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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 J 2025.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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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기다리는 자 /2:25-35/ 곽선희 목사

2014-11-19 14:24:04

 

유명한 데일 카아네기의 사무실에 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커다란 거룻 배의 그림 한 점이 걸려있었다고 합 니다. 노는 모래 위에 놓여있고, 배 는 무척이나 낡은 것 같은 그러한 배의 모습을 하고있습니다.

 

썰물에 모래 위 언덕에 이렇게 걸려있는 배 를 그린 그런 그림입니다. 마치 모 래언덕에 버려진 것 같은 그림 하나 가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그 림은 처량하게 아주 쓸모없이 내버 려진 것 같은 그림, 그 배 한 척이 그려있는 그림이지만은, 문제는 그 그림 밑에 한 줄의 글이 쓰여져 있 는데, 그 글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씌여 있었답니다.

 

"반드시 밀물 때 가 온다."

지금은 썰물이 돼서 물 이 다 빠져나가서 이 배가 이렇게 모래 언덕에 걸쳐있지만은 반드시 밀물 때가 와서 이 배를 물위에 띄 워 놓을 것이다. 그리할 때에 이 낡은 배도 쓸모 있게 쓰여질 때가 올 것이다.

 

반드시 썰물이 있는가 하면, 또 밀물 때가 있다. 그래서 밀물 때를 기다리는 이 낡은 배 한 척, 이 거루의 모습을 그 사무실에 늘 걸어놓고 그는 그 그림을 보면서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했더랍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 박사 님께서는 삼천명을 상대로 해서 설 문조사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에 94%가 결국 기다리는 데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 그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겁니 다.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소식 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기다리고, 좀더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좀더 좋은 세월을 기다리 고, 좀더 발전되기를 기다리고……. 무엇인가 무던히 기다리는데 그 많 은 세월들을 또 그 마음을 쓰고 있 었다고,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게 뭡니까?

 

현대인은 언제나 현재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 습니다. 오직 미래를 향해서 기다 립니다. 기다리기는 하는데 기다림 에 합당한 행동은 또 없습니다. 또 그 기다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 은 사색도 비판도 연구도 없이 막연 하게 기다립니다.

 

프랭클 박사님은 자기에게 많은 고민을 가지고 찾아오는 정신병 환 자들에게 아주 강한 충격적 질문을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정신의 그 약한 점을 치료하도록 조치했다고 합니다. 지금 뭐 고민이 많아서 뭘 어쩌구 어떻구,

 

"이래서 못 살겠습 니다."

하는 사람을, 다 듣고 나서는 한마디 딱 찌르는데,

"그러면 왜 아 직도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까?"

 

가 만히 보니까 꼭 죽을 지경인데 왜 안 죽었냐 그 말이오. 그러면 그때 가서야

", 그 이유가 있지요."

이 래서, 혹은 자녀들 때문에, 혹은 명 예 때문에, 혹은 가정, 가문의 명예 다, 혹은 한 가닥 믿는 내 신앙 때 문에……, 뭐 뭔가 이유를 들기 시 작한대요. 바로 거기서부터 생각을 다시 하라. 그래서 그 생의 궤도를 수정했다 하는 얘깁니다.

 

어떤 글에 보니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목표가 있고, 사 랑이 있고, 꿈이 있으면 살만하다. 돈은 없어도 됩니다.

 

때로는 건강 이 없어도 됩니다. 목표가 있고 사 랑이 있고 꿈이 있으면 충분히 살만 하다. 왜요? 목표가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친구가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소망이 있 습니다. 그런고로 살만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라고 하는, 이 것이 두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근 본적으로 다른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희망사항'이라고 하는 기다 림입니다. 막연한 바램입니다.

"좀 나아지겠지, 행여 좀 나아지겠지."

 

하는 겁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생각하는 막연 한, 아무 내용도 없는, 아무 보장도 없는, 그러한 바램이 있습니다. 이 것을 '희망사항'이라고 합니다. 전 그래서 '희망'이라는 말을 좋아않합 니다. '소망'이라는 말이 좋아요. 왜냐하면 소망이라는 기다림은 약속 이 있는 겁니다.

 

객관적 약속이 있 고, 내용이 있고, 그 미래로부터 현 재로 생각케하는 그것이 바로 '소망' 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있는 바 램, 약속을 받은 그러한 바램이 바 로 소망입니다. 결정적 미래로부터 약속된 미래로부터 주워지는 바램, 그것이 소망이기 때문에 저는 소망 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이, 그 내용이 내 현재의 나를 변화시키 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이 나를 변 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과거가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거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가진 꿈이요. 내가 가 진 소망, 그것에 의해서 내가 변화 되는 것이올시다. 미래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올시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 다. '여성은 그가 생각하는 그 사람 과 닮은 아이를 낳는다.' 누구 미워 하지 마세요. 그 사람 닮은 아이를 낳을거예요. 열심히 사랑하고, 그리 워하면 그 사람 닮는 아이를 낳는 답니다.

 

유명한 소설가 토마스 하 디의 소설 중에 그런 '환상의 여인' 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바로 이것을 주제로 합니다. 어떤 여인이 시를 읽었는데, 그 시인을, 그 시를 쓴 시인을 사모하고, 사랑 하게 됩니다, 마음속으로. 그러나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뭐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러나 마음속으로 그 시를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으 면서 그 시인을 마음속에 그리워하 게 됩니다. 아이를 낳고 보니깐 그 시인 닮은 아이를 낳아 놓았어요. 남편으로부터 오해를 받습니다. 이 것이 진행되는 스토리의 내용입니 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누구를 열렬 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바로 그 사 람을 내가 닮게 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라는 존재가 그 미래적 이 미지로 화해가고 있다는 것이올시 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하는 것도 생각이고, 미워하는 것도 생각입니 다. 그런 내가 생각하는, 그 생각하 는 만큼에 존재가 되어진다는 걸 잊 지 말아야합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야하겠습니까? 그 꿈이, 그 소 망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오. 무 엇을 기다리며, 얼마나 기다리며, 그리고 어떻게 기다려 가야 하겠습 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주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한 신앙입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은 그는 물질적인 어떤 풍요로움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인 것 을 기다렸고, 그는 자기 자신만의 영달이나 안위를, 또는 좋은 일이 있어지기를, 자기를 위해 기다린 것 이 아니에요.

 

만 백성, 하나님의 뜻 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만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는 우주적 구원에 그런 미래를 생 각하며 기다렸습니다. 또는 내 방 법대로 기다린 게 아니오.

 

내가 생 각하는 시나리오대로 미래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 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길! 그의 방법대로, 그의 계시하신 말씀을 따라서 그를 기다리고 구원 을 기다렸습니다. 조금 어려운 신 학적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마는, 이런 기다림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리합니다.

 

'The Messiahnic Age' 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The Messiah'를 기다린 것이다. '메시아 의 세대'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다. 이렇게 정리됩니다. 이 무슨 말씀이고 하 니, 일반적으로 메시아의 시대라 함 은 전쟁도 없고,

 

평화롭고, 빼앗기고 빼앗는 것도 없고, 평등하고, 번영하 고, 자유롭고, 모두가 평안하게 사는 어떤 그런 유토피아적인, 바로 그런 세대, 그런 세상 오기를 기다리는 거요. 이게 바로 '메시아의 세대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 많은 철학들이 전부 엄격하게 말하면 '메시아니즘'입니다,

 

'메시아 니즘'. 그 좋은 세상을 기다리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저마 다 외쳐봤지요. 노력 해봤지, 혁명 도 해봤지, 싸워도 봤지……. 그러 나 그 세대는 오기는커녕 점점 멀어 지기만 합니다. 여러분, 메시아의 세대, 좋은 세상, 그것을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그 메시아를 기다리는, 오로 지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신학적으로 정리하면은 'A Christ', 'The Christ'냐 하는 말을 합니다. '한 그리그도', '그 그리그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말씀은 '그 그리스도', '그 메시 아'를 기다린 것이죠. 여기에 대단 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 라엘 사람들의 '메시아 사상'은 대단 합니다. '메시아 대망사상' 대단합 니다.

 

예수께서 오심도 바로 그 '메 시아 대망사상'의 맥락에서 설명이 되고, 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사건도,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도 알고 보면, 바로 이 '메시아 사상'의 차이에 있는 것입니 다.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 라서 신앙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 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는 무한히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그런 '추상적 메시 아니즘'이 있습니다. 그저 좋은 세 상 올 거다. 막연하게 무한히 미래 적, 그러한 대망 관련이 있단 말이 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문젭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아무 약속도 없 는데 그냥 기다리고,

"좋은 때가 올 거다. 그저 기다려봐."

 

이것처럼 무서운 사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 니다. 마치 무지개를 쳐다보는 것 처럼 무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었으면 성취를 믿어야한다 는 거죠.

 

약속과 성취가 함께 있어 서, 비로소 바른 대망신앙이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우리의 이 소 망의 지계표를 자꾸 옮겨서는 안됩 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이 계시는데 연세가 높으세요. 한 칠 십 훨씬 넘은 그런 분이, 늘 날 보 고 하는 말이

"나는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내 딸이 하나 있는데, 큰 딸이 있는데 이 사십이 넘었는데 아직 시집을 못 갔어요."

뭐 본인은 뭐 생각 없이 자기 나름대로 생을 즐기고 살아가 고 있지만은 부모의 마음을 그렇지 않아요. 저게 빨리 시집을 가야겠 는데……, 싶어요. 그래서는

 

"저 딸 이 시집가는 걸 보고 죽으면은 한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늘 그러시더 라구요.

"저거 딸을 시집가는 것을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그런데 고맙게도 옛날에 대학 다닐 때 연애 하던 총각인데, 또 장가 안 가고 늙 어 가는 게 하나 있더라구요. 그래 서 서로 어떻게 오랜만에 만나고, 만나고 해서

 

"우리 다 때늦었는데, 우리끼리 삽시다."

뭐 이렇게 된 거 예요. 어쨌든 그렇게 많이 가까웠 던 것 같지는 않은데 결혼이 됐어 요. 제가 결혼 주례를 했습니다. 주례하고 같이 그 장로님하고 차를 타고 가면서

"장로님, 내가 하나 물 어봅시다. 그 딸 시집만 보내면 소 원이 없겠다고 했는데, 이제 딸 시 집갔으니 아무 소원도 없겠고만요?"

 

했더니, 장로님 빙그레 웃으시면서

"저게 뭘 하나 낳을 수 있을까?"

그래서

"또 뭘 하나 나가지고 아주 시집 장가까지 보내지 그래요?"

 

그 냥 그러고 말았습니다마는, 보세요. 여러분 소원이라는 어떻게 됩니까? 어떤 때 우리 부모들 보면은

"저 내 아들, 저거, 저 대학입학 하는 거 보고 죽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대학입학하고 나니까 또, 이젠 또

"졸업하는 것보고……."

졸업하고 나니깐

"취직하는 것보고……."

 

"장례식까지 보고 그래요."

우리 인 간들이 소원이라는 게 자꾸만 옮겨 가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있는데, 옳지, 하나님이 이것을 내게 주셨다. 나는 다 이루었다. 나는 아무 소원도 없다."

 

좀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신바람 나겠는 데……, 뭐 그렇게 욕심이 많은지. 저도 모르는 욕심을 그냥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약속을 믿는 자는 성 취를 믿어야 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이 기다리는 마음이 있 다면, 이에 따르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을 준비를 해야 지요. 경건한 생활로 거룩함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자의 마땅한 준비 가 있어야지요.

 

좋은 날은 기다리 면서 아무 준비가 없다면, 이 얼마 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성경에 예 수님께서 친히 비유로 하신 말씀을 보세요. 아시는 대로 열 처녀 비유 를 보니깐 신랑을 기다린다. 신랑 을 기다리면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준비는 없이 기다리는, 이게 바로 어리석은 처녀 죠. 안 그렇습니까?

 

아 시집갈 날 을 기다린다면, 그 신랑과 살 그때 를 생각하며 차곡차곡 준비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자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서 여러분, 죽음을 준비하셨습 니까? 주님 만날 준비를 하셨습니 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그 영 광을 누릴 준비를 했습니까? 어차 피 이 세상은 떠나야 돼요.

 

이건 어차피 멀어질 것이고, 나와 상관없 는 거예요. 다가오는 미래를 약속 의 땅, 약속의 시간을 위해서 여러 분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그날을 준 비하느라고, 그날을 바라보고 있었 기에 오늘의 어떤 고난도 개의치 않 고, 순교의 죽음도 아주 넉넉하게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었던 거 아니 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이 성취 문제에 대 하여 이것을 현실화하는 신앙이 있 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기다렸으면, 이제는 만나야지요. 만 났으면 영접해야지요. 나는 이 성 경, 예수님 나심을 중심해서 되어지 는 사건 속에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동방박사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아 헤롯궁전을 찾아와 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나 라에 오신 메시아가 어디서 나셨느 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구요. 온 소동을 했어요. 이 때문에 소동 은 해놓고,

"베들레헴에서 낳았을 겁니다."

 

하고 지시하고는 박사들은 그리로 갔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리로 갔다는 얘기가 없어요. 떠 들기만 하고, 소란만 하고, 자기들은 안 갔어요. 이게 문제란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바리 세 교인, 서기관, 제사장……. 당시 에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도 간절 하게 메시아를 기다렸고,

 

가르쳤지 만 진작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영접 하지 않았어요. 성경에 아주 시적 이면서 우리 맘을 아프게 하는 부분 이 뭡니까? 나실 곳이 없어서, 사 관에 용납할 곳이 없어 말구유에 나 셨다는 얘깁니다. 주님이 오실 곳 이 없어요. 아무도 영접할 수가 없 어서 말구유, 외양간에서 나셔야 했 다는 그 사정. 그때나 오늘이나 마 찬가지입니다.

 

그뿐 아니라, 헤롯은 예수님의 나심을 아는 순간 벌써 죽 이려고 듭니다. 가야바도 그를 죽 입니다. ? 자기의 보좌를 양보 하기가 싫어서. 자기 부정이 어려 워서 익숙한 곳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해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질 못 해요. 자기 왕좌를 예수님께 드리 지 못했어요. 그런고로 그들은 예 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 가에 못 박아버립니다.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얘기입니까? 당시 사람 들은 그렇게도 기다리는 것 같았는 데,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소망을 현실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믿음을 구체화 해야됩니다. 약속 안에서 오늘 현 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취된 현 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시므온 보세요. 아기 예수 를 품에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 그에게 주 어진 게 뭡니까? 나이 많은 노인입 니다. 빵이 주워집니까, 옷이 주워 집니까?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 만 족합니다. 기다리다가 만나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제는 기 쁜 마음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겠 습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만족함 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 접한 그것으로 충만합니다. 더 바 랄 것이 없습니다. 앞에 주님을 만 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이미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메시아를 영접한 그 감격 하나만으 로 충분합니다. ? 오늘 내가 사 는 모든 현실과 생활, 그 자체가 약 속의 성취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은혜 안에서 가장 뜻 있고, 가장 만족한 주님을 영접한 자의 충 만함이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 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1-8/ 곽선희 목사

2014-11-24 14:34:37

 

1978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1세가 서거하셨습니다. 취임한지 겨우 33일만의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장례절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황이 이 짧은 임기동안에 특별히 임종직전에 남긴 일기문이 공개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직장인들이여, 무직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건강한 자들이여, 병든 자를 기억해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기록입니다. 이 일기문이 온 세계에 공개되게 될 때에 제일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노벨평화상 위원회였습니다.

 

저들은 곧 반응을 나타내서 깊이 심사숙고한 끝에 인도의 빈민굴에서 한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상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중동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고한 카터 대통령에게 주기로 내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생각을 돌려서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기록을 보십시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마다 성탄을 맞습니다. 성탄의 의미를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마음에 되새기고 있습니까? 성탄을 맞는다면 성탄의 의미를 내 마음에 기리고 그 성탄의 의미로 향해서 내 마음과 인격과 생활이 변화될 때에 거기서 성탄의 실존적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외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러분 어떻게 위로하며, 어떻게 위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것이 빵입니까? 그것이 직장입니까? 아니면 건강입니까?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으며, 무엇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요새 저는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이 나라에 실업자도 있고 기술자도 있고 또 그리고 정치가도 있고 학자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신바람을 넣어주고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기술자는 넘쳐흐릅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 많습니다. 소위 정치가들이라는 사람도 만원인데 그런데 정말 우리 국민 앞에 참으로 용기와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는 지도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적 대망입니다. 메시아의 나라, 메시아의 세대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미래의 문제요 메시지의 문제요 복음의 문제입니다. 메시아의 영광, 메시아의 세대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말라 기다립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것을 소위 Futurology 라고 합니다. 미래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관계없이 아주 비약을 해서 결정적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하는 것을 Eschatology,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항상 종말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론적 신앙의 핵심은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복음이요, 복음의 핵심은 사죄입니다.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용서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말합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 하나님의 진노가 여기서 멈추고 은총의 해, 은혜의 해가 앞에 온다고 외쳐라! 하고 말씀합니다. 결정적 미래, 밝은 소망의 메시아의 세대를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그건 바로 용서를 의미합니다. 메시아의 임함은 바로 용서를 말합니다.

 

구제 받을 수 없는 용서. 우리는 많은 문제를 놓고 잘했느냐 못했느냐 어디까지 사실이냐 어지간히 그렇게 비판을 해봅니다마는 이 시시비비를 통해서는 절대로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를 청산해야 미래가 보인다고 하나 과거 청산할 길이 없으니 미래도 안보입니다.

 

언제까지 이 시비 속에 이 절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율법을 초월하여 죄인을 사랑함으로만이 다시 소생하는 길은 있는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모음집 중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페인에 어느 엄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과 건건이 사사에서 충돌이 됩니다. 아버지의 시각으로 볼 때에 그 아들이 하는 일은 못마땅합니다. 아버지가 볼 때는 그건 말도 안되고 사람도 아닙니다.

 

계속 충돌하는 나머지 이 아들은 집을 나가 버립니다. 가출을 해서 몇 해 동안 방황을 합니다. 아들을 내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괴롭습니다. 그래서 항상 가슴 아파합니다. 잘못이 있어서, 내보낼 수밖에 없어서, 사람답지 못해서, 소망도 없어서 내보냈지만 아들을 내보낸 아버지는 여전히 괴롭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들을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는 절대로 편안할 수가 없었어요. 마침내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짤막하게 "파코", 그 아들의 이름이 파코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예정한 시간, 정오에 호텔에 가보았더니 무려 8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였더랍니다. 파코라는 이름이 아주 흔한 이름이라서 파코라는 이름으로 집나간 아이들이 이렇게 많다. 800명이 모였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빠는 너를 용서했다.' 여기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여기 무슨 시비가 있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고. 아무 변론이 없습니다. 거저 용서했다. 내 사랑으로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다 용서했다. 돌아오라 이거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문제는 이 복음에 대한 예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맞아들이는 것, 그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파코라는 청년이 아버지의 이 광고문을 보면서 '아버지 웃기누만'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아버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그랬다면 어떻겠습니까?

 

결국은 믿음이올시다. 그도 함께 괴로워하던 중에 아버지가 다 용서했다는 말 한마디를 전적으로 믿고 감격하여 가슴을 활짝 열고 자기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뭐 얼마는 잘하고 얼마는 못했느니, 알 바가 아니요.

다 지워버리고 그대로 염치없이 아버지께 돌아오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요.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올시다.

 

우리는 탕자 비유를 이제 늘 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이 돌아오는 일은 중요한 신앙이올시다. 그는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라고 부름받을 수도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하지요! 머슴꾼의 하나만한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불구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잔치를 하라!" 잔치를 배설합니다. 아들은 체면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 잔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염치가 없습니다. 뻔뻔합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기뻐하는 마음을 절대로 그렇게 무시할 수가 없고,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섭섭하게 할 수가 없어서 그는 부끄럽지마는 의젓하게, 형이 질투하는 것도 알면서 그 잔치에 앉아서 잔치를 받아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가끔 똑똑한 분들이 대개 이렇게 말하데요. "그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뻔뻔하고 체면이 없어요" 그래요. "왜요?" 그러니깐 "아니 죄지었다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다신 안그러겠다고 또 하고. 아 그거 평생 그러구 있으니 그 사람들 그 뻔뻔한 거 아니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뻔뻔한 사람입니다.

 

제가 어찌 하나님의 딸이고 제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요. 제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요.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믿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그 엄청난 사랑을 영접하되 자 보세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한 증거로 네 죄를 내가 대신 지노라." 그래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죠.

 

이제 예비하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산은 낮아져야 되겠다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되겠다고, 첩경을 곧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시는 예수, 그 복음을 영접하려면 산이 낮아져야 됩니다.

 

바리새주의적인 교만, 자기 의를 의지하는 교만, 잘났다고 하는 교만, 뭔가 자기가 이룬 것같이 생각하는 교만, 다 낮아져야 됩니다. 낮아지고 또 한번 또 한번,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낮아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오시는 주님을 바로 영접할 수가 없고 내가 네 죄를 사했느니라 하는 이 복음을 내가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겸손해야 되고 끝까지 겸손해야 됩니다. 깨끗하게 마음을 비워야됩니다. 그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됩니다.

 

마치 옛날 그 세리와 같고 창기와 같은 사람들, 천대받던 사람들 그 신분을 높여야겠습니다. 나는 소망이 없다 생각하지만 주님이 나를 사랑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 나는 아들입니다.

 

그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면 나는 딸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확실한 주의 자녀입니다.

그런고로 내 천한 신분, 더러워진 과거, 씻을 수 없는 더러운 추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됩니다. 주님과 만날 수 있을 만큼 자기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가서 첩경을 곧게 하라 그랬어요. 굽어진 마음, 갈고리같은 마음, 편견, 오해, 이런 이야기 다 지워버리고 순진한 마음, 깨끗하게 주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랑을 영접하는 자의 수용자세가 분명해야 됩니다. Acceptance가 필요합니다.

 

어느 중년남자가 일주일동안 해외 여행을 갔습니다. 해외 출장을 갔는데 갈 때 생각은 아침저녁으로 내가 전화를 걸어서 마누라한테 문안을 해야겠다 생각을 하긴 했는데 가서 처음에 도착하자마자 '잘왔습니다' 한마디 해놓고는 그만 이래저래 그 출장간 일이 바쁜 일이라서 그만 전화를 한번도 못 걸었어요.

 

아마 저 같았던가봐요 저는 뭐 전화 잘 안 거니깐. 그런데 이러다가 내일 돌아가게 되었어요. 일주일이 지나니까 좀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전화기를 손에 들고 전화를 걸면서 생각하기를 '당신이 보고 싶었소.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하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수화기를 딱 들고는 하는 말이 "집에 아무 일도 없어? 애들은 다 잘 있소? 강아지도 잘 있고? 난초에 물은 주었소?" 여기까지 얘기를 했어요. 잠시 후에 아내는 "당신, 해도 너무합니다!"

 

울먹울먹하면서 딸까닥 전화를 끊었어요. 자 여러분, 이 마누라가 듣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우리가 뭐 강아지까지 챙기면서 제 마누라는 챙기지 않았대요. 뭐 뭐 다 챙기고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어요. 우리가 왜 힘듭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겁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거 같지 않아. 사랑 받을만한 존재도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참사랑은 모든 율법적 비판을 초월하는 것이에요. 이유 없어요. 절대적으로 사랑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받아 들여야 되요.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참 위로는 오로지 죄 사함에 있고 참사랑에 있고 그리고 만나 주심에 있습니다. 그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체적으로 만나주십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제 이 위로를 받아들이는 길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새로운 소망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해마다 성탄을 지키지만 금년은 새로운 의미의 성탄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늘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확정해 주시건만 어느새 우리는 이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고 스스로 사는 것처럼 교만하기도 하고 또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사랑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자인 것처럼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참 메시아로 오시는 주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영접하게 하시고 그 크고 놀라운 뜻이 우리 인격에 우리 마음에 우리 생활에 그대로 다시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메시아로 오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2:25-35/ 곽선희 목사

2014-11-25 14:20:33

 

세계적인 사업가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던 D.L.카네기를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그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그 사무실 아주 중요한 부분 벽에 아주 커다란 그림 한 폭이 늘 걸려 있었습니다.

 

이런 그림은 모조품으로 여러분도 많이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많이 보았습니다. 이 그림은 아주 낡아빠진 배한척이 그 뭍에 이렇게 걸쳐 있는 것입니다. 배는 물에 떠있어야 하는데 이 배는 뭍에 그대로 걸려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낡아빠진 노는 모래위에 그냥 던져진 채로 있습니다. 무척 낡은 배입니다. 아마 썰물 때 버려진 듯한 그런 배한 척과 노가 뭍에, 물이 아닌 뭍에 이렇게 걸려있습니다. 그런 그림입니다. 문제는 이 그림 바로 밑에 쓰여 있는 글자입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썰물이 있는가 하면 밀물이 있습니다. 더구나 인천앞바다는 9m나 됩니다. 그대로 썰물 때보면 쫙 물이 나가버립니다. 그러면 배는 뭍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바로 이러한 소망 이러한 기대감 그것으로 D. L 카네기는 큰 용기를 얻고 힘을 얻어서 한평생 사업을 했더라 하는 얘깁니다.

 

William Marston의 유명한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3,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해본 결과 사람들이 사는 목적의 시간을 그 많은 시간을 어디서 보내느냐? 94%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내더라는 거예요.

 

실제적 생활은 도대체가 6% 밖에 안 되고 기다리는 거예요. 기다리면서 어쩌면 기다림이 목적이 되고 말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소식을 기다리죠, 사람을 기다리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죠. 특별히 변화를 기다립니다. 어떤 변화가 있어지기를... 그리고 어떤 발전이 있어지기를 기다린단 말입니다.

 

신학자 야드 우드의 Beyond Cynicism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냉소를 넘어서라는 특별한 저서가 있는데요, 이 속에서 말합니다. “희망은 가장 믿을만한 기질이다. 어쨌든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유일한 우리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이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 희망이라는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자료를 수정해서 예측하는 미래가 아니다. 과거의 잣대로 보는 미래도 아니고 현재를 추정해서 미래를 바라보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희망이란 오로지 현재의 상황을 넘어서서 현재의 상황을 넘어서서 미래로부터 주어지는 그 기대감을 의미 한다”.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 아직 한번도 이런 경험도 없어본 일이에요. 그러나 기다립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망이요 그 소망에 의해서 인간은 사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이란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희망이란 말이고 하나는 소망이란 말입니다. 저는 이 우리 교회를 소망교회라 이름 지었고요 중국에 가보니까 소망이란 말이 없어요. 희망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래 중국의 소위 학자 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여러 번 물어보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된 거냐고? 분명히 우린 소망으로 배웠는데 소망이란 글자가 없어지고 희망이냐? 고 했더니 거기에 신학자들 정치가들이 그러더라고요. 옛날엔 소망이고 지금은 희망이라고...

 

저는 여기서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음니다 만은 저는 나름대로 깊은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옛날은 소망인데 지금은 희망이라... 글자풀이 해달라고 했어요. 중국 사람에게... 그랬더니 그거야 당연히 소망이란 말이 중요한 말 이지요”.

 

이걸 꼭 알아야 합니다. 희망이란 말은 희망사항입니다.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일 뿐입니다. 희망사항... 그 내용이 없습니다. 아주 막연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이라는 것은 나는 이 소망을 즐거워하는데 그것은 소망하는 바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자 내가 누구를 기다린다함은 그가 나에게 약속해줌으로 소망이 생기는 것이고 어떤 일이든지 내가 소망하는바 그로부터 내가 응답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여러분 이 희망이라는 것은 막연할 때가 많고요 어떤 때는 쓸데없을 때가 많아요. 요새 아이들 시험 보잖아요. 시험보고나면 틀림없이 낙방하는 사람도 있고 합격하는 사람도 있고... 다 합격하는 거 아니잖아요?

 

자 낙방했을 때 우리 보통 무어라 말합니까? “야 걱정마라. 내년에 또 보면 돼지”. 글쎄올시다. 내년에 보면 되는 겁니까? 그게? 우리는 이런 말로 위로합니다. 이게 서로 희망사항이에요. 그건 소망이 아네요. 누가 약속을 해줬나?

 

누가 꼭 그리된다던가? 그야말로 막연하기 짝이 없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는 나 할 탓이지. 그런데 우리는 마치 희망처럼 말합니다.

아무걱정 안하고 내년에 또 보면 된다. 그 본인은 생각합니다. “이거 정말 사람 점점 더 골탕 먹이는구나”. 안 그래요? 위로가 됩니까? 그게? 이게 희망이란 거예요.

 

자 그러면 그 기다림과 나 자신의 변화사이에 여기에 긴장관계가 있는 거예요. 그 기다림이 있다면 그 기다림에 따라서 내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정말 내년에 다시 시험을 본다고 한다면 전의 노력보다 작년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력할 생각이 또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구체적 능력으로 그 의미가 바꾸어져야 하는 것이에요. 기다림이란 늦게 생각하면 이것은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사랑과 가슴 그것이 먼저 미래로 가 있다는 것이에요.

 

생각이 미래에 먼저 가있어요. 내년을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이 내년에 가있어요. 가을을 기다리는 농부는 생각이 이미 가을 속에 가있어요. 추수 때에 가있다는 말입니다. 추수 때를 생각하면서 오늘 농사를 짓는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이게 기다림 이란 거예요.

 

재미난 얘기가 있습니다. 여성은요 그가 생각하는 그 사람과 닮은 아이를 낳는답니다. 사랑해도 닮고 미워해도 닮고 그러니까 시어머니 미워하면 꼭 시어머니 같은 아이 낳는다잖아요. ? 생각하는 대로 작용을 하거든요.

 

그 유명한 토머스 하디의 환상의 여인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어요. 그 소설의 내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 부인이 작품 중의 시를 좋아해서 시인을 사랑해요. 그런데 시인을 본 일이 없어요.

 

만나 본 일도 없고 다만 시를 좋아해서 자꾸 시를 읽으면서 그 시인을 사모했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애를 고 시인과 꼭 같은걸 낳아놨어요. 그래서 남편이 화가 나가지고 이래서 오해가 생기면서 일이 복잡해져요.

 

그래 소설이 되는 거예요. 그게... 이게 환상의 여인이에요. 자 여러분 생각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느 방향으로 생각합니까? ? 누구를 생각합니까? 무엇을 생각하느냐 그것이 바로소망이에요. 그 강하게 소망할 때 그것이 내 몸에까지 작용해요. 내 유전자까지도 움직인다 말에요. 내 건강 내 철학 말할 것 없지요.

 

난 요새 참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조그마한 걱정거리가 생겼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제가 늘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버릇했거든요. 아 도대체 4시 반이 되면은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는 좀 늦게까지 있어도 되는데 4시 반에 일어나가지고 그냥 누웠다 일어났다,

 

불 켰다 껐다 그냥 돌아가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왔어요. 자 이게 항상 나는 새벽에 나가야 겠다 하고 사모하고 생각하니 내 체질이 바꿨어요. 이젠 새벽에 잘 수가 없는 체질이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자 이것이 성품까지 마지막에는 운명까지 바꾸는 거예요. “기다림 그것은 바로 생명력과 같은 것이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 시므온이란 이사람 무슨 장삿속으로, 뭐 출세나 세상적인 것을 기다린 게 아네요. 신령한 것을 기다린 거예요. 또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다린 게 아네요.

 

이스라엘의 위로,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기다렸어요. 그는 자기 방법대로 기다린 것이 아네요. 하나님의 정하신대로 하나님이 정한 스케줄을 따라서 조용히 기다렸더란 얘기에요.

 

그는 메시야의 세대 자유, 평등, 번영 뭐 그런 거를 기다린 게 아네요. 그는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래서 이건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the messiah age, the messiah 이 두 가지는 굉장한 신학적 논란을 벌이는 대목입니다.

 

메시야의 세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메시야를 기다렸단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메시야의 세대만 기다려요.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아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잘못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

 

이 사람은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다렸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기다리면서 먼저 세속생활을 떠났어요. 경건을 찾았어요. 세상의 부귀영화 그런 거 다 버렸어요. 세상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성전에서 기다렸어요.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말로 말하면 교회에서 기다렸어요. 우리는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교회에서 기도하고 어디서나 기다릴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서 교회에서 성전에서 주를 기다리는 거예요. 또한 기다림을 그는 기도로 바꾸었어요. 기다림은 곧 기도였어요.

명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이고 나아가서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기다렸어요. 죽기 전에 네가 메시야를 보리라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시시각각으로 기다렸어요. 몇 년을 기다렸는지 몰라요.

 

이 전설대로 보면 이 사람은 수십 년 기다렸다고 그래요. 정말 계속해서 기다렸어요.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매일같이 성전에 나가서 기도하고 두리번거리면서 아기예수를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기다림의 신앙 이 기다림의 신앙이 아주 귀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무지개 따라가는 애처럼 기다리고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마지막이 문제에요. 약속의 성취가 있어야죠. 기다렸다면 만나야죠.

 

기다렸다면 기다린바가 이루어지는 것을 누릴 수 있어야죠. 이것이 바로 이 시므온의 특별한점이라고 봅니다. 꿈이 꿈으로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꿈이 현실로 바꾸어져야 하지요.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환상이나 dream이나 이것으로 끝날 수는 없어요.

 

이 시므온의 귀중한 점은 아기예수를 만났다는 거예요. 기다렸던 바를 이루었던 거예요. 기다렸던 소원을 성취했다는 것이에요. 기다림, 만남, 그리고 영접, 그리고 행복감. 오늘 본문에 보니 아주 행복해 합니다. 이거 보세요. 난 너무 이 말씀이 아름다워요.

 

주재여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무슨 말입니까? 여러 번 읽어보세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아기예수를 품에 안고, 메시야가 온 것을 눈으로 보면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이제 평안히 가겠습니다.

 

이제는 눈감고 평안히 죽겠습니다그 말이에요. 요샛말로 말하면 이젠 소원이 없습니다”. 소원 다 이루었으니까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메시야를 보는 축복을 누렸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들어왔어요. 그러나 눈으로 본 사람은 몇 사람이에요.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요한이에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복된 사람이고 했어요. 여인이 난 중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했어요. 메시야를 보았으니까... 예언의 성취를 보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시므온은 아기예수를 품에 앉았잖아요.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아무 소원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행복합니다. 이대로 나는 세상을 가겠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에요. 이게 바로 시므온이에요.

 

놀라운 것은 유대사람들이 소위 대망사상 소위 expect거든요.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지요. 간절히 기다렸죠.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긴 하지만 진작 메시야가 오니까 영접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잖습니까?

 

헤롯왕도 기다리더니 아기예수 낳다 는 소릴 듣고 죽일 생각하잖아요. 나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성경을 이렇게 보다보면 그 동방박사 얘기 있죠? 그 동방박사가 예수님 만나러 왔다는데 이거 어디서 만나야하는지 유대 땅 넓은 땅에 알 수가 없어서 헤롯 왕에게 가서 물었더니 율법사들이 말하기를 베들레헴이라고 말합디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루살렘은 소란했다 그랬어요. 소동하더라... 그런데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베들레헴으로 가더라... 그게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들레헴입니다 말해놓고는 저들은 떠들기만 하고 한쪽에서는 죽일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게 바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무서운 사상이에요. 왜요?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헤롯 왕 왕 되신 예수가 왔으면 자기가 내려가야지... 이거 못하겠다는 거예요. 제사장 자기가 지금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시면 자기가 자리를 양보해야 겠거든요.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도 수천 년 동안 기다렸던 메시야이건만 오시는 순간 죽일 생각을 하더라고요. 영접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러니까 기다리기는 하면서도 영접하지는 않아요.

 

기다리기는 하면서도 그것이 구체화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 안에 오시는 예수를 저들은 배척하고 있더란 것이죠.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신학자 어빈 얄롬이란 분이 Existential Psychotherapy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실존적 관심 그 속에는 불안이 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요 둘째는 의미상실에 대한 불안이요 다음에 중요한 게 있어요. 실존을 책임질 필요성에 대한 불안이다.

 

기다렸어요? 그러면 기다리시는 분이 오셨을 때 내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게 책임이 있어요. 어쩌면 직업을 버려야 되기도 하고 어쩌면 생명을 내놓아야 되기도 하고 어쩌면 일생을 다 예수님께 바쳐야 하기도 해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안주함에서 떠나고 일상에서 떠나는 희생을 요구하더란 말예요. 그래 사람들은 불안 해 하는 거예요.

변화를 기다리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거예요. 밝은 미래가 오기를 바라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왜요? 내 몫이 작아질까봐... 내가 잘못될까봐... 이래서 참된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없었더란 말입니다.

 

오늘 시므온은 참 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렸죠, 만났죠, 기뻐했죠, 충만했지요. 이거 놀라운 얘기가 아닙니까?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만족해합니다. 주를 기다려서가 아닙니다. 이제는 현재적 이예요.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거예요.

 

독일에 가면 바실레아 슬링크가 세워놓은 메텔하우스라고 있습니다. 수도원입니다. 이것을 창설한 슈링크의 책 가운데 작은 책자에 사랑의 승리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제가 탐독하던 때가 있습니다. 너무너무 아주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기 때문이에요.

그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의 아주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해서 핍박이 많을 때 교회 장로님 한분이 끌려들어가서 그 많이 맞았어요. 아주 피투성이가 되도록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를 부인하고 전도사업을 중단하면 살려주겠다고 하건만 아니라고... 그는 매를 많이 맞았어요.

 

신앙을 지키느라고 엄청난 매를 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어느 날 갑자기 석방을 했어요. 석방해서 교회로 돌아왔는데 아 모든 교인들이 이를 영접하고 반가워하면서 뻘겋게 묻은 피를 닦았어요.

 

씻어 드렸는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상처가 없고 피로 막 얼룩졌는데 닦고 보니까 깨끗한 거예요. 아 그래서 이거 웬일이냐고 하니까 장로님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는 매 맞을 때마다 스데반을 생각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면 요.

 

그가 계속 스데반을 사모하다보니까 천사의 얼굴이 된 거에요. 자기도 모르게... 그래 석방한거예요. 신비로워서 석방한거예요. 그런데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 상처 난 자리를 이렇게 쓰다듬어 주시더라고 그래요.

 

그런 행복을 느꼈다고... 그런 간증이 교회 앞에서 하는 간증이 책자에 실려 있습니다. 여러분 영접한 사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그리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속에 오늘도 그렇게 주의 위로가 함께하는 것이에요.

 

오늘 성경말씀에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같은 구체적인 은혜 그 거룩한 약속의 성취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크리스마스가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이렇게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주를 기다릴 수 있게 하시고 주를 영접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원컨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사 저 시므온같이 간절하게 기다리고 사모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는 기쁨과 감격 속에 종을 평안히 놓아 보내시니 감사합니다하는 그런 충만한 감격과 기쁨이 있는 그런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1-5/ 곽선희 목사

2014-11-25 20:24:01

 

어떤 어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까지 되었는데 아직도 말을 못합니다.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 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의논을 드렸더니 많은 진찰을 받고나서 이 아이는 충분히 말할 수 있고 혀의 구조나 입의 구조나 모든 면에서 완벽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말을 못하는 것은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여러분 현대인은 모두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스트레스라는 말은 원래 캐나다의 생리의학자인 셀리에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물리학의 개념을 신체반응에 도입한말로 유명한 말이 됐습니다. 스트레스……. 어쩌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렇게 아주 유행한 그런 말이 됐습니다. 그래 막연하게 스트레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이거는 우리 몸에 가해지는 외부적인 압력이나 자극은 엄격한 의미에서 다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 압력과 자극을 우리에게 가해오고 있는데 그러나 어떤 것은 유쾌하고 어떤 것은 불쾌해진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한쪽은 행복이 되고 한쪽은 스트레스가 되는 거죠.

 

여러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가 애무는 뭐고 또 한편으로 욕을 보이는 건 뭡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가까이 올 때에는 애무가 되는 것이구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게 손을 대면 이건 굴욕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지 어떤 물리적 현상이 내게 가해졌느냐의 달린 것은 아닙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셀리에 박사가 처음에 이 이론을 내놓으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해서 500쪽에 달하는 큰 책을 하나 썼어요.

 

출판사에 갖다 줬더니 출판사에서 읽어보고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거든요. 이거 당초에 마음에 안 든다. 너무 분량이 많습니다. 좀 줄여주십시오. 그래서 줄여가지고 30쪽으로 만들었어요. 출판사에서 읽어보고 그래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조금 더 줄일 수 없겠느냐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아예 차라리 책을 내지 말고 한마디로 하죠. 그리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개를 적으로 보느냐 친구로 보느냐에 달린 겁니다.” 여러분 개는 갭니다. 어디까지나……. 저 개를 내가 친구로 보느냐? 적으로 보느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신의 문젭니다. 그래서 그 개를 만날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에 생화학적 반응이 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고 애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당장 무슨 물질적인 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회적 환경을 바꾸어 준다는 그런 내용도 아닙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씀하십니다. 그건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과 생각의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의 하나님과의 관계설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기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른 역사의식을 가져라 은총적세계관으로 생각을 바꾸라 그 말씀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본문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이렇게 중요하고 심오한 말씀을 상대할 때마다 이걸 어떻게 전해야하나?

 

어떻게 하면 이 깊은 뜻을 바로 전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다같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게 제가 고민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무슨 생각 하는 고 하니 내가 국문과를 나왔으면 좋았을 걸…….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하는 그런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여기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역의 때가 지났다.” 복역의 때가 지났다. 이 한마디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세요. 복역이란 게 뭡니까? 죄수로서의 징역살이를 말하는 거예요. 복역에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감옥에 거저 간 거 아녜요. 이유 있어서 간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문제는 감옥살이를 어떻게 어떤 의미로 보내느냐 하는 거죠. 여러분 아시는 대로 감옥에 간 사람들 참 여러 가집디다. 제가 이 안양교도소에 가서 요새는 자주 못갑니다.

 

자주 갔거든요. 그때 가서 설교할 때 그 교도소에 갈 때에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답니다. 그 성가대를 같이 좀 데리고 가는데 내가 꼭 부탁합니다. 돌아와 부르지 말라고……. 돌아와 돌아와 하는 거 그거 부르면 영 스트레스가 쌓인대요. 안됩니다.

 

내가 누군데 돌아오고 말고 하냐 이거예요. 아 대단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을 죄인취급하면서 아 불쌍한 사람들 하면 더 안 됩니다. 화를 내고 소리 지릅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되나? 제가 그 안양교도소에 가서 비교적 인기가 좋아요.

 

왜냐? 저는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원래 큰 죄인은 밖에 있고 작은 죄인은 감옥에 있는 겁니다.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당신들이 대표적으로 여기 와 있는 거지……. 이런다고…….

아 그러면 아멘 스트레스가 딱 풀어져요. 그 다음에 설교를 해야 들어가 먹지 거기 복역하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사람 백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복역이란 게 뭡니까? 알거나 모르거나 이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의 생활 우리 현실이 복역이란 거예요. 우리 죄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거예요. 내 죄 때문에 내가 당하는 거예요.

 

내가 당하는 이 현실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역적인 스트레스란 말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강한 능력에 의해서 이 사건이 있어진 것이다. 그런고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은 없다. 우연한 사건은 없다. 내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오로지 필연이 있을 뿐이다. 그 속에 말씀이 있다. 특별히 자연적 현상은 더더욱 없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 무슨 말입니까?

 

변증법적 변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보다가 공산당을 만든 겁니다. 자 여러분 변증법적 변화가 아니고 그 속에 도덕성이 있고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징계 저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 속에서 구체화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런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린아이를 잘못했다고 때렸어요. 처음에는 아 나죽는다. 또 때리니까 아 나 아프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벌떡 일어나가지고 맘대로 때려.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냐?”그러더래요.

 

이놈을 때릴까요? 말까요? 매일 의미가 있는데 매가 지금 빗나가고 있잖아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이 매속에 깊은 사랑이 있어요. 그 사랑의 의미를 알 때부터 철이 나는 거죠. 그때부터 철이 난거예요. 잊지 말아야 됩니다.

 

쇠는 연단해야 됩니다. 쇠는 불속에 넣어가지고 꺼내가지고 때립니다. 때려서 찌꺼기를 제하는 거예요. 찌꺼기를 제하고 제하고…….

 

제가 어느 공장에 가서 일을 한번 해봤는데요 아 대단합디다. 40톤짜리 햄마가 떨어집니다. 쇳덩이리가 꽝하고 떨어져서 쇠를 때리고…….

저는 그 과학은 잘 모릅니다만 한번 설명을 들어보니까 이렇게 쇠를 때리면 찌꺼기가 눈에 안 보이는 찌꺼기가 나가고 찌꺼기가 나가고 그래서 강한 쇠가 되고 또 쇠의 분자와 분자가 가까이 더 가까이 가까이 붙어놓으면 그래서 가장 강한 쇠가 된다는 것이죠.

 

자 복역의 때가 지났다. 하나님이 역사해서 징역살이를 하게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과정이 끝났다. 그래 제가 보니까 때를 말하고 있어요. 복역의 때 그 기한이 있다는 거예요. 나는 몰랐지만 하나님께는 기한이 있어요.

 

정해주신 기한까지 이제 그 때가 지났으니 이제는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 이제 율법의 시대가 아니고 은혜의 시대예요. 매 맞는 시대가 아니고 이제는 용서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62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은혜의 날이다. 은혜를 선포하는 거예요. 은혜와 용서를 선포하는 거……. 여러분 그것이 바로 위로예요. 이 위로의 때가 된 것이죠.

 

어떤 아이가 하도 말썽을 부립니다. 하루도 성한 날이 없습니다. 그저 언제나 이마가 터져가지고 들어오고 남의 집 아이를 때려서 또 병원에 데려가고 도대체가 성한 날이 없어요. 엄마는 얘가 들어설 때마다 짜증을 냈어요.

 

또 싸웠냐? 또 싸웠냐?” 견딜 수가 없어서 상담하는 목사님을 찾아갔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내가 볼 때는 애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얘가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문제아는 없습니다. 문제의 어머니가 있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를 깊이 새기고 돌아와서 깊이 기도하고 회개하고 뉘우쳤습니다. 또 이마가 터져가지고 들어왔어요. 전에 같으면 또 싸웠냐?” 그럴 텐데 , 얼마나 아프냐?

 

야 그거 한참 걸리겠다. 많이 아프겠다.” 그리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더니 얘가 정색으로 하는 말이 오늘은 싸운 거 아녜요. 내가 넘어진 거예요그리고 그때부터 착한아이가 됐답니다.

위로, 오직 위로만이 사람을 바꾸는 거예요. 운명을 바꾸는 거예요. 은혜의 날을 선포해야 돼요.

 

헤밍웨이의 단편모음집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스페인에 엄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역시 엄한아버지의 대표적인 분이였다. 아들이 견디다 못해서 가출을 했어요. 물론 아들이 잘못한거죠. 그리고 마드리드로 가서 아들은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를 좀더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데 대한 가책도 있고 많은 또한 괴로워하다가 결심하고 아들을 다시 용서하고 불러들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파코였습니다.

 

파코, 화요일 오정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이렇게 신문에 간단하게 광고를 냈는데 그 시간에 나가보니까 무려 800명이 모였더랍니다. 파코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에요. 용서받아야할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800명이 있더랍니다.

 

여러분, 오늘도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총적 용서를 기다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로 군상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받고 용서를 선포하고 용서를 확증하는 것 이것이 위로입니다. 이것만이 위로입니다.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복역은 끝났다. 이제는 은혜의 때가 온다. 진노의 자식이 아니요 은혜의 자식이며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을 살게 되었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위롭니다.

 

여러분 최고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최고의 은총은 사죄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참으로 큰 은혜는 하나님 온전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참 위로는 용서와 사죄뿐입니다. 복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용서받은 자로 은총 받은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는 길이라고만 하는 길이라고 하면 무엇을 마다하겠습니다. 그런고로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뉴욕의 어느 날 겨울에 눈이 하얗게 왔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신발가게 앞에 눈 위에 맨발로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열장안에 있는 신발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본 어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차를 멈추고 그의 손을 잡고 가게 문을 들어서서 그리고 양말10켤레를 사서 그 손에 들려주고 주인에게 부탁해서 세수 대야에 뜨거운 물을 담아오라고 해서 담아다가 손수 그 아이의 얼어붙은 발을 다 닦아주었습니다.

 

깨끗이 씻어주고 양말을 신기워 주고 예쁜 구두하나를 해서 주었습니다. 양말 10켤레를 주어서 자 이제 올겨울에는 이것을 신고 따뜻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얘가 하는 말이 나는 밖에서 저 구두를 내게 주십시오. 하나님, 하나님께 지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줬구먼요. 그리고 이 어린아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주머니는 하나님의 부인이신가 봐요?” 여러분 참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더 이상 비판할 것도 없고 왜 그랬느냐고 물을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 이였냐고 비판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바로 사죄를 선포하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복역의 때는 지났다. 이제는 은총이니라. 말씀하십니다.

 

현실 속에서 이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게 향하신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총의 계절입니다.

 

 

-기 도-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시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성탄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확인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분명 우리가 복역의 때를 다 보내고 이제는 은총의 아침을 맞는 그러한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위로와 긍휼 /49:8-16/ 김기석목사

2016-06-04 14:33:36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구원해야 할 때가 되면,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겠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날에는, 내가 그 간구를 듣고 너희를 돕겠다. 내가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겠으며, 너를 시켜서 뭇 백성과 언약을 맺겠다.

 

너희가 살던 땅이 황무해졌지마는, 내가 너희를 다시 너희 땅에 정착시키겠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는 '나가거라. 너희는 자유인이 되었다!' 하고 말하겠고,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밝은 곳으로 나오너라!' 하고 말하겠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먹거리를 얻게 할 것이며, 메말랐던 모든 산을 그들이 먹거리를 얻는 초장이 되게 하겠다.

그들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무더위나 햇볕도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기 때문이며, 샘이 솟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만들고, 내 백성이 자유스럽게 여행할 큰길을 닦겠다. 보아라, 내 백성이 먼 곳으로부터도 오고, 또 더러는 북쪽에서도 오고, 서쪽에서도 오고, 아스완 땅에서도 올 것이다.

 

하늘아, 기뻐하여라! 땅아, 즐거워하여라! 산들아, 노랫소리를 높여라.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또한 고난을 받은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는구나.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

 

주현절 후 4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부디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늘의 평강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28일 우리는 기가 막히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함께 예배하며 찬양대를 지휘하셨던 우리 청파의 지휘자 윤주원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겨우 쉰다섯 해 사셨습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부름 받아 가시느라, 이별의 말 한 마디 못 나눴습니다. 유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청파 공동체의 충격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서로에게 온전한 위로를 나눌 수 없다는 걸 느낍니다. 부디 유가족에게 하늘 아버지의 위로하심과 긍휼하심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 날 밤 저는 아직 빈소를 마련하지도 못한 유가족을 뵙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터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이었기에 길이 막힐 이유가 없는 곳이건만, 차들은 거북이 걸음이었습니다. 추돌사고가 났나 싶었지만, 터널을 다 빠져나와 속도를 다시 회복할 때까지, 그 어떤 사고나 공사도 볼 수 없었습니다.

 

어두컴컴하고 이유를 알 수 없이 답답한 그 터널이 꼭 그 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방이 욱여쌈을 당하여 뚫고 나갈 구멍 하나 없고, 도무지 그 이유조차 헤아릴 수 없어 가슴이 먹먹했으니까요. 주님, 어떻게 이러셨나요? 저희는 어찌해야 하나요?

 

주전 6세기 중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슷한 아픔과 질문 속에 있었습니다. 영원히 이어지리라 여겼던 다윗 왕국이 무너졌고, 야웨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습니다.

 

개개인의 삶의 터전은 황량함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폐허일망정 고향에 살고 싶은 소망은 무참히 구겨졌습니다.

아버지의 땅, 조상 대대로 물려내려온 땅, 공동체가 굳건히 삶을 견지했던 땅을 뒤로 하고, 먼 이방의 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한 해 두 해 그리고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묘사하는 그들의 현실을 살펴봅시다. 우선 그들은 황무해진 땅 위에 서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 어떤 것도 새로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무심한 바람 소리만 윙윙거립니다.

 

또 그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습니다. 원하는 곳으로 자유로이 다닐 수 없습니다. 내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영혼조차 짙은 어둠 속에 갇혔고, 도무지 숨을 쉴 수조차 없습니다.

 

발바닥 아래는 폐허요, 사방은 꽉 막혀 있으니, 그 마음이 회한과 탄식으로 시커멓게 타들어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넋을 놓은 채 널브러져 있다가도, 한편으론 앞으로 다가올 고통과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깜깜한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바스러질 것 같은 존재가 그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2이사야가 등장합니다. 그는 외칩니다.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40:1)

하나님께서 이제 전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시려고 한다는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겠다는 선포입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날에는, 내가 그 간구를 듣고 너희를 돕겠다.

내가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겠다.” (49:8)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히 신뢰할 때, 그들은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 갇힌 그들에게 나가거라. 너희는 자유인이 되었다!”(49:9) 말씀하십니다.

어둠 속에 갇힌 그들에게 밝은 곳으로 나오너라!”(49:9)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이 말씀으로 감옥 안에서도 자유의 빛을 보게 되고,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의 선포는 짙은 어둠에 한 줄기 환한 빛을 선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서 짙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깨시고, 빛을 허락하셨습니다.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즐비한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안심시키려고 달콤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안팎의 악한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새 숨결을 불어넣으십니다.

하나님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 있는 말씀으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뢰할 만한 존재의 진심어린 위로의 말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그를 환하게 만드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작년 초 제 아내의 몸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많은 분들이 위로해주셨습니다. “목사님, 어떡해요. 그래도 제가 정말 많이 기도할게요. 사모님 좋아질 거예요.”하시며 제 손을 잡아주신 할머니 권사님의 진심어린 위로.

 

목사님, 내가 어떡해서라도 사모님 꼭 고칠거야.”라시며 힘을 주어 잡아주시던 장로님의 위로. 작년 한 해 저와 제 아내는 평생 가장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몸으로 겪었습니다.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들은, 아무리 투박하게 표현되더라도, 그 안의 사랑과 진심의 에너지로 인해, 크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분들의 위로와 기도로, 저희 부부는 오늘도 숨을 쉬며 이곳에 살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은 허공에 부서지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 소망과 힘을 공급하셨습니다.

 

오늘 이 순간 짙은 어둠 속에 있는 분이 있으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곁 가장 가까이에서 울부짖고 있는 이들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전하십시오. 더 나아가 이 시대의 아픔 속에서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늘의 위로를 성심껏 전하십시오.

 

이사야 당시나, 지금 이 시대에나,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위로는, 온갖 알 수 없는 고통과 억울한 아픔 속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위로할 수 있습니다.

 

새롭고 희망찬 상황으로의 전환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고 이웃을 향해 전한 위로가 능력을 발휘하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위로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몸소 움직여 일하십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먹거리를 얻게 할 것이며, 메말랐던 모든 산을 그들이 먹거리를 얻는 초장이 되게 하겠다. 그들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무더위나 햇볕도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기 때문이며, 샘이 솟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만들고, 내 백성이 자유스럽게 여행할 큰길을 닦겠다.”(49:9b~11)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겠다고, 이제 자유인이 되어 밝은 곳으로 나가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신 뒤에, 먹고 마실 거리 또한 당신께서 제공하십니다. 쉴 곳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들이 다닐 길을 닦으십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직접 개입해 주십니다. 위로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길을 떠난 이가 도중에 쓰러지지 않고 마침내 이스라엘 땅에 귀향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십니다.

 

육체와 자연 환경이라는 제한을 지닌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실제적으로 도우심으로써, 당신의 위로의 말씀을 긍휼하신 행동으로 완성해 나아가십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란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앤과 하워드에게는 곧 8살 생일을 맞이할 아들 스코티가 있습니다. 소설은 엄마가 아들의 생일 케이크를 주문 예약하고, 그 아이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의사는 그 애가 곧 깨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며칠간의 검사와 치료 끝에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미리 주문 제작해두었으나 찾아가지 못한 생일 케이크 때문에, 빵집 주인은 밤에 그 집에 전화를 했고, 그로 인해 그들 사이에 오해가 생깁니다. 부부는 빵집으로 찾아가서, 사연을 모르는 빵집 주인에게 케이크의 주인공 8살 스코티가 죽었음을 분노 섞인 목소리로 알립니다.

 

그 때, 빵집 주인은 하던 일을 멈춥니다. 그는 그들을 위해 탁자를 치우고, 부부를 앉히고,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아들을 불시에 잃은 부부 앞에서 빵집 주인은 뭘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그는 커피와 막 구운 계피롤빵을 가져와서,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고 말합니다.

 

그들 셋은 한밤중에 시작하여, 희미한 새벽 햇살이 비칠 때까지 먹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소설은 곧 8살 생일을 맞이할 소년의 뺑소니 사고라는 아이러니 가득한 어둠에서 시작했지만, 희미한 아침 햇살이 그들 위로 비치는 장면으로 맺습니다.

 

그 변화의 과정 한가운데에는, 자기 일을 멈추고 자리를 마련하여 따뜻한 커피와 계피롤빵을 대접한 긍휼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조심스레 건넨 작은 초컬릿 한 조각이 큰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려봅니다.

수줍게 내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시작된 사건은, 단순히 오천 명의 배를 채운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채워졌고, 그들의 영혼이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큰길을 따라 동서남북 사방에서 고향땅으로 돌아올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로 살뜰히 보살피십니다.

 

위로의 말씀으로 그들의 가슴에 희망의 빛을 비추기 시작하셨다면, 긍휼하신 돌보심으로 집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마침내 고향 땅에 이르게 해주셨습니다.

 

2이사야는, 절망의 어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위로의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이 그들 사이에 한 줄기 빛으로 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여전히 젖먹이 어린아이(49:15)라는 걸 아시나 봅니다.

혼자 일어나기 힘겨워하는 아이 곁에 서시고, 그 아이의 먹고 마실 걸 공급하시고, 그 아이가 쉴 공간을 마련하시고, 그 아이가 큰 길로 기운내 걸어가도록 도우십니다.

 

거창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다시 희망을 회복하고 발돋움하려는 존재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작은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긍휼과 사랑은 작더라도 아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전해지는 법입니다.

 

우리 곁에는 위로받고 다시 막 일어서 보려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사 고레스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거리, 마실 거리, 쉴 곳, 큰 길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발돋움하려는 이들에게 긍휼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가 닿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고, 우리를 위해 신실하게 일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픔 가운데 있는 이웃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고, 그들을 위해 작은 사랑의 수고를 행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부디 슬픔과 애통, 고통과 상처, 소외와 억울함의 어둠 속에 있는 모든 분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새 희망을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긍휼하신 역사하심 가운데 마침내 광명의 땅에 당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의 말과 긍휼의 행동을 어둠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로 전하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또한 고난을 받은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하늘아, 기뻐하여라! 땅아, 즐거워하여라! 산들아, 노랫소리를 높여라.”(49:13)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한 줌 흙의 위로 /왕하5:15-19/ 김기석목사

2021-08-12 03:28:43

 

[나아만과 그의 모든 수행원이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와, 엘리사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예언자님의 종인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섬기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을 수가 없소" 하고 사양하였다.

 

나아만이 받아 달라고 다시 권하였지만, 엘리사는 끝내 거절하였다. 나아만이 말하였다. "정 그러시다면, 나귀 두어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예언자님의 종인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예언자님의 종인 저는, 이제부터 주님 이외에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제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예언자님의 종인 저를 주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모시는 왕께서 림몬의 성전에 예배드리려고 그 곳으로 들어갈 때에, 그는 언제나 저의 부축을 받아야 하므로, 저도 허리를 굽히고 림몬의 성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림몬의 성전에서 허리를 굽힐 때에, 주님께서 이 일 때문에 예언자님의 종인 저를 벌하지 마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말하였다. "좋소,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렇게 하여 나아만은 엘리사를 떠나 얼마쯤 길을 갔다.]

 

한계상황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모처럼 예배당이 외로워 보이질 않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을 살피긴 어렵지만 우리는 이 시간을 간절히 기다려 왔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지음 받은 이들이 함께 모여 찬송과 기도를 바치는 시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시간이요, 지친 영혼에 생기를 채우는 시간입니다. 힘드셨지요? 아직은 팬데믹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마치 긴 터널 저편 출구에 어린 빛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요즘입니다.

 

삶을 돌아보면 예기치 않은 일의 연속입니다. 평온한 일상의 흐름을 깨뜨리고 들어와 우리 삶을 뒤흔드는 일들이 간간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사건과 사고는 당사자들의 삶도 어렵게 만들지만, 가족들의 삶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곤 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방어 운전을 한다 해도 부주의한 다른 운전자로 말미암아 사고가 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겪어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능력으로 잘 해결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도 참 많습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어떤 일에 직면하여 우리 일상에 파탄을 일으키고 ,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고, 삶이 뭔지를 묻게 되는 극한의 상황을 일러 한계상황이라 했습니다.

 

투쟁, 죽음, 죄책, 질병, 우연 등이 그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한계상황과 만날 때 비로소 자기 삶을 돌아보고, 애집하고 있던 것들로부터 해방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중병에 걸렸다 회복된 이들 가운데 옛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을 더러 보았을 것입니다.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치던 삶에서 벗어나 가족들과의 시간을 더 누리려 하고, 주변에 있는 이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한계상황에 직면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시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입니다. 성경은 그를 왕이 아끼는 큰 인물‘, ‘존경받는 사람‘, ‘강한 용사로 소개합니다. 시리아 사람들에게는 영웅적 인물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결코 긍정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두 나라는 적대 관계에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영웅적 인물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일종의 한계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받아보았겠지요. 그러나 차도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에서 잡혀와 나아만의 아내의 시중을 들던 소녀가 말했습니다.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왕하5:3)

 

인생의 가장 참담한 상황 속에 있었던 한 소녀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던 남자를 측은히 여겼던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나아만은 그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었기에 왕에게 가서 허락을 구했습니다. 왕은 기꺼이 허락했고,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한 통 써주었습니다. 나아만은 은 열 달란트, 금 육천 개, 옷 열 벌 가지고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그는 가서 시리아 왕의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했습니다.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주시기 바랍니다.“(왕하5:6)

 

그 편지를 받아 든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 왕이 트집 잡아 싸울 기회를 찾기 위한 수작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표현은 정중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국력이 강했더라면 코웃음치며 편지를 찢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왕은 당혹감 속에서 전전반측하고 있었습니다.

 

의전 문제 때문에 화를 내다

왕이 옷을 찢으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문이 엘리사에게 들려왔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더불어 초창기 예언운동의 대표격인 사람입니다. 그가 행한 이적은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에 버금갈 정도였습니다. 엘리사는 왕에게 그 사람을 자기에게 보내달라 청하면서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방도가 없었던지라 왕은 나아만을 엘리사에게 보냈습니다.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당도했습니다. 과시적 행동입니다. 그는 한계 상황 앞에 서 있으면서도 허세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환을 시켜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몸이 깨끗하게 될 것이라는 전갈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화가 난 그는 부하들에게 돌아가자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왕하5:11)

 

그는 엘리사가 의전(儀典)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화를 내고 있습니다. ‘도리라는 말이 참 묘합니다. 그는 스스로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껏 사환을 보내 요단 강에서 목욕을 하라 하니 화가 단단히 났던 것입니다. ‘목욕을 해서 될 일이라면 시리아에도 좋은 강이 있지 않은가?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요단 강에 견줘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 그가 식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나아만을 설득하려고 애썼습니다. 만일 예언자가 훨씬 더 어려운 요구를 했다면 응하지 않았겠냐면서 밑져야 본전이니 목욕을 해보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마지못해 요단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담그며 목욕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오만함을 내려놓자 생명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경외심에 사로잡혀

경외심에 사로잡힌 그의 앞에 비로소 엘리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아만은 더 이상 의전 규칙이나 도리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합니다.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왕하5:15)

 

나아만은 더 이상 군대와 병거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세력을 과시하고, 특별 대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도리를 따지며 화를 내던 그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의 세계를 경험했기에 그는 자기의 작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예언자의 종으로 지칭하며 준비해 온 선물을 받아달라고 엘리사에게 부탁하지만 선지자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뜻밖의 부탁을 합니다. 나귀 두어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가져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흙은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 받아들여졌던 기억의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권한 것도 아닌데 그는 주님 이외의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제를 드리지 않겠다 다짐합니다. 그는 자기 삶의 자리인 시리아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의 영혼의 고향은 요단 강인 셈입니다. 흙 한 줌의 위로를 느낀 적이 있으신지요?

 

사회학자이고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신 한완상 선생님의 미간행 저서 교정본을 읽다가 참 감동적인 이야기와 만났습니다. 한 선생님은 1962년 가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스승 이상백 선생님이 마련해 주신 여비로 샌프란시스코까지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거기서 동부인 애틀랜타까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꼬박 사흘 걸려 에모리 대학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기숙사에서 짐을 푸는데 캐리어 깊숙한 곳에서 비닐봉투가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보지 못한 것이어서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뜯어보니 헝겊이 나왔고, 그곳에는 종이쪽지 한 장과 흙 한 줌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완상아, 고향 생각나면, 이 흙냄새를 맡아보아라. 이 흙은 우리집 마당 흙이다. 조상들의 뼈와 피가 묻혀있는 조국 강산의 흙이다. 조상들의 넋이 이 속에 스며있다. 부모, 형제, 자매의 사랑이 흙속에 녹아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이 흙 속에 담긴 사랑의 힘으로 잘 이겨내고 값진 배움의 삶을 살아라.“(한완상 시대 증언집, <예수, 숯불에 생선을 굽다>, 동연, p.7[근간])

 

아버지의 마음이 그의 존재 전체에 와 닿았습니다. 유교적 절제가 몸에 늘 배어있어서 평소 당신의 깊은 정을 자식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으셨던 부친이셨기에 이 쪽지는 청년 한완상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무려 60년 전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 한 줌의 흙이 그의 고단한 유학생활을 지탱해준 보이지 않는 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흙 한 줌은 마치 성사의 도구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려 주었을 것이고, 그를 시대의 증언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일깨우는 도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만도 엘리사에게 청하여 가져간 그 흙을 보며 자기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을 것입니다.

 

변화된 일상

나아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경험했지만, 그가 살아야 했던 곳은 시리아였고, 대장군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사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수도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살면 됩니다.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생업을 그만 두고 목회자가 되면 큰일입니다. 차라리 자기 삶의 자리를 소명의 자리로 알아,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행하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하면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직업을 소명이라 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고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밥벌이에 무능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살전4:11-12)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역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복음 전파자의 소명 또한 감당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하느라 안간힘을 다하기도 합니다.

 

일도 힘들고,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때려치우고 싶은 때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까운 세월만 묵새기고 있는 것 같아 조급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자기 건강을 현저히 해하는 일이라든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라면 가급적이면 빨리 떠나는 게 좋습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자기 자리를 소명의 자리로 여길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면 의외로 할 일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아만은 대장군으로서의 자기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야훼 하나님만을 믿게 된 사람으로서 느끼는 괴로움을 엘리사에게 털어놓습니다. 시리아 왕의 신하이기에 그는 왕을 모시고 림몬 신전에 들어가 허리를 굽힐 때 주님께서 그를 벌하시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런 현실을 수긍합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가라고 말합니다. 신앙을 빌미로 사람을 벼랑으로 내모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앙은 결단임이 분명합니다. 결단의 때가 무르익으면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지 않았다면 느긋하게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그 후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절대의 세계 앞에 서 본 사람으로서 자기 한계를 명확히 자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요단 강가에서 가져간 흙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흙을 보며 자기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를 늘 자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것 말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경험의 현장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가 곧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현장이 되기를 빕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은 우리를 통해 망가진 세상을 고치려 하십니다. 그 아름다운 뜻을 기쁨으로 받들 수 있기를 빕니다. 서 있는 삶의 자리 바로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주변을 따뜻한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이 물결처럼 번져가기를 소망하십시오. 한 주간 동안 우리의 삶이 그런 사랑의 울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절망의 광야에서 피어난 꽃 위로’ /40:1-/ 김병삼목사

2023-04-18 03:22:30

 

이스라엘이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가고 있을 때, 거짓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광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고난의 광야가 아닌 절망의 광야

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던 때, 가장 어려운 시간을 지나가던 때 예레미야와 이사야 선

지자는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슈브인데, 이사야서에만 50회 이상, 그리고 예레미야와 예레미

야애가에는 11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

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55:7)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

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서 살리라 (25:5)

아마도 이스라엘은 고난의 광야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고난은 힘겨운 것이니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개의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가 인생에서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들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고난의 광야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회개하라고 소리쳤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나라를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을 무도한 바벨론이 치리라는 것을 믿을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돌이키는 아픔의 광야를 거부했습니다.

 

무서운 사실은 고난의 광야를 거부한 이스라엘에게 절망의 광야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광야는 우리가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현명하게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거부한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절망의 광야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결코 고난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했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이 멸망

절망의 광야에서 피어난 꽃 위로

절망의 광야로. . .

했고 고난의 광야로 들어 갔습니다.

아니, 고난의 광야를 거부했던 이스라엘에게 고난은 절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주 절망적인 말을 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면 그 땅의 왕을 잘 섬기라고 말이죠. 돌아올 생각이랑 말고 그 땅에서 집

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라고, 결호도 하고, 자식도 낳고, 손자 손녀도 보고 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 277절에 보니,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다 차면 너희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광야로 인도하실 때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지은 죄의 형벌의 대

가를 받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빨리 광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간이 끝나

기까지 광야의 시간을 견디고 새로워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그 절망의 시간이 70년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요셉처럼 13년의 시간일수도, 누군가에게는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르

렀던 40년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4분의 1을 양을 치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광야에 들어가게 됐던 사연이 다 다르다는 것이고,

그 광야에 들어가게 하신 이는 하나님 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까지는 광야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고난의 광야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광야가 됩

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절망의 광야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그 곳에서 지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이사야서를 보겠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서는 크게 2부분으로 나눠집니다.

 

39장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멸명과 더불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게 될 절망의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40절부터는 완전히 다른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비록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지만 회복시

키실 하나님의 계획이 선포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절망의 광야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들리는 회복의 메시지야 말로 광야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미 절망의 광야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당하지 않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절망의 광야에서 많이 후회하고 있을 것이며, 왜 그 자리에서 절망

스러워 해야하는 지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위로 회복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주시기 시작하십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에서 보았던 것처럼,

로뎀나무 아래 있는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와 만지심입니다.

재촉해서 사역의 길을 가거나, 지금 잘못했으니 회개하라는 꾸지람보다 하나님께서 지금 함께

하셔서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보다 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가장 큰 위로일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914절 말씀.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무엇이 위로가 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아는 것은, 무엇이 절망적인지를 아는 것이죠.

포로로 잡혀가 이방 땅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절망적인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1, 2년 혹은 3년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5

1020년이 흐르는 동안 응답이 없자, 잊혀진 것은 아닌지 겁이 나지 않았을까요?

혹시. 톰 행크스가 주연했던 [캐스터 어웨이]란 영화를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무인도에 표류한 채로 4년을 지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죠.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가 나타나

지 않자 불안해하죠. 자신이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까봐, 결국 무인도에서 배구공에 사람모양

을 만들고 윌슨이라 이름붙이고 대화를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영원히 혼자

잊혀진 존재가 될까봐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이사야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

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아마도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은 이사야 4915절의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비록 절망의 광야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 같은 암울한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단지 때를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심히 타락하고 범죄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가운데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시고

있을까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받아야하는 어떤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절망의 광야에서 무기력한 존재로 살아가지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절망의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노래했던 것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고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란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음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 께로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란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순종의 길]이라는 책에 보면 오스왈드 챔버스의 청년시절 에딘버러 대학에서 말씀을 전하는 허드슨 테일서에

게서 받은 감동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난 밤에 허드슨 테일러는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 당신 자신의 신

실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라는 뜻으로 말해 주었다.

 

챔버스는 크리시에게 지금 정말 평안해, 하나님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져, 계속 기다리면 하나님께

서 문을 열어주실 거야라고 편지했다.

내려놓음이란 신뢰의 표현이지, 고생이 끝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 “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 께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 께로다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 께로다

이사야 4028-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

니 독소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라

여기에서 앙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바라고 합니다. 기대하고 기다리며 바라본다는 뜻

이죠.

절망의 광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기다려도 도움이 오지 않는 절망감과 무기력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

라는 것입니다. 절망의 시간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

입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거나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그렇죠. 길이 보이지 않는 것 말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마치 사막에 길을 내

는 것과 같다고 말이죠.

그러면 길을 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이사야 40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아주 좋은 비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광야를 지나고 있는 우리들이 여호와를 앙망할 때 대로

가 놓입니다.

길을 놓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높은 곳은 낮게, 낮은 곳은 높게, 그리고 굽은 곳은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이 임하시고, 하늘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절망의 광야에서 대로가 놓일 때,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사야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오스왈드 챔버스의 전기인 [순종의 길]을 읽다보면 아주 인상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챔버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는 것은 내어드리는 삶으로 표현하고 있습

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내어드리려 하지 않습

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숙련된 구조자는 곧바로 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힘을 쓰면 쓸수록 모두가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구하려면,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구조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으로 이것, 저것을 하려고 든다면, 하나님은

아마도 가만히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절망적일정도로 지친 후에야 비로소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챔버스가 하나님께 자기를 내어드리는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목회자나 선교사들에게 찾아오는 어려움은 경제적인 어려움일 것입니다.

챔버스 역시 경제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는데, 그런 불안한 삶을 대하는 챔버스의

태도가 참 인상 깊습니다. 비디와 혼인한 후 사역을 위해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배 위에서, 돈도 없고 집도 없는 상황에 놓여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하는 챔버스의 자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다음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누구보다 자기의 불안한 미래를 고민하며 염려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에 파견을 가서 전쟁의 한 복판에서 사역할 때도 이런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p.367)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기를 거절한다는 좌우명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그는 아무런 염려 없이 하루를 기쁘게 맞이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아래 보냈다.

어떤 사람은 걱정과 염려에 지배당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 삶에서 걱정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챔버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걱정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염려하기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삶의 모든 영역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인 것입니다.

 

 

 

환란 중에도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 /86:1-17/ 유기성목사

2017-06-12 22:40:45

 

86:1 주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입니다. 2 그러나 나는 신실하오니,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을 신뢰하는 주님의 종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3 내가 온종일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4 주님, 내가 진심으로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주님의 종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십시오.

 

5 주님, 주님은 선하시며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누구든지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6 주님,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7 주님은 나에게 응답해 주실 분이시기에, 제가 고난을 당할 때마다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8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9 주님께서 지으신 뭇 나라가 모두 와서,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10 주님은 위대하셔서 놀라운 일을 하시니, 주님만이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11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 12 주 하나님, 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렵니다. 13 나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 크시니, 스올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내 목숨을 건져내셨습니다.

 

14 하나님, 오만한 자들이 나를 치려고 일어나며, 난폭한 무리가 나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주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15 그러나 주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분이십니다.

 

16 내게로 얼굴을 돌려주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17 은총을 베풀어 주실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나를 돕고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의 핵심은 기도입니다.

기도의 눈이 뜨이면 신앙생활은 너무나 쉽고 감격스럽습니다.

 

86편은 다윗이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86:1 주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정말 구원해 주십니까?

이런 체험과 간증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을 당하여 기도했지만 언제나 해결 받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사람, 나와서 말해 보라고 하면 기도 응답받았다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다윗도 기도할 때, 즉시 다 응답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기도도 응답받지 못한 상태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86:1 ... 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입니다.

:3 내가 온종일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6 주님, ...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응답이 없을 때, 믿음이 무너집니다. 신앙생활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고통 중에 기도하였고,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이지만, 그는 한 결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양하며 친밀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다윗의 기도인 시편 86편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눈물이 맺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귀하고 아름다웠고, 부러웠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인다.’ 고 표현하였습니다.

86:1 주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

하나님께서 몸을 뒤로 젖히고 위엄 가운데 그래, 무슨 말인 말해 보거라하셔도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하나님은 귀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응답 여부를 떠나서 너무나 감사하지 않습니까?

 

다윗의 기도에는 구절구절 이런 친밀함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2 ...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

너는 내 친구야’, ‘우리 아버지예요’, ‘우리 교인이예요하는 느낌 아시지요? 다윗에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4 주님, 내가 진심으로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

우리가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다윗의 기도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구조나 문장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의 기도 속에 담겨 있는 변함없는 하나님에 대한 친밀함입니다.

 

다윗은 :1-:2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실하오니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신실하오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의 신실함이란 무엇입니까? 형편이 좋을 때나, 말할 수 없이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5 주님, 주님은 선하시며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누구든지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만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오히려 원망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다윗은 너무나 어려운 형편에서도 고백했습니다.

 

:8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12 주 하나님, 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렵니다.

:13 나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 크시니

 

다윗은 고난 중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던 것이 깨달아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5 그러나 주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더욱 나아갑니다.

:16 내게로 얼굴을 돌려주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어린아이가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을 자기에게로 돌리려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다윗은 환란 중에도 어떻게 이처럼 신실할 수 있었을까요?

시편 86편 마지막에서 다윗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17 ...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나를 돕고 위로하셨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환란 중에 있었고 기도한대로 당장 해결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윗의 기도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이 악한 자를 내버려 두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만 계신 것 같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잠잠히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서 기도하는대로 이루시지 않으시더라도 반드시 이길 힘을 주시고 인내할 힘을 주시고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위로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분명한 위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주심을 아는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렇게 집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하였지만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총리가 될 때까지 이길 힘을 얻은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였다가 이세벨 여왕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세벨을 여전히 살려 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로서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도망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는 너무나 원통하고, 답답하여, 차라리 죽고만 싶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하고는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다 응답하지는 않으셨지만 내버려두시지만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망과 낙심에 빠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지며,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구운 떡과 물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40주야를 달려 호렙 산에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입니다.

 

큰 어려움에 빠진 한 여 성도가 기도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무슨 기도를 원하십니까?” “어려움이 많아 기도할 것이 많지만 한 가지만 응답받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가족 양육교재 9단원의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 마음에서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고백한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부른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말씀을 듣고 찬양할 때, ‘은혜가 느껴진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책망이 마음에 느껴진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계속하여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마음에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싶은 거룩한 소원이 있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친구와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항목들은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성경 말씀으로 확인시켜주는 것들입니다.

 

그 성도는 한 말씀 한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얼굴이 달라졌습니다. 큰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였는데요?”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과 동행하고도 한동안 깨닫지 못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습니다.

이미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눈이 뜨이지 않아서 주님을 보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주님의 초청을 받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자기 스스로 이 자리에 온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불러 주셔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여러분이 왕궁으로 오라고 초청을 받았다면 왕궁 문을 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왕궁 안에 들어오라고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살자고 부르신 것입니다. 만약 왕궁으로 초청을 받고도 왕궁 문 앞에만 왔다가 돌아가는 자가 있다면 너무나 안타깝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정도에서 그치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모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왕궁 문 앞만 구경하지 말고 왕궁 안의 삶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고 세상에서 힘들고 지치고 낙담하며 살다가 잠깐 예배나 기도 시간에 회복하고 새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다시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때나 기도 시간만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모든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죄를 이기며, 감사와 기쁨,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16 ...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이란 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집에서 자랐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이처럼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누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함께 계시느냐, 아니냐?’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주님과 친밀해진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시작하기 바랍니다. 한 달 뒤면 하루하루가 달리 생각될 것입니다. 1년 뒤엔 다윗의 마음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시작하면 한 달 금방 갑니다.

나는 정말 주님과 친밀하고 싶지만 그렇게 꾸준히 주님을 바라보고 살 자신 없어요

정말 그렇다면 주보에 전교인들에게 광고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일기 나눔방을 통하여 같은 갈망을 가진 성도들과 연합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두 속회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속회 방학 중에 모든 속회원들이 매일 영성일기를 다 쓰셔서 상으로 제가 식사 대접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영성일기를 온 속회원들이 다 쓰실 수 있었느냐 물으니 속회원 중 한 여집사님이 목사님과 합께 밥 한번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속회원들이 너무 난감하더랍니다. 쓰기 싫고 쓸 자신도 없었지만 그 여집사님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고 썼는데, 써보니 목사님이 왜 그렇게 영성일기를 써 보라고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삶에 눈이 뜨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으로 고난을 이긴 것처럼,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운 떡과 물을 마시고, 40 주야를 달려 갈 힘을 얻은 것처럼, 오늘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좀처럼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믿음으로 주님께 손을 뻗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되면 소원이 바뀝니다.

주님,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전 주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기만 원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왕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항상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누군가 널 위하여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하는...

조용히 그대위해~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서 기도하네

 

 

 

고통을 이기는 위로 /14:32-42/ 이동원목사

2014-12-02 10:17:40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산다는 것,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의 고통이 지나 가면 또 하나의 고통이 찾아오고, 한 종류의 고통이 지나 가면 또 다 른 종류의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옵 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런 고통에 는 매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이면 누구나 겪는 자질구레한 고통 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예외적인 고 통, 잔인하고 충격적인 고통들도 있 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대하지 않게 우 리를 찾아 오는 고통을 겪을 수록 더 커다란 아픔을 우리의 삶의 장에 남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모르고 당하는 고통 은 차라리 잘 담담하게 겪어 갈 수 가 있지만,

 

다가올 고통을 우리가 다 미리 알고 있다면 그 고통을 겪 는것이 훨씬 더 불안하고 긴장이 되 고 더 큰 고통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겪는 고통에는 육체적인 고통도 있고 정신적 고통도 있습니 다.

 

근데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경우, 십자가를 전후한 예수님의 고 통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문자 그 대로 최악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겪으실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십자가의 잔인한 고통의 모든 모습을 주님은 아시고 보시고 그 고통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비단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34절에 '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었 으니...'그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 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잠시 후에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한다는 그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심한 어떤 정신적 고통,

 

그 분이 죄인처럼 매 달려야 한다는 것, 죄인처럼, 죄를 모르신 그 분이 죄인이 되어 매달리 셔야 한다는 수치스러운 고통, 혹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일시적이 나마 죄를 짊어지고 그분의 심판을 경험하심으로써 하나님에게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버림을 받아야 하는 고통. 혹은 십자가의 상황을 앞두고 그가 사랑했던 제자들이 그 분을 버리고 도망감으로써 그분이 겪으셔야만 했었던 그런 배신의 고 통,이런 것들이 주님의 마음을 괴롭 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이런 고통을 예수님이 어떻게 직면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우 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예 수님도 이 고통 앞에 어떤 위로를 찾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 늘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비밀. 그 비밀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싶어 요. 이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우 리의 삶의 장을 엄습해 올 때 우리 는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고 승리할 것인가?

 

고통을 이기는 위로 그 첫번 째 비밀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입 니다. 저는 고통을 이기는 가장 중 요한 비밀 중에 하나는 친구 들과 함께 함이라고 생각 합니다.

32절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저 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그 다음 33절 같이 읽어요.

 

'베드로 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십 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그 겟세마네 동산을 가시면서 베드로와 야고보 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데리고 가셨을까요?

 

우리는 어떤 내가 고통스런 것을 겪게 되면 그 것을 남한테 보이기 싦어하죠. 우리 동양권의 문화는 체면문화가 많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사 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홀로 겪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 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을 동반했 느냐 말이죠. 겟세마네 동산에. 아 마도 최악의 고통을 이기는, 극복하 는 비밀을 그 모본을 제자들에게 가 르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있었다 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는 그 보다도 단순하게 더 인간적으 로 접근하고 싶어요. 예수님도 사람 이셨기 때문에 이런 외로움을 당하 시면서 외로움의 상황, 고독한 상 황, 그리고 고통스런 상황을 이제 직면하시면서 위로받고 싶어 하셨 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더불어 있고싶어 하셨다. 제자들을 친구삼 아 그 고통의 밤을 함께 지내고 싶 어 하셨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친구를 알 아볼 수가 있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봄으 로써 우리는 친구를 알 수가 있습니 다. 고통은 우정의 테스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국 격언에 보면, 선경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친 구를 시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 경은 친구를 시험한다. 로마의 철 학자 키케로도 고난을 만나야 진정 한 친구들을 우리는 알아본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유명한 과학자였 던 퀴리 부인은 역경에 처할 때 우 리들은 진정한 친구들의 숫자를 세 어 볼 수가 있다. 친구가 많은 것 같지마는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역 경을 만날 때 비로소 내 진짜 친구 가 몇명이냐?

 

진정한 친구를 우리는 세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잠언 1717절에도 '친구는 사랑이 끊이 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에 남 아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정말 위 기를 만났을 때 그때 우리는 친구를 알아보고 형제를 알아 볼 수가 있다 는 사실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남긴 이런 감 동적인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미 국 같은 마을에 살던 친구 두 사람 이 전쟁에 징집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훈련을 받고 공교롭게 같은 부 대에 배치되어 같은 저선에서 싸우 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도 작전 도 상에서 친구 하나가 참호를 나갔다 가길을 잃었어요. 그리고 포탄이 나르기 때문에 자기 참호로 돌아 오지 못한체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친구를 잃 어버린것을 안 또 한 사람의 친구가 그대로 견디지 못하고 막 포탄이 날 아 오는데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대장이 막았습니다.

 

지 금 나가면 너도 위험해 진다. 그러 나 분대장의 시선이 다른데로 쏠린 틈새를 이용해서 그는 재빨리 자기 의 참호를 나와서 친구가 고립된 그곳을 향해 포복해 계속 기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고립된 친구 에게 접근해서 그 친구를 붙들고 들 쳐 업고 그는 다시 참호로 돌아옵니 다. 파편이 튀는 조각 속에 그도 상 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 친구를 데 리고 참호로 데리고 왔을 때 이미 친구는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분 대장은 야단을 칩니다. 이런 병신같 은 이 바보같은 이 네 친구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너도 죽어가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 이냐? 이때 그 죽은 친구를 들쳐 업고 왔던 친구는 분대장을 바라보 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분 대장은 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셨 지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무슨 의 미가 있느냐고 친구는 이미 죽었고 저도 부상을 입었으니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씀하시지만, 분대장님 은 제가 친구를 죽기 직전에 만났 을 때 제 친구의 얘기를 듣지 못하 셨지요.

 

네 친구가 뭐라고 그랬나? 내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그게 친구예 요. 친구입니다.

친구는 고통의 순 간에 더불어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 다. 저는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서 친구를 기대하셨습니다.

 

이 고 독한 순간, 이 고통스런 순간, 내일 이면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그 어두 움이 닥쳐오고 있는 그 밤에 제자들 을 친구삼아 그 동산에 함께 있기 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 자들은 친구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 지 못했죠?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 습니까? 제자들의 반응 37절에 보시 면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우리 한 시간 동안만좀 깨 어 있어 함께 기도하자, 같이 좀 대 화를 나누자. 이 외로운 밤, 이 고통 스런 밤 주님은 대화를 요구하셨고 기도를 요구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 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제자들은 친구 역할을 못하는 거예 요. 그러나 이 복음서의 기사를 묵 상하면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친구 지 못했지만, , 친구의 자격이 없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 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본문의 상 황과 같은 사실을 다루고 있는 요한 복음의 기사를 보시면 요한복음 17 장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마지막 대화를 나누면서 다락방에서 요한 복음 15 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단다. 나는 너희 들의 친구야. 라고 주께서 말씀하십 니다.

 

여러분의 곁에 좋은 친구가 없 어 외롭다고 느껴지시는 상황이 있 습니까? 제가 방법을 말씀 드리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요. 저는 이따금식 어 떤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어떤 장례 식은 너무나 견디기 어렵도록 쓸쓸 한 장례식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 사 람들이 없어요. 물론 알리지 못한 상황,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 쓸쓸한 장례 식의 뒷 얘기를 우리 부목사님이나 이런 분들께 들어보면 그 분이 평 소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는 사람이 예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둔감했던 사람, 나중에 자기가 가 장 고독했던 상황에 찾아오는 사람 이 없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 니다. 그러나 고통을 극복하면서 어떻게 의미에 찬 삶을 살아 갈 수 가 있을 까요? 제가 좋아하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크리스챤 카운슬러 요, 의사였던 스위스의 폰 트루니 에가 쓴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 니다.

 

당신이 배우자와 더불어 마음 이 통할 수가 있다면 당신의 아내, 당신의 남편과 더불어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애정의 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동성 가운데 서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몇명의 친 구,

 

내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나를 비판하지 않고 내 얘기를 들어 줄 수 있는 몇명의 친구만 있을 수 있 다면 당신의 인생의 장에서 아무리 폭풍우가 요란해도 당신은 그 폭풍 우를 뚫고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 다.

 

이것은 얼마나 탁월한 진단입니 까? 인생의 장에서 아무리 우리가 폭풍우와 먹구름을 경험한다 할 지 라도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와 더불어 마음 통하는 애정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내 동성 친 구들 가운데 몇사람 내가 무슨 얘 기를 해도 내 마음 속의 얘기를 받 아주고 들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몇 사람만 있다면 나는 인생 의 어떤 폭풍우도 뚫고 나갈 수가 있다.

 

저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위로를 찾 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들은 실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은 홀로 걷기에는 홀로 가기 에는 너무 고독한 인생입니다. 여러 분 주변에 좋은 친구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없다면 여러분이 좋은 친 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좋 은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적합 한 상황이 저는 교회라고 생각이 되 요.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내 친 구가 될 수가 없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서 몇 사람, 정말 마음이 통하 고 함께 기도할 수 있고 함께 인생 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몇 사람만 사귀어도 여러분의 교회 생 활은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요.

 

여러분 주변에 그런 친구를 주 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는 친구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인생을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 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을 목장 이 란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 교회 모임. 같은 연령 또래의 모임, 목장 이런데 참여해야 친구가 사귀 어지지 주일 날 왔다가 사라지고 그 래서 친구가 사귀어지기 힘들죠.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비밀, 두번 째 비밀이 있다면 하나님과 함 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 나님과 함께 하는 것. 여러분 친구 가 나를 위로하는 것 중요한 일입니 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의 위로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 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때 거기에는 항상 한 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로할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서 말을 나누 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어요.

 

마 음은 그렇지 않은데. 위로하는 기 술이 없어서 우리의 의도와는 정반 대로 내가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기 도하도 또 남들이 나에게 상처를 입 히는 경우들도 우리는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전형적인 실례가 바로 욥의 친구들의 경우라고 할 수가 있 습니다.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상처를 더해 주었습니다. 이럴 때 어떻할까요? 이럴 때 어디로 갈까 요? 이럴 때 누구를 의지할까요?

 

,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별로 예수님에게 친구의 입장에서 주님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이 취한 태도 를 주목해 보십시오. 35절에 보시 면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 사를 누가 복음에서 읽어보시면 누 가 복음 2241절에 보시면 '저희 를 떠나 '제자들을 떠나,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마음을 함께 알아주지 못하고 친구가 뭐예요? 한문에 친구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지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 기. 나를 알아준다 그런 뜻입니다. 나를 알아 준다. 내 고통을 알아주 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친구 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심각한 상황에 서 잠들어 있어요. 친구가 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주님은 그것 때문 에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를 떠나 돌 던 질 만큼된 거리에 가서 그 분은 무 릎을 꿃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이제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 습니다.

 

그 분의 기도는 이렇게 시 작됩니다. 오늘 본문의 36절을 보 시면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이 렇게 기도가 시작되었어요. 아바 아바. 이 아바란 말은 우리 말의 아 빠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 는 애칭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치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아버 지이신 하나님을 기대고 싶은 심정 으로 그 분 앞에 자기의 절망, 자 기의 고통,

자신의 아픔을 지금 속으로 부터 끄집어 내고 있는 순간 에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자 기 마음 속에 있는 고통을 끄집어 내놓고 있는 이 상황을 보시기 바랍 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놓아요. 기도란 무엇입니까? 조렌 이라는 기독교 철학가는 기도를 정 의하기를 '기도는 하나님 앞에 홀 로 서는 단독자의 체험'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주님 앞에 홀로 서는 것.아무도 나를 함께 할 수 있는 사 람이 없을 때도 여전히 나는 그 분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비젼 칼리 지의 학장인 제임스 휴스톤은 기도 에 대한 아름다운 제목 가운데 정 의 가운데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 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 하나님을 나의 친구로 삼는 것. 그리고 그 분 앞에 내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분 은 고독하셨습니다. 외로우셨습니 다. 그러나 아직도 부를 수 있는 아 버지가 계셨습니다.

 

, 이 대목에서 요한 복음은 감동적인 주님의 심정 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1632절에 보시면 '보라 너 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여러분 주님의 고독의 심 성이 느껴지십니까? 이 표현을 이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 보십시오. '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 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 분이 고독해 하 시는 순간이예요. 제자들은 떠나 가 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 합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 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 시느니라' 할레루야.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친구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도 함 께 할 수 없는 길이 있을 수 있습니 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우 리가 한참 연예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는 상대방에게 '여보 우리 같이 죽읍시다. ' 저도 옛날에 한번 말 해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철이 들어서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 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길을 건너 갈 때 우리는 함께 건너갈 수가 없 어요. 따로 가야합니다. 물론 예외 적으로 사고가 나서 같이 가는 경우 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죽음의 다리를 우리는 홀로 건너가 야 합니다. 남편도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아내도 함께 갈 수가 없 습니다. 사랑했던 친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고독한 그 길을 건너갈 때, 그때도 함께 할 수 있는 분, 그때 도 내가 부를 수 있는 하나님,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시다면 사랑하 시는 여러분, 결코 우리는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독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정말 배울 수가 있다면 그러려면 평소 부 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되요. 습관이 중요해요.

 

오늘 같은 말씀을 누가 복음에서 읽어 보시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사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습관을 좇아 감람삼에 가서 기도하셨다. 좋은 습 관은 좋은 습관입니다. 믿으십니까?. 좋은 습관은 좋은 습관이예요.

 

여러분, 날마다의 새벽기도가 언제나 은혜가가 아닐 수도 있어요. 어느 날의 새벽기도는 아주 미미하 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왠지 오 늘은 피곤하기만 하다. 그래도 습관 은 중요해요. 좋은 습관이 되어 있 으면 어떤 때는 무미건조하지만 어 느 날의 새벽기도에 갑자기 성령으 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 를 붙잡을 수가 있어요.

모든 큐티 가 날마다의 큐티가 새벽마다의 Quiet Time이 항상 나에게 감격이 요, 은혜는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 러나 Quiet Time이 습관이 되면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 습 관이 되면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 할 때 절실하게 하나님의 텃치와 하 나님의 다루심이 필요할 때

 

그 습관 을 좇아 기도하던 나에게 주님이 임 하시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나 를 만져 주시고 나를 소생시켜 주시 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 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 께 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고통을 이기는 위로 그 세번 째 비밀, 그 마지막 비밀은 하나님 의 뜻을 확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니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줄 아는 것 저는 이것 이 고통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비밀 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정말 힘든 것은 뭐냐하면 이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고통이 아무리 어려워도 , 아무 리 힘든 것이어도 이 고통이 의미가 있다 견딜 만한 의미가 있다. 이것 만 확신 할 수 있다면 뚫고 나갈 수 가 있어요.

 

어느 정도 견딜 수가 있 어요. 근데 정말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 같다. 내 죽음이 어쩌면 개죽음일지 모른다.그렇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만약 내가 의미만 발견 할 수 있다면 내가 겪는, 내가 부 딪쳐 있는 이 고통의 진정한 의미만 내가 확인 할 수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의미 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36절에 '가라 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 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뭐예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 대로 하옵소서' 다같이 ' 나의 원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 옵소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같은 내 용이지만 번역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번역했지요. 아버 지의 뜻대로.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 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이 생각하셨을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무슨 뜻이 있을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내가 이 수 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저 잔인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것. 그것이 무슨 의 미가 있을까? 그러나 주님은 마침 내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뜻을 바라 보고 계셨습니다.

 

'맞아, 그것 때문 에 나를 보내신 거야 나는 십자가 에 달려야 해 그래야 내 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고 사람들이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구속함을 받 고 속량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 지로 부르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 수가 있다면 나의 죽음이 저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십자가를 받아 들여야해. 아마도 주님은 자신 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을 것입 니다.

 

, 그 기도를 세번하십니다. 세 차례에 걸쳐서. 그리고 본문의 상황 을 가만히 읽어보시면 한차례 기도 가 끝난 후에 제자들을 와서 봐요. 그러면 제자들은 아직도 자요. 그래 서 처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어찌 하여 자느냐?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 을 것입니다. 두 번째 한 참 또 ' 하나님 정말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 면 할 수밖에 없죠 뭐. 정말 주님의 뜻입니까?' 그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하면서 기도하시다가 또 와서 보니 까 제자들이 또 자는 거예요. 아직 도 자는 거예요. 아마도 이번에는 주님의 옥타브가 더 높아졌을 것입 니다.

 

'어찌 하여 자느냐?' 아까 보다 주님의 옥타브가 높아졌을 가 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번 기도 합니다. 세번 기도 하고 와서는 주 님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 장면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 오늘 본문에 41절을 주목해 보세요 .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 리우느니라' 세번째는 달라지죠? 세번째 와서는 아직도 자요. 뭐라 그랬습니까?

 

', 그냥 자' 저는 이 때쯤 주님의 마음 속에 어떤 확고 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거예요. 그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 아들이기로 완전히 결정한 것입니 다. 나는 가야한다. 그리고 더 이상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지 않았 습니다.

 

그냥 자게 내버려 두자. 사 람이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면 옆의 사람을 들복지 않습니다. 그렇죠?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괜히 옆 에 있는 사람을 들복아요. 주님은 이때쯤 하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 의 뜻으로 견고한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괜 챦다. 자라. 나는 준비되었다. 'I am ready.' 나는 준비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자 가자. 십자가로' 그는 그 고통을 대 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예요.

 

여러분, 뜻을 알면 내 고통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고통과 대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알거니 와 모르면 안되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께이 사랑을 받는자, 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 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뭐예요? 선을 이룬다.

그것 만 알 수 있다면 내가 겪는 불가사 이한 고통도 억울해 보이는 이 아픔 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결국은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 질 것 이다 라고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을 뚫고 나갈 줄로 믿습니 다. 우리는 고통을 대결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질 하나님의 빛나는뜻을 바라보며 우리는 고통을 향해서 담담히 그리고 당당하게 걸 어나갈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

 

저 유명한 데이빗 리빙스톤이 아프 리카의 선교사.데이빗 리빙스톤이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수차례 목숨의 위기를 겪어가면서도 선교를 포기하 지 않고 선교를 계속했던 이유가 뭐 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 머리 속에서 한 순간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 생각으로 일해 왔습니다. 뭡니까?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이 다하기 전까 지는 나는 죽지 않는 다고 나는 확 신했습니다.'

 

'I shall not die untill my work is done.' 하나님의 사역 이 나에게 주신 그 미션이 다할 때 까지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 던 그것. 주께서 뜻이 있어 나를 이 곳에 보내셨다.

 

그러면 그 뜻이 이 루어지기 전까지 나는 여기서 죽 을 수 없다. 그것이 그를 힘있게 용기있게 능력있게 만들었던 비밀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도 선교 의 문을 열었고 현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그래서 현대 선교의 아버지 라고 불리어지는 윌리엄 케리 그는 32살의 젊은 나이로 영국을 떠나 인 도로 갔습니다.

 

고생 많이 했습니 다. 40년 동안 선교하는 과정에 있 어 자기 아내는 정신병자가 되었습 니다. 너무나 많은 선교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벅차게 그는 경제 적인 아픔을 당해 왔습니다.

 

그가 하기를 원했던 과제중에 하나가 인 도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도말은 하나가 아니예요. 수십개의 dialect 방언이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힘든 과제였습니다. 그 러나 지치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사 역에 몰두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 이냐는 질문 앞에 윌리엄 케리는 유 명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영어로 'The will of God 하나님의 뜻. nothing more, nothing less, nothing else '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 그밖에 다른 어 떤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 하나님의 뜻. 나를 보 내신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이 고통 속에도 뜻이 있다. 이 아픔 속에 도 뜻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오늘 의 나의 실존, 나의 존재 속에도 하 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 신다. 하나님은 나를 바라 보신다. 나는 그 뜻을 다할 것이다. 이 사실 을 믿었을 때 그들은 앞을 향해 전 진했습니다 .우리도 전진할 것입니 다.

 

만약 이 뜻을 알 수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일어나 하나님 주 의 뜻대로 하옵소서. 더 이상 우리 는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 변을 향해서 여유있게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괜챦아요. 형제들, 쉬십시오. 나는 일어나 갈것입니다. 십자가로. 기도하십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그렇습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쉴새없는 고통 이 우리를 아프게 옥조이고 있고 우 리를 괴롭게 하고 있지만,

 

내가 이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만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고통을 아뢸 수 있 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 만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앞을 향해 갈 것입니다.

 

!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함께해 주시옵 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옵소서. 그래서 승리하게 도와 주 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

 

 

기도하시겠습니다.

 

예배를 드리 면서도, 기도하면서도 아직도 가슴 이 눌려있고 아프고 괴롭고 무거운 가슴, 버거운 가슴으로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계시면 조용히 가슴에 손 을 얹으세요 그리고 같이 기도해요.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러나 때로는 인생의 모든 프래셔와 스트래스를 견디기에 내 자신이 너무 작아보이고 초라해 보이고, 인생이라는 이 과제가 너무 나 힘겹게만 느껴지는 분들이 있습 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저들의 마음을 누 루고 괴롭고 아프게 만드는 온갖 악한 영들의 공격에서 부터 저들을 궂세게 해 주시옵소서. 권세있게 하 시옵소서. 모든 악한 영들, 불안과 낙심과 초초의 영들을 주께서 쫓아 주시옵소서. 권세있는 능력의 영으 로 오시옵소서.

 

우리를 충만이 채 워주시옵소서. 자유와 진리의 영으 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성 령 충만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악 한 세대를 이기고 찬미와 그리고 감격과 비전의 노래를 부르면서 우 리 인생이 내일을 향해서 달려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고통을 이기고 마 침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애를 살도록 도와 주시옵 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당신의 말씀을 받고 나아가는 당신 의 백성 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시 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위로의 공동체 /고후1:3-7/ 이동원목사

2014-12-04 22:12:50

 

구약학자인 부르스 워키(Bruce Waltke) 교수는 그가 쓴 책에서 이런 이야기

69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딸이 어렸을 때 어린 딸과 함께 숲속을 거닐다가 거의 태어나고 있는 나비를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누에고치가 꿈틀거리며 돌고 있었는데 나비의 한쪽 날개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갑자기 딸이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아빠, 나비가 나와요. 그런데 너무 힘든 모양이에요. 아빠, 도와주면 안돼요?” 순간적으로 부르스 워키 교수는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고치에 다가가서 고치 밑부분을 잡고 그것을 찢어 주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고치는 작은 덩어리가 되어 부숴져 버렸고 나비는 죽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 날 부르스 워키 교수가 배운 소중한 교훈은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는 레슨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실로 고통은 삶의 한 부분이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면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직면해야 하는 새로운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해야 하는 고난을 예언하고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들 성도들이 만나야 하는 고난을 가르칠 때 결코 고난만을 예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고난과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처방으로서의 위로를 동시에 약속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보면 가장 많이 출현하는 단어가 둘이 있습니다. 고난과 위로입니다. 성도의 신앙 여정에서도 고난은 피할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고난을 직면할 때 우리는 동시에 하늘의 위로를 기대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를 향해 쓰고 있는 바울사도 자신의 경험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이 편지를 통해 교회가 존재하는 모습이 바로 위로의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고난을 극복하는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1. 고난에는 목적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생의 장에 고난을 허용하실 때 거기에는 다양한 목적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성도의 삶에 고난이 허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목적 한가지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난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다른 이웃들의 고난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6절에서는 우리의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한자어 가운데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은 사람끼리 서로를 불쌍히 여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소위 지원 그룹(support group)운동은 일종의 동병상련의 나눔터라고 할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고난을 겪고 나면 동일한 고난을 경험하는 이웃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무관심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 신하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이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방문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 주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습니다.--‘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여왕폐하께서 얼마전에 나처럼 유산한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왕께서 나 같은 여인까지 찾아온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이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제 가슴을 죄고 있던 고통이 저에게서 떠나갔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능력인 것입니다. 위로를 영어로 comfort라고 하는데 이 말은 com(함께)라는 말과 fort(나전어의 fortare)는 힘을 돋운다는 뜻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자리-그 곳은 고난을 이기는 새 힘을 공급받는 능력의 자리요 치유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고난을 허용하신 이유-동일한 고난을 받고 있는 이들의 위로자가 되라는 메시지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헨리 나우엔은 이런 우리의 소명을 일러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소명이라는 목적으로 허용되는 은총임을 잊지 마십시오. , 다음으로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위로를 기대할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2. 위로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밤이 아무리 어둡고 고통의 무게가 아무리 견디기 힘든 것이어도 성경은 우리가 여전히 고난의 한 밤중에도 위로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옛 복음성가의 가사 그대로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슬플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사랑의 주님 안식 주시리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고난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환난속에서 바울이 체험한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요 위로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라는 말은 복수로 되어 있고, 위로 앞에도 모든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사건, 상황들에서 자비들을 베푸시고 이 모든 일에 위로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찾아온 이런 고난과 고통을 막아 주시지 않았느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아무리 성경을 묵상해도 그 대답은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것을 고난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마치 자식의 고통으로 함께 아파해 주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는 우리의 고통의 심연을 이해하시고자 인간의 고통의 극치를 친히 기꺼이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가 친히 우리가 겪는 동일한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을 경험하셨기에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를 방관치 아니하시고 우리 곁에 달려오사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신하의 아내 곁에 달려온 빅토리아 여왕처럼 말입니다. 본래 여기 본문에 사용된 위로라는 단어의 희랍어의 본 의미는 부름받고 달려와 곁에 서 계시는 분곧 파라클레테(paraclete)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고난받는 우리 곁에 오셔서 그의 임재로 우리를 위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중에도 5절의 약속처럼 넘치는 그리스도의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의사요 가정 사역자인 제임스 답슨(James Dobson)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가 일하던 병원에 다섯 살 짜리 소년이 폐암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년의 엄마는 늘 병상을 지키며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 어느 날 잠시 병상을 비운 사이 병원의 간호사는 아이가 종소리가 들려요. 종소리가--”라고 소리를 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돌아와 병원 복도에서 간호사를 만나 아이가 좀 어떠냐고 묻자 간호사는 아이가 좀 환각증세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더군요말했다고 합니다. 이때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환각이 아니에요. 절대로. 제가 아이에게- 네가 숨쉬기도 힘들고 너무 아프면 넌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돼.

 

러면 하늘에서 너를 위해 종이 울릴거고 예수님이 마중 나올거야-고 제가 말해 주었어요그리고 이 엄마는 단숨에 병실로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하늘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대하여 그 종소리가 메아리가 될 때까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저는 동일하신 주께서 지금도 고난당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어김없이 위로의 종을 울리며 다가오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들 성도들이 고난중에도 위로를 기대할수 있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3. 함께 하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지요? 고난--아니 위로라고요? 아닙니다. 그보다 더 많이 나오는 단어는 우리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단순히 자신의 개인의 고난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위로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공동체 바로 교회 공동체로 말미암아 6절의 고백처럼 우리의 환난이 너희의 위로가 되고 너희의 구원이 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위로가 또한 너희의 위로가 됨으로 우리가 함께 고난을 견딜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기쁨을 누리면 기쁨은 갑절이나 더해지고 함께 고난을 당하면 우리는 고난의 무게는 한결 가볍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현대인들은 교회 생활을 해도 소속감이 없이 주일 예배 중심으로만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제일 당황하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고난이 찾아 올 때입니다.

 

어쩔줄을 모릅니다. 가족중 초상이나 질병 사고를 만날 때 비로소 공동체를 떠난 그 소외와 고독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고난에서 당당하고 여유있게 승리하는 이웃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교회 공동체에 깊이 헌신하여 나눔의 지체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목장모임을 주일의 모임과 함께 신앙생활의 두 날개로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목장교회에 소속하십시오. 그리고 축제의 기쁨과 고통의 슬픔을 함께 나눌줄 아는 정상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동화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타니엘 레첸메이어(Nathaniel Lachenmeyer)가 쓰고 로버트 잉펜(Robert Ingpen)이 그림을 그린 부러진 부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꼬마 참새의 이야기입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어먹던 참새가 어느날 부리가 부러진 것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의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하고 야위어 가고 씻지도 못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런

 

데 뜻밖에 어느날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웃으며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래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 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목장 교회)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취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잘자야 해. 내일을 위하여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힘차게 하고 대답합니다.

 

그날 밤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 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민족이 치유되고 세상이 변화되는 꿈을 꾼 것입니다.

 

이 꿈을 위해 우리 교회는 지난 10년을 달려 온 것입니다. 특별히 이 꿈을 위해 지난 3년간 우리는 목장()교회 비전을 가꾸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사랑의 축제를 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 나그네의 피곤함 그대로 오시길 바랍니다.

 

부러진 부리의 피 흘림과 아픔을 갖고 그대로 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드디어 영의 공동체안에서 인생의 새 집을 짓고 그안에서 상처를 치유받고 그토록 사모하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새 역사의 내일을 춤추며 꿈꾸게 될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2. 5절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경험하게 될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3. 4절은 우리들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4. 우리들 교회가 좀 더 위로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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