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합니다 /살후1:6-10
2018-05-12 12:53:16
찬양받기에 합당한 하나님 >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 하나님을 최대한 높이며 기쁘고 즐겁게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 중에는 자기고백이 주제인 찬양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의 참된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다시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새로운 감격에 젖기 때문입니다.
병으로 신음하는 진실한 성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참 괴롭고 힘드네요.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해요.” 고통스런 병중에도 구원 얻은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면 병을 극복하는 능력도 생기고 힘들고 따분하고 무겁고 괴로운 하루를 그런 대로 가볍게 넘길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 은혜가 마음속에서 샘솟듯 매일 새롭게 솟아올라야 합니다. 그런 은혜에 젖으면 매 순간마다 찬양이 나올 것입니다. 그처럼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구원의 감격을 늘 잊지 않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은혜를 주시면 늘 찬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찬양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왜 하나님의 심판이 찬양의 주제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살면서 원통하고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가슴 속에 있는 깊은 상처를 위로 받을 만한 근본적인 원천을 세상에서는 거의 찾기가 힘듭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성도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심판입니다.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상처 입은 일, 사랑하면서 살려다가 상처 입은 일, 믿음으로 살려다가 핍박받은 일, 큰 꿈과 가능성이 있어도 예수님 때문에 포기함으로서 당한 손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상해주는 것입니다. 언제 보상해줍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보상해주십니다.
못된 짓을 하면서도 승승장구하고 악을 맘대로 저질러도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심적인 고통이 큽니까? 왜 심판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날에 우리 눈에 비친 세상의 잘못된 모든 일들을 다 처리해주심으로 의는 의대로 불의는 불의대로 뚜렷하게 심판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생각하면 억울하게 고통 받는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무서운 가공할만한 사건이지만 진실한 성도에게는 기뻐서 찬양할 수밖에 없는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그 심판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생각만 해도 신이 납니다.
가끔 교인 중에 신실한 분이 어렵게 지내는 것을 보면 어떤 때는 한이 될 정도로 마음이 아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런 신실한 성도는 하는 일이 빨리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계속됩니까? 하나님! 그분처럼 순수하고 신실한 성도가 왜 그렇게 힘들게 지내야 합니까?”
그 시련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시련 중에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속에 항상 안타까운 응어리가 있습니다. 그 응어리가 어떻게 풀립니까? 재림하실 예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 풀릴 것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니까 심판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심판이 공의롭지 않다면 진실한 기쁨과 찬양이 나올 수 없지만 예수님의 심판은 공의롭기에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많이 겪습니다. 할 말이 많아도 조용히 넘겨야 할 일도 많고 예수님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손해를 본 일도 많을 것입니다. 거짓말로 살았다면 이미 부자가 되고 재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재벌이나 부자들이 거짓말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여러 상황을 볼 때 엄청난 부자와 재벌이 되려면 진실하지 못한 무엇을 가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양심도 없이 돈만 추구하며 살았다면 더 화려하게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함을 거부하고 예수 믿고 의롭게 살려고 했기에 손해 본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 손해를 보면서도 내면에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 세상에서 손해 본 것을 몇 배로 갚아주셔서 우리를 위로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분명히 오기에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심판의 날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갚아주시는 공의의 하나님 >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까? 하나님께 맡기면 스스로 갚으려고 할 때보다 더욱 하나님이 잘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7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바울 선교 팀도 극심한 환난을 받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이 안식으로 갚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이뤄집니까? 본문 7절 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그때 예수님은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때 공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 때에 누가 형벌을 받습니까?
본문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죄 사함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힘이 있어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힘을 잃고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습니다.
그 예수님의 재림은 어떤 반향을 일으킵니까?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예수님의 재림 후에 예수님은 놀라울 정도로 큰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그때 왜 사람들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재림 후에 기막힐 정도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고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 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합니다 >
살면서 신실하게 믿고 헌신해도 어려움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기막힐 정도로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심을 뚜렷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 그래서 그랬군요!”라는 감탄이 끊임없이 입술에서 나오면서 공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 되셔서 통치하실 날을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황홀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고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원래 그렇습니다. 또한 세상 지도자들이 실망스럽다고 너무 불평하지 마십시오. 세상 지도자는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왕 되신 예수님이 통치하실 그 날이 오면 모든 세상에서의 실망과 억울함이 온전히 풀어질 것입니다.
9남매를 낳고 막내가 뱃속에 있을 때 남편이 죽은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평생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을 한 번도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믿음도 좋고, 헌금도 잘하고, 주일도 잘 지키고, 믿음을 고수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왜 제 팔자가 이렇습니까?”
돌아가시던 날에도 주일 예배 후에 교회에서 2시간 정도 찬송하다가 귀가해서 바로 운명했습니다. 그분은 수시로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마 지금도 천국에서 기쁘게 찬송하며 지낼 것입니다. 그렇게 넘치는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자 9남매가 하나같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처지와 여건과 환경과 상황을 만나도 늘 기쁘게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만날 날을 소망하며 사십시오. 예수님이 주신 구원과 앞으로 펼쳐질 공의로우신 심판을 늘 마음속에 믿고 확신하면 환경에 구애되지 않는 기쁨과 평화가 마음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완벽하신 구원과 완벽하신 심판을 생각하면서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끊이지 않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부자와 나사로/ 지옥은 존재하는가? /살후1:7-9/계20:15/ 옥한흠 목사
2015-05-11 18:20:51
▲불안한 죽음
호스피스 일을 보시는 최 교수님의 책을 보면,
돈 많은 어느 사장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어느 날 몹시 떨며
두 무릎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서워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최 교수는 “왜 그렇게 무서워 떨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옥 갈까봐 그래요...”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그 최 교수는 “지옥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했더니
눈을 번쩍 뜨면서 “예, 가르쳐 주세요” 하더란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값없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고 일러주었더니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평안한 얼굴이 되고, 며칠 후에 돌아가시는데
부인한테 간곡히 부탁하기를 “여보, 최 교수님한테 지옥 가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해주세요”라고 하고
평안한 마음과 천사같이 빛나는 얼굴로 천국 가더란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영원한 고통의 장소,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1. 과연 지옥이 존재하는가?
▲추수는 반드시 있다
농사를 지으면 마지막에 추수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때가 있듯이
세상 끝 날에 심판이 있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사람들은,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지옥 같은 것은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서운 마귀의 미혹이다.
하나님은 밤낮 웃고만 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도 되시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다.
▲지옥의 원래 존재 목적
어떤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사람을 집어넣어 고통을 받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만든 곳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히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라고 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더니 한 교양 있는 여자는
“목사님, 20세기에 무슨 지옥설교를 합니까? 그런 설교는 집어치우세요!”
라고 하더란다. 그때 목사님은 웃으면서
“자매님,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사형당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나라의 질서와 공의를 위해서 반드시 형무소도 있고
사형집행도 필요한 것입니다.
정부가 국민을 괴롭히기 위해서 형무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고 심판의 하나님도 되신다.
▲1.무신론자들의 증언
영국에 무신론자 New Port는 죽어가면서 말하기를
“내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필요 없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의 진노 앞에 서 있다. 나에게 지옥이 없다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의 영혼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여, 나에게 소망이 있다는 부질없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이다”라고 말했다.
유명한 불란서의 계몽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기독교가 건설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자신)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해버리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하면서
무신론 책자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한껏 대적했다.
그는 또 “100년 안에 성경책은 다 없어진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면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여,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시오.
그러면 나의 값진 보물의 절반을 주겠소.”라고 말했을 때 의사는
“6주간도 못 삽니다” 했더니 의사를 못 살게 괴롭히면서
“그러면 나는 지옥으로 가는데 당신도 같이 갑시다!”라고 하더란다.
그가 죽은 후 스위스 제네바의 성서공회가 그의 집을 사서
성서공회 창고로 삼았는데, 없어진다던 성경책이 그 집의 천장까지 꽉꽉 차고
넘치고 지금까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무신론자 Thomas Scott 경은, 자신의 임종 때
“아, 나는 이 때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들이 다 있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전능자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멸망으로 들어간다.”
라고 탄식하며 운명했다.
M. F. Rich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붙는 난로 위에
1백만 년 동안 누워 있는 편이 차라리 더 낫겠다.”라고 했다.
그 외에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이 수없이 많다.
▲2.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증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번만 기록되었어도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사야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한 번 기록되었는데
7백년 후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임마누엘로 탄생하셨다.
①예수님은 지옥이 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8
(지옥에 왜 구더기가 있을까? 이것은 시체 썩는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사람의 썩는 살을 파먹기 위해 거기에 구더기가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차례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
만약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②사도 바울도 지옥이 있다고 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7~9
③수제자 베드로도 지옥을 말씀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 2:4
④사도 요한도 지옥을 말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0:15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3. 사람들의 증언
①영국의 주요 일간지인 “The Times”(98. 7. 22.)에 가톨릭 대주교인
Dr. George Carey 가 은퇴하면서
“성직자들은 교인들에게 지옥을 가르치라”고 했다.
Carey tells clergy to give congregation Hell.
“목사들은 반드시 세상의 종말과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전파해야 한다!”
preachers must proclaim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reality of
Heaven and Hell)라고 했다.
②D. L. Moody 선생은 “만일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 성경은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
기존 예배당도 오락 장소로 개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옥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란 죄 값으로 심판받고
지옥 갈 인간이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것이다.
◑2.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이 존재한다면 지옥은 어떤 곳인가? 흔히 지옥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 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지옥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다.
실제로 고통을 느끼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장소다.
강도는 그가 죽인 사람을 바라보며 양심의 고통을 느끼며,
투전꾼은 투전하며 속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끼는 곳이며,
음란방탕하며 살던 사람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며 후회하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교만하여 고집부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때 믿어둘 껄” 하며 영원히 후회하게 된다.
▲1.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이다
“영원히 꺼지지도 않으며 벌레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막 9:48, 마 5:22, 계 20:10, 계 10:14-15, 계 21:8
지금도 땅속 깊은 곳에는 유황불이 끓고 있다.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에 가면
화산이 폭발했던 곳에 팥죽같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며
누런 유황이 쌓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분 집에 있는 가스불보다 더 뜨거운 불이 꺼지지 않고 붙는 곳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많이 했는데 설교하다가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 대고 있어보라. 잠시 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소통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온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눅 16장에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나이다” 부르짖으며
“손가락으로 물 한 방울만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애원했으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랬더니 “나는 어차피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우리 집에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
고 했을 때 “세상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 지옥이 있다고 해도 안 믿은 사람은 안 믿는다”
라고 했다.
계시록 14장 11절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했다.
▲2. 피할 수 없는 곳이다
어느 빌딩이나 집에나 다 출구가 있고 비상구가 있는 법이지만
출구도 없고 영원히 피해나갈 소망이 없는 곳이다.
▲3. 끝이 없는 곳이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퇴원할 날이 있고
감옥에 간 사람도 출옥할 날을 기다리지만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영원히 끝없이 고통을 계속 받는 곳이다.
어떤 분은 천국이나 지옥을 실재하는 곳도 아니고,
시간 개념도 없는 곳이라고 설명하지만
지옥은 무시간 상태(Timelessness)가 아니라
끝없는 시간(Endless Time)이 계속 되는 곳이다.
참새 한 마리가 태평양 바닷물을 한 모금 물어서
깡충깡충 뛰어서 대서양에 뱉어놓으면서
그 태평양 바닷물이 다 마를 때까지 계속 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몇 억 만 년이 걸린다고 해도 영원에 비하면 ‘시작’밖에 아니다.
그렇다면 지옥에서 ‘영원’은 얼마나 긴 시간인가?
▲4. 모든 종류의 사람이 섞여 지내는 곳이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거지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다 지옥에 들어가 뒤섞여 지내는 곳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3. 지옥을 피하는 길
누구든지 어떤 죄인에게라도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길이 열려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어떤 죄인도 지옥 가지 않는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아무 종교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는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2. 부자와 나사로 눅16:19-31 01.03.25.옥한흠 목사님 설교
주일날 설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본문이다.
본문 자체의 해석상의 어려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자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부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눅 16:19)
그러나 성경에 나온 부자에게 뚜렷한 도덕적 유죄성을 발견할 수 없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말, 부패 등 어느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재산이 부정 축재한 것이라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그럼 ‘부자 되는 것도 죄인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어떻게 보면 조그만 자비심과 기본 양심은 있었다.
거지를 내 쫓지 않고, 자기 상 근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게 허용했다.
이렇게 너그럽고 아량 있는 부자를
우리가 나쁜 사람 취급하는 이유는 - 결과적으로 지옥에 갔기 때문이다.
▶나사로
거지 나사로가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무데도 없다.
단지 그가 천국에 간 것을 보고 결과론적으로 그가 의롭다고 판단할 뿐이다.
거지는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만약 그가 방탕하고 게을러서 거지가 되었다면, 그래도 천국에 가는가?
성경을 잘못 읽으면, 유전유죄/무전무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부자와 나사로’ 성경본문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
▲1.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꼭 잘 믿은 결과가 아니며,
세상에서 실패한 것이 꼭 못 믿은 결과가 아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교인이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교인도 얼마든지 지옥에 갈 수 있으며,
세상적으로 실패한 교인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
뒤에 천국과 지옥 이야기가 만약 삭제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교인 부자를 매우 높이 평가했을 것이고
세상적으로 실패한 교인 나사로를 형편없이 낮게 평가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지지리 못 살고 늘 쪼들리는 가난한 교인
-조상의 저주가 아닐 수 있다.
세상에서 하루도 건강치 못하고 병들다 죽는 사람
-누구 죄 때문이 아닐 수 있다.
노숙자들 중에도 천국 갈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인과응보적 판단을 잘 내린다.
믿음=성공=부자=건강 일 수 있지만
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 판단을 유보하자.
▲2. 땅에서 보상이 없어도 천국에서 보상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눅 16:25)
나사로가 땅에서 무슨 보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헌데, 굶주림, 걸식...
그러나 천국에서 그는 보상을 받았다.
손양원 목사님도 땅에서 무슨 보상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적으론 지지리 고생만 하시다가 결국 순교하셨다.
나환자 봉사 → 신사참배 반대 옥고 → 해방 후 다시 나환자 봉사
→ 두 아들 순교 → 당신 자신의 순교
예수 잘 믿으면 당연히 복 받아야 되지 않는가?
동인, 동신 손목사님 두 아들이 세상에서 머리되고 부자 되어야 했는데...
우리 생각은 오직 땅에 굳어져 있다. 땅에서의 보상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땅에서 못 받아도 천국에서 위로를 받을 터이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눅 16:25)
이 말씀에 위로를 받자!
▲3. 세상에서 유족하게 살고, 덕망 있게 살아도
그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예수님은 부자의 비도덕성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지옥에 갔다.
부자에겐, 보통, 유족함에서 오는 인격과 덕성과 여유가 있다.
“부자가 양반이다”는 시쳇말도 일리가 있다.
돈이 있어야 덕망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도 부자로서 양복도 사주고, 기부금도 적당히 내면서
인격과 덕망을 유지하는 교인들이 꽤 있다.
그들에게 뚜렷한 인격적 흠집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지옥갈 수 있다.
▲4. 믿음은 오직 은혜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서 자기 5형제가 여기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을 믿지 않으면, 나사로가 살아나가는 기적을 보더라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나사로처럼 기적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사람의 증언을
듣고 보고서도 안 믿는다는데, 눅 16:31
그럼 나는 어떻게 안 보고도 믿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은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믿게 되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6)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일반인의 시각
①영면 - 무덤에서 영원히 잠잔다는 생각.
‘영면 하소서!’라는 말을 시중에서 자주 듣는데,
그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자기 머리에 비판 없이 입력시킨 결과.
바울도, 주님의 재림 때 무덤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일어나리라고 말했는데,
그 구절만 읽으면, 성도가 죽으면 영면한다고 오해할 소지가 많음.
②환생/윤회
장례식에서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면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꽤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 어머님 돌아가셨는데,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셨다”
- 하관식 때 마침 옆에서 새가 날았음. 새는 산소주변에 어디든지 있다.
인도의 수 억 힌두교인들, 불교도들도 윤회설을 믿는다.
불교 문화권인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생과 윤회를 믿는다는 사람이 꽤 있음.
③영혼이 떠돌아다님
죽은 이후 영혼이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무속 신앙의 계승.
굿을 통해 무당이 죽은 아버지의 혼을 불러내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굳게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즉시 천국과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 (네가 오늘 나와함께 낙원에...)
④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유물론적 사고방식이다. 극소수 철학자들만 이런 철학을 고수한다.
▶성경적 내세관
우리 육신이 죽으면,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대 앞에 선다.
허공을 떠돌지 않고, 무덤에서 자지 않고, 즉시 간다.
천국에 간 영혼은 보좌 앞에서 때가 차기까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쉰다(영혼부활)
주님의 재림 때, 천국 보좌 앞에서 쉬던 영혼들이
주님과 함께 공중으로 재림한다.
그 때 무덤에서 잠자던 육체가 일어나 공중에서 영혼과 만나
(영혼부활 +육체부활)을 이룬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영혼+육체적 부활체로 살아간다.
*그럼, 영혼부활(죽음)과 육체부활(재림) 사이의 기간은 몇 년일까?
- 그것은 죽을 때 3차원의 시간에서 4차원의 시간으로 넘어감으로
그런 계산이 무의미하다고 본다.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다.
*죽어서 영혼이 부활해서 가게 되는 천국과
나중에 재림 때 가게 될 새하늘과 새땅은 어떻게 다른가?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다. 넓은 의미로 다 같은 천국으로 본다.
차이는, ‘마귀가 살아있을 동안’ 과 ‘마귀가 불못에 심판받은 후’의 차이다.
지옥은 존재하는가 /살후1:7-9/ 김홍도목사
2014-12-22 16:16:30
호스피스 일을 보시는 최 교수님의 책을 보면, 돈 많은 어느 사장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어느 날 몹시 떨며 두 무릎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서워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무서워 떨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옥 갈까봐 그래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최 교수님이 “지옥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했더니 눈을 번쩍 뜨면서 “예, 가르쳐 주세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값없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고 일러주었더니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평안한 얼굴이 되고, 며칠 후에 돌아가시는데 부인한테 간곡히 부탁하기를
“여보, 최 교수님한테 지옥 가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해주세요”라고 하고 평안한 마음과 천사같이 빛나는 얼굴로 천국 가더랍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영원한 고통의 장소,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과연 지옥이 존재하는가?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마지막에 추수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때가 있듯이 세상 끝날에 심판이 있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사람들은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지옥 같은 것은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서운 마귀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빨간 모자 쓰고 밤낮 웃고만 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도 되시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사람을 집어넣어 고통을 받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히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을 보십시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더니 한 교양 있는 여자가 들어와서 “목사님, 20세기에 무슨 지옥설교를 합니까? 그런 설교는 집어치우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이 웃으면서
“자매님,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사형당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나라의 질서와 공의를 위해서 반드시 형무소도 있고 사형집행도 필요한 것입니다. 정부가 국민을 괴롭히기 위해서 형무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고 심판의 하나님도 되시는 법입니다.
① 무신론자들의 증언
영국에 무신론자 New Port는 죽어가면서 말하기를
“내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필요 없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의 진노 앞에 서 있다. 나에게 지옥이 없다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의 영혼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여, 나에게 소망이 있다는 부질없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이다”
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불란서의 계몽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기독교가 건설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자신)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해버리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하며 무신론 책자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한껏 대적했습니다.
그는 또 “100년 안에 성경책은 다 없어진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면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여,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시오. 그러면 나의 값진 보물의 절반을 주겠소”라고 할 때
의사가 “6주간도 못 삽니다” 했더니 의사를 못 살게 괴롭히면서 “그러면 나는 지옥으로 가는데 당신도 같이 갑시다”라고 하더랍니다.
그가 죽은 후 스위스 제네바의 성서공회가 그의 집을 사서 성서공회 창고로 삼았는데, 없어진다던 성경책이 천장까지 꽉꽉 차고 넘치고 지금까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Sir Thomas Scott란 무신론자는 임종 시에 “아, 나는 이 때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들이 다 있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전능자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멸망으로 들어간다”라고 탄식하며운명했습니다.
MF. Rich는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 붙는 난로 위에 100만 년 동안 누워 있는 편이 낫겠다”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증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번만 기록되었어도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한 번 기록되었는데 700년 후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임마누엘로 탄생하셨습니다.
◎ 예수님이 지옥이 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고,
마가복음 9장 48절에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울도 지옥이 있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7~9절에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 수제자 베드로도 지옥을 말씀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던 사람 죽으면 영혼의 지옥, 음부로 들어가고 구원받은 자가 죽으면 영혼의 천국,
즉 낙원에 들어갔다가 예수님 재림 시에 부활하여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다가 그 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천년왕국 끝에 심판의 부활, 즉 둘째 부활 때에 부활하여 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들어갑니다.
◎ 사도 요한도 지옥을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고,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주요 일간지인 “The Times”(98. 7. 22.)에 가톨릭 대주교인 Dr. George Carey 가 은퇴하면서 “성직자들은 교인들에게 지옥을 가르치라”(Carey tells clergy to give congregation Hell)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목사들은 반드시 세상의 종말과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전파해야 한다”(preachers must proclaim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reality of Heaven and Hell)라고 했습니다.
D. L. Moody 선생은
“만일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 성경은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 기존 예배당도 오락 장소로 개조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지옥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죄 값으로 심판받고 지옥 갈 인간이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2.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 지옥은 어떤 곳인가? 흔히 지옥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 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옥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입니다.
실제로 고통을 느끼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강도는 그가 죽인 사람을 바라보며 양심의 고통을 느끼며, 투전꾼은 투전하며 속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끼는 곳이며,
음란방탕하며 살던 사람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며 후회하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교만하여 고집부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때 믿어둘 껄” 하며 영원히 껄껄하며 후회하게 됩니다.
①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입니다
“영원히 꺼지지도 않으며 벌레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막9:48, 마5:22, 계20:10, 계10:14-15, 계21:8) 했습니다.
지금도 땅속 깊은 곳에는 유황불이 끓고 있습니다.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에 가면 화산이 폭발했던 곳에 팥죽같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며 누런 유황이 쌓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가스불이나 석유불보다 더 뜨거운 불이 꺼지지 않고 붙는 곳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많이 했는데 설교하다가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 대고 있어보라. 잠시 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소통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온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나이다” 하고 부르짖으며 “손가락으로 물 한 방울만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하고 애원했으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어차피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우리 집에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했을 때
“세상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 지옥이 있다고 해도 안 믿은 사람은 안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1절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②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어느 빌딩이나 집에나 다 출구가 있고 비상구가 있는 법이지만 출구도 없고 영원히 피해나갈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③ 끝이 없는 곳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퇴원할 날이 있고 감옥에 간 사람도 출옥할 날을 기다리지만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영원히 끝없이 고통을 계속 받는 곳입니다.
어떤 분은 천국이나 지옥을 실재하는 곳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시간 개념도 없는 곳이라고 설명하지만 지옥은 무시간 상태(Timelessness)가 아니라 끝없는 시간(Endless Time)이 계속 되는 곳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태평양 바닷물을 한 모금 물어서 깡충깡충 뛰어서 대서양에 뱉어놓으면서 그 태평양 바닷물이 다 마를 때까지 계속 한다면 얼마나 걸릴까요? 몇 억 만 년이 걸린다고 해도 영원에 비하면 시작밖에 아닙니다(just beginning).
where are you spend your eternity?
④모든 종류의 사람이 섞여 지내는 곳입니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거지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다 지옥에 들어가 뒤섞여 지내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3. 지옥을 피하는 길
누구든지 어떤 죄인에게라도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어떤 죄인도 지옥 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종교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살후1:3-12/ 석기현 은퇴목사
2025-06-11 11:17:42
우리 교회의 ‘구원의 길, 축복의 길’이라는 제목의 새 신자 교육 교재에 보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단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신자가 예수님에 관해 꼭 믿어야 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라는 사실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신앙의 내용’에 마지막으로 나와 있는 것이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신다.’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에는 앞의 세 가지 사실들만 믿으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초림’하신 것을 확실히 믿는 신자라면 그 예수님께서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것도 꼭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나는 예수님의 초림은 믿지만 재림은 믿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사실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나 오십보백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후서를 쓰게 된 동기도 그와 비슷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거기서 “세 안식일”(행 17:2) 동안 전도한 후에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그 이후에도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사회로부터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교인들 중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일상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들떠 있는 교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날과 그 때는 성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예수님께서 명백히 밝혀 주신 사실에 어긋나는, 잘못된 재림신앙의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사도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후서를 써 보내게 되었고, 따라서 이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교훈들이 주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왜 기독신자는 예수님의 초림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 또한 반드시 믿고 기다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재림의 소망을 지키는 성도는 현재의 고난에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신앙이 더욱 굳건히 성장하게 됩니다.
3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서론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데살로니가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에 설립되었지만 아주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다른 “여러 교회”들 앞에서 “자랑”거리였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두고 바울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말하면 또 하나 으레 따라오는 것이 바로 ‘소망’인데, 왜 여기서는 ‘믿음’과 ‘사랑’만 나오고 ‘소망’은 빠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욱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 보면, 거기에서는 사도 바울이 똑같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두고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분명히 셋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몇 달 차이밖에 나지 않는 두 편지들인데, 바울이 같은 교인들을 두고 왜 첫 번째 편지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언급하면서 감사해 놓고서 이 두 번째 편지에서는 유독 ‘소망’만 빠뜨리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이 빠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소망’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그 ‘소망’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구체적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곧바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4절에 보면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데살로니가교회는 큰 핍박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그 교인들이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그들이 어떤 ‘큰 소망’을 확실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망’하고 있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의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받는 ‘박해와 환난’이 바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조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지상교회를 통해서 이미 시작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문맥을 볼 때 그 완성의 단계 곧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 현재는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서도” “견디며” “인내”할 수 있었고 그런 연단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희망을 붙잡아야 현재의 고난을 더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공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를 누비게 될 그 설레는 한 날을 그려보면서 수험생들은 다시금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외식하는 것이나 여행 다녀오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생활비를 아껴 적금을 붓는 것도 언젠가는 ‘내 집 마련’의 꿈이 이루어질 날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반드시 도래할 ‘천당’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할 소망이 지금 잠시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넉넉히 ‘인내’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바로 그 인내가 우리의 ‘믿음’을 ‘칠 배나 뜨거운 불에 연단된 정금’처럼 더욱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강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떤 고난이나 핍박이 닥치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재림과 최후심판의 날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표’인 줄로 깨닫고 더욱 ‘신앙의 허리띠’를 단단히 묶고서 끝까지 ‘견디어내야’ 합니다.
그 ‘테스트’만 통과하면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자’로 한 단계 더 가까워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기독신자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어제보다 오늘 하루 더 가까워진 예수님 재림의 날을 소망하는 가운데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재림의 소망을 지키는 성도는 모든 원수를 하나님의 심판에 맡김으로써 최후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6절부터 9절의 말씀에 “6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박해”하고 “환난”을 당하게 했던 자들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일깨워 주면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도중에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그는 거기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자가 되었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것을 두고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면서”(행 17:4-5) 핍박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어”(행 17:10) 피신을 시켰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데살로니가교회의 개척 당시부터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을 괴롭혀 온, 정말 악질적인 무리를 가리켜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환난으로 갚으시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즉 그 원수에 대한 ‘신적 보응’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처럼 교회와 성도의 원수들에게 ‘환난으로 갚으시는’ 날이 곧 성도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했으니, 이것 역시 분명히 예수님 재림 때에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 재림의 장면은 ‘심판주로서의 권위’가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신다고 했는데, 여기서 “능력의 천사들”이란 바로 ‘심판사역을 보좌하고 수행할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신다고 한 것도 ‘심판의 불’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이 될 원수들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광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화육강세하셨던 초림 때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예수님께서 이처럼 ‘무서운 심판주’의 모습으로 재림하시게 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나 ‘예수 복음의 전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아까 ‘성도로 하여금 환난을 받게 하는 핍박자’들과 다 동격이며 오직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예수님을 두려움 가운데 직면하게 될 한 날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벌이며 곧 지옥세계의 현실이 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원수들이 받을 벌을 두고 ‘환난’에서 ‘형벌’로 그리고 여기서는 “영원한 멸망”이라고 점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더욱 한이 되는 경우는 그 가해자가 ‘법의 심판’을 피하게 될 때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가해자의 변호사가 절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는 변론을 한다든지 혹은 판사가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자기 딸이 강간을 당했는데도 범인은 오히려 비웃는 미소를 띠면서 법정을 여유 있게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아버지나, 자기 남편을 죽인 범인이 실형을 받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어도 속수무책인 아내는 그야말로 한이 맺혀 이를 바득바득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 직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대’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기독신자의 모든 원수들을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그 마땅한 ‘형벌’을 받게 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독신자는 그 어떤 원수에 대해서도 완벽한 최후승리를 거둘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그 원수가 그냥 ‘무죄방면’ 되도록 버려두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그러니 너희는 그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인에게는 ‘영원한 멸망’으로, 의인에게는 ‘안식의 구원’으로 갚아 주실 예수님 재림의 날을 굳게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환난을 주는 원수’들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재림의 소망을 지키는 성도는 영화(榮化)에 도달하여 우리 주 예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10절 이하 12절에 “10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비단 ‘원수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라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당신의 공생애를 통해서나 부활 승천하셨을 때에도 보여 주지 않으셨던 최고최대의 영광을 대동하시면서 오실 것은 아까 7절 하반절을 비롯하여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처럼 온갖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장면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조차 “놀랍게 여김을 얻는” 우주 역사상 최대의 장관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놀랍게 여김을 얻는다.’라는 말은 ‘찬사와 경탄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독신자들은 이 세상에 살 동안 늘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 주님을 친히 뵙게 될 날을 그려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날을 맞이하게 되어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될 때에는 그 평소의 상상이나 기대와는 비교도 안 될 실로 ‘영광의 극치’로 충만한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 모두가 ‘놀라면서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너희도 우리 사도들의 증거를 믿었으니 이 재림주를 놀라움으로 영접하는 자리에 꼭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재림 때에 예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라는 말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찬란하기 짝이 없는 영광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우리 신자들이 도대체 거기에다 무슨 영광을 더 입혀 드릴 수가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여기 ‘얻으시고’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받으시고’라는 뜻인데, 그처럼 이미 최고의 영광을 대동하고 재림하시는 예수님께 도대체 뭐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또 받으셔야 할, 더 추가되어야 할 영광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성화생활을 하며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이제 ‘영화에 이르게 된 성도’들을 당신이 받으실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이라고 하면서 그 기도의 제목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기쁨으로 선을 행하고, 믿음의 역사를 힘을 다해 이루는’ 가운데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성화의 진보’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계속되기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결과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는” ‘성화의 완성’ 곧 ‘영화’에 이르게 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황공스러운 사실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수많은 영물들과 천군천사들이 호위하는 영광보다도, 성화의 완성에 도달하여 당신 앞에까지 서게 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더욱 소중한 영광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온 우주와 천상의 모든 빛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당신을 감싸는 그 어떤 영광보다도, ‘선을 행함’과 ‘믿음의 역사’를 통해 많은 ‘달란트’를 남기면서 ‘주인’을 기다려온 ‘충성된 청지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이 받으시는 최고의 영광으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며 또한 반드시 바쳐야만 할 유종지미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환난 중에도 재림의 날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를 통해서 이 영광을 ‘얻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핍박을 당하면서도 모든 심판을 오직 ‘백보좌 심판’에만 맡기는 가운데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를 통해서 이런 영광을 ‘받으시게’ 될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을 대동하시고 재림하시면서도 오히려 저와 여러분을 통해 바로 이런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도록 그 날이 올 때까지 부단한 ‘성화의 진보’를 통해 ‘영화’의 자리에 꼭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주일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 신앙의 내용은 곧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과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에 이어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으로서 완성됩니다.
즉 예수님을 ‘재림하실 심판주’로 믿는 것은 예수님을 ‘죄인을 위해 화육강세하신 구세주’로 믿는 것과 똑같이 요긴하고도 필수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예수 재림의 소망’이 없으면 문자 그대로 그 ‘믿는다는 것’도 다 ‘헛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없다면 온갖 시험과 환난이 그칠 날 없는 이 땅에서 도대체 무슨 희망을 가지고 계속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지켜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살 맛 없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보좌 심판대’에 높이 앉으셔서 모든 악인들을 ‘영원한 멸망’에 처하실 그 날이 없다면 도대체 그 어떤 ‘착한 사람’이 자기를 ‘옥에 가두고 채찍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아무리 기독신자라 할지라도 그야말로 원한에 가득 차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광스러운 재림주의 모습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친히 만나 뵙게 될 날을 믿지 않는다면, 그저 세상에 살 동안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대상을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기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사실은 ‘실존하지 않는 대상’을 그저 추상적으로 받들어 모시는 외식적 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죄인 대속을 위해 구세주로 오신 초림’을 믿는 신자라면 당연히, 필연적으로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심판주로 오실 재림’ 또한 믿어야만 합니다.
즉 재림 소망은 우리 기독신자의 ‘예수 신앙’의 내용 중에 제일 마지막이면서도 또한 화룡점정입니다.
이 재림 소망이야말로 ‘우리 믿는 것’에 대한 하이라이트이며 동시에 대단원의 막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그 어느 위인이나 현자도 죽을 때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약속을 남겨 주지 못했습니다.
석가모니는 ‘너희들도 스스로 득도를 해서 나처럼 불타가 되어라.’는 말을 그의 제자들에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니 중들은 오늘도 꼭두새벽마다 일어나서 몽롱한 상태에서 죽비로 맞으면서 참선을 한답시고 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호메트는 ‘나는 다시는 너희들과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간다.’라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슬람교도들이 그네들의 교주와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오로지 그 마호메트의 썩은 시체가 묻혀 있는 메디나에 성지순례를 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런 소위 ‘성인’들과 아예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께서 더 이상 인간의 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것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는,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실로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멋진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세상에서 남보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꿈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합당한 자’로 영접 받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소멸될 수밖에 없는 무슨 ‘버킷 리스트’가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소멸하게 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완성될 ‘영생’, 곧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실 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0:20)고 철석같이 약속하신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시는 그 날에 이 놀라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을 저와 여러분이 꼭 믿어야 합니다.
바로 이 소망 가운데서 오늘의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며, 모든 ‘원수’에 대하여 ‘승리’하고, 끝내 ‘영화에 도달한 천국 백성’이 되어 우리 예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천국과 지옥의 비교 /살후1:8-10/ 이경희목사
2020-04-15 07:41:41
우리가 영원히 사모해야할 본향은 바로 천국입니다.
한 저명한 스님이 tv방송 ‘희망 세상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강연을 하셨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한 여성이 질문을 스님께 하였습니다.
“스님, 우리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49제를 절에서 드리고 극락왕생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정말 극락이 있는지, 우리엄마가 그곳에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하고
질문하자 스님은 “따라하시오,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질문한 여자 분이 웃으면서 따라하고 나서, “스님, 그것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하는 말이잖아요 ? 저는 스님의 명쾌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스님은 “목사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스님이 말하잖아? 그럼 어머니가 죽어서 흩어져 버렸다든지, 좋은 곳으로 가지 않았다고 믿으면 좋겠어?
다시 따라 해보세요,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성이 따라하자, “그래! 어머니가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으면, 당신이 복이 있는 거야, 어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셨다고 믿으면 당신 마음이 편하잖아?”
“아~ 네,” 하고 관중들과 함께 한바탕 웃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은 극락이 확실이 있다 없다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으면 당신마음이 편하고 복이 되지 않겠느냐하고 답을 주었을 뿐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고 있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이지요?
지난 주 천국과 지옥 간증을 열편 이상을 동영상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천국과 지옥의 체험을 하고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8세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중학생, 청년들, 노인들까지, 그리고 하버드 뇌의학자인 이븐 알렉산더,
신학자인 신성종 목사님을 비롯해서, 조용기목사님 외 국내외 여러 목사님들,
미얀마의 스님, 불신자, 무신론자, 회의론 자,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고 핍박하는 자들까지, 그리고 인종을 초월해서 세계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의 체험을 하고 자신들이 본 천국과 지옥의 실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임사체험, 입신체험, 환상체험을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미얀마 전직 스님의 지옥체험 간증과 뇌의학자 이븐 알렉산더의 천국 간증을 들려드립니다.
먼저 미얀마 스님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부로 지내다가, 18살에 절로 보내졌고, 19살에 스님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6년이 지나가면서 최고의 스님이 되기 위해서 극한 수도를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황열병과 말라리아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의사가 회복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고, 자기가 있었던 절로 돌아왔는데 날이 갈수록 병은 점점 깊어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지옥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깨어나 보니 3일이 지났고 자신의 몸은 썩어서 관 안에 고름이 차 있었습니다.
불교의 장례의식 대로 장례식을 진행하는데 관과 함께 불태워지기 일보직전에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가 체험한 지옥은 불이 타오르는 불 못 같은 지옥에서 그는 미얀마의 저명한 스님을 보게 되었는데, 안내자에게 “왜 저렇게 훌륭한 스님이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머리를 휘어 감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저 사람은 부처다,” 그는 충격을 받고 “저렇게 훌륭하고 선한 분이 어떻게 여기 있냐”고 물었더니
“저 사람은 착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불속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을 빠져나와 다른 길로 인도를 받았는데,
그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게 되었는데 황금 길이요, 빛이 있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문 앞에 이르자 안내자가
“너는 지금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네가 예수를 따른다면 너의 명이 다하면 이곳에 올 수 있다. 이제 일어나서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부처를 믿는 자들과 우상을 믿는 자들에게 말하라.
너희가 변화 받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것이다. 라고 말하라. 사원과 우상을 만든 사람들도 지옥에 간다고 전하라. 그리고 절에 시주하는 자들도 함께 지옥에 간다고 전하라.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네가 본 것을 증거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 주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사후세계를 경험한 후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지금까지 속아왔다, 오직 한길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다” 하고 증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한사람 이븐 알렉산 하버드 뇌의학자의 천국을 본 간증입니다.
하버드 뇌 의학자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는 7일간 혼수상태 후 깨어나서 “천국은 실재”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과학 학술지에 150편 이상의 논문을 게재했고, 국제의학컨퍼런스에서 200회 이상 발표하는 등 뇌와 의식의 작용에 관해 뛰어난 업적을 쌓은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입니다. ‘하버드 신경외과 의사’였습니다.
인체와 두뇌의 작동에 대해 연구하는 일”을 소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11월 10일, 54세의 나이에 7일 동안 세균성수막염으로 뇌사상태에 빠져서 천국의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뇌사가 되면 모든 뇌의 활동이 멈추기 때문에 환상을 보는 것 등의 모든 뇌의식 활동이 멈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은 회의론자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의신이 많아서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사후세계를 믿는 습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습니다 나는 천국을 보았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육체와 뇌는 별개로 인간의 의식이 존재할 수 있으며, 천국이 실재 존재하고, 우리 영혼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육체의 뇌 안에 불멸하는 영적자리가 있다는 말아니겠습니까?)
그는 또 천국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곳이요, 영광의 광채로 가득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천국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임사체험이나, 입신체험, 환상체험을 한 사람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전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천국과 지옥을 본 증언에 대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갈 때 어떤 공간을 통과하는데 어떤 자석에의 힘으로 끌려가듯이 빨려 가게 되고,
또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조용기목사님도 설교 중에 당신이 지옥으로 빨려들어 가다가 나는 예수 믿는데! 하고 작음 소리로 예수보혈 예수보혈 하니까 자석처럼 끌고 가던 힘이 멈춰지고 떠올라 의식을 찾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빨려들어 갈 때 자신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지옥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곳, 절대로 가지 말아야할 곳, 불속의 고통,
비명소리, 쾌쾌한 냄새, 뱀, 구렁이, 진흙탕, 지렁이, 벌레가 득실거림, 캄캄함, 시간이 정지되었고, 사랑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 물이 없고, 하나님의 자비가 전혀 없는 곳.......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지옥은 예수 믿지 않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 죄(큰죄 작은 죄)를 지은 자들, 자살한 자들(살인자들과 같은 고통)....이 가는 곳,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등등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녔는데도 지옥에서 고통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장로였는데, 집사였는데, 목사였는데도 그 곳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말로다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 하나님의 광채가 날빛보다 더 밝게 비추는 곳,
춤추며 찬양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꽃들, 수정 같이 빛나고 맑은 시냇물, 금빛 찬란한 길, 각종 보석과 반짝거림으로 지어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집들,
눈부시게 반짝반짝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 금 면류관, 금 허리띠를 찬 사람들, 한결같이 평온하고 기쁨 가득한 모습들,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안보이고,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천국에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순교자들, 전도자들, 개척교회를 하면서 고난을 이겨낸 목사와 성도들, 핍박과 고난을 이겨낸 성도들, 예수를 믿되 진실 되게 믿고, 착하고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와있었다라고 증언합니다.
교회는 다녔는데, 지옥 불 속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세상에서 살면서 가난하고 천대 받고 살았지만 주님 일에 충성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빛난 옷을 입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도했던 인도자는 천사나, 예수님, 또 먼저 간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는 장애인이 한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늙어서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젊고 아름다움뿐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대부분 이런 내용이 천국과 지옥을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 내용이었습니다.
간증을 듣고 난 후 핵심은
-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되, 진실 되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 다는 것이고,
- 이 땅에서 예수님을 전하라는 전도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 천국은 말로 다표현 할 수 없이 좋은 곳이요, 지옥은 절대로 가서는 안되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은?
사11:6-8 그 때에(메시야 재림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무엇을 말합니까?
타락으로 인해 파생되었던 온갖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혼란이 제거되고, 죄로 말미암은 적대관계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한 평화가 넘치는 곳임을 소개합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롬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주님계신 너무나 좋은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곳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고통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 우리의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영원한 기쁨 넘치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기쁨 넘치네 /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찬송 넘치네
세상의 근심은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 우리의 주님과 함께 있들때 영원한 기쁨 넘치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즐거움 있네 /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사랑 넘치네
인간의 욕심은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 우리의 주님과 나 함께 있을때 영원한 기쁨 넘치네
또한 그곳은
계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는 곳,
먹고 살 걱정도 없고, 병원 갈 걱정도 없는 곳
이 땅에서의 수고와 아픔의 모든 눈물을 주님이 친히 닦아 주시니 세상 고생 다 잊어버린 곳입니다.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던 하나님을 만나는 곳, 예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거기는 목마름이 없고, 배고픔이 없고, 미움이 없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곳입니다.
영원한 기쁨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찬양이 넘치고, 평안이 넘치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지옥은?
막9:43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49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이 꺼지지 않는 장소, 벌레가 득실거리는 장소, 불속에서 고통 받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마13:40-42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계14:11-12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지옥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지켜야할 것,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끝까지 오직예수 믿는 믿음을 지킵시다.
또한 지옥은 영원한 파멸이 있는 곳입니다.
살후 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장 무서운 형벌은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로 믿음 지킨 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요 축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인생의 종말을 맞는 그날, 예수님 재림하시는 역사의 종말 그날에, 우리는 곧바로 천국 아니면 지옥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계20:12,15절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5절. 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하늘나라 생명록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14:6 어느 누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셨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예수로 구원받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로만 의롭게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에 반드시 선악간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는 자는 천국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굳건히 붙들고, 모든 고난을 이기고, 전도하며, 믿음 지키다가 우리 모두 천국 갑시다. 아멘
얼굴을 숨기시는 하나님 /신31:17-18 /살후1:7-9/ 이성희 담임목사
2018-11-27 04:55:33
성자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원한다면 이렇게 해 보는 것이 어떠냐?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 능력이나, 명예나, 부나, 자유나, 심지어 마음의 평강이나, 선한 양심, 그 어떤 거라도 좋다. 네게 불가능한 것이 없고, 죄가 될 것이 없으며, 금지된 것이 없다. 너는 죽지 않고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 대신 너는 나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최상의 삶 같아 보이지만 최악의 삶입니다.
인간이 온 천하를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봐야 영원한 복락입니다.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은 “인생의 90%는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인생의 100%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살아야 진정한 삶입니다. 신앙적 의미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얼굴’이란 말의 어원은 ‘얼’ 즉 정신적인 것이 담긴 ‘꼴’ 즉 모양새를 말합니다. 얼굴이란 바로 ‘정신적 모양새’를 뜻합니다. 얼굴은 내 자신의 모양새입니다. 아무개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얼굴이 그 사람 자신의 모양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을 알듯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는 하나님의 얼굴로 표현됩니다.
성경에는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한 그 곳이 브니엘입니다. 창세기 32:30에는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았으므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여 기념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3:20에는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합니다. 23절에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였을 때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므로 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굴을 잠시도 돌리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를 향하셔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흔히 아무도 모르게 기부나 선행을 하는 사람을 ‘얼굴 없는 천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게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얼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셔야 우리가 희망이 있고, 우리가 은혜를 누리고,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욥기 34:29에는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얼굴을 돌리신다면 우리는 절망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선하신 얼굴을 우리도 마주 보며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것은 버리셨다는 증거입니다.
신명기 31:17 상반절에는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우리를 버리시면 얼굴을 숨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버리시면 하나님의 사람일지라도 다시는 보시지 않습니다.
“진노하여”라는 말은 “하라”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빨갛게 되다’, ‘더워지다’라는 뜻입니다. 얼굴이 빨갛게 되고, 마음속에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화가 날 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빗대어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한 것입니다.
진노란 열이 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열 받는다’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진노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화가 나다’라고 할 때에 화(火)는 곧 불입니다. 진노하는 것은 마음에 불이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진노하게 되면 실제로 육체도 열이 올라가고 얼굴이 붉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화가 난 가인의 얼굴은 안색이 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화가 나면 열이 오르고 안색이 변하는 법입니다.
우리말에 ‘안면몰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모른 체 하거나 뻔뻔하게 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얼굴을 없애는 것입니다. 얼굴을 숨기고 얼굴이 없는 듯이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얼굴을 숨겨”라고 합니다. 우리교회와 사회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교회가 성장에 매달려 사회를 향한 얼굴을 돌린 결과 이제는 사회가 교회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습니다.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고, 심지어 교회를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알고 보면 버림 받은 쪽의 잘못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를 골려주려고 숨어 있어 아이가 부모를 찾다가 우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안아줍니다. 참 나쁜 부모입니다. 그게 재미있어서도 안 되고 아이의 기억 속에 버림을 받았다는 유기감이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부모는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열심히 놀다가 둘러보아도 부모의 얼굴이 안 보이면 아무리 재미있는 것이 있고, 좋은 것을 준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찾을 때까지 울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고 자유함입니다.
랍비 바룩의 손자 여히엘이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히엘은 꼭꼭 숨어서 술래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20분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히엘은 처음부터 그들이 자기를 찾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에 울면서 할아버지께 달려와 불평을 하였습니다. 바룩은 눈물을 주루룩 흘리면서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실 다음과 같이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숨어 있는데 아무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고 진노하십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고 얼굴을 숨겨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은 얼굴을 돌리게 한 사람들 편의 잘못이 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게 만들고, 하나님 없이 더 큰 죄로 말미암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숨겨”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여도 못 본 척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그 고통은 배가 될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에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통을 당한 가정이나 초상집에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신 이유가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토미 테니는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라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은사가 아니라 은사 주시는 분을 갈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갈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잃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아동정신분석학자 볼비는 ‘애착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부모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부모와 아이 사이에 애정이 형성된다고 그는 분석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사랑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사랑이 형성되지 않고 사랑이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시편 24:6에는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입니다. 거룩한 곳에 설 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다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아닙니다. 거룩한 곳에 설 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면 우리는 한시도 살 수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다른 신을 따르는 악행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십니다.
신명기 31:18에는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반드시 얼굴을 숨기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다른 신을 따르는 악행을 행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최고의 악행이 무엇입니까? 다른 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란 어떤 행위가 아니라 행위 이전에 하나님과 분리된 삶입니다. 하나님과 결별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보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따르는 악행을 행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얼굴을 숨기십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보기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으므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5살짜리 철수가 엄마와 함께 지하철을 탔습니다. 철수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지하철에서 너무 떠들어 엄마는 “철수야, 엄마가 어떤 사람이 제일 싫어한다 했지?”라고 했더니 철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빠!”라고 소리 질렀답니다. 아마 철수 아빠가 평소에 철수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했으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자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다른 신을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그 일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하나님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신을 두어 하나님을 화나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단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꼭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에게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대신 하는 것들을 섬기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기 이전에 모세를 하나님보다 더 섬겼습니다. 이렇게 우상이란 우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금송아지는 결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금송아지는 내 곁에서 잠자고 나의 일터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란 유일하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사람이나, 사물이나 육체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자원공급을 찾는 그릇된 관습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무엇인가를 믿게 됩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합니다. 돈이나, 과학이나, 권력이나 또는 지적우상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념이라는 ‘이데올로기’ 등도 지나치게 탐하면 우상숭배가 될 수밖에 없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좋은 것이라고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목숨을 걸만한 것을 말하며 세상에서 우리의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과 그 나라밖에 없습니다.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세상에는 실체보다 우상이 더 많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온갖 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들은 실체가 아닌 가상적이며 허무한 존재인 것들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인은 하나님 외에 온갖 다른 신을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들을 섬기다 보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행을 행합니다. 하나님이 금하시는 가장 악한 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정직한 왕들을 보세요. 한 결 같이 이들은 우상을 제거하고,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헐었습니다. 반면에 악한 왕들을 보세요. 이방신들을 가지고 와서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왜 그들을 악한 왕이라고 합니까? 그들의 악행 때문입니다. 악행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악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은 이와 더불어 온갖 포악한 행실을 마다하지 않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반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만든 신은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지켜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가 만든 신 때문에 내가 어려워지고 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내가 만든 신이 나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신을 만드는 순간 하나님이 내게서 반드시 얼굴을 돌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내리시는 벌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후서 1:9에는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장차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지옥에 떨어져 멸망의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라고 노래합니다.
요나 1:3에는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라고 합니다. 인간의 죄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은 것과 똑 같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얼굴을 가리시고 얼굴을 돌리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면 그 자체가 파멸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긴 결과가 17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면 재앙이며 환난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지구촌의 재난은 알고보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돌리신 결과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고 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합니다. 희미하고 불확실한 신앙에서 확실한 신앙으로 진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주님의 얼굴을 항상 대면하고 살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인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얼마나 더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정말 주님의 얼굴을 뵐 때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뵐 그 좋은 날을 기다리며, 그날에 주님의 얼굴을 떳떳이 뵐 것을 기대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악행을 버리고, 선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고,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늘 기쁘고 즐겁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1:6-9
2016-06-28 11:14:46
1장 6절-8절: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환난: 자연환난이 아닌 사람이 계획적으로 주는 환난도 있다.(인위적 고의적 계획적)
왜 환난을 줄까? 국가에 사회에 인류에 인간에 대해 잘못한 것이 있어서냐? 주님이 세상이나 사람에 대해 무슨 해를 끼친 것이 있느냐? 참 의 참 선을 행했다.
대립: 무신론적인 자들과는 별로다.
약한 대립: 이방종교인과.
큰 대립: 성경을 가지고 외식으로 나가는 자들과.
세상: 이삭과 이스마엘에서.
천국: 아벨 이삭 야곱.
대립성이다.
참 성도들이 진리를 주니 비진리로 나가는 자기에게는 대립이 된다. 진리 자체가 가르고 나가니 자기에게 지적이 되어 대립이 된다.
누림성자는 회개를 말하면 싫어한다. 이런 자는 마귀에게 잡혀 종노릇을 하게 된다.
마귀는 사람이 거룩 정결한 것을 싫어한다. 깨달아지는 것을 싫어한다. 죄와 세상에 대해 말을 하거나 세상과 천국을 구별하는 것을 싫어한다. 예수 닮는 것을 싫어하고 혼합 혼돈 혼란을 좋아하고, 인간이 천국의 깨달음이나 진리에 대한 목적이 없이 먹고 마시고 누림성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자와 친구하고 다닌다.
성도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뚜렷한 목적을 외친다. 그러나 이질적으로 믿는 자들은 거룩하게 살자고 하면 환난과 핍박을 준다. 사상의 대립이다.
왜 지옥으로 안 갚으시고 환난에 환난으로 갚으실까? 불신자뿐만이 아니라 신자도 끼어 있기에!(바리새인)
주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 성도도 주님이 하시는 그 일에 수종 든다. 이 구원은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에 해당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딱 한 번 되는 일이다. 저 세상에 가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 구원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주목적적인 일이다.
때문에 이 일에 수종 드는 자에게는 그 만큼의 보상이 있고, 이 일에 반대하고 핍박 환난 무관심한 자들에게는 그만큼 보응이 있다. 에누리는 없다. 고의건 알건 모르건 에누리가 없는 것이다. 자연 법칙적으로도!
시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있다. 어른에게만 시간이 흐르고, 아이에게는 멈추나? 일 잘 하는 사람에게는 멈추고, 못 하는 사람에게는 흐르는 그런 게 없다. 에누리가 없다. 그런 것처럼 복음에 수종을 들거나 환난 핍박을 주면 이에 대한 보응이 에누리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해도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은 방해받지 않고, 실력 있는 성도는 그 방해를 면류관 만드는 일에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환난 핍박을 주는 자는 오직 환난 핍박을 주는 것이 그 목적이다. 면류관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환난을 준 자에게는 용서가 없다.
단순히 성도라고 하는 한 인간을 못살게 굴고 해롭게 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성도에게는, 성도가 하는 일에는 영원과 직결되는 구원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잘못했으니 그 짓을 했다고 때리는 것이 아니다. 자타에게 영원과 관계가 되는 구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것이다.
핍박자들은 자기에게 온 구원을 핍박하고 말살시킨 고로 이는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형벌이다. 짐승으로 살겠다는 선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주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만 계실 리가 없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언제든지 하나님을 주격으로 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면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창조적 면에서, 사역적 측면에서 봐야 성경이 봐지는 것이고 눈이 열려지는 것이지 불신자들이 일을 보고 논하는 것처럼 인간 편에서 논하게 되면 복음이 안 되고 구원이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통해서 ‘너에게 복음이 필요하다, 너에게 인간창조의 목적이 있다, 복음을 받아라’ 하며 진리를 받으라고 인간들에게 심부름을 보냈는데 하나님의 복음에 심부름하는 그 자를 핍박을 했으니 심부름을 보낸 하나님께서 가만 계실 리가 없다. 이 불신성자의 배후에 있는 마귀 역시 그냥 두지 않는다.
환난 핍박을 주는 자, 무관심자들은 자기가 마귀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환난을 직접 주는 자-외형의 핍박.
간접으로 주는 자- 동참치 않고 무관심.
간접으로 주는 자들은 직접으로 주는 자들의 기를 도와준다.(로마군인과 바리새인들과의 관계)
기독자가 전부 외식으로 흐를 때 진리의 성도들은 환경적 인위적으로 핍박을 받는 것은 아니라도 생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외식자들은 자신들은 풍부히 살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진리성도를 무시하고 강 건너 불 보듯 무관심하다. 자기가 핍박을 주는 게 아니니까!
이 때 외식자들이 참 성도들에게 오는 이 환난을 어떻게 볼까? 참 성도의 환난을 고집과 교만 때문으로 보게 된다. ‘너만 잘 믿는 것이냐, 그렇게 믿으면 못 산다’ 하며 자기 자신이 핍박자인지를 모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군인에게만 심판이 있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한 바리새인들과 옆에서 비꼬고 손뼉을 친 사람들과 아무리 철이 없더라도 부모를 따라 함께 손뼉을 친 어린아이들 모두 보응을 받았다. 로마에 의해 불바다가 될 때 다 받았다.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하며 흉을 본 어린아이들이 불곰에 의해 심판을 받았다.
이웃집의 어려운 것을 보고만 있는 것, 옳은 것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는 은연중에 반대편에 선 것이다.
성도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사랑 의 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복음을 안 주고 살면 되느냐? 환난이 오더라도 복음을 주고 가는 것은 당연하다. 환난 받는 성도는 안식으로 갚으신다.
참 성도는 환난이 올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주님 잡고 진리 잡고 구원을 이루며 나왔으니, 환난을 통과하여 나왔으니 하늘나라에서 합당한 자로 나왔으니 만들어졌으니 하늘나라를 안식으로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된 환난을 당할 때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게 아니고 근심 걱정 짜증 원망 폭력 배고픔 목마름이다.
불꽃 중에: 심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심판: 하나님의 공의 공정이다. ‘하나님을 왜 몰랐느냐’ 하고 인간의 책임을 전제하고 들어간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심판은 무슨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유 없이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 불택자들? 아예 지옥 갈 자들로 정해졌는데 하나님이 심판을 해 버린다면 심판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 왜? 애초에 지옥 갈 자로 만들어졌는데 안 믿었다고 지옥에 보낸다면 공의가 아니다. 지옥 갈 자들은 선이고 악이고 간에 그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는데 심판인가?
형벌: 행위의 대가.
심판: 보응이다.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공의가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불택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성이 무너지지 않느냐? 불택자들은 지옥 갈 자들이니 영 중생이 필요 없고, 안 했고, 예수 못 믿었고, 예수를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인간의 골각만 있지 짐승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고 논하겠느냐 그 말이다. 심판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를 않는다.
실컷 이용해 먹고 영원히 불속에 집어넣고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말이 합당하게 들리지를 않는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하실까 그 말이다. 그러니 형벌을 준다는 말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첫째, ‘너는 불택자로 지었다. 고로 중생을 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을 마음도 없이 지었다. 그러니 너는 지옥심판 불속에서 고통을 받아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
인간 모두에게 자유성과 인격성을 왜 주었느냐? 가치 판단 평가성을 왜 주었느냐? 이런 면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인간 자기는 택자인지 불택자인지를 모르는데 복음을 듣고 예수 믿고 싶은 마음이 조금 났는데도 ‘너는 불택자이니’ 하며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없앤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되느냐? 안 된다.
뭔가를 해 주었는데도, 가치 판단 평가성을 넣어놓고 했는데도 믿지 않았을 때 심판을 할 수가 있다.
셋째, 택자인지 불택자인지 모르지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는데도(현재성) 하나님이 ‘너는 불택자니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맛봐야 된다’고 하며 심판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넷째, 인간을 지을 때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었다. 그래서 인간 자기에게는 도덕성과 자유성과 인격성이 있어서 희로애락을 느낄 수도 있고, 가치 판단 평가성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요, 이해타산적으로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 않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으로 볼 때는 심판이 있을 수 있다.
자기가 알던 모르던 결과성은 자기에게 있다는 것과 심판이라는 말이 있고, 이것을 느낄 수 있는 인격성을 넣어주었다는 의미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이라는 말이 따라온다.
다섯째, 자기가 알던 모르던 자기를 내신 창조의 목적이 있고 이 물질세상을 이용 활용하게 한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창조의 목적을 모르고 살았다는 의미에서 이것도 심판이라는 말이 붙게 된다.
여섯째, 복음을 들었고 복음의 권함을 받았고 또 교회가 있었는데도 자기는 믿지를 않았다면 심판이 되는 것이다.
일곱째, 양심에 가책이 되면서도 의를 선을 사랑을 주고 착한 일을 하는 성도들에게 핍박을 주니 심판을 한다면 그 심판은 타당하다. 인간 자기들 속에서도 심판이라는 것이 나온다. 사람들 속에서 공감대를 갖는다.
여덟째, 영은 죽었지만 이성은 판단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이건 10년을 가겠다, 이건 100년을 가겠다, 이건 영원히 가겠다’ 하는 그 용어는 안다. 이성이 판단을 한다. 즉 죄(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를 지었을 때 이성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일반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둔 것은 복음의 소식을 들을 때 나를 구원해 주려는 목적인데 그럼에도 믿지 않았다. 복음의 질은 모르지만 좋은 것임은 알면서도 믿지 않았으니 이성적 판단에서 심판이다.
‘불택자라’ 할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다’ 하면 이것은 말이 되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 할 때 이를 불택자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다. 어폐가 있다.
우리가 택자 불택자를 논할 바는 아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우리가 형벌을 받는 자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택자냐, 불택자냐’ 하는 예정 면은 그 날에 가서 하나님께서 존재적으로 나타내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향해서 미리 ‘택자다, 불택자다’ 하고 논하는 것은 삼가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당신의 주권적 예정 면은 모르도록 해 놓았으니 우리 인간은 복음을 들었을 때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을 하고 자기가 할 일을 다 하고 가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왜 몰랐느냐’ 했을 때 ‘나를 하나님을 모르도록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자기를 불택자로 지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알고서 안 믿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믿기 싫어서 안 믿은 것이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도록 했는데 왜 안 믿었느냐’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심판이 있게 된다.
가룟유다는 원래가 불택자인데도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며 실컷 이용해 먹고 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불러서 가르치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 타당한 이유가 있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선다.
자연을 보고, 양심을 보고, 복음을 보고, 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너도 인간 나도 인간, 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알고 믿고, 누구는 모르고 안 믿고 있다면 심판이 가능하다.
복음에 불복종자, 순종자, 안 믿는 자.
두 심판: 공심판-불택자. 사심판-택자.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은 인간을 당신처럼 닮아지게 하는 것. 성품이 근본적으로 당신처럼 닮는 일이다. 예수 믿어 천당 가고 병 고치는 것만 안다면 복음에 순종을 안 하는 것이다. 의사 소원 목적 취미 등(인격) 이것이 없이 하면 심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복음에 순종치 않는 자들을 양면성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을 핍박을 한 것은 자기 구원을 죽인 것이다. 성도의 구원과 대립 충돌 마찰이 되어 있고 본질에서 이탈되어 있는 자는 심판이다.
하나님의 존재성은 시인을 하는데 하나님의 소원 목적과 마음과 인격 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자들이 기독교 안에 수없이 많다. 아버지의 골각은 아는데 마음을 모르면 아버지를 아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골각은 이웃사람들도 안다. 마음을 아는 게 아는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예수를 믿지만 성화구원이 조금도 없고 기복주의 신비주의 사역주의로 나가는 자가 기독교 안에 수없이 많다. 이것 역시 복음에 순종치 않는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중심 사상적 개념은 이방 불신자적 개념과 똑같다. 그러니 이름만 기독교이고, 정신 사상은 불신사상이다. 이방 불신자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줄 때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바꾸어지라고 준 것이지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라고 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말하는바 ‘하나님을 알았느냐, 몰랐느냐’ 하는 것과, ‘복음에 순종했느냐, 아니했느냐’ 하는 것을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고로 이것을 ‘택자, 불택자’ 하고 신학적으로 따지는 것보다 우리의 신앙적인 면으로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본다.
기독자가 성경을 가지고 복음에 순종치 않고 살았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았다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창조한 그 물질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살았다는 것이냐? 인간이 인간으로서 참 인격으로 가르치지 않고 무엇을 하며 살았다는 말이냐? 세상 먹고 마시며 누림의 목적으로 살았다는 말밖에 더 있느냐? 그러니 심판이 마땅하다.
심판의 기준은 인간도덕이 아니다.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느냐, 복음을 순종했느냐’이다.
현재 교회는 도덕운동을 하고 있다. 인간의 양심성의 도덕을 기준해서 성경을 가지고 고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건 기준이 다르다. 타락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운동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을 중생시킨 것은 아담 타락 전의 상태로(무죄인) 회복이 아니다. 영 중생은 하나님과의 본질로이다. 복음은 하나님을 기준하여 성경을 가지고(성경은 하나님이 기준이니) 하나님과 단일성으로 그 인격과 성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교회는 일반 도덕성의 회복이 아닌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흔히 말하길 ‘교회 나가면 착한 사람 되라, 거짓말 하지 말라, 사랑하라고 하며 좋은 것을 가르치지 나쁜 것 가르치겠느냐’ 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된 도덕성의 기준이다. 말세의 기독교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사랑으로 대체시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을 알 것.(몰라서 심판이니) 존재적 성분적으로! 알되 많이 정확히 알 때 내 속에서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이 능력적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복음에 순종할 것. 동시적 깨달음이 되도록!
이런 자들.
9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다. 지옥이 아니다. 주의 얼굴과 힘의 능력 밖이다.
얼굴을 못 본다: 주님과 단절이다. 단절이면 교제 밖이고 사랑 밖이고 주님을 볼 수 없다. 영원까지 부르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다.
힘의 능력: 주님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세상과 죄를 이긴 능력, 물질계를 초월하는 능력, 신령계를 통치하는 능력, 물질계를 통치하는 능력, 지능 기능의 능력. 모든 면의 능력자는 모든 면의 영광자이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 이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얼굴, 주님의 능력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기로 인도하는 것을 환난 핍박을 주었다.
이들은 주님의 영광의 능력에서 떠난 자들이니 주님의 영광의 능력을 못 볼 자들이요, 그 능력과 상관없이 살았으니 그 영광을 못 볼 자들이다. 복음에 복종을 않았으니 주의 얼굴을 못 보고 못 볼 자로 살았고, 환난 핍박을 주었으니 영적인 면에 대적노릇을 했으므로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영원히! 끝없는 멸망파괴, 죽음파괴. 끝없는 파괴요 끝없는 죽음이다. 영원히 건설의 기회가 없고 영원히 생명으로 사는 기회가 없다. 있을 뻔 했는데(왔었는데) 기회를 놓쳤다는 그 말이다.
순간의 한 생각 한 행동으로 이런 결과가 올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하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복음에 순종한 것과 안 한 것, 환난 핍박을 주는 것에 대한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이야!
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① 한꺼번에 모았다가 이들에게 환난을 준다.(어느 시대적으로)
② 개체 개별적으로 그 생명이 끝날 때 한꺼번에 준다.
③ 개체 개별적이던 단체적이던 그 심판은 마지막 그 날에 필연적으로 된다.
마지막 그 날에 어물쩍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 잊지 않는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란 건설 생명이 없고 비참성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화구원에 빠진 부분 부분마다 안 된 부분에 대한 비참성을 느끼도록 최고의 비참성을 겪게 하는 것이다. 성화구원은 영원에 해당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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