ‘희생’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자신을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지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코드 무신론, 진화론, 유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코드가 있는데 세상에도 나름대로 코드가 있습니다. ‘무신론 코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치 닻을 잃어버린 배와 같은 것입니다. 배가 떠다녀도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가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풍랑이 일 때 배가 묶여 있어야 하는데 줄이 끊어진 것과 같습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습니다. 인생에서 스스로 자신이 의미요 목적이며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신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코드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과 과학 그리고 지성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학문 과학 이성 경험을 중시하고, 경험이 없거나 이성에 맞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겁니다.
세상의 코드는 영이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유물론입니다. 모든 것을 항상 물질적으로 해석합니다.
세상의 코드는 진화론을 숭배합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운명론에 젖어 있습니다. 진화론도 나름대로 코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적 사고 방식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조작합니다.
DNA로 생명을 조작할 수 있으나 생명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절대 생명을 만들지 못합니다. 다만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명의 기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라고 주장합니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생명보다 물질을 우선 생각합니다.
불교에도 나름대로 코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그란 원은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되는 ‘무’라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코드에는 ‘은혜’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해탈’이라는 개념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절대자가 주는 위로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에는 계시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득도해 신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거니까 많이 힘듭니다. 불교 코드에는 창조, 비전, 개혁, 역사, 구원 등이 없습니다. 무한한 ‘무 ’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계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슬람 코드는 ‘성전’입니다. 그들의 코드 자체는 전쟁입니다. ‘코란’이 아니면 죽음입니다. 나의 편이 아니면 모두 원수입니다. 이슬람 코드에 또 다른 중요한 것은 ‘복수’입니다.
사랑과 용서 그리고 생명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삼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않고 모든 여자들의 얼굴을 가리게 만들고 오로지 ‘인샬라’, ‘알라’만 찾으며 인간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월드컵을 치렀습니다. 새로운 응원 문화가 생겼습니다. 한순간에 붉은 티셔츠가 ‘레드 콤플렉스’를 몰아냈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정서는 붉은 것만 봐도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붉은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색하고 좋아합니다.
성경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크리스천 코드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데살로니가 전서에 크리스천 코드가 있습니다. 네 가지 코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2, 13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크리스천의 첫째 코드 ‘공동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주의를 배격합니다. 하나님도 개인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도 공동체입니다. 공동 조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도 개인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120명에게 공동으로 임했습니다. 기독교의 존재 양태는 언제나 공동체입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실패자, 어리석은 자나 누구든지 교회의 본질은 서로 끼고 사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들끼리, 똑똑한 사람들끼리, 어떤 특별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존재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서로 같이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중에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병든 사람, 서로 안 맞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랑 안에서 귀중히 여기고 ‘너희끼리 서로 화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분열을 일으키고 편파당을 만든다면 크리스천의 코드가 없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큰 특징은 화해입니다. 고발하고 투쟁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코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슬림의 코드입니다. 기독교인의 코드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격려하고 화목하는 것입니다. ‘너희들끼리 서로 화목할 뿐만 아니라 서로 귀중히 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회 구성의 가장 기본 단위는 가정입니다. 가정에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기독교의 독특하고 유일한 코드입니다.
다른 종교는 대부분이 계급적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14절 말씀에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이 말씀이 순의 원리입니다. 온누리교회의 핵심적인 본질은 순에 있고, 공동체에 있습니다. 공동체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기준에 맞거나 맞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합니다.
주변에 규모 없이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권면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도와 주라, 힘이 없는 자들을 북돋워 주라,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사람의 공동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독교 코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이 말씀에서도 개인적인 삶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코드를 누르면 음악이 나오듯이 기독교의 독특성, 크리스천의 코드를 짚으면 기막힌 연주가 연출됩니다. 13절에?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절에 ‘권계하고 안위하고 붙들어 주고 오래 참으라’, 15절에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항상 선으로 대하라’는 크리스천의 코드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고 말하기 전에 나의 삶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느껴야 되는 겁니다. 크리스천이 말, 생각, 행동, 돈 씀씀이 등에서 남들과 다른 이유는 코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코드 ‘기쁨’
우리는 12~15절 말씀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에서 서로 하나 되는 코드를 찾았습니다. 16절 말씀에 새로운 코드가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 말씀을 잘 해석한 것이 빌립보서 4장 4~7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독교인의 독특한 코드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기쁨의 코드는 외형적인 게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진짜 기쁨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지워도 지울 수 없고 막아도 막을 수 없는 내면의 기쁨은 저절로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크리스천이 갖는 독특한 코드입니다. 이런 기쁨은 주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영원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환경에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셋째 코드 ‘기도’
세 번째 코드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기에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가 있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또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절망과 좌절과 패배가 있을지라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가능성을 만들어 주고 미래를 열어 줍니다. 기도는 희망을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기도가 노래요, 대화요, 찬송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몸 속에는 ‘기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너무나 많은 기도를 발견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강조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면서 낙망하지 말 것을 어떤 과부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기적을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방법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모델’을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 속에 기도의 코드가 심어지기를 축원합니다. 18절 말씀을 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넷째 코드 ‘감사’
네 번째 코드는 감사입니다. 시편을 보면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는데 모두 고침을 받아도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십일조이고 귀중한 것은 모두 십일조에 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있으면 어떤 불평도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절망, 좌절, 실패도 감사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가 있어서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에 항상 충만합니다. 죽는 순간에도 우리는 감사합니다. <찬양의 능력>이라는 책에 이혼하면서 감사하여 재결합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은 재앙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만든 재앙도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만든 재앙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재앙이라는 것은 지진 등 천재지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재앙은 인간 스스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재앙을 축복으로 바꾸는 것은 감사입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감사하십시오. 평생 일군 기업이 무너졌을 때 감사하십시오. 원하는 자리에 가지 못했을 때 감사하십시오. 그 감사는 천국을 만들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가 코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설계도, 계획, 방법, 비밀이다. 이렇게 살기만 하면 인생은 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결혼식 때마다 하는 설교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입니다. 앞으로 누가 결혼해도 설교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 말씀으로 똑같은 얘기를 많이 했는데, 설교할 때마다 은혜 받는 사람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제 자신입니다.
믿음이라는 코드! 희망이라는 코드! 사랑이라는 코드!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부부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꾸는 꿈이고, 서로 약점과 실수를 감춰 주는 사랑입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음이 나옵니다. 두 손으로 코드를 누르면 모차르트 음악도 나오고 베토벤 음악도 나옵니다. 코드대로 누르면 좋은 음악이 나옵니다. 잘못 짚으면 다른 음악이 나오게 됩니다.
또 바이올린도 정확한 코드를 켜야 좋은 음이 나옵니다. 믿음이라는 코드, 희망이라는 코드, 사랑이라는 코드, 그 코드를 붙잡고 있으면 병이 들었건, 사업이 망했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건 그리고 원하는 것이 전부 깨졌건 간에 코드대로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행복 코드 8가지
성경에 행복의 코드 8개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화해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그 코드대로 누르기만 하면 천국은 우리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코드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한 달 반 정도 머물다 돌아옵니다. 헤어지기 섭섭해서 얼굴 한번 보고 설교하고 싶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번 여름을 위대하게 만듭시다. 무덥고 습기가 많은 날씨에 짜증도 나겠지만 창조적인 여름을 만들 수 있습니다. 8월 한 달, 유치부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전 성도들이 큐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큐티 노트에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기록하는 축복을 갖길 원합니다.
올해 8월에는 감사, 기쁨, 기도, 믿음, 희망, 사랑의 코드를 눌러 보십시오. 큐티 노트가 누구에게 전해져도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록으로 남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들을 축복해 주시고
여름 한달 동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연주가
삶을 통해 이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이 세우시는 직분 /살전5:11-14, 딤전5:12, 갈6:6/ 김형익 목사
2021-05-19 02:19:08
약 3년 전쯤 교회의 집사, 권사 선출에 즈음하여 [교회와 직분]이라는 주제로 네 차례 직분에 대한 설교를 했고 지난 4월에도 장로 선출에 맞추어 장로 직분에 관한 설교를 한 차례 했습니다. 다음 주일, 집사와 권사 선출을 앞두고 다시 직분에 대한 설교를 두 차례 전하려고 합니다.
1.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세 가지 이유
제가 왜 직분자 선출을 할 때마다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3년 전 직분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할 때, 그 설교를 들으신 분들이 소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수는 그 이후에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에 대한 설교는 오늘도 필요합니다. 제가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듣고 배워서 이해한 것 보다는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에 이끌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실제로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이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직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각자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의 지난 교회 생활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배우고 이해한 것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이해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교정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가 벧샬롬교회의 교인으로서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직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셨던 하도례(Theodore Hard, 1925~2009)선교사님은 1981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장점과 활기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집사들이 대부분이 거의 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필자는 크게 실망하고 있다.
그들에게 집사란 흔히 하나의 명예적 직분일 뿐이고 장로가 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에 불과하고 있다.”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세번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큰 교회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큰 교회가 되지 않겠다거나 큰 교회는 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큰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합당한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크기가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요새 상고하는 요한계시록이 그것을 놀랍게 가르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큰 성 바벨론이 아니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 성경적인 교회가 되려면,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를 깨닫고 잘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직분입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항존직(恒存職)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이 직분이 존재해야 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직분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목사와 장로 직분(이 둘은 크게 장로 직분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집사 직분을 온 교회가 바르게 이해하고,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성경이 가르치는 기준에 따라 선출되며, 그들 각자가 자기 직분을 바르게 행사할 때, 교회는 바르게 세워지고 복을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직분자를 잘못 선출하면, 온 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직분이 (성경적으로) 개혁되면, 교회가 개혁된다”는 말을 합니다. 직분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직분자 선출을 할 때마다 저는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함으로써 모든 교우들이 성경에 합당한 기준으로 직분자들을 선출할 수 있도록 성경적 직분론을 다시 기억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세 가지 주요한 이유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시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다음 주일 교회의 집사와 권사를 선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 선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을 세워주시는지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가지는 책임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특별히 집사직분과 관련해서(권사직분을 포함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2. 성도의 소명: 교회를 세워라!
본문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주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11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합니다. 결론을 말하겠다는 것이지요. 11절을 보지요.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서로 덕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건축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집이나 구약 성전에 비유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순종과 거룩함으로 교회 공동체를 건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라는 말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가 된 모든 교인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덕을 세우는 것, 즉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돈 주고 일군을 사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서로를 돌아봄으로써 세워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언급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의 앞 부분에서 한 말씀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1:7-8).”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사람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2:13) 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를 본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전해짐으로써, 믿음의 선한 본을 보이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특징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1:3).”
이들의 믿음은 삶과 일로써 드러나는 살아있는 믿음이었고, 이들의 사랑은 형제를 섬기는 수고를 만들어냈으며, 이들의 소망은 모든 환난 중에 그들을 인내하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말로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참된 실재였습니다. 이것이 11절에서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을 때, 바울 사도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 11절에서 ‘피차 권면하고’라는 말을 듣습니다. 권면한다는 말은 보혜사를 의미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의 동사형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듯이, 모든 성도는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면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목사나 장로가 아닌, 모든 성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교회, 거룩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직분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하는 일이지만, 특별히 이 일을 위해 직분자들을 세우십니다. 12-13절을 보지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여기서 바울 사도는 직분자들을 언급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 직분자들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장로들만을 언급한 것인지, 아니면 집사 직분을 포함시킨 것인지, 이것도 아니라면, 사도가 특정 직분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에서 특별한 수고를 감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것인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규명하려면, 이들이 하는 일을 묘사하는 세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이 그것입니다. 이 세 단어는 이들이 하는 일을 묘사하는데, 맨 앞에 있는 ‘수고하는’이라는 단어는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총칭하는 역할을 합니다(찰스 워너메이커). 본래 ‘수고하다’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육체적 수고를 가리키는데 쓰이는 말인데(살후 3:8; 고전 4:12),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한 자신의 수고에 이 단어를 종종 사용하곤 했습니다(고전 15:10; 갈 4:11; 빌 2:16; 골 1:29).
두번째로 ‘다스리며’라는 단어는 주로 장로의 직무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직역하면 ‘선두에 선다’는 말인데, 앞장서서 본이 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5:12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라고 할 때,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고, 장로와 집사 직분의 자격을 묘사하는 디모데전서 3장에서도, 집(가정)과 자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딤전 3:4,12). 다스림은 장로 직분의 가장 기본적이고 특징적인 직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의 다스림과는 달라서, 힘으로 누르거나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삶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으로, ‘권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훈계, 가르침, 충고, 경고’ 심지어 ‘책망’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주 안에서 누가 누구를 훈계하고 심지어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가하다고 생각하지만, 교회에서도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분명히 성경은 그 일을 하도록 구별된 사람들이 있으며(그들이 직분자들—장로—입니다)
그들을 알아주고 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의 모든 성도를 향한 일이기도 합니다. 14절에서 바울 사도가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라고 할 때, 권계한다는 말이 ‘권하는’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라는 점을 볼 때, 이것은 비단 장로나 사도 같은 지도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장로들의 훈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에베소 장로들을 향해서 자신이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면서,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말합니다(행 20:31). 같은 말입니다. 이 일은 목양의 직분인 장로들이 어렵지만 힘써 감당해야 할 직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훈계는 실로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단어들의 의미와 정황을 고려하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장로들에 대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아마 데살로니가교회 안에 리더십과 관련하여 어떤 어려움이 발생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편지를 마치기 전에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들을 알아주고 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서신의 일차적 독자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누구를 가리켜 이 말씀을 하는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까지 알 수는 없을지라도 이것이 장로 직분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4. 우리의 약함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면 되는데, 왜 주님께서는 직분자들을 구별하여 세우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믿는 무리들이 한평생 함께 천로역정을 걷게 하심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없기에, 함께 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붙들어주고 권면하는 가운데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성도가 모든 성도를 책임져야 하지만, 과연 우리의 현실이 그러합니까? 우리 교회의 교인(멤버십)이 되려면, 6주 동안 주일 오후의 새가족 코이노니아에 참여한 뒤에, 목사와의 만남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등록카드만 작성하면 교인이 되는 보편적 관례에 비하면, 까다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저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교인됨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서로를 돌볼 책임을 가지도록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만을 제외하고, 교회의 모든 공적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교인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를 알고, 서로와 사귐을 가지며,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고 때로는 책망을 하기도 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서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인됨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직장에 매이고, 혹은 건강과 기타 여러 불가피한 이유, 또는 우리의 약한 믿음으로 인해, 서로를 향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런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교인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애써야 하겠습니다마는, 이 빈 자리를 채우도록 주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이 장로와 집사입니다. 장로는 말씀과 심방으로 모든 교인들의 영적 돌봄을 책임진다면, 집사(권사를 포함)는 모든 교인의 육적 돌봄을 책임지는 직분입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가족이 영적 돌봄만이 아니라 육적 돌봄까지도 책임지게 하셨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이를 위해 누군가는 배나 수고하고 애씀으로써 모든 성도의 책임 가운데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2)”고 말씀한 것도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사도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그들을 ‘알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은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의미를 넘어, 존경하라는 의미까지 내포합니다. 종종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목사와 장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참된 마음에서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 안에서 귀하게 여기기 위해서, 우리는 목사를 청빙할 때 보다 신중해야 하고 장로를 선출할 때 더욱 분명한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선출해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목사와 장로를 결정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교인들 자신입니다.
존경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외적 스펙을 보고 목사를 청빙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장로를 선출할 때도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선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장로가 된다고 해서 그를 존경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우리는 이 일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합당하지 않은 자를 존경하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너희 가운에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고 권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직분자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 역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이런 수고를 감당하는 자들이기에 존경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한삼서에서 사도 요한이 언급하는 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요삼 9-11)는 아마 교회의 장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그를 존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의)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요삼 11). 하지만, 여러분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고 까다로워서 그들이 말씀에 서서 참된 마음으로 교회의 지체들을 섬기지만, 그들이 가진 어떤 약점들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 행하는 일이며, 피차 덕을 세우는 일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그릇이지만,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불러 직분자로 세우시는 우리의 형제들 역시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분에 대한 존중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사도가 직분자들을 향해서 취해야 할 성도들의 마땅한 태도로 언급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멀리서 존경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도들이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이고 특별하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단서가 있습니다.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하는 현저한 수고들과 열매들을 인하여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격이나 인품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하십시오. 부족할지라도, 그들이 하는 수고와 그 일을 인하여 성도들은 그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의미를 곰곰히 묵상해본다면,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에 고심하는 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저는 자신이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로서 이런 구절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곤혹스럽습니다. “나한테 잘하라”는 이야기로 듣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피할 수 만은 없습니다. 이 원리를 조금 확대하여 실질적 예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들은 성경에서 언급된 직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자원함으로 감당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오후 교리 공부에 참석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성도들이고 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배나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매 주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수고를 알아주고 사랑 안에서 귀히 여겨야 합니다. 가령, 지난 주간에 가족수양회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교육부 프로그램을 별도로 진행하였습니다.
누군가의 수고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하셨지만, 특별히 신진현형제와 김범렬형제는 세 번의 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하고 우리 자녀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수양회가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기도하고 고민하며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수고를 알아주고 그들이 감당해준 수고로 말미암아 그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선출 그리고 존경과 사랑
이제 말씀을 맺기 전에 교훈적 적용점들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장로 직분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교회 생활의 원리로서 조금만 확대 적용해본다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모든 성도의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사의 일, 장로의 일, 혹은 집사의 일이나 기타 직분자들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세우는 일은 성도의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로 여러분 모두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는 말씀은 ‘형제들’인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14절에서 사도는 다시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성도들은 형제 중 게으른 자들을 권계해야 하고(12절에, ‘권하다’와 같은 단어),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해야 하며,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직분자들의 일이기 전에, 모든 성도의 일입니다. 여기서 ‘게으른’이라는 단어는 군사용어로서, 대오를 맞추지 못하고 벗어나는 사람, 질서 없이 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Leon Morris).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의 결론을 쓰면서, 데살로니가 교인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을 지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으로 인하여 주님은 교회에 직분을 주셨고 직분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지만, 우리 중에서 직분자들로 세우집니다. 직분자들은 성도로서 하는 일을 몇 배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인해 교회에 직분을 주시고 직분자를 세우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저들의 수고가 교회를 얼마나 복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직분자들이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직분자들은 주님이 규정하신 자기 직분의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고, 성도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천로역정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순례자들을 섬기라고, 담대를 붙여 주셨고, 또 진리의 용사와 불굴과 같은 강한 자들을 붙여 주십니다. 그들이 앞장 서고(인도하고) 뒤를 지켜줌으로써 연약한 순례자들이 그 험한 순례의 여정을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중에서 담대를 일으키시고 또는 진리의 용사나 불굴 같은 사람들을 일으키사, 우리 중에 가장 약한 자라도 이 천로역정을 완주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직분자들이 많다면, 그저 이름만 가진 직분자가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열심으로 서로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지만 이 일에서 배나 수고하여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는 직분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세워진다면, 그 교회는 얼마나 복된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우리는 다음 주일 예배 후에 공동의회를 열고 우리 교회에서 집사 직분과 권사 직분을 받아 섬길 형제들을 선출해야 합니다. 교회의 교인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직분자를 선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한 주간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투표로써 직분자들을 선출해야 합니다. 나와 친한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존경하고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셔야 합니다. 한 주간 특별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어떤 분이 집사 직분의 직무에 합당하고, 어떤 분이 권사 직분의 직무에 합당한지를 열심히 찾아보십시오.
그러나 선출이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는 선출된 직분자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교회를 세우라고 요구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뒷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 모든 교인들은 자신의 직무를 언제나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자들은 배나 수고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뜻대로 세워져 감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주님께 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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