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1 : 위로의 하나님 /사40:1-11/ 이하준목사
2018-09-15 07:50:36
❚위로가 필요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한 주간도 치열한 세상에서 생업과 가정을 이끌어가느라 애쓰고, 게다가 치열한 영적 전쟁까지 치르느라 힘쓴 여러분, 참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애쓰고 힘쓰고 수고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다섯 번에 걸쳐 ‘위로’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왜 이런 주제를 택했는가? 이 시대에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위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로’는 사전에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이라고 나옵니다.
그렇지요.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따뜻한 말, 따뜻한 행동 아니겠습니까? 괴로운 일도 많고, 힘든 일도, 슬픈 일도 얼마나 많습니까? 힘 빠지는 일은 또 왜 그리 많은지요?
사실 우리 가운데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참 많습니다. 우리 가장들 참 힘들어요. 먹고 살기 얼마나 힘듭니까? 요즘 경제가 너무 어렵고 직장도 사업도 참 불안합니다. 그러다보니 직장에서도 좌불안석입니다. 남 눈치 보느라, 때로는 더럽고 치사한 일도 겪는데 그럴 때마다 “이거 당장 때려치워?”
하다가도 토끼 같은 자식들, 집에서 기다릴 마누라 생각에 그렇게도 못하고 매일 매일 참고 산다고 어떤 집사님이 그러더군요. 부인들은 또 쉽나요? 신랑 가져다주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림하느라, 남편 뒷바라지에다 애들 키우고 살림하느라 또 얼마나 애쓰고 힘씁니까? 우리 자녀들은 어떤가요? 요즘 어린애들도 참 힘들게 살더군요. 요즘 젊은이들은 ‘삼포세대’랍니다.
하도 세상이 어려워서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했다고 해서 ‘삼포세대’고, ‘오포세대’ ‘칠포세대’까지 있답니다. 힘들게 대학 졸업해 정규직도 아닌 비정규직에 겨우 취직해 받는 평균 월급이 88만원이라고 해서 ‘88만원 세대’라고도 부릅니다. 이게 다 참 가슴 아픈 말들입니다.
이렇게 요즘 참 힘든 사람들, 우리 가장, 우리 아내, 우리 자녀와 형제와 성도들에게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게 뭐겠습니까? 바가지요? 잔소리? 충고? 다 아니지요. 이런 게 아니라 지금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바로 ‘위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위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다섯 주간 위로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이렇게 힘든 여러분, 지치고 아프고 상처 받은 우리 가족과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탄절 때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 바로 헨델(Handel)의 오라토리오 ‘메시야’(Messiah)입니다. ‘할렐루야’(Hallelujah)(첫머리 부르기)라는 곡이 제일 유명하지요. 우리 찬양대도 성탄절 때 한 번씩 부르지요?
그런데 이 ‘메시야’에서 잔잔한 전주로 시작해(첫머리 부르기) 맨 첫 번째 나오는 곡이 바로 “Comfort ye my people”라는 멋진 테너 솔로곡입니다. 우리말로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지요. 제가 솔리스트는 아니지만 첫 소절만 한 번 불러볼까요?(첫머리 부르기)
Comfort ye, comfort ye my people(너희들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곡이 바로 오늘 본문인 이사야 40장 말씀을 가사로 쓴 곡입니다. 1절 말씀 같이 읽을까요?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렇지요? 이 말씀이 영어로 “Comfort ye my people”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곡처럼 이사야서 40장 말씀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첫 구절 1절이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로 시작되는데 이 ‘너희’는 이사야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이겠지요. 그런데 ‘너희’가 누구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로하냐? ‘위로의 대상’입니다.
누구를 위로하라고 하셨지요? ‘내 백성’입니다. 그러면 ‘내 백성’이 누구일까요? 예루살렘 백성들을 뜻합니다. 주전 587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남왕국 유다의 백성들 말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왜 이방민족인 바벨론에게 함락당해 성벽이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이 다 불타고 약탈당하고, 왜 백성들이 저 머나먼 이방 땅인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까?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숭배하고, 신상을 세우고 산당을 세우고 절을 합니다. 사회에서 불의를 행하고, 약자를 수탈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다 깔아뭉개는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시며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이방민족인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삼아 그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머나먼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7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이제 그 심판과 저주의 때가 끝나고 드디어 하나님의 위로가, 하나님의 회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이 바로 이 심판의 끝과 위로의 시작을 말씀한 것이지요.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유다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 겁니다. 이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요? 죄악 때문에 하나님이 그토록 냉정하게 심판하고 영원히 버리신 줄 알았던 유다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신 겁니다. 자식들이 말 안 듣고 너무 힘들게 하면 부모가 이런 소리 하잖아요? “너 이제 내 자식 아니다!” 처음 들으세요?
아마 여러분 중에도 지지리 부모님 말씀 안 듣고 속 썩여서 “너 내 자식 아니다.” 소리 들어본 사람 있을 걸요?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이 과연 진짜일까요? 과연 우리 부모님들이 진심으로 “이제 너 자식 아니다.”
하셨을까요? 너무 속상하고 힘들어서 그런 말을 하셨겠지만 그게 어디 진심이겠습니까? 아니죠. 아무리 속을 썩여도 내 자식은 내 자식 아닙니까? 어떻게 자식이 아닐 수 있고, 어떻게 영원히 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말 안 듣고, 하나님 속 지지리 썩인 유다 백성들이라도 내 백성은 내 백성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나고 부족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무리 잘난 데 하나 없고, 아무리 못 살고 초라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져도, 때로는 좌절하고 낙심해서, 상처 입어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로의 방법
이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면서 이 백성을 향해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둠과 심판의 시대는 지나고 위로와 회복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위로의 방법이 세 가지 나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위로의 방법은 이제 심판과 고난이 끝났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인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을 읽을까요?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노역의 때’란 죄를 지어 강제노역을 하는 기간을 뜻합니다. 옛날 죄수들은 죄를 지었을 때 그 벌로 몇 년간 강제노역을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힘든 노동을 하고 나면 죄값이 치러지고 석방되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백성들도 그 강제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치른 죄값은 바로 나라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일이었는데 이제 그 포로의 기간이 다 차서 석방되고 돌아오게 된다는 소식인 것입니다. 이제 그 노역의 기간, 포로의 기간이 다 차서 죄값을 다 치렀으니 죄를 사함 받고 고향으로 귀환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이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통의 때가 곧 끝날 것입니다. 지금 비록 너무 힘들고 괴롭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반드시 다 끝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때가 반드시 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가 이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위로의 방법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6~8절 읽읍시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파릇파릇하다가가 곧 마르는 풀이나 잠시 아름답게 피었다 시들고 마는 들의 꽃과 같이 영원하지 못하고 순간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세상의 모든 가치와 아름다움은 다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무엇만은 영원하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피었다가 시드는 세상의 것들을 붙잡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잡으면, 그 영원하신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영원한 힘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잠시 피었다 지는 풀의 꽃과 같은 세상 것과 사람 의지하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말씀 의지하여 영원한 위로를 받고, 영원토록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위로의 방법은 바로 ‘메시야를 통한 위로’입니다. 9~11절 읽읍시다.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높은 산에 올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라 명하십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이란 10절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셔서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시고, 목자 같이 그 양떼, 백성들을 품에 안고 인도하신다.”는 내용이지요. 어떤 예언입니까?
궁극적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 권능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고, 사랑으로 백성들을 품고 인도하실 구세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사야 53장에 이르러 메시야에 대해 본격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이렇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씀에 나온 것처럼 그 분은 권능의 팔로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하며, 심판하시는 강력한 심판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자 되어 양들을 품에 안으시고, 지치고 탈진하고 힘 빠진 양을 어루만지고, 토닥거리고, 위로하시는 세심하고 사랑 많으신 선한 목자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요 소망이십니다. 예수님 만나면 위로 받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소망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예수님 만나면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해결 받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 만나 영원한 위로와 소망 얻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잘 왔다!
요즘 TV에 부쩍 많이 나오는 김창옥교수라는 유명강사가 있습니다. 보신 적 있는지요? 모르는 분들은 제발 TV 좀 보세요. 볼 건 봐야죠. 이 친구 젊어요, 저보다. 아주 좋은 크리스천입니다. 화려한 언변과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청중을 단숨에 휘어잡는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강의를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자 점점 지쳐가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싫어지더랍니다.
급기야 우울증까지 걸리게 되고 증세가 심해지면 ‘자살’까지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러 잠시 강연을 중단하고 두 주간의 휴가를 내서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곳으로 떠납니다. 너무 힘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며칠 동안 명상과 조용한 기도로 보내던 중 어느 날, 이런 하나님이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바로 이 말씀 한 마디 때문에 그는 큰 위로를 받고, 우울증을 극복하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뭔가를 이뤄 보겠다고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멈추어 뒤돌아보니 “내가 그동안 뭘 했지? 뭐하고 살았지?” 허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앞에는 더 달려가야 할 머나먼 길이 보입니다. 뭔가를 더 이루어야 할 것 같고, 아직 내 목표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아 안절부절 불안하고 조바심이 납니다. 그래서 지치고, 그래서 우울해지고...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내 백성아, 그래 내 아들 내 딸아! 여기까지 잘 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수고 많았니? 이제 내가 함께 할 거야, 걱정 마라!” 이 말씀이 말 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힘이 됩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잘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우리 주님 품 안에서 그 안아주심과 어루만지심, 토닥거리며 위로하시는 손길을 느끼고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더 달려가고 더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특별히 요즘 지치고 힘든 성도들, 아픔과 고민이 있는 성도님들! 이 참된 주님의 사랑과 위로가 오늘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위로 2 : 위로가 있는 교회 /행9:31-35/ 이하준목사
2018-09-15 07:53:19
❚ 위로가 필요한 성도들
요즘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주부터 ‘위로’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시작했는데 요즘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위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한다,” 잘하고 있는 사람을 더욱 장려하라는 좋은 뜻이지만, 저는 성도들에게 요즘 필요한 말은 반대로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지 말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성도들 너무 지쳤어요. 먹고 살기 힘들어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안 그래도 지치고 힘든데 경제도 어렵고, 세상도 험난하고, 온갖 무거운 짐들뿐인데 이렇게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주일에 교회에 온 성도들에게 오히려 짐을 더 지우고, 채찍질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제 생각이 그래요.
세상이 좀 살기 편하고, 별 근심걱정거리 없고, 무거운 짐이 좀 덜할 때 교회에서 채찍질을 좀 하는 것은 필요하지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요즘 성도들이 너무 힘들고 지쳤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럴 때 정말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지 말고, 지친 말에 무거운 짐 더 지우지 말라.”인데 그렇다고 여러분이 말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의미가 그렇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지치고 힘들면 교회 와서 좀 쉼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상처받고 오면 교회에 와서 회복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교회에서 또다시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뭔가를 요구한다면 그건 더 짐을 지우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게 교회 봉사도 하지 말고, 아무 부담 없이 교회 나와라 하는 뜻은 아니에요. 오해 마세요. 거룩한 부담도 필요하고, 교회도 섬길 분들 애써 줄 분들의 손길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교회가 사역이 많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그러다가 성도들이 지치고 힘들어지면 그건 뭔가 거꾸로 된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힘들고 지치다가도 교회 오면 위로 받고, 힘내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 와서 더 상처 받고, 힘들어 지고, 지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11:28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면 쉼과 위로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예수님 만납니까? 물론 예수님 어디든지 계시지만 교회 나와서 예배하며 하나님 만나고, 예수님 만나고 돌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목사만 만나고 다른 성도만 만나고 가면 안 되잖아요? 예수님 만나야지요. 하나님 만나야지요. 그렇게 만나면 주님 말씀처럼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왔다가도 다 주님 만나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대신 져주시고, 그래서 참된 쉼을 얻고, 안식을 얻고,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예수님 만나 쉼과 위로를 받기 바랍니다! 꼭 하나님 만나 새 힘 얻기 바랍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분께 내 모든 무거운 짐과, 부담과, 상처와, 힘든 일들을 다 내려놓고 맡기기 바랍니다! 그래야 삽니다. 요즘 같은 때는 특별히 이렇게 해야만 삽니다.
❚ 위로가 있는 교회
그래서! 교회에는 뭐가 필요하다? 교회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교회 오면 예수님 만나고, 교회 오면 예배하며 하나님 만나기 때문이지요. 주님 만나고 하나님 만나면 위로 받아야 한다니까요? 우리 효자교회가 이런 “위로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사도행전 9장 말씀은 이 “위로가 있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1절 말씀 한 절만 먼저 읽읍시다.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기서 “그리하여”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본문 바로 앞을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울이는 율법과 유대교에 충성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던 인물이지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 잡으러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 만나 거꾸러진 것 다 아시지요? 그래서 사울이가 바울 된 것 아닙니까?
기독교와 성도들을 가장 가혹하게 박해하던 자가 가장 열심히 복음 전하는 사도로 변한 것 아닙니까? 31절에 “그리하여” 하는 말은 이렇게 “사울이가 거꾸러져 바울 되어서” 하는 뜻입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이 비로소 박해로부터 벗어나 평안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박해만 없으면 교회가 다 잘 되냐? 아니요. 오히려 교회는 박해를 받을 때 더 건강하고 번성해 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히려 박해나 고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지고 긴장감을 잃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박해나 고난만 없으면 되는 게 아니라 오늘 31절에 나온 것처럼 뭔가가 더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31절이요.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또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이 교회들에 뭐가 있었던 겁니까? 주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고, 또 하나 성령의 위로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만 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교회 와서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또 성도들이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 받고, 따돌림 당했지만 교회만 오면 뭘 받은 거에요? 예, ‘위로’요. 바로 “성령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초대교회들이 잘 된 이유, 부흥하고 날마다 믿는 사람의 수가 많아진 이유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교회들에 어떤 ‘위로’가 있었는가? 뒤에 나오는 사건 두 가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애니아’라는 성도의 치유 사건입니다. 32~35절을 읽읍시다.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 사도가 사방으로 복음 전하다가 룻다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 성도들 중에 ‘애니아’라는 사람이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워 8년 동안이나 꼼짝 못하고 있었지요. 베드로가 애니아를 보고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 너를 낫게 하신다고요? 예수 그리스도! 예, 예수님 만나면 낫게 하신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애니아는 그 자리에서 자기가 8년 동안이나 누워있던 침상을 정리하고 벌떡 일어납니다. 이 모습을 보고 그곳의 뭇 사람들이 다 주께 돌아왔답니다. 할렐루야!
위대한 치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치유 사건이 바로 ‘위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교회 오면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위로와 회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병을 앓고 삽니까? 그 중에도 중풍병은 혈관의 문제로 마비 증상이 오는 병이잖아요?
요즘 너도 나도 다 어렵지만 특히 힘든 성도들이 계세요. 수많은 답답함과 무기력에 시달리고, 그래서 삶이 지치고 힘들고, 영혼이 마비되고, 극한상황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이게 중풍병이지요. 우리 성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중풍병자 ‘애니아’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무기력과 마비증세, 우리 삶의 고난과 환난과 아픔, 탈진이 누구를 만나면 다 해결되고 치유되는 겁니까? 예수님이요! 그래서 교회는 이런 치유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와 회복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아프고 힘들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고, 지쳐서 죽은 듯 쓰러져 있다가도 교회 오면 벌떡 일어나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런 회복과 치유와 위로가 없으면 우리 뭐 하러 교회 나오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 효자교회가 바로 예수님 만나 치유 받고 회복 되는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효자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위로가 넘치는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 죽은 자도 일어난다!
이어서 36절부터 보면 애니아 치유 사건보다 더 위대하고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초대교회에 일어난 두 번째 위대한 위로의 사건입니다. 우선 36~37절만 읽읍시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여기 다비다, 혹은 도르가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앞서 중풍병에서 치유 받은 애니아는 이름을 볼 때 남자 성도입니다. 이번에는 여성 성도가 치유 받은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욥바에서 교회를 섬겼는데 우선 ‘여제자’라는 이름을 들을 정도로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제자’라는 말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여기 딱 한 번만 쓰입니다. 이 분이 이 정도에요. 또한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39절에 보면 과부들이 도르가(다비다)가 지은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지요? 아마 다비다는 살림은 넉넉하지 않으나 옷을 지어 가난하고 힘든 과부들을 돕는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잘 믿고, 교회 잘 섬기고, 성도 잘 섬긴 최고의 여제자였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최고의 권사님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예수 잘 믿고, 교회와 성도들 제일 잘 섬긴 다비다 권사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갑자기 병들어 죽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여러분!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죽는다, 안 죽는다? 죽어요. 예수 잘 믿고 교회 정말 잘 섬기는 사람도 환난이 있다, 없다? 있지요. 이게 문제 아닙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이런 분에게 이런 환난 시험이 닥쳐요?
그런데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교회 일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에게도 환난이 닥쳐옵니다. 헌데 이럴 때 우리가 “어라? 이게 뭐야. 왜 이런 일이 생겨?” 또는 “아니, 하나님 저렇게 잘 섬기는 사람도 저런 일을 당해? 어떻게 된 거야?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 거야?”라든지
“교회 잘 다녀봐야 아무 소용없네.” 하고 반응하면 안 됩니다. 또는 “저 사람 뭔가 문제가 있을 거야. 겉으로는 신앙생활 잘 하는 것처럼 보여도 뭔가 죄가 있거나 문제가 있으니 저런 일이 생기지.” 하면, 이건 마귀 사탄의 덫에 딱 걸리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럴 때 바로 ‘위로’가 필요하고 온 교회가 합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욥바 교회도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 사도가 가까이 있는 것을 알고 그를 부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의 시체가 누인 다락방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죽은 다비다가 벌떡 일어나잖아요? 그 모습을 보고 온 욥바 사람들이 놀라서 주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잖아요?
그렇습니다. 잘 믿는 성도에게도 환난 시험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온 교회가 하나 되고, 성도가 하나 되어 다른 말 일체 하지 말고, 다른 판단도 일체 하지 말고, 오직 기도로 돕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를 살리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넘어진 자, 실패한 자, 끔찍한 일을 당한 자도 다 살리고 고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환난을 통해, 시험을 통해 오히려 교회는 하나가 되고, 모든 성도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고, 교회가 더 큰 능력이 생겨 부흥과 발전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축복이 되고,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는 겁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효자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정말 좋은 교회입니까? 내가 다니고 섬기는 교회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지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 정말 ‘위로’가 있습니까? 정말 우리 안에 ‘성령의 위로’가 넘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지치고 병들고 힘들어 교회 오면 위로 받고, 새 힘 얻고, 치유와 회복을 받는 그런 교회입니까?
우리끼리만 위로 받는 게 아니고, 정말 세상에서 지쳐 우리 교회 나온 다른 성도들, 다른 교회에서 상처 받은 성도들, 예수 잘 믿다 실족하고 고난 시험 당한 성도들까지도 우리 교회 오면 남김없이 다 위로와 회복을 받는 교회입니까? 죽을 만큼 힘들고 지친 사람도, 심령도 육체도 다 죽어가는 사람도 우리 교회 오면 벌떡 일어나고 다시 살아나는 교회 맞습니까?
제가 목회 연수가 좀 늘어나면서 ‘관상’을 좀 보게 된 모양입니다. 새가족이 오면 얼굴에 그늘이나 수심이 어린 것이 보입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묻지는 않지만 분명 그 분 삶에 무거운 짐이나 근심걱정이 있는 겁니다. 때로는 다른 교회 다니다가 상처나 아픔을 겪고 온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기쁨 순간은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 출석하면서 점차 얼굴에서 그늘이 걷혀가고 밝아져갈 때입니다. 효자교회 와서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때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교회가 정말 이 ‘위로’와 ‘회복’이 있는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하지요.
물론 이 위로는 ‘성령의 위로’입니다만, ‘예수님 주시는 위로’입니다만 그 키(key)는 사실상 우리 자신이 쥐고 있습니다. 우리 효자교회가 그냥 ‘교회’일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위로가 가득 넘치는 정말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인지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 이 사명 정말 정말 귀합니다. 이 귀한 사명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기 바랍니다!
위로 3 : 나의 위로자 /룻4:13-22/ 이하준목사
2018-09-15 07:56:48
❚ 평생웬수!
시 한 수 읊어볼까요?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이해인 수녀의 ‘달빛기도’라는 시에 나온 것처럼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성도들이 고향을 찾아 먼 길 떠났고, 여러분 중에도 곧 떠나실 분이 계실 줄 압니다. 혹은 자녀나 가족들이 포항으로 찾아와 오늘 이렇게 함께 예배에 참석한 분들도 많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명절에 가족 만나니 좋습니까?
정말요? 오랜만에 가족 만나고, 자녀 만나고, 온 가족 한 자리에 모이니 너무 행복한 분도 계시고, ‘가족’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힘이 나는 분도 있겠지만 솔직히 안 그런 분도 계실 걸요?
가족을 만나니 불편하고 마음이 무거워 지는 분도 있을 겁니다. 안 그래요? 이렇게 가족은 내 평생의 위로자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내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이요, 나를 가장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랜 전 일이지요. 어느 TV 퀴즈 프로그램에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부부 중에 한 분이 낱말을 설명하면 다른 한 분이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등장한 낱말이 ‘천생연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열심히 낱말을 설명합니다. “할멈! 우리 같이 사이가 좋은 걸 뭐라고 하지?”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는 다시 이렇게 설명하지요. “아니, 아니 두 글자 말고 네 글자!” 그러자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여러분도 다 아시죠? 이 방송이 실제로 나가고 난 뒤 워낙 유명해 져서 사람들이 다 알더라구요. 뭐라고 대답합니까? 네 글자로? “평생웬수!”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원수!” 하면 실감이 안 갑니다.
“웬수” “평생웬수” 이렇게 해야 실감이 가지요. 이 할머니에게 평생 살을 부비고 살아온 영감님이 “천생연분”이 아니라 “평생웬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기가 막합니까? 부부가 천생연분이 될 수도 있고 평생웬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가족이, 형제가 자녀가 내 평생의 최고의 위로자가 될 수도, 반대로 평생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가족이 바로 이런 존재입니다.
❚ 나오미와 룻
오늘은 “위로” 시리즈 설교 그 세 번째 시간으로 “나의 위로자”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가족이, 배우자가, 자녀가 나의 위로자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룻기에는 배우자가, 내 자녀와 자녀손이, 가족이 나의 평생의 최고의 위로가가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도 많고, 상처와 아픔이 많아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도 많지만 룻기에 등장하는 두 여인,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인 이 두 여인만큼 파란만장하고 상처 많은 삶을 산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솔직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하면 벌써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분들 계시지요?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인지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는 하나님도 해결 못 하신다.”는 말도 있고요, 며느리들은 ‘시’(媤)자가 들어간 건 먹지도 안는다나요? ‘시금치’도 안 먹고 ‘시편’도 안 읽는다면서요?
“에덴동산이 왜 낙원이었는 줄 아느냐?” “하와에게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시어머니 며느리 관계가 미묘하다는 말인데 오늘 룻기에 나오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관계는 좀 특별합니다.
룻기 1장은 이 두 여인에게 일어난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사시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베들레헴 땅에 큰 기근이 들자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갑니다. 아들 말론과 기룐은 히브리말로 ‘병골’(病骨)과 ‘약골’(弱骨)이라는 뜻입니다.
큰아들 이름을 김병골이라 짓고 둘째아들 이름을 김약골이라 지은 셈입니다. 세상에 이런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두 아들의 이름은 앞으로 이들에게 일어날 불행한 일을 예견해 주는 이름입니다. 결국 엘리멜렉 가문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 두 아들도 역시 결혼한 지 10년도 못 되어 자녀도 못 남기고 죽고 말지요. 처음 모압에 들어갈 때 남편과 아내, 두 아들이 들어갔는데 모압에서 나올 때는 나오미와 모압 땅에서 얻은 두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 세 과부만 나오게 됩니다.
나오미라는 여인, 정말 비참하지 않습니까? 남편을 잃은 것만도 통탄할 노릇인데 두 아들까지 죽고 과부 며느리 둘만 남았으니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이처럼 룻기는 나오미라는 한 여인의 불행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모리슨이라는 성경학자는 “많은 남자들이 시험을 당하지만 욥 같은 사람이 없었고, 많은 여자들이 환난을 당하지만 나오미 같은 여자가 없었다.”고 말하지요.
결국 이 세 과부는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남의 나라에서 굶어죽느니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 뭔가 살 길이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나오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대로 세 과부가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요. 나는 그나마 고향으로 돌아가니까 친척이나 비빌 언덕이라도 있지만, 두 며느리는 생면부지 남의 땅 베들레헴에 돌아가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큰 결심을 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은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당시의 풍습대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재가하여 살 길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여기 계신 시어머니 여러분! 시어머니가 바로 이런 자세를 가지고 며느리를 대하면 고부관계, 복잡할 일 전혀 없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 입장만 생각한다면 이 두 며느리를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갔어야 합니다. 늙은 시어머니한테는 수발이라도 들어주고, 밖에 나가 이삭이라도 주워올 며느리가 절실하게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나오미는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며느리의 입장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정으로 돌아가 재가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며느리인 룻의 효도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자기 입장만 생각하지 않고 며느리들을 친딸처럼 생각하고 배려했던 시어머니 나오미가 먼저 있었기에 효부인 룻도 나온 것입니다. 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라고 시어머니의 성숙하고 진실된 태도가 있었기에 며느리 룻도 진실 되게 시어머니를 존경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들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며느리가 진정으로 시어머니를 존경하고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지만 맏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릅니다. 룻기 1:16~17에 나온 룻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여자 분들만 읽읍시다.
16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바로 이겁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룻은 성경에 나온 최고의 며느리, 최고의 효부가 되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입니다.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모든 생활과 행동을 함께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시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시어머니 하시는 일을 나도 하고 시어머니의 신앙까지도 따르겠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시어머니와 생사까지도 같이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며느리가 어찌 안 예쁘겠습니까? 어찌 사랑스럽고 귀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 방법이란 말입니다. 며느리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결국 이렇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온 룻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룻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시댁의 가까운 친척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 가서 추수하다 떨어진 곡식 이삭을 주워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룻을 눈여겨보고 연정을 품게 된 보아스와 연결이 되어 결국 룻과 보아스는 백년가약을 맺게 되지요. 두 사람이 눈이 맞아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고 something이 생긴 과정은 다 생략하도록 합시다. 중요한 내용은 그 다음 일이니까요.
❚ 나의 위로자
룻기에 보면 정말 위로가 필요한 여인 둘이 나오잖아요? 나오미, 그녀가 얼마나 힘들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면 ‘나오미’라는 이름이 ‘희락, 기쁨’이라는 뜻인데 그녀가 비참하게 베들레헴에 돌아올 때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저 사람 나오미잖아?”
할 때 “나를 나오미, 희락이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 괴로움이라고 불러라.”(1:19~20)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고통의 이름 나오미, 상처와 아픔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오미가 누구 때문에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되나요?
또 한 명의 진정한 위로가 필요한 여인, 그는 바로 룻이지요. 비록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지만 룻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것만도 서글픈데 고향도 아닌 낯선 베들레헴 땅에 와서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하루 종일 뙤약볕에 남의 밭에 가서 흘려놓은 곡식 이삭이나 주어다가 겨우 입에 풀칠해야 하는 신세 얼마나 서럽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밤마다 친정인 모압을 그리워하며 얼마나 서러움의 눈물을 삼켜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상처 입은 여인 룻이 누구를 통해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되나요?
먼저 룻은 새로이 백년가약을 맺은 남편 보아스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됩니다. 2:13입니다.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룻은 자신에게 큰 친절을 베풀어주는 보아스에게 “당신 때문에 제가 큰 위로를 받게 된다”며 고마워합니다. 한 마디로 남편 때문에 상처 입은 여인 룻은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4:67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맞이함으로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를 잃고 장례를 치룬 후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평생웬수”가 아니라 평생의 위로자, 내 평생의 가장 귀하고 고마운 위로자가 되어 준 것입니다.
제가 늘 하는 말처럼 연애와 결혼은 달라요. 연애할 때는 눈꺼풀이 씌어서 죄다 좋은 것만 보이더니, 결혼 후 눈꺼풀 벗어지고 정신 차리고 보니까 모르던 약점, 나쁜 버릇 다 보이기 시작해요. 특히 두 사람이 결혼 전 겪은 아픔, 자라면서 받은 뿌리 깊은 상처가 결혼 후 죄다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부부는 이 결혼 전의 뿌리 깊은 상처와 아픔들도 이 남편을 만난 후, 이 부인을 만난 후 다 치유와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결혼 후에도 밖에 나가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 아이들을 낳고 육아하면서 겪는 힘든 일도 남편 때문에, 부인 때문에 회복되고 위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부부 아닙니까? 바로 여러분이 그런 남편, 그런 아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시어머니 나오미는 누구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되나요? 오늘 본문 13절부터 봅시다.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과 보아스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나오미의 손자가 태어난 거지요. 그런데 이 아이 이름을 특이하게도 부모나 할머니가 아니라 동네 여인들이 지어줘요. 이름이 뭡니까? ‘오벳’ 히브리말로 ‘오베드’로 섬기는 자, 봉양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름을, 그것도 동네 여인들이 지어준 걸까요?
게다가 17절에는 이 오벳을 ‘룻의 아들’이 아니라 ‘나오미의 아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동네 여인들은 누구보다 나오미의 아픔과 상처를 잘 알았기에 이 손자가 할머니 나오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를 알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이 손자가 할머니의 최고의 위로자요 봉양자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오벳’이라고 지어준 것입니다(15절).
더 놀라운 일이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이 아이가, 룻과 보아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 할머니 나오미의 최고의 회복자요 위로자인 오벳이가 나중에 누구의 조상이 돼요? 바로 오벳의 증손자가 다윗이 되는 것입니다.
14절에 나온 축복처럼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됩니다. 이 오벳으로 인해 부모와 할머니뿐 아니라 이 가문 전체가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광된 가문이 되고, 다 쓰러져가고 끝나가던 가문이 일어나 다윗의 가문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 맺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가정이 축복 받은 가정, 하나님께 복 받은 가문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 받은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남편이 아내에게 위로가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위로가 되는 가정입니다. ‘평생웬수’ 아니고 ‘나의 위로자’ 말이에요. 또, 자녀가 부모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는가?
부모에게 자녀란 가장 큰 위로자가 될 수도, 반대로 평생 가장 큰 근심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형제가, 부모가, 가족이 다 그렇습니다. 가장 가깝기에, 내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에 도리어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밖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집에 오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게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족을 원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어떤 가족이 되기 원하십니까? 어떤 아내와 남편, 어떤 부모와 자녀가 되기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처럼 여러분 모두가 가족에게,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자가 되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받은 행복한 가정 이루시길 이 좋은 명절 추석이 축원합니다.
위로 4 : 잘못된 위로 /욥2:7-13/ 이하준목사
2018-09-15 10:31:25
❚ 욥의 고난
‘화부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는 혼자 오지 않는다.” 재앙이나 고난은 한 번만 오지 않고 반드시 다른 고난을 몰고 온다는 뜻이지요. 목회하면서 성도들 가정에 어려움이 생기면 참 이상하게도 연이어 다른 고난이 닥치고, 앞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들이 몰려오는 것을 봅니다. 저도 정말 힘들고 답답합니다.
욥에게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욥이 어떤 사람입니까? 뭔가 문제 있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내 저 사람 저런 일 당할 줄 알았어.”하든지 “저 사람 저런 일 당해 싸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욥은 아닙니다. 욥기 1:1은 욥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얼마나 대단한 극찬입니까? 게다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7남 3녀의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5절) 염려하며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번제를 드리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면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이런 자랑까지 하겠습니까?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한 마디로 욥은 하나님도 자랑스러워하실 만큼 완전한 성도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이런 좋은 성도를 그냥 내버려 둘리 없지요. 똑똑한 사탄은 성도들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 그냥 내버려둬도 아무 문제없는 성도, 가만 둬도 아무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지요. 둘째, 성도는 성도인데 오히려 사탄에게 도움이 되는 성도, “아니, 세상에 이런 성도가 있어?” 예, 안타까운 일이지만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런 인간도 교회 다닌대... 난 저런 사람 때문에 교회 안 가!” 오히려 교회에, 기독교에 대한 나쁜 인상만 주는 최악의 성도입니다. 사탄이 “난 니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하며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사탄이 진정 두려워하고 눈엣 가시처럼 여기는 성도, 욥처럼 저 하나만 잘 믿는 게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강력하게 끼치는 성도지요.
그래서 첫째 부류는 그냥 가만 내버려 둡니다. 가만 둬도 아무 문제없으니까요. 둘째 부류는 오히려 좋아하고 장려합니다. 하지만 셋째 부류의 성도는 가만 두지 않지요. 이런 사람 하나가 주변의 수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넘어뜨리고 시험 들게 해야지요. 그래서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은 때로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에게 어떤 고난을 줍니까? 첫째, 욥의 재산을 다 빼앗습니다. 둘째, 욥의 자녀들을 다 쳐서 한 날 한 시 죽게 합니다. 셋째, 욥의 몸을 쳐서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심한 종기가 나게 합니다.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다 일어난 것입니다. 경제적인 고난, 가정적인 고난(특히 자녀), 건강의 고난, 이 세 가지가 차례로 밀려옵니다. 그렇습니다. 화는 홀로 오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화가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읍시다.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온 몸에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그릇 조각으로 몸을 벅벅 긁고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한 말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이래도 당신이 하나님 믿는다고 할 거야? 하나님 잘 믿어서 이 꼴이 뭐야? 차라리 잘난 당신이 믿는 그 하나님 욕하고 나가 죽어라 죽어!” 차마 제가 강단에서 이 소리는 못하겠습니다만 아마 욥의 아내는 “예수고 나발이고 나가 뒈져라.”고 했을 겁니다.
보세요. 아무리 힘들고 고난이 닥쳐와도 아내가, 가족이 힘내라고 하면, 곁에서 기도해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주일 말씀 나눈 것처럼 가족은, 내 배우자나 부모나 자녀는 이럴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게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줄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극심한 고통 중에도 믿음만은 잃지 않으려는 남편에게 아내가 던진 이 한 마디는 그 어떤 칼로 후벼 파는 것보다 다 큰 아픔과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안 그대로 죽어가는 남편을 ‘확인사살’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세 친구의 위로
그런데 바로 이 때 욥의 세 친구가 찾아옵니다. 욥이 재산도 잃고, 자녀도 잃고, 건강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머나먼 데만이라는 곳에서 찾아옵니다. ‘빌닷’이라는 친구는 멀리 수아에서 찾아오고, ‘소발’이라는 친구는 멀리 나아마에서 찾아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친구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친구는 이럴 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참된 친구는 내가 잘 나갈 때, 좋을 때보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찾아와주고 함께 해주는 친구 아닙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런 의리 있는 좋은 친구가 있는지요? 있다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친구도 좋지만 이럴 때 같은 교회 성도들이 이런 좋은 친구 역할을 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혈육도 아니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성도들은 이럴 때 찾아와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울어주고, 기도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형제요 친구지요. 안 그렇습니까?
욥의 세 친구는 처음에 욥에게 정말 좋은 위로를 해줍니다. 12~13절을 읽을까요?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바로 이겁니다. 자녀도 잃고, 아내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 때 욥의 세 친구는 정말 참된 위로, 좋은 위로를 해줍니다. 욥의 세 친구가 한 일이 세 가지인데 이것은 내 친구나 성도나 가족이 욥처럼 심한 고통을 당할 때 정말 좋은 위로의 모범이 됩니다.
첫째, 욥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일제히 소리 질러 웁니다. 이 말은 친구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뜻입니다. 같이 울어 주세요. 그러면 정말 힘이 됩니다. 둘째는 자기 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립니다. 욥과 함께 슬픔을 진정으로 나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례 때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재를 머리에 뿌렸습니다. 따라서 욥의 세 친구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장례에 버금가는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셋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7일 밤낮을 땅에 앉아 욥의 곁을 지킵니다. 보세요. 정말 좋은 위로 방법입니다.
지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이 사람이 겪고 있는 이 아픔에 그저 말없이 손잡아 주고, 안아 주고, 기도해주고, 곁을 지켜주면 그것으로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오해를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저 사람한테 위로가 될까?” 물론 “힘내세요. 기도할께요.” 이런 말이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이 너무 크면 이런 말조차 위로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그저 말없이 손 잡아주면 됩니다. 안아주면 됩니다. 함께 울어주면 됩니다. 곁에 있어주면 됩니다.
목회하면서 이런 일을 겪습니다. 다른 장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수를 누리다 가신 분은 몰라도, 사랑하는 가족을 너무 갑작스레 잃고 충격에 잠긴 유가족들, 정말 힘들어하고 무너질 지경일 때는 저도 말이 안 나와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말없이 손잡고, 함께 울어줍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 잘못된 위로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여기까지는 잘 했어요. 여기까지는 욥의 세 친구가 고난당한 친구를 제대로 위로해 주었는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기지요. 욥기 3:1을 봅시다.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뭘 저주해요? 자기 생일이요. 그래서 3장 전체가 온통 욥이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꼴을 당하냐?” 하는 원망입니다. 어쩌면 자신을 태어나게 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일지도 모릅니다. 방금 전만 해도 욥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큰 고난에도 절대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22은 욥이 재산 잃고, 자식 잃고 난 후의 일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또 건강까지 잃은 후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할 때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2:10입니다.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이러던 욥이 어떻게 된 셈인지 세 친구가 찾아오자 불평 원망을 쏟아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생일까지 저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과연 욥은 신앙을 잃고 시험에 빠진 것일까요?
잘 들으세요, 여러분! 이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이럴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괴로우면 욥처럼 반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우면 이런 표현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친구를 향해 “넌 하나님 믿는다는 놈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하면 되겠습니까?
“당신은 장로라는 사람이, 권사 집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불신앙적인 말을 합니까?”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아니지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들면 저런 말을 다 할까?”
“저 목사님이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그렇게 믿음 좋은 분이 얼마나 괴로우면 저런 말을 다 할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손만 잡아주면 됩니다. 함께 울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당한 친구를 위로하려고 왔는데 친구 녀석이 하나님 원망하는 소리를 듣자 분통이 터집니다. “네가 하나님께 죄 지어서 벌 받는 것인데 왜 회개하지 않고 계속 나는 의롭다고 주장하냐?” 욥기 4장부터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친구가 번갈아가며 수없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이 다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원인이 있고 그에 따라 보응을 받는 것이다. 네가 지금 하나님께 이런 벌을 받는 것은 분명히 네가 그럴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인데 어찌 아무 죄 없는 자를 징벌하시겠냐? 너는 지금 회개하고 엎드려야 할 판에 계속 나는 의롭다고,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고집만 피우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회개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시지요? 지금 욥은 정말 죄 때문에 징벌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의인의 고난, 즉 죄 없지만 고난을 당하는 억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절대 아니다. 난 정말 죄가 없다,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번갈아가며 욥을 야단 치고 비난하고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욥 한 마디, 친구 한 마디, 또 욥 한 마디, 다른 친구 한 마디, 이렇게 번갈아가며 욥기 4장부터 37장까지 지루하게 논쟁이 오갑니다.
그런데 이 기나긴 설전이 오간 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욥아! 네가 아무리 자신이 의롭다고 하지만 너의 고난 뒤에 숨은 내 큰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알았지만 이제 고난을 통해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번에는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십니다. “너희들의 말과 행동이 옳지 못하다. 고난당한 친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인데 너희는 친구를 정죄하기만 했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세 친구에게 욥을 위해 번제를 드리라 명하십니다.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 42:9)
이번에는 욥이 친구들을 용서할 차례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세 친구가 욥을 위해 회개의 번제를 드리고 욥은 기꺼이 세 친구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니 하나님이 욥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 가족 중에, 친구나 성도나 이웃들 중에 어떤 분들이 이런 일을 겪었습니까?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 나는 어떻게 해주면 좋겠습니까? 대략 네 가지의 반응이 있습니다.
①말없이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고 같이 울어준다. ②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해준다. ③‘옳은 말’을 해준다. ④수군거리며 함부로 말한다.
넷 중에 골라보세요. 욥의 세 친구들은 처음에는 친구의 고난을 보며 경악하며, 말없이 옆에 앉아 위로해 줍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점차 욥에게 충고를 하고 ‘옳은 말’을 해주기 시작합니다. 정신 차리라는 겁니다. 뭔가 너한테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 생긴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은 욥은 위로는커녕 더 아파하고 더 상처받아 힘들어 합니다. 얼마나 아픈지 욥은 6:25에 이런 말까지 합니다.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당하는 가족이나 친구, 이웃, 성도들을 어떻게 위로합니까? 혹시 위로한답시고 욥의 세 친구처럼 잘못된 위로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난당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감과 위로’입니다. 우리는 공감과 위로, 눈물과 기도 없이는 참된 위로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아픔 당한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위로 5 : 상처 입은 위로자 /살전3:1-10/ 이하준목사
2018-09-15 10:34:24
❚나 하나도 벅찬데...
사람마다 ‘주특기’라는 게 있습니다. 본디 이 말은 군대에서 쓰는 용어지요. 주특기가 포병이냐, 보병이냐, 통신병이냐, 운전병이냐, 혹은 군종병이냐에 따라 병사와 간부의 분류가 달라집니다. 이 군대용어에서 파생되어 그 사람이 유난히 남들보다 잘 하는 것을 ‘주특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교회 성도들 중에 유난히 남을 위로하는 일을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의 주특기는 ‘남 위로하기’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주특기가 “남 힘들게 하기, 분란 일으키기, 상처주고 못된 말만 골라서 하기” 뭐 이런 것들인데 물론 이런 이상한 주특기를 가진 성도들은 우리 좋은 교회 효자교회에 한 분도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위로가 주특기인 성도들은 어떤 분들이냐?
다른 성도들이 힘들다가도 이 분만 만나면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이 분의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위로가 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분 얼굴만 봐도 마음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누구보다 목회자가 이런 역할을 해주어야 하지만 목회자만 하라는 법 없습니다. 성도 중에도 이런 분들이 꼭 필요합니다. 더욱이 이런 성도를 만나면 목사인 저조차도 마음이 푸근해 지는 그런 좋은 분들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바나바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부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행 4:36)
사도행전에는 바울과 더불어 안디옥교회의 사상 첫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바나바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바나바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별명입니다. 마치 베드로는 별명이고 본명은 바요나 시몬인 것처럼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이지만 본명보다 바나바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바나바’라는 별명의 뜻이 바로 4:36 본문에 나온 것처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왜 이런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바로 이 바나바의 주특기가 뭐라는 뜻일까요? 예 ‘위로 주특기’요. 바나바는 아마도 교회 안에서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잘 위로하고, 어긋난 길로 가는 사람들을 잘 권면한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워낙 이런 일을 잘 하니까 그 교회 성도들이 바나바를 너무 좋아하고 존경해서 이런 별명을 지어준 모양이에요.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성도가 꼭 필요합니다. 위로 주특기를 가진 성도 말입니다. 남을 유난히 잘 위로하고 마음 편하게, 푸근하게 감싸주는 그런 분들 말이지요. 이런 분들 몇 분만 있으면 교회 분위기 정말 따뜻해집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런 좋은 성도, 좋은 위로자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런 위로 주특기를 가진 분들을 보면 특징이 하나 있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지요.
“저분 늘 저렇게 웃고 밝은 모습으로 사는 걸 보니 근심걱정 하나도 없나보다. 가정에 사업이나 건강에 아무 어려움이 없으니 저렇게 마음이 넉넉한 모양이야.”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물론 이런 분 중에 정말 근심걱정거리 별로 없는 분도 있어요. 환경이 참 좋은 분도 계세요. 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런 위로 잘 하는 분들 대부분이 다 걱정도 있고 근심도 있습니다.
다 나름대로 힘든 일도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어서 늘 그렇게 푸근하게 웃고 남을 감싸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다 이 속에 뭔가 말 못할 고민과 어려운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도, “나도 이렇게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는데...”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도 남을 위로하는 좋은 위로자가 되세요.” 하면 “참 나, 나 하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을 위로하긴 뭘 위로해?” 하는 분들이 있단 말이에요. “나 하나 살아가기도 벅찬데, 내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남을 돕고 위로해? 그럴 정신이 어디 있어?” 하는 분도 틀림없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잘 들으세요. 내가 아무 문제없어서 남 위로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아무 어려움이 없어서 남 돕고 품어주는 것 아닙니다. 나도 힘들지만,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힘든 분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나아가, 잘 들으세요,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내가 힘들어봐서 남 힘든 것도 아는 겁니다.
내가 아파봐서 아픈 게 얼마나 서러운지 알기에 아픈 사람 돕고 위로하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상처 입어봐서 아는 겁니다. 상처가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요. 그래서 상처 입은 내가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 헨리 나우웬이 지은 유명한 책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책 사진 보여줌).
❚상처 입은 치유자
저자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예수회 신부요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예일, 하버드 등 최고의 대학에서 교수로 인정받는 안정된 삶을 살다가 갑자기 그만 두고 캐나다의 발달장애인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에 들어가 199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장애인들을 섬기며 삽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 나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첫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예수님 스스로가 고난을 당하고 채찍질과 온갖 모욕과,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상처를 입고 바로 그 고통과 상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고 치유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내가 온전하고 문제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나도 상처입고 아프지만, 나도 힘들고 문제가 많지만 오히려 그런 경험 때문에 남을 더 잘 싸매고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적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 취급 못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았지만, 그 잘난 제사장과 레위인도 겁나서 피해 간 강도 만난 자를 누가 치유해 줍니까? 예, 사마리아인이요.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 10장)
강도 만나 상처 입고 죽어가는 사람을 진정 불쌍히 여기고, 자기 가는 길을 멈추고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를 주막에 데리고 가 보살펴주고 완치될 때까지 비용까지 주막 주인에게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상처가 많은, 가장 멸시 천대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마리아인 아닙니까?
바로 이 사마리아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오히려 세상에서 상처가 가장 많고 가장 힘든 일을 겪어본 사람이 남을 더 잘 치유하고, 돕고, 위로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헨리 나우웬이 말한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모든 사회적 지위와 존경과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 그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던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직장 다 그만두고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라고요?” 아니요.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적어도 세상에서, 너의 가정에서,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사람, 특히 교회 안에서 남을 잘 위로하고 돕고 품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 한 몸 챙기기도 벅찬데...” 하지 말고 나도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서 오히려 남을 더 잘 위로하고 치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 <상처 입은 위로자> 되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위로
오늘 본문말씀을 봅시다. 데살로니가전서 3:1부터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제자 디모데를 파송합니다. 자신이 세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믿을만한 제자인 디모데를 보내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믿음 잃지 말고 꿋꿋하게 믿음으로 잘 이겨내라고 격려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6절과 7절 말씀만 한 번 읽어봅시다.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지금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환난 당하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려고 ‘위로 주특기’ 제자 디모데를 보냈는데 도리어 누가 위로를 받은 거에요?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갔다 오더니 소식을 전해줍니다.
“바울 선생님, 걱정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믿음 확실합니다. 사랑도 넘칩니다. 비록 환난 핍박 많으나 꿋꿋하게 믿음 지키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격려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말을 한 겁니다.
게다가 바울 일행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오히려 바울을 걱정하면서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나... 지금 누가 누구 걱정해주고 있는 겁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바울을 걱정하며 믿음 중에 어떤 환난 근심 핍박 궁핍도 다 이겨내고 잘 살고 있다고 하니,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사도 바울이 더 큰 위로를 받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고,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이런 일을 종종 받습니다. 어떤 성도가 지금 너무 힘든 일을 겪고 있다고,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저는 딴에 너무 걱정이 되는 거에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지금 너무 힘들 텐데 어떻게 이겨낼꼬... 이러다가 믿음도 흔들리고 교회 못나오게 되면 어쩌나...” 이런 걱정 저런 걱정 하다가 위로해준답시고 만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믿음 흔들리기는커녕 너무 꿋꿋한 거에요. 저도 그런 일 당하면 힘들고 흔들릴 것 같은데 너무 끄떡없는 거에요. 오히려 저보고 건강 잘 챙기시래요. 그래서 위로한다고 하던 제가 오히려 그분을 통해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믿음을 배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요.
❚상처 입은 위로자
오늘로 ‘위로’ 시리즈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그동안 다섯 번에 걸쳐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그리고 사람의 위로, 가족의 위로, 성도의 위로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아픔과 상처가 너무 깊을 때 물론 우리의 최고의 위로자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통해서 참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곁에 있는 우리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성도가, 주변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가족이, 성도가 그에게 위로는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줄 수도 있지요. 반대로 우리의 태도와 자세에 따라 그가 우리를 통해 정말 소중한 위로와 힘을 얻어 쓰러진 영혼이 다시 일어나고, 절망하고 포기한 인생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으니 이런 사명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바로 여러분이 이런 참된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우리가 ‘상처 입은 위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힘들 때,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을 통해 위로를 받으신 경험이 있습니까? 내가 너무 괴롭고 지칠 때, 낙심될 때 다른 사람을 통해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이렇게 남에게 위로를 받았으면 이제는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런 상처와 아픔을 경험해 보았기에 다른 이들에게 더욱 좋은 위로자가 될 수 있고, 비록 지금도 나의 문제가, 나의 아픔이 다 해결된 게 아니고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나의 이 상처가 남을 더 깊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어렸을 때 상처가 많은 사람이나 자라면서 어려운 환경이나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 나중에 남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할 확률이 높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어려서 부모의 폭력이나 학대를 경험한 사람이 커서 자기 자녀에게 똑같이 폭력이나 학대를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합니다.
그런 부모를 증오하며 “나는 나중에 절대 저런 부모가 되지 말아야지.” 했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라면서 경험한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내 보이지 않는 내면에 상처의 뿌리가 되어 결국 나중에 그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심리학이나 세상 학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상처 받았기 때문에 남의 상처를 덮어주고 감싸주는 사람, 내가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남을 더 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단!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초의 <상처 입은 위로자요 치료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해 내 상처의 뿌리와 아픔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야 가능합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아무리 오래 다녀도 이 만남과 치유를 경험하지 못하면 여전히 남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되고, 교회까지 와서 교회 안에서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통해 치유 받고 힘 얻고 회복되어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상처 입은 위로자>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정호승 시인이 쓴 시를 하나 소개하렵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바로 여러분이 이 향기로운 꽃잎 되시길 축원합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사40:1-5/ 이하준 목사
2022-10-13 09:31:14
❚ 위로가 필요해
환자가 유난히 많은 병원에 가면 대기시간이 정말 길지요. 어떤 때는 1시간, 혹은 그 이상도 대기하다가 의사 선생님을 겨우 만났는데 의사는 너무나 무덤덤한 표정으로 한두 마디 해주고 끝낼 때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1시간이 넘는데 만남과 대화의 시간이 불과 1~2분도 안 될 때가 있어요.
물론 “환자가 많아서 그렇겠지, 의사도 사람인데 피곤하겠지.”
인간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나도 아프니 할 얘기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섭섭하고 허전할 때가 있습니다. 이게 환자의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도 의사들이 계신데 직업적인 어려움이 이해는 가지만 기왕 예수 믿는 의사니까 다른 의사들보다 조금이라도 환자의 마음을 더 알아주는 ‘좋은’ 의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떤 의사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 의사가 어느 여성 환자를 만나 진료가 다 끝났는데 그분이 뭔가 아직 할 말이 남은 표정이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대요.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사실 이 말 하기 전 잠시 고민을 했대요. 환자의 마음을 살피고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고 배우긴 했지만, 눈 앞에 대기 중인 수많은 환자들 명단이 모니터에 떠 있는 상황에서 이 질문을 매번 모든 환자들에게 건네기란 쉽지 않다는 거지요.
하지만 어쩐지 그날따라 이 말을 하게 되었고, 이 질문을 받은 환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시작하더랍니다.
“사실 석 달 전에 갑상선암을 진단받았어요. 그런데 수술은 아직 안 했어요. 아직은 암이 작으니 좀 더 기다려서 수술 날짜를 잡아도 된다고 해서 석 달 후에 다시 초음파 검사를 받아보고 결정하기로 했어요.”
안쓰러운 마음에 의사가 이렇게 답을 해줬대요. “아무리 갑상선암이 순한 암이라고 해도 그래도 암이라고 들으니 마음이 아주 편하지는 않으셨겠어요. 크기가 자라는지 아닌지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조금 초조하실 수 있고요.” 순간 그 환자의 두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들 갑상선암인데 뭐가 걱정이냐고, 남편도 그건 암도 아니라고 그러고... 그러니까 나도 덩달아서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더라고요. 힘든 암환자도 많은데 나는 암 같지도 않은 암이니까 힘들다고 말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어떨 때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데 이런 걸로 뭔 걱정이냐고 할까봐 속 시원히 말도 못하고 지내고 있어요.”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진료실에서 울었습니다.
“아유, 죄송해요. 안 울고 싶은데, 아유, 막 울음이 나오네요. 아유, 시간 많이 빼앗아 죄송해요. 다른 환자들도 많이 기다리실 텐데... 암 진단받고 나서 힘들겠다고 위로해주는 얘기 처음 들어봤어요.”
글을 맺으며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짧디짧은 나의 위로에 그렇게 큰 눈물이 쏟아질지는 정말 몰랐다. 갑상선암을 진단받고 3개월 동안, 순한 암인데 뭘 그러냐는 얘기 들을까봐 참고 참고 참아왔던 눈물이 그날 진료실에서 모두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위로받지 못했던 이들의 눈물은, 마치 막혔던 둑이 터지는 것처럼 쏟아진다.
물론 이날 이후로도 그 환자의 상황은 딱히 달라질 게 없겠지요. 병이 나은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날 진료실에서 쏟은 그녀의 눈물은 그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어준 겁니다.
사실 그녀는 위로가 필요했던 거에요. 의사의 정확한 진단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갑상선암은 암도 아니라는 말도 필요했던 게 아니고, 얼마나 힘드셨냐고, 힘내라고 말해주는 그런 위로가 필요했던 거에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하나님의 위로
우리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의사가 환자 마음을 조금만 알아줘도 눈물이 쏟아지는데, 남편이나 아내가 내 아픔 조금만 알아줘도 그토록 감동이 되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마음과 아픔을 너무나 잘 아는 분이세요.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아세요. 그래서 위로를 참 잘 해주시는 분이세요. 이 사실 하나만 알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답니다. 꼭 이 사실을 기억하세요.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 말씀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고 머나먼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간 상황이에요. 나라도 망하고 성전도 불타고 천리타향 낯선 곳에 끌려간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분석이 필요하겠으며, 무슨 책망이나 책임공방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위로였지요. 그런 상황에서 위로자이신 우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 1절 말씀입니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위로하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심으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위로하라 위로하라>이고요.
그런데 여러분, 무조건 위로만 한다고, 위로 받으라고만 한다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뭔가 위로의 근거가 있어야지요. 하나님은 이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씀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첫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지금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왔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선 그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뭔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신 겁니다. “일단 이건 분명히 하자. 나라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것은 너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범죄의 대가로 끌려온 포로생활을 ‘노역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역’이 뭘까요?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이 말이 어떤 일정한 기간을 뜻하는데 그냥 기간이 아니라 ‘군대의 복무기간’ 혹은 ‘전쟁의 기간’ 등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는 기간을 뜻합니다. 마치 죄를 지어서 수감되거나 강제노역을 하는 기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따지고 책임을 추궁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죄의 결과로 받은 고통의 기간, 노역의 기간이 다 끝나고 너희가 받을 벌 다 받았고, 너희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 말씀이 왜 위로가 될까요? 사형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이 무기징역이라고 하더군요. 무기징역은 말 그대로, 무기(無期), 기한이 없는 거에요. 징역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에요. 희망이 없기 떄문에 더 힘들다는 거지요.
하지만 내가 지금 감옥에 갇히고 강제노역을 하고 있다고 해도 언제 이 처벌의 기간이 끝난다는 사실만 안다면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소식이 뭐겠어요? “너 더 좋은 감방으로 옮겨줄게.” 혹은 “오늘 특식이 나온다.”는 소식이겠습니까? 아니죠. “너 복역기간 다 끝났다. 이제 석방이다. 자유를 얻었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음(福音, The Good News)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사형날짜만 기다리던 죄수에게 “너 오늘 무죄석방이다.”라는 소식보다 더 좋은 뉴스, 더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네 죄가 사함 받았다, 오늘 석방이다.”라는 소식보다 good news가 어디 있겠어요?
나라가 망하고 포로생활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도 “네 죄 사함을 받았고, 너의 복역 기간이 끝났다.”라는 소식보다 더 좋은 good news, 더 좋은 복음, 이보다 더 큰 위로의 소식이 어디 있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받을 벌 다 받았고 죄 사함 다 받았으니 이제 석방이다. 포로생활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며 가장 큰 위로를 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참으로 오랜 노역의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분도 계십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온 국민과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고난의 때, 노역의 기간을 2년 반 이상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끝났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이 노역의 때, 고난의 기간이 다 끝났다, 너희는 이제 그 코로나라는 지긋지긋한 굴레로부터 석방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참다운 위로를 주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이제 우리에게는 위로밖에 없다, 앞으로는 절대 좌절할 일, 낙심할 일 없이 희망만 남아있다,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힘차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위로의 하나님이 반드시 힘주실 줄 믿습니다!
❚ 힘주시는 하나님
둘째, 여호와의 영광과 말씀으로 힘주시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까 말씀드렸지요?
사형선고 받고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좋은 감방으로 옮겨줄게, 오늘 특식 나온다.”는 말이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다고요.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에요. “좀 더 좋은 유배지로 옮겨줄게, 강제노역을 조금 쉽게 해줄게.” 이런 말이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그들에게 최고의 위로와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왜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게 중요하냐? 캄캄한 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기 직전이라도 저 멀리서 희미한 등대의 불빛만 봐도 희망이 막 생기고 살아야겠다는 힘이 마구 생기지 않습니까?
하물며 여호와의 영광!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보이면 그들이 얼마나 큰 소망을 얻었겠습니까? 살아갈 힘이 팍팍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이에요.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아무리 싱싱한 풀이나 아름답게 핀 꽃이라 해도 때가 되면 다 마르고 시들지요. 세상의 어떤 권세든, 어떤 사람, 어떤 힘도 세월 흐르면 다 시들고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세상 권력이나 사람 의지하면 오래 못간다. 절대 영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세상에 오직 영원한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래서 그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의지하면 반드시 해방의 역사가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영원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그 영원하신 말씀만 의지하라고, 반드시 포로생활에서 해방된다는 소망과 위로를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셋째,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8~31절 말씀을 교독합시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소년, 장정도 피곤하면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앙망’이란 간절히 바라보고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뜻이에요. 오직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강력한 능력을 주신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앙망해야 하는 거에요. 세상 그 누구도, 어떤 권세도 앙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앙망하고 하나님 말씀만 의지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독수리 같이 날아오를 수 있는 새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바로 위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면 그 원인을 열심히 분석합니다. 대체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거야? 누구 때문에 이 어려움이 생긴 거야? 따지고 진단하고 분석하고 책임을 규명합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지금 제일 필요로 하는 건 오직 위로인데요.
설교를 시작하며 들려드린 이야기, 의사를 찾아온 그 환자는 사실 위로가 제일 필요했던 거에요. 의사의 정확한 진단도 아니고 갑상선암은 암도 아니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냥 얼마나 힘드냐는, 힘내라는 위로만 필요했던 거에요. 그래서 의사의 다정한 위로 한 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위로와 힘을 얻어 돌아간 겁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우리 성도들은 “왜 이런 위기와 어려움이 닥쳐온 거야? 누구 때문이고 누구 책임이야?” 하는 진단이나 분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코로나 그거 아무 것도 아닌데 뭘 그리 힘들어하냐?” 이런 말도 아니에요. 그냥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할 뿐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의사가 환자에게 한 마디만 부드럽게 해줘도, 작은 위로만 해줘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카타르시스가 일어나고 큰 위로가 되는데 하물며 천지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위로해주시면 얼마나 우리가 힘이 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저는 이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내가 너희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너희도 서로 위로해줘라.”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꼭 서로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저도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위로해드리려 합니다. 저는 절대 무슨 진단 안 할 겁니다. 따지고 원인 분석하고 그러지 않겠습니다. “여보, 갑상선암 그거 암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남편이 이렇게 얘기할 때 아내가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저도 여러분에게 “이거, 지금 여러분이 겪는 고난 아무 것도 아니에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요.”라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그냥 위로만 필요할 뿐이니까요. 오직 하나님의 위로가, 그 따뜻하신 사랑의 위로만 여러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내세요! 하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만 바라보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앙망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앞으로 잘 될 겁니다. 무조건 잘 될 겁니다. 여러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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