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가는 길 (진실하라!) /마5:17-20/ 김병삼 목사
2016-03-22 13:20:1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진실이라는 이 말은 라틴어로는 시네 세라(sine cera)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밀칠하지 않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sun tested', 즉 '햇빛에 시험해 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것은 고대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긴 단어입니다. 우리가 보아도 값싼 도자기(옹기)는 두껍게 만들기 때문에 불에 구워낼 때에 금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값비싼 도자기는 얇게 만들고 가볍게 선명한 색깔을 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값비싼 도자기는 불에 구워내기 전이나 구워낸 후에 금이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정직한 도공은 이런 도자기는 깨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도자기에 색소에다 딱딱한 밀초를 섞어 갈라진 틈을 메워 유약을 발라 상품으로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햇빛에 비쳐 밀초를 메운 자국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런 후 그런 자국이 없을 때 'sine cera'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신자가 진실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흠도 없고 티도 없는 깨끗한 신자, 위선이나 분으로 위장하지 않은 모습을 가질 것을 말합니다.
신자란 “나는 조금만 다듬기만 하면 죄와 멀어질 수 있다 하는 자가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이 원하시면 깨끗해질 수 있나이다.”라고 하는 자입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이 바로 진실논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실이 무엇인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의로운 자들인지, 아니면 율법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의로운 것인지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고, 율법 전문가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철저하게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 이해하기!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배경을 아는 것이 조금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의 많은 분이 성경을 읽으려 시도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레위기나 신명기 부분에 나오는 율법에 이르게 되면, 소 잡고, 양 잡고, 염소 잡고, 고운 가루로 등등 정신 못 차리게 지루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루한 부분이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하냐면,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겪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들은 율법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조항을 이마에 붙이고 소매에도 달고, 문 위에 붙여놓고 들어가며 나가며 늘 외우고, 자녀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잘 섬기도록 주신 것인데, 어는 순간부터 주인공인 하나님은 사라지고 율법을 지키는 데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죠.
결국,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주신 것인데 본질이 사라진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본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생명과 자유와 평안함이 있어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기 시작하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기 시작한 것이죠. 율법을 지키는 그들에게는 본질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마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외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선행”이죠. 본래 선행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 즉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를 자랑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문 17~18절이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모세의 율법이 가장 중요했고 또한, 장로의 유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미쉬나’라고 했는데 랍비와 장로들의 가르침을 수백 년 동안 모아놓은 것이죠. 여기에는 율법을 지키도록 세부규범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에서는 정결하게 손을 씻으라고 했는데, 물을 떠다 놓고 씻는 방법이 다 다릅니다. 물의 양도 횟수도 그래서 규례를 정하게 되고.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까지가 일이고 아닌지 정해 놔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무화과 하나를 드는 무게까지는 일이 아니지만, 그것보다 무거우면 일이 됩니다.
또 안식일에는 2000규빗 이상을 걸어가면 여행하는 것이 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죠.
이렇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지키는 ‘미쉬나’가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죠.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든 ‘미쉬나’가 오히려 율법을 범하게 한 것이죠. 사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데, 무화과의 무게, 2000규빗의 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편법이 생기게 됩니다. 5000규빗 쯤 되는 거리를 가야 하면, 1900규빗쯤 가다가 쉬고 다시 걷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닌데, 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율법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나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사건이 하나 있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까먹은 것입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음식을 그냥 먹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공을 하거나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명백한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식은 밥을 먹으면 죄가 아니고, 식은 밥을 데워 먹으면 죄가 되는 것이죠.
미쉬나를 신봉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했겠죠.
마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습관과 전통을 율법으로 생각하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유함을 잃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법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잘못된 율법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지금이나 내일도 같습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습관, 잘못된 믿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고 있을 뿐이지요.
또 다른 각도에서 오늘 본문 17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나 선지자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나요? 모든 율법과 제사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동물들의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목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상수훈을 통해서 더욱 온전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법은 결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율법이 규정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음식들에 대한 규례는 결국 “음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부정하게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이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율법의 각론들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율법이 점점 상징화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재미있는 글을 하나 소개하죠. [학교 밖 선생님 365]에 나오는 ‘잉꼬’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잉꼬는 남들이 보지 않을 때만 싸운다.
소문 한번 잘못 나서 참 힘들게 산다.
율법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해지려고 하면서, 자꾸 더 많은 율법을 만들어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이 율법을 피해 가려는 교활한 지혜를 또 만들게 되죠. 그러면 또 율법을 만들고, 결국, 율법이 강화되면 될수록 인간들은 더 큰 죄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경계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가리켜 “몽학선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요즘 교회들을 보세요. 얼마나 많은 규정을 만들어 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는 영적 공동체가 되기보다는 그 규율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세속적인 공동체로 변해갈 따름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회 안에서 “법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교회의 생명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용서가 없는 율법,
사랑이 없는 공의.
용납하지 않는 정죄,
자유함을 잃어버린 규칙은,
이것이 종교 공동체가 되어 유기체로서의 신앙공동체를 상실합니다.
율법보다 나은 의!
김장환 목사님이 쓰신 예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되어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주일 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 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 것이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분 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사람을 신장기증자로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답니다.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맙시다.
본문 20절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옳게 사는 문제에서 너희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의”라는 면에서 오늘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 우리는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들은 누가 보아도 종교적인 품위와 위신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에서나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로 예를 든다면, 이들은 회식자리에서 술과 담배를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며, 주일에 골프 약속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니 감히 이들 앞에서 이런 것을 깨라고 이야기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데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늘 자신에게 가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즐거움과 행복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자기 성취’에 만족함을 얻으려 하지만 절대 채워지지 않는 절망감을 경험합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정죄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의 즐거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이 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참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허전한 것이며, 왜 예수님께서 이들을 인정하지 않으셨을까요?
종교인인 외적인 것에 치열하게 관심을 두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쓴다면, “신앙인”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종교인은 의무감으로 살기에 위선적이 되기 쉽습니다.
의무감은 기쁨을 앗아갑니다. 의무감은 자신이 쌓은 ‘공적’이 있을 때 ‘의롭다!’라고 말하지만, 단지 자신을 만족하게 했을 뿐입니다. 단지 자기 일을 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이 없는 종교인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죠?
종교적인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 것은 단지 자신의 성을 쌓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지켜야 하는 종교적 삶을 살지 않는다면, 단지 자기 편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종,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들의 교제나, 봉사, 섬김, 십일조와 감사의 생활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예수님께서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의무감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지켜야 하는 ‘의’가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 의’입니다.
신앙인은 종교인을 능가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도 하는 것을 신앙인이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늘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앙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날 내 모습이 종교적으로 바뀌어 있지 않은지, 너무나 종교적인 내 모습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한 위선적은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공부하는 성경도 공부하지 않으면서, 바리새인들도 구제하는 일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의 것 중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국은 진실에 대한 문제입니다.
율법을 지키느라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믿는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도리들을 외면하지는 않는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독선적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믿으며 위선적이 되지 않도록 올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천국 문을 가로막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마23:13/ 김병삼목사
2020-06-10 13:21:02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3. "Woe to you, teachers of the law and Pharisees, you hypocrites!
You shut the kingdom of heaven in men's faces. You yourselves do not enter, nor will you let those enter who are trying to. (NIV)
화 있을진저!
헬라어로 ‘우아이’라는 말은 ‘오 슬프다’ ‘아이고’ 라는 탄식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부터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하는 문장이 7가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저주선언을 ‘7화(禍)선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7화’의 대상은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외식하는 자’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외식하는 자’를 ‘위선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헬라어 ‘히포크리타이’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며 ‘외식’이라는 뜻으로 당시에 아주 모욕적인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욕적인 언어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하시는 이유는 지난 주 서론 부분에서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23장 2-7절에 나오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외식’이라는 단어를 입력했을 때, 나온 이미지 컷 몇 개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ㅣ이미지ㅣ외식하는 자에 대한 사진들
예수님께서 이들의 위선적인 행위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들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눌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나쁜 영향은 무엇인가요? 마태복음 23장 13절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는데, 이들이 그 문을 막고 있으니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가요?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막아서고 있는 자들이니 마땅히 화를 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나눌 말씀을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지난주에 다 다루지 못한 부분을 간단하게 나누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마태복음 23장 3절 말씀을 통해 보았습니다.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행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상세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지키되’라는 단어는 ‘몸에 배듯이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잘못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율법을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율법성이나 막중한 의무 때문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 자체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자의적으로 그 율법을 해석하여, 각종 규범과 전통적인 계율들을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분화해서 규칙과 예법을 만든 것이죠. 율법의 생활규범 613개 조항이 그것이죠.
이는 규칙을 지키는 것도 무겁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는 노예로 전락해 버린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수년 전 <곡성>이라는 영화가 개봉한 후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뭣이 중한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 중에 뭣이 더 중한디?”
라고 묻고 계시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급한 것’과 ‘중요한 것’ 중에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데?”
손을 잘 씻고 먹자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율법들, 즉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그 아이들의 손과 발이 더럽고 얼굴에 때가 묻어 있으니 씻고 오라고 말한다면, 씻을 물도 없는 곳에서 때 묻은 손을 보면서 부정하다고 비난한다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부모를 잘 돌보기 위해서 법과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묵상 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 바리새인들의 무거운 율법의 짐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내게 믿음이 들어와 마음이 뜨거워져 ‘아들을 말씀 안에서 잘 양육 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아들이 무슨 잘못을 하면 내 마음대로 삼진 아웃제를 도입해 두 번까지 용서하고, 세 번째는 매를 들었다. 그 때 나는 아들에게 성경을 가져오라고 했고, 잠언 13장 24절을 펴서 읽으라고 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함이라’
아들이 그 말씀을 읽고 나면, 나는 왜 내가 매를 들어야 하는지 성경을 곡해하며 억지 이론을 폈다. 그리고 몇 대 맞을 것인지 물었다. 아들은 ‘한 대요’ 라고 대답했고 나는 ‘한 대로는 안 되지. 세 대는 맞아야 해’ 라면서 내 마음대로 개수를 정해 때렸다. 그때는 그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알았다.
더 믿음이 들어와 그때보다 조금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보니 내가 엄청난 잘못을 했음을 깨달았다. 아들은 이미 사춘기가 시작되어 단지 매로 다스리기 힘든 상태였다.
말씀의 능력도 어디 갔나 할 정도였다. 아들을 불러 조용히 이야기했다.
어릴 때 엄마가 잠언을 읽게 하고 매를 든 것을 기억하느냐고. 아들은 기억한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아들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하나님을 어설프게 잘못 알아 성경을 모독했고 너를 아프게 했다. 엄마를 용서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잘못 이해하지 말거라 다 내 잘못이다.’ 하며 아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 순간 나는 아들에게서 ‘괜찮아요!’ 라는 대답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아들은 무뚝뚝하게 ‘ 네’ 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내가 그 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면 사춘기의 정점에 다다른 아들은 나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더욱 미워할 뻔 했다.
조금 더 천국을 가로막는 ‘외식’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 말씀입니다.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우리에게는 잘 와 닿는 구절은 아닙니다만,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은 ‘기도의 끈’을 만들어 차고 다녔습니다. 이 ‘기도의 끈’이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에 힘쓸 목적이었지만 차차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끈이 ‘부적’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부착할 때가 아침 ‘쉐마’ 기도 때뿐이었는데 점차 하루 종일 차는 것이 관행이 되었고, 심지어는 취침 때에도 부착 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경건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랍비들에 의해 규정된 크기보다 더 크게 만들어 눈에 띠게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옷 술에 경문을 달고 다니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 모습에서 적용점을 찾아 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경건한 옷차림으로 와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경건의 모습이 꼭 넥타이를 매거나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목회자다운 옷차림과 모습이 중요하다고 해서 꼭 머리의 형태나 와이셔츠의 색깔, 양복의 스타일이 정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화적인 존중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죠. 자기 자신의 잣대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천국을 가로막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화 있을 진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 자들이여!
오늘 말씀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본문 말씀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13. “…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아마도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11장 52절을 보면 이 의미가 명확해 질 것 같습니다.
52.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은 일반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종교 예식과 제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조정하던 시기였죠.
이들의 문제는 수없이 많은 규칙들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도, 따를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막는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박양규 교수가 쓴 『중세 교회의 뒷골목 풍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겠습니다.
당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살았는지, 어쩌면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욱 슬픈 것은 그런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죠.
1077년에 일어난 ‘카노사의 굴욕’은 당시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를 교황 그레고리 7세가 파문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서로 권력을 가지려 했지만 결국 황제가 3일간 카노사의 눈밭에서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던, 유명한 교회와 세상권력 간의 갈등이었죠.
중요한 것은 황제도 교황도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했지만, 성경에 순종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탐욕에 눈이 멀면 성경도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마련입니다. 14세기의 윌리엄 랭글런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순결하지만 전적으로 사랑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서 성직자들보다 더 탐욕스러운 사람은 없다. 육체적으로 순결한 교구 신부들이라 해도 탐욕 아래 짓눌려 있고, 소유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해서 그들의 머리에서 이를 떼어낼 수가 없다.”
위선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들이 취하려는 명예와 권력을 정당화 할 뿐입니다.
기독교가 중세기에 권력을 가지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단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자노는 유대인 친구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간청했다.
“자네는 내가 기독교도가 되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지? 나도 그래 볼까 생각하는데, 그 약속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로마로 가서 자네가 말하는 그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분을 만나보고 그분의 품위와 태도 그리고 형제 뻘 되는 추기경들의 품위와 태도를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네. 그리고 자네의 말과 견주어 본 뒤에 자네가 나한테 들려주었듯 자네의 종교가 내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방금 말했듯 나도 기독교도가 되겠네.“
이 말을 들은 자노는 매우 실망하며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을 개종시킬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 고생도 물거품으로 돌아가려는가 보군. 로마 교황청에 가서 성직자들의 더러운 악덕 생활을 보게 된다면 기독교도가 되기는커녕 진작 기독교로 개종을 했더라도 다시 유대교도로 돌아가고 말 테니.”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데 ‘지식’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지식을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에게 지식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자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잘 사용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13. ‘…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그들이 가진 지식으로 인해 누군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적용 –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우상숭배’의 문제.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바울이 교회를 향하여 권면하고 질책한 내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문제는 평신도나 초신자에게 발생하기 보다는 뭔가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지적교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우상제물’ 논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성경에 관한 지식과 믿음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겸손함과 자기포기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들어가는 순간, 아니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교만이 찾아옵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느냐, ‘믿음’을 자랑하며 누군가를 핍박하는 사람이 되느냐?
‘지성’이 겸손하게 나타나느냐, 아니면 ‘지성’이 교만하게 나타나느냐?
자신의 믿음과 지성에 ‘확신’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중요한 말입니다. 자신의 확신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그것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하기 보다는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죠. 사랑이 없는 지식은 늘 누군가를 정죄하는데 사용됩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우상 제물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 없는 지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바라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 안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 하거나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죠. 지식에 대한 확신은 있으나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결핍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국을 가로막고 있는 바리새인들처럼, 고린도 교회에서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가지고 천국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4절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오랜 신앙을 통해 지식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우상제물’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진리에 기초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에게 있어서 우상은 단순한 피조물이요, 어떤 영적 능력도 없기에 거기에 드려진 ‘제물’ 역시 먹거나 말거나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방인들이 여전히 우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연의 위대함을 두려워하며 숭배하고 몸에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위안을 삼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7절 말씀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그냥 음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제물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있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7절에 나오는 ‘양심’이란 말은 ‘아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신약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근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이 세상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영적인 것을 따르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영적 지식이 많아지면 훨씬 더 양심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 즉 영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양심을 가지게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습관과 관습의 틀로 인해 소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가책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느끼는 죄책감으로 인해 죄인이 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약한 성도들에게 해가 되거나 피해가 될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보는 성숙한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약한 자가 하는 것을 다 내버려 두어 제멋대로 하도록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함은 사실이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철저하게 목회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의 사상을 ‘그리스도에 중심한 은혜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누군가에게도 흘러가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제입니다. 지식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천국의 문을 여는 자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식의 교만으로 천국 문을 닫는 자들이 될 것인가?
교만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최고인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 교만이 우리 신앙에 치명적인 것은 ‘합병증’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뇨병’은 그 병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합병증이 무서운 것이죠.
당뇨의 합병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교만하면 자신의 모습도 주변의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제 멋대로 살아가다가 ‘패망에 선봉’에 서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생명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만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지혜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선비는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선비는 강 나루터에 다다르고 한 뱃사공의 배에 타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사공에게 으스대며 뻐기듯이 말했습니다.
"자네, 글을 지을 줄 아는가?"/"글 자체를 몰라 지을 줄 모릅니다."
"그럼 세상사는 맛을 모르겠구먼 그려. 그럼 자네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가?" "그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쯧쯧... 자네는 인간의 도리를 모르고 사는구먼. 그럼 자네는 글을 읽을 줄 아는가?"
"아닙니다. 저는 까막눈입죠."/"아니, 이런 세상에나, 자네는 도대체 왜 사는가?"
이 때 사공의 배가 갑자기 암초에 부딪쳐 물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사공은 느긋했지만 선비는 다급해졌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사공이 선비에게 물었습니다.
"선비님, 헤엄치실 줄 알고 계십니까?"/"아니, 난 헤엄칠 줄 모르네."
"그럼 선비님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여보게, 살려주게."
"아니, 선비님은 그 나이 때까지 뭐하고 살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파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인해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 ‘상처’ 받는 교인들입니다. 설교할 때는 “상처를 준다고 다 받느냐? 받은 상처를 돌려주라!”고 말하지만 사실 무의식중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것들이죠.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정확하게 하고 싶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1절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그런데 이 말씀이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이 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위선적인 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으로 인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연약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는데, 실상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당당했습니다.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경멸했습니다.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이 충분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떠올랐던 일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분당에서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조금 당황스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식당주인이 목사님이라고 인사를 하는 상황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맥주와 와인을 주문하는 그 목사님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맥주와 와인이 사람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당에서 목회하는 저에게는 저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식당이었기에 말이죠.
그 분의 눈빛은 “뭐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 . .”라고 말하고 있었죠.
그것을 먹고 안 먹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그 분의 태도가 문제 아니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목회자가 식사를 하면서 술을 먹는 상황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사를 볼 수 있는 교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술은 먹는 목회자의 모습 때문에 은혜가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지식을 내세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독선과 교만이 아닐까요?”
그 교만이 누군가에게 천국을 가로막는 죄가 될 수 있다면 말이죠.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 .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비판은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은혜로 말미암아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우리의 믿음과 지식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천국을 여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하나요?
그런데 이 결단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없이 정죄하고 괴롭혔습니다.
주로 안식일을 어기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일로 인해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을 받으셨죠.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를 걸으시며 안식일에 밀을 잘라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며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이렇게 되묻습니다. “안식일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쉼’을 주기 위해 안식일을 주셨는데, 더 큰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무관심한 채로 안식일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잃은 것이죠. 안식일에 배고픔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쉼’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이죠.
또 한 가지 물음을 가져보세요.
제가 주일에 설교를 하는 것은 ‘일’일까요? ‘쉼’일까요?
우리 교회의 직원이나 목회자들은 주일에 일을 하고 있으니 안식일을 범하는 것일까요?
식당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주일에 문을 여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고, 병원이나 공공기관에서 당직을 서는 사람들은 괜찮은 것인가요?
우리의 지식이 자기중심적인 테두리에서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들 판단하거나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율법만 지키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안식일에 다른 의미가 더 중요한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교만한 지성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과, 그 교만은 하나님께서 꺾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살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참 아프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 고민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교만해지려는 자신의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내 속에서 고개를 드는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나의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나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사이에서 공정성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나의 기준으로 인해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마23:15/ 김병삼목사
2020-06-10 13:23:37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5. "Woe to you, teachers of the law and Pharisees, you hypocrites! You travel over land and sea to win a single convert, and when he becomes one, you make him twice as much a son of hell as you are. " (NIV)
잘못된 열정으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꾸짖으신 두 번째 저주 선언문입니다.
역시, 저주의 대상은 위선적인 바리새인입니다.
첫 번째 저주에서 조금은 소극적으로 천국의 문을 닫고 있었다면, 두 번째 저주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바리새인들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 앞에 온 자들에게 자신들의 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위선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두 번째 화가 더욱 무섭습니다. 적극적으로 천국의 문을 가로막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활약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바다와 육지’를 다니며 사람들을 찾아 ‘회심’을 시키는데, 이들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는 지옥보다 두 배나 무서운 지옥의 자식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어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신봉하고 지키는 율법적 지식과 행동을 추종하도록 만드는 것을 선교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과 같은 ‘유대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죠.
소위 ‘개종자’를 만드는 것인데, 이들은 이방인이 개종한 후에 할례를 받고 성전세를 내는 등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위선적인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따르도록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이해가 되실 것 같은데 ‘두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했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지옥에 등급을 매겨서 더 나쁜 지옥과 조금 나은 지옥이 있다는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자신들만 잘못 믿고 살다가 지옥에 가면 좋을 텐데,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처럼 만들어 지옥에 가게 하니 지옥의 인구가 두 배나 늘어난다는 말이 아닐까요?
혹은,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배운 위선적인 모습을 따라하며 더욱 위선적인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모습으로 바뀐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이 부분은 오늘날 기독교 선교에 시사점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한사람을 얻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convert’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훨씬 명확하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었던 영역이 바로 ‘회심 선교’라는 주제였습니다.
누군가를 회심시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심은 하나님을 알기 전의 세계관을 하나님을 믿는 자의 세계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 역사에서 종종 교회가 오류를 범했던 것이 있습니다. ‘회심’을 세계관의 변화가 아닌, 이미 말씀을 믿고 전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따르는 일로 착각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많이 바꾸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리고 보편적인 일부일처제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었죠.
케냐의 마사이족 선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평소에 부족 간의 마찰이 없고 나그네를 잘 돌봐주던 마을에 위생과 의료시설들이 들어오면서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작한 소산과 소를 가지고 충분히 나누고 베풀며 살았는데, 더 이상 사람들이 쉽게 죽지 않는 환경이 되자 식량이 모자라게 된 것이죠.
문제는 좋아진 환경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지기 시작한 것이죠.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패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선교사들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일부일처제를 가르치며 일부다처제를 ‘죄’로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발생된 문제도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부인을 한 명만 남겨놓고 다 버리라고 하니, 버려진 사람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복음이 들어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 관계가 파괴된 것이죠.
일부다처제가 만들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남자들이 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에 나갔고, 위험한 사냥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남자의 수가 극히 부족해진 것입니다. 급기야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서구의 문화적인 틀에서 단순히 정죄해야할 문제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교적인 문제들의 뿌리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태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선교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열정에는 부작용이 있는데, ‘복음’보다 ‘하나님의 마음’보다 자신들이 믿는 방식을 진리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규칙으로 복음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규칙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예수를 믿고 회심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맞닥뜨리게 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열정 역시 대단합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
15.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그렇게 사람을 얻고 나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율법의 추종자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노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바울 역시 자신이 믿고 있었던 ‘신앙’을 다른 누군가가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찾아 자신과 같이 율법 지키는 자가 되기 원했고,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본 받아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며 영원한 생명 얻기를 원했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가지기 원했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기준이 달랐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본질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에 달린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33절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바리새인들의 회심은 그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거나 포기할 의향이 없습니다.
그들의 가치는 ‘정해놓은 규칙’에 있지 그 ‘규칙을 만드신 하나님’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은 늘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과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잘못된 열정인 것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회심’이 구원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유익’한가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열심히 전도해서 얻은 영혼을 위한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러면서 여기에서 중요한, 우상제물을 먹느냐 마느냐에 관한 사도바울의 변론이 나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살던 당시 시장에 파는 고기는 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에 의하면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우상이라는 것조차 그렇게 신앙적 문제가 되지 않는, 무시할 존재인 것이죠.
중요한 것은 불신자들이 사도들을 초청해 음식을 줄 때, 관계를 위해서나 그들을 얻기 위해 그 음식에 대하여 따지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안 먹고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신앙관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그 제물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말하며 신앙의 걸림돌에 처할 상황이 되면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라면 생각도 못할 말을 하죠. 고린도전서 10장 29절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오.
지금 우상 제물을 앞에 놓고 행한 그 일은 ‘우리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양심 때문에 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인해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단과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행한 것이기에 남의 양심으로 판단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근거해 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이 많아지는 곳이 지옥이다!
예루살렘 남쪽에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지난 해 성지순례를 가서 숙소에 머물며 아내와 함께 걸어서 예루살렘 온 지역을 다녔습니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서 내려간 곳이 ‘힌놈의 골짜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옥’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게엔나’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게힌놈’이라고 음역됩니다. 유대교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받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생각했는데 복음서에는 죽음 이후에 벌을 받는 곳을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던 ‘힌놈의 골짜기’는 죽은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최후의 심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옥의 자식’이란 바로 최후의 심판 때, 벌을 받는 곳에서 위선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깊이 ‘두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시며 질책하셨을까요?
그들의 삶은 늘 ‘거룩’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룩을 추구하는 것과 거룩해진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제가 거룩에 대한 설교를 하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면 ‘위선’이 되고,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거룩을 자랑하면 ‘독선’이 된다.“
위선과 독선이 왜 무서운가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거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관심을 갖고 경외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말하는 거룩이 위선과 독선으로 나타나면 분노하게 되죠.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거룩’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생들을 향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 거룩을 추구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과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옳고 그름을 나누는 정의가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하지 못한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하지 못한 죄 가운데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죄와 더러움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거룩의 목적은 죄를 드러나게 함이 아니라, 드러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은 유명한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게 됩니다. 무섭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의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 6장 5절)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젓가락으로 더러운 이사야의 입을 태우시고 정결케 하심으로 선지자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으로 만나시던 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두려움 없이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순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누가복음 5장)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주장하는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며 그들이 죄책감에 살도록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부르셔서 천국 백성을 삼고자 하시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옥의 자녀로 만들어가고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긍휼히 여길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왜곡시키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들이죠. 조심해야 할 무서운 말들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잘 아는데, 너 같은 사람은 절대로 좋아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아.
내가 그 사람을 잘 아는데, 그 사람은 네가 실수한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
내가 그 사람을 잘 아는데, 그 분의 말씀을 어기면 끝나는 거야. . .“
말씀 적용과 기도
혹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하거나 정죄한 일은 없는지.
자녀들을 향해, 부모를 향해,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해 뻗었던 비난의 화살이 사실은 나에게 향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질책하셨던 바리1새인들은 율법을 핑계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가복음 7장 11절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서도 정작 자신이 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일을 등한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모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핑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렇게 적용이 되지 않을까요?
이들이 생각하는 교회 일과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위해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한 일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장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악취가 납니다.
주님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화가 임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열심이 두 배나 무서운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 일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천국과 지옥 /눅16:19-31/ 이동원목사
2014-12-04 13:57:03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비판하는 메뉴 가운데 빠지 지 않는 단골 메뉴가 하나 있습니 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속하는 교인 들의 신앙이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둘째는 타계적이다.
기복신앙을 가 지고 있고 타계신앙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 -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기복 적이고 둘째로 타계적이다' 이런 비 판이 있습니다.
이 비판은 한 부분 적으로는 타당한 요소가 있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 다. 저는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 이 그 동안에 지나치게 기복적이었 다는 점은 늘 동의를 하지만 과연 한국 교인들이 타계신앙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 부분에 관하여서는 저 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진 이유, 그냥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히려 반대로 타계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세신앙이 없었 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내세가 있다고 참으 로 믿는다면,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뭐 조금 잘 사는 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그렇게 치사하게 매달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내세 신 앙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타계신앙 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내세신앙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취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 또 기독교 문화의 바탕을 가지고 있는 서구 사회의 경우, 특 별히 미국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내 세를 믿느냐? 천당을 믿느냐? 이런 조사를 해 보면 항상 80%가 넘어요. 80%이상의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교회를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 크리 스챤이거나 아니거나 80% 이상의 사 람들이 85%, 어떨때는 90%나 되더라 구요. 나는 내세를 믿는다. 나는 천 당을 믿는다.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하면 최근에 제가 대표로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 임'에서 코리아 갤럽에 의뢰해서 이 조사를 했습니다. 한국인들의 종교 의식 조사를 했습니다. 먼저 기독교 인들에 물어 봤습니다. 어떤 천국을 믿느냐? 영원한 내세의 천국을 믿느 냐?
아니면 그저 이 땅에서 어떤 상 징적인 천국만 믿고 있느냐?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위 교인이라고 대 답한 사람들 가운데서 내세의 천국 은 안 믿고, 이 땅에서 그냥 하나님 과 함께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천국이지요 라고 대답한 사람이 무 려 41.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 니다.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물어 봤습니다.
이 조사는 천 명의 기독교인, 천 명의 불신자를 대상으 로 했던 조사였습니다. 비 기독교인 들에게 내세를 믿느냐? 천국을 믿느 냐는 질문을 했더니 믿는다고 대답 한 사람이 33.9%였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 기독교인이 아닌 비 기독교인의 경우에 내세를 불신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66%나 되었습 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은 내세나 천국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것 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두 가지 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 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의 가치 체계가 지나치게 물질주의 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먹고사는 것이 중요 하지 내세는 뭐 별로 중요하지 않 다.
여기에서 오늘 내 직장이 중요 하고 내 목구멍이 중요하고, 내 job 이 중요하고, 내 직업이 중요한 것 이지 나는 내세에 관심이 없다.
지 나치게 물질주의적으로 또 자기 중 심으로 이렇게 우리들의 생각과 의 식이 변하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별로 내세에 대한 관심 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누가 우 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해도 그 분의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되었 을까? 별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기 독교인들도 조차도 그렇습니다.
누 가 우리 가족중이나 이웃 사람들 중, 누가 죽었다 그러면 별로 심각 하게 생각하지 않고 냉담하게 생각 하고 혹시 가까운 사람한테 누가죽 었다 그러면 그 분의 죽음이 내 호 주머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거 기에나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유산 에나 관심이 있고, 그 분의 죽음으 로 내가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 이 죽든 말든 관심이 없다. 이런 냉 혹한 사회의 조류를 대표하는 조크 가 수년 전에 유행했던 말 중에
"내 가 죽으면 국보 손실이고, 당신이 죽으면 환경정리"라는 말이 있죠? 무서운 얘기입니다. 그렇게 물질주 의적으로 가치가 세속화된 그런 현 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이러한 시류에 편승 한 교회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교회의 대부분의 설교도 이 땅에서의 축복, 위로 거기에 다 집 중이 되어있고, 별로 내세에 대한 설교, 천당이나 지옥에 대한 설교를 우리가 들어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 서 교인들 조차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지난 달에 조사가 끝난 거예요. 아주 최 근의 조사이지요. 이 조사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 면 좋겠느냐?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 교의 주제에 대해서 내세에 대한 설 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의 퍼센테이지가 1.5% 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 요. 자, 이따금 가뭄에 콩 나듯 들 어볼 수 있는 내세에 대한 설교는 코미디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 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경각 심을 느껴서 매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앉아서 픽픽 웃고 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 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 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 만 하니 어떻게 된거냐고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비판하 는 메뉴 가운데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속하는 교인들의 신앙이 지 나치게 기복적이고 둘째는 타계적이 다.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고 타계신 앙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현실적 인 축복 -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 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기복적이고 둘째로 타계적이다'
이런 비판이 있습니다. 이 비판은 한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요소가 있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아 주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한국 교 회 교인들의 신앙이 그 동안에 지나 치게 기복적이었다는 점은 늘 동의 를 하지만 과연 한국 교인들이 타계 신앙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 부분에 관하여서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 다.
오히려 저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진 이유, 그냥 이 땅 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매달 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히려 반대로 타계신앙이 없었기 때문이 다. 내세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내세가 있다고 참으로 믿는다면, 영 원한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 상에서 뭐 조금 잘 사는 것을 위해 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 게 치사하게 매달릴 필요가 있겠습 니까?
이것은 내세 신앙이 없기 때 문에 그래요, 타계신앙이 없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 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내세신앙이 다 른 나라에 비해서 취약하다고 생각 합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 또 기 독교 문화의 바탕을 가지고 있는 서 구 사회의 경우, 특별히 미국 사람 들의 경우를 보면 내세를 믿느냐?
천당을 믿느냐? 이런 조사를 해 보 면 항상 80%가 넘어요. 80%이상의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교회를 나 오거나 안 나오거나, 크리스챤이거 나 아니거나 80% 이상의 사람들이 85%, 어떨때는 90%나 되더라구요. 나는 내세를 믿는다. 나는 천당을 믿는다.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하면 최근에 제가 대표로 섬기고 있는 '한국 교 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코 리아 갤럽에 의뢰해서 이 조사를 했 습니다. 한국인들의 종교의식 조사 를 했습니다. 먼저 기독교인들에 물 어 봤습니다.
어떤 천국을 믿느냐? 영원한 내세의 천국을 믿느냐? 아니 면 그저 이 땅에서 어떤 상징적인 천국만 믿고 있느냐?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위 교인이라고 대답한 사 람들 가운데서 내세의 천국은 안 믿 고, 이 땅에서 그냥 하나님과 함께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천국이지 요 라고 대답한 사람이 무려 41.1% 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 리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물어 봤 습니다. 이 조사는 천 명의 기독교 인, 천 명의 불신자를 대상으로 했 던 조사였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에 게 내세를 믿느냐? 천국을 믿느냐는 질문을 했더니 믿는다고 대답한 사 람이 33.9%였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 기독교인이 아닌 비 기 독교인의 경우에 내세를 불신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66%나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 고 있는 한국인들은 내세나 천국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두 가지의 이유 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가치 체계가 지나치게 물질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 에서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지 내세 는 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 서 오늘 내 직장이 중요하고 내 목 구멍이 중요하고, 내 job이 중요하 고, 내 직업이 중요한 것이지 나는 내세에 관심이 없다.
지나치게 물질 주의적으로 또 자기 중심으로 이렇 게 우리들의 생각과 의식이 변하면 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별로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누가 우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해도 그 분의 영원 한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별 관 심이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조차도 그렇습니다.
누가 우리 가족 중이나 이웃 사람들 중, 누가 죽었 다 그러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냉담하게 생각하고 혹시 가까 운 사람한테 누가죽었다 그러면 그 분의 죽음이 내 호주머니에 어떤 영 향을 끼치느냐?
거기에나 관심이 있 을 뿐입니다. 유산에나 관심이 있 고, 그 분의 죽음으로 내가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관 심이 없다. 이런 냉혹한 사회의 조 류를 대표하는 조크가 수년 전에 유 행했던 말 중에
"내가 죽으면 국보 손실이고, 당신이 죽으면 환경정리"
라는 말이 있죠? 무서운 얘기입니 다. 그렇게 물질주의적으로 가치가 세속화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 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이러한 시류에 편승한 교회의 무관 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대부분의 설교도 이 땅에서의 축복, 위로 거기에 다 집중이 되어있고, 별로 내세에 대한 설교, 천당이나 지옥에 대한 설교를 우리가 들어 보 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교인들 조차 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 었습니다.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 면, 이것이 바로 지난 달에 조사가 끝난 거예요. 아주 최근의 조사이지 요. 이 조사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내세에 대한 설교를 해 주었 으면 좋겠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 의 퍼센테이지가 1.5%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요. 자, 이따 금 가뭄에 콩 나듯 들어볼 수 있는 내세에 대한 설교는 코미디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경각심을 느껴서 매 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 이 앉아서 픽픽 웃고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 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 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만 하니 어 떻게 된거냐고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 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 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 하니까 그런거지"이런 대답을 했다 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 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될 성 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 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 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 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 느냐,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 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 음 16장이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 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 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 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 접하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만약 지혜롭게 살 수 있다면 어떤 축복이 약속되느 냐? 제가 이말의 뜻을 해석하는 것 이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것은 그냥 지나가겠습니다.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 속에 나타난 이 단어를 보세요.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 이다. 지금 이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 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 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을 보내게 될 장소. 이 세상의 짧은 시간이 끝 났을 때 우리가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그 영원한 상태는 어떤 곳일 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 16 장 19절이하에서 주님은 그 영원한 세계의 커튼을 조금 열고 그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세계 어떤 곳일까요?
첫째로, 그 영원한 세계의 상태 에 관해서 본문은 이런 것을 가르칩 니다.
그곳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즉시 로 가는 곳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소위 죽는 순간, 즉시로 가는 곳. 그것이 영원한 세계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 되는데요. 여기 보시면 '한 부자가 있어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가 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다 이렇 게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비유라 는 얘기 없어요.
어쩌면 이것은 역 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래서 이런 케이스를 아셨다가 얘기 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다고 저 는 봐요. 왜냐면 20절에 보시면 부 자이름은 안나와 있지만 부자와 함 께 등장하는 주인공인 거지의 경우 에 이름이 나와있죠. 이름이 뭐였습 니까?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가..'이름까지 명기한 것을 보아서 어쩌면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 적 사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데 22절에 보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 어..'죽었습니다.
보통 죽었다고 말 하면 기독교의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 되는 것. 분리되서 어떻게 되는거예 요? 영혼과 육체가 떨어지는 것입니 다. 육체는 흙으로 지음받았기 때문 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어떻 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저 상공을 space를 계속 떠도는 것으로 구천을 우리의 영혼이 떠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 향이 많습니다. 소위 newage culture 뉴에이지 문화가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 이 아닙니다.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즉시로 어딘가로 갑니다. 어디로 가 느냐? 여기 23절에 보시면 부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저가 음부에 서..'음부라는 곳으로 갔다. 이 음 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 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하데스. Hades.하데스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 리고 있는 장소입니다.엄격하게 말 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 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 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곳 이예요. 본질적으로는 같은 곳입니 다.즉각적으로 이 부자는 음부로 갔 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그러 나 이 거지 나사로는 어디로 갔습니 까?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 이렇 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 이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서도 전통적으로 성경주석가들은 신학자 들은 이것을 낙원,혹은 천국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낙원과 천국도 본질 적으로 같은 곳이예요.낙원은 아직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나 그곳이 영원한 천국으로 흡수가 될것입니 다. 낙원과 천국 본질적으로는 같은 곳이라고 말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를 했느 냐? 마태복음 8장 11절에 보시면 이 런 말씀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로마 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자 기 아들이 병에 걸려서 와서 고쳐달 라고 하는데
"선생님.우리집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여 도 낫겠습니다."예수님에 대한 놀라 운 믿음을 보여준 이 백부장. 비록 로마사람이였지만 이런 신앙을 가지 고 있었던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이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동서남북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고 야 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어 디에 앉으려니와? 천국에 앉으려니 와..그랬습니다.믿음의 조상 아브라 함이 간 곳. 그곳이 천국이예요.
그 러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함께 간 다..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쓰여졌기 때문에 유 대인의 대표적인 조상. 누구예요? 아브라함인 것처럼 그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갔던 천 국.그 천국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죠. 성경은 결코 소위 중간기의 신 학 인터벌의 신학을 허락하지 않습 니다.
카톨릭의 경우에는 천국과 지 옥의 중간기의 음부, 혹은 림보라는 장소에 가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라고 하는데 성경은 그 사실에 대해 절대적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죽 는 즉시로 간다.음부이던가 천국이 던가 둘중의 하나를 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영원한 세계. 그세계는 어떤 곳이 냐? 그곳은 죽은 다음에 즉시로 가 는 곳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 랍니다.죽은 다음 떠돌다가 한참을 있다가 도착하는 어떤 곳이 아니라 내가 생명이 이땅에서 떠나가는 그 순간 즉시로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로 의식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는 우리들의 의식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 이라고 있죠.
집에 열심히 찾아오 는 사람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 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 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 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 혼도 없어진다라고 가르칩니다. 그 러나 성경은 없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그 사실은 생 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자의 묘사, 죽은 후의 사후의 부 자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 니까? 본문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 사로를 보고 자,음부에서 뭐라고 그 랬어요? 고통 중에. 그가 지금 고통 하고 있어요.
의식적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하고 있는 장소, 분명히 여기 의식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24절에 보시면 그가 이 고통의 장소에서, 음부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24절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여러분 무더운 여름철에 목 마름에 시달려 보셨습니까? 목마름 에. 목이 타는 고통, 물방울 하나를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고 고 통하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내세 는 무의식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 은 의식이 살아 있는 생생한 세계라 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악몽에 시달린 기억이 있습 니까? 악몽. 너무너무 괴로워서 소 리치고 싶은 악몽, 우리 마누라가 가끔 이상한 꿈을 잘 꾸고 소리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인생을 그렇 게 살지 말라고. 잘 때는 푹 자라 고, 늘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왜 그 렇게 이상한 꿈을 잘 꾸는 지 몰라 요. 꿈이니까 깨라고. 아, 꿈이냐 고. 일어 나서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었으니 망정이지 깨이 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분 깨어나지 않는 악몽 생각해 보세 요.
깨어나지 않는 고통의 악몽, 영 원히, 영원히, 영원히 지속되는 고 통스런 악몽, 깨어날 수 없는 악몽 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지옥입니다. 기 억이 살아있는 곳이예요.
반대로 나사로가 갔던 세계를 보십시오. 25절에 아브라함이 가로 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 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 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 서 무엇을 받고? 위로를 받고 반면 에 이 나사로는 위로를 경험하고 있 습니다. 위로를 경험한다는 말이 무 의식이 아니지요. 위로를 경험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품이라 는 말을 썼을까? . 마태복음 8장 11 절을 인용했습니다마는 이것을 어떤 성경 사본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 와 이렇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천 국에서 기대어 누우려니와 그랬어 요.
기대어 누우려니와. 유대나라에 서는 사람들이 참 아픔이 있다가도 마음 속에 어떤 슬픔이 있다가도 그 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 가 운데 하나는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아주 좋은 분,
스승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식탁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기대어 눕는 것이 전혀 실례가 아니 예요. 한국에서 그렇게 누웠다가는 호로자식이라고 부모들에게 야단맞 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유대 문화권 에서는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이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누워서 이렇게 기대요. 그러면 괜찮다, 괜찮다.
최 후의 만찬석상에서도 제자, 요한같 은 제자가 주님에게 이렇게 기대어 누웠어요. 그 어떤 위로를 받는 광 경.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마음에 어떤 아픈 일을 당했을 때 괜찮아, 안아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품에 안아줘요. 천국을 아 브라함의 품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신앙의 스승, 그분의 품에 안긴다.
우리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나 라. 이 말할 수 없는 위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영원한 세계의 특성이 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레오나르 도 다빈치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듯 잘 보낸 일생은 우리에게 편안 한 죽음의 침상을 마련할 수가 있 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폐 기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후의 우리 의식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세는 그 의식 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세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습니 다. 이미 벌써 간간이 언급했습니다 만은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 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 다.
자,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 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 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그리 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 움의 장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 에 막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가도 고 민이 어느정도 지나면 끝나니까 우 리가 생존이 가능하죠. 끝나지 않는 고민. 끝나지 않는 번민. 상상해 보 세요. 이 고통의 장소. 번민의 장 소. 25절에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거니와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 랬어요. 고민을 받느니라. 저는 이 고민이 단순히육체적 고민만이 아니 라고 합니다. 이미 육체적 고민 그 러나 이것은 정신적인 고민. 그리고 영적인 고뇌입니다. 끝없는 정신적 인 고통. 상상해 보세요. 이세상 후 에 사람들은 그냥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고선 마지막 생명을 끊는 사 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예요. 영원한 정신적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 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부탁을 하나 합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그래서 28절에 보면 부 탁을 하나 합니다.
음부에 들어간 부 자가 부탁을 하죠. 28절에 보세요. 자,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 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 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따라 서 하시기 바랍니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 전도 잔치를 배설한 이유중의 하나. 우리 가 주로 적극적인 것.
예수믿으면 평화. 예수믿으면 기쁨. 예수믿으면 구원. 적극적인 주제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은 이것을 역으로 거꾸로 정의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우리는 이미 고통의 부르짖음을 앓고 있습 니다. 어느날 우리는 이 소리를 토 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가끔 어떤 사람 예수 안 믿을 이유를 말 하는데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우리 부모님이 안믿으셨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나혼자 천국가겠느냐고. 차 라리 같이 가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이 있어요. 아주 휴머니즘의 인간애 를 가진 소리같지만은 지금 이소리 가 무슨 소리냐면 아주 음부에 가있 는 지옥에 가있는 부자가 소리치는 겁니다. 뭐라고 소리칩니까?
내 형 제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이 곳에 왔거니와 내 사랑하는 형제들만은,내 사랑하는 부모들만 은, 내 사랑하는 후배들만은, 내 사 랑하는 친구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 게 하소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어 요.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꽃. 영원 한 목마름. 캄캄한 어두움.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통곡소리. 귀신 들로 가득찬 곳. 성경은 이것이 지 옥의 정체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분 이런 질문을 할지 몰라요."아니. 사 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그런 곳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까?"
잘들 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 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 을 위해 예비된 곳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 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 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 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 지막도 가 있는 것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입 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 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 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 다.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 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 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 마자 즉각적 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 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번째는 이것입니다.하나님이 달려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 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 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 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자, 여러분 어디로 가 기를 원하십니까?천국입니까,
지옥 입니까, 둘중에 하나예요. 나사로 는 아마도 이땅에서는 어려운 삶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배불리 하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아먹었다. 얼마나 어려운 삶을 이 땅에서 살았 습니까? 그는 죽었을 때 아마 변변 한 장례식하나 지내지 못했을 것입 니다.
시청이나 구청에서 나와서 그 의 시체를 간단히 씌워갔을 것입니 다. 반대로 부자의 장례식. 아니, 부자의 삶자체가 호화로왔습니다. 그의 장례식도 호사로운 장례식이었 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 상황은 역 전됩니다.한사람은 영원한 빛의 나 라에서 또 한사람은 캄캄한 헤어날 수 없는 어둠속으로 떨어집니다. 이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 천국과 지 옥.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영원한 세계. 그곳은 한마디로 더 말하면. 네 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어떤 곳이냐?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지옥 에서 천국으로 갈 수가 없구요. 천 국간 사람이 지옥으로 갈 수가 없어 요.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26절 보세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가는 것 아니예요. 뭐 그런 것 가르치는 종교가 있습니 다만은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다시는 그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사건이 일 어날 수 없다. 지금 여기가 중요합 니다.이순간이 중요해요. 이순간 어 떤 결단을 하는가? 이순간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그것이 영원한 상태와 영 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 다.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죽는 그 순간은 이미 늦은 거예요. 이미 영원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가던가. 영원한 지 옥으로 가던가. 그순간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줄 아세요? 본문에 보면 사람이 죽는 그 순간 일어나는 다음 사건을 볼 수가 있어요. 22절에 보 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 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죽는 순간 누가 임했습니까?
천사들이 와 서 그의 영혼을 오늘 아브라함의 품 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올려갑니다. 천사들은 우리 영혼의 가이드. 이세 상에 살때도 하나님이 그를 보내서 그를 인도하셨다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영혼을 영원한 상태로 옮겨가 주십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할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오늘이 중요해 요.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내일 결 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은 우리 의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 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아 있는 질문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할까요?
어떻게해서 사 람이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갔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이 부자이기 때문에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그렇게들 해석을 많이해요. 그것은 성경에 대한 깊은 오해입니다. 부자 이기 때문에 지옥에 갔고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은 결코 아닙니 다.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은 아니예 요.뭐 게을러서 가난해지는 사람도 있어요.게으름이 미덕일순 없잖아 요.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고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고 가난 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가 있었 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무엇 이 결정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 부자의 일생속에는 회개가 없었습니 다. 죄를 회개함이 없었기 때문입니 다. 30절 읽어보겠습니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 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 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 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 면..뭐라고 했습니까? 회개할 것입 니다. 이사람은 지옥에 가서야 뒤늦 게 비로소 회개의 중요성을 깨닫습 니다.
누군가 가서 저사람에게 가서 외 쳐주면, 전해주면 회개할 지도 모릅 니다. 자기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 에 저곳에 가있다. 죄로부터 방향을 전환하고 돌이키는 것.회개없이는, 회개는 방향의 전환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 을 향해서 내 삶을 전환시키는 결단 이 없다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래요. 가만히 가다보면 지옥가는 것 이예요.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젊은 형제하나가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재미있는 전도지 하나 있 는데 보세요"전도지를 하나 가져왔 어요. 전도지의 제목이 뭐냐면
"당 신이 지옥에 가기 위해선 무엇을 해 야 하는가?"물음표예요.그리고 아 무것도 없어요."그래서 뭐 전도지가 이래?"
그랬더니
"목사님. 그 뒤를 보세요"뒤를 넘겨보니까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그게 대답 이예요.가만있으면 간다는 말이예 요. 가만있으면. 가만 있으면 여러 분의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은 지옥 이예요.내가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 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회개해야 합 니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강조되야 될 한가지 사실이 있다면 믿음입니 다. 믿어야합니다. 저는 나사로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간 것이 아니 라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합 니다.
믿었다는 증거가 뭐냐? 그의 이름이 그것을 증거해줘요. 나사로 의 뜻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다같이 말해보세 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그 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그의 가난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예요. 그것 은 사실이예요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챤스가 더 적다고 저는 생각합 니다. 그건 사실이예요. 왜냐하면 부유하기 때문에 그는 부를 믿을 가 능성이 있어요. 자기의 재력을 믿고 재산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 을 가능성은 훨씬 더 많아요. 저는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갈 챤스는 확 률은 더 많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그는 주 앞에 달려 와 주를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하 나님.제가 믿을 곳 없어요. 제가 의 지할 곳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 님을 믿어요. 당신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 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나사로는 그의 인생의 역경과 그의 인생의 불 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믿음 이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준 것이예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당연하죠.여러분. 자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부자는 세상에서 당당히 살았겠지만 은 부자의 이름조차 나와있지 않아 요.부자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name card 명함을 가지고 다녔을까 요?
이 세상에 살 때 아무도 나사로 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 니다.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나사 로..나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가난 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경에도 불구 하고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 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하나님은 그를 아셨습니다. '영 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 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나중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 보면 성경책에 이런 선언이 나와요.
'누구든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못에 던지울것이다.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하나님은 자 기 자녀들의 이름들을 기록하고 계 십니다. 그 자녀들을 아십니다. 나 사로. 그는 회개하고 예수믿고 하나 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그것이 영 원한 천국의 주인공이 되게 한 것입 니다.당신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기도하십시다.
잠시 조용히 머리숙여 기도하시 면서 묻습니다.
여러분 지금 죽으면 지금 바로 이순간 죽는다면 나는 천 국갈 확신이 있다. 한번 손들어보세 요. 내려보세요. 확신이 없는 분. 내가 지금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확 신이 없다. 그러나 갈 수가 있습니 다.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당 신도.하나님없이 살아왔던 삶. 그 삶 을 회개하고 이제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 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 니다.
목사님.저 오늘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 어요. 하는 분 오른손을 올렸다 내 려보세요.
제가 기도해드릴께요.
교회만 나왔다고 해서 저절로 천 당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회개하 고 정말 그리스도라는 분을 그리스 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손 올리신 분. 그 결심이 진실이라면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으세요. 그리 고 조용히 저를 따라 기도해보세요.
하나님.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 마음의 문을 엽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 흘리신 피로 저의 죄를 씻어주시옵소서. 부활하 신 예수님. 이제 제 맘에 오시옵소 서.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옵소서. 여러분. 오늘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 하신다면 이 기도는 여러분의 일생 에서 드릴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 도. 가장 중요한 결단.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지금 이순간 이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오시는 순 간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귀에는 아 무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이순간 예 수님이 마음속에 성령으로 찾아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십니다. 오늘은 여 러분의 생애에 최고의 날, 우리의 인생에서 많은 중요한 날이 있지만 이다음에 천국에 도착하면 돌이켜보 면.
오늘 여러분 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초청했습니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날입니 다. 영접하는 자,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 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 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하 니까 그런거지"
이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 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될 성경의 가장 중요 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 느냐,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이 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면 소위 불 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 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 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 접하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만약 지혜롭게 살 수 있다면 어떤 축복이 약속되느 냐? 제가 이말의 뜻을 해석하는 것 이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지나가겠습니다.그 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속에 나타난 이 단어를 보세요.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 이다. 지금 이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 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 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을 보내게 될 장소. 이 세상의 짧은 시간이 끝 났을 때 우리가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그 영원한 상태는 어떤 곳일 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 16 장 19절이하에서 주님은 그 영원한 세계의 커튼을 조금 열고 그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세계 어떤 곳일까요?
첫째로, 그 영원한 세계의 상태 에 관해서 본문은 이런 것을 가르칩 니다.
그곳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즉시 로 가는 곳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소위 죽는 순간, 즉시로 가는 곳. 그것이 영원한 세계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 되는데요. 여기 보시면 '한 부자가 있어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가리 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비유라는 얘기 없어요.
어쩌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케이스를 아셨다가 얘기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다고 저는 봐 요. 왜냐면 20절에 보시면 부자이름 은 안나와 있지만 부자와 함께 등장 하는 주인공인 거지의 경우에 이름 이 나와있죠. 이름이 뭐였습니까?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이름까지 명기한 것을 보아서 어쩌 면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 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데 22절 에 보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죽 었습니다. 보통 죽었다고 말하면 기 독교의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런 것 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
분리되서 어떻게 되는거예요? 영혼 과 육체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 는 흙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흙으 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어떻게 될까 요? 어떤 사람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저 상공을 space를 계속 떠 도는 것으로 구천을 우리의 영혼이 떠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 습니다.
소위 newage culture 뉴에 이지 문화가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즉시로 어딘 가로 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여기 23절에 보시면 부자는 어디로 갔습 니까? '
저가 음부에서..'음부라는 곳 으로 갔다. 이 음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라고 불리우는 곳입 니다.
하데스. Hades.하데스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 리고 있는 장소입니다.엄격하게 말 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 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 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본질적으로는
그리고 두번 째로 의식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는 우리들의 의식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 이라고 있죠. 집에 열심히 찾아오 는 사람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 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 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 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 혼도 없어진다라고 가르칩니다.
그 러나 성경은 없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그 사실은 생 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자의 묘사, 죽은 후의 사후의 부 자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 니까? 본문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 사로를 보고 자,음부에서 뭐라고 그 랬어요? 고통 중에. 그가 지금 고통 하고 있어요. 의식적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하고 있는 장소, 분명히 여기 의식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24절에 보시면 그가 이 고통의 장소에서, 음부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24절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여러분 무더운 여름철에 목 마름에 시달려 보셨습니까?
목마름 에. 목이 타는 고통, 물방울 하나를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고 고 통하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내세 는 무의식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 은 의식이 살아 있는 생생한 세계라 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악몽에 시달린 기억이 있습 니까? 악몽. 너무너무 괴로워서 소 리치고 싶은 악몽, 우리 마누라가 가끔 이상한 꿈을 잘 꾸고 소리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인생을 그렇 게 살지 말라고.
잘 때는 푹 자라 고, 늘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왜 그 렇게 이상한 꿈을 잘 꾸는 지 몰라 요. 꿈이니까 깨라고. 아, 꿈이냐 고. 일어 나서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었으니 망정이지 깨이 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분 깨어나지 않는 악몽 생각해 보세 요. 깨어나지 않는 고통의 악몽, 영 원히, 영원히, 영원히 지속되는 고 통스런 악몽, 깨어날 수 없는 악몽 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지옥입니다. 기 억이 살아있는 곳이예요.
반대로 나사로가 갔던 세계를 보십시오. 25절에 아브라함이 가로 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 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 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 서 무엇을 받고? 위로를 받고 반면 에 이 나사로는 위로를 경험하고 있 습니다.
위로를 경험한다는 말이 무 의식이 아니지요. 위로를 경험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품이라 는 말을 썼을까? . 마태복음 8장 11 절을 인용했습니다마는 이것을 어떤 성경 사본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 와 이렇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천 국에서 기대어 누우려니와 그랬어 요. 기대어 누우려니와. 유대나라에 서는 사람들이 참 아픔이 있다가도 마음 속에 어떤 슬픔이 있다가도 그 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 가 운데 하나는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아주 좋은 분,
스승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식탁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기대어 눕는 것이 전혀 실례가 아니 예요.
한국에서 그렇게 누웠다가는 호로자식이라고 부모들에게 야단맞 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유대 문화권 에서는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이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누워서 이렇게 기대요. 그러면 괜찮다, 괜찮다. 최 후의 만찬석상에서도 제자, 요한같 은 제자가 주님에게 이렇게 기대어 누웠어요.
그 어떤 위로를 받는 광 경.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마음에 어떤 아픈 일을 당했을 때 괜찮아, 안아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품에 안아줘요. 천국을 아 브라함의 품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신앙의 스승, 그분의 품에 안긴다. 우리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나 라. 이 말할 수 없는 위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영원한 세계의 특성이 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레오나르 도 다빈치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듯 잘 보낸 일생은 우리에게 편안 한 죽음의 침상을 마련할 수가 있 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폐 기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후의 우리 의식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세는 그 의식 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세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습니 다. 이미 벌써 간간이 언급했습니다 만은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 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 다.
자,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 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 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그리 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 움의 장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 에 막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가도 고 민이 어느정도 지나면 끝나니까
우 리가 생존이 가능하죠. 끝나지 않는 고민. 끝나지 않는 번민. 상상해 보 세요. 이 고통의 장소. 번민의 장 소. 25절에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거니와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 랬어요. 고민을 받느니라. 저는 이 고민이 단순히육체적 고민만이 아니 라고 합니다. 이미 육체적 고민 그 러나 이것은 정신적인 고민. 그리고 영적인 고뇌입니다. 끝없는 정신적 인 고통. 상상해 보세요.
이세상 후 에 사람들은 그냥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고선 마지막 생명을 끊는 사 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예요. 영원한 정신적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 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부탁을 하나 합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부 탁을 하나 합니다.음부에 들어간 부 자가 부탁을 하죠. 28절에 보세요. 자,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 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 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따라 서 하시기 바랍니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 전도 잔치를 배설한 이유중의 하나. 우리 가 주로 적극적인 것. 예수믿으면 평화. 예수믿으면 기쁨. 예수믿으면 구원. 적극적인 주제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은 이것을 역으로 거꾸로 정의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우리는 이미 고통의 부르짖음을 앓고 있습 니다. 어느날 우리는 이 소리를 토 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가끔 어떤 사람 예수 안 믿을 이유를 말 하는데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우리 부모님이 안믿으셨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나혼자 천국가겠느냐고. 차 라리 같이 가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이 있어요. 아주 휴머니즘의 인간애 를 가진 소리같지만은 지금 이소리 가 무슨 소리냐면
아주 음부에 가있 는 지옥에 가있는 부자가 소리치는 겁니다. 뭐라고 소리칩니까? 내 형 제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이 곳에 왔거니와 내 사랑하는 형제들만은,내 사랑하는 부모들만 은, 내 사랑하는 후배들만은, 내 사 랑하는 친구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 게 하소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어 요.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꽃. 영원 한 목마름. 캄캄한 어두움.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통곡소리. 귀신 들로 가득찬 곳. 성경은 이것이 지 옥의 정체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분 이런 질문을 할지 몰라요."아니. 사 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그런 곳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까?"
잘들 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 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 을 위해 예비된 곳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 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 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 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 지막도 가 있는 것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입 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 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 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 다.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 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 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 마자 즉각적 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 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번째는 이것입니다.하나님이 달려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 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 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 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자, 여러분 어디로 가 기를 원하십니까?
천국입니까, 지옥 입니까, 둘중에 하나예요. 나사로 는 아마도 이땅에서는 어려운 삶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배불리 하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아먹었다. 얼마나 어려운 삶을 이 땅에서 살았 습니까? 그는 죽었을 때 아마 변변 한 장례식하나 지내지 못했을 것입 니다.
시청이나 구청에서 나와서 그 의 시체를 간단히 씌워갔을 것입니 다. 반대로 부자의 장례식. 아니, 부자의 삶자체가 호화로왔습니다. 그의 장례식도 호사로운 장례식이었 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 상황은 역 전됩니다.한사람은 영원한 빛의 나 라에서 또 한사람은 캄캄한 헤어날 수 없는 어둠속으로 떨어집니다. 이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 천국과 지 옥.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영원한 세계. 그곳은 한마디로 더 말하면. 네 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어떤 곳이냐?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지옥 에서 천국으로 갈 수가 없구요. 천 국간 사람이 지옥으로 갈 수가 없어 요.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26절 보세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가는 것 아니예요. 뭐 그런 것 가르치는 종교가 있습니 다만은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다시는 그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사건이 일 어날 수 없다. 지금 여기가 중요합 니다.이순간이 중요해요. 이순간 어 떤 결단을 하는가? 이순간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그것이 영원한 상태와 영 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 다.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죽는 그 순간은 이미 늦은 거예요. 이미 영원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가던가. 영원한 지 옥으로 가던가. 그순간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줄 아세요? 본문에 보면 사람이 죽는 그 순간 일어나는 다음 사건을 볼 수가 있어요.
22절에 보 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 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죽는 순간 누가 임했습니까? 천사들이 와 서 그의 영혼을 오늘 아브라함의 품 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올려갑니다.
천사들은 우리 영혼의 가이드. 이세 상에 살때도 하나님이 그를 보내서 그를 인도하셨다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영혼을 영원한 상태로 옮겨가 주십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할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오늘이 중요해 요.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내일 결 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은 우리 의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 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아 있는 질문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나는 과연 천국에 갈수 있을까? /눅23:39-43/ 이동원목사
2014-12-04 10:56:31
1492년까지 스페인령으로 스페인이 통치하고 있었던 저 유명한 지브랄탈 해역에는, 라틴어의 세글자로 된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세 글자인데 라틴어로, 네블루스 울트라, 네불루스 울트라, 영어로 번역하면 ‘노 모어 비얀더’ (NO MORE BEYOND)
그러니까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당시 스페인 사람들,그리고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곳이 지구의 끝이라고 믿었습니다.지구는 여기에서 끝난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가 끝이다.
그런데 왜 제가 1492년을 얘기했을까요? 1942년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이 이 지구의 끝을 용감하게 박차고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저 건너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든 지구의 끝,
그리고 참담한 벼랑만이 기다리고 있었든 지구의 끝을 넘어서서 그기에 미지의 새로운 대륙인 소위 아메리카가, 미 대륙이, 신대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그리고 이 표지판은 바뀝니다.
사람들은 첫 글자를 뗐습니다. 네어 라는 단어를 빠트렸습니다. 네어가 영어로는 노(No)거든요 N0, 단어가 빠지니까 이제는‘MORE BEYOND’ 저 건너편에는 많은 것이 있다! 놀라운 것이 있다! 이렇게 간판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죠. 죽으면 다 끝났다, 죽음 앞에 서서 우리는 다 끝났다 .내 끝이 가까워온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현상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현대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에 죽음에 관한 최대의 연구가는 하바드대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라는 그런 학자일 것입니다. 그분의 팀들은 소위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합니다.
‘니어 데스 익스피어린스’라고 그러는데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든 사람들, 우리가 보았을 때 죽었든 사람들, 그런데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의식세계만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연구했습니다.
그분의 쓴 책은 매우 학문적으로 어렵지만 그분의 조수들이 쓴 책들은 굉장히 여러 권들이 많이 세상에 소개 되었어요. 죽음 건너편에 뭐가 있는가?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든, 아니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했든, 병원이 사형선고를 내렸든,이 사람은 죽었다고 죽음의 진단을 내렸든, 이미 생명이 끊어졌다고 선언을 했든 사람들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드문 케이스들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경험의 세계, 그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돌아왔는지,
이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악몽을 경험하고 옵니다.
아주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고.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현상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돌아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터널을 잠시 통과한 후에 환한 빛의 세계가 기다리고있다 그리고 그 빛의 세계를 잠깐 발을 디뎌 놓는 순간 너무너무 좋았다. 다시는 돌아오고싶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고싶지 않았다
성경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고할만한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도 천국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챤스는 반반 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지나간 세계의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런 유명한 얘기를 했어요.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겠죠? 천국이 없어도,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었으면 갈 수 있었든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그래서 자기를 도박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다면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
그래서 저는 죽기직전에, 죽기직전에 극적으로 죽음을 보장 받고,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고,그러니까 죽은 이후에 천국이라는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고,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의 이야기를 잠시 나눌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 누가복음23절 39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님과 더불어 양쪽에 매달린 두 강도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다 강도였고 두 사람이 다같이 행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심경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한 사람은 여전히 죽어가면서 저주하고,죽어가면서 욕설을 퍼붓고,죽어가면서 몸부림을 치는 그를 향해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한 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그 정죄를 받고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은 우리 가운데 매달린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에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갑자기 자기 곁에 매달린, 자기 곁에서 꼭 같이 몸부림치고 고통하지마는, 뭔가 달랐든 자기 옆에 매달린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여, Oh Jesus!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 예수님은 역시 똑같은 고통 속에서, 똑같은 몸부림 속에서, 똑같은 신음속에서, 그러나 그 곁에서 이 고백을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서, 천국에서 깨어날꺼야’
어떤 미국의 목사님이 병을 앓고 거의 죽어가는 분에게 이사람 얘기를 하면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 받은 사람의 얘기를 하면서, 선생님 지금도 늦지않았어요 이 강도처럼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국 가셔야 합니다.
이 사람이 아프면서도, 사람은 아파도 자존심이 있잖아요? 그래서 하는 소리가 목사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하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대요.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셨습니까? 선생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아,저 하나님 모르니까 제 자신을 위해서 살았겠죠. 그럼 선생님, 이분이 마침 은행계통에서 일하든 분이였다고 합니다. ‘
그럼 선생님 지점장도 많이 하셨죠?’ ‘녜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뉴욕은행의 지점장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본부는 따로 있고 거기 지점장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지점장으로서 본부의 상부의 지시와 전혀 상관없이,
은행을 소유한 사주의 견해와 상관이 없이 마음대로 돈을 쓰시고 그리고 본점에 하나도 보내지않고 다 쓰셨으면 그런 사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강도겠네요?
하하~ 강도겠네요. 선생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하나님을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그게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계시더래요.
그런데 어떤 부자가 죽어가면서, 갑자기 죽어가면서 자기 식구들 보고 변호사 불러달라고, 변호사하고 의사를 불러오라고, 변호사와 의사를 불러오라고, ‘아니 아버님 갑자기 왜 변호사와 의사에요?’
‘나도 예수처럼 죽고싶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그러니까 ‘나도 두 강도 사이에서 죽고싶다’ 하하하~ 변호사님, 의사님 계시면 참 죄송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의료보험 많이 빼앗기고 재판하다 보면 법률가들에게 주는 돈이 참 많거든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 강도죠? 자기 이기심의 만족을 위해서, 내가 작은 이익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만이 강도가 아니라,누구나 다 강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밤 저는 여러분과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어요.Good news를 말하고싶어요. 오늘밤 저는 슬픈 소식을 말하고 싶지않아요.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우리 대통령께서 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는 놀라운 소문을 들은 날인데, 어떻게 비극을 얘기합니까?
하하~ 좋은 소식을 얘기해야 옳을 것입니다.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이것입니다. 복음은 이것입니다. 강도도 천국 갈 수 있다! 할렐루야? 하하~ 녜, 강도도 천국 갈 수 있다. 강도도 천국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냥 가는 거는 아니에요.
어떻게 했어요?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가 천국에 갈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을 기독교의 용어로 말하면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신앙고백 때문에, 그게 무슨 말 입니까?
그걸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이 말도 어렵죠?
자, 다시 풀어보겠습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천국을 보장 받고 눈을 감을 수 있었든 이유, 첫째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했어요.
자, 누가복음 23장40절에 보시면 이 강도한 사람이 다른 강도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절에 그 다음절에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이렇게 죽는 것이 이 십자가에서 이런 처형을 받는 것이, 강도로서 다른 사람의 재산에 해를 끼치고 아마도 생명에도 해를 끼쳤을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죄값이다. 이 한 사람은 분명한 죄의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모든 사람, 여기 서 있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의인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영웅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성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견해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내 심장을 꿰뚫어보시고 겉으로 표출된 내 행동의 배후에 있는,
내 삶의 동기를 살피시며 가장은밀한곳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고있었던 내 삶의 모든 모습을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여러해 전에,영국에서 런던의 장난치기 좋아하는 청년 하나가 장난을 쳤습니다. 런던의 가장 유명한 사회적 저명한 명사 40명의명단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똑같은 Telegram,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전문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났음 피신하기 바람’ 그 다음날 40명이 다 없어졌습니다.하하~
사람은 다 죄인이에요.그런데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이땅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이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줄 모르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다.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이 세상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 밖에 없어요.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이 있고, 내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아는 죄인이 있다. 전자는 희망이 없다. 절망이다. 그러나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예수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세상에 어차피 의인은 없으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 다음에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느니라.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나는 의사야, 나는 병자를 위해서 왔다,
여러분 병자의 치유의 희망, 병자가 고침을 받고 건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은 뭘까요? 그것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의사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아파요. 제 여기아파요 막 쑤시고요, 결리고요, 괴로워요, 아파요. 이것이 정확한 진단의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건강의 시작인 것 입니다.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날 내, 이세상에서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 용서 받은 자로 하나님나라 천국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첫째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 강도처럼 말입니다.우리는 이렇게 죽는 것이 옳아, 좀 원색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죽는 것이 싸, 강도질하고 살아왔던 인생, 이 인생을 위해서,나를 위해서만 살아왔든 내 인생은 이렇게 죽어도 마땅해,
나는 죄인이야, 우리는 정죄된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첫번째 단계에요.
두 번째,나는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두번째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두번째 단계입니다.
자 다시 한번 오늘 본문에 있는 이 회개한 강도의 이 부르짖음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요. 40절에, “하나는 또 다른 그 사람 다른 강도를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않느냐?”
이 강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시작되었어요.두려움, 두려움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이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두려워해요. 왜 사람들이 죄를 범할까요? 죄를 범하는 이유, 하나님이 두렵지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나를 심판한다, 내 말도 심판하고, 내 행동도 심판하고 내의식, 내 생각까지도 심판한다.
내가 한, 쏟아놓은 모든 말, 내 모든 행동, 어느날 나의 창조자 심판자 앞에서 내 일생은 낱낱이 심판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여러분 참으로 믿는다면 죄 범하겠어요?
저는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든 사건하나가 있습니다. 요즘 이러한 시대가 좀 뒤떨어진, 벌써 얘기일줄 모릅니다마는, 저는 80년도 말에 평양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만해도 평양 가는 사람 많지 않았으니까, 조금 두려워하면서 갔어요.그래서 뭐 마치 무슨 순교자의 걸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뭐 이런 얘기까지 하고, 평양으로 갔다온 적이 있어요. 몇몇 목사님들하고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도착해서 이제 호텔에 들어가는데, 사실은 평양 가기 전에 베이징에서, 북경에서 우리 같이 가는 일행 몇 사람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북한에 가면 호텔 안에서 모든 얘기가 다 감청 되고 도청될 테니까 우리 호텔 안에서는 극도로 조심하자, 그런데 한 분은 또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거기는 다 도청장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낱낱이 행동을 다 감시하는 시청장치도 있다. 그러니까 호텔 안에서는 절대로 우리 얘기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끼리할 어떤 중요한 얘기 있으면 우리 바깥에 나와서 버스 탈 때, 걸어 다닐 때 길에서 얘기하자 이런 약속을 단단히 하고 우리가 갔거든요?
딱 평양에 도착해서 이제 호텔에 싹 들어갔어요. 저는 호텔에 들어가서 호텔내부를 제 평생에 그렇게 유심히 관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하~녜, 그래서 그날 따라 보니까 호텔내부에 방에 뭐 이렇게 뾰죽한 게 나온 게 있으면 이건가? 이건가? 내가 무슨 엔지니어나 된 것처럼 호텔의 내부구조를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천정주변에 뭐가 하나가 있어요.맞아! 저기서 나를 보는구나,하하~ 이런 생각이 들자 머리가 싹 서더라구요. 그러니까 정말 조심하게 되더라구요. 저는 평생 호텔방에서 그렇게 거북하게 정중하게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하하~.
그 이튿날 나와서 이제 우리가 좀 거리에서 그 얘기를 하는데, 저하고 같이 갔든 아~옆에 방에 드셨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목사님 한 분이 그러더라구요 자기는 아예 옷을 다 입고 주무셨데요 하하~
그래서 아무리 목사님 그래도 그렇게 옷까지 다 끼어 입고 어떻게 그렇게 주무셨어요? 그러니까 웃으면서 하는 소리가, 아니 공산당이 보는데 어떻게 빤스 바람으로 자냐?
하하하~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 그가 나를 감찰하고 있다.
우리가 시편에 보시면, 구약성경에 시편에 이 시편을 기록한 기자가 이런 말을 쓰고있습니다. 주께서는 나의 앉고 일으서심을 보셨나이다.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행동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내가 하늘 저 높은 곳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가 저 음부의 깊은 곳에 가서 눕는다고 할찌라도 내가 저 바다 끝으로 새벽날개를 치면서 가서 거한다고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시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하나님 전지하신하나님, 인생을 지어 만드신 창조주, 우리의 낱낱이 모든 행동과 생각을 살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이것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죄범할 수 있을까요?
죄범?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무슨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까?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보지않는데, 아니요! 불꽃같은 안목으로, 그렇습니다.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불꽃같은 안목으로 나를 꿰뚫어 보시고 내 깊은 패부를 살피시며 내 생각의 밑바닥을 살펴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내가 그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이것은 회개의 시작이에요 회개의 시작. 벌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시작이에요.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주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내가 이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을 것인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성경은 그것을 경외라고 말합니다. 그냥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 성경은 이것이 진지한 회개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범한 것을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이 죄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삼판을 받을 것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그리고 내 어떤 공적을 들고도 내가 인생을 살면서 조금 잘해놓은, 조금 잘 해놓은 일, 내가 조금 한 자선사업, 그거 가지고 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그거 가지고 설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 번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 처럼 해야할 이 세 번째의 일,
그는 예수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자기의 구원을 호소합니다. 예수님께 매달려 자기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십시요. 예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아니 예수님이 나라를 가지고 있나? 사람들에게 쫓겨다니고 핍박을 받았든 젊은이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이 강도는 예수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의 나라,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아니 예수님이 나라를 가진 분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리고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 나라에 저를 받아주시고 기억해달라고, 아니 예수가 그런 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오늘 이 말을 기독교인들은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메달려 고통을 받으실 때 두 번째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하신 말씀. 그런데 이 말씀 전에 첫번째로 하신말씀이 있어요.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첫번째로 하신말씀, 첫번째는 이것입니다. 그가 십자가가 세워지고, 골고다의 언덕에 이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놓고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던,
로마의 군병들 앞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저 예수 십자가에 매달렸다, 이 몸부림치면서 고통 당하고 피 흘리는 예수를 향해서 야유와 비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십자가 주변의 군중들과 로마의 병정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십자가상에 매달린 예수의 첫마디 음성이 이것이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저들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이때 그 얘기를 들은 옆에 있는 강도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 저분은 남을 용서하고있다 용서하고 있다.
여러분? 사람이 너무 너무 고통스러우면요 그 고통이 극점에 도달하면, 고통이 크라이막스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의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사람이 다른 생각을 아무것도 못한다 아프다! 그거 밖에는 생각을 못한다 고통스럽다,
고통.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의 극점에서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세요.이것이 옆에 있는 강도에게 충격을 준 것 입니다.
아니 저 분이 누구야? 세간에 떠돌든 그 동안의 소문처럼, 그 동안의 소문처럼 저분이 메시아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계신 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올 수 있는 분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시는 분, 그렇다면 저분이 나를 용서해 주신다면,
지금 저들을 향해서,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저분이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나도 용서 받고 저 천국에 그분의 나라에, 메시아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예수여,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그 말을 바꾸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 저를 구원해주세요. 쎄이러 미, 저를 구원해주세요.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이제는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를 위해서 매달립니다.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그리고 예수님을 용서할 수 있는 분으로 믿은 것 입니다. 그는 방금 전에 예수님의 선포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 격렬한 고통과 저주와 야유와 조롱을 받고도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기보다도 이웃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저 분은 메사아야, 맞았어, 약속된 메시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이시는 바로 그분이야,
그렇다면 내가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소망, 마지막 잎새 같은 최후의 소망, 그 소망을 예수에 걸고, 옆에 같이 고통을 토하지만 자기와 전혀 다른 그분을 향해서외칩니다. 예수여! 주예수여 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구원해 주십시요.
그때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은 낙원입니다. 파라다이스 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파라다이스를 말했습니다.
이상향을 말하고 유토피아를 말했습나다 그러나 이땅은 아직도 유토피아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상 유토피아란 말의 본래의 뜻을 아세요? 유토피아라는 말은 노 프레이즈, 그런 곳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하~ 유토피아는 그런 곳이 없어요. 세상에는 없어요.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진정한 낙원, 우리가 그리던 그 이상향,
우리의 꿈,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소망이 충족될 수 있는 그 진정한 나라 파라다이스, 천국은 낙원입니다.
그리고 천국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에요. 네가 나와 함께, 나와 함께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저는 예수님이 없으면 천국 갈 생각은 없어요. 사랑하는 그 분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이 있어서 천국은 진정한 파라다이스일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개척하면서 한 2년쯤, 그 동안은 제 아내가 미국에 있으면서 왔다갔다 했죠. 그래서 제 아내와 떨어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남자들이 다 그렇지만 저도 제 아내의 생일날을 잊어버렸습니다. 깜빡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의 생일날 제 아내가 저한테 전화를 했더라구요. 잘 들어십시요 제가 한 전화가 아니라 제 아내가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 오늘 내 생일이에요’ 보지는 안 했습니다마는 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아이 미안하잖아요. 제가, ‘아이 내가 깜빡 잊어버렸다’고 미안하다고, 그런데 ‘아이 괜찮아요, 괜찮아요. 우리 애들이 카드도 샀고요 꽃도 주었고요, 교인들이 또 아무개 교인 집에서 잔치를 해서 잘 먹었어요’.
그래 좀 이상하더라구요. ‘그런데 왜 전화했어?’ 그랬어요. ‘그런데 왜 전화했어?’ 그러니까 가까스로 하는 소리가 ‘그래도 당신이 없었잖아’, ‘그래도 당신이 없었잖아’ 이런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되세요?하하~녜,
제가 20대초에 저는 아주 철학을 좋아했습니다. 뭐 철학을 많이 알지는, 조금알지만 철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그래서 철학 책들을 읽고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아주 즐겨 읽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얼마되지않아서 아직도 신혼 때였는데 그때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래 회의가 일찍 끝났습니다. 어떤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일찍 끝났는데, 저가 너무 너무 가고 싶었던 곳이 덴마크였습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의 어떤 그림자를, 내가 청년 시절에 그토록 좋아했든 이 우수의 철학자, 이 키에르케고르의 발자취와 그림자를 좀 밟아보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저 혼자 비행기 일정을 좀 변경해서 코펜하겐으로 덴마크으로 날라갔어요.
그리고 부지런히 수소문해서 키에르케고르가 살던 집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그런 모든 것을 모아놓은 조그만 유지용, 이런 데를 왔다갔다 했어요. 처음에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했는데 저는 굉장히 기대를 갖고 왔거든요?
그러나 생각보다는 이렇게 많이 보존되어 있는 것도 아니였고 몇군데 다니다가 그날 오후에 호텔에 돌아오니까 너무너무 힘들더라구요.피곤하고,
그래서 왜 그럴까?내가,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던 코펜하겐의 거리,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의 집을 갔다왔는데 내 마음속에 흥분이 살아나지 않는 거 있죠, 별 그렇게 좋지 않더라구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녀가 없었거든요. 하하~그래서 그냥 아유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아마 와이프(Wife)가 옆에 있었으면 달랐을 꺼에요.
Wife가 옆에 있었으면, 저는 이민생활을해서 그 미국에 좀 살아봐서 아는데 미국에 사는 그 우리 한국 사람들 동포들 가운데 친척들이 다 미국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친척들이, 가족들이 다 미국에 살아요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한국에 별로 오고 싶어하지 않아요. 별로, 왜 조국을 그리워하는지 아십니까?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할까요?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우리를 용서해주신, 우리를 사랑해주신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시고 그리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를 텃치 해주시고 내게 꿈을 주시고 내게 기쁨을 주시고 노래를 주시는 그 예수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좋은 곳 천국에 있으리라. 자,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강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회개하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너무나 감격스러웠겠죠?
그는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알고있어요. 조금 있으면 내 생명이 끝날 것이 뻔합니다. 그는 얼마나 평안하게, 얼마나 감사한마음으로 얼마나 평안한마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맞아! 나는 그 분의 낙원에 저 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야, 그 낙원에 있게 될 것이야.
물론 저는 이 강도에게 후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을 일찍 만나서 저 예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나는 강도가 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는 내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터인데, 나는 이렇게 인생을 헛되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순간 죽음의 마지막 문턱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내가 저 분을 만난 것, 그리고 저 분의 보장을 받은 것, 저분이 나를 용서하신다고, 그리고 나를 받아주신데요.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주신데요.
그분과 함께 있게 될꺼라구요. 드디어 그분의 심장이 그 강도의 심장이 멎는 순간 그의 영혼이 육체에서 딱 분리되는 그순간 그 분 앞에는 낙원으로 가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 환하게 열려져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박관용 형제가 그 눈먼 사람이 소리치며 찬양할 때, 길이 어디냐?, 그 길이 어디냐, 그 길이 어디냐? 인생을사는,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로 가는 그길이 어디냐? 예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자가 없느니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분, 그분을 통해서 용서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갈 수 있는 길,
아무도 자기의 의, 아무도 자기의 공적,아무도 자기의 크레딧을 가지고 그 분 앞에 창조주 앞에 갈 수 없지만 예수 믿고 용서받아, 예수님의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그 나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떤 선교사 한분이 아프리카에 밀림을,정글을 마을마을을 찾아 다니다가 길을 잘 모르겠어요.그래서 그 토인 아프리카 정글지대에 살고있는 토인 하나를 길잡이로 자기 가이드로 고용을 했습니다.
내가 어느 마을에 가기를 원하는데 나를 그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자, 그런데 이 청년 가이드가 그래요? 저를 따라오세요. 돈을 주기로 하고 가이드를 고용하고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전혀 길 같지 않는 길로 계속 그냥 가는 거에요. 이게 어디? 정말 그 마을이 나올까?
그래서 가다말고 선교사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답니다. 그 청년에게 당신 길을 아시오? 이때 토인청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선교사를 바라보면서 이 선교사의 평생 잊지못할 대답을 하더래요.
선교사님, 제가길이에요. 내가 길이에요. 아임 더 웨이(I am the way) 내가 곧 길이이에요. 내가 길이에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저가 와싱톤 지구촌교회에 있을 때, 거기서 저와 같이 신안생활하든 한교인의 얘기를 마지막으로 좀 들려드리고 싶어요. 공치조란 집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공치조형제, 그 아버지는 장로님이셨습니다.
부인도 좋은 그리스도인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냥 아버지가 장로님이셨으니까 교회 근처에 항상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회 나오는 의미를 별로 몰랐습니다.
나왔다 안 나왔다, 제가 보기에도 늘 답답한, 목회를 하다 보면 교인가운데 답답한 교인 몇 사람이 있습니다. 제눈을 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분일지도 모릅니다. 녜,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였어요.
그런데 이분이, 뭐 그래도 좋은 분이에요. 열심히,이민생활 열심히 해서 드디어 세탁소를 차렸습니다. 미국에서 세탁소 차리면 그 인제 이민생활에 익숙해졌고 상당히 어떤 경지에 도달한 거에요.그런데 미국의 이민생활의 풍속도를 풍자하는 얘기가운데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들은 얘기에요.
제가 아는 분 한 분이 LA에 왔어요. 황집사님이라는 분인데, LA로 이민 오셔서 제가 만나서 집사님 요즘 뭘 하세요? 그러니까 이분이 목사님, 제가 LA를 쓸고 다녀요. LA를 쓸고 다녀요.그래서 뭘 하시는데요?
아 진짜 쓸어요.진짜, 진짜 청소해요, 그래요.청소하는 Job을갖고 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만났어요. 집사님 요새는 뭘 하세요? 아이 목사님 제가 LA를 누비고 다닙니다. 누비고 다닙니다. 그래서 뭘 하시게요?
그러니까 봉제공장 다니세요.하루종일 누비는 겁니다. 봉제공장, 그런데 다시 한 2-3년 흘러가서 또 그분을 만났거든요. 집사님 뭘 하세요?그러니까, 목사님 제가 드디어 LA를 주름잡게 되었습니다.하하~그게 뭔 줄아십니까?
그게 세탁소에요. 세탁소가 하루종일 주름 잡는 거 거든요? 뭐 그러다가 조금 더 나가면 이제 뭐 모텔도 사고, 개스 스테이션도하고 그게 이민 가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속도, 삶의 이야기거든요? 이분이 인제 세탁소 차리니까 살만큼 산 거에요.
이제 얼만큼 어떤 자리에 돈도 좀 만지게 되었고 그래서 워싱톤 지역에서 돈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운데서 부토멕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네를 부뜨막이라고 불렀습니다. 부토멕,
하하~ 거기 아주 큰집도 이렇게 샀었어요. 그런데 살만하게 되었고 나이 40이 조금 넘었는데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첵크를 딱 받아보니까, 암이에요. 위암이에요.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런데 뭐 제가 이제 방문을 하는데, 이분이 평소에 와서, 교회에서 뭐 항상 뒤에 앉으세요. 항상 뒤에 앉아요. 제 시선을 피했어요. 구석진 곳,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교회에 하하하~ 졸다가 이렇게 나가시고, 어떤 때는 빠지시고,
하하~ 그런데 이분이 저가 병원에 심방을 갖더니 제 설교테잎을 들어요.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목사님 말씀이 꿀같이 달아요. 하하~항상 교회에 와서 졸든 분이 말씀이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요.
아파서 병원에 들어가서 조용히 앉으면서 그때부터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거에요. 설교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저 목사님 제가 너무 죄를 많이 지었어요.그리고 이제 정말 복음을 알겠어요.십자가를 알겠어요.
어느날 제가 갔더니 ‘저 정말 이제 예수님이 제안에 게세요 저 여기서 일어나면 저 열심히 이제 주님 섬길꺼에요’. ‘그래요 집사님 꼭 일어나셔야 돼요’ 이제 그러면서 제가 계속 찾아간 거죠.
그런데 몸이 계속 쇠약해져요 계속 쇠약해져요.그러다가 조금 회복이 되시는 것 같더라구요. 잠시 퇴원을 했어요. 퇴원을 할 무렵이 였습니다. 퇴원을 할 무렵인데 그때, 와싱톤지구촌 교회에서, 지금 여기서도 우리교회서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만 성지순례를 간다고 그러니까,
이분이 성지순례를 가겠데요. 그래 암환자인데, 앓든 분인데 그러니까 뭐 주치의가, 아이 힘드시다고, 안 된다고, 그런데 꼭 가겠데요. 저한테 좀 얘기를 해달라고, 주치의도 우리교회 집사님이고 의사선생님이시니까,
그런데 이분이 너무 간절하고 제가 보니까 마음속에 어떤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아,그러면서 ‘저 예수님이 걸으셨든 그 땅을 밟고싶어요’ .예수님이 걸으셨든 그땅을, 그래 제가 그 주치의 되시는 분한테 좀 강요를 했습니다.
‘좀 허락을해주세요. 이분이 너무 가고싶은 모양이에요.하나님이 도와주실꺼에요 잘 갔다오시도록’ 그래 갔습니다.
이분이 성지순례팀에 그 참가를 해가지고, 같이 간 거에요.그래서 이스라엘여러 곳을 다니다가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그 마지막극치,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든 삐아돌로 로사의 피묻은 길,
세 번씩이나 쓸어지셨다가 다시 일어나신 그길, 성묘교회라는 곳, 과거에는 성문 밖 골고다의 언덕 그 언덕을 십자가를 지시고 쓸어지셨다 일어나셨다 걸어가셨든 그 거리, 그 거리를 제가 가다보니까 그분이 제 옆에 딱 있더라구요 그런데 너무 힘드신 것같에요. 몸의 표정이, 집사님 저 붙들고 같이가요.
그래서 제가 손을 딱 붙들고, 이분을 붙들고 같이 그 길을 걸었어요. 걸으면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쭉, 그 길에 내력 옛날에는 여기보다 조그만 산에 탑이 낮았다고, 보시죠? 조금씩 조금씩 높아지죠?
저기 있는 교회, 저기가 사실은 성문 바깥이에요. 골고다 언덕이거든요 과거에, 예수께서 이 길을 가셨어요.
넘어지시고 다시 일어서시고 피를 떨구시면서 가신 길이죠. 제가 이런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그 분이 목사님, 이 길 때문에 하늘가는 그 길도 우리가 가는 거죠?그래요.
이 길 때문에 하늘가는 그 길을 가는거죠? 맞아요. 십자가의길, 예수께서 걸으셨든 십자가, 내 대신 걸으셨든 십자가, 나 대신 못 박히신 십자가, 나 대신 피 흘리신 십자가,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죄 용서 받고 하늘가는, 천국 가는 그 길이 열린 거에요. 제가 설명을 해드렸어요. ’
그러네요.’ 이분이 막 감동을 하면서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때는 전통적으로 성지순례객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찬양을 부르면서 그 길을 쭉 걸어올라갔어요. 성지순례 잘하고 오셨어요. 잘하고 오셨어요. 그리고 한 석달 후에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떠나시기 직전에 저가 제가 현장증인은 아니지만 사모님 한테 들은 얘기인데, 갑자기 코마상태 속에,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있든 이분이 갑자기 순간적으로 깨어나더래요. 잠시 깨어나더래요.
그러더니 일으켜달라고, 그래서 침대에서 일으켜드리니까 하늘 가는 길이 보여요! 하늘 가는 길이 보여요. 설명할 수 없는 광채가 희열을 가지고 손을 들고 할렐루야, 하늘 가는 그 길이 보여요.
내 사랑하는 형제 공치조 집사님이 가셨든 그 길,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회개한 강도가 갔든 그 길, 하늘가는 밝은 길,그의 죄많은 인생, 그의 허물 많았든 인생, 그럼에도 불과하고 감히 사랑하는 주님에게 천국을 보장받고 마지막 순간에 이 놀라운 말씀을 들을 수 있었든 이 강도,
‘네가 말이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어떻게, 어떻게요. 그가 자기의 죄를 인정했으므로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매달리면서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저를 구원 주시구요. 당신의 나라가 올 때, Remember me 나를 기억해 주십시요. 주님은 이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그의 심장이 멎는 순간 이 밝은 길을 통해서 주님의 품안에 안기는 그 순간 죄송해요 주님, 잘못 살았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염려마라. 염려마라 이제는 다 잊어버려라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거야. 영원히 나와 같이 여기 있는 거야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같이, 우리 다같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축복하는 기도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해주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하시고 오늘 결심한 이분들을 축복해주시옵소서. 안아주시고 받아주시고 오 하나님 저들의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 아버지 하나님 함께하시고 저들의 마음을 붙들어주시고 저들의 일생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보십시요 이들이 이렇게 결단하며 일어서서 예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의 주님이 되십사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십사고 오 하나님 저들의 아름다운결단과 기도를 들어셨을진데 십자기상의 그 강도에게 주셨든 말씀을 주시옵소서 ‘네가 오늘부터 나와 함께 같이 있는 거야, 그리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나와 같이 더불어 있는 거야’ 하나님 이제 이 천국의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예수님과 함께 기쁘고 아름다운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경 읽고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제하며 멋지고 아름다운 풍성한 인생을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들, 천국의 백성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제는 다 주님 앞에 맡기는 것 입니다. 혼자 괴로워하고, 혼자 외로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 바라보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지옥이 확정된 사람들 P1 /눅13:23-24/마7:13-15/ 오목사
2015-07-29 10:27:07
◑서론/ 양면을 다 보는 균형 잡힌 신앙.
▲어떤 전도사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위대했던 하나님의 사람들, 찰스 피니, 조나단 에드워즈..
그런 사람들은 모두 한 결 같이 회개의 메시지를 외쳤고,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자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 나라 미국을 다시 한 번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는데, 요즘은 그런 메시지를 들어보기가 어렵습니다.
저도 전도사, 설교자로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렇게 물어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매 시대마다, 그때에 맞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시대적인 메시지’라는 것을 주십니다. 그 메시지를 받아서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오늘 이 설교의 본론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시는 메시지는, 혹시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메시지는
다 우리가 받을만하고,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겠죠?
▲그래서 그런 부분이 어려운 부분이 될 수도 있는데,
여러분은 축복이 좋으세요, 저주가 좋으세요?
저주의 메시지가 좋은 분은,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저도 축복의 메시지를 듣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저주이야기를 조금 해야 될 것 같아서
제가 먼저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까? 저주의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이 맞아요? 하나님이 저주도 하시나요?
먼저 신명기 28장 1절부터 14절까지만 봅니다.
거기에 보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니까.. 너무 듣기에 좋죠?
‘야~ 이렇게만 되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되겠다!’
그런데 저는요, 과거에 신명기 28장은, 14절까지 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깐,
신명기 28장은 14절까지 있는 것이 아니라, 68절까지 있더군요.
그런데 처음에 제 눈에는, 14절까지만 보인 것입니다.
그 이하 나머지 구절에는, 제가 전혀 관심이 없었죠.
아시다시피, 14절까지는 축복인데요, 15절부터 68절까지는 전부 저주더라고요.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저주의 목록이에요.
저주의 목록이 축복의 목록보다, 무려 3배나 더 많고
저는 무슨 의학백과사전 보는 줄 알았어요. 무슨 질병이 그렇게 많은지..
하나님은, 축복보다 저주를, 훨씬 더 자세하고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셨더라고요.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축복은 14절만 말씀하시고,
저주는 무려 3배가량이나 더 많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신앙의 양면성>을, 둘 다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서, 신명기 28장 2절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칠 것이다.’ 아멘.
그러나 15절을 보세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다.’
이 모든 축복도 있지만, 이 모든 저주도 있다... 즉, 양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면이 있는 줄 모릅니다. 우리는 늘 한쪽만 보려고 합니다.
내가 보고 싶은 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원하니까, 결국은 건강한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 되려면
우리의 신앙이 정말 균형 잡힌 신앙이 되려면
우리는 성경에 모든 진리를 다 받아 들여야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경은 축복도 이야기하지만, 저주도 이야기해요.
성경은 생명도 이야기하지만, 사망도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천국도 이야기하지만, 뭘 이야기합니까? 지옥도 말씀 합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둘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돼요.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사랑과 진노를.. 두 측면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돼요.
▲원래 자녀들을 키우다보면, 애들은 절대로 입에 단것만 먹죠? 쓴 것은 안 먹죠.
그거 건강한 거에요, 좋지 않은 거에요? 좋지 않은 거지요.
쓴 나물도 먹어야 하고, 때로는 느끼하거나 매운 것도 먹어야.. 영양분이 골고루 섭취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싫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모두 다 받아들일 줄 아는 그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숙한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 내 귀에 듣기 좋은 것, 내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
그런 것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나에게 유익이 되는, 나를 붙들어주는,
그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요, 제자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좋은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자가 많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만 아니라, 하나님은 무서운 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도 묘사되지만
-유다지파의 사자(심판자)로도 묘사가 되는 거에요.
이것을 둘 다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숙한 신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제가 여러분에게 서론을 뜸을 들인 이유가 있는데요..
성경의 양면을 보자는 것이었죠...
◑본론 / 구원 받기가 쉽지 않다는 성경구절들
▲1.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가 선뜻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쉽게 이해가 안 돼요. 본문 누가복음 13장 23~24절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제 질문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던 제자들,
그 청중들이, 이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도대체 천국 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위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구원 받는 자가 적을 것입니까?’ 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그렇다, 적다’ 라는 식으로 예수님이 답변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뭐냐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이 말은 들어가기를 애써도.. 들어가기를 힘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2. 또 한 번은 마19장에, 예수님이, 부자관원과 대화하시면서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나눠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그래서 그는 근심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축약하면, ‘그렇게 어렵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서두에서, 성경의 양면성을 다 보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에 관해서도, 쉽다/ 어렵다.. 양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쉬운 면만, 그 한쪽 면만 일방적으로 보고/가르치고/배우고 있습니다.
오늘날 2013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예수님 말씀을 다 듣고 나니깐, 그러면 구원을 받을 자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위에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란 질문에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고 답변하십니다. 마19:26
그렇다고 이 말씀이, ‘구원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뉘앙스입니다.
▲3. 또 한 구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마7:13절에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좁은 문은 어디로 인도해요?
생명으로!
넓은 문은 사망으로!
여러분은 생명을 원하세요, 사망을 원하세요?
생명을 원하신다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문을 찾으시면.. 안 됩니다.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없는..”
그 좁은 문, 그 좁은 길로 가셔야..
생명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은
‘에게게...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저래?’ 사람들이 그런다는 거에요.
문이 좁고, 문이 형편없이 보인다는 거예요. (요즘 말로 비주얼이 형편없습니다.)
그런데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어때요? 으리으리하다는 거예요.
무슨 대궐문 같고, 넓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따라가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우르르 몰려다니는 데가, 더 안전할 가능성이 많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많은 사람이 몰려간다고,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닐 수 있다는 거지요.
오히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문이 좁고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습니다. 찾는 이가 적습니다.
반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습니다. 찾는 이도 많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죄송한 표현을 한 번 쓴다면) 거기는 개나 소나 다 들어갑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일단 찾아서 들어오는 이도 적습니다. 뭐 매력적인 것이 눈에 확 안 띕니다.
▲위 구절에서 제가 멈추고 눈여겨 본 구절은,
‘그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애쓰고 힘을 쓰면.. 다 들어갈 수 있다’가 아니라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애쓰고 힘을 써도.. 못 들어가는 자가 많다’ 입니다.↓
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힘쓰고 애쓰기만 하면.. 다 들어갈 것이다..’ 가 아니라,
‘힘쓰고 애를 써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가 있을 것이다..’ 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는 사람들’
즉, 오늘날 현대 교회의 신자들이 대다수가 이렇습니다.
‘이신칭의 신학’ 때문인지.. ‘값싼 은혜’ 때문인지..
자기 구원에 대해, 힘쓰지도 않습니다.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낙제입니다.
공부 못 하는 학생이, 공부하고 애를 써도, 명문대에 합격하기 어려운데,
아예 힘도 쓰지 않고, 애도 쓰지 않으면.. 불합격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명문대학에 들어갈 것으로, 당연히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직하게 말씀을 대하면
우리가 지금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죠?
1단계로 좁은 문을 찾는 사람도 적습니다.
그런데,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이 그 중에 일부 있다고 칩시다.
2단계로, 그 좁은 문을 찾은 일부 사람들이, (즉, 오늘날의 교적에 오른 신자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애를 써도, 들어가는 이가 적어요? 많아요?
예수님 말씀에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각에서,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환상에 의하면,
‘구원 받고, 천국에 온 사람들이 많더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못 들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의 증언이,
‘천국에 온 사람들이 적더라’입니다.
물론 우리가 환상을 보고, 천국에 갔다 온 사람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경에 일치하는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대중이 majority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도그나 카우나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신가요? (예)
하나님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길 원하시나요? (예)
그러면 이거 뭐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길 원하신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문도 넓게 만들어 놓고
우르르 들어갈 수 있도록 그러셔야지..
천국에 들어가는 문도, 좁게 해 놓은 데다가
‘들어가기를 애써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눅13:24.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심각한 질문을, 거의 다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천국에 당연히, 자동적으로, ‘하이패스’로 논스톱으로 통과할 줄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명기28장에서, 14절까지만 읽고, 나머지 68절까지는 대충 건너뛰듯이,
성경의 구절을, 요3:16절 등 몇몇 요절 중심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지옥길, 그 넓은 길을,
오늘도 사람들이 “대다수”가 그 길로 달려가고 있고,
그것을 올바로 가르쳐주어야할 영적 지도자들이, (아래에서 살피겠지만)
그 중에 상당수가 눈이 가려져서 ‘축복의 말씀!’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 축복!’ 하면서, 지도자와 양떼가 다함께 넓은 길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요, 중대한 기도제목입니다!
‘저는 당연히 천국가지요.
제가 누굽니까, 제가 삼 대째 기독교 집안에다가
지금 직분을 맡아서 봉사를, 7년이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 말을 믿지 마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세요.
우리의 질문은
‘이게 정말 진짜인가, 진짜 예수님의 말씀인가?’
그걸 묻고, 그걸 분변하셔야 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너와 나의 영생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
고의로 그런 분은 없겠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을 많이 인도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사람들을 적게 인도하는 사람도.. 복음을 올바로 전하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안이 열려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3~15
위 구절을 보십시오. 13~15절을 연결해서 보면, 한 단락으로 보면,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자가, 바로 거짓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넓은 문, 좁은 문을 말씀하신 직후에, 연결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3편 /마13:47/마22:1-14/ 오목사
2015-07-29 10:37:29
예복의 참 의미
믿음과, 그 믿음에 자연적으로 ‘따르는’ 행위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입니다.
간혹 위조지폐나, 위조주화가 있습니다. 한 면은 있는데, 반대 면이 백지입니다.
위조지폐 같은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위조’니까요!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다.
마지막 심판 때는요, ‘믿음으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심판하지 않으시고요,
하나님은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진정성은, 그 행위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7가지 예만 살펴 보겠습니다.
물론 7가지만 나오지 않고, 성경 곳곳에 더 많이 나올 것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 각자 조사해 보세요.
◑최후의 심판 때,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절 7가지
▲1. 마8:1~13절에 보면 <백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중간에, 종말에 관한 내용을 곁들이십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자 이것은 세상 끝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지요.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8:11~12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십니다.’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에요? ↓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그의 믿음은, 들으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이에요.
지금 이 설교의 주제는, 종말의 심판 때는,
믿음+행함으로 심판받는다는 예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믿음이 뭐가 그 자체로 부족해서, 믿음에 행함을 보탠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믿음 자체에, 행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첫째 예로,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즉각 순종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2. 마13:38~42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자 무엇에 관한 이야기에요? 세상 끝에 관한 이야기.
예수님 초림이 아니라, 재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누구를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왜 이들을 풀무 불에 던져져서,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어요?
불법을 행했기 때문에.
여기도 보세요.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심판하십니다.
(물론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또 다시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해서 한 말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믿었죠.
다만 그 뜻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내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그들을 향해서 말한 것입니다.
▲3. 마13:47~48 <그물에 잡힌 물고기의 비유>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하다고 그랬습니다. :48
교회 안에도, 신자가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물 속 물고기가, 다 그릇에 담겨졌으면 좋겠는데..
그건 우리의 바램일 뿐이고요,
나쁜 물고기는, 내다 버린다고 그랬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끝에도,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낸다고 했습니다. :49
여기서 ‘나쁜 물고기’는, the bad인데,
또 ‘악인’은 the wicked 인데.. 모두 ‘행위’와 관련된 의미입니다.
‘믿거나/ 안 믿거나’의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believe or not 이 아닙니다.
▲4. 마22:1~14 <혼인잔치의 비유>
오늘 본문의 우리가 말하는 혼인잔치의 비유. 예복을 입지 않는 그 사람.
그 사람을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성경에서 ‘옷’은, 주로 우리 교인의 ‘행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관련글/ 예복의 참 의미
▲5. 마24:45~47,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여기에서 말 하는 ‘종’은 누구를 말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포도원, 이스라엘 백성들을 누구에게 맡겨주셨어요.
종교 지도자들에게 맡겨주셨어요.
그런데 48절에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서 왜 이 악한 종이 슬피 울며 이를 가냐면
1) 주인이 더디 온다고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더디 올 것이다.. 라고 믿는 종은 악한 종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주님이 곧 오신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선한 종입니다.
그런데 위 말씀처럼 ‘주인이 더디 온다’ 라고 믿는 종은 무슨 종? ‘악한 종’입니다.
2) 그 다음에 동료들을 때려요. 그런데 동료들을 왜 때려요?
‘주님이 더디 온다는데.. 너는 왜 금방 온다고 해?’ 그래서들 때리는 거죠.
자기가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에, 그들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짜 술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 취해서, 현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산다는 뜻이죠.)
그들이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올 줄.. 믿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믿음의 열매가.. 옳바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6. 마25:26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누군데요?
달란트 하나 받고 땅 속에다가 잘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예수님 오시니까 하나 여기 있습니다. 라고 내놓은 그 종.
그 종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약하고 게으른 종아!’ 그러면서
그 종에게 하신 말씀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악하다’는 것도.. 행위요,
‘게으르다’는 것도..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믿음이 아니라요!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확실히 회계 결산 account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건강도, 물질도, 은사도, 재능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잠시 빌려서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실 때, 물어보실 것이에요.
‘내가 너에게 이렇게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게 해주었다.
너는 부모를 잘 만나서 온갖 교육을 다 받게 해주었다.
너는 명문 대학을 나왔다. 너는 이런 재능을 내가 주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너는 내가 준 것 갖고 뭐했냐?’
‘예, 제가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땅 속에다 고이 그대로 묻어두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 악한 종아. 이 게으른 종아. 저 바깥 어두운 데로 가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D. L. 무디가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드와이트 레이맨 무디
무디는 수 많은 영혼들이 지옥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천국에 보내려고 밤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셀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한 번은 설교가 끝나고 나니까 시카고 모 교수가
‘무디 목사님 오늘 목사님 설교하는데 영어 문법이 얼마나 많이 틀린 줄 아십니까?’
그때 무디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맞아요 교수님 저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요. 문법이 많이 틀려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틀리는 문법 갖고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교수님은 잘 하는 문법으로 뭘 하십니까?’ (사실이 그렇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인 것이지요)
▲7. 일곱 번째 눅13:23~28절, <너희>
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서 천국에서 쫓겨난, ‘너희’는 누구인데요?
23절에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
24절에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 말씀은 전에 자세히 설교했습니다. ☞애를 써도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SKY 대학에 들어가려면.. ‘좁은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어가길 힘써도,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눅13:24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는
들어가기를, 아예 힘쓰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당연히 ‘SKY’에 들어갈 줄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미혹 때문인 것입니다.
25절에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주님, 주님이 저희를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 우리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닙니까? 그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27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먹고 마신 적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불신자들 입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가 뭔데요. 좁은길로 안 갔다. 여기까지 보면 울며 이를 갊이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한 것입니다.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심판에 관련된 구절들을, 개인적으로 다 조사해 보세요.
‘행위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 심판’도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주제
▲사도행전 26:20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바울은 믿음만을 외친 사람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뭐라고 말했어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간 다음에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내가 이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도바울을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하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드리겠습니다.
이 예복이 진짜 칭의에 관한 것이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그 사건을 말 하는 거냐.
아니면 정말 이 예복은 그 이후에 우리의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말하는거냐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 이것은 계시록 19장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은 비유입니다.
마지막 때에 혼인잔치에 있을 일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계시록 19장은 실제 사건입니다.
그러면 비유와 실제 사건을 보면 그것이 매치가 될까요, 안 될까요?
물론 정확하게 매치 되지요.
그러면 계시록 19:7절을 소리내어 읽겠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 말씀은 혼인잔치에 관한 실제 상황입니다. 자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실제 상황을 사도 요한이 미리 보았습니다.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준비되었다. 신부가 준비 되었다.’
그런데 그 신부에게 무엇을 입히셨다고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무엇을 입으셨다고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이 세마포는 그냥 세마포가 아니라 빛나고 깨끗함입니다.
그런데 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뭐냐.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믿음이다? 아니잖아요. 뭐라 그랬어요?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심각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세상 끝 날. 저와 여러분은 이 혼인잔치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우리 영혼을 결정할 운명의 순간에 그 순간에
그 혼인잔치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믿음 입니까. 행함입니까?
진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있다는 것이에요.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세마포는요. 두 가지 중요한 묘사가 있는데
하나는 빛나는 세마포,
또 하나는 깨끗한 세마포. 깨끗하다는 말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정결하다는 이야기에요.
빛난다는 이야기는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거룩한 삶을 말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저는 여러분들에게, 3차례의 설교를 통해, 3가지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마21장 22장에서 두 아들의 비유,
마21장 포도원 농부의 비유,
본문 마22:1~14의 혼인잔치의 비유.
이 세 가지를 통하여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고 싶으셨냐면,
예수님은 무엇을 지금 말씀하시려고 이렇게 공을 들이셨냐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느냐.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첫 번째로 두 아들중에 내가 아들이라고 해서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그 아들이 천국에 들어간다.
두 번째, 내가 아들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렇게 떠들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자가 들어간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세 번째로 혼인잔치의 비유. 예복을 입는 자가 들어간다.
이 세 비유는 모두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들은, 정말 빛의 자녀들은 회개하고 믿어 순종하는 자들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정결하고 거룩한 삶의 예복을 입는 자들이다.
이들이 천국에 들어간다.
우리는 이미 천국의 비밀을 통해서 이미 임한 천국에 대해서 말씀 들었어요.
이미 이 땅에 임한 천국. 그 천국이 내 마음 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천국은 나하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이 땅에 임한 천국을 받아들이고 누리며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장차 임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교리사의 흐름 파악하기
16세기에 하나님은 루터를 들어 쓰셨어요.
루터를 통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믿음이 있고 그 다음에 행위니까
그래서 그 믿음을 회복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200년이 지난 다음에 하나님은 웨슬리를 높이 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뭐에요. 믿음만 강조하다가 삶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믿었으면 그 다음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웨슬리를 쓰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약 200년이 지나서, 20세기에 성령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믿음도 그렇고 거룩한 삶도 그렇고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이에요.
내 힘으로 되요 안되요. 안되기 때문에 성령을 주신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룰 수가 없어요 거룩한 삶을.
저와 여러분이 무슨 수로 거룩한 삶을 살아요.
오직 성령님 만이 내 안에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오직 성령의 소욕을 쫓아 행하는 그에게 율법의 유업을 이루신다고 한 것 아니에요?
2013년 우리는 정결한 마음, 내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정말 나는 불행한 것입니다.
거룩한 삶. 우리 한 번 몸부림 쳐봐요. 하나님은 도와주실 것입니다.
2013년을 우리가 마감할 때에는 우리가 다시 한 번
하나님 우리가 일 년 동안 정말 정결한 마음, 거룩한 삶을 위해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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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를 보시지 않지만, 행위를 보신다
부르심은 많되, 택하심은 적다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천국’ /요14:2-23/ 찰스 프라이스
2015-06-23 00:21:56
심령천국이란, 내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서.. 어쩌면 가장 강조된 부분이 심령천국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는 심령천국 중심으로 신앙생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주요 가르침이요, 또한 사도바울의 핵심 교훈이었으니까요!
교회성장 또는 성공적인 삶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내가 떠나도, 나는 너희와 함께 거하겠다.
떠나면(죽으면).. 그것으로 영영 이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면서도, 영영 이별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거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어안이 벙벙한데요...
▲1. 내가 천국에서, 너희와 같이 살겠다. (내세천국)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2. 내가 너희 마음속에 거하여, 너희와 같이 살겠다. (심령천국)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14:23
위 1번과 2번,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요14:2~3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14:23
두 구절 다, 유사한 말 (‘너희와 같이 살겠다’) 을 사용하신 것은,
매우 재미있고, 심오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하늘로 가시고
언젠가 그곳에서 그들을 영접하리라 하셨던 것처럼,
지금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위한 처소를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심령천국과 내세천국
둘은 같은 것일까요?
본질은 같지만, 형태는 다를 것입니다.
지금 심령천국을 누리는 사람은, 장차 내세천국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란 의미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사시겠다는 뜻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겠다는 뜻이고요.
주님이 지금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는 동시에,
그들 가운데 거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마16:28,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것은 재림 때 오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때는 제자들이 다 죽어서, 그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없으니까요)
이것은 오순절 성령감림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성령의 형태로 강림하심입니다.
옛날과 다른 것은, 오순절 이후부터는, 예수님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거기서 다스리십니다.
◑내가 심령천국을 통해, 너희와 함께 거하겠다.
▲3.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을 종종 가르치셨습니다.
행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가르친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말하면, 제자들의 ‘심령천국’이었습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1
앞서 우리가 살폈던 요14:23절이
바로 행1:3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와 일맥상통 합니다.
지금 ▲1. ▲2. ▲3.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4. ▲5. ▲6까지 계속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다락방 강화’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치신 것도
‘내가 떠나가면, 너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할 것인데, ▲1.
먼저는, 그 천국을 너희 마음속에 심령천국으로 이룰 것이요, ▲2.
그 똑같은 얘기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 이어가십니다. ▲3.
그만큼 중요한 주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 어렵거나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예수님이 내 심령에서 거하시면서 나를 다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 그토록 반복해서 가르치기 원하신
매우 중대한 주제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 그 후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교회에 오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미리 하신 말씀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거하지 않으셨으며,
손으로 지은 어떠한 성전에 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부어짐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곧 예수의 영입니다.
성령이 자기들 속으로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영의 형태로 자기를 속에 임하신 것을.. 제자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을 통한 심령천국을
실제로 그들은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5. 사도바울이 열심히 가르친 것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마지막 구절이라는 점이 또한 의미심장하지요?
사도행전은 처음과 끝이 모두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28:31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행20:25
(※물론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는, ‘심령천국’만 있지 않고,
재림과 심판과 미래천국을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글에서는, ‘심령천국’만을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심령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 교리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인데,
다시 말하면 ‘심령 천국’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거처를 삼으시고,
거기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요,
다시 말하면 ‘심령천국’입니다.
그냥 요3:16절 한 구절을 통해, 예수를 영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매 시간, 매일, 계속해서 다스리시며,
주님과 계속 친밀한 교제관계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심령천국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벌써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이 중대한 교훈을 기도해서, 완전히 자기 것으로 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6. 계속되는 사도바울의 강조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분의 풍성한 영광으로 그분의 성령을 지켜,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엡3:16~17
기독교 교리가운데 놀랄만한 한 가지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시고 그곳에 안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령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에는 ‘심령천국’이란 표현은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만 나옵니다.
‘심령천국이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람들이 만들어서 쓰는 말입니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접하는 사람의 마음(영)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다스리기 원하십니다. 교제, 친밀한 관계도 같은 범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대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은, 어디에 있습니까?
변죽을 울리지는 않습니까?
......................................
◑적용/ 내려놓기 출처
성경말씀과 주일날 목사님 설교말씀중에
'내려놓아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이 부분도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는 내려 놓을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학비, 카드비, 관리비, 인건비등
오늘과 내일 당장이라도 다가올 일이 너무 많습니다.
회사를 정리하면서 동생과 통화중 가장 난감한 말은
"형님 모든것 다 내려 놓으이소. 그냥 가만히 하나님 말씀만 기다려 봅시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하겠다 라고 대답은 했습니다만,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마음속으로 약간이지만 반감도 가진 내용입니다.
‘당장 이렇게 급한데, 너는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밀린 직원들의 임금, 거래처에 주어야 할 금액,
받아야 할 미수금, 재고처리 등등
하루가 급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누가 이를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엔 자기에게 닥친 일이 아니니까 말하는 것은 쉽겠지..
라는 생각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시 동생의 전화내용이 맞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말씀과 성경말씀이 정말로 맞는 말씀이구나라는 것이
지금 현재 저의 생각입니다
당시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내려놓기를 하였으면
지금보다 훨씬 쉬운 길을 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당시 저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저 말고 여러분도 회사를 정리해보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어두운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잘 돌아갈 때 모이던 사람들이 한결 같이 멀어집니다.
아주 심한 경우도 있는데
그 내용을 거론하면, 그 자체가 어두운 세력이 원하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변명이 되고, 원망하는 이야기기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려 놓으라’ 라는 말은
당시 당장 급한 일을 내려 놓으라라는 말이 아니고,
억울하다고 느끼는 저의 감정과 생각을 내려 놓으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결국 제 자신을 내려놓아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내 왕권을 내려놓고, 주님의 왕권/통치/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말씀들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의 영혼은
이런 것을 잘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러니 좋은 말도 잘못 이해되어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내 자신 스스로가 어두운 세력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지옥에 대하여 /막9:47-48/계14:11/ 로버스 하이머스 R. L. Hymers
2015-07-15 14:49:14
◑서론
▶저 하이머스는 요한 웨슬리의 "지옥에 대한" 메시지를 토대로
여러분께 설교하려고 합니다.
조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리는 18세기의 두 위대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분은, 하나님에 의하여, 설교로 세상에 불을 지피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의 목회 동안에 아주 위대한 부흥이 있었는데, "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18세기는, 휫필드와 웨슬리가 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고 말합니다.
휫필드는 순회설교자였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자 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반대 측면인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알미니안 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회심의 필요성’을 설교하였으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회 아래 구원을 받았습니다.
※강력한 회심의 강조는, 17세기 청교도주의, 18세기 휫필드/웨슬리의 1차 대각성
18세기 피니의 2차 대각성까지 계속 강조되었는데, 즉 기독교의 전통이었는데,
19세기말 무디의 부흥운동 때부터 사라진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무디의 부흥 운동은, 집회의 대형화가 시작되기는 했으나, ‘회심’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었습니다.
휫필드가 죽었을 때, 그가 그의 장례 설교를, 웨슬리가 담당하기 원했습니다.
서로 신학적으로 일부 영역에 있어서,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서로를 존중하였던 것이지요.
한 신자가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웨슬리와,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칼빈주의적 측면을 강조함과 아울러, 웨슬리적 측면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우리는 두 측면 다 받아들여서, 균형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느 한쪽만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칭의 구원'이 유행하는 이유는, 칼빈주의만 받아들이고, 웨슬리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웨슬리의 "지옥에 대하여"라는 설교가 있습니다.
웨슬리는 우리에게, 프로테스탄트와 침례교회들의 옛날 설교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담대한 설교를 선포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옛날에는, 이런 주제의 설교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그런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실정이지요.
오늘날은, 중세의 Dark Age가 다시 찾아왔다고 할 만큼, 기독교계가 어둡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기로 결신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결단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기에, 전통적 설교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구미권의 목회자들은, 중년 부인들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주축인데,
그 중년 부인들이, 설교의 주제와 내용을 컨트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옥’과 같은 주제의 설교는.. 듣기 싫다는 것이지요.
좀 듣기에 부담 없고, 실생활에 유익한 설교를 해 달라고, 목회자에게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그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배척당할 수도 있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부흥이 없는 것은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중년부인들은, 설교의 주제와 내용에 대하여, 컨트롤하지 말아야합니다.
저는 웨슬리에 의한 이런 설교들이 더 많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믿습니다.
▶예수님은 무서운 고통의 장소로 지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 즉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여생을 영원히 보내는 장소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unconverted’이란, 교회를 다니지만,
지적동의나, 결단주의로 예수 믿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 불신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옥에 대한 이런 사실들이,
오직 큰 죄인들, 세상 죄인들에게만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지옥 설교를 보면,
그 당시에, 의심할 것이 없이 가장 거룩하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에 대한 언급인, 본문 막9:47~48절 단락은,
9:35절부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막9:35).
예수님이 본문에서 지옥을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8)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세상 불신자가 아니라요) 이 말씀을 주신 이래로
오늘날 우리도, 지옥에 대하여,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옥의 주제는, 단지 큰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공포의 장소이고,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1. 지옥의 형벌과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지옥에 들어가서, 지상의 모든 것들을 다 잃을 것입니다.
어떤 유예기간, 기다리는 기간 없이
모든 일은 ‘즉시로’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불못 지옥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영혼수면설은 비성경적입니다.
죽으면 시공을 초월합니다.
눅16장의 부자는, 지옥에 들어갈 때, 대기한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즉시 심판을 받고, 즉시 지옥에 간다고 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고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가 가졌던 모든 기쁨을, 즐거움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몸은 죽고, 그의 몸을 기쁘게 하던 것들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지옥의 불속에서, 모든 지상의 기쁨들은 다 잃어버릴 것이고,
오히려 그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자기가 지상에서 누렸던 ‘죄악된 기쁨들’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옥에는 위로가 없고, 위로해줄 친구도 없습니다.
그 어두운 장소에는. 그 고통을 위로하고 달래줄,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로가 없습니다.
거기는 빛이 없으며, 그러나 불꽃만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공포 위에 또 다시 공포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음악이 없고, 오직 이를 가는 소리와, 우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있고,
오직 저주받은 영혼의 저주의 소리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와
서로를 향해 끝없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좋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지옥에 가는 그들은 부끄러움을 상속받고, 영원히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구에서 사는 동안
그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언급했다면,
지금은 정신적인 고통과 외로움, 소외감입니다.
지옥에 들어간 그들은 그들이 지구에서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아내, 남편, 부모님, 자녀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을
그들로부터 영원토록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우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그에게 다가와 위로할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영원히 그들을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고통은, 천국과 주님을 잃어버리는 고통.
지옥에서 또 하나 잃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잃어버립니다.
그는 천국에 가는 소망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절대 만나지 못할 것이고
구원 받은 자들과 또는 천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그는 천국으로부터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단절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1:9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을 당하는 것은
아주 비극적인 것입니다. 그 추방은 영원히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될 무서운 저주가 잇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나를 떠나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마25:41
만약에 다른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다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가오!
그러나 지옥에서, 그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 절망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이렇게 설명되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8
저는 이것은 진짜 벌레라고 믿습니다. 상징적인 벌레가 아닙니다.
※관련글/ 천국은 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지옥의 느낌을, 간접 경험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현실은 영생/영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래와 비슷한 현상들이,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으면, 지옥을 살다가 나중에 지옥에 가고요,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서 천국을 살다가, 나중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의 삶을,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닙니다. 자기 느낌, 감정이 괴롭게 때문에..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적 괴로움과 고통들을
매일 더 심하게 느낄 것입니다.
죄책감, 자기 스스로 자기를 정죄함, 탄식, 부끄러움, 후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 이런 감정들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누가,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자기 양심의 꿰뚫는 깊은 고통에서 능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의인들은 천국에서, 죄 용서받은 자유와 기쁨을 느끼는 대신,
죄인들은 지옥에서, 뒤늦게 죄책감과, 용서를 못 받은 괴로움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고통으로 떠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지구상에서 이런 압박감을 경험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자살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 정신적 고통이, 크다는 뜻입니다.
물론 지옥에서 겪게 될 그 정신적 고통은,
사람이 지상에서 겪는 그 어떤 정신적 고통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정신적 고통이 될 것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그 정신적 고통들을 나열해 볼까요?
두려움, 무서움, 분노, 악한 정욕, 시기, 질투, 분노, 원수 맺기.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 받지 못한 영혼들은, 이런 죄를 짓고,
그 결과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당합니다. 여러분이 화를 한 번 내어 보십시오!
누구보다 자기가 먼저 제일 괴롭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지상에서 그의 영혼을 끊임없이 갉아 먹었는데,
지옥에서도 한층 더 그를 좀먹듯이 괴롭히고 고통을 줄 것입니다.
‘좀먹듯이’란.. 매일 조금씩 파고 들어가는/갉아 먹는.. 이란 뜻입니다.
헤롯이 충이 먹어서 죽었는데, 마치 지옥의 장면을, 현실에서 연출한 것 같습니다.
실제 벌레와 또한 정신적 고통이
좀 먹듯이, 서서히 느리게, 그에게 고통을 줄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죽어가는 사람의 간을 조금씩 뜯어 먹듯이,
그런 고문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의 용서를 받지 못했기에,
지옥에서도 이런 죄들을 계속 짓고, 계속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빈익빈 부익부처럼,
이렇게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증오심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지구에서도 석면은, 불에 타지 않고, 벌겋게 달구어만 집니다.
지옥에서도, 사람들은 불에 타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는 ‘불못 Lake of fire’입니다.
만약에 그의 몸 전체가 밖으로 나와서, 불이 터치할 수 없는 안전한 장소에 있고
그리고 오직 한 손이나 한 발이 불속에 들어가 있다면
그것이 그에게 편안할까요? (아니죠)
그러면 그 몸 전체가 유황으로 불타는 연못에 던짐을 받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차라리 눈 하나, 손 하나 잘라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7-48
그만큼 철저한 회개와, 죄로부터 단호한 돌아섬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그 외 지옥에 대한 간접 경험들
▶첫째로, 그가 지옥에서 둘러싸일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감옥에 간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는, 세상 어디든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소원합니다.
나는 이 포악한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감옥에 있는 것이 끔찍합니다!"
그러나 지상 최악의 범법자들을 모아놓은 최고의 나쁜 감옥도
지옥에 거하는 자들과 비교하면, 약과인 것입니다.
만약 그가 큰 감옥 속에 수감되었는데,
자기 주위에 살인자들과, 연쇄 살인범들과, 성폭행자들과, 사람 살을 먹는 사람들과
변태성욕자들과 함께 수감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감옥에서, 이런 수감자들과 하루 밤을 지내는 것도 상상할 수 없을 텐데
한 달이나 일년을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보내야 합니다.
중세에 악명 높았던 가톨릭의 종교재판소의 고문은
고문 받는 사람이, 기절하면
고문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종교재판소의 심문보다 더 악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절해도, 거기서는 고문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법적으로 제지하는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지옥에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들 악한 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을, 미리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끔찍한 설명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지금 우리의 이러한 간접 경험이,
어쩌면 직접 경험을 피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거기는 어떤 ‘휴식’도 없는 곳입니다.
육체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으로 어떤 중단됨이나 중간 휴식 없이
끝없이 지속될 모든 고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불과 유황의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영원토록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그 이름의 낙인을 받는 자는
밤에도 낮에도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계14:11
밤과 낮으로! 그것도 24시간 계속, 지옥에서는 계속되는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지옥에서는 잠자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이 아무리 크거나, 그 고통이 얼마나 강렬한지 상관을 하지 않고,
그가 기절하는 것도 없고, 잠시도 쉼의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잠을 잘수 없고, 또는 무의식이 되지도 않고.
계속적으로 그 고통이, 밤낮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구에 사는 동안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당할 때,
음악을 듣거나, 밖에서 아이들이 노는 행복한 소리를 듣거나,
태양의 빛을 받거나, 대자연을 거닐면서
자기 우울함으로부터 기분을 전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그들은, 그 고통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이 쉬거나
흥을 돋워줄 엔터테인먼트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 일분 동안도!
거긴 전적인 일식, 월식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즉 태양도 없고, 달도 없습니다!
해도, 달도 없는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계절의 변화가 없고요,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기쁘게 할 친구도 없고, 음악도 없고,
소일할 비즈니스가 없고, 오직 무서운 장면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언제나 두려워 떨며 살고,
그리고 빈틈이 없이 모든 생각 속에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고통이 끝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여러분은 영원히 지옥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다의 모래 알갱이의 숫자를 셀 수가 없듯이,
그 영원한 날 수들은, 결코 셀 수가 있습니까?
▶지구에서 모든 고통은, ‘언젠가 해결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희망 때문에,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고 싶을 만큼 큰 고통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그 고통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죽음의 희망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는 거기서 절대 죽지도 않고, 고통의 탈출이라는 희망도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인 곳입니다.
그 깊은 구덩이 속은 얼마나 어둡고, 얼마나 깊은지요!
지나간 수백만의 날들, 수만 년, 흘러가 세월들을 다 계산해도,
아직도 영원한 고통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고통을, 절대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작 왓츠 박사의 글을 인용하며, 끝맺으려 합니다. *Isaac Watts 1674-1748
우리는, 자기 죄에서 떠난, 많은 죄인들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드러운 긍휼이
우리를 매주, 매달 덮는 것도,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자주 우리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복하여 부패함으로써
자기 유죄 선고를 자초합니까!
지금도 우리들은, 아직도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살고 있고,
여전히 구원과 희망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무서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에,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훨훨 날아가십시다.
지금은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나오고, 여러분의 죄를 그의 보혈로 씻김을 받을 시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분명하게 회심한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은 곧 ‘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8).
...........................
주1)
"지옥에 대하여," 설교 73, Wesley’s Works Vol. 2,
Grand Rapids, Baker Books, 1979, 381-391면.
지옥가면 죄인이 더 완악해 진다 /계16:9/ Max Lucado
2015-07-16 23:57:35
▲지옥에 가면 하나님을 더 저주한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들을 지옥에 보내실 수 있나?
하나님이 죄인을 등 떠밀어 지옥에 보내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죄인들이 자기 발로 걸어서 내려간다.
거기에 한 번 가기만 하면, 빠져나오기 원치 않는다. (설명 나옴)
저주받은 자들의 어리석고 완악한 마음은, 거기서도 결코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결코 변화되지 않고, 거기서도 하나님을 저주한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16:9
사람들이 지옥에 가면, 거기서라도 애통하고 회개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지옥에서 더 하나님을 모독할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 한다.↖
(왜 그럴까? 그만큼 지옥의 고통이 극심하다는 뜻도 되겠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입에서 욕과 험담이 나온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는데...↓)
▲왜 부자는 지옥에서 물 한 모금만 요청했을까?
눅16장에 나오는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부자를 기억하시는가?
그는 지옥에서 눈을 들어 천국을 보았지만,
자기를 천국에 보내달라고 거기서 애원하지 않았다.
대신에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만 했다.
그는 왜 자기를 나사로 있는 천국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까?
그 부자는 자기가 심이 목이 탄다고만 말했다.
자기가 지옥에 떨어진 것이 <부당하다고> 전혀 하소연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심사해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다만 물 한 모금 달라고만 요청했다.
그가 만약 자기 영혼을 위한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다면... 어땠을까?
*인간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위에서 주셔야 가능하다.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이므로,
그곳에 지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모할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는다.
위의 부자를 보시라!
모든 무릎이 하나님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님을 고백할지라도 롬14:11
지옥에서 마음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은, 너무 완고해서
절대 주님께 경배하지 않는다.
(캄캄한 지하 동굴에 사는 심해어深海魚가 시력을 상실하는 것처럼
캄캄한 지옥에 사는 자들은... 경외심, 사모함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지옥에는 무신론자가 아무도 없다. 빌2:10~11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유신론자들이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을 애타게 사모하고 찾지 않는, 완악한 심령의 소유자들이다.
지상에서 그랬지만, 지옥에서는 더 심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 인자, 은혜, 사랑이 전혀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 부자처럼, 신앙심이 완전히 마비되고, 물만 찾는 것이다.
**왜 부자가 재심을 요청하지 않고, 그저 물 한모금만 달라고 했을까?
왜 부자가 자기를 천국에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사정하지 않았을까?
다른 각도로 보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그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 생각에 성취 가능할만한 부탁을 요청했다.
그것은 나사로를 통해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며 타는 갈증을 잠시 푸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6
▲하나님은 결코 너무하시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지옥의 형벌이 과연 공의로운가?’ 의문을 품는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데, 동시에 아무리 공의의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영원한 지옥 형벌’은 너무 과도한 판결이 아니냐고 묻는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영원한’ 고통의 형벌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람이 감히 누구이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전하겠는가!
지옥에 간 자들이 얼마나 수없이 복음을 거절했으며,
완악한 마음으로 전도자들을 비웃고 욕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하나님이 너무하시다고?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지옥의 출입구에 <출입금지, 폴리스라인>같은 테이프를
수없이 쳐 놓았으며,
수많은 경고자들을 보내서, 저기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경고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엄청 많은 숫자의 붉은 깃발(십자가, 교회)을
꽂아 놓으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옥의 출입구 계단을 태연히 밟고 내려간다.
왜냐하면 자기들 눈을 완전히 감아버리고, 그래서 그 경고표시 하나 못 보고,
자기들 귀를 완전히 닫아버리고, 그래서 그 경고음성 다 무시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명백한 대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무시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며 울부짖고 절규하시는 그 음성을
그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이 고난주간에도
그들은 여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듣지 않으려고 자기 양쪽 귀를 꽉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발로 내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지옥에 대해 가장 깜짝 놀랄만한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 대신 내려가셨으므로,
이제 내가 거기에 내려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종말, 내세, 심판
◑Every Knee Shall Bow by Max Lucado
(아래 영문 위에서 대충 번역, 편집했음)
“. . .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 . .”
How could a loving God send sinners to hell? He doesn’t. They volunteer.
Once there, they don’t want to leave. The hearts of damned fools never soften; their minds never change. “Men were scorched with great heat, and they blasphemed the name of God who has power over these plagues; and they did not repent and give Him glory” (Rev. 16:9 NKJV). Contrary to the idea that hell prompts remorse, it doesn’t. It intensifies blasphemy.
Remember the rich man in torment? He could see heaven but didn’t request a transfer. He wanted Lazarus to descend to him. Why not ask if he could join Lazarus? The rich man complained of thirst, not of injustice. He wanted water for the body, not water for the soul. Even the longing for God is a gift from God, and where there is no more of God’s goodness, there is no longing for him. Though every knee shall bow before God and every tongue confess his preeminence (Rom. 14:11), the hard-hearted will do so stubbornly and without worship. There will be no atheists in hell (Phil. 2:10–11), but there will be no God-seekers either.
But still we wonder, is the punishment fair? Such a penalty seems inconsistent with a God of love—overkill. A sinner’s rebellion doesn’t warrant an eternity of suffering, does it? Isn’t God overreacting?
Who are we to challenge God? only he knows the full story, the number of invitations the stubborn-hearted have refused and the slander they’ve spewed.
Accuse God of unfairness? He has wrapped caution tape on hell’s porch and posted a million and one (엄청 많은) red flags outside the entrance. To descend its stairs, you’d have to cover your ears, blindfold your eyes, and, most of all, ignore the epic sacrifice of history: Christ, in God’s hell on humanity’s cross, crying out to the blackened sky,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Matt. 27:46). The supreme surprise of hell is this: Christ went there so you won’t have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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