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2:8-14/ 김의식목사
2023-04-20 04:09:50
우리는 오늘 성탄주일이요 송년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한 해가 어쩌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고요. 또 우리의 일생도 그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어요. 이러한 우리의 인생에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참된 평안을 얻을 수가 없어요. 오직 주님만이 참된 위로를 하시고요. 참된 평안을 주시고요.
참된 영생을 부어주시는데요. 이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 of great joy) 즉 복음을 들려주세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미가 5:2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예언의 말씀대로요.
다윗의 고향 동네인 베들레헴에 우리를 일평생 불행과 고통으로 몰고가는 죄악과 상처와 질병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세주가 나셨는데요. 그는 지난 구약시대 4000년 동안 기다려왔던 만왕의 왕이시오. 대제사장이시오. 대선지자이신 그리스도(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자)시고요. 우리의 일생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이시라는 거예요. 바로 이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데요. 이러한 복음은 어떠한 이에게 임하고요. 어떠한 결과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는가를 보면서요. 우리도 성탄절이 되었는데요. 점점 기쁨이 사라져가는 말세 마지막 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어떻게 누리며 살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겸손하게 충성을 다해야 함
먼저 본문 8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 양은 기르던 목자들이 들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는데요. 이스라엘 성지의 목자들은 배우지도 못하고요. 신분적으로 천민이었어요.
또 들에서 양을 치면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어요. 세상적으로는 그들은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을 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요. 밤에 자지도 않고요.
밤 새워 놀지도 않고요. 늘 깨어서요. 양떼를 충성되게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성탄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당시 종교계를 대표하는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심지어 동방박사들에게도 아닌 이 가난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무명의 겸손하고 충성되었던 목자들에게 전해졌던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 우리도 세상의 부귀나 권세나 향락이나
그 무엇으로도 누릴 수 없는 예수님의 탄생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데요. 그런데 많은 때 우리가 세상의 부귀나 권세나 향략에 빠져 살다 보니깐요. 참된 기쁨을 누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요. 우리 자녀들까지도 똑같이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즉 복음을 믿고 체험하게 되면요. 성탄절에만 기대하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가 아니라요. 날마다 순간마다 ‘매일 크리스마스(Everyday Christmas)’의 이 놀라운 감격의 큰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예화) 김동건 교수님의 책,「예수: 선포와 독특성」이야기
그러므로 우리가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먼저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해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5:5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주의 종)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분명히 경고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받고요. 기도를 하고요. 찬양을 부르고요. 봉사를 하고요. 구제를 하고요. 전도를 하고요. 선교를 하면서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어서요. 평생토록 신앙생활을 해도요. 우리가 교만하면 절대로 은혜를 못 받아요.
그래서 마음이 점점 강퍅하고 완악해져서요.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요.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다가요. 불행과 고통 속에 인생을 끝내 버리고 마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핵심인 이 치유의 은혜를 체험하면요. 다 예수님처럼 겸손해져서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모든 일에 감사하고요. 어떠한 원수라도 다 용서하고 사랑하고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위로 받고요. 새 힘을 얻어서요. 큰 기쁨의 감격의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먼저 겸손해야 하는 거예요.
예화)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교회 이야기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일찍이 17살 때부터 이방여인과 방탕한 삶을 살다가 32살 때 주님을 만나서요. 근대 교부였던 세계적인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실만을 붙잡는 삶의 길의 첫째는 겸손이고요. 둘째도 겸손이고요. 셋째도 겸손이다”고 강조했던 거예요. 우리가 겸손해질 때 성탄의 주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요.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요. 죽기까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지요?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뜨겁게 느껴져서요. 날마다 성탄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요.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예화) 은퇴하시는 최귀협 장로님 이야기
이처럼 우리가 일생토록 겸손하게 변함없이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할 때에 마태복음 25:21, 23에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분명히 약속하세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우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하고 평생토록 변함없이 겸손하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할 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복되게 살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떠난 후에도 주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모두 다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
계속해서 본문 13-14절 상반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한 주님의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으로 목자들에게 전해주시면서요. 목자들이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가보면 보자기에 싸여서 말 밥통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될 텐데요. 우리에게 큰 영적인 교훈을 담은 기적인 표적(sign)을 보게 되리라고 증거해요. 그때 갑자기 수많은 천군 즉 하나님의 군대의 무리들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찬송한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성탄의 주님을 만나고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하게 되면요. 이 놀라운 성탄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환난 많은 세상 가운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건강한 것도, 축복된 것도, 위로 받는 것, 새 힘을 얻어 사는 것도, 무엇보다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사는 것도 다 주님의 은혜인데요. 우리가 내세울 것이 뭐가 있느냐는 거예요?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예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 이야기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강하게 강조하세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먹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기도해보고 먹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 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기도해보고 마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기도해보고 행합니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더 이상 시험에 빠지지 않고요
. 우리의 신앙을 지킬 뿐만 아니라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토록 복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요. 자기의 이익을 취하고요.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라면 철저히 외면하고 멀리하고 배격해야 해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요.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도 목숨 걸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을 다해야 하는 거예요.
예화) 은퇴하시는 윤건상 장로님
이처럼 우리가 평생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 시편 62:7에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고 분명히 약속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듯이요. 우리의 인생의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음을 보면서 분명히 목격하고 체험하며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여생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하게 됨을 감사하고 감격하면서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일생토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승리의 힘이 되어 주시고요. 반석이 되어 주시고요. 피난처가 되어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모든 사람들과 화평해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14절 하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수많은 천군들과 천사가 함께 계속해서 찬양하기를 “(예수님의 탄생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서 평화로다”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라는 단어인데요. NIV 영어성경에 보면 “those on whom his favor rests" 즉 ”하나님의 호의(인정)이 머무는 사람“이란 뜻이에요. 성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들은 성탄절이 아무런 화평의 의미가 없고요. 평생토록 불화와 분쟁만 일삼다가 끝낼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가장 먼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던 거예요(:15). 이처럼 예수님의 성탄은 구원받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우리들 사이까지도 모두를 화평케 하신 거예요.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요, 복음의 큰 기쁨 소식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까지 지난 날 우리와 화평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다 회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바로 여기에 매 연말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연례적인 성탄절이 결단코 아니라요. 영적인 화평의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은혜롭고 행복한 성탄절이 되는 거예요.
예화) 영국군과 독일군의 화해 이야기
이 얼마나 감동적인 화평의 모습이에요? 이것이 바로 성탄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한 사람들의 화평의 삶인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화평이 성탄절에만 있어야 하겠어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믿고 체험한 모든 사람이 일생토록 행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로마서 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명령하신 거예요. 우리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고요. 언제 어떤 사람을 만나서요. 어떻게 도움을 구해야 할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살아 있는 동안 교회나 노회나 총회나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나 심지어 세계 선교지에서까지 어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교인들을 만나도요. 인간이기 때문에 다 흉허물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허다한 죄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으니깐요. 그 사람의 허물은 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요. 주님께서 저를 용서하셨듯이 다 용서하고요. 최선을 다해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총회나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나 세계 선교지의 어디를 가도 많은 주의 종들이나 교인들의 더 큰 사랑을 받고 더 큰 은혜를 입게 된 것에 대해서 너무 너무 감사해요. 사실 인생을 살다보면요.
사람들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고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험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은혜로운 사람이고요. 축복받은 사람이고요. 행복한 사람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서로 화목해질려면요. 자주 만나 음식을 나눠 먹어야 해요. 그래서 음식을 먹을려면 입이 열리고요. 입이 열리면 식도가 열리고요. 식도가 열리면 마음이 열리는 거예요. 그래서 초대교회가 시도 때도 없기 성전에서 떡을 떼고 가정에서 음식을 나눠 먹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거예요.
예화) 은퇴하시는 박복철 장로님 이야기
이외에도 오늘 은퇴하시는 모든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과 권사님들 등 모든 사람을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 가운데 일곱 번째로 마태복음 5:9에 축복을 약속하세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고 증거하신 거예요. 우리 주위에 불화하고 분쟁하며 사는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거예요. 아무리 불화하고 분쟁을 화해 화평케 하는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성탄의 감격을 체험하게 될 때 모든 사람을 화평케 하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은퇴하시는 이경화 장로님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인생이 빨리 지나가고요. 또 다시 우리의 송년주일이요 성탄주일을 맞이했는데요. 겸손하게 충성을 다하고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의 감격 속에 영원히 행복하고 축복되게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2:1-14/ 유기성목사
2022-02-17 10:39:53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님 탄생의 큰 기쁨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군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한 밤 중인데 찬란한 광채가 비취었으니 목자들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겠습니까? 그 때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 하면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10)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시험에 합격했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하는 일이 성공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기다리던 자녀가 출생하였다. 아픈 병이 나았다 등등이 다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식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기쁨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기쁜 소식은 예수님뿐입니다.
대부분의 기쁜 소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이 아니거나 시기 질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기뻐할 소식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한국도 일본도 중국도 북한도 다 기뻐할 소식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탄생이 그 기쁜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온 백성의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11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이 구주라는 말은 엄청난 진리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탄이 존재하고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며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요, 죄 안 짓고 살 수 없는 존재로 모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이 있고 지옥이 있기에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이 큰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주며 살인강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무슬림에게도 갓난아이에게도 병든 사람에게도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도 기쁜 좋은 소식입니다.
죄인에게 속죄 받을 길이 열린 것입니다.
마 9:13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아니 세상에 누가 죄인을 초청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죄인을 초청해본 적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니 큰 기쁨의 소식이지 않습니까?
누구나 천국에 갈 길이 열렸고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화해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그 죄가 깨끗이 씻깁니다.
이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우리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기적을 매일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주어졌으니 성탄이 큰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탄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면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이 기쁜가?” 하는 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데 성탄절이 와도 그리 기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성탄절을 중요한 날로 여깁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려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고맙지 않습니까? 그런 믿음은 있습니다. 성탄절 장식도 하고 성탄절 예배도 드리고 카드도 보내고 선물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성탄절이 그렇게 기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어떤 사찰에서 성탄 트리를 만들고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합니다’ 현수막을 내걸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뉴스의 분위기는 불교가 마음이 넓다, 다른 종교도 포용한다는 뉘앙스입니다.
이처럼 절에서도 성탄절을 축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을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여러분은 성탄절 축하행사와 성탄절 예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못 받으신 분 계십니까? 지금 확인해 드립니다.
그래서 성탄전야 행사와 성탄절 예배에 오실 생각입니까?
망설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재미가 없어서’ ‘바빠서’ ‘피곤해서’ 등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이 마음에 거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생일, 부모님이나 아이들 생일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반드시 챙기겠지요! 성탄절이 가족 생일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족과는 같이 사는데 예수님하고는 같이 안 살기 때문입니다.
광복절과 친척 결혼식,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왜 광복절 기념식에는 안가고 친척 결혼식에는 갑니까? 전적으로 인간관계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 되면 축하해주는 사람이 더 바쁘고 기쁘고 설렙니다.
‘며칠이 누구 생일이지!’ ‘기쁘게 해줘야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돈쓰고 시간 내면서 마음이 더 설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탄절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 추도예배와 살아계신 아버지 생신 잔치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성탄절을 맞이하는 마음이 왜 다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당시 베들레헴에 빈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마음속에 많은 것들로 가득 차서 주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주 예수님을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과 관계가 서먹하고 마음은 황폐하고 기쁨이 다 사라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탄절전야 집회와 성탄절 예배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 초대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초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알기는 하실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은 비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작고 가난한 마을이었습니다. 그 베들레헴에서도 마구간에서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죄인이든 어떤 실패자이든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친히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폴로 15호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가 달에 착륙해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창문으로 축구공만한 지구가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순간, 어윈의 마음속에 요한복음 3장 16절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주 안에 수억만 개의 별들 가운데 너무나 작은 지구에, 무엇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지구에 있을 때는 하늘과 땅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주에 나가보니 지구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그 작은 지구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그 지구 안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친히 사람이 되어 지구 속에 들어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정말 궁금하였다고 했습니다.
지구가 어찌 그렇게 하나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고 크게 보인 것입니까?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에 간 아들이 있으니 최전방 부대까지 찾아가는 것이고 사랑하는 자녀가 있기에 다들 외면하는 교도소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릴지 몰라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탄절의 말할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못 받은 분 있습니까?
예배 때나, 설교를 들을 때, 기도 시간, 큐티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또는 경건 서적을 읽다가, 혹은 그저 길을 가다가, 실패나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분명히 자신에게만 주시는 주님의 책망과 교훈과 위로와 약속을 깨달은 적이 없으셨습니까?
있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마음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정말 믿을 때 누구나 성탄절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어느 성도의 예수동행일기입니다.
“아침에 ‘오늘 기쁜 일 좀 생기면 정말 좋겠다’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하나님 오늘 기쁜 일 생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는데 저녁때까지 특별히 기뻐할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실망도 되고 응답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려는데 문득 요 15장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읽어 보았는데 요 15:11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기도응답인가?’ 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니 예수님께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너 안에 있는데 무슨 기쁨을 또 원하냐?’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투정하였던 것을 회개하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침에 드린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돈이나 성공,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기쁨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실망하고 상처받고 낙심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진정한 기쁨,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쁨은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라 하니 위만 쳐다보거나 마음만 들여다볼까 걱정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을 만나려면 주위에 어렵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야합니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하루는 교회 로비가 시끄러워 나가 보았더니, 경찰관이 행려자 한 사람을 끌고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욕을 섞어 가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교회가 이래도 되냐? 도와달라고 온 사람을 경찰을 불러 끌어내는 곳이 교회냐?”
그는 잔뜩 술에 취해 있었고, 교회 사무실에 와서 오랫동안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교회 관리집사나 사무원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려자의 외침은 제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인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 내가 헐벗었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이 일로 인하여 부산제일교회에 노숙자 급식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급식소를 운영하면서 걱정거리가 정말 많았습니다, IMF 사태로 어려웠던 1998년 여름에는 매일 아침 200명이 넘는 분들에게 아침 식사를 해드렸습니다. 주일 300여 명 예배드리는 때였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마음 하나로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부산제일교회가 재정적인 축복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급식소를 지을 땅도 사고 급식소 건물도 지었습니다, IMF 사태로 모두 다 어려울 그때 말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때 교회가 땅도 사고 식당 건물도 지은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은혜로 충만하게 되고 교회가 생명의 역사로 살아난 것입니다.
매년 우리 교회에서 실시하는 [교회 밖 성탄절] 행사가 참 귀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탄절을 지키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있는 어려운 이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을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진정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예수님만 기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만 아닙니다. 가족에게도 주위 어려운 이들에게도 기쁨이 흘러가게 됩니다.
찬양: 천사 찬송하기를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참 놀라운 소식. /마1:21, 눅2:18/ 김형익 목사
2021-05-12 03:09:06
1. 사람들이 다 놀랐다(눅 2:18)!
누가복음 2장 18절은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듣고 다 놀랐다고 말합니다. 여기 놀랐다는 말은 두려움이 있는 놀라움입니다. 목자들이 전해준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장 8절부터 그 이야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 인근에서 한 밤에 양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고 한 천사가 그들의 곁에 섰습니다. 우리는 그 광경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목자들도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물론 여러 명이 함께 있었기에 그것은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으니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다윗의 동네에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입니다. 다윗의 동네는 베들레헴입니다. 이것은 작은 촌에 불과한 베들레헴 사람들이 가지는 자부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2).”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마치자,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의 합창 소리가 들립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목자들은 서둘렀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집집을 다니면서 물었겠지요. 결국 멀리 나사렛에서 호적하러 왔는데 부인이 만삭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봤습니다. 그가 메시아입니다. 이 이야기를 목자들은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다 놀랐다고 18절은 말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있는 놀라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와 비슷한 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는 원한을 품은 형의 보복이 두려워 멀리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렇게 멀리 길을 떠나 보지 않았던 사람이 홀로 그 길을 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밤이 되어 광야에서 홀로 잠을 자는 것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밤에 야곱은 하나님의 현현을 보게 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고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이제 그의 이야기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하며 두려워했습니다(창 28:16). 바로 이런 두려움인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2. 놀라움에 대한 추적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 정황을 조금 더 추적해보겠습니다.
A. 동방박사들(마 2:1~12)
먼저 그 자리에는 동방박사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에서 별을 보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루 이틀의 간단한 여행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 길을 왔습니다.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나셨는데 이는 그냥 왕이 아니다 하는 정도의 계시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아, 바로 이런 분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놀란 것입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는 바로 하늘이 보내신 분이라는 인식과 느낌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하고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B. 요셉(마 1:20~23)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동방박사들 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계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정혼한 아내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은 채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이것은 돌로 쳐 죽여야 할 사안이지만, 요셉은 그저 조용히 관계를 끊음으로써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계시의 형태로 주어진 꿈이었습니다.
천사는 아내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말라고 하면서 그 임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텐데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할 것이며 그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것을 성취하는 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은 잠이 깨어 천사가 말한대로 순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나 그들은 호적을 하기 위해서 원적지인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아내 마리아는 만삭이었지만 여관을 구하지 못해서 가까스로 마구간을 구하여 거기서 해산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이미 이 계시를 알고 있었기에 이분이 예수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와서 다시 한 번 이 아기가 어떤 분인지를 말해 준 것입니다. 어찌 두려움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C. 마리아(눅 1:26~38)
우리는 이제 마리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가장 많은 계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꿈이 아니라 생시에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말합니다. 천지개벽할 일입니다. 정혼하고 아직 결혼식을 남겨두었기에 남편과 동침한 적도 없는데, 어찌 아이를 가진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가브리엘은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이고, 나실 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며 다윗의 왕위를 가지고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왕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이 말씀을 그대로 받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참 큰 믿음입니다. 그녀는 그녀의 친족인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때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온다”고 말합니다(눅 1:43)
. 내 주의 어머니는 내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금씩 더 분명하게 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산을 하게 되고 지금 눈 앞에 자신이 낳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와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더 두려움으로 놀랐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정황을 생각해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 중 한 사람도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두려움에 놀라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소식은 정말 두려워하고 놀랄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과 밖에서 놀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구유에 누우셨던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3. 인생의 가르침, 철학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웃기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소위 ‘세계 4대 성인’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와 함께 분류해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가르침을 찾으려고 생각하는 시도인데, 이런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산상보훈을 아주 사랑했고 그것을 자신의 비폭력투쟁의 이론적 기초로 삼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고, 그분이 오신 목적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이나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가르침이나 철학적 가르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똑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정교한 인생관과 윤리 혹은 철학 이론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아무 소용도 없는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철학과 지식과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그것을 세워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그것은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공부하고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자기 만족과 자기 추구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단지 지적인 만족을 위해서 성경을 혹은 주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인생의 가르침이나 철학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4.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보여주시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은 주님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는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고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면서 상과 의자들을 둘러엎으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현대인들이 싫어하는 모습이고 관용적이거나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분노 조절에 실패한 모습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들을 예외로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본을 보여주시려고 오셨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본받아 삶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비참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은 절대로 죄인에게 평강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한계입니다. 주님은 본받는 삶을 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5.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오셨을까요?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물론 우리의 중보자로서 선지자직을 가지고 오셨지만,
단지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하는 백성들에 의해서 뜻을 이루시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만 잘 듣고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6. 사회 개혁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하나 더 다룰 오해는 예수님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오신 개혁가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신 혁명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이런 오해들이 있어왔지만,
그 뿌리는 오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주된 오해가 이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을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다윗의 영광을 온 세상 위에 회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중에 이런 유대인 대중들의 메시아 오해를 의식하셔서 자신을 감추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습니다. 이 오해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나라로 혼동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혼란스러워하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이지만(계 11:15) 아직은 아닙니다. 주님은 타락한 세상을 개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7.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님께서 나시기 전에 천사가 요셉에게 전해준 메시지에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목적으로 오시는지에 대한 참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요셉이나 마리아가 붙여준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영원 전에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실 성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름이었습니다. 요셉에게뿐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이 이름은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서 계시되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이 이름의 의미 안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목적이 명확하게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입니다(요 17: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하시려고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8. 복음: 객관적인 역사(고전 15:3~4)
어떻게 주님께서는 이 목적을 성취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은 복음에 대한 가장 간결한 요약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가르침이나 복음 전파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복음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3장 25~2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를 흘려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그들과 화목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신약 성경만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선지자 이사야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8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5~8).”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복음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 역사 속에 일어난 객관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죽으시는 것이었을까요? 잘 가르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렇게 하셔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정말 그것이 가능했다면 물론 주님은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지 않으셨겠지요.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잘 가르쳐주기만 하면 자기들이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희망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엡 2:1).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롬 3:20).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선언입니다.
인간은 어떤 가르침으로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지식과 학문을 성취하고, 아무리 높은 권좌를 누렸다고 할지라도 죽음의 침상에 누워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가 가졌던 지식이나 권세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권세와 명예와 성공이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뉴스 미디어를 통해서 매일 매일 확인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어떤 사회 프로그램을 제시하시거나 그런 사회를 만드시거나 혹은 선한 인생에 대한 희망적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복음을 전하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얻을 복음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9:30).”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바로 예수 이름의 뜻,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 일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심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전해준 뒤에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임마누엘!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이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임마누엘은 예수의 이름의 궁극적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이 필요했으며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9. 놀라야 할 소식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참된 교회는 지난 스무 세기 이상 동안 이 복음을 믿어왔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들은, 주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오셨다는 이 소식은 정말 두려움으로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우리를 더 큰 두려움으로 놀라게 할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이르지도 못할 명령을 주신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들이 받을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사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기 죄를 담당하신 죽으심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그 복음의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이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 성령 안에서 주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성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려고 오신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마땅히 두려움으로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마구간에 가보라 /눅2:1-14/ 유기성목사
2020-03-18 21:55:34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늘 저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성탄절이 기쁘냐?”
여러분도 스스로 질문해보기 바랍니다.
어렸을 때 성탄절은 일 년 중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그저 좋았습니다.
무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설렘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성탄절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성탄절의 기쁨이 사라진 이유는 성탄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2,000년 전 예수님이고 아기 예수이지 지금 함께 계신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 되면 축하해주는 사람이 더 바쁘고 기쁩니다.
돈쓰고 시간 내면서 마음이 더 설렙니다.
“기쁘게 해줘야지, 행복하게 해줘야지,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그러나 돌아가신 분이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생일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참 오늘이 그 사람이 생일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잃어버린 성탄절의 기쁨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습니까?
지금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마구간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눅 2:10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짐승들이 먹고 자는 마구간에 온 세상의 구주가 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메시지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구간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마구간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우리 마음이 마구간보다 더 더럽습니다.
누구를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내 마음 몰라준다.’고 말하지만 정말 마음을 열어보여 줄 자신이 있습니까?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이라고 마음에 들어오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마음에 주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영접한 사람은 마음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마구간보다 더 더러웠는데 주님이 계신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빌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욕심덩어리인데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빌 2:6-8에서 계속 말씀합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 성경 최초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빌립보서는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성경입니다. 이 편지를 기록했던 누가가 나중에 마리아나 예수님의 증인들을 직접 찾아 듣고 누가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바로 빌립보 교회가 가진 문제에 적용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큰 시험거리가 있었는데, 교회를 사랑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성도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빌립보 교회에 큰 근심이었고 사도 바울에게까지 그 일이 전해졌습니다.
그 문제로 사도 바울이 그 두 여성도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권면합니다.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말씀은 빌 2:5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저는 성탄절에 제 마음에 거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전에는 제 마음이 마구간보다 더 더러웠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처소,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너무나 기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이 기쁜 사람은 그 비밀이 마음에 있습니다.
성탄절에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정말 나의 마음에 임하신 것인가?’ ‘나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가?’
예수님께서 태어난 지 팔일 만에 요셉과 마리아가 규례를 지키려고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갔을 때, 선지자 시므온을 만나는데, 아기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아보고 축복하면서 마리아에게 의미심장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마리아의 마음이 칼로 찌르듯 고통스러웠던 일은 십자가에서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겪습니다.
19세기의 성공회 주교 J. C. 라일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두 가지 큰 표지가 있다. 하나는 내면의 평화이고 또 하나는 내면의 전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나간다. 그들의 이름은 세례자 명부에 올라있다.
그들은 사는 동안 기독교인으로 간주되고,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하고, 죽어서도 기독교인으로 묻힌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에는 ‘싸움’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영적 전투, 수고, 충돌, 자아부인도 모른다. 이런 기독교는 생명의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세우시고 그 분의 사도들이 전한 신앙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는 “싸움”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에 큰 싸움이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의 보좌를 차지하고 있던 옛 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어느 성도의 일기입니다.
"오늘은 직장에서 팀장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새벽기도회 때부터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여러 가지 시험거리를 만들었습니다. 몇 번 목에까지 올라오는 말을 내뱉을 뻔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혈기나 논리로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 때, 주님께서 오늘 식대를 제가 내라는 마음을 주셔서 ‘오늘 점심은 우리 부서의 단합을 위하여 제가 쏘겠습니다.’ 했더니 팀장이 깜짝 놀라며 고마워했습니다. 커피는 자신이 사겠다고 하여 모처럼 훈훈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속상한 일이 많은 하루였는데, 이상하게 감동적인 하루라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연스런 삶입니다.
주님은 그저 낮아지라거나 그저 순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탄절이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옆방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제가 안산에서 목회할 때, 서울에서도 제법 거리가 먼 곳에서 예배를 드리러 오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교회가 어디일까, 정말 예수님을 느낄 수 있는 예배를 드리는 곳이 어디일까?’찾고 찾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만나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갈망이었습니다. 저라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예배가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갈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 무급 사역자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교회를 찾아갈 수 있겠지만 저는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교회를 예수님을 만나는 교회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느낄 수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돈을 벌어 기쁠까요? 학위를 해서 기쁠까요? 권력을 얻어 기쁠까요? 그래서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이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이 세상의 왕이나 독재자 주위에는 총애를 기다리며 세력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력과 총애는 정치가 다루는 전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왕 되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물과 뇌물로 그분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빠지지 않으며 큰소리로 찬양하고, 헌금도 잘 합니다. 교회와 병원, 학교를 짓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보상받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진짜 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이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 “내가 네 마음에 거함을 믿으라.”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이것이 성탄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믿어지면 더 이상 구할 것도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데 돈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사람들의 평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성탄절의 기쁨을 어디서 찾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음을 주님께 활짝 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리라’ ‘주님의 눈으로 보리라’ 결단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 아내의 마음, 부모의 마음으로도 부족합니다. 목사의 마음, 선교사의 마음으로는 주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이 마구간 같은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만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당신은 영광의 왕'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눅2:8-14/ 유기성목사
2017-06-12 23:42:18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절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성탄절의 은혜는 큰 기쁨에 있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한 밤중에 천사들이 나타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성탄절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진 날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성탄절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탄절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작가 찰스 디킨스는 그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성탄절의 기쁨을 모르던 한 사람에 대하여 썼습니다. 스크루지 영감은 지독한 구두쇠로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았고 평소에 웃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크리스마스가 기쁜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잠을 자다가 꿈을 꿉니다.
그는 꿈속에서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비록 구두쇠처럼 살기는 살았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다고 자평해왔는데 사람들은 자기를 너무나 나쁘게 평가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지막 어떤 사람의 장례식 장면을 볼 때입니다. 사람들이 묘지 앞에 모여 망자에 대하여 말들 합니다.
"불쌍한 영감이야" "부지런히 뛰며 돈만 벌면 뭐해?" "독사처럼 인정머리 없는 영감인걸....." "그래 맞아,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모르는 바보였어..." 도대체 누구의 묘지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스크루지 자신의 묘지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주저앉고 맙니다. 그 때, 잠이 깹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었고 멀리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습니다. 식은땀이 온 몸에 흘렀습니다.
스크루지는 그 날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다시 태어난 기쁨이 넘쳤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가서 성탄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빈민 구제소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부금도 내고 조카네 집에도 들릅니다.
성탄절을 맞는 여러분의 마음은 꿈을 꾸기 전과 후, 어느 편의 스크루지에 가깝습니까?
천사가 말해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렇습니다. 성탄절의 기쁨은 자신이 지옥에 갈 자였음을 깨닫고, 예수님 때문에 그 죄에서 구원받은 감격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환경과 처지를 초월한 기쁨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탄절은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날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천성을 향하여 가는 성도가 지옥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고통당하는 어떤 사람들을 보고 안내하는 사람에게 "저들은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 고 물었더니,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는 대답을 듣는 부분이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기 힘든 것은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구원의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에 구원의 기쁨을 되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기쁨은 단지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주가 나신 기쁨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성탄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천사들이 들판의 목동들을 찾아 왔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만나는 하나님은 가난한 하나님, 약하신 하나님, 작아지신 하나님입니다. 하나같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이 성탄절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소식을 왜 처음 목자들에게 전하셨을까요?
당시 '목자'들은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짐승들과 밤낮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 교양도 없고 거칠고 거짓말도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전하셨을까요?
혹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을 것 같다고 여기는 분은 성탄의 기쁜 소식이 누구에게 전해졌는지 주목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유는 작고 가난한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그 베들레헴에서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자신은 하나님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말하거나 주님이 자신에게서 떠나신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이 느낌은 거짓입니다. 느낌에 속으면 안 됩니다.
천사들은 들판의 목자들을 주목하여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도 여러분에게 똑같이 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아시며, 여러분을 주목하시고 여러분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집요하게 여러분을 찾으시는 주님을 느끼지 못하십니까?
유명한 성공회 목회자이셨던 존 스토트가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인 것도 아니며 바로 "천국의 사냥개" 때문입니다. 즉, 제가 원하는 길로 가고자 도망할 때조차도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천국의 사냥개라는 표현은 시인 프랜시스 톰슨 (Francis Thompson)이 처음 썼습니다. 그는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게 신부도 되지 못하고 의사가 되지도 못하고 군인이 되지도 못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기를 원했지만 프랜시스는 마약에 빠져 살았던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을 계속하여 추적해 오시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추적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프랜시스 톰슨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사냥개)(Hound of Heaven)라는 기념비적인 시를 썼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 속의 미궁 같은 길로
슬픔 속에서도 그를 피해 숨었다네.
겉으로는 계속 웃었고 한 때 희망에 부풀어 오르기도 했었지만
이내 두려움의 골짜기 아래 거대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쳐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오는 그 힘찬 발소리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장엄한 긴박함으로,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가여워라, 너는 알지 못하는 도다.
나 아니면, 오직 나 아니면 비천한 너를 누가 사랑해 주겠느냐?”
“내가 네게서 너의 모든 것을 가져감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네가 그 모든 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 함이었다.
네가 어린아이 같은 생각으로 잃어버렸다 여긴 모든 것을 나는 내 집에 쌓아 두었노라.”
“일어나라. 내 손을 꼭 잡고 가자!”
내 곁에서 멈추네, 그 발자국 소리.
“아, 어리석고, 눈멀고, 연약한 자여, 내가 바로 네가 찾는 자이니라!”
성도 여러분, 프랜시스 톰슨의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이 시간 여러분이 이 자리로 오기까지 계속 여러분을 추적해 오고 계셨음을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천사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만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존 스토트만, 프랜시스 톰슨만 추적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모두를 추적해 오셨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절망하고, 탄식하던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 오셨습니다.
귀신에게 붙들려 무덤가에서 울부짖으며 살던 사람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죽어서 무덤 속에서 썩어져가던 나사로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 모든 성경 기사는 하나를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판의 목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 때 ‘나에게 들판에서 목자들이 천사를 만난 것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훨씬 극적일 텐데’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하는데, “유기성목사야” 하며 주님이 나타나신 다거나, 길을 걸어가는데, 누가 툭 쳐서 돌아보니 “오, 주님” 하게 되는 사건을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저는 천사가 나타나는 경험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목자들과 지금의 저를 비교하면 저는 훨씬 주님과 가까운 것입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를 만났지만 저는 제 마음에 주님이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들판의 목자들 보다 예수님에 대하여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크루지 영감이 꾼 꿈을 기다리지 말고 들판의 목자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싶습니까? 조용한 자리를 구별하여 성경을 펼치기만 해 보기 바랍니다. 들판의 목자들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풍성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예배 시간이 스크루지 영감의 꿈보다 더 놀라운 은혜의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순회선교단 김용의 선교사님은 술집 아들이었고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도 사랑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이 자랐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숨이 멎을 것 같았답니다.
부모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였는데! 사랑은커녕 상처만 받았는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니!
그는 술집 아들인 자신을 지목하여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금처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번 묻고 싶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김용의 선교사님이 깨닫고 삶이 뒤집어진 메시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안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쫓아오시는 주님을 향한 응답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탄의 기쁨이 없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추적해 오시는 예수님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짐승들을 키우던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까?
당시 베들레헴에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많은 것들이 가득 차서 주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주 예수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여러분, 언제까지 주님이 쫓아오게 만드실 것입니까?
이제 주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그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은 잔치를 준비하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하늘에서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고 웅장한 팡파르와 음악이 있었다. 먼 지방에서 동방박사가 예물을 가지고 왔고, 들의 양치기들도 와서 축하하였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
오병이어로 장정 오천 명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떡 잔치를 벌이셨다.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 바비큐 파티를 벌이셨다.’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잔치를 준비하고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혼인잔치를 배설하는 임금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당신이 오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도 (요 10:10)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셨다”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이 있는 삶이겠구나!’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였습니다. 가슴에는 별 충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부분에 소개한 어린아이가 낸 퀴즈를 읽고 ‘빵’ 터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최초로 하신 말씀이 무엇일까요? 정답은 "짠!"입니다.” 이 부분을 읽는데, 갑자기 주님께서 제게 “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웃어! 왜 그렇게 심각하니? 괜찮아 웃어도 돼” 순간 잔치를 벌여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가슴에 임함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설교만 듣지 말고 나를 바라봐!”
우리 모두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 예수님 그 분이 기쁨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에 여러분 모두에게 큰 기쁨,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성탄의 실현 /눅2:1-7/ 이동원목사
2014-12-04 16:26:28
20대 초, 예수 믿기 직전 죽음을 생각해본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자살의 유혹을 느끼게 한 소설이 두 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까뮈의 이방인이었는데 주인공 뫼르소는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살인합니다.--살인의 이유가 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강렬한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 진것입니다. 그는 장례식에 가서 울지 않습니다. 해변가에 파티에서 웃지도 않습니다.--전 어쩐지 그를 이해할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하나의 소설(에세이)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큼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중간에/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덥다.--나는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무슨 제목으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아무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이 두 개의 작품의 주인공이 걸린 병은 권태였습니다.(후자의 책은 초 현실주의 작가라고 불리우는 이상의 권태의 첫머리글 이었습니다.)
성탄의 계절인데 좀처럼 삶의 의욕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너무나 똑같은 그날이 그날이라는 이 평범성 때문에 삶의 의욕을 못 느끼고 계신 분이 있으신지요? 저도 한때 인생은 이렇게 부조리하고 권태로운 힘겨운 존재 그 자체라고 믿고있었습니다만 예수 믿고 나니까하루 하루가 기대요, 감격입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내 인생을 바꿀줄 정말 몰랐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2000 년 전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기리는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의 증언을 통해서 그가 이 땅에 오신 방법과 그 교훈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방법--그는 의외의 방법으로,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1.의외의 방법
1) 의외의 상황
--가이사의 호적등록의 명령이 그것을 입증합니다./2:1--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초대황제이었습니다. (본명은 Caius Octavius, 30BC-14AD)줄리우스 씨저의 조카였던 그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독재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은 그의 생일인 9.23을 새해로 바꾸었고, 그를 구세주와 신으로 선포했습니다.--세금수입이 중요했던 그에게는호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고, 이것이 요셉과 마리아로 하여금 베들레헴에 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진짜 구세주가 탄생한 것입니다. 가짜 구세주의 통치하에 진짜 구세주가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 의외의 장소
--베들레헴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의수도 로마, 성도 예루살렘, 항구도시 가이사랴, 욥바, 아름다운 갈릴리 해변 의 디베리아스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라니?
오죽하면 미가 선지자 가 주전 650년경에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한 로마의 변방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도 작고 가난한 마을을 택하신 것이 의외가 아닙니까!
3) 의외의 인물
--마리아와 아기/나사렛땅의 틴 에이저 소녀를 통해 아기의 모습으로.구세주가 이렇게 오심도 의외였습니다.
2.평범한 방법
우리가 그의 출생에서 느끼는 의외성은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평범하게 오셔서는 안된다는 가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매우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의외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1) 호적등록
--독재자의 통치수단인 인구조사로 세금을 강화하여 정부의 재원을 증가시켜 보겠다는 것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목격하는 평범한 현실이 불과 합니다.
2) 베들레헴
--이스라엘 땅의 평범한 서민마을로 지금도 팔레스틴 통치아래서 인구수는--수지보다 적은 가난하고, 평범한 마을일뿐입니다.
3) 마리아와 아기
--미혼모였다는 것이 특별해 보이지만(우리는 성령의 잉태라는 사건을 알고 있지만) 외적으로만 보면 미혼모들을 통한 출생도 죄인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회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들 일행이 호적등록으로 분주한 이 마을에서 투숙 거절을 당한 것도 평범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II.교훈--의외의 방법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다는 것-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요?- 두가지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1.평범한 일이 중요한 일이다.
2.평범한 일이 주님의 일이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삶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원론적 사고의 극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일과 세상일이,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따로 따로 존재한다는 사고 말입니다. 이런 사고로 가정일과 직장일 에 당당하게 임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베들레헴 주민들과 여관주인의 입장에서 그 날 얼마나 많은 손님들을 치러야 했을까요?
무감각하게 될 수 있음을 이해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주님이 태어날것을 알았더라면, 메시아의 부모가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대했을까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무슨일을 하든--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가르칩니다. 6-7절에 보면, 해산의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주님의 태어남을 알았더라면 그랬을까요? 그 일이 우리를 권태롭게 하는 아주 평범한 반복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섬김의 대상이 보잘 것 없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우리가 주님이 맡겨 주신일로 알고 주께하듯 한다면 우리의 일상적 삶은 얼마나 놀라운 삶으로 변신할수 있을까요?
이런 시각 곧 주님의 시각으로 본다면 인생은-하루 하루가 특별한 날이요, 경험하는 모든 일이 특별한 일들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평범한 아기에 대해서도 "당신은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눅2:1-14/ 옥한흠 목사
2014-11-12 10:19:01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 에 태어난 세 명의 천재들 덕분에 온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또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 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세 명 의 천재들은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화가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이었습니다.이 기사를 보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 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20세기 과학과 문화 예술을 주관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2000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 로 전 인류가 어떠한 혜택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 든 종이를 다 끌어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예 수님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간증과 개인이 받은 은혜들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종이가 모자랄 것입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 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류 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었 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알고 있다 해 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신 문 한 모퉁이에라도 거기에 대해 감 사하다고 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 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사 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위해 서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묘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 슨 용기가 필요합니까? 용기라는 덕 목은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세 상에 오신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면, '아무리 광대하고 크신 하나 님이라 할지라도 용기 없이는 그렇 게 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 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 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 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을 하면 육안으로서는 식 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 고 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 중 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 분 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 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 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 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 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 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 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 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 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 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 제를 했습니까? 팡파레를 불었습니 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 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 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 고 천한 몇 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 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 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얼마 전에 미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그 의 행차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호들 갑을 떨며 경쟁하듯이 여왕의 의전 품 목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행사 때마다 2벌씩 갈아입을 옷을 가져갔 고, 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상 복까지 가지고 갔으며 왕이 병이 들 면 급하게 쓰려고 19l짜리 혈장액을 들고 가고, 또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 변기에나 앉다가 세균에 오염 될까 두려워서 변기 깔개까지 들고 간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챙기다 보니 짐만 해도 2000kg이 넘었고, 게다가 전속 미용사 두 사 람에 경호원과 수행원을 수십 명씩 데리고 갔습니다. 이 여행에 들어간 경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26억원이 나 되었습니다.
여왕이 모습을 드러 내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여서 그를 영접하느라고, 또 언론 사들은 그 사실을 보도하느라고 이 만저만 요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 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영국이라는 나라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 다. 제 방에는 밀키웨이 즉, 천문학 자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은하계를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펴놓 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태양계는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양계 중에서 도 아주 작은 별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도 그렇게 요란을 떠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 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 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 데 14절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지 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 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를 주시 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 셨습니다.
샬롬이요 에이레, 우리나 라 말로 화평이요, 화목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바로 위에 있는 1장 79절을 보면, 예수님 을 영접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세 상에 보냄을 받았던 세례 요한의 아 버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 가 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 님이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나 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 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였 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 천년 전 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려고 오셨습니 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 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 목 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 분은 예수 없는 우리의 현주소가 무 엇인가 잘 아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에서 명료하고 간단하게 우 리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 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 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 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베개를 높이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 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 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 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 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 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 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 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 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 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 서 한 때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 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 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 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돔과 고 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 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 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 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 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 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 다.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 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 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해당하는 평민의 모습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 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설명한 글을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절친한 관계를 유 지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사이가 나빠졌 습니다.
일년 동안 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 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 십년이지 만 그 우정의 탑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은 1분이면 족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1년이 넘도록 서 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아마 교회를 다녔나 봅니다. 어느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가책이 왔습 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 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 간 후 그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 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노력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편지를 5통이나 보 냈는데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 서 이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 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을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 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자기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 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 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 에, 그 앞에 녹아지지 아니할 사람 의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 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 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 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벨을 누르는 친구의 모습 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 이상이다. 이건 비유가 안된다.'고 많이 생각 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 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 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 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 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 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 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 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 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 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 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 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 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 니다.
사랑의교회에서는 1년에 한 400 건 정도 장례가 납니다. 400건이면 매일 한 건 이상 난다는 말이 아닙 니까? 엄청나게 많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그런 십자가도 져야 됩니 다. 물론 그 중에 대부분은 연로하 신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는 장례 입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많이 있지만, 가슴 아픈 장례도 있 습니다. 자녀가 먼저 예수 믿고 주 님을 만난 뒤 이 구원의 은혜가 너 무 감격스러워서 '우리 어머니 아버 지도 예수 믿도록 해야지.'라고 생 각하고는 수년 동안 부모를 위해 간 절히 기도하고,
어떤 때는 직접 찾 아가서 꼭 예수 믿으라고 눈물로 전 하기도 하고, 대각성 전도 집회 때 는 초대해서 복음을 듣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안 믿고 계속 미루기만 하시더니 어느 날 갑 자기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 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 없이 하 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 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 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 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 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 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 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 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 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 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 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 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 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세상 끝 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 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 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 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 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31절 이하에 바울이 너무나 흥분하고 너무나 황 홀해서 소리친 그 말씀이 정말로 우 리 마음에 그대로 와 닿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어찌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아시고, 나 같은 것 을 예정하시고, 나 같은 것을 때가 되자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 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 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하셨는 가?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 나님과 평화 할 수 있는 은혜를 주 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 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 고, 우리와 평화 하셨는데 누가 아 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 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 는가?'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 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 시지 않겠느냐?' (롬8:32) 의롭다 하 시는 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받으시고 우 리와 평화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우 리를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겠는 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 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 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 씀이었습니다. (눅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 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 는 세상의 암흑과 혼돈 속에서도 없 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 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 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찬송가 469장을 여러분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 기 때문에 은혜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 혼자 불러도 1시간이 라도 부를 수 있는 찬송가입니다.
'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 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 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얼마나 우리 예수 님이 좋은지요.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 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 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 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 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 잘 몰라서 이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 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 도를 배우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 까이 나가서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가 있 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 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의 평화의 왕입니다. 근심, 걱정을 그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 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 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 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전지전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 라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 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 셨습니다. 티끌보다 많은 죄, 석탄보 다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 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 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 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 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 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 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 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 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 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서 1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 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명령 합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다 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 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 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종 교적인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하는 것입 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 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 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 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 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 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 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 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 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 는 사람들도 많고, 한번 상처를 입 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 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 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 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 수를 절대 잊 버리지 않는 것입니 다.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고부간 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 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 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 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 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봐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 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서 로가 좀 심한 다툼도 할 수 있습니 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 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 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 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절대 어떤 사 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 다.' 누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인생 을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 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 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약한 인간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백번 이고 천번이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 도 형제를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용서함으로써 그들과 평화를 누림으 로 우리가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 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를 용 서하지 못합니까? 묵은 감정을 가지 고 계속 그를 접대합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알아두십시오. 주기도문 을 통해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있습 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 해 주옵소서.' 보십시오. 내가 형제 를 사랑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평화 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 해 주시는 것을 보류하신다는 것입 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 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 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 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 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 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 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 서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 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는 지금 새천년의 문턱에 서 있습니 다. 평화의 왕 예수님 때문에 하나 님과 평화 하였다고 하면서 형제와 불화하면 안됩니다. 뒤의 것을 잊어 버리십시오. 20세기를 잊어버리십시 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 갈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십시오.
과거 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과거에 대해서 문을 닫고 못질을 해 버리십시오. 자물통을 잠가 버리고 다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용 서하면서 새로운 2000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으로서, 가는 곳마다 이 평화의 왕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 미 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이 강단에서 어느 자 매가 한 세례 간증을 제가 기억합니 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을 때 그 는 생활이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어 떻게 된 일인지 간염이 걸려서 고생 을 하고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그런대로 수입이 좋고 잘 사 니까 마음이 다른 데로 갔나 봅니 다.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볼 생각은 안하고 바깥으로 돌면서 마 음을 다른 데 주고 있었던 것입니 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 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가슴이 찢어 지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 니까? 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데 이 웃에 있던 우리 교회 순장이 가서 전도를 했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면 다 이길 수 있어요.' 새가족반에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날 말씀 을 배웠습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 의 구주가 되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 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을 배우면서 점점 마음이 열렸습니 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그 놀 라운 평화가 자기 마음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 게 불안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갈등 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함을 받 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 살아계신 주님이 그 자매의 마 음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이 그 마음을 다스리니까 평화를 해치 는 모든 것들이 다 쓸려 나가는 것 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남편을 용서하게 되었습니 다. 남편을 다 용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 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고가 아니 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으로 자녀들 을 들볶으며 그들에 대해 항상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마음도 순식간 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연약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얼마나 감사하 게 여겨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애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 다.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 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치유를 받으니까 얼마 후에 간염까지도 깨 끗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끝으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마음의 평안이 있기에 인생의 거센 파도를 두려움 없이 타고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 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 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 하게 되었습 니다. 동시에 그분을 내 마음에 모 시고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신으로, 평화의 대사로 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 는 사람들과 평화 합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 하나님의 평화 가 임하였음을 선포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를 통해서 새 로워지는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역사가 창조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면서 사는 내일이 될 수 있기 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 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 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 누가 성탄을 기뻐할 수 있는가? /눅2:1-14/ 옥한흠 목사
2014-11-10 21:31:08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주일입니다.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서로 기뻐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수년 전에 아폴로 15호를 타고 우주 여행을 했던 우주 여행사 제임스 어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달에 착륙해서 그 마음 속에 끊임없이 외었던 성경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온 우주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편 119편을 외웠다고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말씀을 외우면서 하늘을 보고, 멀리 보이는 지구를 보고, 그 주변에 있는 별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도 황홀했을 것 같습니다. 그 우주 속에서 새롭게 창조자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창문으로 내다 보이는 자그마한 공 같은 별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지구였습니다. 축구공만한 별이 눈 앞에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어윈의 마음 속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특별히 생각나고, 그 말씀을 외우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시여, 저 축구공만한 지구를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까?
이 우주 안에는 수억 만개의 별들이 있는데 그 별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저 지구, 그리고 저 속에 우글거리고 살고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특별히 기억하시고 사랑하셔서 자신이 사람이 되어 저 지구 속으로 들어 오셨다니,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셨다니,
저 지구가 어찌 그렇게 하나님의 눈에는 아름답고 위대하게 보인 것입니까? 크게 보인 것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지구 안에서 생각하던 성경 말씀 하고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동이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탄생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원래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기에 태어나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 뿐이고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우리가 무슨 말로 설명을 하고, 우리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연구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문학적인 재능이 탁월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의 글, 그리고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글 중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묘사해 놓은 것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렇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신비한 일이라서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족할 만한 어떤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필립 얀시라고 하는 분이 쓴 글이 그런 대로 무엇인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한번 소개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창조자가 지구상의 피조물 가운데 한 부분이 되신다는 이 사실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도 견줄 수 없고 전혀 생소하며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춥고 어두운 어느날 밤 베들레헴 굴곡진 언덕 위에서 영계와 물질계가 극적으로 교차되었습니다.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께서 시골뜨기 아이가 되셨습니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똑 같이 걷는 법과 말하기와 혼자 옷 입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음으로 의도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결함 속으로, 약점 속으로 들어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전지하심은 당시 통용어였던 아람어 발음 하나하나를 배워야 하는 한정된 두뇌로 바뀌었고, 온 우주에 충만하신 그의 편재하심은 두 발로 걷고 때로는 나귀를 타야 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전능하심은 나무를 켤 정도의 힘은 있었지만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나약한 상태로 변하셨습니다.
한눈으로 온 우주의 별들을 바라보시던 그분이 나사렛의 좁은 오솔길과 유대 광야의 바위들과 예루살렘의 복잡한 거리를 쳐다 보셨습니다. 물질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물질의 형태를 취하셨습니다.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의 한 점이 되듯, 극작가가 자신이 쓴 연극 대본의 한 등장인물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런 대로 표현이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에 와 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그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우리 마음에 그림처럼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 구석진 곳에 있는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6절, 7절을 보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면서 빈 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 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하지만 빈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찬 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이 풍기는 악취가 가득하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는, 고약하고 어두 침침한 그 마구간을 하나님께서 자기가 출생할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소를 키워 봤기 때문에 마구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압니다.
물론 우리 한국의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유대 나라의 양들을 키우는 마구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정말 냄새는 고약합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고, 거기에 눕는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자기가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별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일컬어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0절을 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다 기뻐할 너무나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에 의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사랑스런 파트너를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파트너, 항상 보아도 사랑스럽고 기쁜 파트너, 하나님께서는 이 파트너를 가지고 싶어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그 의도를 차 버리고 제 마음대로 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섬기기를 원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면서 살아도 나중에는 슬픔 밖에 남지 아니하는 허무한 실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산 죄 값을 짊어지고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될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셨습니다. 날마다 문 밖에 나와 기다리며 우리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래 의도대로 우리 인간을 회복시키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를 섬기는 것을 가장 인생의 기쁨으로 여기는 자들로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생각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까?'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 원래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바꾸어 거룩한 자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세상으로 가야 될 일입니다. 저 높은 곳에 앉아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결단하셨습니다. '내가 가야지.' 그리고는 그 거룩한 보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 아름다운 어의를 벗어 던지고 친히 베들레헴 말구유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려 오셔도 누구나 다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그도 흘려 보기를 원했고, 우리가 고통하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했고,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나중에 우리의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가 세상에 임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이제 절망이 아닙니다. 희망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우리는 낙담이 아닙니다. 소망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느끼는 거룩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을 주시는 이가 오셨으니 어찌 큰 기쁨이 아닙니까? 어찌 우리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이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숫자는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성탄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누가 구주로 오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를 영접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아마 두 가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첫째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천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아주 평범한,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다가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옆으로 밀쳐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데 쓰임 받은 요셉이라는 사람과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10대 후반이거나 아니면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나이의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평생 목공소를 경영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63개 마을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끼이지 못하는 아주 후진 곳입니다. 따라서 별 볼일 없는 데서 태어나 그저 한 생 살다가 가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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